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99화 (500/527)

제87장. 자고로 미모란(5)

때로는 엉뚱한 일이 엉뚱한 결과를 만들기도 한다.

딸기가 정말 맛있어서 좋아하는 히나와 달리 딸기를 좋아한다 생각하다 보니 좋아하게 된 플란츠가 그러하듯이. 만난지 오래되지 않은 신분 귀한 시종이 그나마 잘 만들던 것이 민트차인 까닭에 주구장창 민트차만 부탁하다보니 어느새 민트차를 엄청 좋아하게 되었던 칼리안이 그러하듯이.

드미레아 역시 그랬다.

- 단 것은 싫은데, 쓴 맛이 좋아서, 캐러멜을, 먹어요?

이제야 간신히 짬을 내 제대로 된 점심 식사를 마친 드미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질문을 했던 히나는 세상에서 제일 알쏭달쏭한 말을 들었다는 듯한 얼굴이 됐다.

그래.

캐러멜 때문이다.

'군단장님도, 그만큼의 캐러멜을, 드시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지. 나도 저렇게 많이 먹지는 않으니.'

'그 많은 캐러멜을, 다 어디서, 구했어요?'

'새끼 코끼리가 가져다 주었겠지.'

단 것을 입에 잘 대지 않는 드미레아가, 영주 대리인의 집무실에 틀어박혀 밤새도록 일을 하는 동안 어마어마한 양의 캐러멜을 먹어치웠음을 알게 된 까닭에 시작된 대화였다.

'영주성 밖이야 멀끔하니 상한 곳 하나 없는데 그깟 캐러멜 쯤 구하지 못할 것도 없지 않겠나.'

앨런의 말대로였다.

그 많은 캐러멜은 영주성 밖의 상점가에서 구해 온 것이었다. 당연하겠지만 영주성은 아직 복구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제온과의 전투를 치른 뒤 이제 막 하루가 지났을 뿐이지 않나. 마법사들 덕에 그 많던 시신은 빠르게 치워낼 수 있었다지만 영주성의 부서진 벽이며 일부러 무너뜨린 통로까지 원상태로 돌려놓을 수는 없을 단시간이었다.

전투가 일단락 된 뒤 앨런이 싹 다 잡아온 제온의 남은 군사들을 수용할 감옥과 발칸의 부상자들을 쉬게 할 깨끗한 방, 그리고 모든 인원들의 식사를 챙겨 줄 주방이 온전한 것이 기적이라 할 일이다.

"쓴 맛 때문에 저것을 먹는다니. 아무튼 자네도 참 어지간히 독특한 인사일세."

"그래도 설마 제가 칼리안 왕자님만큼 독특하겠습니까."

전해 줄 말이 있다며 히나를 데리고 찾아왔던 앨런의 말에, 살짝 웃은 드미레아가 대답을 전했다.

"실은 저희 기사단장 로난시테 경 때문입니다. 어릴 땐 로난시테 경이 제 호위를 함께 맡았었는데 로난시테 경이 캐러멜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래서 같은 것을 먹는 날이 늘어나다 보니 어떻게든 저도 그 단 것을 좋아해봐야 할 것 같아서, 좋아할 수 있을 만한 이유를 찾다 이렇게 됐습니다."

잘 졸인 설탕의 맛 사이에 꼭꼭 숨겨진 쓴 맛이라도 좋아해보려 하다 보니 어느새 자연스레 캐러멜 특유의 단 맛과 향도 함께 좋아하게 되었다고.

참으로 엉뚱하기 짝이 없는 이유였다.

체리 꽃을 좋아해서 체리까지 좋아하게 되었던 얀의 것과 퍽 비슷한, 어쩐지 순서가 뒤바뀐 기호의 이유를 알려준 드미레아가 손을 뻗었다. 그러더니 폭신폭신한 시트 위에 캐러멜이 든 생크림을 잔뜩 올린 디저트에 포크를 가져다 댔다.

"피로할 때 먹기에도 좋은 것 같고요."

그러더니 지난 밤 사이 적절한 휴식과 수면 대신 과다한 당분을 몸 속에 채워놓은 것도 잊은 것처럼 방금 떠 올린 다디단 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그 속에 든 쓴맛을 보물찾기하듯 솎아내 음미하면서.

물론 케이크 역시 얀이 준비해 내어 준 것이었다. 일이 쌓여 있을 때마다 드미레아가 무엇을 찾을지에 대해 얀보다 더 잘 알만한 이는 없었으니 말이다.

- 너무 많이, 먹지는, 말아요. 소공작님 이 썩어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무튼 다행한 일이다.

그렇게나 엉뚱한 이유로 만들어진 드미레아의 기호 덕에 단 것은 대부분 다 좋아하는 히나나 단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앨런까지 모두 다 자신들의 입맛에 딱 맞는 디저트를 함께 즐기는 짧은 여유를 부리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제 숨을 좀 돌려도 되겠나."

향 좋은 홍차로 입을 가신 드미레아를 향해 앨런이 이렇게 말을 건넸다. 그러더니 자신의 앞에 놓인 우유를 살짝 들어 히나의 앞에 내려놨다. 튼튼이 색을 닮은 자신의 말 때문에 홍차보다는 밀크티를 더 좋아하게 된 히나임을 익히 알고 있던 까닭이다.

잠시 웃은 히나가 그것을 받아들고 자신의 차를 따로 만드는 사이 드미레아의 답이 들려왔다.

"수도의 재밌는 소식을 들을 만큼은 됩니다."

"허, 혹시 이야기를 이미 전해받았나?"

"아닙니다. 그냥 그러실 것 같아서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줄 줄 알고?"

"마나실 경께서 이곳에 오시기 전에 아버지를 만나셨던 것을 압니다. 휘트린 영지와 관련된 문제가 있다면 혼자 찾아오시거나 헤르츠 경을 곁에 두셨을 텐데 안 그래도 가장 바쁠 베른 경을 굳이 대동하셨으니, 이 영지의 일이 아니라 아버지와 의견을 나누셨을 사적인 문제로 찾아오신 것 아니겠습니까."

계속 들고 있던 잔을 조용히 내려놓은 드미레아가 앨런을 쳐다봤다.

"정혼자간에 신경을 써드려야 할 문제같은."

그리고 스스로 생각해 낸 결론을 입에 담았다.

- 그것 보세요. 저를 데려오시면, 소공작님이, 다 눈치 챌, 거라니까요.

곁에서 듣고 있던 히나가 핀잔을 주듯 이야기했다. 그러자 앨런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낮게 웃었다.

"속이고 놀려먹기에 만만한 것이 베로니카 뿐이어서야. 영 재미가 없으니 이를 어찌할는지."

"마나실 약제사도 눈치 빠릅니다, 마나실 경."

"이런. 그러하던가?"

"조부님이시니 속아드리는 것일 겁니다. 마음 놓지 마십시오."

"이것 참. 꼭 주의하겠네."

정말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히나의 웃음보를 터뜨린 앨런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히나와 드미레아를 한 번씩 번갈아보며 입을 열었다.

"베른 경에게는 내가 이미 이야기를 했네만. 지금 수도에 자네 말마따나 재밌는 소식이 퍼지고 있네."

"저와 칼리안 왕자님에 대해서 말씀이십니까."

"아니. 자네와 저하에 대한 이야기일세."

"······ 네?"

"자. 들어보게."

그 뒤 이렇게, 칼리안을 정말 즐겁게 만들었던 엉뚱한 소문을 전했다. 케이크를 한 번 떠 먹은 히나가 밀크티에 손을 댈 동안 이어진 이야기였다. 그 사이 드미레아는 제 앞의 자그마한 케이크를 싹 비워냈다. 허기가 남아서라 하기보다는 당분이 부족해질 소리였던 까닭이다.

앨런의 말이 끝난 뒤 긴 한숨을 내쉰 드미레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히나를 보며 작은 웃음이 밴 말을 꺼냈다.

"광장에서 같이 싸움이라도 벌여볼까요."

히나의 입에서 바람같은 웃음소리가 나왔다.

- 소공작님이랑 싸우면, 제가 지니까, 저는 그냥, 자상한 왕자님이랑, 손 잡고, 반짝반짝한 거리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을까, 했어요.

왕궁 앞 광장에서 소공작과 백작이 싸움을 벌이든, 아스트리샤 거리에서 3왕자와 백작이 아이스크림을 먹든, 뭐가됐든 카이리시스를 참 흥미진진한 곳으로 만들어 둘 계획들이 한 번씩 오고갔다.

잠시 실소한 드미레아가 입을 열었다.

"저하께서는 뭐라 하셨습니까."

"저하의 의견은 듣지 못했네."

"그럼 칼리안 왕자님께서는요."

"뭐라 하셨을 것 같나?"

"생각이 워낙 엉뚱한 분이라,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상심한 김에 지그프리드 뒷마당에 멋대로 들어앉겠단 얘기만 아니면 다 좋을 것 같습니다만."

"자네에게 생일 선물을 하겠다 하던데."

"선물을요."

때마침 드미레아의 생일과 가까운 날이 아닌가. 그러니 '제 형제와 손을 잡고 자신의 목을 쳐내려던 정혼자'의 생일을 챙기겠단다.

'브리센에서 형님의 손을 잡을 생각을 아직도 못 버렸나 봅니다.'

'왕자님께서도 그리 보십니까.'

드미레아에게 설명을 해나가던 앨런이 지난 밤 칼리안과의 대화를 잠시 떠올렸다.

'안그래도 명성 자자하신 제 망나니 형님께서 이대로 신망을 더 깎아먹으면 오도가도 못하는 처지가 될 텐데요. 그런 상황에서 형님이 별 탈 없이 왕위에 오르려면 브리센의 손이라도 다시 잡아야지 별 수 있겠습니까.'

'그 생각의 크기가 어찌나 비좁은지. 어찌됐건 너무 신경쓰지는 마시지요. 수도에서는 지그프리드 공작이 전면에 나서기로 하였고 왕자님들과 저하께서 돌아오셔서 모두의 앞에 다시 나서면 잠잠해질 터이니.'

'아뇨. 소문은 잠잠해질지 몰라도 형님이나 드미레아에 대한 시선은 안 바뀔 겁니다. 상상하고 퍼뜨리기에 그보다 더 재밌는 이야깃거리가 또 어딨겠습니까. 시간이 지나서 저나 형님이 국혼을 치른다 해도 사라지지 않고 따라붙을 겁니다.'

'겪어보신 것처럼 말씀을 하십니까.'

'아리안느와 제 사이가 워낙 좋았지 않습니까. 덕분에 뒷이야기가 참 많았습니다.'

'하기사. 그러했겠습니다.'

'네.'

'그래서 이번에는 어찌하실 요량이신지요.'

'이럴 땐 역시 더 재밌는 얘기를 퍼뜨려야 하는 법인데. 벌써부터 제온을 알려 불안한 마음으로 재밌는 소식을 잠재우려 들 수는 없을 일이고······. 제 정혼자에게 선물을 할까요, 제가.'

'선물 말씀이십니까.'

'네. 마침 시기가 좋으니.'

그레이 브리센의 허리를 부러뜨리러 가기 전에 냈던 것과 꼭 같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던 칼리안의 목소리를 상기하고 있으려니, 드미레아가 앨런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언제든지 제 이마를 부여잡을 준비를 마쳤다는 듯한 비장한 표정을 지은 채로.

"무엇을 주겠다 하십니까. 설마 휘트린은 아니겠죠."

"설마 이 영지를 자네에게 버리기야 하시겠나. 걱정 말게. 이곳은 왕자님께서 계속 끌어안고 가실 터이니."

"그럼 무엇입니까."

플란츠와 드미레아의 관계에 대한 소문을 일순간에 종식시킬 만한, 그 사이에 낀 완두콩의 이름 정도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아예 없던 것처럼 덮어버릴 만한. 칼리안이 드미레아에게 배신당한 것이 사실이라면 절대로 전해지지 않을 만큼의 과한 선물. 브리센으로 하여금 이런 헛소문을 뿌린 것이 얼마나 멍청한 수였는지를 직접 깨닫게 할 만한.

그런 선물.

"폴룬 상단의 이름을 지그프리드 상단으로 바꾸겠다 하셨네."

한 때는 브리센의 것이었고 이제는 분명한 칼리안의 소유이나, 그것을 '카이리스 상단'이라 이름지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상단을 관리해 줄 멜피르 폴룬의 성을 따다 이름붙였던 폴룬 상단. 그곳의 이름을 바꾸겠단다.

"폴룬 상단의 이름을······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이름이 바뀌어도 여전한 칼리안의 소유다.

계속하여 멜피르 폴룬이 관리를 할 터였다.

달라지는 것은 오직 이름 뿐.

그 사실을 드미레아가 모르지 않았다.

"제 정혼자님의 배포가 어찌나 남다르신지 모르겠습니다. 농사 타령을 그렇게 하더니, 그래도 어찌됐건 일은 확실히 하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드미레아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반응했다.

지그프리드에서 무엇이 아쉬워서 상단의 수익금이나 상단의 운영자 자리에 관심을 두겠나. 그것으로 지그프리드에서 얻게 될 것이 단순한 금전이 아니라 그 이상의 명성임을 알기 때문에 놀라는 것이었다.

어차피 사람들은 상단의 실제 소유주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것의 이름이 지그프리드라면 지그프리드의 것이겠거니, 그리 믿고 찬탄할 뿐이다.

한때 이 나라를 쥐고 흔들어대던 브리센 상단의 이름이 아주 잠시 '폴룬'이라는 이름 모를 남작의 성을 거쳐 지그프리드로 바뀌게 된 것이, 사정 모르는 수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어떻게 새겨질까. 수도의 소문에까지 귀를 열어두지는 못해도 당장 자신들의 마을에 찾아오는 상단의 이름만은 분명히 알고 있을 그 많은 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 브리센의 날개가 지그프리드에게 갔구나.

브리센과 지그프리드.

몰락해가는 그리핀의 날개를 빼앗아 단 코끼리.

그런 인식이 생길 터였다. 그렇게 만들겠다는 소리였다. 남부의 중심 지그프리드에 이참에 아예 더 큰 날개를 달아주겠노라고 말이다.

"그게 끝이 아니네."

"그럼 또 뭐가 있습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텐실의 마음을 붙들어잡아서, 텐실 왕실과 '지그프리드 상단' 사이의 다이아몬드 직거래 협의를 성공시켜 주겠다 하셨네."

"······ 다이아몬드요."

"지그프리드가 아닌가. 지그프리드라면 응당 다이아몬드를 가져야지."

지그프리드로 이름이 바뀌자마자 다이아몬드 직거래권을 가져온다. 그보다 더 인상깊은 업적이 또 어디에 있을까.

"저하와 제 이름을 지우는 대신 브리센을 다시 입에 올리게 만들려는 겁니까."

"맞네. 바로 그것이네."

그렇게나 대단했던 상단을 말아먹은 '무능한 레넌'과, 얼마든지 소생이 가능했던 상단임을 알아보지 못하고 한낱 남작에게 헐값에 팔아넘긴 '시야 좁은 에반'과, 그것이 지나치게 손해를 보았던 거래임을 주장하며 상단을 되찾아 올 시도도 해보지 않은 '바로 그 그레이 브리센'의 이름이, 드미레아와 플란츠라는 식상한 이름 두 개 대신 아스트리샤 거리에 널리널리 퍼지게 되는 것이다.

'다만, 왕자님. 폴룬 상단에서 그동안 그렇게나 노력했어도 성공하지 못한 거래입니다. 그들 왕실에서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동안에는 제가 신경을 안 썼으니까요.'

'직접 나설 생각이라는 말씀이십니까.'

'네. 더는 소문을 가지고 장난질을 해보겠다는 생각을 떠올리지도 못하도록. 직접 나설 생각입니다.'

'가능하겠는지요.'

'당연히 가능하죠.'

앨런이 피식 웃었다.

'이럴 때 써먹으려고 아껴 둔 미모 아닙니까.'

도대체 그것을 아끼기는 했었는지 알 수가 없을 아들 놈의 대답이 생각난 까닭에.

"그러니 거절 않고 받아달라 하셨네.'

"알겠습니다."

드미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일 선물,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가 없이 받기만 하면 될 '생일 선물'을 받겠노라 말하며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참 엉뚱한 일이 원인이 되어 대륙에서 가장 굳건하던 방패 위에 다이아몬드까지 뒤덮어두게 되었으니 웃지 않을 수가 있나.

- 다이아몬드, 얻게 되면, 축하파티 열어요, 소공작님.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둘의 이야기를 듣던 히나가 손을 움직였다.

- 발,칸, 문양을 넣은, 연두색, 드레스를 입고,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하고, 좋은 왕세자 저하, 팔짱도 끼고서, 축하해주러, 갈게요.

물론 실리케의 '그 청포도색'과는 확연히 다른, 플란츠를 떠올리게 할 연두색을 말함이다.

왕세자가 그의 정혼자인 발칸의 치유사와 함께 브리센의 날개를 빼앗아 단 코끼리들에게 진심어린 축하를 해줘야 하지 않겠나. 애초부터 왕세자는 브리센의 사람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하나씩 배워가는 정치질이 어찌나 재미있는지. 딱 그런 얼굴을 한 히나를 향해 드미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해야 되겠습니다."

히나와 꽤 비슷한 얼굴을 하고서.

* * *

간혹 란델의 얼굴에도 표정이 들어설 때가 있다.

조찬에 나선 막냇동생이 하루에 한 번씩 꼬박꼬박 말을 걸었을 때, 그 막냇동생이 독차가 싫다시며 제 손으로 독을 집어드시사 비로소 독에서 벗어나는 광경을 보았을 때, 그렇게 하여 무럭무럭 씩씩하게 자란 장미같은 막냇동생이 저를 향해 이를 드러내는 꼴을 보게 됐을 때.

그리고.

"지그프리드에도 텐실처럼 금식을 하는 날이 있더냐."

"없습니다."

"그런 날이 있어 네가 도움을 주는 줄로 알았다."

엘프들의 도시에서 나와 지그프리드 영지에 잠시 들르자마자 이 동네 사람들의 일용할 양식을 죄 가져다 제 뱃속에 담아둘 것처럼 생굴을 집어드시는 막냇동생과 마주앉아 있을 때.

해물 없이 바짝 익힌 소고기 스테이크와 샐러드로 이미 진작에 식사를 마친 4층 사람이 이런 상황에 참 익숙하다는 듯 창 밖을 감상하기 시작했을 즈음.

씹는 소리는 물론이거니와 식기가 맞부딪히는 소리조차 내지 않는 완벽한 왕실의 예법을 따박따박 지키며 참 야무지게 생굴을 먹던 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품질 좋은 버터의 향이 기분 좋게 감도는 랍스터의 마지막 조각을 입에 넣던 란델을 향해 대답했다.

"금식하는 날은 아니고 기념할 만한 날이기는 합니다. 오늘 란델 형님의 연두색 동생 금고가 가벼워지는 날이거든요. 생굴을 사주기로 약속하셔서."

어디보자.

나에게 막냇동생이 있기는 한데 그 동생이 연두색은 아닌 터라. 연두색 동생이라 할 만한 다른 사람이 있던가.

잠시 고민해보듯 시간을 둔 란델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칼리안이 설명한 것에 그나마 가장 가까운 듯한 4층 사람을 일별한 뒤 말했다.

"세레이아 진주의 품질이 좋다 하였지."

"그랬습니까. 저는 민물 진주에는 관심이 없었어서, 형님 영지에서 진주를 키워다 파는 줄은 몰랐네요."

진주를 키우는 게 아니라 조개를 키우는 거라고. 그리고 그거 팔아봐야 내 금고에 들어오는 돈은 얼마 되지도 않는다고. 그러니 작작 좀 드시라고.

"어디로 갈 건데."

그렇게 말하며 구박을 하자니 생굴을 사주겠단 말에 신나서 달려왔던 저 새까만 고양이가 크게 실망하여 시무룩해진 얼굴로 마구 짖어댈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가만히 입을 다물고 다른 질문을 했다.

"휘트린이요."

그러자 예상했던 대답이 들려왔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파비안에 가야 되겠으나 대장로 나르잔이 내어 준 엘프 자객을 호송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함께 돌려받은 하피 마석도, 그리고 다누에게 '선물받은' 단단하고 반투명한 검의 재료도 건네주어야 했다.

"전해줄 것도 있고, 휘트린을 만나보기도 해야 하고, 휘트린쪽 영지 일도 마저 살펴봐야 하고요. 라시드 브리센에 대한 체포가 늦어지더라도 이쪽 일은 마무리를 지어 둬야죠."

"혹시 파비안에 갈 때에는 다 두고 혼자 갈 생각이신지."

"아닙니다. 처음 계획대로 할 겁니다. 부상자들은 스승님과 함께 수도로 돌려보내겠지만 다른 인원들은 다 함께 파비안으로요. 영지 시찰이라는 명목은 유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알았어."

만족스러운 대답에, 딸기 조각이 동동 떠 있는 탄산수로 입을 가신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구운 가리비에 레몬 소스를 올려놓고 있는 또 한 사람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애석하게도 키리에는 아니었다.

키리에는 지금 지그프리드의 시장저에 있는 감옥에 엘프 자객을 넣어두고 그 앞을 지키고 있었다. 한밤에는 칼리안이 교대를 하기로 했으니 그 때까지는 키리에가 수고를 해주어야 했다.

"마법사. 왜 안 가는데."

그러니 플란츠가 쳐다보고 있는 것은 키리에가 아닌 또 다른 한 사람.

"나는 내 돈 내고 먹는 거다. 똑같이 어린 놈아."

아델리아였다.

"······ 말고. 질문."

"저 왕자 설명만으로는 궁금증이 다 안 풀려서 못 가."

이 말을 들은 칼리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하피가 어떻게 아직 살아있는지를 알아봐 달라 했더니 계속 저렇게 입을 꾹 다문 채로 일행들을 따라오고 있었다. 언제는 세르제인의 목이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굴더니 말이다.

"휘트린에까지 같이 가든가. 스승님이랑 인사하면 되겠네. 아델리아."

"거기까진 안 따라가. 앨런 마나실 싫다니까?"

그렇게 말하곤 한동안 입을 또 다물던 아델리아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리고 칼리안의 품 속에 들어있던 마법사 주머니 쪽을 자신의 포크로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하피 마석 말고, 하나만 더 물어보자."

"얘기 해."

"실레스티안같은 힘을 네가 왜 쓰는지. 난 그것도 궁금하거든."

생각지도 못한 말에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아델리아의 말이 이어졌다.

"내 마법 지웠잖아. 그거 실레스티안 주특기인데 네가 어떻게 한 거냐고."

칼리안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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