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500화 (501/527)

제87장. 자고로 미모란(6)

칼리안의 표정을 본 아델리아가 더 크게 인상을 써 보였다.

"설마 몰랐어?"

"전혀 몰랐어."

"그걸 어떻게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실레스티안이잖아."

"그 용이 나를 알아?"

"알 리가 있나."

"알 리가 없지. 그러니까 나도 모르는 것 아냐."

걔도 나를 모르는데 내가 걔를 왜 알아야 하느냐는 기적적인 논리가 아델리아를 향했다.

당장 완두콩이 클린을 쓸 줄 아는지 모르는지조차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상황에, 마주앉은 저 옥수수수염이 언제 저렇게 자랐는지도 모르는 마당에. 아니, 애초에 지금 당장 내 뱃속에 들어가고 있는 사랑스런 생굴이 어느 나라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놈이었는지도 불분명한 판에.

대사막 황금 용이 무슨 재주를 부리는지 알 게 뭐람?

"굴이나 먹어."

굴이나 먹어야지.

계속 같은 말을 시키는 대마법사에게 화도 안 내고 이렇게나 일리있는 말로 차근차근 설명할 줄을 알게 됐다니, 나 진짜 착한 어른이구나 대견하다 해 가며 스스로를 칭찬한 칼리안이 제 손을 살짝 들어올렸다. 그러더니 그 우아한 손동작을 알아보고 재빨리 사일런트 막 안으로 들어온, 지그프리드령의 시트렌 시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식당의 주인에게 방금 먹은 생굴을 한 접시 더 가져오도록 주문했다.

"자네들 요리사의 솜씨가 좋아서인지, 아니면 동생을 어여삐 여겨주시는 마음이 실로 아리따우신 내 둘째 형님이자 이 나라의 밝은 미래이신 플란츠 왕세자 저하께서 흔쾌히 값을 치러주실 음식이라 그러는지. 오늘따라 이렇게 계속 손이 가는군."

그것이 여섯 번째 접시임을 잊지 않았을 주인을 향해 방긋방긋, 만에 하나라도 카이리스의 3왕자가 왕위에 오르면 생굴 값을 내느라 나라가 거덜나겠다는 비관적인 생각을 싹 까먹도록 만들어 줄 웃음을 얼굴 가득 띄워올린 채로.

거기에 더해 또 하나.

창 밖을 향해 다시 시선을 옮기는 플란츠의 목덜미가 뻣뻣하게 굳은 것처럼 보이는 이유에 대해서도 굳이 생각하지 않은 채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언제 어느때고 맹수로 돌변할 준비를 다 갖춰두고 돌아다니는 까만 고양이가 오늘 처음 만난 평민의 앞에서 고롱거리는 꼴을 못 봐주겠다 생각하는 것인지,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었을 낯선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여겨서인지, 한 접시 늘어난 생굴 값을 따져보느라 그러는지, 그도 아니면 조금 전 퍼져나가다 순식간에 사그라든 아델리아의 피어를 몸소 체험한 까닭인지.

알 게 뭐람.

굴이나 먹어야지.

"그 힘, 나도 쓸 줄 알아."

주문을 받은 주인이 사일런트 막 밖으로 다시 나가자마자 아델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알고 있었다.

세크리티아에 처음 나타났을 때 에우리아의 번개를 무효화시킨 적이 있다고, 그리 전해듣지 않았던가.

때문에 자신의 재주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던 칼리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른 인간인 아델리아도 쓰는 힘을 칼리안이 쓸 뿐인데, 특별할 것은 없지 않겠나.

"그래. 대단하네, 아델리아."

"나는 실레스티안에게 배운 거야."

아.

그건 몰랐는데.

"많이 심심했나봐. 용이 인간을 가르치고."

"앨런 마나실이 아무 말도 안 했어?"

"스승님은 너 잘 모르셔. 우리 스승님 다른 데 관심가질 만큼 한가하게 사신 분 아니거든. 게다가 스승님 나한테 마법 잘 안 가르쳐 주신다니까. 안 그래도 바쁜데 대사막 황금 용이 뭔 재주를 가졌는지를 어느 사이에 알려주시나."

"그럼 실레스티안이랑 연관이 없어? 정말로?"

"없어. 정말로. 대사막 전사에게 죽을 뻔하다 나도 모르게 깨우친 거야. 나이 들어서 깜빡깜빡하는 건 알겠는데, 아델리아. 굳이 말해주자면 난 같은 얘기 또 하는 것 싫어해."

그러고 보니 내가 스승님한테 남의 마법을 흔들어놓는 법을 익혔다는 얘기를 했던가, 안 했던가.

나이도 어리면서 깜빡깜빡하는 안 세심한 칼리안이 잠시 이런 고민을 했다.

그 사이 눈을 가늘게 뜨고 칼리안을 살피던 아델리아가 입을 열었다.

"새 형제들이 걱정할까봐 무던한 척 하는 건가? 꽤 대단한 사실을 알려준 건데 별 반응이 없네."

칼리안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일행들을 다 감싼 사일런트 막 안에 어느새 이중으로 생성해 둔, 아델리아와 칼리안만을 감싼 두 번째 사일런트 막을 보게 되었다.

느긋한 얼굴이 된 칼리안이 말했다.

"말이 이상한데. 새 형제라니."

"그날 내가 옮겨 두느라 다 죽어가던 라시드 브리센이 너에 대해 신기한 잠꼬대를 하더라고. 그래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흥미진진한 얘기를 몇 개 더 훔쳐 들었지."

"시간 많네."

"너. 신기한 일을 겪었나 보던데."

칼리안의 입가에 보기 좋은 미소가 걸렸다.

그 외에는 표정 하나 달라지지 않고서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를 냈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해, 아델리아."

"알아듣고 있잖아. 세크리티아에는 있지도 않은 버릇없는 왕제야."

칼리안을 따라하듯 똑같이 만들어낸 웃음이 아델리아의 입가에 걸린다.

귀를 닫아 걸었나보다.

칼리안의 반응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 것 같다. 제온에서 대체 뭘 주워들었는지 몰라도 이미 확신을 했다.

이 이상 반박을 해 봐야 소용없으리라는 것을 안다. 그러니 지금 당장 방향을 바꿔 파비안으로 가 라시드의 목을 비틀어 둘까, 아니면 텐실로 가서 하이데른 공작가를 탈탈 털어내 볼까.

"아델리아."

고민하던 칼리안이 아델리아를 응시했다.

순식간에 서늘해진 붉은 눈을 마주 쳐다본 아델리아가 손을 들어 휘휘 내저었다.

"살기 넣어라. 따갑다."

"사는 게 지겨워서 불만이었던 거면."

톡, 톡.

손에 들린 포크로 접시를 두드리던 칼리안이 말했다.

"내가 그쪽으로는 너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들을 일이 확실히 생길 것도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아델리아만을 향해 쏘아내던 살기를 내버려 둔 채였다. 어차피 아델리아도 실레스티안을 언급한 뒤부터 지금까지 칼리안을 향한 피어만은 남겨두고 있었으니까.

"새파랗게 어린 것아. 어르신 목숨 가지고 협박하면 혼난다. 그렇게 기어올라도 궁금하니까 살려두는 거지 예뻐서 살려두는 게 아니야."

"아니었어?"

"아니었어."

"이럴수가."

- 뭐야.

실랑이가 오가는 사이, 머릿속으로는 플란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별 일 아닙니다.

- 별 일이 아닌데 다 함께 있는 자리에서 따로 얘기를 나누시는지.

- 별 일이라 하기보다는 그냥. 저를 살려두는 이유를 잘못 알고 있던 것을 깨닫게 되어서 좀 놀라고 있습니다.

- ······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 별 일 아닙니다, 아무튼.

- 또 들키신 거군.

- 별 일 아니라는 말이 어떻게 그렇게 해석됩니까.

- 별 일 아닌 건 맞잖아.

"어차피 나랑 네가 원수진 사이도 아닌데 뭘 그렇게 숨기려 들어?"

"그것도 아니었어? 원수처럼 사사건건 방해만 하길래 맞는 줄 알았지, 나는."

"방해라니. 내가 널 살려놓은 건 잊어버렸냐?"

"아. 그랬지, 참."

"다누가 해 준 말만 아니었어도 이미 죽였다, 버릇없는 놈."

- 저 연로한 마법사가 그걸 알아서 어쩔 건데.

- 네, 뭐. 어쩌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 그럼 소용없이 우기느라 또 허기진다 짖을 생각 말고 식사나 마저 하셨으면 좋겠는데.

- 그래도 걱정이 되니까요.

- 축복이 사라지기라도 하셨나.

- 아뇨.

- 그럼. 축복도 있고 나도 있는데 무슨 걱정을 하시는지.

시스파니안의 후손으로 인정을 받고 있을 뿐더러 '칼리안의 정통성이 사라지면 가장 큰 이득을 볼 사람'인 플란츠가 쟤가 내 동생이 맞다 말하고 있는데, 이제 와 아델리아가 그 사실을 알든 말든.

알 바 아니니 그만 싸우고 배나 채워라 말한 플란츠가 조용히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반쯤 남았던 탄산수를 들어 유유자적 한 모금을 더 마시고 내려놨다.

- 네.

때문에 똑같이 태평한 얼굴이 된 칼리안에게 아델리아의 말이 다시 들려왔다.

"하여간 네 놈이 누구인지를 떠벌리는 것보다 천하의 아델리아가 감사 인사를 건넬 짓을 네 놈이 어떻게 저지르는지 기다리는 게 더 재밌으니까 지레 겁먹지는 말지. 그리고, 이 재밌는 일을 왜 소문내. 그래봐야 그 어둑어둑한 마법사 놈만 더 끼어드는 꼴인데."

"누굴 말하는 거야."

"루벤. 나 말고 또 다른 7서클 마법사. 네 소문이 나면 그 미친놈이 널 잡아다 제 궁금증을 풀어보려 할 게 뻔한데 알려봐야 나한테 득될 게 없지."

이렇게 말한 아델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칼리안이 주문한 새 굴 접시를 들고 가까이 다가서려던 식당 주인의 발을 그 자리에 잠시 묶어둔 뒤 입을 열었다. 당황한 얼굴로 무어라 말하려는 주인을 향해 습관같은 윙크를 해 보이면서.

"여하튼 실레스티안이랑 관련이 없다는 거지."

"없다니까. 왜 계속 캐묻는 거야? 실레스티안이랑 원수라도 졌어?"

"졌어."

"졌어?"

- 드르륵!

아델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내리뜨고 있던 눈을 들어올린 칼리안을 향해 말했다.

"실레스티안이랑 관련없다는 말 믿고 그냥 가는 거야, 안 죽이고. 그건 알아 둬라."

"가려고?"

"가야지. 세르제인 죽겠다."

더 붙들 생각이 없는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 대한 헛소문 안 퍼뜨리겠다는 말 믿고 그냥 보내주는 거야, 스승님 안 부르고. 알아 둬."

끝까지 안 지려 드는 모습에 피식 웃은 아델리아가 대단히 감사하다는 듯한 얼굴을 해 보였다.

"시스파니안은 인간을 좋아했고 실레스티안은 하피를 좋아했어. 하피들이 마법을 훔칠 줄 아는 건 실레스티안이 준 선물 덕이야. 나는 내 힘으로 배운 거지만. 하여간 혹시라도 실레스티안을 만나면 네 스승이 누구인지 알리지 마. 아주 많이 싫어할 테니까."

처음 듣는 이야기다.

장담하건대 이 말은 앨런도 들어본 적 없을 거다.

때문에 미간을 찌푸린 칼리안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런 정보를 공유해 줄 사이 아니지 않아?"

"돈을 안 가져 와서. 이 정도 얘기면 식사 값은 되겠지?"

한동안 대답하지 않던 칼리안이 의자에 등을 댔다. 그리고 검붉은 빛을 내는 아델리아의 눈을 들여다보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것 참······ 내가 알고보면 꽤 재밌는 사람이라고 꼬셔 둘 걸 그랬나."

생각해보니 완두콩의 말이 틀린 것이 없는데.

파릇파릇하신 분의 의견대로 아델리아를 좀 회유해 둘 걸 그랬나, 하고. 크게 후회되지는 않는 아쉬움을 꺼내놨다.

"날 회유해 보려고 했어?"

"고민했지. 쓸모 많잖아."

"너 버릇없어서 난 싫다."

"그럴 것 같아서 관뒀고."

가볍게 답한 칼리안이 아델리아의 접시를 가리켜 보였다.

"이건 네 조언 값으로 칠 테니까 하피 정보 알아다 주기로 한 약속이나 잘 지켜. 다음에 올 땐 제대로 나한테 찾아와. 나 때문에 엉뚱한 사람 앞에 나타나서 겁주는 일 더는 안 참아."

아델리아가 피식 웃었다.

"버릇없다. 다음에 볼 땐 말버릇 챙겨 둬라."

그리고 이렇게 대꾸한 뒤 휙, 하고 일순간에 사라졌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고개를 돌린 칼리안이 다시 한 번 방긋방긋 웃어 보였다. 갑작스레 온 몸이 무거워져 멈춰서게 된 것에 깜짝 놀란 식당 주인을 향해서였다.

"미안하네. 많이 놀랐나?"

최선을 다해서, 방긋방긋.

* * *

관계가 참 복잡하기도 하다.

아델리아는 실레스티안을 싫어하는 듯 하고, 실레스티안은 다누를 싫어한다. 앨런도 싫어할 것이라 했으나 그건 셈에서 뺐다. 앨런이 연관되어야 할 문제가 아니니까.

어찌됐건 실레스티안이 아끼던 것은 하피다. 그런데 지금 하피를 이용하고 있는 것은 제온이다. 다누 역시 제온에게 이용당하는 중이고.

그리고 하피를 사육하는 일에 관련된 것은 휘트린이다. 더불어 휘트린이 싫어하는 것은.

"브리센인가. 여전히."

"헤르츠 경이 잠깐 살펴봤을 때 그레이 브리센이라는 말에 반응을 보였다 하던데요."

"그 외에는."

"전혀. 입을 열지 않는다 합니다."

"아우님의 새 부하 쪽은."

"에일라 말씀이십니까."

"그래."

"아직이요."

다각, 다각.

예고도 없이 또 찾아든 3왕자의 일행을 이번에도 문제없이 잘 맞이해 준 곳. 시트렌 시의 시장저를 빠져나와 지그프리드 외성 밖을 향해 레이븐을 움직이던 칼리안이 답을 더했다.

"휘트린 인근 영지에 잠입한 상태입니다만 아직 이렇다할 것을 확인하지는 못했다 합니다."

"그래."

"돌아가면 다시 만나봐야죠."

"가면, 곧바로 휘트린을 만날 건가."

"네. 그럴 생각입니다. 시간 촉박합니다."

"그랬으면서 굳이 지그프리드령에 들르셨군."

"어제 식사값 많이 나왔습니까. 란델 형님과 아델리아의 것은 제가 계산을 했는데요."

"······ 말고."

그래봐야 그 둘의 식사값은 칼리안이 혼자 먹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아무리 그래도 칼리안의 한 끼 식사 정도에 휘청일 플란츠의 금고도 아니었다.

당연한 일을 두고 '굳이 지그프리드에 가서 식사를 한 것이 아까워 그러느냐' 놀리듯 말하는 것에 짧은 한숨으로 답한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내 아우님께서 잠에 들기는 하시는지."

"이제 그런 것까지 걱정해주시는 겁니까."

"걱정까지는 아니야."

전날.

엘프 도시를 나와 지그프리드령에 잠시 들른 칼리안은 그렇게나 염원하던 생굴을 양껏 먹었다. 먹기는 했다.

그런데 엘프 숲에서 나와 이동 마법진으로 가던 발을 잠시 틀어 지그프리드 공작령에 들른 것이 비단 칼리안의 입에만 맛있는 그 해산물 때문이었느냐 하면, 또 그렇지만은 않았다.

전투가 끝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휘트린에 곧장 돌아가봐야 제대로 쉬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칼리안이나 키리에야 별 상관이 없었다지만 플란츠와 란델에게 그 어수선한 곳이 편하지는 않을 테니까. 때문에 하루라도 제대로 쉬자며 지그프리드의 시트렌 시에 들어섰던 터였다.

"시트렌에 간 것 때문에 오히려 더 못 쉰 거잖아."

만약 휘트린으로 바로 갔다면 칼리안도 잠을 청할 수 있었을 터였다. 키리에와 교대를 하고 엘프 자객이 붙들려있는 감옥 앞을 밤새도록 지키고 서 있을 필요가 없으니까.

"형님들은 쉬셨잖습니까. 그럼 됐죠."

"말고. 너."

"걱정해주시는 겁니까."

"한다고."

살짝 웃은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다각, 다각.

바람을 밟는 듯 가벼운 레이븐의 발소리가 뒤를 이었다.

"마나실 후작이 이곳까지 와도 괜찮은 것이더냐."

란델의 물음이다.

지그프리드 외성 수비대의 인사를 받은 칼리안이 계속 걸음을 옮기며 답을 전했다.

"다누는 숲의 길을 안 열어 주겠다며 뒤끝을 부리고, 저 엘프를 데리고 이동 마법진을 쓸 수도 없어서요. 스승님 손을 빌릴 수밖에요."

칼리안과 연관된 이들만 따로이 등록하여 쓸 수 있는 이동 마법진이 아니던가. 그런 것에 엘프 죄수를 들일 수가 없었다.

때문에 앨런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앨런과 함께 공간 이동을 하는 모습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은 될 곳까지 나선 뒤에 말이다.

"허면. 다누는 더 이상 누구와도 연을 맺지 않겠다는 것이더냐."

"그 속을 어떻게 알겠습니까만. 일단은 그럴 것 같습니다. 제온의 부탁도 들어주지 않기로 했고요."

"다누가 다시 협박을 받게 될지도 모르겠군."

"아무래도요. 제온에서 다누가 가짜인 걸 실레스티안에게 알리겠다······ 고."

다각.

칼리안의 말이 끊어짐과 함께 레이븐도 발을 멈췄다. 미간을 찌푸린 칼리안이 톡, 하는 소리를 내며 레이븐의 안장을 한 번 두드렸다.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키리에와 칼리안의 사이에 매인 말 위에 널브러진, 칼리안이 여전히 서툴러하는 슬립 마법에 취하는 대신 뒷목을 맞고 기절한 엘프 자객을 한 번 쳐다본 뒤 입을 열었다.

"계속 엮이네요. 실레스티안."

톡, 톡, 톡.

칼리안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지그프리드의 외성을 등지고, 이곳에 처음 오게 되었을 때 지그프리드 공작령을 한 눈에 내려다봤던 언덕을 앞에 두고서. 아무것도 없는 너른 땅 위에 우뚝 선 채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텐실이 대사막과 손을 잡았죠."

"오래 되었다."

"제온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확인되는 건 일단 텐실의 하이데른 공작가고요. 라시드 브리센의 어머니가 있는."

란델의 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던 칼리안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대신 플란츠가 한 마디를 더했다.

"이제 대사막의 전사들은 대부분 다 제온에 속했다고 보아도 되지 않겠나."

"제온의 군사 수 때문에 그렇게 보시는 겁니까."

"그래."

맞는 말이다.

제온은 한 나라의 군대가 아니었다. 여러 나라에서 모여든 이들이 힘을 합친 단체라 했었다. 그런데 그들 군사의 수가 지나치게 많았다. 각 나라의 일부 사람들이 모였다고만 하기에는 이해되지 않을 만큼 말이다.

그런데 만약 대사막의 그 많은 부족들이 전부 다 제온에 속했다 하면, 그리 되면 말이 된다. 시오나의 반응을 보아도 그랬다. 대사막의 부족들을 제멋대로 정복하고 다녔다던 놈들이 바로 제온에 속해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또 하나.

텐실의 하이데른 공작가.

베른이 살았을 때와 확연히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는 곳. 그들에게도 분명히 숨기는 것이 있었다. 칼리안의 비밀을 라시드가 눈치채고 있던 것만 보아도 그러하다.

"텐실의 하이데른 공작가가 제온의 중심이든, 아니면 그들 역시 제온과 손잡은 사람들 중 하나였든. 어쨌거나 텐실이나 대사막에 놈들의 머리가 있을 것 같은데······ 실레스티안이라."

실레스티안은 하피를 좋아한다.

때문에 마나실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간을 싫어하리라 했다. 그런데 제온은 하피를 되살려내 이용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실레스티안과 연결이 되어 있는 것처럼 굴었다.

"실레스티안이 제온을 좋아할까요?"

하다못해 다누가 플란츠를 쏙 빼가고 아델리아가 키리에를 확 잡아챘을 때에도 칼리안은 그렇게나 화가 났었는데. 하피를 좋아한다 했던 실레스티안이 하피를 이용하고 있는 제온을 과연 좋아할까.

"그럴 리가."

"네······ 그렇죠."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고민을 이어나가던 칼리안의 귀에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끝으로 갈수록 점점 붉게 변하는 독특한 빛의 머리카락, 날카로운 눈매, 더할 나위 없이 온화한 미소까지. 어디에서 마주치든 절대로 알아보지 못할 리 없을 모습의 대마법사가 어느새 앞에 서 있었다.

"스승님!"

칼리안의 얼굴에 활짝, 꽃이 핀다.

전날의 식당에서 억지로 만들어낸 것 말고, 진심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앨런에게 인사를 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우선 돌아가요. 가서 말씀드릴게요."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시간을 지체할 이유가 없다는 것처럼 마력을 움직였다.

- 우우웅!

마력이 소용돌이친다.

따스한 바람이 이는 느낌이 든다.

낯선 듯 기분 좋은 그 바람에 칼리안이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다 퍼뜩, 무언가를 깨달은 듯 다시 떠올렸다.

어둠이 보인다.

한 치 앞도 가늠하기 힘든 어둠이 들었다.

"······ 내 스승님을 마법으로 흉내내지는 못한댔는데. 확실히 다르네."

그 어둠을 직시하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실레스티안."

칼리안의 키보다 더 긴 동공을 품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황금빛의 눈을 올려다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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