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장. 쓸모 많은 얼굴 덕에(1)
익히 예상한대로 제온이 엮여 있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휘트린의 이름이 실레스티안을 통해 전해졌다.
"나쁜 인간들이 하피의 알과 시신을 이용했다고?"
"그렇게 들었어요."
실레스티안은 그렇게 설명했다.
제온에서 하피의 알과 시신을 이용해 그들을 살려냈다고.
당연하겠지만 살아있던 모든 하피가 인간에게 사냥되어 죽은 것은 아니지 않겠나. 그들은 하늘을 뒤덮은 화산재에 묻혀 죽기도 하고 갑작스런 열풍에 온 몸이 말라 죽기도 하고 악신이 불러온 얼음 폭풍에 갇혀 죽기도 했다.
이렇게 자연히 죽은 뒤 화석으로 남겨진 하피들에게서 마석을 꺼내기도 하지 않던가. 히나의 귀걸이처럼 말이다.
"죽은 이를 되살리는 흑마법은 나도 못 써요. 너도 알잖아요. 그건 시스파니안이 아니라 세렌티가 금제한 마법이라는 걸."
"그런데 하피가 어떻게 살아났어?"
"죽은 뒤 썩지 않고 남겨진 하피의 알과 시신들을 찾아냈다 했어요. 마법을 반사하는 하피의 힘을 연구하려고 그것들을 가져온 뒤에, 땅 위에 오른 시신이 급격히 썩어들어가지 않도록 돌을 심어두었다고."
"누가. 제온이라는 그 인간들이?"
"네. 그놈들이."
"돌? 그건 뭔데?"
"너도 모르고 나도 몰라요."
"응응. 그럼 그거 빼고 다음 얘기 해줘, 실레스티안."
제온에서 하피의 알과 시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일이 흘러갔다. 죽은 하피의 심장 곁에 돌을 두니 변화가 인 것이다.
심장 속에 온전히 남겨져 있던 마석이 돌의 영향으로 다시 박동했다. 죽은 심장이 다시 뛰고 혈액이 돌고 근육이 되살아나고, 종내에는 하피가 눈을 뜨고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했다.
시신이 썩지 않도록 돌을 심은 것을 보면 이전에도 여러 많은 시신들에 같은 짓을 해봤다는 뜻일 터다. 그럼에도 심장이 다시 박동하리라는 사실을 짐작하지 못했다 함은.
"하피들만 그렇게 살려냈다 들었어요. 하피들만."
이전의 다른 인간 혹은 몬스터는 되살아나지 않았다는 소리일 터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하피들만.
"왜 하피들만?"
"그것도 마찬가지로. 너도 모르고 나도 몰라요."
"응응. 그럼 다음 얘기 해, 실레스티안."
"응. 그런데 되살아난 하피와는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고 했어요. 생각할 줄 모르는 변종이 됐다고. 그래서 하피들이 인간의 말을 듣게 할 방법을 찾다가 그 엘프가 나에게 왔어요."
"그 엘프가 너를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
"그 애······ 저 작은 놈은 아델리아라 부르던데. 그 애가 흑마법을 누구에게 배웠는지 그 인간들이 알았나봐요. 그 애는 그런 말을 안 했을 텐데. 나를 절대로 생각하지 않기도 하고 만약 말했다면 내가 들었을 테니까요."
"응. 들었을 거야."
"어떻게 나를 알았는지 몰라도 나를 찾아왔어요. 하피를 테이밍할 방법을 알려달라고 하면서."
"은백색 머리 엘프가?"
"네."
마나실이라는 성을 지닌 오래 전의 마법사는 자신이 죽인 하피의 마석을 가져가지 못했다. 그 하피의 생명이 다하던 순간 실레스티안이 나타난 까닭이다.
덕분에 마지막 하피의 시신에도 마석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오래도록 썩지 않고 온전히 보존되고 있었다.
그 역시, 실레스티안에 의해서. 실레스티안의 곁에서.
"그래서 그 마지막 하피의 시신을 맡겼어?"
"테이밍을 알려주는 조건으로 내가 맡겼어요. 대신 그 하피도 살려내서 나에게 데려다 달라고요."
"그러면 안돼, 실레스티안. 잘못된 거야."
"나도 알아요. 그래서 저 작은 놈 옆에 있는 눈매 사나운 희멀건 놈이 아까부터 저렇게 노려보고 있어도 참고 있잖아요."
"그래그래. 착하다, 실레스티안."
"내가 너보다 어른이에요."
"응응. 알아, 알아."
둘의 대화를 듣던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 가면 반드시 휘트린을 만나야 되겠습니다.
- 그래.
"그런데 왜 그 나쁜 인간들이 아니라 텐실에 가려고 했어?"
"엘프가 그랬어요. 자신을 찾을 일이 있으면 텐실의 공작가로 연락하라고."
"텐실의 공작가? 인간들의 가문은 너무 많아서 나는 잘 몰라."
"네가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잘 알겠어요. 나도 몰라요."
"그래서, 텐실의 공작가라는 곳에 가서 다 없애려던 거였어?"
아, 그냥 둘 걸.
막지 말 걸.
그냥 뒀으면 손을 안 대고도 라시드의 가문을 없앨 수 있었는데, 하고. 후회가 막심한 표정이 된 칼리안이 플란츠에게 말했다.
- 휘트린이 브리센에 복수하기 위해서 텐실의 하이데른 공작가와 손을 잡은 걸까요.
- 확인해야겠지.
- 네. 빨리 돌아가야 되겠습니다. 휘트린 보고 싶어서.
칼리안의 붉은 입술이 고운 호선을 만든다.
"알려줘서 고마워, 실레스티안."
한편, 실레스티안이 화를 낸 이유를 알게 된 아르나이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엘프를 저 인간이 감시하고 있다고 했어. 그러니까 실레스티안, 인간들의 일은 맡겨두자. 텐실의 인간들이 그 하피의 시신을 마음대로 쓰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까 인간들에게 화내지 말고 있자. 응?"
고개를 가로젓고 싶은 것이 분명한 얼굴을 하고 있던 실레스티안이 긴 숨을 내쉬었다. 메마른 바람이 불어든다.
"······ 알았어요."
"응응."
- 실레스티안은 괜찮을 거야! 그러니까 이제 돌아가도 돼. 나는 저 팔찌를 풀 때까지 여기 있다 갈게.
안도한 목소리가 앨런을 향했다.
그런 아르나이젤을, 실레스티안을, 그리고 칼리안과 플란츠를 쭉 둘러 본 앨런이 입을 열었다.
"실레스티안께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
방금 전까지 욕만 안 했지 그 입으로 실레스티안을 몇 대는 후려쳤던 앨런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렇게 갑작스레 태도를 바꿨다.
영문을 몰라 눈을 꿈뻑이는 해룡을 곁에 둔 채로, 앨런이 다시 한 번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냈다.
"잠시 저와 따로 이야기를 나눠주시겠는지요."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
실레스티안이 눈썹을 찡그렸다. 앨런의 태도 변화에 많이 언짢은 듯했다.
아주 많이.
* * *
비를 싫어한지 오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를 기꺼워한 날이 있었다.
털 짧은 은백색의 고양이가 창 밖에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잡아보려 무던히도 애를 썼던 날이었다.
- 쏴아아아!
창을 짚고 두 발로 선 고양이의 몽실몽실한 뒷모습과 곱게 피어난 목화같은 손이 도무지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어여뻐서, 적어도 한 번을 죽고 두 번을 살아왔던 그 오랜 날 내내 그렇게나 싫어해왔음을 싹 잊어버리고 잠시동안 비를 반겼다.
비가 내리는 날을 무작정 꺼리기에는, 덧없을 줄을 알면서도 계속 손을 뻗어대는 작은 생명의 몸짓이 못견디게 사랑스러워서. 그래서 잠시나마 마음을 놓고 창 밖의 비를 구경했던 그런 날이 있었다.
"결국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거겠죠."
문득 그날이 생각났다.
어린 해룡이 불러온 폭우가 싫지 않았기 때문일지. 덧없을 줄을 알면서도 손을 뻗어야만 견딜 수 있었을 미치광이 용의 몸부림이 못견디게 가여워서였을지.
알 수는 없지만.
"누군가에게는 숨막히는 광경이 한 마리 고양이에게는 그저 신기한 장난감처럼 여겨지기도 하고, 부작용 많은 잔혹한 마법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숨구멍이 되기도 하고.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시간을 돌리는 힘이 든 물건이 있었다.
그것을 지닌 사려깊은 고룡은, 짧아서 섧은 날의 기억에 매달려 그 작은 우산 하나를 영원히 기다리게 만들어버릴 사람을 영영 잃었다.
그것을 지키던 현명한 왕은, 악몽같은 심연속으로 함께 뛰어들어 죽을지언정 손을 놓아버릴 생각은 해본 적 없던 동생을 온전히 잃었다.
그럼에도 버텼다.
시간을 되돌려 잃은 것을 되찾고자 하지 않았다. 시스파니안과 체이스는 그랬다. 시간의 축을 지니고 있었으면서도 잃은 것을 다시 만날 기회를 스스로 놓았다.
그러나 실레스티안은 달랐다.
버텨내지 못했다. 닿지 말아야 할 것에 결국 손을 뻗었다. 되찾지 말아야 할 것을 제 품에 다시 두고자 했다. 저를 찾아온 휘트린을 도왔다.
"그렇다 한들 잘못이 사라지지는 않는데."
"실레스티안이 잘했다는 건 아닙니다. 설마요."
실레스티안과의 대화를 마친 아르나이젤은 이제 돌아가라 말했었다. 그런데 앨런이 실레스티안에게 따로 물을 것이 있다며 잠시 남았다.
'실레스티안은 지금 마력을 못 써. 조용히 얘기하고 싶어도 여기에서 못 나가. 그러니까 잠깐만 나가있어!'
건망증 심한 아르나이젤은 사일런트라는 좋은 마법이 있음을 깜빡한 모양이다.
그러나 칼리안은 굳이 그 말을 지적하거나 거절하지 않았다. 지나치게 오랫동안 그 어두운 공동 안에 있던 터라 바람이 그리워진 까닭이다.
'알겠어. 나가있을게.'
'응응, 고마워. 내가 비 막아 줄게!'
그리하여 이렇게, 아르나이젤이 부지런히 퐁퐁거리며 청소를 시작한 공동에서 나왔다. 그 후 멀뚱멀뚱 해룡의 실드 아래에서 폭우가 쏟아지는 대사막의 밤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헤르츠 경이 대사막의 밤만큼 볼만한 게 또 없다 했었는데요. 비가 와서 하늘이 안 보이네요."
물론 아무것도 안 보였지만.
"세크리티아 하늘도 보기 좋았어."
"카이리스는요."
"왕궁에서는 별로."
"왕궁 밖에서는 괜찮았습니까."
"괜찮았어."
"다행이네요, 그래도."
"그래."
"안 추우십니까."
"괜찮아."
"거짓말."
"반말."
거짓말은 맞다.
추위가 몰려오고 있었다.
플란츠가 앨런과 함께 실레스티안의 둥지를 찾으려 대사막을 뒤지고 다녔을 때에는 더웠었다. 더위도 추위도 골고루 잘 타는 완두콩인지라, 앨런이 아니었다면 견디기 힘들었을 만큼 더웠다.
그런데 밤은 덥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급격히 기온이 낮아지는데 비까지 내려오니 카이리시스의 초겨울 정도는 되는 듯한 추위가 엄습했다.
- 슥.
똑똑한 것이 무색하게 대사막에 가면서 온도 조절 마법이 걸린 겉옷 하나를 안 챙겨온 플란츠의 앞에 새카만 로브가 내밀어졌다.
"걸치시죠."
더위도 추위도 다 잊어버린 칼리안임을 알면서도 새 겉옷이 생길 때마다 굳이 앨런을 찾아가 마법을 부탁하는 얀 덕에 지니고 있게 된 것이었다.
"됐어."
"고집."
"반말."
"감기 걸립니다."
감기에 걸린다 해도 스쳐가듯 나을 몸이다.
시스파니안의 축복을 지녔으니 말이다.
그러니 고집을 좀 부려볼까 하다가, 라시드를 '얼었다 녹은 상추 이파리'라 부르던 친구 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서 얌전히 받아들었다. 얼었다 녹은 완두콩깍지라고 불리고 싶은 마음은 루시의 오른쪽 손바닥에 난 작고 까만 점만큼도 없었으니까.
플란츠가 그것을 받아 주섬주섬 걸쳐 입는 사이에 칼리안의 말이 이어져 들려왔다.
"실레스티안이 잘했다는 게 아니라 그냥, 왜 그랬을지에 대해서만은 어느정도 이해가 된다는 거죠."
휘트린에게 테이밍을 알려준 것은 넘어가기 힘든 잘못이다. 그 일에 휘말린 칼리안은 물론 플란츠를 포함한 주변인들이 싹 다 위험해질 뻔하지 않았나.
때문에 눈꼬리를 찌푸린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내 아우님의 이해가 대체 어디까지 닿으시려는지."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이해가 하늘 끝까지 닿을 만큼 관대해져도 형님들 용서해드릴 날은 안 올 테니까."
"반말."
"지금 말버릇이 더 중요합니까."
"더 중요해."
플란츠가 짧게 답했다.
그 와중에 '네 글자 이상으로 대답해달라' 했던 언젠가의 부탁까지 잘 지켜주면서.
어쨌거나 칼리안에게 대신 용서를 받을 생각 같은 건 단 한순간도 해본 적 없으니 당연히 말버릇이 더 중요하지 않겠나.
"왜요."
"뭐가."
"계속 반말하다가 거기에 익숙해져서는, 저 이제 형님 동생 노릇 그만하고 세크리티아에 갈 겁니다 하는 소리나 꺼낼까봐 그러십니까."
평소같으면 꺼내지 않을 말들이 툭툭 들려온다.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흘려댈 만큼 졸리거나, 혹은 농처럼 입에 담아도 될 만큼 정말 괜찮아졌거나.
- 쏴아아아!
쏟아지는 폭우에 끊임없이 일렁이는 오아시스를 바라보던 플란츠가 고개를 들었다. 적당한 바위를 골라 각자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있던 둘의 머리 위로 넓게 펼쳐진 두 겹의 실드가 보인다.
하나는 물론 아르나이젤의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칼리안의 것이었다.
명백히 플란츠의 것은 아니다. 클린조차 못 쓰는 플란츠는 실드 역시 펼쳐낼 수 없지 않나. 정말로.
연두색 눈이 조용히 움직인다. 청소에 집중한 아르나이젤이 실드를 까먹을까 우려해 한 겹을 더 펼쳐 둔 동생 놈의 실드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그러다 맞은편에 앉은 그 동생 놈을 쳐다봤다.
"대뜸, 왜. 자."
얘기가 대뜸 왜 그쪽으로 갔는지 몰라도 당장 잠이나 자라는 말을 기적적으로 줄인 네 글자짜리 대답에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일부러 급히 말씀드렸던 겁니다. 다른 데 간 게 아니라 성질머리 나쁜 용 새끼, 아니. 되게 비싸보이는 황금색 저 새끼······ 아니. 실레스티안에게 잡혀 온 거라고."
내 동생한테서 왜 자꾸 내 친구 냄새가 나나.
쟤가 졸린 건지 내가 졸린 건지 알 수가 없다.
"아델리아에게 붙들려서 브리센 후작저에 갇혀있게 됐을 때 형님이 체이스 형님에게 연락하셨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말씀드렸습니다. 누구한테 잡혀왔는지."
눈앞에서 누군가에게 붙들려 갔는데 설마하니 그때처럼 다 놓고 세크리티아에 돌아갔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했겠냐마는, 사라진 것을 본 순간 온갖 일을 다 떠올릴 머리임을 알아서.
칼리안이 사라지자마자 또 무섭게 굴러갔을 머리도 쉬게 해줄 겸, 경우의 수 하나하나를 떠올려 볼 때마다 한 꺼풀씩 시들지도 않게 해줄 겸.
실레스티안의 피어 앞에 당장 제 코가 석자인데도 손 많이 가는 완두콩에 물부터 줬다고.
"그런데 또 궁금해서요. 제가 없어졌다고 체이스 형님 생각을 하신 걸 보면, 제 말버릇도 그래서 그렇게 지적하시나······ 하고요."
"아니야."
"아닙니까."
"아니라고."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냥 형 노릇을 하는 것뿐인가보다.
아무튼 아니라 하니 다행이다. 그럼 앞으로는 안심하고 계속 기어올라야지. 재밌으니까.
"네."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을 했다. 그런 칼리안의 얼굴을 보며 상당히 언짢은 표정을 해 보이던 플란츠가 말했다.
"그런 생각 안 하니까 아우님도 그만 신경 쓰시지."
"뭐를요."
"변장 마법, 하고 있잖아. 계속."
이렇게 말한 플란츠가 칼리안의 머리꼭지를 쳐다봤다.
"아우님은 머리가 계속 안 자라시는데."
검은 머리.
수도를 떠난 이래 조금도 자라지 않은 그 검은 머리를.
5층 거주인은 본래에도 머리가 다소 긴 편인데다 애초에 관심도 없었다. 그래서 그 금발이 어깨를 훌쩍 넘어가든 말든 신경을 안 썼다. 그리고 칼리안은, 수도를 떠나온 딱 그날의 머리 길이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플란츠는 오늘이 되어서야 제 머리카락이 길어진 것을 알았다. 평소 거울을 유심히 보지는 않았던 까닭에.
아무튼 그게 다 이상한 데에서만 환장할 만큼 세심한 저 망할 동생 놈 때문이다. 혹시나 예전 일이 생각날까, 예전의 칼리안을 떠올리고 르니에리 향을 맡을까. 그새 길어져 눈앞을 가리기 시작한 제 머리카락을 급한대로 마법으로 숨겨 둘 정신머리는 있으면서 앞에 나타난 스승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할 머리는 멀리 집어던져 둔 놈 말이다.
"눈 찌르면 불편해서요. 검을 쓰자니."
웃기고 있다.
그 치렁치렁한 긴 머리를 잘도 가눴었으면서.
"됐으니까. 신경 안 써도 된다고. 너야말로."
"네."
잔뜩 찌그러진 완두콩을 본 칼리안이 헤실헤실 웃었다. 그러면서도 제 머리를 원래 길이대로 돌려놓질 않는다. 덕분에 플란츠는 조금 더 많이 찌그러진 완두콩이 됐다.
"······ 차라리."
확 그냥 내가 길러버릴까 보다.
5층 거주인이랑 머리 모양이 같은 것이 너무 싫어서 잘랐었는데 5층 거주인은 어차피 잘 묶고 다니지도 않으니 내가 그냥 길러버릴까 보다. 칼리안이 기억하는 어린 시절, 동생을 처음으로 마주쳤던 그때 만큼만 길러서 보란듯이 다닐까 보다.
그 시절의 내 동생에게서는 르니에리 향이 안 난다는 말을 그렇게 해줘야 좀 믿으려나 보다.
"차라리?"
"아니야."
"쓸데없는 생각은 마시고요."
"안 해."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거짓말."
"반말."
"또, 왜."
"너. 계속."
"요."
"자."
"이따가요. 집에 가면. 아니지, 휘트린이 집은 아닌가. 어쨌든 형님들 계시고 스승님 계시고 얀도 있고 키리에도 있고 레이븐도 있으면 집인 거니까. 아무튼, 집에 가면요."
"······ 알았어."
"네."
생글거리며 답한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제껏 비를 막아주던 자신의 실드를 거두며 고개를 돌렸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시지요. 모셔다 드릴 터이니."
이렇게.
진짜 대마법사의 목소리가 들려온 까닭에.
"스승님!"
생글거리던 얼굴에 꽃을 피워낸 칼리안이 반가움을 가득 담아 제 아비를 불렀다. 당장 오늘 저 대마법사를 그렇게 반기기만 하다 큰 일이 날 뻔했다는 사실은 싹 다 까먹은 것처럼.
- 따악!
걷기를 그만두고 칼리안의 코앞으로 워프해 온 앨런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훈훈한 온기가 주변을 감싸는 것이 느껴진다.
제 로브를 전해줄 줄은 알면서 주변에 차고 넘치는 빗물을 조금만 끓어오르게 해도 이렇게 따뜻해진다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않은 덜 세심한 제자를 대신한 것이었다.
"그러다 허울 좋은 가짜 마법사에게 또 잡혀가면 어찌 하시려고 이렇게 앞뒤 없이 반기십니까."
플란츠의 추위부터 살핀 뒤 칼리안의 경계심없는 모습을 타박한 앨런이 혀를 쯧쯧 찼다. 그러자 작은 웃음을 터뜨린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몇 번을 속든 어떻게 의심을 먼저 하겠습니까. 스승님인데요."
진심이다.
몇 번을 속든 어떻게 앨런을 의심할까. 차라리 속고 말지.
"아무튼 말 하나는 번지르르하게 잘도 하십니다."
"누구 아들인데요. 당연하죠."
토닥토닥.
몸 고생 마음 고생 심했던 플란츠와 칼리안의 어깨를 양손으로 똑같이 두드린 앨런이 말했다.
"어찌됐건 이제 돌아가겠습니다."
"네."
"알았어."
"그리고 왕자님께서는 왕궁에 돌아가면 저와 수련부터 하시지요. 미룰 생각 마십시오. 봐 드리지 않을 터이니."
"수련 말씀이십니까?"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클을 억지로 하나 더 늘려놓을 요량이십니까. 다섯 개로도 충분하니 거기서 멈춰도 탈이 안 나도록 해야 할 것 아닙니까."
"탈이 안 나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은,"
"내 아우님 몸 속에서 오러와 마력이 충돌하지 않을 방법을 알았다는 소리인가."
"저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실레스티안과 할 말이 있다더니. 그걸 물어봤나, 마법사."
"그렇습니다. 실레스티안이 마력을 읽고 다스리는 것에 대해서는 으뜸이 아닙니까."
좋은 소식이다.
혼자 노력해보지 않아도 어떻게든 주변에서 도움을 준다는 것은, 정말이지 좋은 일이다.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저 그럼 드디어 스승님한테 마법 배우는 겁니까?"
"이런······ 누가 들으면 제가 마법을 가르쳐드린 일이 아주 없었던 줄 알겠습니다."
"명분 상의 스승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플란츠가 거들고 칼리안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는 소리다.
"대체 언제 이렇게 죽이 잘 맞는 놈들이 되셨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다 들리는 혼잣말을 내뱉은 앨런이 형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빛이 아른거린다.
대사막의 빗소리가 멀어진다.
휘트린의 바람소리가 들려온다.
- 대사막은 밤하늘이 정말 예쁘다고 실레스티안이 그랬었어. 나 때문에 비가 와서 못 봤으니까 다음에 꼭 보러 와! 그리고 실레스티안은 걱정하지 말고 푹 자! 나중에 또 만나!
뭍의 하늘에 뜬 별을 본 적 없었을 어린 해룡의 미안함과 진심을 담은 인사가 전해진다.
- 그래. 다음에 또 만나.
비로소 잠이 밀려든다.
휘트린에 도착하자마자 한 걸음도 더 옮기지 못하고 잠든 동생 놈을, 그렇게나 연로하다는 대마법사를 대신해 또 업어들게 된 완두콩의 한숨소리도 못 들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