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장. 쓸모 많은 얼굴 덕에(4)
가진 능력만큼 전적도 화려하다.
새로운 곳에서 살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잘나가던 변경백의 허리를 아작냈다. 머리색 말고는 물려준 게 없는 듯한 생물학적 아버지의 생일잔치가 끝난 뒤에는 궁 하나를 박살내놨다. 후작의 도박장을 초토화시키도록 하더니 기어코 후작과 후작 아들의 목숨줄까지 끊어놨다. 그러고서도 툭하면 귀족들의 앞에 나서서 이 나라는 내가 가질 것이라 엄포를 놓곤 한다.
뿐만인가.
툭하면 시스파니안에게 불평을 한다. 세렌티를 향해 살기를 쏟아냈다. 다누의 뿌리를 잘라내고 줄기에는 깊은 상흔을 새겨두었다. 세크리티아의 선원들이 가장 두려워한다던 아르나이젤을 등푸른 생선이라 부른다. 대사막의 웅크린 미치광이 실레스티안과는 한바탕 거하게 말싸움을 벌였다.
이쯤 되면 그냥 망나니다.
인간의 영역까지 홀랑홀랑 벗어난 망나니다.
"내가 또 마음이 약하잖아. 워낙 착해서."
시스파니안이시여.
제가 어떻게든 저 망나니 놈, 아니.
제 정혼자를 이해해보겠습니다.
- 카아아앙!
시스파니안의 것보다는 좁겠으나 적어도 대해보다는 넓을 듯한 이해를 가득 담은 묵직한 검날이 붉은 빛의 검을 후려쳤다. 둔중하며 날카롭기까지 한 굉음이 수련실 전체를 웅웅 울린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온 힘을 다해 휘두른 검은 붉은 검을 쳐내지 못한 채 멈추고 말았다.
그 공격을 큰 어려움 없이 막아낸 사람. 데블란 듀라한 세크리티아가 탄생시키고 플란츠 루 룬 카이리스와 아르센 헤르츠가 빚어내고 세렌티가 완성시킨 듯한 바로 그 희대의 망나니.
"와. 더 세졌다, 내 정혼자님."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가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다.
- 타앗!
- 부우웅!
무겁기 짝이 없는 은빛의 검날이 그 웃음을 향해 휘둘러진다.
눈부시게 빛나는 검을 비스듬히 맞대는 것으로 무게감 가득한 다음 공격을 가볍게 흘려보낸 칼리안이 발을 내딛었다. 그러자 무게 중심이 아래로 쏠린 검과 자신의 몸을 함께 회전시킨 드미레아가 이제껏 공방을 주고받던 곳이 아닌 전혀 다른 쪽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 카아아앙!
칼날의 굉음 뒤에 짧은 감탄사가 들려온다.
눈앞에서 사라진 칼리안이 어느 쪽으로 치고 들어올지를 정확히 알고 휘두른 공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반응에 연연하지 않은 드미레아가 이번에는 검을 올려쳤다. 은빛의 검신이 반짝 하고, 수련장 벽에 가득한 마법 등불의 빛을 반사시켰다.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은, 당연히 대련이다. 한 쪽은 상대의 성과를 가늠하고 도움을 주는 자리라 여기고 있는 반면 다른 한 쪽은 생애 두 번 없을 원수와 생사를 건 결투 중이라 생각 중인 듯하긴 하지만 어찌됐건 대련이다.
- 부우웅! 카앙!
- 캉, 카가강, 콰앙!
그래. 분명 대련이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미레아의 검 끝에 여느때와 확연히 다른 살기가 모이게 된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설명하고자 잠시 시간을 거슬러 본다.
기울어가던 붉은 햇살이 휘트린에 위치한 어느 별장의 넓고 높은 창 안으로 길게 드리워졌을 즈음까지.
정확히는,
- ······ 툭.
'휘트린의 영주 대리인 나비아를 대신하다 파비안에 다녀오기 위해 자리를 비운' 드미레아를 다시 대신한 히나 베른에게 건넬 서류 더미 위에 새하얀 장미 한 송이가 툭 올려진 바로 그 즈음까지.
- 살랑!
이제 막 사인을 마친 서류를 덮으려던 이의 귀가 꽃이 놓여지는 소리를 듣고 청회색의 눈이 소리가 난 쪽을 향해 움직이기 전에, 향기가 먼저 찾아들었다.
책상에서 풍겨오는 마호가니 나무의 향기, 손에 들린 종이에 밴 검은 잉크의 향기, 테이블에 올려진 볶은 아몬드의 향기, 그 곁에 놓여 있던 진한 커피의 향기 사이로 낯선 꽃내음이 느껴진다.
"뭡니까."
담담하게 흘러나온 낮은 목소리가 소리소문은 커녕 기척조차 남기지 않고 등 뒤로 찾아와 꽃을 내려둔 이를 향했다.
그제야 자박자박, 늦어도 한참 늦은 발소리를 두 번 내밀며 책상 옆으로 걸어온 방문자가 듣기 좋은 목소리를 냈다.
"예쁜 짓."
멋드러진 예복의 대미를 장식할 코르사주로 쓰여도 손색이 없을 만큼 보기 좋게 피어난 그 꽃에서, 이 시절의 가장 호사스런 바람 내음이 났다 하면 표현이 될는지.
그 향기 만큼이나 탐스럽게 피어오른 흰 장미 한 송이를 묵묵히 쳐다보던 드미레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생글생글 웃으며 서 있던 칼리안이 말을 더했다.
"내 형님보다는 내가 더 재밌을 테니까 내 형님 말고 내 손만 잡아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내 정혼자님한테 이런 것도 가져다 줄 줄 아는 사람이거든, 나는."
"재밌게 해주려고 오신 겁니까."
"응. 우리 아직 꽃 구경도 못 했잖아."
휘트린 영주성의 정원에 가득하던 장미 사이에서 가장 어여쁜 것을 골라 가져왔을 터였다. 무엇 하나를 하든 성의를 다하는 사람이 아니던가.
티 하나 없는 흰 장미를 집어든 드미레아가 작게 웃었다. 그리고 커피잔과 함께 놓여있던 새 물잔에 꽃을 꽂아두며 말했다.
"다음엔 가시는 자르고 가져다 주십시오."
"다음에도 가져다 주면 받아 줄 거야?"
"이미 꺾인 꽃을 어떡합니까. 받아야지."
봄을 담아 온 왕자의 얼굴에 이 시절의 가장 호사스런 바람같은 웃음이 퍼진다.
"다음에는 가시 떼고 가져올게."
"오라버니는 잘 계십니까."
"잘 있지."
"영주성이 시끄러울 텐데."
"내 새끼코끼리는 무슨 소리를 주워듣든 항상 잘 있게 할 거야. 걱정 마."
3왕자가 가짜라는 말.
3왕자의 겉모습을 뒤집어 쓴 엉뚱한 사람이라는 말.
그런 말이 영주성의 사람들에게 알음알음 퍼져나갔다. 휘트린은 믿었으며 나비아와 귀족들은 의심했던 그 이야기를, 영주성의 다른 사람들은 재밌다 여길지언정 온전히 믿지는 않았다. 시스파니안의 축복을 무슨 수로 따라할 수 있겠나. 게다가 플란츠로 변장한 칼리안이 회의장 문을 박차고 들어가며 그 난리를 부렸는데 무슨 의심을 더 할까.
저마다의 반응이 어찌됐건간에, 어쩔 수 없이 그런 소문을 함께 듣게 된 얀은 충격을 받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했다.
정말 진지한 얼굴로 '내가 결국 그런 말이 퍼질 줄 알았다'며 칼리안을 걱정했단다. 우리 왕자님이 왜 그렇게 달라졌는지 이유도 모르고 떠들어댈 사람이 언젠가는 생길 줄 알았다 하면서.
의심 한 자락 없이 칼리안을 믿고 있는 얀을 떠올리던 드미레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오라버니에게 왕자님에 대한 사실을 알리지 않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얀에게 죽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물끄러미 흰 장미를 바라보던 칼리안이 대답했다.
"내가 쳐 둔 선을 넘지 말라 했던 찬 소리를 유언처럼 남기고 죽은 어린애로 남겨지기 싫어. 이대로 지내는 게 다른 사람 눈에 맞든 틀리든, 난 그냥. 그거 하나만은 양보 안 하고 살래."
그것이 옛칼리안의 뜻일지, 혹은 지금 칼리안의 뜻일지. 이제는 스스로도 구분하지 않고 있는 진심을 전한 칼리안이 다시 몇 걸음을 걸어갔다. 그리고 서재 중앙에 놓인 소파로 가 앉았다.
"그럴 거면 들키고 다니지나 마시던가요. 제온에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 같던데요."
"그건 내가 들킨 거 아니야."
칼리안이 헤실헤실 웃었다.
"그럼. 왕자님 모르게 왕자님에 대한 이야기가 아스트리샤 거리에도 퍼진 것은 아십니까."
"너랑 형님 얘기 말고, 내 얘기가?"
"네. 왕자님께서 가짜라는 그 얘기 말입니다."
몰랐다.
"인기도 좋지. 뭐 하나 조용히 넘어가는 게 없네."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은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조용히 걸어와 칼리안의 맞은편에 앉은 드미레아가 말했다.
"아버지께서 낸 소문입니다."
"······ 지그프리드 공이 내가 가짜라는 소문을 냈어?"
"네."
"왜 나를······ 아."
생글생글.
끄덕끄덕.
칼리안이 흡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헛소문은 헛소문일 때 퍼지는 게 낫지."
"네.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우스개소리여야 브리센이나 그들이 그것을 무기로 휘두르려 들지 않게 되니 말입니다."
칼리안이 가짜라는 소문을 슬레이만이 오히려 더 퍼뜨렸다.
얼토당토 않은 헛소문일 때 잔뜩 퍼져나가야 브리센이나 제온에서 그 일을 무기로 삼지 못하게 되니까. 이미 모두가 한 귀로 듣고 흘린 이야기라면 나중에 누군가의 입에서 같은 말이 터져나온다 한들 관심받지 못하고 사그라들 것이 아니겠나.
"전하께서 소문을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네. 혹시나 믿으시면 안 되는데."
"믿기는요. 전하께서 왕자님께, 왕궁에 돌아오면 카밀론에 갈 준비부터 해두라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책상에서 들고 왔던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드미레아가 담담하게 말했다.
세자위.
그것은 휘트린이 내뱉고 슬레이만이 퍼뜨린 악질의 소문을 한 방에 종식시킬 르메인의 해결책이었다.
"그럼······ 대사막 개를 어디서 구해와야 하나······."
칼리안의 입에서 깊은 고민이 어린 말이 조용히 흘러나왔다.
"무엇을 키우실지 드디어 결정하셨습니까."
"고민할 필요가 없었어. 이미 어릴 때부터 생각을 했었더라고, 내가."
그 어린 시절이 언제를 뜻하는지, 대사막 개를 기르겠단 이가 기실 누구였을지. 다른 말 없이도 아주 잘 알아들은 드미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두 번째 멍멍이는 직접 고민해서 데려오십시오."
칼리안이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까. 한 마리는 너무 심심하려나."
"네. 고양이도 둘이 있는데."
"그래. 그럴게, 드미레아."
"어디서 검은 재규어 새끼를 데려다 놓고 왕자님과 성격 잘 맞는 멍멍이 구했다 하지는 마시고요."
"······ 아."
"안 됩니다."
"······ 으응."
"왜 찾아오신 겁니까."
도무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 같아서, 드미레아가 말을 돌리듯 물었다. 그러자 영 아쉽다는 낯을 다 지우지 못한 칼리안이 대답을 전했다.
"휘트린 만났어."
찻잔을 다시 들어올리려던 드미레아의 손이 빈 채로 되돌아갔다. 고개를 들어 칼리안을 쳐다보던 드미레아가 나지막이 물었다.
"그래서 얼굴이 그런 겁니까."
"내 얼굴?"
"네. 왕자님 얼굴."
"얼굴이 왜?"
"저하와 또 싸우신 줄 알았습니다. 낯빛이 안좋으시기에."
"안 싸웠어. 혼났지. 아무튼 휘트린 때문이기도 하고 옛날 기억 때문이기도 하고······ 저것 때문이기도 하고. 이래저래."
칼리안 스스로는 '삶'이라 부르는 물건.
벽에 걸린 시계를 가리켜보인 칼리안이 살짝 웃었다.
"내 낯빛이 안 좋아?"
"많이 안 좋습니다."
"어쩐지 얀은 꿀차를 주고 너는 두말 않고 꽃을 받더라니."
"오라버니야 왕자님 생각에 꿀차를 드렸겠지만 꽃은 제가 그냥 받은 겁니다. 예뻐서."
"와. 나는 안 예쁘다 했으면서 꽃은 예쁘대."
"꽃은 꽃이니까."
"나는."
"인성 나쁜 그냥 왕자님."
"와. 너무해."
작은 웃음을 터뜨린 칼리안이 손을 뻗었다.
그러더니 드미레아의 앞에만 놓여 있던 커피잔을 제 앞으로 끌어왔다.
몰래 들어온 까닭에 제 몫의 차가 없던 터라, 나에게도 차를 내어 달라 말하는 대신 드미레아가 마시던 커피를 홀짝 훔쳐 마신 칼리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쓰다."
참 오랜만에 입에 댄 커피가 여전히 쓰고 여전히 향기로웠던 까닭에.
"커피 안 드신다면서요. 차 내오라 하겠습니다."
"아니야. 더 안 마셔. 곧 갈 거야."
손을 휘휘 내저은 칼리안이 드미레아를 쳐다봤다.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시계를 바라보듯 세크리티아의 파도를 바라보듯 그렇게 한참을 쳐다보다가.
"데블란 때문이래."
하는 말을 꺼내며 파리하게 웃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휘트린. 데블란의 새였대. 나는 몰랐는데, 체이스 형님도 모르셨는데, 그랬대."
드미레아가 눈을 찌푸렸다.
"휘트린이 키리에 앞에서 죽은 척 위장을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세크리티아의 세작들에게도 그렇게 만들어주는 약이 있어서, 내가 실리케의 앞에서 먹었던 그런 약이 이미 있었어서, 그래서 잠깐 생각을 했었는데 어차피 비슷한 약이 많으니까 의심을 안 했어. 안 했는데······. 내가 먹은 그 약을 휘트린도 먹었던 게 맞았대."
"자세히 말씀을 해주셔야 알아듣습니다."
"응. 미안."
톡, 톡, 톡.
칼리안의 손끝이 테이블을 두드리다 멈췄다.
"오래전······ 내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에 세렌티가 깨어나게 될 것을 봤었대, 휘트린이. 예지일지 과거를 꿈꾼 것일지는 모르겠어."
"네."
"그때 알아낸 일들을 빌미로 브리지트 숲의 엘프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얻어낼 수 있을까 싶어서 세크리티아의 세렌티 신전을 찾아갔대. 그러다 그곳의 대신관을 통해 데블란을 만나게 됐대."
"세크리티아의 선왕이 그 말을 믿은 겁니까."
"그럴 리가. 데블란은······ 아버지는. 사람은 안 믿어. 대신 휘트린이라는 엘프가 가진 좋은 능력은 믿었겠지."
"세크리티아의 선왕이 휘트린을 수족으로 둔 겁니까."
"응."
'그래서.'
'세렌티의 재림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제가 가진 능력을 물어봤고 저는 숨기지 않았습니다.'
'데블란이 탐을 많이 냈겠네.'
'······ 브리지트 숲의 마을을 볼모로 두고 협박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몇 번을 도왔고, 차차 시일이 지나면서는 새로운 생활이 좋아져 계속 함께 일했습니다.'
'네가 데블란과 손을 잡았다는 말인가.'
'네.'
'무슨 일을 했는데.'
'무슨 일을 했겠습니까.'
가지치기를 했다.
데블란이 왕위에 오르는 것에 방해되는 세력들을 휘트린이 없앴다.
'······ 그래서.'
'그러다 꼬리를 밟히게 되어 카이리스로 몸을 피하게 되었습니다. 꽤 오랫동안 다른 일 없이 카이리스에 정착해 조용히 살았습니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데블란의 연락을 다시 받았습니다. 저에게 다른 일을 맡기겠다 했습니다.'
'무슨 일.'
'카이리스의 전왕비 아이샤.'
달그락.
칼리안이 도로 밀어준 커피잔이 소음을 냈다. 그것을 집어들던 드미레아가 낸 소리였다.
'데블란의 주변에서 소리소문없이 죽은 이들에 대한 말이 돌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데블란은 그들의 눈을 돌려두겠다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기에 가장 좋은 타깃은······.'
'외부의 전쟁이겠지.'
'네. 텐실의 공주 아이샤가 죽으면, 그레이 브리센과 셀레나 하이데른의 결혼으로 다소 나아졌던 카이리스와 텐실의 관계도 다시 악화될 테고 만약 텐실의 국왕이 카이리스와 전쟁을 일으킨다면 결국 텐실이 크게 휘청일 테니 세크리티아의 입장에서는 나쁠 것이 없었습니다.'
'계속 말해.'
'조용히 에반을 찾아갔고 실리케 브리센을 알게 됐습니다.'
"그럼 혹시. 두 베른 경의 아버지를 죽게 한 것은 브리센이 아니라 휘트린이었던 겁니까."
"아니. 그렇지는 않대."
'남편을 죽인 건 그레이 브리센입니다. 알려지기로는 아이샤의 사망 이후 남편이 죽은 것으로 되어있으나 실제로는 이전입니다.'
'그레이 브리센이, 왜.'
'저를 협박해 일을 멈추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아이샤가 죽으면 실리케가 왕궁에 들어갈 것이 뻔했습니다. 실리케가 왕궁에 들어가면 브리센 후작가는 결국 막을 내리게 되리라고, 그레이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어째서.'
'······ 내 어머니는. 브리센 후작이나 왕비를 원한 게 아니었으니까.'
"실리케가 왕위를 원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응."
실리케는 제 손에 피를 묻히길 원치 않았다.
누군가의 아래에 머무르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왕비가 되었다. 왕비로 살고자 하여 왕비가 된 것이 아니라, 반란을 일으키는 것보다 플란츠를 왕위에 올린 이후에 그 자리를 건네받는 편이 어느모로 보든 더 향기롭다 여겼기 때문에 그리하였다.
그렇게 되면 딱 한 명.
플란츠의 피만 제 손에 묻히면 될 일이니까.
"······ 그래서요."
"그레이가 방해를 하긴 했지만 어쨌든 아이샤는 죽었어. 계속 이어진 그레이의 방해 때문에 휘트린이 나서지는 못했는데 실리케가 직접 나섰어."
"그렇게 된 이후 프레이야 왕비께서 오신 겁니까."
"응."
"그럼 설마······ 프레이야 왕비님께서도."
"아니야. 어머니는 데블란의 새가 아니었어. 대신 어머니는 데블란과 거래를 했대."
휘트린은 데블란이 시키는대로 위기상황을 꾸며내 편지를 썼다. 그것을 프레이야에게 보냈다. 혹시나 휘트린이 그레이 브리센 측에 넘어간다 하더라도 그레이가 그 일을 빌미로 세크리티아를 협박하지 못하도록, 오히려 휘트린이 피해를 입은 것이라는 증거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것을 프레이야가 받았다.
그리고 프레이야는 휘트린을 걱정하는 대신 데블란을 찾아갔다.
"실리케가 왕비가 되기 전에 먼저 왕궁에 들어가겠다고. 그래서 세크리티아에 좋을 일을 해 주면 더 이상 휘트린을 이용하지 말아달라고. 그 후에 어머니가 어떻게 왕궁에 들어갔는지, 이후에 왕궁에 들어온 실리케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휘트린도 모른다 했고."
"휘트린은 어떻게 됐습니까."
"죽음을 위장한 뒤에 텐실로. 텐실 국왕을 찾아갔어. 그레이 브리센을 잡기 위해서."
'그럼. 키리에와 히나의 이름은 왜 그렇게 지은 거야. 신관이 되려고 한 거야?'
'셀레나 하이데른, 아십니까.'
'알아.'
'후작저를 찾아왔던 그가 그런 말을 중얼거리는 것을 당시 브리센에서 일하고 있던 남편이 듣고 왔습니다. 듣기 좋은 말을 배웠다 하기에 그것으로 키리에의 이름을 짓고 둘째가 태어난다면 히나라 짓자고. 제가 말을 했었습니다.'
'굳이 아이들 이름을.'
'세렌티가 정말 눈을 뜬다면 그런 이름을 가진 아이들을 조금이라도 돌봐주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저도 어미였으니.'
"그럼 엘프들의 어머니 나무와 제온. 그들과는 어떻게 엮인 겁니까."
"휘트린이 텐실에서 지내던 중에 텐실로 되돌아온 셀레나 하이데른의 편에 섰대. 그레이 브리센을 당장 죽여 없애는 것보다 셀레나와 손을 잡고 브리센 전체를 없애는 편이 낫겠다 싶어서. 그렇게 차차 제온에 발을 들이게 됐고 놈들이 처음으로 돌을 만들고 그것을 심장에 심을 수 있게 도왔다더라. 지금은 다른 놈이 그 일을 한다는데 누구인지는 모르는 것 같고."
"그러다 다시 돌아온 겁니까, 카이리스로."
"프레이르가 브리지트 숲의 엘프들을 모아 프레이야의 영지에 터를 잡은 것을 알게 됐나봐. 그들 중 엘프 치유사가 있다면 회유할 생각으로 카이리스를 찾아왔는데, 프레이르와 의견 충돌이 있어서 프레이르를 죽이고 그 행세를 하면서 지내게 됐대. 셀레나가 계획을 바꿨던 것 같아. 변장용 목걸이는 오래전에 데블란에게 받았고."
"······ 그럼 휘트린은 지금도 제온과 관련이 있다는 겁니까."
"응."
"헤르츠 경이 찾아갔을 때 제온을 죽였던 것은요."
"제온이 아니라 대사막의 늑대였어. 시오나처럼 제온에 소속되지 않은 늑대들. 휘트린을 암살하러 왔다가 당한 늑대들을 제온이라고 속인 거야."
드미레아가 긴 숨을 내쉬었다.
그런 드미레아를 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부탁할 게 있어, 드미레아."
"무슨 부탁 말씀이십니까."
"엘프 하나를 찾아야 하는데 지금 상황에서는 발칸이나 마법사 연합을 움직이기가 어려워. 브리센이나 제온이 언제 또 수도를 공격할지 알 수가 없어서 그래. 그래서 지그프리드의 인원을 빌렸으면 좋겠는데."
"엘프를 찾는다고요."
"응. 어린 엘프."
'제가 보았던 미래에서는 어머니 나무가 둘이었습니다. 그것으로 다누를 협박하여 숲의 길을 이용하게 해주도록 제가 도왔습니다. 그리고 아직 어린 어머니 나무를 찾아냈습니다.'
'······ 내가 싫어할 일을 했다고 말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휘트린.'
'하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다만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하던 중이었습니다만. 얼마 전부터 어린 어머니 나무로부터의 응답이 없습니다.'
'언제부터.'
'라시드 브리센이 이곳을 떠난 이후부터입니다.'
"이 넓은 카이리스 땅에서 어린 엘프를 찾아다 보호해달라는 말씀이십니까."
"시스파니안께서 아실 거야. 시스파니안을 만나고 시아를 찾아다 보호해줘. 제온이 엮여 있다면 내가 나설게. 다만 그게 아니라 그냥 응답이 없을 뿐인거면 잠시만 지그프리드령에서 맡아줘."
"저는 다누와는 연관 없는 사람입니다. 제가 그래야 할 이유가,"
"어리잖아. 그냥 어린 아이야, 드미레아."
그 한 마디를 거절하지 못할 드미레아임을 아는 것이 분명하다. 설득도 회유도 협박도 참 잘하는 칼리안이 아닌가.
"······ 알겠습니다."
드미레아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보며 생글생글 웃은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잘 부탁할게, 드미레아."
"알겠다고, 요."
"응. 저 꽃도. 시들지 않게 잘 봐줘야해, 드미레아."
"네."
"나도. 아델리아한테도 비밀을 들켰지만 죽이면 안돼, 드미레아."
- 화아악!
마지막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살기가 몰아쳤다.
방긋방긋 웃은 칼리안이 서재 창 밖으로 몸을 날렸다.
- ······ 쿠웅.
그것을 드미레아가 뒤쫓아갔다.
그렇게 시작된 대련이었다.
* * *
터덜터덜.
주인의 마음이 허전한 것을 알았던지 레이븐의 발걸음이 묵직하다.
그런 레이븐의 안장에 오른 채 영주성으로 돌아온 동생 놈을 쳐다본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렸다.
"너."
"안 졌습니다."
"뭔데."
"정혼자에게 죽을 뻔하다 살아 돌아온 대신 생긴 상처요."
"아델리아에게 들킨 것을 말했나."
"어떻게 아셨습니까."
"말고 또 뭐가 있는데."
할 말이 없다.
덕분에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레이븐의 고삐를 하인에게 맡겼다. 그리고 장미향 가득한 정원 밖으로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웬일로 장미를 보고 계십니까."
"안 싫어하려고."
"철드셨습니까."
"르니에리 안 맡으려고."
휘트린과의 대화를 마치고 나왔을 때, 혹시나 또 절여졌을까 걱정을 해오는 칼리안에게 플란츠는 그냥 자리를 비켜달라 했었다.
어쭙잖게 위로를 하겠다 들어 보아야 결국 실리케를 계속 생각나게 할 뿐인 얼굴을 가진 칼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스스로도 참 복잡해진 속을 좀 채우려 드미레아를 찾아갔다.
위로는 커녕 왼 팔뚝에 길쭉한 상처 하나만 매달고 되돌아온 셈이 되었지만. 잘못한 건 한 거니까.
"장미 향기가 장미 향기로 맡아지면 르니에리 향이 아닐 것 같아서."
"그래서 나와 계셨습니까."
"그래."
"어떤 향기가 났습니까."
"란델 형님 냄새."
짜증이 가득 밴 말에 칼리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다행인지 아닌지 모를 말에 다시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무어라 말하려 입을 열었다.
"사과했어."
그런데 플란츠의 말이 먼저 들렸다.
정확히 말해 사과를 입에 담은 건 아니지만 사과를 했다고.
"히나 귀걸이를 빌려서. 란델 형님에게."
"그러셨습니까."
"그래."
"잘 하셨네요."
"미안."
칭찬을 했더니 사과가 돌아온다.
영문 모를 사과에 눈을 꿈뻑이던 칼리안에게 플란츠의 것보다 조금 더 묵직한 란델 특유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내서."
낮에 화낸 일을 말하는 건가 보다.
칼리안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저도 미안합니다."
그리고 이미 필요치 않았을 화해를 다시 했다.
아, 그러고보니 완두콩 더 컸다고 자랑을 못했네.
이런 생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