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장. 과할수록 좋으니(6)
칼리안은 화를 가라앉혔다.
얼굴도 마음도 어여쁜 왕자로 돌아왔다.
이제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칼리안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같은 자리에 있는 앨런이나 플란츠도 그에 동의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니까.
"저는 진정이 됐는데······."
아무튼 칼리안은 화를 가라앉혔다.
다만 실레스티안이 아껴오던 대상을 잃고 그 원망을 풀어낼 길 없이 지내왔음을 알게 되어서, 혹은 그런 모습이 칼리안이나 앨런을 참 많이도 닮아서 마음을 푼 것은 아니었다.
알고 보니 나쁜 짓을 한 놈에게 안쓰러운 사정이 있었다 해서 그놈의 잘못까지 다 용서해 줄 것이었으면 이미 진작에 플란츠와 란델에게 용서를 내리지 않았겠나. 그러나 그렇게 넘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는 칼리안이 아니던가.
화를 풀게 된 이유는 오로지 실레스티안이 칼리안에게 사과를 했기 때문이었다. 사과를 했고 사과를 받았으니 얼굴도 마음도 고운 카이리스의 막내 왕자로 돌아왔을 뿐이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아무렴.
"저는 진정이 됐는데 실레스티안은 그렇질 못하나 봅니다. 화를 좀 가라앉히는 것 같더니 다시 폭발하네요."
그런데 실레스티안은 칼리안과 달랐다.
칼리안이 전한 소식에 충격을 받고 아르나이젤과의 대화에서 진정을 얻고 앨런을 만나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듯 보였던 실레스티안이 돌연 다시 화를 냈다.
"텐실로 가겠다 한 것 같은데."
"네.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다 죽여버리겠다면서요."
방금 전 실레스티안이 꺼낸 말을 거듭 확인한 플란츠에게 칼리안의 말이 들려왔다.
"그나저나. 한 가지 상황에 몰두하면 앞뒤 안 가리고 달려나가려는 게 형님을 좀 닮았네요."
"······ 누구."
"실레스티안이요."
"말고."
"형님이요. 생각해보니 조금이 아니라 많이 닮은 것 같기도 하고요."
"저 용과, 내가."
"네."
실레스티안과 플란츠가 닮았단다.
그래. 저놈이 헛소리는 많이 해도 틀린 소리는 안 하니까. 그러니 진지하게 한 번 생각을 좀 해보자고. 플란츠가 눈을 감고 스스로를 애써 다스린 뒤에 눈을 떴다. 그 후 나지막한 답을 전했다.
"······ 내 생각에는 아우님을 더 닮은 것 같은데."
"에이, 설마요. 저는 그래도 앞뒤는 가려 보고 달려듭니다. 저렇게는 안 굴어요."
거짓말 못하는 놈이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다.
뭘 굳이 싸우고 있느냐. 너네 둘 다 똑같다.
차라리 누군가 그런 말을 하면 플란츠도 얌전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거다. 칼리안이 아닌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하면, 그래. 남들 눈에는 칼리안 뿐 아니라 플란츠도 성격이 나쁜 만큼 인내심이 짧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거니 생각해가며 반박 않고 받아들여보려 할 수 있다.
그런데 하필 칼리안이 그런 말을 한다.
플란츠가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움켜쥐었던 주먹을 애써 펼쳐냈다. 사람이 사람을 때리는 건 분명히 나쁜 짓인데 하물며 짖는 짐승을 상대로야 말을 해 무엇할까.
"······ 자. 그냥."
"지금 잠이 오겠습니까."
- 우우웅!
"저런 장관을 또 언제 봅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구경해야지."
"정신을 바짝 차리셨으면 그런 말을 하실 수 있을 리가 없을 텐데."
- 콰드득, 콰가가각!
공동의 바닥이 아르나이젤의 몸을 꿰뚫을 것처럼 갑작스레 솟아오른다.
그 곁에 있었기 때문에 같은 공격에 노출된 앨런이 가볍게 몸을 피했다. 그러더니 입술을 꾹 깨물며 마력을 운용했다.
- 슈우우욱!
- 콰아아아앙!
인간 대마법사의 새하얀 불꽃이 실레스티안의 발밑을 강타했다. 꺼지지 않는 불에 노출된 돌이 녹아들고 바위가 패여든다.
아무리 대마법사라 한들 도대체 무슨 용기가 있어 대사막의 용을 상대로 공격을 보낼 수 있겠냐만은.
'잠깐만 쟤 시선 좀 돌려줘. 실레스티안이 공격하는 건 내가 막아 줄 테니까, 걱정 말고 발만 좀 묶어줘. 응?'
해룡의 이런 부탁을 듣게 되었으니 어쩌겠나.
시스파니안을 향해서는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할 테지만 실레스티안이라면. 소싯적에 이미 한 번을 만나 한바탕 말싸움을 벌였던 사이인데 마법 싸움 하나를 더 못할까.
"아무튼 좋네요. 제가 안 싸우고 이렇게 얌전히 구경만 하는 것도."
스승의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공동의 한쪽 구석에서 그 모습을 태평하게 바라보던 어여쁜 제자의 입에서는 이런 말이 나오고 있었다.
"구경을 할 일도 없으면 더 좋았을 것 아닌가."
"그건 당연하고요."
"걱정은 안 되시는지."
"누구, 스승님 말씀이십니까."
"그래."
"앨런 마나실인데요. 누가 누굴 걱정합니까. 아르나이젤도 있으니 괜찮습니다."
- 우웅, 우웅, 우우웅!
- ······ 화륵!
- 콰아앙, 콰광, 콰아아앙!
"그리고 스승님도 가끔씩 저렇게 화를 푸셔야죠. 그간 전하때문에 쌓인 것도 많으실 텐데 제 때 안 풀면 건강에 해롭습니다. 워낙 연로하셔서."
"그 화를 드래곤에게 푸나."
"전하를 그을려 둘 순 없잖아요."
"······ 자라고. 좀."
"지금 잠이 오겠습니까."
여전히 옹기종기, 아르나이젤이 펼쳐 둔 자그마한 물의 보호막 안에 사이좋게 앉아 바깥 상황을 구경하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왜 갑자기 화가 난 걸까요."
"뭐가."
"실레스티안 말입니다."
"하피들이 누군가에게 세뇌된 것을 알아서겠지."
"저에게 제온의 이름을 들었으니, 그랬다면 제온을 언급했어야 할 일 아닙니까. 그런데 제온도 대사막도 아닌 텐실을 다 죽이겠다 하지 않습니까."
- 콰아앙, 콰앙, 쾅!!
- ······ 우지끈!
- 투둑, 투둑······ 후두두둑!
천장에서 떨어져나온 돌가루와 흙먼지가 보호막 위로 쏟아져내린다. 실레스티안의 피어와 다른 여러 공격들로부터 칼리안과 플란츠를 보호하고 있는 장막 말고 거대한 공동 전체를 틀어 막은 또 다른 물의 장막을 깨뜨리기 위한 공격의 결과였다.
살짝 고개를 들어 보호막 위로 돌덩이가 떨어져내리는 모습을 확인한 칼리안에게 실레스티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켜요. 너랑은 싸울 생각 없어요."
"싸우려는 게 아니라 막으려는 거야."
"비켜라. 너는 왜 거드는 거냐?"
"뛰쳐나갈 생각 접거라. 그리하면 그만 거들 터이니."
아르나이젤과 앨런에게 한 번씩 말을 건 뒤 인상을 찌푸리던 실레스티안이 돌연 모습을 감췄다.
- 쉬이이익!
그러자 앨런으로부터 눈부신 백색의 빛이 쏟아져 나가 공동 안의 한쪽 구석을 강타했다.
- 콰아아아앙!
- ······ 쿠웅, 쿵!
후두둑, 붉게 달아오른 돌덩이와 흙먼지가 쏟아져내리는 것이 보인다. 그렇게 떨어진 것들이 이내 조금씩 검게 변하며 발산하던 빛을 잃었다. 새하얀 불꽃의 열기에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곧 식어가는 것이다.
그 온도가 어느 정도이기에 돌을 태우는지.
플란츠가 그것을 가늠하기도 전에 다시 한 번 마력의 소용돌이가 느껴진다. 곁에서 같은 쪽을 보던 칼리안은 생각과 입을 잠시 닫았다.
앨런이 서 있던 곳을 향해 무시무시한 마나가 뻗쳐나간다. 형체도 모양도 없는 강대한 기운이 앨런의 온 몸을 감아 쥘 것처럼 휘몰아쳤다.
- 파슷!
마나의 집약을 느낀 앨런의 몸이 꺼뜨러지듯 사라졌다. 공격을 피해 워프한 것이리라.
그런데.
- 스스스······.
사라지려던 앨런의 모습이 흐릿하게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야를 되돌리는 것보다도 더 빠르게, 워프를 시전하던 그 자리에 도로 못박히듯 돌아왔다.
이제껏 다른 말 없이 앨런의 공격을 막거나 피하기만 하던 실레스티안이 워프를 방해한 것이다.
"······ 마법 차단."
마법의 차단.
칼리안이 선보이고 아델리아가 의심을 했던 바로 그 힘이다.
헌데 지금 벌어진 상황을 읽어낸 플란츠의 말에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섬뜩한 살기가 곁에서 터져나왔다. 앨런의 발을 묶어놓고도 공격을 멈추지 않는 실레스티안을 향한 것이었다.
- 파앗!
그러나 걱정하지 말라는 듯, 실레스티안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었던 듯한 앨런의 모습이 연기처럼 흩어지다 사라졌다. 워프가 방해받은 것을 안 앨런이 자신의 가짜 형상을 다시 만들어 세워둔 뒤 제 공간 속으로 몸을 숨긴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실레스티안의 바로 뒤의 공간이 쭉 찢어지듯 열렸다. 그 사이로 눈이 부실 만큼 새하얀 불꽃더미가 쏟아져내렸다.
- 파스스······!
그러나 폭음이 이어지지 않았다.
바위와 돌이 타오르지도 않았다.
무엇으로도 꺼지지 않아야 할 앨런의 불꽃이 실레스티안에게 닿기도 전에 남김없이 사라진다. 두 번째 마법 차단이었다.
- 화아악!
이번에는 실레스티안이 팔을 뻗었다. 그리고 주변의 공기가 울렁거릴 만큼의 마력을 모아 앨런을 향해 쏟아냈다.
- 쿠웅, 쿠우웅······.
불안한 울림이 공동을 휘감는다.
제 앞을 막아서는 인간을, 하필 그 머리색 때문에 차마 죽여 없애지도 못할 인간 마법사를 멀찍이 던져두기라도 하려는 실레스티안의 힘이다.
형체도 없이 뻗어나오는 공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직감한 앨런이 실드를 둘렀다. 그 힘을 버텨낸 뒤 내보낼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바로 그 순간.
- 포르륵!
앨런의 앞에 작은 물의 소용돌이가 일었다.
그러더니 푸른 물결같은 어린 아이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아르나이젤이었다.
투명한 물방울같은 해룡의 마나가 모여든다. 일순간에 거대한 힘을 집약시킨 아르나이젤이 실레스티안의 공격을 막아섰다.
- 쾅!
짧은 굉음이 인다.
실드를 꺼내들고서 흡수한 것이 아니었다.
비슷한 힘을 꺼내들고 맞부딪힌 것이었다.
- 쿠구궁······!
불안한 소리가 이어졌다.
대기가 흔들리는 것을 느낀 칼리안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스윽, 하고.
플란츠의 앞으로 나선 칼리안이 나지막한 말을 전했다.
"······ 움직이지 마십시오."
안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칼리안처럼 주변의 기운을 정확히 읽어내기에는 아직 부족함이 많다 해도 지금 저 모습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지 않나.
이미 많이 보아왔던 상황이었으니까.
- 쿠궁······ 쿠우웅······.
차라리 어느 한 쪽의 힘이 부족했다면 상관없었을 것이다. 만약 앨런이 공격을 막지 못했다 하더라도 공동 구석으로 나가떨어지는 정도에서 그쳤을 터였다. 그러나 비등비등한 힘이 맞부딪혔다. 그것이 문제를 일으켰다.
- 쿠우웅. 쿠웅. 쿠웅.
마력 충돌, 발칸의 마법사들이 일부러 만들어내는 그 강대한 폭발이 일어나기 직전의 모습이 아니던가.
그런 일이 지금 눈앞에서 벌어진 것이다. 심지어 일개 인간 마법사도 아닌 두 드래곤의 힘을 떠안고서!
"칼리······."
- 콰과과광! 콰앙!
플란츠의 목소리가 막혔다.
거대한 충돌음이 인다. 충격파가 터져나온다.
- 파스슷!
힘을 이기지 못한 바위가 순식간에 바스라진다. 아르나이젤의 발 밑이 움푹 꺼진다.
패여나간 지면 대신 허공을 디디고 선 아르나이젤이 눈을 돌렸다. 자신의 뒤에서 무사할 앨런이 아닌 먼 곳에 떨어져 있던 두 사람, 칼리안과 플란츠를 쳐다봤다.
- ······ 파슷!
거대한 구덩이 하나를 만들고도 멈추지 못한 파장이 터져나왔다. 플란츠는 차마 가늠하지도 못할 속도로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켜 부서뜨릴 것처럼 퍼져나간다.
플란츠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으나 칼리안은 현저히 느려진 자신만의 시야로 그 강대한 힘이 달려드는 모습을 똑똑히 봤다. 아르나이젤의 발 밑을 다 부서뜨린 힘이, 제 앞을 가로막는 돌과 바위를 죄 모래가루로 만들며 닥쳐드는 것을.
- 우우웅!
붉은 빛의 힘이 둘을 감싼 아르나이젤의 방벽 위를 다시 덮었다. 앨런의 실드였다.
- 타앗!
- 우웅, 우우우웅!
칼리안도 함께 움직였다.
플란츠의 앞을 가로막은 채 지닌 오러를 전부 다 담아낸 실드를 만들어 방벽 안을 감싸안았다.
- 가만히 계십시오.
말보다 빠른 칼리안의 목소리가 플란츠의 머릿속으로 전해진다. 입을 열 만큼의 시간도 없다는 뜻이다.
- 콰과과과······!
- 투둑, 우지끈!
거대한 파장이 순식간에 주변을 집어삼킨다.
칼리안이 눈을 들었다. 충격을 견디고자 온몸을 긴장시켰다. 가장 밖에 앨런의 실드를, 그 안에 아르나이젤의 방벽을, 가장 안쪽에는 칼리안의 오러를. 그렇게 세 겹의 보호막으로 둘러싸인 채로.
그리고 그 순간.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힘이 당장 눈앞까지 닥쳐온 그 순간.
- 슈우욱!
- 화아아악!
물방울이 차올랐다.
바로 곁의 오아시스를 이곳으로 옮겨 둔 것이 아닐까 착각될 만큼의 수많은 물방울이 공동을 가득 메운다. 하나하나가 영롱한 자개라도 된 것처럼 찬연히 빛나는 그것이 충격파를 가로막는다.
알고보니 참으로 대단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던 카이리스 왕세자의 마법이 펼쳐진 기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대사막의 용과 해룡의 가벼운 맞부딪힘'에 공동 전체가 분쇄되어 사라지는 것을 막으려 아르나이젤이 나섰을 뿐.
- 파아앗!
사방으로 확 펼쳐진 물의 힘이 칼리안의 코앞까지 다가왔던 충돌의 힘을 그러모으듯 감싸안았다.
바람에 퍼뜨려지는 풀씨를 활짝 펼친 손아귀로 잡아채는 것처럼, 물방울 하나하나에 담긴 강대한 마력으로 터져나오는 힘을 끌어안았다. 그 속에 든 힘을 흡수했다. 막아냈다.
- 반짝, 반짝!
제 몫을 다한 물방울이 저마다 반씩 갈라진다.
그것이 다시 반으로, 또 다시 반으로, 점차 크기를 줄여나가며 수를 불렸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한 크기가 될 때까지 계속하여 나뉘었다. 그러다 이내 공기 중으로 증발하듯이 사라졌다.
- 사아아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하······."
잔뜩 긴장했던 붉은 입술 새로 긴 한숨이 새어나온다.
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앨런을 향해 '괜찮다'는 입모양을 만들어 보여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물론 이번에는 제 등 뒤에 있던 플란츠를 제일 먼저 살피는 것을 잊지 않고 챙긴 뒤였다.
- 툭!
아르나이젤이 다 부서져내린 발 밑의 바위에서 벗어나 온전한 곳으로 걸음을 디뎠다. 그리고 칼리안과 플란츠 쪽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급해서 실수를 했어. 뭍에서는 마법을 잘 안 써봐서 그랬어. 미안해."
"놀랐지? 너한테도 미안해. 저 인간들 괜찮아. 걱정하지 마!"
"봐, 실레스티안. 큰일 날 뻔했잖아."
칼리안과 플란츠를 향한 목소리가 조근조근 흘러나옴과 동시에 앨런과 실레스티안의 귀에는 다른 말이 들렸다. 아르나이젤이 그렇게 넷을 향해 서로 다른 말을 건넨 뒤 고개를 돌렸다.
- 도르륵!
물방울이 흐르는 듯한 마력이 느껴진다.
이번에는 춤을 추듯 모여든 물의 힘이 푸른 빛의 고리를 이루었다. 그것이 곧 실레스티안의 손목을 향했다.
- 사락!
그리고 그 팔에 부드럽게 감겨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앨런이 다소 놀란 얼굴을 했다. 칼리안도 마찬가지였다. 실레스티안에게서 흘러나오던 위압감이 일순간에 사라진 까닭이다.
정확히는 아르나이젤의 팔찌가 실레스티안의 팔목에 채워진 바로 그 순간부터 그리 되었다.
"내일이면 풀릴 거야, 실레스티안. 그 때까지만 얌전히 기다려. 내가 여기 같이 있으면서 나쁜 인간들이 너를 공격하지 못하게 막아줄게."
그 팔찌.
앨런에게 시선을 돌려주기를 부탁한 뒤 만들어낸 것.
"그러니까 답답해도 조금만 참아."
해룡이 지닌 중재의 힘이었다.
실레스티안의 마력을 흩어내어 더 이상 섣부른 일을 벌이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것이었다.
중재자의 힘이란 자고로 중재의 대상이 지닌 것보다 과해야 하는 법이니까.
그저 어릴 뿐 힘이 약한 것은 결코 아니었던, 때문에 시스파니안이 자신이 부재할 때 다른 드래곤들로부터 다누를 지키도록 부탁할 수 있었던, 그런 아르나이젤이 다시 입을 열었다.
"비가 오긴 하겠지만 괜찮을 거야. 지난번에 네가 화가 많이 났을 때 내가 여기에 있느라 사흘 내내 비가 내렸어도 금방 말랐었어. 그러니까 다른 걱정 말고 저 인간들 돌려보내고 나랑 같이 있자. 응? 왜 화가 났는지 얘기해줘. 응?"
안락하던 보금자리가 싹 다 부서진 것을 본 실레스티안이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마지막 하피가 죽었던 날 이후 다시 차게 된 푸른 물의 팔찌를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그 하피가 다시 보고싶어서 시스파니안이 금지한 마법을 텐실의 인간들에게 알려줬어? 그랬는데 그 인간들이 네가 알려 준 힘을 잘못 사용하고 있어서 화가 났어?"
"······ 그 얘기는 이미 들었어요. 너 오기 전에 저기 작은 놈한테."
"그럼. 왜 갑자기 화를 냈어. 얘기해 줘, 실레스티안."
한참 어린 아이가 한참 커다란 청년을 다독이는 기묘한 광경이 펼쳐진다.
물끄러미 그것을 보다 방금 전 세뉴 강변에 갔다 오게 된 일까지 잊어버리게 된 칼리안이 헛웃음 소리를 냈다. 그리고 한 걸음 걸어와 칼리안과 나란히 서서는 같은 광경을 보고 있던 플란츠를 향해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저도 같이 가서 따질까요. 자칫하면 내 형님 푹 절여질 뻔했다고."
"짖지."
"네."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다시 실레스티안 쪽을 쳐다봤다.
짖는 게 맞다는 뜻인가.
칼리안의 대답에 짜증을 내려던 플란츠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 하피를 살려낼 방법을 알아내겠다고. 도와달라고 했었어요."
"그걸 알려줬어? 왜?"
"······ 보고싶어서."
"누가? 누가 물어봤는데?"
이런 대화.
그리고,
"백은발의 엘프."
이런 대답이 들려왔던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