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504화 (505/527)

제88장. 과할수록 좋으니(4)

다 자란 밀밭에 바람이 불면 파도가 인다 했다.

뭍에서는 그만한 장관을 찾아보기 어렵다며 설명하는 얼굴이 퍽 들떠있어서, 꾸며내고 과장하여 말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 바람 부는 밀밭을 얼마나 홀려 보았으면 그런 말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밀밭에 이는 파도라는 것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여겼다. 처음 마주했던 광경처럼 세상의 모든 것을 뒤집어엎을 듯 거세게 몰아치는 파도일까, 아니면 휘트린으로 돌아올 때 마지막으로 보았듯 잔잔하고 평화로운 파도일까.

생각하고 결론짓는 일은 잘 하지만 무언가를 상상해보는 일에는 재주가 없던 탓에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때문에 그렇게나 신이 난 동생을 향해 한 번 더 물어볼까. 그런 고민을 하다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저리 들떠서는 그 붉은 눈 속에 밀밭의 바람을 이미 담아 둔 얼굴을 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당연히 잔잔하고 평화로운 파도겠구나. 이렇게 답을 내게 된 바람에 특별히 묻지 못했었다.

'세레이아 영지 쪽은 이제 곧 밀을 수확하겠네요. 휘트린보다 파종 시기가 이르다고 들었으니 말입니다.'

게다가 칼리안이 이런 말을 이어갔던 까닭에 더더욱 질문을 접어두었었다. 세레이아의 밀은 지금쯤 모두 영글었을 것이라 하니, 혹 궁금하다면 그곳에 갔을 때 직접 확인하고 답을 찾으면 되겠거니. 그렇게만 생각을 했었다.

그렇다면 파비안의 밀은 어떠할지.

문득 새로운 궁금증이 든다.

- ······ 다각!

그것이 봄 밀이든 가을 밀이든 상관 없이 어디서든 잘 자라게 해주는 다누의 힘 덕에, 카이리스의 각 영지에서는 저들에게 가장 필요한 시기에 맞춰 밀을 파종하고 수확해왔다. 그러니 파비안의 밀은 지금 시기에 얼마나 자라 있을지. 만약 모두 자랐다면 그 대단하다는 파도를 볼 수 있을지. 그런 사소한 것들이 잠시 궁금해졌다.

포도와 레몬이 잘 자라든, 보리나 호밀을 잘 키우든. 그 지역의 어떤 것이 가장 유명하든 상관없이 대부분의 영지에서 조금씩이나마 길러내는 것이 바로 밀이지 않나. 플란츠의 영지 세레이아가 민물 진주로 유명한 것과 별개로 영지 외부로부터의 밀 수급이 어려울 때를 대비한 어느만큼의 밀밭을 지닌 것처럼 말이다.

- 다각, 다각!

그러니 파비안에서도 분명 작게나마 밀 농사를 지을 터였다.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아 아직은 알지 못했으나 직접 가게 된다면 확인을 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곳의 밀이 파도를 불러 일으킬 만큼 자랐을지, 아니면 서로 그리 멀지 않은 휘트린과 마찬가지로 아직은 자랄 날이 더 많을지. 지극히도 사소한 궁금증에 대해서 말이다.

- 다각, 다각······ 다그닥, 다그닥!

- 다그닥, 다그닥!

말 위에 올라 유난스레 떠오르는 상념으로 머릿속을 채워넣고 있으려니 잰 걸음을 옮기던 말들의 발굽 소리가 점차 빨라졌음이 느껴진다.

휘트린의 외성을 벗어나 이동마법진으로 향하는 너른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리라.

'걱정하는 마음이 지나쳐 네 방도 혼돈하는 것이더냐.'

'제 방이 어디인지 몰라서 형님 뵈러 온 것 아닙니다.'

'허면. 무슨 일로.'

'마법사······ 앨런 마나실 후작이 대사막으로 갈 겁니다.'

'그 마법사의 기운이 다시 스미더라만.'

'조금 전 지하 감옥에서 휘트린을 만나는 동안 잠시 일이 있었습니다.'

'이곳을 향한 화는 아니라 하니 다행이라 해야겠구나.'

이동 마법진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특별히 해야 할 일도 없었다. 그저 입을 다물고 최대한 속도를 내어 달리기만 하면 되었으니.

때문에 이렇게, 칼리안의 기사와 정혼자를 앞 뒤로 두고 달리는 모양새를 취하고서 조금 전에 오간 같은 건물 거주자 사이의 대화를 계속 떠올렸다.

'그것을 알려주고자 굳이 왔더냐. 그 엘프를 만나러 지하감옥에 다녀온 일을 알려주려고.'

'아닙니다. 갚으실 일 생겼다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내가.'

'네. 형님께서.'

'누구에게.'

'칼리안 말고 또 있습니까.'

'혹 모를 일이지.'

'충분히 더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하더냐.'

'그렇습니다.'

갚으라 했던 말에 무슨 표정을 지었던가.

갚아야 할 사람이 더 없다는 말에는 또 어떤 얼굴을 했던가.

그것을 잠시 기억해내려 하였으나 생각나는 것 없이 그저 무상하기만 하여서.

"부군단장님, 안녕하십니까."

"부군단장님 또 오셨습니까?"

어느새 이동 마법진에 도착한 것을 모르고 가만히 있다 이런 인사들을 받게 되었다.

왕족을 향한 격식이니 예의니 하는 것들을 다 잊었는지, 얼굴 한가득 반가움만 띄워올리고 있는 마법사들이 눈에 들어온다.

본디 이곳에서 일을 하던 마법사들이 아니라 왕궁에서 휘트린까지 함께 따라온 발칸의 마법사들이었다. 제온과의 전투 이후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이곳에까지 경계 인원을 두었다 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고개를 끄덕여 그들의 인사를 받은 뒤 곁을 쳐다봤다. 그러자 이제껏 마찬가지로 아무 소리 없이 말을 달려 온 칼리안의 기사 키리에가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들 중 한 명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마법진을 사용하러 왔습니다."

"네, 베른 경.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어느 곳으로 가실 겁니까?"

무료한 경계근무 중 만나게 된 손님을 반가워하는 것인지, 혹은 지금 찾아온 세 명을 반기는 것인지 모를 마법사의 얼굴에 웃음이 다시 깃든다. 말 위에 앉은 채 그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사이 키리에의 대답이 들려왔다.

"지그프리드령으로 다시 가고자 합니다."

"지그프리드령 말씀이십니까?"

"네. 그렇······."

"아니다."

그 말을 잘랐다.

키리에와 드미레아, 그리고 그곳에 있던 여러 마법사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와 닿았다. 그것을 다시 무심히 넘기며 입을 열었다.

"지그프리드령으로 가지 않는다."

"지그프리드령이 아닙니까? 그럼 어디로 가십니까?"

'이번에 갚아내면. 내가 더는 막내에게 갚을 것이 없겠느냐.'

'아마도, 없을 겁니다.'

'그러하더냐.'

'이후로는 갚는 대신 단지 도와주시면 됩니다.'

'······ 그래.'

'해주실 겁니까. 시간 없습니다.'

'얘기하거라. 무엇을 어떻게 갚으라는 것인지.'

'받으십시오. 자주 보셨던 물건일 겁니다.'

'변장용품이 아니더냐.'

'맞습니다.'

'해서. 누구의 모습을 취하라는 것이더냐.'

"······ 파비안. '형님'의 영지에 가려고 하는데."

'저입니다.'

'······ 내가, 네 모습으로.'

'네. 그렇습니다.'

"파비안 영지 말씀이십니까, 부군단장님?"

"그래."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런데 부군단장님, 무슨 안좋은 일 있으십니까?"

"신경쓰지 않아도,"

"시간이 촉박합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저하."

앞에 선 마법사에게 전하던 대답이 중간에 막혀들었다. 키리에였다.

제 궁금증 때문에 시간을 지체했음을 안 마법사가 겸연쩍게 웃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이동 마법진이 있는 쪽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바로 모실 테니 이쪽으로 오십시오."

플란츠, 아니.

'플란츠의 모습으로 변장한 란델'이 고개를 끄덕인 뒤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마법사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여러 번을 겪어 보았던 이동 마법진이다. 때문에 마법진의 위에 올라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야가 밝아지는 것도, 그 시야가 심히 흔들리는 것도, 잠시 뒤 이전과 조금 달라진 내음이 드는 것도 이미 익숙했다.

그러니 다른 모든 것들은 괜찮았다.

'싫으시다면.'

'싫은 것은 많이 참아 보았으니 감내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겠다만. 그보다는······ 짜증이 많이 나겠구나.'

'저라고 다르겠습니까.'

'다행한 일이구나. 같다 하니.'

'많이, 다행한 일입니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밝은 에메랄드 빛의 짜증스러운 머리카락만 뺀다면.

'네가 휘트린에서 사라진 것을 숨기려 나를 대신 세워두는 것이더냐.'

'비슷합니다만 형님께서 속여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니라 파비안입니다. 파비안에서 저인 척 흉내를 내며 해주실 일이 있습니다.'

'왜 하필 나에게 그 역할을 맡기는 것이냐.'

'저를 따라할 수 있으면서 방 안에 들어가 며칠동안 나오지 않아도 의심받지 않을 사람이 형님 뿐입니다. 만약 파비안에서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음을 들킨다 해도 문제되지 않을 사람 역시 형님 뿐입니다. 말씀드렸습니다만 저 역시 좋아서 부탁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플란츠가 칼리안을 구해오고 휘트린의 일을 적당히 정리한 뒤 파비안으로 찾아올 때까지 이런 모습을 한 채로 있어야 되겠지만, 그래도 일단은 참아보기로 했다.

- ······ 사아아아!

파도.

잔잔하고 평화로운.

너른 밀밭에 금빛의 파도가 불어드는 것을 보게 되었으니까.

바다를 떠나오고 나서도 바람이 움직이는 것을 다시금 눈에 담게 되었으니, 눈앞을 어지르는 낯선 빛의 머리카락 쯤은 잠시 참아줄 수 있지 않겠나.

"무슨 안좋은 일이 있었는지, 대원들이 늘 묻는 말입니다."

그 바람소리 사이로 키리에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랬던가."

"네. 그랬습니다. 저하의 얼굴이 항상 무표정한 것을 걱정하여 그렇습니다. 그러니 만약 앞으로 또 이런 일을 하게 되시다 발칸의 누군가가 같은 것을 묻는다면, 다른 말을 붙일 필요 없이 '없었어' 라고 대답하시면 됩니다. 그 역시 늘 그렇게 대답하셨던 겁니다."

공간 이동을 하기 전, 마법사의 질문에 전하던 대답을 막은 이유를 설명하고 있었다.

플란츠가 칼리안이나 키리에를 대하는 모습은 최근에 많이 보았으나 발칸을 대하는 모습까지는 보지 못한 까닭에 곧바로 들킬 뻔했다. 그것을 그제야 알고 고개를 돌리니, 서로 다른 빛의 눈으로 연두색의 눈을 직시하던 키리에가 말을 이었다.

"란델 왕자님."

이 말을 들은 드미레아의 고개가 휙 돌아왔다.

플란츠의 말이 다시 떠오른다.

'소공작은 저와 형님을 특별히 오래도록 마주한 적이 없어 눈치채지 못하겠으나 베른 경은 형님이 변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바로 눈치 챌 겁니다. 다만 휘트린 내에서는 듣는 귀가 어디에 있을지 알 수 없으니 미리 알리지 마십시오. 휘트린을 벗어나면, 소공작과 베른 경에게만은 사실을 알리셔도 괜찮습니다.'

플란츠의 예상이 제대로 맞아떨어진다.

"······ 아. 그럼."

한동안 '플란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상황을 파악하던 드미레아의 입이 열렸다.

"나도 이제 말해도 되는 건가. 입 열면 들킬 테니까 여기 올 때까지는 무조건 다물고 있으라 하던데."

그러더니 이런 말을 했다.

드미레아의 얼굴을 하고 드미레아의 옷을 입고, 드미레아의 갑옷을 걸친 뒤 드미레아의 검을 차고서. 드미레아가 절대로 하지 않을 말투를 입에 올리면서.

그 말을 듣자마자 알게 되었다. 이제껏 저 거대한 검은 말을 타고 뒤따라 온 이가 지그프리드의 소공작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하나가 더 있습니다만. 도착하면 곧 알게 되실 겁니다.'

사라진 칼리안을 찾으려 대사막으로 간 앨런 마나실. 그런 앨런을 막기 위해 휘트린을 떠나 지그프리드로 간 사람들.

······ 이라는 명목 하에, 라시드 브리센을 하루속히 잡아들이고자 파비안으로 먼저 오게 된 세 사람. 칼리안의 일로 다른 문제들이 더 지체되지 않도록 따로이 빠져나오게 된 세 사람.

키리에와 플란츠, 그리고 드미레아.

아니. 키리에와 란델, 그리고 또 한 명. 휘트린이 전해주었던 방울 대신 휘트린에게서 빼앗은 변장용 목걸이를 제 목에 걸고 따라온 사람.

바로 시오나 힐이었다.

그렇게 하여 시오나까지 포함한 세 명.

그 세 사람이 잠시 입을 다물고 서로의 처지를 살폈다.

- 사아아아······.

실로 잔잔하고 평화로운 황금빛 바람 사이에서.

* * *

- 오셨습니까.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

입을 열어 말하지 않는 것이 입을 열기 어려울 만큼 지쳤기 때문인지. 아니면 제 곁에 서있던 긴 금발의 남자로부터 스승과 형제를 가리고 서기 위해 몸을 움직여야 했기 때문인지.

그것을 알 수는 없었으나 목소리는 다시 들렸다. 이유야 어찌됐건 심장에 묶인 맹세의 인이 풀리는 소리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니, 그랬으면 된 일이다.

- 형님 동행인이 화려한데요.

- 어차피 싸울 거면 내가 가진 힘이 과한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데.

싸울 때는 힘을 아낄 필요가 없다.

내 힘은 과할수록 좋다.

그래야 내가 다치지 않는다. 내가 안 다쳐야 뒷사람에게 엄한 칼이 닿지 않는다. 다만.

- 하긴. 맞습니다. 무엇이 되었든 제 손으로 다스려지는 것이라면 과할수록 좋으니.

그래.

저 놈의 말마따나, 다스려질 수 있는 것에 한해 그렇다.

- 그럼 형님 이제 마법도 배우시겠네요.

- 안 배워.

- 마법을 배우시면 형님도 엄청 강해지실 수 있을 텐데요. 왜 안 배우십니까.

- 생각이 줄어들면. 그때.

이런 대답에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 좋네요. 그런 대답.

그것을 듣고 나서야 눈치를 챘다.

칼리안이 정말로 마법을 배우길 바라서 물은 것이 아니라, 혹시라도 더 강해지겠다며 마법까지 배우려 들까봐 떠 본 말이라는 것을.

- 대사막의 용을 앞에 두고서 나를 또 가르치려 들 생각이 드시는지.

- 듭니다. 대륙에 하나 뿐인 대마법사에 어디를 가든 비를 몰고 다니는 해룡까지 데려오셨는데 뭐가 무섭다고 때를 가립니까. 그나저나 그새 아르나이젤까지 찾아다 함께 오셨네요. 역시 형님은 참 유능하십니다.

남쪽 대사막 어딘가의 작은 오아시스.

그 곁에 난 나즈막한 모래무덤.

오아시스를 둘러싼 이곳저곳에 잔뜩 늘어선 수많은 모래무덤과 참 많이 비슷하나 그 크기만은 현저히 작았던 낮은 언덕. 그곳의 지하에 실레스티안의 둥지가 있었다.

휘트린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아르센과 에우리아로부터 사실 확인을 한 앨런은 곧장 움직였다. 물론,

'시스파니안께서 오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다녀오지요.'

'같이 가.'

혼자 온 것은 아니었다.

'고집 부리실 일이 아닙니다, 저하.'

'마법사. 지금 고집을 부리는 건 내가 아닌데. 실레스티안이 당신을 많이 싫어할 거라고 아델리아가 그랬어. 당신도 알 것 아냐.'

'그것을 제가 모르겠습니까. 그래도 별 탈은 없을 터이니,'

'내가. 같이. 간다고. 내가 있으면 실레스티안이 마법사 당신한테 크게 화를 못 낼 텐데, 왜.'

'위험하여 말리는 것이 아닙니까. 싸움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저하께서는 이곳에 계시지요.'

'싫어.'

휘트린에서 혼자 빠져나온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제 위대한 핏줄을 내세우며 반드시 같이 가겠다며 절대 물러서지 않는 왕세자'를 떼어놓지 못하고 함께 떠나온 길이었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 동안 대사막 이곳 저곳을 워프해다니다 휘트린이 설명한 곳을 비로소 찾아냈다.

실레스티안의 둥지라 여겨지는 곳을 발견하기가 무섭게 앨런의 손 끝에 마력이 모여들었다. 그 힘이 얼마나 막대했을지는 함께 따라온 플란츠의 얼굴이 유난히 질려있는 것을 보면 알 일이다.

어찌됐건 그렇게 모여든 힘이 앨런의 손을 떠나기 직전,

'그걸로는 실레스티안 둥지에 손도 못 대.'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 쏴아아아······!

그리고, 비가 내렸다.

'지금은 시스파니안이 여기까지 못 와. 세렌티를 두고 이렇게까지 멀리 오면 안 돼. 실레스티안이 화가 나도 안 돼. 실레스티안이 화를 내면 시스파니안이 막아야 해. 그러면 세렌티가 불안해 할 거야. 실레스티안이 그 인간에게 나쁜 일을 하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까 그냥 돌아가. 응? 응?'

참 오랜만에 반가운 비를 보게 되었다.

대사막의 누구인들 그렇게나 더운 열기를 가르며 쏟아지는 비를 반겨하지 않을 수가 있겠냐만은, 앨런과 플란츠에게 있어 그보다 더 반가운 비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제 손으로 데려가겠습니다.'

그렇게나 반가운 아르나이젤에게 깊숙이 고개를 숙여 예를 보인 앨런은 이렇게 말했다.

'조용히 데리고 나와 돌아갈 터이니, 열어주시지요.'

그것이 가장 좋은 '중재'임을 배려한 아르나이젤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렇게 함께 나서게 되었다.

- 아르나이젤은 어떻게 데려오신 겁니까?

어두운 동굴을 온통 밝히는 앨런의 새하얀 불꽃을 일별한 칼리안이 물었다. 그 불꽃이 혹시라도 실레스티안에게 닿는다면 곧바로 막을 요량으로 따라들어선 아르나이젤을 잠시 바라보면서.

- 어쩌다보니. 어쩌다가.

- 혼자 오기 무서웠으면 그냥 하실 일 하면서 기다리셔도 잘 돌아갔을 텐데요. 심심하셨으면 란델 형님과도 많이 친해지셨으니 함께 식사를 하든 체스를 두시든 하면서······.

- 짖지.

- 반가워서요. 그새 또 자라셨기에.

- ······ 몸은.

- 졸립니다. 배도 고프고.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렸다.

그리고 칼리안에게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실레스티안의 금색 머리꼭지를 노려봤다.

내 동생이 배고픈 것보다 다른 걸 먼저 말했다.

내 동생 쟤가 어떤 앤데, 애를 얼마나 못살게 굴었으면 쟤가 고기 말고 잠을 찾느냔 말이다. 그러니 내가 지금 화가 나겠나, 안 나겠나.

- 돌아가. 가서 자.

- 네.

짧게 답한 칼리안이 시선을 되돌렸다.

그리고 앞에 선 실레스티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물어볼 게 있으면 지금 물어봐."

갑작스레 찾아든 아르나이젤과 무언가 따로이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던 실레스티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런 실레스티안의 황금빛 눈을 바라보며,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사과, 먼저. 하고 나서."

이제 내가 더 세졌다.

그러니까 받을 것은 받아야겠다.

이런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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