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장. 자고로 미모란(4)
흐드러진다.
결코 꽃이 아닐진대, 온 나무에 피어오른 붉은 꽃잎처럼 흐드러진다. 세상에서 가장 호사스러운 단명을 기꺼워하듯 그렇게나 철저하게 흐드러진다.
칼리안의 손에 들렸던 두 자루의 검.
그 끝에서 나고 지던 붉은 흐드러짐.
그것을 잊지 못했다. 서로 다른 날에 서로 다른 곳에서 칼리안이 만들어낸 브리센의 검을 보았으나 똑같이 잊지 못했다. 키리에도, 플란츠도.
"왕자님의 검과 다릅니다."
때문에 플란츠의 검을 상대하던 키리에가 이렇게 입을 뗐다.
- 카강!
- 캉, 카아아앙!
칼리안의 검과 달랐다.
시나스타의 끝에 맺힌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피어오르고 이내 저물었을 뿐, 절로 흘러나오는 찬탄마저 방해가 될까 입을 다물게 만들었던 흐드러짐이 없었다.
"알아."
짧은 대답의 끝에 한 쪽의 시나스타가 이어져 들어왔다. 답보다 날선 공격을 쉬이 막아낸 키리에가 자신의 잿빛 검을 내뻗었다.
- 카앙!
튕겨나왔던 쪽의 검 대신 다른 한 쪽의 청은빛 시나스타로 칼날을 쳐낸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너도. 내 아우님 검이랑 다른데."
"괜찮습니다."
키리에가 플란츠에게, 그리고 플란츠가 키리에에게, 똑같이 한 번씩 '다름'을 주고 받았다.
그러나 그 말에 대한 반응이 서로 달랐다. 플란츠는 다름을 안다 하였고 키리에는 달라도 괜찮다 한 것이다.
- 카가강, 캉!
- 카아아앙!
칼리안의 검술 역시 대륙의 첫 번째 소드마스터인 테일란의 것과 많은 부분이 달랐지 않나. 분명 칼리안은. 아니, 베른은 테일란에게 검을 배웠음에도 말이다.
그러나 칼리안은 괜찮았다. 칼리안의 검을 배운 키리에가 칼리안과 다소 다른 검을 쓴다 하여도 그 역시 괜찮았다.
어둠 속을 소리없이 파고든 뒤 상대의 목숨을 무조건 일격에 끊어놓는, 비정한 것인지 다정한 것인지 구분되지 않는 칼리안만의 검술을 키리에가 똑같이 베껴내야 할 필요가 서로에게 없었다. 더욱이 칼리안은 키리에가 자신의 검술에 매이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누군가의 검술을 이어나간다면 차라리 테일란의 것을 배우기를 바랐다.
"저는 괜찮습니다만. 저하께서는 아닙니다."
- 카앙! 카아앙, 캉!
"······ 알아. 그것도."
그렇다면 플란츠 역시 칼리안과 다소 다른 검술을 사용해도 괜찮지 않겠느냐. 이렇게 묻는다면 이 자리에서 검을 쥘 줄 아는 모두가 다 똑같이 고개를 가로저을 터였다. 플란츠 본인마저도.
오랜 시간을 이어져 내려왔고 앞으로도 다시 오랜 시간을 이어나가야 할, 말 그대로 계승되는 검술이기 때문이었다. 지그프리드의 드미레아가 퀴트로스 혼 지그프리드의 검술을 배우고 이어나가는 것처럼 제 목숨을 지키고 남의 목숨을 끊어내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가문의 기둥이 되어야 할 칼날을 쥐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브리센이 아닌 새로운 이름을 내건 일가의 가주가 된다 하더라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머리로 외워 따라하시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손과 발과 어깨와 허리에 검을 담으십시오."
그러니 키리에는 비정하거나 다정하지 않다 하여도 푸른 빛을 만들어내는 법만은 알아내야 했고 플란츠는 빛나지 않는다 해도 반드시 흐드러져야 했다. 결국 이 자리에 서 있는 둘 모두 한 명의 스승이 내준 각자의 숙제를 풀어야만 하는 셈이다.
- 휘이익!
- 카앙!
"기억이 아니라 습관이 되고 본능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아직 멀었습니다, 저하."
"내 검술을 봐줄 때가 아니지 않나."
"제 검도 신경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 카가각, 카아아앙!
"제가 언제 무엇을 하든 저하의 검술은 봐드릴 수 있습니다."
"과신하지 말라는 말은 못 배운 건가."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지녔으니 다소 과신해도 좋다 배웠습니다."
- ······ 웅······!
"지금 깜빡이는 것이 오러인지 마력 다한 등불인지 구분이 안 되는데. 정말 그렇게 배웠나."
"오러입니다. 서류를 보시느라 눈이 어두워 지셨습니까."
"그랬으면 눈이 더 부셨어야 되겠지. 반대일 리가."
- 카강, 카아아앙!
칼싸움의 사이에 말싸움이 섞인다.
그렇게 기싸움을 한다.
그리 해야 칼도 자란다.
어둠 속에 있음에도 크게 눈에 띄지 않는 푸른 불꽃이 아주 잠시 스치듯 검을 지나쳤다.
순간적이라 하나 쭉 뻗어 올라갔던 푸른 오러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자 키리에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 얼굴을 본 플란츠가 키리에의 검을 드세게 올려치며 입을 열었다.
"호흡이 달라지는 순간, 발을 떼기 직전, 시선이 검에서 떨어지는 때. 어깨를 잠깐 멈췄을 때."
그러더니 이렇게 서로 연관성 없는 상황들을 나열한 뒤 말을 덧붙였다.
"그럴 때만 오러가 생기는데."
"그렇습니까."
"그래."
- 카아아앙!
"저에게 닿기 직전에 검 끝이 흔들리는 버릇이 여전합니다."
"그런가."
"검이란 결국 사람의 목숨을 취하는 물건입니다. 상대가 죽을까 걱정되시면 검 내려놓고 펜이나 드십시오."
"싫어."
"검을 들어 지킨다는 건 적을 죽인다는 말을 그럴싸하게 포장해 둔 소리일 뿐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칼은 세상에 없습니다."
"알고 있어."
"머리로만 알지 말고 손으로도 아셔야 합니다. 머뭇거리지 마십시오."
"알았어."
물론 검에 섞인 말이 싸움만은 아닌 터라.
기억이 예민한 플란츠는 키리에의 검에 우연처럼 오러가 들다 사라진 상황들의 공통점을, 감각이 예리한 키리에는 플란츠의 악습관을 골라내어 알려준다.
- 카강, 카아앙, 캉!
- 카아앙! 카강!
막무가내로 싸우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으니 칼리안도 둘의 대련을 지켜보기로 한 것일 터였다.
"내가 할 말을 형님께서 해주시네."
이렇게 한가로운 소리를 중얼거리면서.
자칫하면 정말 싹뚝, 키리에의 오러에 완두콩 싹이 잘려나갈지도 모르는 상황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키리에의 실력이 플란츠보다 훨씬 더 우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배우는 것이 있으니까.
- 타앗!
곧 발을 박찬 키리에가 제 검을 아주 잠시 물렸다.
속도가 아닌 힘을 겨루려 들기 직전의 자세임을 플란츠가 알아봤다. 때문에 플란츠 역시 시나스타를 쥔 손에 잔뜩 힘을 주었다. 그리고 언제든 시나스타를 교차해 공격을 막아설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때.
- 다행이야, 오빠.
플란츠가 차고 있던 팔찌에서 빛이 났다. 하피의 알 화석에서 채취했다 했던 분홍빛 마석이 함께 빛을 냈다.
오늘 안에 칼리안이 음식에 손을 대면, 아니면 혹시라도 몰래 나가 야생 닭을 사냥하려 들면, 그 때에는 곧바로 히나에게 일러바치려고. 그런 생각에 빌려와 여전히 차고 있던 키리에의 팔찌였다. 그것을 통해 히나의 말이 전해지고 있었다.
- 위고 경 말이야. 계속 발칸에 남기로 결정했어. 대신 한쪽 팔로 검을 잡는 연습을 할 기간이 필요하겠지만 그래도 다행이야. 오빠나 저하께서, 아니면 칼리안 왕자님께서 한쪽 손만 쓰는 연습은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내가 마음대로 얘기했어. 괜찮지?
위고.
피에르 위고.
리본을 잘 묶는 갈색 머리 기사.
- 왜, 한쪽 손만 쓰는 연습을. 왜.
- ······ 플란츠 저하?
안도감이 큰 까닭에 평소와 달리 서로의 안부도 묻지 않고 전했던 히나의 말. 순식간에 들이닥친 그 말의 무게에 짓눌린 연두색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것을 본 키리에의 검 끝이 같이 흔들렸다.
칼리안의 눈빛이 돌변했다.
'호흡이 달라지는 순간. 발을 떼기 직전. 시선이 검에서 떨어지는 때. 어깨를 잠깐 멈췄을 때.'
푸른 빛의 오러.
일순간 집중이 흐트러지는 때 발현되는 오러.
- 우우웅!
대련을 이어가는 내내 깜빡이던 오러가 유난스레 찬연한 빛을 냈다. 그리고 멈추지 못한 채 그대로 뻗어나갔다.
- 사아아······!
플란츠의 눈 속에 키리에의 잿빛 검이 담긴다. 하피를 등 뒤에 두었던 칼리안의 눈에 비쳤던 것과 똑같이 창백해진 키리에의 얼굴이 연두색 눈동자로 들어섰다.
상황을 눈치챈 아델리아가 마력을 운용했다.
언젠가 자신이 키리에의 목을 죄였던 일을 잊지는 않고 있던 까닭에, 그 대가로 키리에를 살려주는 대신 키리에가 누군가를 죽이지 않도록 돕기 위해서.
칼리안이 손을 뻗었다.
마나를 움직였다.
- ······ 우우웅!
플란츠와 키리에의 사이를 막아서려던 아델리아의 실드가 칼리안의 방해를 받았다. 요동치듯 뒤흔들렸다.
아델리아의 얼굴에 경악이 들어앉았다. 란델이 지켜보는 가운데 키리에가 숨을 참았고 플란츠가 검을 쥐었다.
칼리안의 눈에 칼날이 세워진다.
- 파슷!
대마법사의 실드가 지워진다.
오러가 빛을 잃는다.
- 카아아아아앙!
검과 검이 충돌했다.
* * *
키리에의 검은 빠르다.
4층 사람의 검은 화려하다.
그냥 그 정도의 차이만 눈에 보인다. 키리에가 이기든 플란츠가 이기든, 둘의 대련이 누구에게 배움을 주든 말든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가끔씩 흘러나오는 4층 사람의 살기나 키리에의 검에 얽히다 사라지는 오러의 기운에 선득해지는 감각도 무시했다.
텐실에 간 뒤라 한들 바다를 보겠다며 궁을 나설 기회가 있기는 할지. 떠오르는 낯선 의문에 생각을 맡겨둔 채로 오가는 칼 대신 밀려들다 되돌아가는 먼 바다의 파도만 지켜봤다.
"갔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칼리안이 이런 말을 했다.
무슨 소리인가 하여 곁을 쳐다보니, 란델이 저를 닮은 깊고 짙은 바다를 바라보는 시선을 알았던지 웃는 낯을 하고 있었다.
"바다요, 란델 형님. 꽤 자주 갔었습니다."
"그러하더냐."
"네."
그들과 다소 떨어진 곳에서 검을 겨루는 키리에와 플란츠에게서 조금도 눈을 떼지 않으면서, 아델리아에게 '부탁을 들어주면 하피의 마석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겠다'는 거래를 걸면서, 또 한편으로는 란델의 시선을 따라 속내를 들춰본다.
그러니 생각을 할수록 참 녹록한 곳이 없는 막냇동생을 두게 되었다고.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려니 가느다란 목소리가 이어져 들려왔다.
"어릴 때 바다에 갔었는데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저는 바다에 드는 것을 꺼립니다만 체이스 형님은 아니었습니다. 같은 사고를 겪었는데도 오히려 수영을 배우고 틈이 날 때마다 바다를 찾아갔습니다."
"왕궁에서 가깝지는 않을 텐데."
"네. 가장 가까운 곳을 가더라도 말을 타고 오래도록 달려야 바다가 나옵니다."
아델리아의 고민이 이어지고 또 다른 곳에서는 대련이 오가는 동안, 지난한 파도를 담은 듯한 말이 나지막이 계속됐다.
"그래도 좋아해서요. 저나 체이스 형님이나. 저는 꺼리면서도 좋아했고 체이스 형님은 꺼리지 않기 위해 좋아했고. 그래서 몰래 나가서 보고 오고 핑계를 대어 구경을 나가고. 그렇게 지냈습니다. 체이스 형님이 세자이던 시절에도, 왕위에 오른 이후에도."
"지겨워지지는 않은 모양이구나."
"네. 이상하게도. 그렇게 많이 찾아갔어도 늘상 들려오는 파도소리가 매번 달라서, 그것이 신기하다가도 마음이 벅차서 늘 그렇게 갔습니다."
"그래."
"사람을 다루고, 장미를 키우고, 그런 것에 지겨워지면 얘기해주세요. 혼자 찾아가기에 막막하고 번잡하다 하시면 스승님을 불러서라도 제가 몇 번이고 바다에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숲이 더 좋았다 하면."
"그러시면 숲에 모셔가야죠."
"듣기에 나쁘지는 않구나."
"겪기에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한 번을 쳐다보지도 않고 되돌아오는 말이 정말로 듣기에 나쁘지 않다. 그래서 란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역시 보지 않았으면서도 칼리안은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하마."
그래서 다시 한 번, 대답을 건넸다.
"네."
답이 돌아왔다.
그 짧은 한 글자의 대답을 되뇌듯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텐실의 바다가 이곳의 것과 같을지에 대한 의문을 새로 가진 채 계속하여 바다를 눈에 담았다.
"아델리아. 고민이 긴데."
란델과의 대화를 일단락 지은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반대편 옆에 앉아있던 아델리아를 향해서였다.
"어린 놈이 어르신을 어떻게 부려먹을 줄 알고 거래를 선뜻 받아."
"생각없이 사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생각없이 힘자랑하는 짓은 안 해."
"웃기는 소리 하네."
"앨런 마나실이 마법만 가르치냐? 말버릇 안 챙겨?"
"내 스승님한테 말버릇 안 배운 게 다행인 줄 알아."
그리고 사실 마법도 잘 안 가르쳐 주셔.
투덜대듯 덧붙인 칼리안이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맞붙고 있는 키리에와 플란츠의 대화를 들었다는 것처럼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할 말을 형님께서 해주시네."
아무래도 저 둘이 칼싸움만 하는 것은 아닌가보다고. 대충 그렇게 생각하고 넘긴 란델이 시선을 돌렸다. 한동안 지켜보지 않았던 두 사람과 세 자루 검의 싸움을 눈에 담았다.
그런데 그때.
- 반짝!
칼리안의 팔찌나 반지에서 몇 번 쯤을 보았던, 하지만 색이 다소 다른 옅은 빛이 둘째 동생의 손목을 맴돌았다.
그와 동시에 상황이 급변했다.
키리에의 검에 머무르던 푸른 오러가 그 어느 때보다 더 휘황한 빛을 냈다.
"뭐야?"
그것을 눈에 담은 직후 아델리아로부터 마력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와 거의 동시에 상황을 눈치챌 수 있었다.
사고.
사고가 생길 지도 모르겠다고.
휘트린에 가던 날 생길 뻔했던, 그러나 발칸의 부군단장이 세운 얼음 벽 덕에 일어나지 않았다 했던 그런 사고가 일어날 지도 모르겠다고. 제 오러를 다스리지 못한다는 키리에의 검에 맺힌 길고 긴 오러를 플란츠가 막아낼 수는 없을 테니 이번에는 아델리아가 나서서 실드를 세우려는 생각인가보다고.
그러니 이번에도 사고를 막겠거니.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 막겠거니. 그런 결론을 낸 짙푸른 눈이 앞을 주시했다.
그런데 칼리안이 손을 뻗었다.
마나를 움직였다.
- ······ 우우웅!
란델의 예상을 뒤엎는 힘이었다.
그 힘에, 신속하게 만들어진 아델리아의 실드가 휘청이는 듯한 움직임을 냈다.
- 파슷!
그러더니 바람 앞에 놓인 양초의 불처럼 요동치다 픽 하고 사라졌다.
"너······."
아델리아의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
그 말의 대상이 되었을 칼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어느새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 카아아아아앙!
이제껏 들려오지 않았던 굉음이 울려퍼졌다.
저도 모르게 눈을 찌푸린 란델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어둠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앞을 쳐다봤다.
두 자루의 검.
한 자루의 검.
한 발을 뒤로 빼 더 이상 몸이 밀리지 않도록 버티고 선 플란츠가 보였다. 그 손에 움켜쥔, 어느새 하나로 합쳐 든 검. 시나스타라 부르던 두터운 검이 플란츠의 머리 위를 단단히 막아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시나스타의 위에는.
형형하던 빛을 다 지워낸 또 다른 잿빛의 검, 키리에의 검이 막혀든 채 멈추어 있었다.
"저 어린 놈 지금 내 실드 일부러 지운 거지."
"무상한 질문을 하는구나. 마법사."
아델리아의 중얼거림에 별 것 아니라는 듯 대답한 란델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바다를 향했다.
"역시."
칼리안의 말이 들려온다.
빌헬름 관에서의 시오나, 휘트린 영지로 가던 길에서의 칼리안. 그 둘에 이어 이번에도 또 오러를 다루지 못하는 실수를 하여 누군가를 다시금 위험에 빠뜨리게 되면, 과신해도 좋다 했던 재능을 지니고도 검을 쥐는 것에 겁을 먹게 될까봐.
"형님이 막아내실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오러 집어넣을 줄 알았어, 키리에."
그래서 아델리아의 실드를 지워버리고 둘의 곁으로 달려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지켜보기를 택한 칼리안의 말이 이어진다. 플란츠가 어떻게든 키리에의 검을 막아내고 키리에는 어떻게든 제 오러를 집어넣게 될 줄 알았노라고.
란델은 알지 못했으나 언젠가 제 심장으로 치닫던 키리에의 검을 끝끝내 막아내지 않았었던 플란츠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시나스타를 검집에 집어넣었다.
"기사 한 명의 부상이 심하다 들었는데."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돌아가면 이야기하려 했노라고.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가 없어서 알리기를 미뤄왔노라고. 그렇게 답하려던 칼리안이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플란츠의 말이 이어진 까닭이다.
"발칸에 남겠다 했다고. 히나가 그랬어."
"그렇습니까."
"그렇게까지 해 가며 발칸 수를 유지시켜 줬는데 내가 줄이면 안 되잖아."
하나 남은 팔로 검을 다시 연습해서라도 발칸에 머물겠다는 기사가 있는데, 그 놈 얘기에 상심해서 키리에의 검에 싹뚝 잘려나가면 안 되니까. 그래서 시나스타를 다시 들었노라고. 안 죽고 막았다고.
그렇게 알려오는 목소리가 담담하다.
"내 아우님께서 다누에게 생각보다 더 화를 낸다 했더니, 그 일 때문이었나."
"네. 그 일 때문입니다."
"숨기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앞으로는."
칼리안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아우님께서 아끼시는 만큼 나도 그 미친놈들 아끼니까. 죽었든 다쳤든 숨기지 말고 얘기해달라고."
생각보다 완두콩이 더 많이 자라난 모양이다.
기껍기 짝이 없는 말에 칼리안이 슬쩍 웃었다.
"알겠습니다."
"한 쪽 팔로 검 쓰는 법은,"
"형님이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아니."
플란츠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우님께서 가르치셔야 더 오래 살 것 아냐."
"그럼 제가 가르칠게요. 오래 살아야 되니까."
"알았어."
"네."
고개를 끄덕인 플란츠가 저벅저벅, 란델이 앉아있던 곳으로 걸어가 란델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앉았다.
간신히 검을 집어넣는 것으로 오늘의 할 일을 마친 팔에서 찢어질 듯한 통증이 인다. 힘을 내느라 악다문 턱이 저릿하다. 그렇게까지 해가며 제 명을 연장시킨 적은 없던 탓에 낯설게 느껴지는 몸의 상태가 본래대로 돌아오기를, 가만히 눈을 감은 채 기다리기 시작했다.
조용히 무릎 위에 올려 둔 플란츠의 주먹이 가늘게 경련하는 것을 본 란델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오늘 내내 고요했을 바다를 여상하게 바라봤다. 어차피 고쳐줘야 할 상처도 아니었으니 모르는 척 하기로 하면서.
그 둘을 지켜보던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 자박.
이제껏 아무 말 없이 한 자리에 서 있던 키리에에게 한 걸음을 더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올려 그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키가 더 컸나, 어깨가 올라갔는데."
검집에 넣지도 않고 내려뜨려 둔 제 검을 줄곧 바라보고 있던 키리에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잔뜩 잠겨든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키가 더 컸냐니까 이상한 대답을 하고 있어."
"믿어주신 덕분에, 알 것 같습니다.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칼리안이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때에도 그렇게 말했었는데. 키리에."
"그랬습니까."
"그랬었어. 훨씬 나중이지만."
"이번에는 검의 길에 오르는 것까지 꼭 다 보여드리겠습니다."
"······ 응."
"감사합니다."
끄덕끄덕.
말없이 고개만 움직인 칼리안이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플란츠가 앉은 쪽을 가리켜 보였다. 그 의미를 알아들은 키리에가 입을 열었다.
"저하께도 감사 인사 드리겠습니다."
다시, 끄덕끄덕.
고개가 움직이고 웃음이 들어선다. 차마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만큼 기분이 좋아서 말 대신 웃음만 지었다. 대신 키리에의 말이 이어져 들려왔다.
"키가 더 자란지 오래됐습니다. 히나 키 자란 것만 눈치채지 말고 제 키도 알아봐 주십시오. 그리고 제 생일 때도 선물 주십시오. 서운합니다."
고요하던 입가에 소리가 든다.
칼리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어. 키리에."
* * *
향이 좋다.
색도 좋다.
심지어 씹는 재미도 있다.
그러니 칼리안 가라사대.
굶다 먹는 육포는 더 맛있다.
"육포 맛있네요. 소금도 들고."
키리에가 플란츠를 찾아가 감사 인사를 전하고, 플란츠가 거봐라 나는 내 검으로 내 목숨 구했다 그러니 너도 빨리 검의 길에 올라서 내 아우님 좀 제대로 도와봐라 해 가며 감사 인사를 받고, 란델이 그런 둘의 무용한 말싸움에 귀를 닫아 건 뒤.
해가 뜨기 시작했다.
'해가 뜨면 동이 트고 동이 트면 새가 우는데 저기 저 새들이 울고 있지 않습니까. 아직 어두운 건 모르겠고요, 저기 저 새들도 발딱발딱 일어나서 벌레 잡아 밥을 먹는데 형님의 이 어여쁘고 곱디고운 동생이 새 울음 소리보다 제 뱃속의 꼬르륵 소리를 더 크게 듣고 있으면 이건 정말 너무 서러운 일 아닙니까. 이러다 배고픔에 지쳐 뽀얀 제 피부 한 자락이라도 상해서 드미레아가 저한테 너 이제 안 예쁘니까 우리 그만 파혼하자 안녕 즐거웠어 해버리면 형님이 책임지실 겁니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어차피 아침도 됐으니 이제그만그육포좀내놓으시죠.'
그리고 칼리안은 이렇게.
대련을 마치고 언덕을 내려오는 내내 달밤에 나선 개 한 마리가 하울링을 하듯 짖어댔다.
정말이지 환장하도록 어여쁘신 아우님의 성화에, 플란츠는 결국 육포를 내어 줬다. 아직 해도 다 안 뜬 새벽이든 말든 뭐가됐건 아침밥을 먹으면 그 때가 바로 아침이라는 요상한 주장이 터져나올 즈음의 일이었다.
그리고 딱 그 즈음, 아델리아가 다가왔다.
"설명해라. 방금 그 일."
이 말에 칼리안이 짐짓 순진한 얼굴을 만들어보이며 대꾸했다.
"무슨 일을 설명해?"
"말을 해줘야 알아?"
"해줘야 알지, 안 해주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방금 네가 내 실드를 없앴는데 그걸 왜 몰라?"
"아아. 그거."
"그래. 그거."
"마석은 안 궁금해하기로 한 거야?"
"······ 궁금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접히지 않을 마법사의 호기심에 칼리안이 씩 웃었다. 그리고 육포가 담긴 종이 봉투를 손에 꼭 쥔 채 입을 열었다.
"실드가 흔들리니까 놀라서 멈춘 거잖아. 네가 작정하고 마법 쓰면 나도 못 없애. 대마법사가 부리는 마법을 내가 어떻게 없애겠어. 그냥 잠깐 흔든 거야. 네가 쓰는 마나 속에 내 마나를 섞으면 충돌이 일어나니까 그 반발력에 잠시 없어지는 거야."
"뭐야. 이건 왜 이렇게 쉽게 말해주는데."
"키리에 앞에 실드 둘러 준 거잖아. 고맙다는 인사 하는 건데. 내가."
"빚지기 싫다는 소리를 신기하게 하네."
"알아들었으면 그것도 고맙고."
칼리안의 대답에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뗀 아델리아가 입을 열었다.
"무슨 부탁인데."
"들어 줄 거야?"
"그래."
"하피가 살아있어."
제안을 수락하자마자 궁금증에 대한 답이 들려온다. 지나치게 순순한 말에, 그리고 그 속에 든 말의 뜻에 잠시 놀란 아델리아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아직 다 밝아지지 않은 하늘 아래 검게만 보이는 검붉은 눈을 들여다보면서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못봤었나 본데, 네가 라시드 브리센을 뺏어갔던 날에도 하피 두 마리가 공격을 했어. 그 전에도 한 마리."
"······ 그런데 앨런 마나실 머리 색은 왜 그래?"
"그래서 이상하다는 거야. 시스파니안께서 하피가 멸족했다고 착각하고 내 스승님의 조상님에게 그런 저주를 부리지는 않으셨을 테니까."
"그 하피한테서 얻은 마석인 거야?"
"하피한테서는 마석 안 나왔어. 이건 하피 기르던 놈들이 가지고 있던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하피가 공격을 했다며."
"하피 몸 속에서 나온 건."
잠시 말을 멈춘 칼리안이 아델리아의 심장 근처를 가리켜 보였다.
"그 돌. 너도 가지고 있는 그 돌이었어, 아델리아. 하피가 제 심장같은 마석을 뺏기고 대신 그 돌을 심장이 있을 곳에 대신 넣은 채로 나를 공격했어. 멀쩡히 살아서."
칼리안이 자신의 마법사 주머니 속에 꼭꼭 감춰 둔 마석의 마력을 느끼고 캐물었던, 누가 뭐래도 대마법사가 맞기는 한 아델리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델리아는 정말 모른다.
거짓으로 꾸며낸 표정이나 반응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아델리아가 라시드 브리센을 구해갈 만큼은 그들과 관련이 있지만 하피의 일에 대해서까지 알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님을 알아낸 칼리안이 한쪽 입술을 슬쩍 올렸다.
일대 일의 거래를 굳이 왜 하겠나.
뭐가 됐든 내가 더 많이 챙겨야 좋은 거래지.
"제온에서 그랬다는 거야?"
"그걸 내가 부탁하려는 거야, 아델리아."
칼리안이 붉은 눈을 빛냈다.
"하피. 제온에서 멸족된 하피를 어떻게 다시 살려냈는지, 얼마나 더 남았는지, 하피 말고 다른 몬스터가 더 있는지. 이 일에 대한 정보를 좀 알아봐 줘."
마법사의 호기심 한 번과 맞바꾸기에는 다소 과할지도 모를, 하지만 그 역시 호기심이 들 테니 거절하지는 못할 조건을 이야기했다.
아델리아가 또 한 번 눈을 찌푸렸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어여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자고로 미모란, 이렇게 써먹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