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장. 과할수록 좋으니(1)
칼리안이 말하기를.
"나는 사람이 좋더라."
실레스티안이 답하기를.
"나는 싫더라."
실레스티안이 몸을 일으켰다.
칼리안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인사 안 하냐?"
"설명 안 하냐?"
그리고 동시에 화를 냈다.
* * *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조금 전, 아무런 기척도 없이 나타난 '앨런'이 곧바로 마력을 운용했다. 그러자 눈부신 빛이 터져나오며 '앨런'과 칼리안이 사라졌다. 함께 있던 다른 일행들은 물론이거니와 직전까지 칼리안을 태우고 있던 레이븐까지도 고스란히 다 남겨두고서.
"모두 무탈하셨습니까."
그 직후 또 한 명의 '앨런'이 나타났고, 그런 앨런을 본 뒤에야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마법사."
"헌데 칼리안 왕자님은 어디 계시는지요."
내 동생이 사라졌다는 것을.
"······ 사라졌는데."
내 동생이 또, 사라졌다는 것을.
동생 놈이 자신이 사라질 일이 없도록 하겠다던 말을 정말 지킬 것이라는 믿음은 버린지 오래다. 칼리안이 그 말을 어기지 않을 날이 계속 이어지리라는 예상이 되질 않았다. 누구보다 정확한 계산을 해 내는 좋은 머릿속에 내 동생이 제 의사와 상관없이 사라질 수밖에 없을 가지각색의 가능성들이 주르륵 나열되곤 했으니까.
"방금 전에. 마법사 당신이 데려갔잖아."
"데려가다니."
그러니 언제가 됐든, 참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내 아우님이 어딘가에 납치되어 사라질 일이 또 다시 오기는 하겠거니. 그러니 그런 일이 벌어져도 지난 번처럼 넋을 다 빼놓고 있지는 말아야 되겠거니. 예상도 하고 나름대로 각오도 했다.
했는데.
"또 사라졌다는 겁니까."
앨런의 인내가 폭발할 줄은 몰랐다. 한기조차 느끼지 못할 공포감을, 그런 것을 담아 둔 피어를 말 그대로 폭발시키듯 터뜨린 8서클 대마법사의 앞에 서게 될 줄은 몰랐다.
그나마 최선을 다해 갈무리하고 나서도 흘러넘친 피어가 그것이라고. 곧 평정을 찾을 테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앨런은 그리 말하지 않았다.
"······ 일단 돌아가시지요."
처음 나타났던 '앨런'이 진짜인지, 두 번째로 나타난 '앨런'이 진짜인지, 그것을 확신하지 못해 시나스타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가던 플란츠. 처음 나타났던 앨런의 목소리와 발소리가 평소와 조금 다른 듯하니 잠시만 기다려달라 말하려 했으나 한 발 늦게 된 키리에. 칼리안이 아니라 지금 당장 제 심장이 사라져도 한결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란델. 그리고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모르는 채 잠들어 있는 엘프 자객까지.
앨런은 그 모두의 반응을 신경쓰지도 않았다.
자신을 의심해 칼을 뽑든, 믿고 따라오겠다 하든, 상황을 관조하든. 내가 진짜 앨런 마나실이니 안심하라는 말 같은 것은 덧붙이지도 않았다.
- 따악!
그 무엇으로도 자신을 증명할 필요 없을 앨런 마나실은 그냥 손가락만 튕겼다.
그렇게 일단 휘트린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막을 길 없이 사라져버린 칼리안을 제외하고서.
- ······ 다각!
레이븐이 다리를 움직였다.
짐승은 사람보다 예민하다. 본능적으로 기사의 살기와 마법사의 피어를 느끼고 놀라며 몸을 떨 줄 안다.
그러니 이곳에 있던 말들이 제대로 된 훈련을 받은 놈들 뿐인 것에 깊은 안도감이 든다. 아니었다면 모두가 한 번씩 낙마를 할 뻔했다. 저 대단한 레이븐조차 더는 참지 못하고 온 몸을 굳힌 채 한 발을 뒤로 물렸는데 다른 말들은 오죽할까.
뿐만인가.
말 안장의 손잡이를 콱 붙든 란델의 손에 핏줄이 섰다거나, 칼리안과 대련할 일이 가장 많았던 만큼 그렇게나 혹독한 살기에도 제대로 단련되어 있던 키리에가 힘을 주어 숨을 쉬고 있다거나, 어지간해선 멈추는 법이 없던 플란츠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지게 된 것도, 전부 다. 당연한 일이다. 유약하다 할 일이 아니었다.
"······ 군단장님."
그러니 이 와중에 앨런에게 다가가 말을 건다는 것.
그것만은 참 대단하다 해야 할 터였다.
두 번 다시 잃어버리고 싶지 않을 제 아들을 손 쓸 새도 없이, '당신이 데려갔다'는 소리로 보아 심지어 자신의 모습으로 변장한 놈에게 보란듯이 빼앗겨버린, 그런 상황에 놓인 대륙 최강의 대마법사가 채 다스리지 못하고 흘려내는 피어를 뚫고 입을 연다는 건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테니까.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게다가 이런 훈계까지 더해진다.
그러니 정말이지 대단하기는 한 것이 맞다.
같은 의미의 다른 말로 바꾼다면 '저 파란 머리 미친놈이 지금 죽고 싶어 환장했나보다' 정도가 되겠지만.
"베른 경. 군단장님 왜 저러시나?"
아르센이 키리에를 쳐다보며 물었다. 플란츠에게 그것을 물어 보아야 꾹꾹 압축하고 뚝뚝 잘라낸 말만 돌아올 것이 뻔했으니 말이다.
"마나실 경으로 위장한 이가 찾아와 칼리안 왕자님을 데리고 함께 사라졌습니다."
"언제?"
"방금 전입니다."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키리에로부터 상황을 전해 들은 아르센이 제 입술을 깨물었다 뗐다. 그리고 두 눈을 힘주어 뜨고 긴 숨을 들이쉰 뒤 앨런 쪽으로 다시 한 발을 더 다가갔다.
"왕자님 납치한 건 저희 아닙니다, 군단장님. 갈무리 해주십시오."
말을 더 건넸다.
그 많은 날 동안 대사막의 전사들 앞에 밥먹듯이 홀로 서 본 사람 답게, 플란츠의 인내심을 매일같이 건드려 본 사람 답게. 칼리안의 앞에서 동상 제작을 입에 담고 앨런의 식사 자리 위에 누운 채로 올라 본 사람 답게.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두 주먹을 콱 말아 쥔 채로.
범인이 누구였을지를 생각하느라 다시 흘러나오던 피어를 깨달은 앨런이 고개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숨막히던 공기가 달라진 것을 느낀 다른 이들이 긴 숨을 쉬었다. 그러자 안도한 얼굴이 된 아르센이 또 한 번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어찌됐건 군단장님 모습으로는 마법 변장이 안 된다는 말만 믿고 아무 의심도 없이 모르는 사람 따라가신 건 왕자님 아닙니까? 그러니,"
"휘트린을 떠난 이래로 쉬지 못하셨습니다."
"많은 것을 따져 보기 어려울 상태였겠지."
"못 잤는데. 아우님."
세 사람의 반박이 튀어나왔다.
그새 좀 늘어난 것 같은 칼리안의 편들을 보며 씩 웃은 아르센이 앨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보십시오. 왕자님 상황이 좋지 않아 따져보지 못한 일이라지 않습니까. 그러니 군단장님 탓 그만 하시고 숨 좀 돌리십시오. 왕자님 괜찮으실 겁니다."
"······ 신경을 쓰게 했군. 알겠네."
칼리안의 탓이 아니라는 얘기를 제멋대로 해석한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진정을 하기는 한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러자 아르센이 식은땀에 푹 절은 손을 제 로브에 탁탁 닦아내며 대꾸했다.
"신경이 아니라 수명을 쓸 뻔했습니다."
"그래. 미안하네."
"미안하시면 대원들 특별수당 챙겨주실 때 제 것도 주십시오."
"자네 지금 수당 얘기가 나오나?"
"지금 그런 얘기라도 해야 왕자님 걱정을 덜 하실 것 아닙니까?"
잠시 말을 멈춘 아르센이 팔을 뻗었다. 그리고 뒤에 서 있던 발칸 대원들을 한 번씩 쳐다본 뒤 방금 실려 온 엘프 자객을 가리켜 보였다.
창백한 얼굴들을 주억거린 대원들이 새로운 죄인을 끌고 가는 사이, 아르센의 말이 이어졌다.
"세상에 진짜 쓸데 없는 걱정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세이렌 경이 어디서 술에 취해 잠들지는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고 또 하나는 왕자님이 어디 가서 지고 오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입니다. 그러니 왕자님 말고 제 급여나 걱정해주십사······."
"실레스티안."
누군가 아르센의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휘트린이 능력을 숨겨 두었다가 칼리안을 끌고 도망간다거나, 제온에서 새로운 수면향을 만들어다 칼리안을 잠재워 납치한다거나, 다누가 또 한 번 마음을 바꿔 먹고 칼리안에게 손을 뻗는다거나, 눈을 뜬 세렌티가 그 동안 잘 자란 내 패를 이제 가져다 써야 되겠다며 칼리안을 데려간다거나. 혹은 세크리티아의 국왕이 내 동생 빌려주는 일은 이제 그만 하기로 했다며 그동안 충분히 덕을 봤을 테니 이제 도로 내놔라 요구한다거나.
뭐 그런 상황들을 떠올려 본 적 많았던 사람.
당연히 플란츠였다.
"실레스티안이 데려갔어. 내 아우님."
이 말에 아르센이 숨을 집어삼켰고 앨런의 눈이 다시금 날카롭게 변했다. 지나치게 현실성 없는 강함을 지닌 이름에 오히려 침착함을 유지 중인 키리에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아십니까."
"얘기가······ 전해졌었는데. 끊겼어."
이렇게 얘기한 플란츠가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칼리안이 사라진 직후 딱 한 번 빛을 냈던 통신용 팔찌를 쳐다봤다.
'실레스티안인 것 같습니다. 왜 데려왔는지는 몰라도 얘기 잘 하고 돌아갈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
들려오던 말이 중간에 끊어진 뒤 더 이상 연결되지 않는 그 팔찌를 내려다봤다.
휘트린부터 세렌티까지, 심지어 체이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들이 칼리안을 향해 손을 뻗어 오는 상황을 생각해 본 적 있었으나 그 이름만 몇 번 들어봤을 뿐인 대사막의 황금빛 용에 대해서는 떠올려 본 적 없던 플란츠가 고개를 들었다.
"헤르츠 경."
앨런이 입을 열었다.
"······ 네. 군단장님."
아르센이 답했다.
어디 가서 지고 올 일 없을 칼리안이다.
그것을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안다. 다만 그것이 인간을 마주했을 때에나 통할 말이라는 것도 안다. 인간이 아닌 이를 상대로는,
"실레스티안의 둥지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있는가."
카비니언 실레스티안.
미치광이 실레스티안.
아르나이젤보다는 조금 더 나이가 많고 시스파니안보다는 현저히 어리다 했던, 성체가 되기 직전의 '어린 용'. 한 마디로 한창 혈기왕성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황금빛의 드래곤을 상대로는 절대 통하지 않을 말임을 안다.
"······ 대사막의 그 누구도 둥지의 위치를 모를 겁니다. 힐 경을 불러 확인해보겠습니다."
"그리 해 주게."
아르센과 앨런의 대화를 듣던 플란츠가 오래도록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잿빛으로 잠겨든 앨런의 얼굴을 쳐다보다 훌쩍, 안장 위에서 몸을 날렸다. 그 뒤 영주성을 향해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 스륵!
플란츠가 향하는 방향을 확인한 앨런이 바로 곁으로 워프해왔다. 그리고 플란츠와 나란히 걸으며 입을 열었다.
"함께 가시지요."
"어디 가는 줄 알고."
"휘트린과 제온이, 제온과 실레스티안이 연관되었단 얘기는 저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때문에 휘트린을 만나시려는 것 아닙니까. 실레스티안을 만나는 법을 알고 있을까 하여."
"맞아."
"같이 가겠습니다."
잠시 고개를 돌려 서리 가득한 은회색 눈을 올려다 본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죽여버리면 안 돼."
"화를 삭여 두었습니다."
뚜벅, 뚜벅.
누구를 탓하면 될 지를 제대로 알게 되어 당장의 화를 삭이게 된 앨런이 플란츠보다 앞서 발을 옮겼다. 대마법사의 길고 붉은 로브자락이 걸음 끝에 부풀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저하를 말려드리러 가는 겁니다. 대사막의 용이 어디에 있는지를 휘트린이 모른다 하여도, 저하께서 휘트린을 죽이지 않도록."
어두운 복도 속에 목소리가 깃든다.
이미 진작부터 그 복도를 향하고 있던, 왕세자의 첨예한 살기를 덮어두듯이.
* * *
크다.
엄청 크다.
아직 성체가 된 것도 아니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크다. 아르나이젤은 물론이거니와 시스파니안의 눈도 저 정도로 거대하지는 않았다.
석양을 길어다 메어 둔 듯한 날개도, 바다 위의 윤슬을 모아다 엮어 둔 듯한 비늘들도, 북쪽 대사막의 얼음을 베어다 벼려 둔 듯한 발톱들도, 남쪽 대사막의 열기를 담아다 세공해 둔 듯한 눈동자도. 전부 다.
이를 수 없이 아름답다.
비할 바 없이 거대하다.
그리고 그렇게나 대단하게 비범한 만큼,
- 콰악!
버티기 힘든 피어를 제 숨처럼 내뱉는다.
숨구멍이 말라비틀어지다 바스라지는 듯한 감각이 칼리안을 짓눌렀다. 그것을 버티려는 이의 모난 곳 하나 없이 잘 다듬어진 둥근 손톱이 새하얀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 미친놈이 돌은 놈을 데려왔으면 설명을 해야지. 겁부터 주면 쓰나."
어딘지도 모를 어둠 속에 불려온 뒤로 단 한 발자국도 떼지 않은 칼리안이 제 턱을 조금 더 치켜올렸다. 세상이 저물어도 절대 사그라들지 않을 듯한 붉은 눈으로 실레스티안을 노려봤다.
그러자 더운 바람이 훅 불어들었다.
비슷한 일을 겪어본 적 있다. 풀잎에 든 바람같은 웃음을 시스파니안의 앞에서 마주했던 적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와 달랐다.
어쩌면 텐실의 열풍이 그러하지 않을까, 바람에 닿는 모든 곳이 바싹 말라 흩어질 듯한 느낌에 깊은 갈증이 절로 드는 메마름이 느껴진다. 그런 웃음이 칼리안을 향했다.
"확인하고자 하느니라."
그러더니 처음 오간 막말은 싹 까먹은 듯한 실레스티안의 진중한 음성이 귓가에 들려왔다.
아마도 어딘가의 동굴 속인가보다.
피어가 실린 목소리 끝에 우릉우릉 울림이 든다.
손톱 끝에 맺힌 핏방울이 도르륵 툭, 떨어져 내린다. 그것을 안 칼리안의 붉은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려냈다. 영영 붙들고 있을 것 같던 공포감이 어느새 씻은 듯이 사라지고 손바닥의 아픔이 느껴진 까닭이다.
"나는 시스파니안의 영토에 들지 못한다. 그 애를 대하는 것을 보니 내 청에 조용히 응하지는 않을 것 같아 네 원을 비췄느니라. 당장의 네가 가장 갈급히 찾던 이로 보여졌을 것이니라."
"그 애라니. 아델리아를 말하는 건가."
"아델리아? 그게 누구냐?"
어쩐지 말투가 달라진 듯 한데.
잠시 생각하던 칼리안이 무언가를 대신 떠올리며 말했다.
"아, 이름이 따로 있었지. 아이젠 디나한. 흰 머리 마법사."
"맞아. 아이젠. 그 애 얘기야······ 그 애를 말함이니라."
깜빡, 깜빡.
실레스티안을 올려다보던 칼리안이 큰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그렇게나 어두운 동굴 속에서도 어둠에 물들지 않고 제 빛을 온전히 보여주고 있는 신기한 눈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저 말투 어쩐지 익숙한데, 하고.
'왕제님. 외출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래. 고맙네, 키리에.'
'······ 네. 저녁에 석찬이 있다 들었습니다. 참석 않고 외출할 생각이신 겁니까.'
'그럴 거야······ 아니. 그리 할 생각이네.'
'왕제님.'
'응. 말해보게. 들을 테니.'
'전하께서 왕제님께 말버릇을 고쳐봐라 하신 것은 욕설을 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말투로 바꾸라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 알고 있네.'
'아시면서 왜 굳이 고집을 부리십니까.'
'이렇게 안 하면 욕을 못 끊겠어서. 도저히 안 고쳐지는데 어쩌겠어.'
'그럼 저한테만이라도 본래 하던대로 말씀해주시면 안됩니까.'
'이상해?'
'이상합니다.'
'······ 응.'
그래.
딱 그 시기의 베른이 생각나는 말투. 그런 말투였다.
어른 용이 될 준비를 저런 식으로 하는 건가. 잠시 생각하던 칼리안이 짧은 숨을 내쉰 뒤 말했다.
"나한테 궁금한 게 있고, 아이젠 디나한과 얘기하는 것을 들어보니 얌전히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러하다."
대답과 함께 마력이 움직였다.
빛이 들고 옅은 금빛의 반짝임이 펼쳐졌다.
'설마 몰랐어?'
'전혀 몰랐어.'
'그걸 어떻게 몰라?'
'그걸 어떻게 알아?'
'실레스티안이잖아.'
'그 용이 나를 알아?'
그 반짝임을 타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전날, 지그프리드령의 한 식당에서 칼리안이 아델리아와 함께 나누었던 대화였다.
"그 애가 비로소 나를 찾기에 목소리를 들었다."
실레스티안의 말이 빛무리에 섞인 목소리를 뒤덮듯 전해졌다.
로젤리타에 들었던 왕족들의 목소리를 듣는다던 시스파니안과 비슷한 경우인가보다고. 아델리아와 실레스티안이 서로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델리아가 실레스티안을 떠올린다면 그 말을 듣는 모양이라고.
아마도 아델리아는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지만.
실레스티안의 설명을 적당히 알아들은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스승님으로 분해서 나를 찾아왔다고."
"다소 달라. 네게 비춰 보였다. 나는 직접 가지 못한다."
"······ 환각?"
"인간들은 그렇게도 말하지."
아델리아도 환각 마법을 썼었지, 참.
지그프리드령의 외성 밖에서 보았던 앨런이 실재하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실레스티안이 보낸 환각이었음을 안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와 뭔 소리든 안 믿겠냐.
대충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래서. 할 말이 뭐야. 확인하고 싶은 게 뭔데."
실레스티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웃음보다 강한, 메마른 바람이 다시 불어든다.
"하피를 보았느냐."
실레스티안이 질문했다.
칼리안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 속에 감춰진 분노를 느낀 까닭에.
"누군가 하피를 제대로 괴롭히고 있는 건 봤지, 내가."
때문에 칼리안은 이렇게 답했다.
"······ 어찌나 안쓰럽던지······."
이렇게도 덧붙이면서.
실로 안타깝다는 얼굴을 하고서.
- 화아악!
대사막의 용이 일으킨 메마른 바람에 노기가 깃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