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장. 자고로 미모란(3)
카이리시스, 그리고 지그프리드.
넓디 넓은 카이리스를 남과 북으로 나눈다면 북쪽 지역의 중심이 되는 곳은 당연히 수도 카이리시스일 것이다. 물론 위치 상의 중앙을 뜻하는 표현이 아니라 영향력에 있어서의 중심을 말함이다. 위치를 따진다면 사실상 카이리시스는 카이리스의 북쪽에서도 한참 더 북쪽에 위치해 있었으니까.
그리고 동일한 기준에서 남쪽 지역의 중심을 찾는다면 단연 지그프리드를 떠올려야 할 터였다. 정작 본인들은 어딘가의 중심 세력으로 여겨지길 바라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런 평가는 공작령으로서의 지그프리드를 두고 따져보았을 때 나오는 것이었다.
공작령이 아닌 지그프리드는 그저 거대하고 평화로운 땅일 뿐이었다. 포도와 레몬, 올리브가 잘 자라고 커피의 향이 짙은 곳이었다. 초대 공작 퀴트로스 혼 지그프리드의 고향이 지금은 세크리티아 남부에 속해 있는 어느 어촌 마을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떻게든 해산물을 공급해 와 하루에 한 끼니 이상은 해산물로 배를 채우는 단순 무식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기도 했다. 한겨울이 되어도 눈을 보기 힘들 만큼 언제나 따뜻하고 여유로운 그런 땅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시스파니안.'
'응.'
'나 궁금한 게 있는데요. 물어봐도 괜찮아요?'
'아니.'
'비를 싫어한다면서요. 그런데 왜 그렇게 더운 곳에 둥지를 마련했어요?'
지극히 위대한 고룡의 둥지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대사막이 생기기 전부터도 카이리시스는 내내 추웠으니까요. 만약 이곳에 둥지를 지었으면 적어도 겨울에는 비를 만나지 않게 됐을 텐데요.'
'물어봐도 괜찮다고 안 했어.'
'그래도 궁금하니까. 대답해주면 안돼요?'
'······ 세렌티가 정해 준 곳이야.'
'당신 둥지를?'
'그래.'
'그럼 다른 용들의 둥지는요?'
'각자 알아서.'
'아, 억울하겠다. 혼자만 마음에 안 드는 곳에 집을 지었네.'
'억울하지 않아.'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그래도 나랑 지내는 동안에는 카이리시스에 있어요.'
'너랑 지내는 동안이라니.'
'눈이 내릴 때마다 같이 산책도 하고 눈 구경도 같이 해요. 꿀이 가득 든 차를 앞에 놓고 책을 읽어도 좋고 그냥 나란히 앉아서 창 밖을 봐도 좋고요. 따뜻한 모포 속에서 꾸벅꾸벅, 둘이 같이 졸아보기도 해요.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여유를 부리다 어느새 봄이 오면 혹시라도 봄비를 반가워하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내가 왜 너랑.'
'나 지금 청혼하는 거예요. 당신한테.'
아주 잠시, 영원같은 세월의 유일한 봄이었던 짧은 시간.
'나 당신 좋아하는데요. 시스파니안. 아마도 꽤 오래 전부터요.'
그 찰나같은 봄날을 맞이하기 이전까지의 시스파니안이 늘 머물렀던 곳. 지그프리드.
때문에 양신전쟁을 치르는 동안에도 악신에 의한 피해를 입지 않은 유일한 곳. 그렇게나 온전히 남아있던 땅을 지니고도 어딘가의 중심이 되고자 한 적 없던 이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
그렇기 때문에 견제가 아닌 존경을 받는, 지금의 브리센을 제외한 모두가 우러르는 불가침의 영역. 그런 곳이 바로 지그프리드였다.
"파비안으로 지그프리드를? 라시드 브리센이?"
"살기 접고 말해라."
"이상하잖아. 라시드가 그렇게 생각없는 놈이 아닌데."
"살기부터 넣어라. 따갑다."
칼리안의 얼굴에는 숨기지도 못할 의심이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아델리아는 그런 의심에 답할 생각이 없다는 듯 거슬리는 것부터 없애도록 요구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 란델의 방 안에 키리에가 함께 있었는데도 노크에 대한 아무런 반응이 없음을 안 그때부터 흘려내던 살기를 꾹꾹 눌러 없앴다.
콕콕 찔러오던 기운이 사라졌음을 안 아델리아가 고개를 휘적거렸다.
"라시드 브리센이 파비안으로 갔다. 파비안을 이용해서 지그프리드를 몰아넣을 생각이다. 그렇게 말하는 걸 들었다니까."
"누가?"
"비밀."
"그럼, 라시드가 파비안 영지를 어떻게 이용해서 코끼리들을 노린다는 건지. 뭘 하든 정말로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기는 하는 건지. 내가 궁금한 게 많은데, 아델리아."
"이 어르신 피곤하다. 그만 캐물어라."
"내가 협박하면 말해주나?"
"피곤하다니까. 그리고 나 리베른 사람이다. 여기 정세를 내가 어떻게 알아? 재미도 없는 걸."
"그 나이 먹도록 너도 뭐든 배운 게 있기는 할 것 아냐?"
"새파랗게 어린 놈아. 말 좀 예쁘게 해라."
끄덕끄덕.
아델리아의 말이 틀리지는 않다는 듯 또 순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플란츠가 보인다. 그 모습에서 애써 고개를 돌린 칼리안이 잠시 이마를 짚었다.
"아무튼······ 잠깐만. 스승님이랑 얘기 좀 할게."
"앨런 마나실 부르려고?"
"안 불러."
"알았어. 너무 시간 끌지는 마. 나 없으면 세르제인 목이 언제 떨어질지 모르거든."
"지금 세르제인을 호위하는 중이야?"
"뭐, 일단은?"
칼리안이 눈매를 굳혔다.
"세르제인의 일에 굳이 관여하지 않는 것 같았으면서 어느새 도와주고 있고······."
세크리티아의 린 후작저에 쳐들어왔던 아델리아는 분명한 적이었다. 데블란의 편에 서서 키리에를 죽이려 들었고 아르센과 에우리아를 무력화시켰다. 앨런이 제 때 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칼리안이 아델리아와 이렇게 정다운 대화를 나누는 일은 절대로 없었을 것이다.
그 뒤 세크리티아의 브리지트 숲에서 마주쳤던 날의 아델리아는 세르제인의 뒤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다만 세르제인의 목숨을 지켜주는 입장으로는 보이지 않았었다. 제 공간 속에 숨어서는 자객의 습격을 받은 세르제인을 그저 관망하지 않았던가.
"내 사람들을 공격했으면서 나는 또 살려놓질 않나, 그러다 또 마음을 바꿔먹고선 라시드 브리센이 죽기 직전에 빼내가기도 하고."
그런데 칼리안이 라시드의 수면향에 취해 죽을 뻔했던 날의 아델리아는 세르제인의 부탁을 받고 칼리안을 찾아왔다 했었다. 그러다 휘트린 영지에서 마주쳤을 때에는 칼리안의 손에 죽기 직전이었던 라시드 브리센을 빼내어 도망쳤다.
누군가와 함께 워프하는 것이 불가능한 서클임에도 그것을 해냈다. 칼리안을 '납치'했던 날에만 해도 칼리안과 함께 워프할 수 없던 아델리아였으니, 짧은 사이 돌의 힘을 더 끌어다 쓰는 방법을 익혔다는 말일 터였다.
하기사.
그정도가 되니 이렇게 제멋대로인 행보를 보일 수 있는 것일 터였다.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을 만큼의 능력은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다른 이들에게 목줄을 붙들려 있을 만한 성격도 아니었고.
"무슨 꿍꿍이야, 아델리아."
"꿍꿍이라니. 대뜸 무슨 소리야?"
"무슨 생각으로 세르제인을 돕는 거야?"
그래서 더 의문이 든다.
라시드의 편으로 돌아선 줄 알았던 아델리아가 여전히 세르제인의 편에 서 있다 하니 더더욱 의심이 된다. 무능한 텐실의 왕이나 가짜 왕세자 세르제인의 말을 듣고 있어야 할 이유를 가늠하기가 어려웠으니까.
때문에 미간을 찌푸리던 칼리안이 덧붙였다.
"대체 넌 누구 편이냐고 묻는 거야. 아델리아."
"대마법사 아델리아는 아델리아의 편이지."
스스로를 마치 타인처럼 지칭한 아델리아가 한 쪽 눈을 찡긋해보이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더니 평소의 유쾌한 얼굴로 되돌아와 말을 이었다.
"인생 뭐 있나. 재밌으면 그만인 것을 무슨 편을 나눠. 머리만 아프게."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
그에 대해 다시 머리를 굴려보려는데 칼리안의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내 아우님께서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지를 알게 되면, 저 연로한 마법사가 이 쪽에 붙을 수도 있겠군.
혹시나 훔쳐듣지는 않을까 걱정되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한껏 더 낮아진 목소리. 안그래도 목소리가 낮은 플란츠의 것이었다.
- 아델리아가 제 쪽으로요.
- 재밌는 게 좋다잖아.
- ······ 형님 혹시 저 재밌으십니까.
- 그렇다고 얘기를 했었는데. 아무래도 아우님께서 내 말을 잊으셨나.
- 설마요. 형님 말씀을 잊을 사람입니까, 제가.
대답을 전하던 칼리안이 긴 숨을 만들어 내쉬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몇 초 사이에 둘의 대화가 빠르게 오갔다.
- 제가 재밌다는 말씀이신 줄은 몰랐죠. 뭐 어쨌든, 형님은 그럼 제가 아델리아와 손을 잡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이십니까.
- 저렇게 언제 또 나타나서 무슨 사건을 일으킬지 모르는 채로 두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은데.
- 글쎄요. 그 편이 낫다고 하기에는.
- 아우님이 혼자 무리하시다 다칠 일도 적어질 것 아닌가. 마나실 후작은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위치라지만 아델리아는 아니잖아.
- 저 비싼 목숨이라, 형님한테 백 번을 맡겨둬도 아델리아에게는 못 맡깁니다. 제가 다치는 게 걱정되시면 아델리아를 불러들일 게 아니라 형님이 힘을 더 키우셔야죠.
- 키우고 있어.
- 그러니까요. 이렇게 열심히 쑥쑥 잘 자라고 계시는데 뭐하러 다른 놈을 불러들입니까.
- 똑같이 열심히 쑥쑥 자라신 아우님께서는 어김없이 또 짖으시나.
- 저는 그게 재밌습니다. 아무튼 제가 아무리 재밌다 해도 아델리아가 제 손 안에 완전히 들어올 일은 없을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형님같지는 않으니까요. 발칸의 마력 융합보다 불안정한 저런 사람을 끌어안고 언제 터질까 걱정하며 지켜보느니 창 밖에서 시원하게 터지도록 내던져 두는 게 낫습니다. 게다가······.
플란츠의 말에 반대의 뜻을 보인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플란츠를 향해 살짝 웃어보이며 말을 더했다.
- 벌써부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예쁨 받고 싶지는 않은데요. 자고로 미모란 아껴 써야 더 값어치가 나가는 것 아닙니까.
- ······ 하.
말을 괜히 꺼냈다.
이렇게 후회하는 것이 분명한 플란츠의 얼굴에 짜증이 올라섰다. 그 표정을 보며 다시 한 번 생긋, 작게 웃어보인 칼리안이 아델리아를 쳐다봤다. 그러더니 소매 아래로 흘러내려 있던 자신의 팔찌를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아델리아. 도망가지 말고."
"알았다니까."
칼리안과 플란츠가 한 두 마디 대화를 주고받았다 여긴 아델리아는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의 반지와 플란츠의 팔찌가 동시에 빛나는 것을 이미 보기는 했지만 '새로운 동업자를 구할지 말지에 대한 진중한 의견을 주고 받던 중 쑥쑥 잘 자라는 완두콩을 향해 마찬가지로 많이 성장한 짖는 소리가 끼어들다 결국은 협의가 무산된' 길고 긴 대화가 오갔다 하기에는 지나치게 짧은 시간이었으니까.
어찌됐건 앨런 마나실을 불러오지는 않겠다 하고 제 나름대로 칼리안에 대한 마음의 빚이 없지도 않았으니 일단은 말을 들어주기로 한 것이었다.
- 스승님.
- 네, 왕자님.
- 잠시 여쭐 게 있습니다.
- 말씀하시지요.
- 제가 아는 것 외에, 브리센에서 지그프리드에게 시비를 건 일이 또 있습니까. 라시드 브리센이든 그레이 브리센 후작이든, 브리센과 연관된 다른 귀족 가문이든. 어디든지요.
- 그것은 왜 물으십니까. 또 무슨 일이 터졌기에.
- 라시드 브리센이 파비안에 있다고 합니다. 라시드가 란델 형님을 회유한다 한들 코끼리들을 건드릴 수는 없다는 걸 모두가 아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요.
- 이번에는 파비안입니까.
- 네. 파비안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브리센이 시비를 걸고 나선 일이 있었습니까.
- ······ 그것을 시비라 해도 좋을는지.
-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칼리안의 말에 잠시 말이 없던 앨런이 입을 열었다.
- 휘트린에 싸움이 일었을 때 제가 왕궁에 없던 것이 바로 그 일 때문입니다. 브리센에서 퍼뜨린 소문 때문에 잠시 대장 코끼리와 대화를 나누었지요.
- 제가 드미레아와 손을 잡고 전하와 형님을 해치려 했다는 소문이요. 그 이야기가 벌써 돌고 있습니까?
- 아닙니다. 그런 소문은 나지도 않았습니다.
- 아니면요?
-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 그럼 어떤 소문이 돈다는 말씀이십니까.
- 아직 소공작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만.
앨런의 설명이 잠시 이어졌다.
브리센 측에서 내보내고 있는 소문. 말도 안되는 그 이야기를 칼리안에게 전했다.
- 형님이 드미레아랑 테이블 밑에서 손을 잡았다고요.
- 네. 그런 소문입니다.
- ······ 아. 그랬구나.
- 네. 그랬다지요.
"아······ 형님이."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플란츠가 고개를 돌렸다.
이제야 움을 틔운 고사리 순 같은 눈을 한참동안 쳐다보던 칼리안이 양손을 움직였다. 그러더니 뽀얀 두 손으로 곱디고운 제 입을 가렸다. 그것에서 멈추지 않고,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는 듯한 얼굴을 만들어 보였다.
그 표정을 본 플란츠가 깊은 불쾌감을 느꼈을 때.
"형님이······ 형님이 저한테 어떻게 그런 짓을······ 제가 그렇게 믿음을 드렸는데, 어떻게······."
채 맺어지질 않는 말이 뒤를 잇는다.
"뭐."
"하정말세상에이럴수가시스파니안이시여."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렸다.
'형제와 정혼자에게 배신당한 것을 알게 된 3왕자'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란델의 방을 짜랑짜랑 울리기 시작했다.
* * *
바다 위에 떠오른 푸른 별빛을 잊지 않았다.
새하얀 제복의 마법사들이 띄워낸 수많은 푸른 빛무리 사이에서도 참 유난한 빛을 내던 파란 불꽃 한 송이를 기억하고 있다.
그날, 그 바다를 지켜봤던 곳.
레이븐의 다리에 기대 앉아 시간을 흘려보냈던 곳.
- 카아아앙!
이제 두 번 다시 바다 앞에 서게 될 일은 없으리라 여기던 마음을 되돌리게 만들었던 푸른 별들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던 그 언덕에 올라 있었다.
- 카아앙, 카앙!
- 카가가강!
다만 이번에는 레이븐에 기대 앉지 않았다. 대신 적당한 크기의 바위 위에 란델과 나란히 앉아, 어둑한 달빛에도 아랑곳않은 이들의 검이 서로 얽혀드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 카각, 카아앙!
횡으로 치닫던 잿빛 검을 막아내는 두 자루의 검이 보인다. 어둠을 삼킨 듯한 검을 들어 공격을 몰아붙인 이는 키리에였고 서로 다른 색의 검을 교차하여 막아낸 것은 플란츠였다.
- ······ 우웅!
키리에의 검날에 엷은 오러가 들었다 지워진다. 그것에 겁먹지 않은 청은빛의 시나스타가 키리에의 어깨를 노리며 뻗어나갔다.
순간적으로 몸을 튼 키리에의 신형이 재빠르게 움직여 플란츠의 공격에서 벗어났다. 그러자 그리 움직일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어두운 쪽의 시나스타가 키리에의 발을 막아섰다.
- 휘이잉!
- 카앙!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제가 오러를 조절하는 법을 익히려면, 안심하고 싸울 수 있는 왕자님보다는 제가 조심해서 상대해야 할 저하와 겨루는 쪽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 네가 형님을 싹뚝 자르면 어떻게 하려고, 키리에.'
'그렇게 되기 전에 왕자님께서 막아주실 것 아닙니까.'
키리에는 기어코 검술을 봐주겠다 나선 칼리안에게 이렇게 절충안을 내밀었었다.
'신경 쓰이는 일도 생겼지 않습니까. 직접 대련해주지 않으시더라도 왕자님께서 제 검을 보아주신다는 점은 다르지 않습니다. 무리하지 말고 그렇게 해주십시오, 왕자님.'
아델리아를 마주한 일.
그리고 앨런에게 들은 헛소문.
안 그래도 그 두 가지 일로 허기가 더 심해진 칼리안이다. 때문에 칼리안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간헐적으로 오러가 들었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잿빛 검을 쥔 키리에와 자신만만하게 제 검을 들고 나선 플란츠의 대련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 카가강! 카아아앙!
찔러드는 검격을 막은 키리에가 발을 박찼다. 그 발 끝에 들던 소리가 일순간 사라지는 것이 느껴진다. 아직 칼리안의 속도를 따르지는 못한다지만 제 몸의 무게를 흩뜨리는 법까지는 곧잘 쓰게 된 모양이다.
"재미 없으시죠, 란델 형님."
"염려 말거라. 이런 소란함만으로도 바람이 드니."
"네."
플란츠를 상대로 언제 사고를 일으킬지 모를 키리에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던 와중에도, 잠시 짬을 내 란델을 챙겼던 칼리안이 웃었다. 둘의 검격을 제대로 보고 즐길 눈이 없다 하더라도 나름대로 흥미를 느끼며 구경하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 카아앙! 카강, 캉!
키리에의 검이 달빛을 삼켰다.
그 달빛을 다 담은 청은빛의 검날이 잿빛 검 위로 잔상을 흩뿌린다.
제 검을 다시 하나의 두터운 검으로 합치거나 길다란 창의 모양으로 변형시킬 짬이 없을 터였다. 때문에 플란츠는 시나스타를 두 자루로 나누어 든 그 상태로 키리에를 계속 상대하고 있었다.
- ······ 웅, 우우웅······!
또 한 번, 키리에의 검에 오러가 얽히다 이내 사라졌다.
어떤 상태에서 오러가 맺히는지를 가늠하지 못한 키리에의 입술이 꾹 다물리는 것이 보인다. 그 새를 놓치지 않은 두 자루의 검이 서로 다른 빛의 꽃을 피웠다.
세상에 더 없을 즐거운 광경이다.
저 앞에서 서로를 대하고 있는 두 놈이 결국은 다 칼리안의 제자나 다름이 없으니, 지켜보는 재미가 없을 수가 있나.
때문에 조금 전 란델의 방에서 웃음을 터뜨렸을 때보다 더 즐거운 얼굴이 된 칼리안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아델리아."
"왜?"
"왜 안가."
그래.
아직도 안 가고 계속 따라다니고 있는 백발의 연로한 마법사를 향해서.
"가. 엄청 바쁘다며."
"나 붙잡은 건 너야."
"내가 널 언제 붙들었어. 세르제인 위험하다며. 빨리 가."
"세르제인 칼 잘 쓰던데. 금방 그렇게 날아갈 목 아니야."
"말이 달라졌는데, 아델리아."
"여하간 걘 괜찮다는 소리야."
"대체 왜 안 가는데?"
"그 마석 대체 뭐야?"
"알고 있잖아? 하피 마석인 거."
- 카아아앙, 카강!
- 캉! 카가강!
"대단히 귀한 마석도 아니잖아. 뭐가 신기하다고 안 가는 거야?"
"나 마법사다."
"내가 그걸 모르겠어, 아델리아?"
"그거 화석에서 캔 마석 아니야. 화석에서 캔 건 크기부터 달라."
"그래서, 뭐."
"앨런 마나실이지. 앨런 마나실이 준 거지."
스쳐 지나가는 듯한 푸른 오러가 빛을 낸다.
한 발을 물렸던 플란츠가 그 오러를 향해 달려들었다. 찔러드는 검을 키리에가 막았고 베어내려는 검을 플란츠가 흘려보냈다. 달려드는 공격을 피해내고 내리치는 검격에 몸을 물렸다.
서로를 향해 치닫는 검은 세 자루인데 단 한 자루의 청은빛 검에서만 잔상이 흘러나온다. 그 빛을 담담히 눈에 담던 칼리안이 대답했다.
"아니야. 얘기가 왜 스승님한테로 가?"
"하피 끝장낸 거, 마나실 가문이잖아."
- 카아아아앙!
서로의 중심을 받치듯 교차한 두 자루의 검 위로 키리에의 검이 떨어진다. 그렇게 공격을 막아낸 검을 비틀며 한 자루의 검을 빼낸 플란츠가 키리에의 심장을 노렸다.
재빨리 몸을 돌린 키리에의 검 끝에 푸른 기운이 오르다 내렸다. 그 서늘함을 고스란히 눈에 담은 듯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랬지. 그랬다 했지."
"아니야?"
두 개의 저주였다.
마지막 남은 하피를 없앤 까닭에 시스파니안의 원망을 받았다던 인간 마법사. 때문에 제가 죽여 없앤 하피를 꼭 닮은 외형으로 평생을 살다 간, '마나실'이라는 성을 지닌 어떤 마법사.
시스파니안의 원망은 그것이 다였다.
그런데 그 외형이 유전됐다. 그 하피를 닮은 머리색이 이어졌다. 마법을 익히고 사용하게 될 재능을 지닌 이에게만 그렇게나 독특한 머리색이 이어져 내려왔다. 로닐을 제외한 앨런과 베로니카에게까지도, 정말이지 저주처럼.
"이상하지, 아델리아. 마나실 가문에서 분명히 하피를 다 잡아 없앴다는데. 하피가 남아있어."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자신을 쳐다보는 호기심 많은 마법사의 시선을 느끼며 작은 미소를 띄워올렸다.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무슨 일인지 알려줄게."
"무슨 부탁?"
그리고 이렇게.
"대답부터. 아델리아."
호기심 많은 마법사로서는 도무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입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