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장. 과할수록 좋으니(5)
뺏기고는 못 사는 칼리안이다.
"솔직히 원래는 내가 질 것 같아서 사과 안 받고 그냥 접어주려고 했는데 상황이 바뀌었으니까 안 넘어갈래."
"기어코 나를 이겨먹기로 했냐?"
"사실 내가 지는 걸 안 좋아해. 뺏기는 걸 싫어해서."
키리에를 구하러 들어갔던 도박장에서, 나에랑샤 거리의 건물 한 채 정도는 거뜬히 살 수 있을 어마어마한 금액의 불로소득은 주저없이 내버렸으나 입장료와 원금을 합친 5플로린만은 끝끝내 돌려받았던 사람이다.
무럭무럭 잘 키우고 있던 완두콩을 한순간에 쏙 빼앗아 간 다누의 행각에 돌아버려서, 그 다누 덕분에 카이리스에 가뭄이 들든 홍수가 일든 르메인이 흉작 걱정을 할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도 싹 까먹고 살기를 뿌려댄 사람이다.
지고는 못 사는 칼리안이라 그렇다.
뺏기고는 못 사는 칼리안이라 지는 것도 싫어한다.
끝내 데블란을 이겨내지 못해 푸른 솔새를 빼앗겼었다. 끝내 발칸을 물리치지 못해 키리에를, 체이스를, 세크리티아를, 시간의 축을. 그리하여 결국 베른을 빼앗겼었다.
"지고는 못 살아, 내가."
지면 빼앗기고 빼앗기면 못 살았다.
정말이지 말 그대로, 살지 못했다.
그래서 싫어한다.
"사과하면 착하고 예쁘게 고분고분 대답해줄게."
"사과? 믿는 구석이 생겼다 이거냐?"
"믿는 구석은 원래도 있었어. 더 늘어난 거지."
"말 참 잘 하는구나."
"잘 하지. 누구 아들인데."
피로에 절어있는 놈에게 안식처를 줄 것처럼 속여서 데려온 행각을 생각하면 또 부아가 치민다.
"지나가는 개도 그딴식으로는 안 끌고가. 그런데 네가 나를 그딴식으로 끌고 왔잖아."
생각할수록 괘씸한 작태가 아닌가.
차라리 고기라도 줘 가며 유인했으면 모를까.
"말 가려서 안 하냐. 작은 놈아."
"수단 방법 안 가리는 큰 새끼한테 작은 새끼가 뭘 가리냐."
이런 대꾸에 아르나이젤이 깜짝 놀란 얼굴을 했고 플란츠가 드높은 천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앨런은 곧장 실드를 둘러 칼리안을 가릴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그제야 제 험한 말을 깨달은 칼리안이 아차 하는 표정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아, 맞다. 고운 말 써야지.
완두콩이 있었지, 참.
하면서.
"······ 새끼."
아이고, 내가 너무 오래 살았구나.
실레스티안이 딱 이런 표정을 만들어 보였다. 인간의 모습으로 바뀌고 나니 그 표정이 확연히 눈에 들어온다. 아델리아와 참 많이도 닮았다는 뜻이다.
어찌됐건 실레스티안도 억울하기는 매한가지다.
칼리안의 입장에서나 실레스티안이 잘못을 했다 말하는 것이지, 입장을 바꿔놓고 보면 실레스티안도 할 말이 참 많은 상태였다.
"인간 꼬라지를 하고 있으니까 내가 인간으로 보이냐?"
"인간으로 보이면 내가 널 살려뒀겠냐?"
저 태도를 좀 보란 말이다.
전부 깨어지고 해진 시스테라 대륙에 드래곤이라 해 보아야 얼마 되지도 않는다. 그나마도 대다수는 인간들의 앞에 제 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산다. 둥지에 틀어박혀 지내든 인간인 척 엘프인 척 혹은 인어인 척 유유자적 유희를 보내든, 어찌됐건 큰 소음 없이 살고 있다.
그러니 저 인간이 지금 누구의 앞에 선 것인지를 잊어버렸을 수 있다. 깨닫지 못하고 인간들의 기준을 자신에게 요구할 수 있다.
그건 안다.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를 잊지 않을 만큼의 날은 살아왔다.
"너······."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말버릇이 대체?
- 화내지 마, 화내지 마, 화내지 마, 실레스티안. 화내면 안 돼. 내 생각에 네가 먼저 잘못한 게 맞는 것 같아. 그리고 계속 얘기했잖아. 네가 저 인간 건드리면 너 큰일 나. 시스파니안의 후손을 죽게 만든 세르나비안이 어떻게 됐는지 알잖아. 인간이 아니면 누구든 자기 핏줄을 건드리는 것만큼은 절대 이해해주지 않는 거 알잖아.
아르나이젤의 다급한 목소리가 실레스티안에게 와 닿았다. 조금 전 아르나이젤을 마주친 뒤로 지금까지 족히 백 번은 들은 듯한 저 말을 또 들으면서, 조금 더 전까지만 해도 참 아늑했던 보금자리를 꽤 오랫동안 둘러보던 실레스티안이 아르나이젤에게 대꾸했다.
- 화 안 내요. 네 앞에서 화를 어떻게 내요. 대사막에 홍수나면 눅눅해서 싫어요.
저 어린 해룡은 도대체 언제 다 커서 저놈의 비를 다스리게 될 셈인지. 까마득한 앞날을 세어보듯 긴 한숨을 내쉰 실레스티안이 말을 더했다.
- 시스파니안이 겁나는 것도 아니고요.
- 겁을 내. 좀 내라니까? 나도 무서워하는 시스파니안을 왜 겁을 안 내?
이 말에 실레스티안의 눈길이 움직였다.
- 나는 다른 용들이나 너랑 달라서 시스파니안 겁 안 나요.
갑자기 찾아와서는 밑도 끝도 말도 없이 아까부터 실레스티안의 황금색 머리꼭지를 노려보고 있는 낯빛 허연 어린 놈 말고. 그 허연 놈을 가리고 선 눈 빨갛고 낯빛은 더 허연 작은 놈도 말고. 두 허연 놈을 다시 가리고 서서는 감히 드래곤의 앞에서 고개를 치켜들고 있는 또 다른 놈. 특이한 머리색이 참 익숙한 덜 어린 놈을 쳐다봤다.
그 머리카락을 물끄러미 하염없이 쳐다보다가.
그렇게 한참을 쳐다보다가.
- 원망만 들어요.
대답을 했다.
"그래. 미안하다. 됐냐? 작은 놈아."
그 뒤에는 기어코 사과를 받겠다며 으르렁거리고 있는, 제 자신이 누구의 핏줄인지 티를 좀 내겠다는 듯한 검은 머리와 빨간 눈의 그 작은 놈을 향해 결국 사과를 했다.
그것을 본 아르나이젤이 기분 좋은 얼굴로 퐁퐁퐁, 기포 대신 바람을 꺼내놓는 동안 실레스티안이 고개를 돌렸다.
"피어 거둬라. 간지럽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저 작은 놈이 누구한테 그 성질머리를 물려받았는지 참 잘 알게끔 만드는 사람. 실레스티안 자신만큼이나 성질 더럽던 화염 마법사를 쳐다봤다.
"앨런 마나실. 인사 안 하냐? 너는 왜 늙지도 않아? 죽을 때 안 됐냐?"
그리고 물었다.
불만을 들은 대마법사가 대답했다.
"늙어 죽을 날이 영영 안 오게 됐느니라."
실레스티안의 얼굴이 확 찌푸려졌다.
어떻게 들어도 인사는 아니었으니까.
* * *
워낙에 과묵하다.
말하는 것을 기피하지는 않지만 쓸데없는 소음을 즐기지도 않는다. 왁자지껄함과 적막함을 두고 비교를 해보라 하면 당연 후자 쪽을 선택할 터였다.
그랬으니 란델이나 키리에는 지금 이 상황을 특별히 어색하게 여길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실로 애석하게도 함께 있는 또 다른 한 명은 아니었다.
- 다각, 다각!
드미레아의 거대한 말 위에 올라 있는 드미레아, 아니. 드미레아의 외형으로 변장을 하고 있는 시오나는 조금 달랐다. 왁자지껄함을 좋아하는 편도 아니었으나 그렇다 해서 적막함을 선택하고 싶지도 않은 그런 성격이었다.
한 마디로, 입이 근질근질하다는 소리다.
"얼마나 더 가야 하나."
벌써 네 번째 질문임을 알고는 있는지.
황금빛 물결을 가득 떠안은 밀밭을 지나치고 푸른 나뭇잎을 주렁주렁 매단 포도밭이 너르게 펼쳐진 작은 마을의 앞을 하나 더 지나자마자 질문이 건네진다.
"아직 한참 남았습니다."
그럼에도 키리에는 꼬박꼬박 대답을 했다.
그리고 묵묵히 앞으로 나서고 있던 란델의 옅은 에메랄드빛 머리를 쳐다본 뒤 말을 이었다.
"저도 가보지는 않았습니다만. 듣기로는 이동 마법진과 지그프리드령의 사이만큼은 떨어져 있다 했었습니다."
하루가 꼬박 걸린다는 뜻이다.
지그프리드령으로 향하는 이동 마법진은 지그프리드령과 하루 거리에 놓여 있다. 그것을 이용해 시스파니안의 땅에 해를 가하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우려한, 정확히 말한다면 3왕자인 칼리안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슬레이만을 위해 그렇게 했었다.
초근접 거리에 이동 마법진을 두고 있는 휘트린은 말 그대로 휘트린이기 때문에, 슈린츠는 슈린츠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각각 칼리안과 르메인을 따르는 곳이 아니던가.
칼리안과 란델의 사이가 지금처럼 가까워지기 훨씬 전에 세워진 이동 마법진이었으니 파비안 영주성과 이동 마법진을 멀리멀리 떨어뜨려 놓게 되었을 수밖에.
"가는 길에 계속 이렇게 작은 마을도 있고 숲도 있겠습니다만, 아무래도 야영을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적당히 과묵하고 적당히 말도 하고 적당히 사교성도 갖춘 까닭에 어쩌다보니 가장 앞으로 나서서 가게 된 키리에가 말을 덧붙였다. 그러자 시오나는 제대로 된 고기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된 것에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는 정도의 얼굴이 됐고 란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체가 탄로나면 안 되니 그렇겠지.
그도 아니라면 영주성에 도달하기 전에 괜한 싸움에 말려들까 걱정한 까닭이거나.
"왕세자 저하로 분하고 계시니 파비안에서는 되도록이면 사람을 많이 마주치지 않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키리에가 이런 말을 더했다.
그 함의가 괜스레 선득하다. 그것이 단지 불필요한 싸움을 피하기 위함이라거나 이 셋의 방문을 파비안에서 미리 알지 못하게 해야 한다거나, 단순히 그런 이유 뿐만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그제야 든다.
"이곳의 사람들이 내 외견을 반겨하지 않으리라는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휘트린에서 이미 보셨지 않습니까. 이곳의 사람들이 왕세자 저하를 반겨할 이유는 없습니다."
말을 돌리는 법을 모르는 칼리안의 충성스런 기사가 가감없이 답했다.
"둘째가 굳이 나에게 이 일을 맡긴 이유를 이제야 제대로 알겠구나."
"다른 이유가 더 있었습니까."
"나라면 누군가에게 독을 건네받아도 탈이 나지 않을 테니."
뿐만 아니었다.
시오나로 하여금 '사실상 지그프리드령까지 직접 따라나설 필요는 없던' 드미레아의 흉내를 내어 가며 동행하게 한 이유도 제대로 알게 되었다.
소드마스터 중에서 얼굴이 잘 알려지지도 않았을 뿐더러 엘프이기까지 한 시오나 힐보다는 지그프리드의 소공작이 지닌 영향력이 훨씬 클 테니까. 지그프리드의 작은 코끼리가 함께 있는 곳에서 왕세자를 해칠 생각을 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에 하나 독이 건네진다 하더라도, 란델이라면 무사할 테니까.
휘트린과 같지 않겠나. 파비안 역시 자신들의 영지에 홀로 찾아온 '플란츠 룬 카이리스'를 환영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저 스스로가 얼마나 미움을 받고 사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플란츠의 안배에, 키리에가 한참 뒤에 대답을 했다.
"언제든 급한 일이 생기면 부르십시오. 저도 힐 경도 목소리를 잘 듣습니다."
"그리하마."
"그럴 상황이 되지 않는다면 변장을 푸십시오."
"그래."
짧은 대답 끝에 침묵이 든다.
"항상 침착하구나. 막내가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닐 텐데 나를 신경쓰고 있으니."
문득 란델로부터 이런 말이 들려왔다.
저보다 한 살 많은 키리에를 향한 것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키리에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지금 들려온 말에 대해 어떤 대답을 할지를 고민하는데 이제껏 둘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하지."
시오나였다.
"정신 안 차리면 당장 죽는 곳에서 동생까지 지켜가며 살아온 애다."
"그러했더냐."
"그래. 그러니 제 주군이 잠깐 사라졌다 해서 당장의 앞가림도 못할 사람이 아니다."
꼭 제가 칭찬을 받기라도 했다는 듯한 얼굴의 시오나가 말했다. 손 하나를 안 보탰는데 이렇게나 잘 자란 '죽은 친구의 아들'을 진심으로 뿌듯하게 바라보면서.
"1왕자 당신도 다르지 않을 것 같은데. 아니. 아니군. 굶지 않을 곳에서 나고 자랐으니 그건 다르겠군. 그래도 몸이 더 편한 것을 빼면 다를 바 없지 않나."
란델이 고개를 돌렸다.
그 얼굴과 참 안맞는 말투를 하고 있는, 늘 과묵하고 정중하던 소공작의 얼굴을 쳐다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말이 이 자에게 큰 실례가 되겠구나. 나는 그리 살아온 적 없는 사람이니."
플란츠가 이 말을 들었다면 제 귀를 의심했을 거다. 칼리안이라 해서 다르겠나. 또 '실례하겠습니다' 해 가며 그 고운 손으로 양쪽 귀를 툭툭툭 두드렸을 것이 분명하다.
다만 키리에는 그러지 않았다. 란델이 참 많이 달라진 것에 놀라거나 놀려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런 말을 이제야 하게 된 것에 애석해하며 안타까움을 느끼지도 않았다. 말없이 이리스의 안장 위에 손을 올리기만 했다.
대신 키리에를 가운데 두고 란델의 건너편에 있던 시오나가 다시 대답했다.
"그럼 앞으로는 실례되지 않게 살면 되겠군."
"간단한 일이라 여기는 것이더냐."
"실례인 걸 알았으면 실례되지 않을 방법도 안다는 말 아닌가. 알았으면 알게 된 대로 마음 하나만 바꿔 살면 되는데 그보다 더 간단한 일이 어디 있나."
그보다 더 간단한 일이 없나.
생각해보던 란델이 연두색의 눈을 들었다.
그 눈보다 더 푸른 것들이 온통 피어나고 바람이 불어들고 아직 가야 할 길은 멀고도 먼 앞을 고요하게 바라보다가.
"그래. 그러하겠구나."
대답을 했다.
* * *
우리 아빠가 무서운 사람인 건 알고 있었다.
우리 아빠가 어마어마하게 무서운 사람인 건 이제 알았다.
"궁금한 건 나한테 묻거라. 내 제자 그만 괴롭히고."
쟤네 아빠가 대단한 사람인 건 알고 있었다.
쟤네 아빠가 어마어마하게 대단한 사람인 건 이제 알았다.
"그놈들이 하피를 멋대로 이용하고 있다는 말이 맞냐?"
"지금 내 제자를 못 믿겠다는 소리인가?"
"확인하는 것 아냐?"
"의심스럽다는 뜻이 아닌가?"
대사막의 미치광이라 불린다던 황금빛의 드래곤과, 그 드래곤이 아끼던 하피를 빼앗아 없앴다는 이의 후손이기도 한 어마어마한 대마법사가 평화로운 대담을 시작했다.
- 쏴아아아!
새하얀 불꽃으로 환히 빛나는 거대한 공동의 밖에서 어마어마한 빗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괜찮아? 무서우면 쟤들 안 보이는 데로 데려다 줄까?"
어차피 오아시스도 있고 하니 몇 시간 쯤 비가 내린다 해서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테니까 잠깐 있다 같이 가겠다며 눌러앉은 해룡이 안부를 묻는다.
"비맞는 것 싫어."
"아, 맞아. 싫어한댔어."
그 해룡은 건망증이 심하다.
망각하는 법은 모르지만 건망증은 심한 어린 해룡과, 그 어린 해룡보다 나이도 많고 덩치도 크면서 해룡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듣는 듯한 대사막의 미치광이 용과, 그 미치광이 용과 이미 한 번쯤 대거리를 해 본 듯한 인간 대마법사를 한 번씩 둘러보던 사람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칼리안."
그렇게 목줄을 죄여놔도 어딘가로 사라지기를 밥먹듯이 해대는 놈을 불렀다.
"네."
"자."
"지금 잠이 오겠습니까."
"오겠는데. 이미 꿈같아서."
이미 꿈 속에 든 것 같은 광경의 한가운데에 옹기종기 앉아있는데 못 잘 게 무어란 말인가.
"자."
"안 잡니다."
"왜."
왜냐니.
아무래도 이곳에 모인 이들 중에 이성적인 건 역시 나밖에 없나보다.
이런 생각에 긴 한숨을 내쉰 칼리안이 앞을 바라봤다. 시스파니안의 앞에서는 고개를 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했으면서 당장이라도 실레스티안의 머리를 후려칠 기세로 앉아있는 앨런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상해서요."
"뭐가."
"제 앞으로 나서는 사람들을 자꾸 보게 되는 일이."
"등에 업히려고 앨런 마나실을 스승으로 불러들인 것 아니었나."
"하긴. 그랬네요."
흘려보내듯 대답하고 웃은 칼리안의 눈에 앨런의 등이 보였다.
"아델리아······ 아이젠 디나한이 하피에 대해 조사를 해보기로 약속했다는데. 그건 몰랐는가?"
"들었어, 이번에."
앨런이 묻고 실레스티안이 대답했다.
"그럼 뭐가 더 궁금한가?"
"어린 놈아. 내가 궁금한 건."
묻다 말고 잠시 말을 멈춘 실레스티안이 앨런을 쳐다봤다. 정확히는 그 머리카락을 쳐다봤다.
"······ 그런 생김."
다시 입을 열다가 다시 멈춘다.
이어지질 않는다.
이번에는 앨런이 입을 다물었다.
"없었어."
대신하여 칼리안이 대답을 전했다.
실레스티안의 금빛 눈이 칼리안을 향했다.
"내가 만난 하피 중에는 스승님같은 머리 색의 하피는 없었어."
칼리안이 덧붙였다.
마나실이라는 성을 쓰던 누군가에 의해 죽었다 했던 그 마지막 하피. 그 하피의 죽음에 실레스티안이 분노했던 것은 단순히 하피들을 아끼기 위함이 아니었나보다고.
아마 '그 하피'를 아꼈기 때문인가보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럼. 하피들이 말을 못하고 겁을 내지 않고······ 그리 말했던가?"
실레스티안이 물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 우르르릉!
공동이 다시 울린다.
탁탁탁, 하고.
아르나이젤이 플란츠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렸다. 그러자 플란츠의 낯빛이 다시 돌아오는 것이 보인다. 아르나이젤이 실레스티안의 피어를 차단시킨 모양이다.
완두콩이 또 시들까 걱정하던 칼리안이 살짝 웃었다.
"텐실로 가겠다."
그런데 그 때.
"전부 다, 죽여버리겠다."
실레스티안의 말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