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장. 쓸모 많은 얼굴 덕에(2)
칼리안이 스스로를 평가하길.
나는 미모도 과하지만 지닌 능력은 더 과하다.
휘트린 영지는 물론이거니와, 카이리스의 구석구석까지 연결된 광대한 판로를 지닌데다 세크리티아와의 루비 무역까지 독점한 상단, 그리고 몇몇 개의 주요 영지에 분교를 내기 시작한 카이리스 마법 학교까지. 이 모든 것의 실질적인 소유주인 터라 지닌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는 스스로도 정확히 가늠하지 못한 채로 살고 있다.
뿐만인가. 평소보다 조금 더 돌아서 제자리를 벗어나지 않는 이상 성격도 나무랄 곳이 없다. 게다가 마법이든 검이든 상관없이 싸움에도 일가견이 있다.
심지어 왕족이다.
죽기 전이었든 다시 살아난 뒤였든 따져볼 필요도 없이 왕족이다. 그것도,
"제가 참 곱게 자란 사람이라."
믿거나 말거나 곱게 자란 왕족이다.
"그렇게 곱게 자라셔서 야생 닭을 잡아드셨는지."
"야생 닭을 잡아먹는 법을 익혔을 땐 이미 곱게곱게 다 자라고 난 뒤라서요. 자랄 때에는 곱게곱게 자랐습니다."
그래. 어련하실까.
바다에 던져지질 않나, 가지치기를 위한 칼날로 쓰이질 않나. 그밖에도 굳이 입에 담지 않은 일들을 얼마나 많이 겪었을지 가늠도 안되지만 그래도 곱게 자랐다 하시니. 믿어 드려야지.
이렇게 생각한 플란츠가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얼굴이며 재산이며 성격에 신분까지 어디 하나 과하지 않은 곳이 없다 말씀하시는 동생 놈에게 무슨 말을 더 하겠나.
때문에 하고 싶은 수많은 말을 다 집어넣고서는, 한낮이 되어서도 눈을 뜨지 않은 탓에 '우리 꽃 같은 왕자님 저대로 곱게 죽은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는 얀의 악담 같은 걱정이 튀어나올 즈음에야 부스스 일어난 놈과의 늦은 식사에 집중했다.
"아무튼 휘트린이 음식을 잘 하네요. 고기도 많고."
그렇게 곱게 자라서 참 까탈스런 제 입에 휘트린의 음식이 잘 맞는다는 믿지 못할 말을 대충 흘려 들었다는 뜻이다.
"그래."
"골고루 잘 드십시오. 키 많이 크시려면요."
"보자마자 짖을 줄 알았더니 이제야 짖으시나."
"짖는 소리 기다리셨습니까."
"아니."
"네."
생글생글 웃은 칼리안이 포크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잘 쪄낸 양배추와 곁들여진 먹음직스런 스테이크에 사과 소스를 올려 입에 넣었다.
지나치게 아삭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무르지도 않은 양배추가 고기와 잘 어울린다. 부드러운 고기의 단 맛이 사과 소스와 섞이지 못해 겉돌지도 않는다. 그러니 이것 참 맛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찬물로 입을 가신 뒤 말했다.
"그나저나······ 생각해보면 전하께서 영지를 참 적절히 내리셨습니다. 저도 과하지만 휘트린 영지도 과한 면이 있지 않습니까. 소득도 많고, 식사에 고기도 많고, 사건 사고도 많고, 비밀도 많고."
그리고 다시 생글생글.
그 웃음이 진짜 웃음과 미묘하게 다름을 안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렸다. 그러나 그에 개의치 않는 칼리안의 말이 이어져 들려왔다.
"모르는 새 사라진 사람들도······ 많고."
흰 빵을 잘라 집어올리던 플란츠의 손이 멈춘다.
다른 말은 다 흘려 듣는다 해도 갑작스레 치고 들어오는 냉기서린 목소리까지 묵묵히 넘겨버릴 수는 없던 터라.
"내가 보냈는데. 세 명."
"어디로요."
"파비안."
대답을 전했다.
란델과 키리에, 시오나. 그 셋을 란델의 영지 파비안으로 먼저 보내 두었다고 말이다.
"······ 파비안이라."
적당히 식사를 마친 칼리안이 세심하게 세공된 은제 커트러리를 내려놨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뻗어 물잔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거기까지.
은은한 레몬 향이 도는 물을 마시는 대신 잔 속의 레몬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던 칼리안이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푸른 빛이 쌓이고 쌓여 짙게 보이는 것인지, 아니면 짙고도 짙어서 푸른 빛을 띠는지 모를 맞은편 사람의 눈을 직시하면서.
"왜 그 셋을 보내는지, 가서 무슨 일을 하면 되는지, 자세한 설명 해주신 겁니까."
물었다.
"아니."
"형님."
"왜."
"형님에게 험한 소리가 향하는 것에 이골이 나셨습니까."
플란츠가 물끄러미 칼리안을 쳐다봤다.
칼리안의 형제와 기사와 소드마스터를 빼내 파비안으로 보내면서 칼리안과 상의하지 않은 일을 탓하는 것은 아닐 터였다.
당시 칼리안은 실레스티안에게 끌려간 상태였고 상황은 바빴으며 당연하게도 플란츠 역시 일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으니까.
"나와 소공작에 대한 소문이 더 퍼질까 걱정을 하시나."
"그럴 것 같습니까. 제가."
"아닐 것 같아서 묻는 거야."
"네. 신경 안 씁니다. 이제 와 무슨 소문이 어떻게 더 퍼진다 한들, 상단과 다이아몬드 독점권을 정혼자에게 선사한 3왕자에 대한 소문 하나면 전부 다 뒤집힙니다."
물론 그것만으로 소문이 잠잠해지지 않는다면 대회의장에서 칼부림을 부려서라도 제 형제와 정혼자를 향한 손가락을 싹 다 잘라놓을 심산이겠지만. 그 정도는 플란츠가 막을 수 있으니까.
그러니 소문을 신경쓰는 것은 아니다.
"내가 왜 그렇게 일을 서둘렀는지 모르셔서 또 이렇게 기분이 가라앉은 것도 아닐 텐데. 얻은 것을 가지고 늦지 않게 왕궁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나."
"그래서요."
"그래서 보냈는데."
방금 전의 말대로다.
이들 모두가 서둘러 왕궁으로 돌아가야 했다. 중앙 귀족들은 물론이거니와 왕국 내외의 온갖 사람들이 다 모여드는 축제 기간에 르메인의 자식들이 단 한 명도 참석하지 않는 일이 벌어져선 안 된다. 그러니 적어도 열흘, 아니. 정말 최소한 사흘 전까지는 왕궁으로 돌아가야 할 터였다.
그렇다 해서 빈 손으로 갈 수도 없다. 명분이야 영지 시찰이겠지만 실상은 브리센과의 힘겨루기를 위한 증거와 증인 수색에 있음을 모르는 귀족은 없을 것이 아닌가.
그러니 브리센을 몰락시킬 증거를 찾든, 더 좋은 명분을 찾든, 혹은.
"라시드 브리센 찾으시려는 건 압니다. 브리센을 함께 없애자 하셨으니."
"그걸 아시면서. 왜."
라시드를 직접 붙잡아 가든.
세크리티아에서 돌아온지 얼마 되지도 않은 왕세자와 3왕자가 1왕자까지 끌고 나돌아다니는 것에 대해 모두를 진정으로 납득시킬 만한 성과가 있어야 했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시스파니안이 몸소 나선 것으로 간신히 굳건해진 르메인의 위치가 '제 자식들이 군대를 이끌고 나라를 휘젓는 것조차 막지 못하는 나약한 국왕'으로 전락하는 데에는 반 나절도 걸리지 않을 테니까.
"저는. 형님께서 어떤 말을 들어도 한 귀로 흘려낼 만큼이 되셨는지를 여쭈는 겁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는 거잖아."
"파비안에 가신 란델 형님께서, 형님이 왜 하필 란델 형님을 그곳으로 보냈을지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릴지. 그걸 모르고 보내셨습니까. 아니면 상관없다 여기신 겁니까."
"알고 보냈어."
플란츠가 가만히 고개를 돌렸다. 창문으로 비춰드는 햇빛에 밝게 반짝이는 구불구불한 금발에 익숙해지려 노력해보면서.
"상관없지는 않아."
하필 란델을 보냈다.
플란츠를 반기지 않을 란델의 영지에 플란츠로 분한 란델을 보냈다. 시오나가 분해 있는 소공작과 3왕자의 기사, 딱 둘을 호위 겸 동행인으로 두고서 말이다. 그건 누가 봐도 제대로 된 호위 인력이 아니지 않나.
작정하고 마음을 먹으면 칼과 독을 보내 볼 생각이 들 만큼.
"형님들 사이가 기껏 좀 가까워졌다 싶었는데 다시 멀어질 겁니다. 독을 받아도 괜찮을 사람이니 그 역할을 맡겼으리라고, 란델 형님이라면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알아."
"그런 생각으로 보낸 건 아니잖습니까."
"아니야."
"아닌데도 왜 보내는지 설명 안하셨고요."
"안 했어."
"이제는 란델 형님이 형님을 다시 오해하고 탓하든 말든 상관없다 여기는 것도 아니시면서요."
소문이고 정치고 브리센이고 라시드고 나발이고.
내 집에 사는 내 형제들의 사이가 가까워지려다 다시 멀어지는 것이 칼리안에게는 더 큰 문제다.
'오르테.'
'네, 왕자님.'
'네 자식들도 형님들처럼 사이가 안 좋았어?'
'서로간의 사이를 말씀하십니까?'
'응.'
'말씀드리기 면구스럽습니다만······. 매일같이 싸움을 일으키곤 했습니다.'
'매일 싸웠어?'
'그렇습니다. 조용할 날이 없었습니다.'
'······ 부럽다.'
얀이 왕궁에 들어와 칼리안의 상급 시종이 되기 한참 전부터, 칼리안에게 있어서는 참 커다란 문제였다.
'나도 우리 형님들도 그렇게 지내면 좋을 텐데.'
그런데 이제야 간신히 가까워지려던 둘 사이에 플란츠가 나서서 큰 벽을 하나 다시 세워 둔 셈이니 오랜만에 푹 자고 일어난 것도 잊어버릴 만큼 기분이 가라앉을 수밖에.
"그래서 이렇게 화를 내시나."
"혼내는 거야. 플란츠."
제 앞으로 날아들던 키리에의 검을 죽어라 막아내는 것을 못 봤으면 신경도 안 썼을 거다.
"검을 막아낼 만큼은 자랐으면서 말을 막아낼 생각은 않고. 란델의 안위를 챙길 만큼은 변했으면서 다시 벽을 세우고 있잖아. 당신 노릇을 해야 할 사람이 필요했으면 차라리 헤르츠 경을 보내든, 에일라를 불러다 보내든 했어야지."
독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에일라도 안전하다. 어지간한 독에는 내성이 생긴 에일라가 아닌가. 아니라면 산전수전 다 겪은 기민한 아르센을 보냈어도 될 일이다.
수도에 올라오지도 않는 파비안의 영주가 왕세자의 말버릇이며 손짓이며 하나하나 알지는 못할 테니까.
"그 둘보다 일을 더 잘 맡을 것 같아서 그랬는데. 영지 상대하러 가는 게 아니라 라시드 브리센 잡으러 갔다는 건 당신도 잘 알지 않나."
"그랬으면 란델에게 그렇게 말을, 설명을 했어야지. 라시드를 잡아들이는 일을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라 보내는 거라고 제대로 얘기를 했어야지. 이제껏 란델이 잘못한 게 많으니 이 기회에 다 갚는 셈 치고 위험도 감수하고 다녀오라 한 거라고. 독이든 칼이든 다칠 일도 없으니 보낸 거라고. 당신 형이 그렇게 여기게 하지는 말았어야지."
플란츠가 입을 다물었다.
앞에 앉은 놈이 잘못 짚은 것이 없으니 할 말도 없었다.
갚으라는 말로 란델을 보낸 것은 맞았으니까.
"대화하고 싸우고 사과하고 용서하고······ 이제는, 아직은, 할 수 있잖아. 그렇게 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지내면 안 될까? 플란츠."
칼리안이 칼리안을 대신해 차마 건네지 못할 말이 베른을 통해 전해진다.
갑작스레 찾아온 친구 놈의 새빨간 눈을 쳐다보던 플란츠가 짧은 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알았어."
"뭘 알았는데."
"설명하고 사과할 테니까. 란델 형님 만나면."
"그럼 빨리 만나야 되겠네. 사과하고 화해하려면."
가뿐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가시죠. 휘트린 취조하러."
생긋 웃은 칼리안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박자박, 작은 발소리를 내며 밖으로 나갔다.
* * *
루시.
위로, 그리고 가장 빛나는 별이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은백색의 고양이.
안네.
잊지 않고 기억하겠노라는 약속의 말을 이름으로 가진 잿빛의 고양이.
- 옛 언어입니다. 세렌티의 힘이 그 말을 타고 이름에도 주어진다 믿은 까닭에, 적어도 세크리티아의 왕족들은 옛 언어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 알아.
- 네. 그래서 지금의 제 이름은······ 일몰의 잔재. 옛 언어로 따진다면 그런 뜻도 있습니다. 지그프리드 공의 미들네임인 '혼' 역시 방패라는 뜻이 있고요.
란델, 숭고한 빛의 주시자.
카이리스에서 지어 준 이름은 그런 뜻이었다. 다만 옛 언어로는 다른 뜻이 되었다.
- 란델 형님의 이름은, 매듭이라는 뜻입니다. 세렌티가 별똥별의 꼬리를 베어다 세상의 기둥을 매두었다는 매듭을 그리 불렀습니다. 물론 신화 속의 이야기입니다만.
- 나는.
여지없이 이어진 물음에 칼리안이 슬쩍 웃었다.
- 형님 이름의 뜻은 조금 더, 나중에요.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그리고 이번에도 알려주질 않는다.
- 갑자기 이름 얘기는, 왜.
- 궁금해져서요.
- 뭐가.
대답을 미룬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있는 백은발의 엘프, 휘트린을 날카롭게 바라보며 말했다.
"키리에랑 히나에 대한 책임을 운운하지는 않을게. 그건 네가 선택한 거니까 그냥 둘게. 솔직히 화는 나지만."
"알겠습니다."
"대신 궁금한 게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 이름이요.
- 이름이라니.
"키리에랑 히나. 네가 적어 보낸 편지에 둘의 이름이 적혀있었어. 네가 지어 준 거야?"
"중요한 문제입니까."
"중요하지."
- 엘프가 왜. 세렌티를 섬기는 말로 자식들 이름을 지었는지. 그것부터요.
브리센에 원한을 가지고 지내다 왕비 프레이야의 동생 프레이르의 행세를 하며 살아왔던 휘트린이다. 휘트린이 말하기를 자신은 제온과 사이가 좋지 않다 하였으나, 실레스티안을 찾아가 하피를 테이밍하는 방법을 묻고 그것을 제온에 알리기도 했었다. 마법을 쓰지 못하는 엘프인데도 말이다.
그런 문제들 만으로도 궁금한 것이 넘쳐 흐를 지경인데 갑작스레 세렌티가 나오다니.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렸다.
- 키리에와 히나의 이름. 처음에는 우연이라 생각했습니다만.
- 그것도 세크리티아의 옛 언어인가.
- 기도문입니다. 키리에는 키리에대로, 히나는 히나대로.
세렌티의 자비를 갈구하는 길고 긴 기도문. 그것이 키리에의 이름이었다. 히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 세상을 빛으로 인도하소서.
히나의 이름이 지닌 뜻을 일러준 칼리안의 눈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처음에는 의심하지 않았다.
같은 이름의 사람들이 카이리스에도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란델이나 플란츠처럼 지금의 언어로 된 다른 뜻이 있거나 혹은 별 뜻 없이 발음하기에 좋거나, 그런 이유로 만들어진 여러 이름들에 우연히 옛 언어가 겹치는 경우가 허다했다. 때문에 의심하지 않았었다.
- 브리지트 숲에서 배운 건 아닌지. 세크리티아에 있잖아.
- 네. 저나 체이스 형님은 다른 곳에 그 언어를 퍼뜨린 적 없었습니다만, 엘프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브리지트 숲에서 살아왔으니까요. 지금이 아니라 언제라도 왕족을 통해 옛 언어를 배웠다면 전해져 내려왔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 점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궁금한 건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가 아니라 '왜' 그것으로 이름을 지어놨는지. 그 쪽입니다.
말로 이루어진 긴 설명 대신 칼리안의 생각 무더기가 또 한 번 통째로 전달됐다. 그것을 받아든 플란츠가 생각에 잠겨든 사이, 휘트린의 말이 들려왔다.
"세크리티아의 옛 언어로 지어진 이름이라 여쭈시는 겁니까."
"그게 세크리티아의 옛 언어였어? 몰랐네."
칼리안이 '가짜'임을 인정할 필요는 없었으니 이렇게 답했다. 서로가 그것이 진실임을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으면 끝나는 일이니까. 때문에 눈에는 날을 세우고 입술에는 온기를 머금은 칼리안이 말을 더했다.
"궁금해서 묻는 거야. 이름들이 예쁘기에."
"제가 지었습니다."
휘트린이 조용히 대답했다.
- 왕족들도 짓지 않을 신실한 이름을 제 아이들에게 지어줬네요.
- 엘프는 신을 섬기지 못하나.
- 그런 제약은 없었습니다. 적어도 세크리티아에서는요.
엘프가 신을 섬길 수는 있다.
당연히 가능하다. 세렌티는 누구에게나 신이었으니, 이제와서는 다누를 우선시하는 엘프들이라 하더라도 다누가 아닌 세렌티를 따르겠노라 할 수도 있다. 그것을 누가 막겠나. 다누라 해도 막지 못할 일이다.
그러니 엘프가 세렌티를 따르겠다 할 수는 있다.
그러나 휘트린은 그럴 수 없다.
- 이상한데.
- 무엇이 이상하십니까.
- 휘트린이 다누 대신 세렌티를 선택했다 한들 단순한 믿음은 아니었을 것 같아서.
- 네. 저도 그런 생각이 듭니다.
사제가 되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을 휘트린이 가졌을 리 없다. 그 정도로 제 욕심을 버릴 수 있는 이가 아니다. 다누에게 버림받은 마음을 세렌티에게 기댔을 리 없다. 그 정도로 만족할 휘트린이 아니다.
애초에 다누에게 버려진 것을 슬퍼하고 있지도 않은 것 같지만.
그러니 왜일까.
찰나의 시간 동안 생각을 하던 플란츠가 목소리를 전했다.
- 예지.
- 과거.
그리고 칼리안과 다소 다르지만 비슷한 말을 주고받았다.
- 엘프들 중에서는 미래를 보는 이가 있다 하던데.
- 예지는 아닙니다. 그랬다면 형님에게 실레스티안의 둥지를 알려줬을 리 없어요.
- 어째서······ 마법사 때문이군.
- 네. 앨런 마나실이 실레스티안을 찾아가면 그 미치광이 용이 스승님을 죽여버릴 줄 안 겁니다. 저 뿐만 아니라 아델리아마저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 그럼 이 기회에 앨런 마나실을 없애두려고.
- 형님이 변장했다는 그레이 브리센의 모습에 정말로 동요했을지도 모르고, 그런 척을 했을지도 모르고요.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스승님을 해칠 기회라 생각해서 순순히 알려줬을 것 같습니다. 미래를 볼 줄 안다면 그렇게는 안 했겠죠.
- 그래.
- 그레이로 변장한 것이 괜한 일이라는 건 아닙니다. 어쨌거나 휘트린이 아직 그레이와 자신의 관계를 잊지 않고 있다는 건 알았으니까요. 뭐, 마뜩잖은 방법이기는 합니다만.
- 아우님께서는 외팔이 흉내를 내겠다고도 하셨는데. 그레이 브리센 노릇이 어려울까.
- 저 아직 외팔이 흉내 안 냈는데요. 기회가 없어서.
- 필요하면 할 생각이잖아.
- 그렇기는 합니다만.
톡, 톡, 톡.
잠시 다른 길로 샌 이야기를 바로잡듯, 칼리안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긴 대화가 오가고 있으나 시간이 많이 흐른 것은 아니었으니 휘트린이 둘의 대화를 눈치채지는 못할 터였다.
- 뭐. 어쨌거나 휘트린이 직접 봤든 다누에게 말을 들었든. 세렌티가 깨어날 것을 이미 알고 있다면,
- 장래희망을 바꿨을지도 모르겠는데.
- 네. 만약 그랬다면 텐실의 하이데른 공작가와 미리 손을 잡고 신관 수업을 받으면서 신의 힘을 부리게 될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수도 있겠습니다. 휘트린이 정말 앞으로의 일을 봤다면 하이데른 공작가의 행보가 제가 기억하는 과거와 달라진 것도 이해가 되네요.
- 뭘 원하는지 알아내. 세렌티 얘기 꺼내지 말고.
- 네.
지극히 짧은 시간 동안 의견을 주고 받은 칼리안이 휘트린을 향해 다시 말했다.
"다누를 만나고 왔어. 잃어버렸던 하피 마석도 돌려받고 여기 어딘가에 갇혀있을 엘프 자객도 찾아오느라."
"그렇습니까."
"다누를 만나서 물어봤지. 휘트린이라는 엘프를 어떻게 사용하다 내버린 거냐고. 그랬더니 다누가 뭐라고 했을 것 같아?"
"모르겠습니다."
"내 아이가 아니었다, 라고."
"그렇습니까."
"그래."
휘트린은 표정도 달리하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휘트린."
"말씀하십시오."
"인간이든 엘프든 사람 얼굴이라는 게 여기저기 쓸모가 많아. 이름을 안 들어도 누가 누구인지 구분하게 만들어주기도 하고, 생김새를 보면서 저 놈이 어떤 성격일지 대충이라도 가늠해볼 수 있게 해주기도 하고, 굳이 말을 안해도 누가 누구와 부모 자식 관계인지 눈치채게 해주기도 하고, 또······. 특별한 대답을 안하더라도."
톡, 톡, 톡.
"내 말에 동요하는지 아닌지를 알려주기도 하고."
톡, 톡톡.
테이블을 짧게 두드린 뒤 손가락을 멈춘 칼리안이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휘트린을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은 동요 안 하네. 당신 어머니가 당신 자식 취급 안한다는데."
"이미 버려진지 오래인데 동요해야 할 이유가······."
"재밌어하네. 휘트린."
시시때때로 다누를 불러가며 여전히 다누가 자신을 외면하는지 확인해왔던 휘트린이 칼리안을 바라봤다. 그러자 칼리안의 말이 다시 들려왔다.
"슬프고 서운한 것도 아니고, 화가 나는 것도 아니고, 즐거운 것도 아니고. 재미라······ 진짜 재밌네."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뭐가 재밌을까. 나는 믿고 있던 뱀이 나를 붙든 손을 놨을 때 기분 참 더럽던데."
톡, 톡, 톡.
테이블 위의 손가락이 다시 움직인다.
풀기 어려운 문제를 깊이 고민하듯이.
"하긴. 재밌는 기분이 들 때가 있기는 했다. 내가 놓은 덫에 뱀이 걸렸을 때. 그땐 재밌었네."
그래. 그랬지.
그건 재밌었지.
곁에 있던 플란츠의 눈이 찌푸려지는 것도 모르는 채 중얼거린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브리센이 네 남편을 죽인 일 정도는 너한테 아무것도 아닐 거야. 사람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내가 정말 많이 봤거든. 너는 아니야. 달라."
'시오나. 검이 부서졌는데도 그 방울은 기어이 챙기는 거야?'
'프레이야가 주고 휘트린이 전한 선물이다.'
'알아.'
'휘트린은 좋은 친구였다.'
'이제는 아닐 텐데.'
'아니. 휘트린은 좋은 친구였다. 이미 죽었지만 그렇다.'
'그래.'
'그리고 나는 이 방울을 떨어뜨려 둔 적 없었다.'
'내가 그거 떼냈었는데. 시끄럽다고.'
'······ 그 전까진 없었다.'
'응. 믿어줄게.'
'그건 내 다른 친구가 마련하고 그 친구의 아들이 다시 건넨 선물이기도 하다. 그러니 죽은 친구가 떠오른다 해서 버릴 생각은 없다.'
"그래. 네가 사람을 뺏기고 잃어버린 게 아니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시오나가 그러더라. 너는 좋은 친구였다고. 이미 죽었지만 그렇다고. 키리에는 죽은 어미를 추모했다 하고 히나는 너에게 받은 걸 다 갚았으니 이제 인연이 없다 하고. 그러니 네가 사람을 뺏기고 잃어버린 게 아닌 것 같지. 오히려 너를 간직하던 사람들이 너를 잃은 거지."
드륵.
작은 소리를 내며 의자를 뒤로 밀어낸 칼리안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휘트린과 자신의 사이에 있던 테이블을 짚었다. 상체를 기울였다.
- 스으윽.
천천히 그렇게 휘트린에게로 가까이 갔다.
휘트린의 코앞에 제 얼굴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팔찌의 힘을 운용했다.
"휘트린."
속삭임이 들려온다.
지척까지 다가온 붉은 눈빛이 변하는 것이 보인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빛나던 붉음이 꺼뜨러진다. 붉은 삶을 내버리고 생을 잃은 탁한 연보라빛으로 변했다. 그 성벽 앞에서 결국은 모든 것을 잃고 결국은 스스로도 잃어버린 이의,
"휘트린······ 휘트린."
진짜 베른의, 눈빛.
그것으로 변해갔다.
팔이 사라지던 기억을 제 몸에 다시 불러냈던 미친 새끼가, 제 형제가 또 향수를 뒤집어 쓴 것을 알게 된 돌은 새끼가, 아무렴 죽은 그날의 얼굴 하나를 못 불러올까.
"나를 봐."
목소리가 변해간다.
고함을 지르고 울부짖다 이내 절망했던 날. 그날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쇠를 긁어내리는 것보다 더 악몽같은 목소리가 휘트린을 부른다.
"남들에게서 다 잊힌 사람을, 봐."
휘트린이 고개를 돌렸다.
바람이 불었다. 휘트린의 고개를 강제로 되돌렸다.
그 검은 눈에 연보라색의 눈을 마주쳤다.
"네 마지막이 이것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 같지. 그래도 난 후회는 안 했거든. 그런데 넌 할 것 같지. 아무리 봐도 그렇지."
휘트린의 얼굴이 변해갔다.
지워두었던 동요가 떠올랐다.
"그래도 내가 볼 땐 아직 다 늦은 건 아니지 싶은데······. 어떻게 생각해. 휘트린."
칼리안이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