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장. 쓸모 많은 얼굴 덕에(3)
플란츠가 가는 숨을 들이쉬었다.
그 후에는, 돌연 몸을 일으키더니 휘트린과 얼굴을 맞대다시피 하고 있는 칼리안의 새까만 뒷머리를 보다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짧은 고민을 했다.
테이블을 짚은 동생 놈의 손이 새하얗게 질려있음을 함께 보게 된 까닭에.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내 동생이 멀쩡히 일어선 채로 악몽에 든 모양새라.
- 칼리안.
천천히 두드려보듯 칼리안을 불렀다.
그러나 대답이 곧장 돌아오지 않았다.
대답은 커녕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혹시.'
또 베른을 꺼내들었나.
어린 칼리안을 떠올리는 날이 늘어난 만큼 제 지나간 어린 시절의 기억처럼 베른의 모습도 편한 대로 툭툭 건져올려둘 수 있게 된 동생 놈이 아니던가. 조금 전 플란츠의 잘못을 지적했을 때처럼 말이다.
그렇게 하여도 지금의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게 됐으니까.
그러니 혹시 또 베른을 꺼냈나.
휘트린의 입을 열게 하기 위해 그렇게 했나. 그러다 휘트린이 무언가를 건드려 악몽에 들었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머리가 빠른 만큼 성격도 급한 탓에 조금도 더 기다리지 못한 플란츠가 제 동생 놈을 한 번 더 부르려 말을 골랐다. 필요하면 무어라 하든 상관없으니 무슨 말로든 부르라 했었지만 그래도 적절한 것을 꺼내야 할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고민인지 걱정인지 모를 생각을 하다가 결국은 답을 내지 못한 플란츠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우선 칼리안을 붙들어 자리에 앉혀두고자 손을 뻗었다.
- 아무튼 어찌나 급하신지.
그런데 칼리안의 목소리가 플란츠의 행동을 막았다.
- 칼리안.
- 네에. 형님 동생 어디 안 갔습니다. 코앞에 있는데도 걱정을 하십니까. 제가 그렇게 못미덥습니까.
- 대답을 안 하니까.
- 부르자마자 일어나셨는데요. 대답할 틈을 주셔야죠.
- 무슨 얘기 하고 있는데. 소리까지 막아놓고.
- 와. 형님 이제 사일런트도 알아보십니까.
- 소리가 안 들리는데 눈치를 못 채나.
- 아, 그렇지. 참.
칼리안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든다.
- 목소리는 잠깐 가렸습니다. 아직 더 자랄 날이 한참이신 형님께서 함께 들으시기엔 적절하지 않은 말을 좀 해주느라.
- 무슨 말.
- 나쁜 말.
짧게 답한 칼리안이 천천히 허리를 세웠다.
그리고 플란츠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휘트린의 코앞에서 바꾸었던 눈빛을 본래대로 되돌렸다. 휘트린에게 가까이 다가간 뒤 펼쳤던 작은 사일런트 막 역시 거둬들였다. 그 뒤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본래의 자리에 앉아 휘트린을 쳐다봤다.
"휘트린."
휘트린의 시선은 조금 전 강제로 칼리안을 마주보게 되었던 그 위치에 머물러 있었다. 이미 자리에 앉은 칼리안의 눈은 그보다 한참 아래에 있었음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진작에 사라진 연보랏빛의 눈이 여전히 자신을 직시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휘트린. 나 봐야지."
자신을 보라는, 방금 전의 말을 다시 떠올리게 만드는 칼리안의 목소리가 휘트린의 눈을 강제로 잡아끈다. 그제야 고개를 움직인 휘트린이 칼리안 쪽을 쳐다봤다.
플란츠가 눈을 찌푸렸다.
휘트린의 얼굴에서 여유와 평온함이 사라진 것을 눈치챈 까닭이다.
- 무슨 말을 한 거야.
- 나쁜 말이라니까요.
칼리안이 휘트린만을 향해서 살기를 쓰거나 한 것은 아닐 터였다. 그런 수에 저렇게 평정을 잃고 겁을 집어먹을 휘트린이 아니다.
칼리안이 제 비밀을 인정하고 밝혔다는 이유도 아닐 터였다. 사실상 칼리안의 속내에 다른 사람이 들었다는 것을 휘트린도 얼마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 않았던가. 그저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던 일을 새삼스레 밝힌다 한들 사실을 재확인하게 될 뿐, 저렇게 휘둘릴 이유가 없다.
그러니 도대체 얼마나 나쁜 말을 건넸으면 앨런의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던 휘트린이 저런 모습을 보이고, 대체 무슨 소리를 했으면 저 동생 놈이 테이블 밑에 숨겨 둔 손이 떨리느냔 말이다.
때문에 찌푸린 표정을 한 플란츠가 칼리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얘기하라고.
- 그걸 알려드릴 거면 사일런트를 왜 썼겠습니까.
- 돌리지 말고. 말.
- 굳이, 왜요.
- 걱정되니까. 알려달라고.
아무튼 집요한 완두콩.
피식 웃은 칼리안이 답을 보냈다.
- 그렇게 살다간 죽을 때 후회할 거다, 협박했습니다.
틀린말이 아니다.
거짓말도 아니다.
물론 저것이 다라고 생각하지 않겠지만 그 이상은 알려 줄 생각 없었다. 그래서 칼리안은 플란츠의 주위를 돌리듯 휘트린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 말 똑똑히 기억해. 잊지 말고 잘 생각해, 휘트린. 만약 이번에도 입을 안 열면 여기 계신 마음씨 넓은 내 형님 저하께서 너에게 무엇을 약속했든 다 상관없이 내 마음대로 손을 쓸 거야. 그렇게 되면 정말로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거야."
손을 써서 죽이겠다는 것인지.
약속의 이행 대신 벌이 내려지도록 손을 쓰겠다는 것인지.
어느 쪽이든 휘트린에게 불리할 것이 분명한 새로운 조건이 멋대로 건네진다.
조금 전에 보여준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른, 그래서 휘트린으로 하여금 자신이 잠시 꿈을 꾼 것은 아니었는지를 의심하게 할 만큼의 어여쁜 웃음을 변성기조차 겪지 않은 듯한 미성 속에 담아내면서.
"형님께서 약속하신 걸 내가 지킬 필요는 없잖아. 그치?"
생글생글.
지독한 악몽을 이미 진작에 다 겪어낸 이가 그리 말했다. 지독했던 눈빛과 악몽같은 목소리를 어느새 감춰두고서.
그 웃음을 마주한 휘트린이 눈을 내리떴다.
그 후로 얼만큼의 시간이 지났을 때 휘트린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 이 나라의 3왕자가 실레스티안보다 더 미쳐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너."
- 드르륵!
- 터억!
용납할 수 없는 말이 칼리안을 향한 것에, 플란츠가 살기를 내보이며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나 재빠르게 움직인 손이 그 어깨를 눌러 다시 자리에 앉혔다.
플란츠가 칼리안을 노려봤다. 그러자 급한대로 뻗은 손을 되돌려 둔 칼리안이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칼리안."
"맞는 말인데 왜 화를 내십니까. 형님도 그런 말씀 하셨으면서."
- 내가 내 입으로 내 동생 새끼가 단단히 미쳤다고 말하는 것과 저 따위 엘프가 그딴 소리를 하는 게. 같나.
- 다릅니까.
- 달라. 그러니까 하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너도.
- 뭐를 말씀이십니까.
- 미친 짓.
플란츠의 짙푸른 눈에 제대로 날이 선다.
시계 초침이 두어 번을 움직일 동안 수많은 대화가 다시 오갔다.
- 휘트린한테 또 뭔 짓을 했으니까 저런 말이 나오는 것 아냐. 얼마 전에는 바다에 들어가더니 이번에는 대체 뭘 했는데. 뭘 했기에 네가 휘트린보다 더 겁을 집어먹는데.
- 안 듣고 넘어가주시면 안 됩니까.
- 나한테도 말 못 할 일이면 하지 마. 어물쩍 넘어가지 말고 핑계 대지도 말고 하지 마. 그냥 하지 말라고.
화났다.
- 형 말 좀 들으라고, 미친 동생 새끼야.
혼냈다.
혼났다.
- ······ 아.
세크리티아의 선왕비 디에나는 언제나 자상했다. 디에나를 대신해 베른을 기른 루이즈는 오로지 애정만 줬다. 체이스도 늘 그랬다. 항상 부드러운 얼굴로 베른을 타일렀다.
그러니까 처음이라는 거다. 형제에게 얻어맞은 일도 처음이었지만 이런 식의 말을 들어 본 적도 없었다. 말했지만 참 곱게곱게 자라왔던 지라.
칼리안이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덮고 짧은 한숨을 내쉬다 대답을 전했다.
- 네. 알겠습니다.
그랬더니 플란츠는 식사 자리에서 자신이 들은 말을 고스란히 돌려줬다.
- 뭘 알았는데.
라고.
손바닥 안에서 피식 웃은 칼리안이 대답을 전했다.
- 안 할게요.
- 뭐를.
- 나쁜 말.
- 나쁜 말만 하지 말라는 게 아니었잖아.
- 미친 사람이 미친 짓을 안 하면 무슨 짓을 합니까. 다누가 형님을 또 쏙 빼가든 라시드가 형님을 또 툭 건드리든, 귀족들이 형님을 또 입방아에 올리든, 아니면······.
- 그만. 알았으니까.
- 아무튼 오늘 했던 나쁜 말은 더 안 하겠습니다.
- ······ 알았어.
- 네.
그렇게 시계 초침이 다섯 번 쯤을 더 움직인 뒤 칼리안이 손을 내렸다. 그리고 휘트린을 향해 시선을 옮기며 말을 전했다.
- 저 여기서 나가면 별장에 갈 겁니다. 그러니까 형님은 다른 데 가서 노십시오.
- 갑자기 무슨 소리야.
- 드미레아 만나겠다는 소리입니다. 시오나가 드미레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덕에 별장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오고 있다 하니 직접 가서 만나려고요.
- 히나부터 볼 줄 알았는데. 왜.
- 히나 만나면 혼날 일 많습니다. 이미 한 번 혼났는데 또 혼나면 서럽습니다. 그러니까 별장 가서 또 자랑하고 칭찬부터 받을 겁니다. 완두콩 또 컸다고.
- 야.
- 아무튼요.
- 내 아우님께서는 이제 소공작에게 가서도 짖으시나.
- 형님이 하도 오냐오냐 내 동생 잘 짖는다 하시니까 아무데서나 이렇게 잘 짖게 된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좀 작작 아껴주지 그러셨습니까.
플란츠는 손가락질 받는 것에 이골이 났고 칼리안은 플란츠에게 짖는다는 말을 듣는 것에 이골이 난 모양이다.
친구 놈의 말버릇을 응용해 '네 개소리는 정말 수준급이다'라는 험하디험한 말을 생각해내긴 했지만 차마 동생에게 욕지거리를 또 할 수는 없던 플란츠가 숨기지 못할 한숨 소리를 길게 냈다.
- 고맙다는 말씀입니다. 동생 챙겨주셔서.
그러자 이런 말이 들려왔다.
그와 함께 휘트린을 향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내가 너한테까지 미쳤단 말을 들을 사람은 아니래."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 보인 칼리안이 말했다.
"뭐. 그래도 많이 미쳐있기는 하지. 이 나라의 지고하신 왕세자 저하께도 엄청 잘 기어오르거든, 내가. 그러니 무엇인들 무서울까······ 생각을 해봤는데."
방금 전 플란츠를 끌어다 앉힌 손을 한 번 들어올려 보이며 이야기한 칼리안이 그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그러나 그것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는 대신 주먹만한 동그라미를 하나 그려냈다.
- 카드득!
가느다랗고 고운 손이 물먹은 모래바닥에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가볍게 움직일 뿐이었다. 그런데 휘트린이 불려와있던 응접실의 두터운 대리석 테이블에는 깊은 흠이 났다.
- 카득, 카득······!
칼리안의 손이 계속 움직였다.
동그라미 안에 열 두개의 금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하나씩 새겨진다.
"내가 무서워하는 건 이거 하나밖에 없더라고."
시계였다.
시침도 분침도 없었으나 분명한 시계였다.
"이번에는 후회할까봐."
그것을 칼리안은 조금 달리 불렀다.
자신이 그려낸 시계를 툭툭 두드린 칼리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건 무슨 미친 짓을 해도 돌이키지 못하거든. 어떤 재주를 부려도 절대로 안 돌아가거든."
곁에 앉은 플란츠가 짧은 한숨소리를 냈다.
그쪽을 잠시 쳐다본 칼리안이 휘트린에게로 시선을 되돌렸다. 그리고 히나의 것과도, 아르나이젤의 것과도 참 많이 비슷한 빛의 검은 눈을 들여다봤다.
검은빛.
같은 검은색인데 뭐가 저렇게 달리 느껴지는지.
그런 생각에 입맛이 쓰게 변해버린 칼리안이 가라앉은 목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제대로 봐. 내가 미친 걸 알아봤으면 너도 좀 봐. 그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도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너를 지금 당장 제대로 봐."
휘트린이 눈을 들었다.
칼리안의 붉은 눈을 쳐다봤다. 자신을 향한 목소리를 들었다. 아무에게도 남겨지지 않은 이의 연보랏빛 눈과 목소리를 떠올렸다.
"나보다 더 미치기 싫으면 네 속에 든 걸 말 해. 내버려 둬도 괜찮은 일을 해왔으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눈감아 주고, 해선 안 될 일을 벌였으면 내가 어떻게든 막을 테니까. 휘트린."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를 휘트린에게 내어 줬다.
"도와주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어떤 식으로든."
휘트린이 다시 눈을 내렸다.
칼리안의 손과 그 손이 만들어낸 시간을 봤다.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그리고 비로소, 입을 열었다.
"전부. 다."
칼리안이 답했다.
* * *
- 부우웅!
묵직한 검 끝에 제법 더워진 바람이 인다.
그 바람을 맞게 된 모닥불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그 뿐.
검이 일으킨 바람 소리 사이에 방울 소리는 나지 않았다.
"어색하군."
"검이 손에 익지 않아 그러십니까."
마법사의 주머니 속에서 빵과 베이컨을 꺼내 데우고 익혀내던 키리에가 물었다. 그러자 시오나는 고개를 가로젓다가 다시 끄덕였다.
"키가 줄어든 것도 그렇고 곱슬머리가 된 것도 그렇고, 검이 무거운 것도 어색하다. 그런데 그보다는······."
이어지던 말이 끝을 맺지 않고 멈췄다.
늘상 지니고 다녔던 방울 소리가 들리지 않아 어색하다는 말을 하자니 말을 듣는 상대가 키리에였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를 숨기는 것에는 칼리안 만큼이나 소질이 없는 시오나가 아니던가. 때문에 말이 나가는 것은 막았으나 자신의 눈이 검 손잡이 끝에 닿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그런 모습을 짐짓 못 본 척.
키리에가 모닥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방금 전 시오나가 일으킨 바람에 흩어진 재를 괜스레 모으며 말했다.
"칼리안 왕자님께서 경의 검을 만들 재료를 구해두셨습니다. 만나게 되면 전해주실 겁니다."
"내 검의 재료 말인가?"
"그렇습니다."
"돈이 굳었군."
즐거워하는 기색이 가득한 시오나가 드미레아가 지니고 다니던 여분의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1왕자에게 영지의 미스릴을 싸게 팔 생각이 없는지 물어보려던 참이었다."
그러더니 이런 말을 하며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플란츠, 아니. 란델에게 물었다.
"일면식이 있다 하여 특혜를 주어서야 되겠느냐."
카이리스에 딱 세 개 뿐인 미스릴 광산 중 한 곳을 지니고 있는 파비안 영지의 영주가 대답했다.
"특혜라니. 이렇게 선뜻 호위를 맡겠다 나선 실력 좋은 검사에게 서운한 말을 하는군. 내가 파비안의 황금색 미스릴을 달라 말한 것도 아니지 않나."
- ······ 툭!
- 치이익!
바닥으로 허무하게 떨어진 두툼한 베이컨이 모닥불 속으로 쏙 빠졌다. 그 기름에 닿은 불이 제법 큰 소리를 낸다.
뒤집던 베이컨을 툭 떨군 키리에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새로운 베이컨을 꺼내려 이리스의 안장에 매달린 가방 속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베이컨을 찾는 거다.
형제들의 영지에는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은 안 세심한 칼리안이 파비안의 미스릴을 사다 정성껏 제련하여 파비안의 영주에게 생일 선물로 주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어 당황한 게 아니다. 그래. 베이컨을 찾는 거다.
"널리 알리지 않아 대부분 잘 모르는 사실인데, 귀가 밝구나."
"슬레이만에게 들은 얘기다. 오래 전 그것을 구해보려 했으나 값이 지나쳐 포기했다면서."
키리에가 천천히 걸어 되돌아왔다.
번쩍거리는 황금빛 검을 든 우람한 근육질의 슬레이만을 상상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너와 지그프리드 공이 막내보다는 낫구나."
베이컨을 하나 더 찾아볼 걸 그랬다.
가능한 천천히 걸음을 옮겨 가까이 온 키리에가 자리에 앉는 사이 시오나의 말이 다시 들려왔다.
"당연하지. 슬레이만은 물론이고 내 검술 역시 칼리안 왕자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래.
소드마스터가 되려면 심신을 모두 단련해야 한다고 했다. 마음을 다스릴 줄 알아야 진정한 소드마스터라 했다.
이런 생각을 끝없이 되뇌며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는 것에 성공한 키리에가 새 베이컨을 다시 굽기 시작했다. 그러자 란델이 키리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덕분에 영주성에 새로운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하더구나. 막내에게 영주 대리인이 고마움을 전해달라 했다 말해주거라."
일부러 소문을 내어 팔지도 않았거니와 팔 생각이 있기는 한지 의심스러울 만큼 높은 가격 탓에 실제로 팔려나간 일이 극히 드물던 황금빛 미스릴을 처분하게 된 일에 대해 뒤늦은 인사를 전했다.
"······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
고요한 연두색 눈을 되돌린 란델이 모닥불을 바라봤다.
이게 다 나 때문이다. 우리 왕자님께서 그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잘 알아봤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생긴 일이다. 그러니 다음부터는 꼼꼼하게 챙겨야 되겠다.
충직한 따까리가 곧 이런 반성을 시작했을 때.
- 난데.
뜬금없는 무뚝뚝한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들려왔다.
하마터면 굽던 베이컨을 다시 놓칠 뻔한 키리에가 손목을 봤다. 플란츠에게 잠시 빌려주었다 되돌려 받은 통신용 팔찌가 빛을 내고 있었다.
- 무슨 일이십니까, 저하.
- 형님과 잠시 얘기할 게 있는데.
- 알겠습니다.
이런 사람들 사이에 왜 하필 나를 끼워 보냈느냐 묻는 대신 대답을 한 키리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두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란델에게 가 팔찌를 내밀었다.
플란츠가 할 말이 있다 하더라는 짤막한 말에 잠시 눈을 가늘게 떴던 란델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키리에가 설명해주는 사용 방법을 잠시 익힌 뒤 말을 건넸다.
- 아직 갚는 것을 못했다만. 이번에는 도울 일이라도 생긴 것이더냐.
이동 마법진과 파비안은 지그프리드령보다 조금 더 멀리 떨어져 있었다. 덕분에 부지런히 움직였음에도 거리가 남아있었다. 늦은 저녁이 지나서야 도착하게 될 터였다.
때문에 시킨 일을 시작도 못했다 말한 란델이 키리에를 쳐다봤다. 반대편에서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은 까닭이다.
그러니 이 팔찌를 다시 가져가거라, 라고.
란델이 그렇게 말을 하려는데.
- 형님의 쓸모 때문에 보낸 것이 아닙니다.
하는 말이 들려왔다.
란델이 대답없이 잠자코 그 말을 들었다.
키리에가 베이컨을 다시 뒤집을 때까지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 형님이 싫은 것과 별개로 믿기 때문에 가주십사 부탁드린 겁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란델이 입을 꾹 다물었다.
- 그러니 조심하십시오. 독이 든 음식이나 창 밖에서 날아드는 검에 당하지 않도록.
그런 말이 찾아들었다.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던 란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리하마.
짧은 대답을 동생에게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