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511화 (512/527)

제89장. 쓸모 많은 얼굴 덕에(5)

키리에에게 팔찌를 돌려줬다.

그 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본래 과묵하여 그런 것인지, 아니면 플란츠와 다시 싸우기라도 한 것인지.

란델이 조용해진 이유를 가늠할 길이 없는 키리에는 그냥 신경을 껐다. 카이리스에서 제일 안 세심한 놈이 칼리안이라면 그 다음으로 안 세심한 놈이 바로 키리에였으니까.

"미스릴인가."

그런데 스스로 평온을 찾아 잘 끌어안은 키리에게 이런 물음이 전해졌다. 방금 전에 받은 베이컨을 입에 넣은 드미레아, 아니. 드미레아로 변장 중인 시오나였다.

"고기가 질깁니까."

"아니. 고기가 미스릴 같다는 게 아니다. 베이컨은 부드럽다. 물론 나는 무슨 고기든 잘 씹어 먹는 사람이니 질기더라도 걱정할 필요 없다."

싱긋 웃은 '드미레아'가 다시 한 점의 베이컨을 입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보던 키리에가 참 복잡한 얼굴을 했다.

근엄하기 짝이 없는 드미레아의 얼굴로 저런 웃음을 짓고 저런 말을 하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괴리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하나 있지 않나. 애초에 시오나는 엘프라는 사실 말이다.

본래 엘프라는 종족이 잡식을 해도 괜찮은 것인지, 아니면 대사막에서 자란 시오나의 위장이 고기에 맞춰 바뀐 것인지.

가늠할 길이 없는 키리에는 그것 역시 그냥 신경을 껐다.

"하여튼. 미스릴인가."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칼리안 왕자가 준다 했던 것 말이다. 미스릴인지가 궁금한데. 알아서 튼튼한 재료를 구했을 테니 걱정하는 것은 아니고. 궁금해서 묻는 거다."

"아."

방울을 떠올리는 시오나의 주의를 돌리려 아무 말이나 꺼내느라 이후를 가늠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 재료가 무엇인지를 궁금해 할 텐데, 문제는 그 재료가.

"왜. 잘 모르나."

"다누의 가지라 하더구나."

우뚝.

잘 움직이던 시오나의 포크가 갑자기 멈춘다.

키리에가 꺼내기 어려워하던 말을 대신 해준 란델은 조용히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사실인가."

"네. 맞습니다."

"······ 튼튼하겠군."

'그러고 보니 시오나가 다누의 가지를 좋아할까. 싫어할 것도 같은데······ 그래도 사실 이만한 재료가 없는데. 뭐라고 말을 해줘야 하지.'

고민하던 칼리안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기분이다. 다른 이도 아닌 다누의 가지인데다 다른 이도 아닌 시오나이기 때문이었다.

다누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은 시오나 역시 마찬가지 아니던가.

"꺼려지신다면 왕자님께 말씀을 드려서 다른 것을,"

"아니. 뭐하러 번거롭게 그런 일을 하나. 괜찮다."

손을 휘휘 내저으며 대답한 시오나가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잠시 손을 멈추다 다시 이어지고 또 다시 멈췄다 손을 놀리기를 반복하면서.

"힐 경을 위한 것이기도 하고, 브리지트 숲의 엘프들에 대한 사소한 복수이기도 하다고. 그래서 일부러 다누에게 가지를 내어달라 했다고. 칼리안 왕자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시오나에게 키리에가 이런 말을 했다.

시오나는 브리지트 숲 출신의 소드마스터다. 다누가 뿌리를 내린 카이리스에는 발도 들이지 못하도록 내쫓긴 엘프들. 다누에게 제대로 된 보호도 받지 못하고 저들만의 마을을 꾸려 살아가던 엘프들. 그들 중 한 명의 엘프로 살다 대사막으로 간 이가 아닌가.

한 번 떨궈낸 잎을 좀처럼 다시 주워 들 일이 없었을 다누가, 이미 떨궈낸 잎사귀인 시오나에게 제 일부를 건네는 일. 그것이 다누에게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 될지.

"그러니 조금이라도 꺼려지신다면 얘기해주십시오. 제가 전하겠습니다. 검사가 검을 꺼리면 안 되지 않습니까."

"어머니 나무의 가지라 하니 찝찝하기는 하군. 그래도 꺼려지지는 않는다. 튼튼하면 됐다."

이 말에 란델이 시오나를 쳐다봤다.

"용서가 빠르구나. 너 역시."

"용서할 것도 안 남았다. 나는 그냥 어머니 나무에 대해서는 관심을 끊고 살 뿐이다."

별 것 아니라는 듯 대답하던 시오나가 란델이 가진 연두색 눈을 쳐다봤다.

리리에가 만들어줬다는 빨간 꽃 모양의 체리사탕 두 개를 귀중품 보관함에 집어넣다 도로 꺼내놓던 슬레이만의 말이 떠오른 까닭이다.

'아니지, 바로 보관할 게 아니라 왕궁에 들고 가 자랑이나 하고서 넣어둬야겠군. 르메인 그놈은 이런 재미도 모를 것 아닌가. 가서 실컷 보여주고 와야지.'

"누가 또 누구를 용서했길래 역시라는 말이 붙나."

묻기는 하였으나 이미 적당히 답을 냈다.

지그프리드 공작저에서 지내는 동안 그래도 어느정도의 정황은 주워들어 알고 있는 시오나가 아니던가. 큰 원한을 주고받을 일 없을 왕궁에서 살아온 란델이 용서를 언급할 만한 인물이 과연 누구겠나. 르메인이겠지.

시오나의 말을 들은 란델의 눈이 고요히 가라앉았다.

적당히 배도 찼겠다, 몸 대신 머리나 운동시킬 겸 세 형제들이 지닌 성정들을 가만히 따져본 시오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란델이 말한 '누구' 중 한 사람이 만약 르메인이라면, 다른 '누구'는 분명 플란츠일 것이다. 칼리안이야 용서도 화해도 없이 르메인의 단물을 쏙쏙 빼먹는 것으로 뒤끝을 부리고 말 놈이니까.

"플란츠 왕세자가 국왕 르메인을 용서해서 신경이 쓰이나."

"아니다."

란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건 애초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내가 전하와도 엮여 있었지, 하는 정도로 생각을 할 뿐. 시오나가 다누를 대하는 것처럼 란델 역시 르메인을 단념한지 오래였으니까.

"둘째와 나를 말함이다."

타닥, 타닥.

평소라면 어떤 경우에도 열리지 않았을 입이 열리고 있었다.

막냇동생의 과묵한 기사와 엘프 소드마스터. 딱딱하고 찬 바닥과 더운 열기를 내는 모닥불.

'조심하십시오.'

온통 익숙하지 않은 것들 틈에서 가장 익숙하지 않은 말을 듣게 된 그 낯선 기분에 그렇게 입이 열렸다.

"용서가 빠르다 느리다 말할 게 있나. 부모자식도 아니고, 형제 사이에. 형제들은 원래 다 싸우고 화해하면서 자란다 했다. 내가 봐 온 인간 아이들은 다 그랬다."

"그러하더냐."

"따지고 보면 한 쪽만 잘못한 경우도 적던데. 고만고만한 놈들이 누가 더 잘했네 어쩌네 해 가며 싸워봐야, 알고 보면 다 똑같은 일이 허다하다. 그런데 무슨 용서를 하나. 그냥 다시 놀면 끝나는 거지."

칼리안도 못 꺼낼 말이 시오나의 입에서 술술 나오는 것을 본 키리에가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저러다 란델이 화를 내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당장 히나를 불러 칼리안을 연결해 달라 해야 할지.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둘째의 말버릇이 또 있더냐."

낮은 목소리가 키리에를 향했다.

잠자코 그 연두색 눈을 바라보던 키리에가 입을 열었다.

"어떤 말버릇이 궁금하십니까."

"아랫사람에게 화가 났을 때. 둘째가 어떤 식으로 말하는지 알려주거라."

"저하께서 화가 났을 때, 말씀이십니까."

하필 화가 났을 때의 말버릇이라니.

많이 겪지 못한 모습을 잠시 떠올려보는 키리에에게 란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파비안에 도착하면 분명 불편한 눈길들이 있을 텐데. 참아서야 되겠느냐."

귀가 밝지 않았다면 제대로 들은 것이 맞을지를 의심했을 말.

"화를 내볼 테니 알려주거라."

첫째 형의 단단한 다짐이 들려왔다.

* * *

무슨 말을 더 하랴.

이런 날에는 그냥.

- 짤랑!

술이다.

결국은 다 데블란 때문에, 결국은 다 실리케 때문에, 그 사이에 놓인 휘트린 때문에. 그런 것을 따져보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따져보다가는 기어코 시스파니안과 세렌티에게 엉뚱한 화살을 돌릴 때까지 끝나지 않을 원망이니.

- 탁.

적당히 독하고 품질은 제일 좋고 향긋한 냄새는 전혀 안 나는 것을 구해다 달라 부탁해 얻어낸 술을 세 병이나 들고 영주성의 납작한 지붕 위로 올라왔다.

장미 냄새 짜증난다며 쪼글쪼글해진 채 제 방에 돌아가서는 밥도 안 먹고 콕 박혀 있던 완두콩을 냅다 꿰어들고서.

'술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세이렌 경. 아무래도 속이 아릴 것 같아서.'

'칼리안 왕자님의 영주성이니 칼리안 왕자님의 술 창고에서 훔친 술을 칼리안 왕자님께 가져다 드리는 것은 어려울 게 없습니다만······.'

'경 것도 훔쳐와요. 제일 독한 건 경이 가지고 두 번째 독한 건 나 주고.'

'좋습니다. 훔쳐다 드릴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물론 이렇게, 술은 에우리아를 통해 얻어냈다.

술에 일가견이 있는 플란츠는 지금 '파비안으로 떠나고 없는' 상태가 아닌가. 향 좋은 와인 외에는 입에 잘 대지도 않는다는 1왕자나 행실마저 곱디고운 3왕자가 독한 술을 찾을 순 없는 노릇인데다 제일 시켜먹기 좋은 미친 따까리는 술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놈이었으니.

그렇다고 직접 훔쳐오기엔 귀찮기도 했고.

아무튼 이런 것이나 시켜먹으라고 있는 왕자 자리 아니겠나.

"히나는 좀 어떻습니까."

"직접 보고 오지. 왜."

"휘트린이 레니시타 잎 위에 서게 될 거란 말을 못 하겠어서 내일 만날 겁니다."

"예상하고 있을 텐데."

"그래도요. 처음이니까 했지, 하고 보니 두 번은 못 하겠습니다. 그런 말."

당신의 어머니가 광장에 서게 될 것이라고.

플란츠의 진짜 얼굴을 보게 만들었던 그런 말을 다시 누군가에게 건넬 생각을 하자니 맨발로 한겨울의 세뉴강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이라. 칼날보다 서늘한 얼음 날이 맨살을 파고드는 것도 잊을 만한 아득함이라.

"형님이 해주시겠습니까."

"나도. 두 번은 별로."

당신의 아버지가 나락에 떨어질 것이라고.

과거의 유령에게서 벗어나게 해주겠다며 새 유령을 불러들일 말을 또 하자니 도무지 입이 열리지 않아서. 하늘을 가리지 못할 손바닥으로 고작 두 눈을 가려주는 허울을 다시 쥐자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체스 둘까요. 진 사람이 얘기하기."

"싫어."

"그럼 이긴 사람."

"안 해."

"아, 왜."

"말 또 짧지."

"왜애."

"야."

보는 눈이 없는 곳까지 올라오자마자 꼴보기 싫은 금발을 던져버리듯 치워내고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던 플란츠가 또 짜증을 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시력 좋은 칼리안의 눈으로도 끝이 가늠되지 않는 너른 밀밭이 보인다. 아직 자라날 날이 더 많은 푸른 밀싹들이 한 데 모여 한 가지 색으로 세상을 뒤덮었다.

그것을 가만히 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파릇파릇하네요. 누구처럼."

"누구."

"저겠습니까. 형님이지."

온통 연두색이다.

중간중간에 지어진 작은 집들이 아니었다면 연두빛 바다라 해도 좋았을 푸름이 한가득이다. 연두색의 사이사이로 깊고 진한 장미의 향이 든다. 숨막히지 않는 바다에서 숨막히는 대신 짜증만 일으키게 된 향기가 든다.

- 짤랑!

란델의 머리색을 썩 닮은 술잔을 든 칼리안이 그것을 쭉쭉 들이켰다. 술에 취하지는 못하지만 그 맛에도 독한 냄새에도 취할 수는 있는 거니까.

그런 칼리안을 일별한 플란츠가 큰 걱정 없는 얼굴로 먼 곳을 봤다. 그리고 영 마음에 안 드는 색을 내는 술을 한 모금 입에 담았다 삼켰다. 바질리카나 세레누스와는 또 다른, 휘트린의 이름 모를 술 맛이 낯설다가도 반갑다.

낯선 것이 반가웠던 경우를 이렇게 또 하나 늘린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네."

분명 대답을 전했다.

그러나 질문이 건네지지 않는다.

저 완두콩이 궁금한 것을 입 밖으로 못 내놓는 성격이 아닌데 뭐가 궁금해서 저러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 ······ 스륵.

별빛도 담고 찬 서리도 담고, 삭막한 바람과 다 지나간 겨울과 진작 밀려나간 파도 거품을 다 모아 담은 긴 머리카락을 그림자처럼 풀어냈다.

대사막 멍멍이를 키우겠다던 놈 대신 대사막 멍멍이같은 놈. 쟤네 어머니랑 내 아버지에 대한 생각만 떼놓고 본다면 일말의 연관도 없을 그런 놈을 불러다 놨다.

그나저나 꼭 맞는 재킷을 벗어두고 오길 다행이다. 작은 코끼리의 묵직한 칼날에 선득히 베였던 왼 팔뚝에 약도 발라주고 붕대도 감아준 얀이 '상처 위에 겹겹이 옷을 입으면 안 된다'며 우기는 통에 헐렁한 셔츠와 베스트 차림으로만 나와 다행이다. 아니었음 모양새가 우스워질 뻔했다.

사람이 잘생겼으면 옷태가 따라줘야지. 아무렴.

멋들어진 긴 머리를 쓸어넘기며 이딴 생각이나 하고 있는 베른의 귀에 불퉁거리는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왜."

"뭐. 쓸모 많은 얼굴 덕에 휘트린 입도 열었겠다, 하는 김에 원수 같은 친구 새끼 말도 좀 훔쳐듣겠다는데. 싫어? 나 도로 치워?"

이미 낮에 한 번을 보고 아마도 그 뒤에 휘트린의 앞에서 한 번을 더 찾아온 듯하던, 그래놓고 또 찾아온 타인이 물었다.

"아니야."

세상이 뒤집혀도 베른이 찾아드는 꼴이 싫다 하지는 못할 순한 완두콩이 얌전히 대답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인 베른이 입을 열었다.

"생각 빨라서 기다리는 것도 못하는 내 원수 같은 친구 새끼가 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하기에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이 없나."

질문을 주저하는 동안 저 머릿속에 무슨 향기가 들었다 나올 줄 알고 시간을 끌까.

그러니 어쩌겠나. 동생 놈이든 친구 놈이든 억울한 말을 들어주겠다 했었으니 동생이 못 들어 줄 질문을 들어 줄 친구 놈을 또 불러다 앉혀 둬야지.

아무튼 얼굴마저 쓰임새가 이렇게 널렸으니, 정말이지 나는 대체 왜 이렇게 유능한지.

"그다지. 별로."

"눈 앞에 술 놓고 상념만 늘면 어떻게 되는지 아리안느가 말해 준 적이 있어."

"어떻게 되는데."

"술맛 떨어진대."

그 말이 참된 진리라는 듯 진중하게 끄덕이며 대답한 베른이 술잔을 들었다. 그 손 끝에 잠시 냉기가 맺히더니 잔 속의 술이 차게 변했다.

"마법이라는 게 이렇게 편한 건 줄 알았으면 진작 배울 걸 그랬지, 나도."

이리저리 어긋난 퍼즐 조각을 억지로 끼워맞춰 전시해 둔 듯한 낮은 목소리 끝에 웃음이 든다. 벌어진 채로 굳어버린 무수한 흉터를 꼭 닮은 닳은 목소리 뒤에 짤랑, 하고. 기껏 차게 식혀두고는 입에 대지도 않는 술잔 소리가 이어진다.

"당신 어머니가 살아있었으면 어떻고 죽었으면 어때서. 이미 다 지난 일인데."

그러다 이렇게, 문득 떨어진 별똥별처럼.

시작과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말이 흘러나왔다.

꺼내놓지도 않은 질문을 알아서 다 들은 듯한 베른의 말에 플란츠가 고개를 돌렸다. 시원한 물이라도 되는 양 독주를 삼킨 베른이 말을 이었다.

"내 유령이나 당신 향기나. 손에 잡히지도 않는 것에 목이 죄이긴 마찬가지잖아. 그러니 뭔 상관이야. 살아있었든 이미 죽었든."

과거에는 실리케가 살아있었는지.

그 마지막 날에 실리케가 살아있었다 한들, 혹은 이미 죽었었다 한들. 오롯이 애도하지도 안도하지도 못할 질문이 아닌가.

때문에 물어보기를 결국 주저했던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술이나 마셔. 살았으면 어땠을지 죽었으면 어땠을지 따져 본다며 좋은 머리 혹사시킬 생각 말고."

"알았어."

"뭐가됐든 지금 당신은 파릇파릇하니까. 중요한 건 그거지."

"······ 그럼 당신은."

"나, 뭐. 왜."

"아니야."

그날의 플란츠는 이렇게 되돌아와 살고 있는데.

언젠가 기억을 찾게 된다면 지금의 이 생이 그날의 플란츠에게도 위로가 될 텐데. 어떻게든 위로가 될 것 같은데.

나아질 길 없이 살다 그렇게 죽어 이렇게 사라진 친구 놈에게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생각이 나지 않아서 이번에도 그냥 입을 다물었다.

"나는 이렇게. 밀밭 너른 곳에서 원수 같은 친구 새끼랑 좋은 술 훔쳐마시고 있으니 됐지."

바람 맺힌 마른 잔디처럼 웃던 베른이 긴 숨을 쉬었다. 그러다 멋대로 저를 친구로 삼은 연두색 놈을 향해 물었다.

고개를 돌리지는 못한 채로, 그냥. 그 너르고 푸른 밀밭을 멀리 바라보기만 하면서.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뭐를."

"실리케에 대해서."

"내 어머니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내가 언제 알았는지. 그걸 묻는 건가."

"말 길게 하네. 아무튼 그거 말고 궁금할 게 또 뭐가 있나."

"몰라."

낯선 대답이 꺼내졌다.

플란츠가 아는 것의 시작점을 모른다니.

책에서 오리를 봤으면 아르센의 품에 든 코코를 마주했을 때 오리가 나왔던 책의 제목과 페이지는 물론이거니와 왕궁 도서관 몇 번째 방의 몇 번째 서가 어디에 꽂혀있던 책인지부터 그 책을 본 날에 만난 사람들과 그 날의 날씨까지 전부 다 기억해낼 수 있을 플란츠다.

"당신이 모르면."

"나도. 몰라."

"알게 된 게 아니라 눈치를 챈 거구나. 그럼."

실리케에게, 혹은 다른 누군가에게.

잔혹하게도 향기로운 제 어미의 미래 계획을 직접 들은 것이 아닌가보다. 살아가며 조금씩, 단이 낮은 계단을 천천히 오르듯 그렇게. 눈치를 챘나보다.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짤랑, 짤랑.

대신 손에 든 남은 술을 전부 다 입에 털어넣고 꿀꺽 삼켰다.

오러만 없었으면 칼리안을 진작에 재워놓고도 남았을 독한 술을 한 입에 털어넣고도 참 멀쩡한 플란츠를 보며 아주 잠시 시스파니안을 찾은 베른이 웃음 소리를 냈다.

웃다가, 웃다가.

쏟아버리듯 흘려버리듯 털어버리듯 웃다가.

"아쉽네."

쏟아지지도 흘려지지도 털어지지도 않는 한 자락의 아쉬움을 입에 담았다.

"뭐가."

"내 나라 쳐들어온 연두색 국왕이 그렇게 살다 온 미친놈인 줄 알아봤으면 죽기 전에 술이나 한 잔 해보자 할 걸 그랬지."

"······ 미친놈이 미친 새끼랑 술을 왜 마셔."

"그럼 뭘 해야 하나."

짤랑, 짤랑.

베른이 다시 채워준 술잔을 말없이 빙빙 돌려보던 플란츠가 늦은 답을 전했다.

"그냥 살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당신이나 나나 알아서, 각자. 계속."

"그냥 살려고 내 땅에 쳐들어왔나 보지, 당신도."

"지금 당신이 내 편을 드나."

"편 들어준다 했으면 들어줘야지. 그리고 미친 새끼가 미친놈 편을 들지, 그럼. 누구 편을 드나."

"당신은 당신 편에 서서 미친놈을 탓해야 하잖아."

"내가 왜."

"억울하다며. 그래서 하는 말인데, 왜."

"미친 새끼만 억울했나. 미친놈도 억울했겠지."

"억울했을까."

"억울했겠지."

"······ 억울했을까."

"······ 억울했어야지."

마법을 잘 써서 술도 잘 식히지만 오러도 잘 써서 작은 소리도 잘 주워듣게 된 능력 좋은 미친 새끼의 귀에 작디 작은 소리가 들렸다.

"억울했어."

그날의 미친왕은 어땠을지 몰라도 적어도 오늘 이 자리에 앉아있는 플란츠는 억울했다고 말했다.

"······ 나도. 억울했어."

어항 속인 줄 모르고 태어난 새끼 고래처럼.

온실 속인 줄 모르고 움을 튼 어린 가문비나무처럼.

결국 벗어나지 못할 벽 앞에 가로막힐 생임을 알고서. 채 다 자라지도 못할 생인 것을 알고서.

그런 생인 것을 알고서.

억울했다고.

"그래. 억울했어야지."

베른은 위로 한 마디 없는 담담한 말만 건넸다.

위로해 줄 사람 한 명, 위로 받을 사람 한 명. 이렇게 모인 형제가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도 좋겠지만 그냥 어디서도 위로받지 못할 타인이 나란히 앉아 에라모르겠다 술이나 퍼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고생했어. 사느라."

뚝.

"억울해도 사느라."

뚝.

뚝.

"플란츠."

키리에는 얼마나 많이 들었을까.

옆에 앉은 놈이 또 뚝뚝 흘려대는 방울소리가 내 귀에도 이렇게 크게 들리는데. 날 때부터 귀가 밝던 키리에는 얼마나 많은 억울함을 듣고 살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고생했어. 플란츠. 잘 견뎠네. 대견하게."

뚝뚝.

짤랑, 짤랑.

뚝뚝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