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장. 자고로 미모란(2)
다행한 일이 셋이나 있었다.
일단 첫 번째. 에일라를 제대로 구해냈다. 먼 거리에 있었지만 그래도 제 때 맞춰 휘트린 영지로 돌아가 에일라에게 큰 일이 생기기 전에 막았다.
그리고 둘째.
- 찰박······!
욕조.
그냥 욕조 말고 되게 넓고 좋은 욕조.
엘프들의 도시에도 그럴싸한 욕조가 딸린 귀빈실이 있었다. 물론 지난 번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부터도 알았던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렇다 해서 새삼스런 다행함을 느끼지 말라는 법 없었으니까.
'키리에.'
'네, 왕자님.'
'검술 봐주기로 했던 것, 오늘은 봐 줄게.'
지난 밤 이후로 휘트린 영지로 달려가 에일라를 구하고 났더니 히나가 혼절해버리는 세상 무너질 광경을 보게 됐지 않나. 그것을 꾹꾹 참고 다시 지그프리드령 쪽의 숲으로 되돌아와 다누에게 횡포를 부렸다. 그 뒤 플란츠를 구해오다 비를 맞았고 그 후에 다누를 또 만났다.
다누와 거래를 마친 뒤에는 일행들을 다 데리고 엘프들의 도시로 되돌아와 대장로 나르잔을 만났다. 협상을 했다.
'검술 말씀이십니까.'
'응. 대신 지금은 조금 피곤하니까 잠깐 목욕 좀 하고 나서, 이따 밤에.'
그렇게나 많은 일을 해치웠으니 아무리 활기 넘치는 칼리안이라 한들 별 수 있겠나. 녹초가 될 수밖에. 때문에 욕조가 있어 다행이라 여기는 중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마지막 세 번째.
'아닙니다, 왕자님. 쉬십시오. 저는 괜찮습니다.'
'봐 줄게. 오러 내고 나서 제대로 가르쳐 준 적이 없잖아. 휘트린으로 돌아가든 형님들 영지로 바로 가든 바빠지면 다시 못 알려줘. 시간이 될 때 봐 줘야지.'
'왕자님 더 쉬셔야 합니다. 괜찮습니다.'
'나 배고파, 키리에. 많이 고파. 엄청 많이.'
'그건······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
'없지.'
'네. 없습니다.'
'어차피 잠도 안 올 텐데 너는 못 도와주고 그럼 나는 하는 일도 없이 계속 배가 고프기만 할 것 아냐. 계속, 계속, 멀뚱멀뚱.'
'······ 네.'
'밤새도록. 내일 아침에 육포 먹을 때까지.'
'그럴······ 겁니다.'
'그러니까. 봐 줄게, 검술.'
'······ 알겠습니다.'
'응.'
플란츠에게 육포가 있어서 다행이다.
아니었다면 당장 남몰래 숲 밖으로 나가 야생 닭을 잡아 구워 먹고 올 뻔했지 않나. 그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그나마 아침까지는 꾹 참고 의연하게 기다릴 수가 있었다.
만약 못 기다렸다면 히나에게 또 혼이 날 것이 분명했을 일이다. 그러니 아무튼 육포가 있어서,
"나와."
플란츠에게 육포가 있어서.
다행한······.
"당장."
아닌가.
육포고 나발이고 내 형님 저 희멀건 놈이랑 같이 온 게 안 다행한 일인 건가. 시도 때도 예의도 참을성도 동생의 소중한 사생활도 모르는 완두콩 저 놈이랑 또 같이 쏘다니게 된 바람에 이 좋은 목욕시간을 내가 또 못 즐기고 또 이렇게 또 내 시간도 못 챙기고 또 저 놈이 시키는대로 결국 또 그렇게 내가.
"네."
목욕 도중에 얌전히 나가는 일이 벌어진 건가.
"나갑니다······."
오늘 다행한 일 세 가지 중 마지막 내용을 수정해야 할 것 같다. 플란츠에게 육포가 있어서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그건 하나도 안 다행한 일이었다.
그게 아니라.
"아우님께서 내 목숨값을 멋대로 정하셨는데."
육포를 둔 협상을 먼저 해서 다행이다.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이 날 뻔했다.
육포 얘기가 나오기 전에 플란츠의 목숨값을 먼저 결정했었다면 내일 아침이고 낮이고 육포는 구경도 못 해볼 뻔했다. 다누의 가지든 뿌리든 뭐든 하나 얻어내 나가기 전까지는 내도록 계속 엘프들이 내주는 풀만 먹을 뻔했다. 아니면 정말 닭을 잡아먹거나.
"형님 목숨값으로 치기에는 너무 적었습니까."
그러니 플란츠의 목숨값을 두고 협상을 걸기 전에 육포 얘기를 먼저 알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애 두 번 없을 안도감을 느낀 칼리안이 생긋 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잽싸게 옷도 갈아입고 머리도 싹 말리고 매우 멀끔해진 얼굴로 응접실에 나와 마주앉은 동생 놈을 쳐다보는 플란츠의 눈이 크게 찌푸려졌다.
"말고. 나와 상의하셨어야 하는 일 아닌가."
"형님 목숨값을 얼마로 받을지에 대한 상의 말씀이십니까."
"그래."
"시오나가 제온을 막으려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휘트린에 찾아와서 검까지 부숴먹게 된 건 저와 형님 때문입니다. 시오나 덕에 별장에 있던 발칸 대원들이나 시종들 전부 다 멀쩡히 살아있고요. 그 정도 보상은 해줄 수 있다 생각했습니다."
"굳이 다누를 통하지 않더라도 다른 방법으로 보상해줄 수 있을 텐데."
"미스릴을 사다 주든 시스파니안의 둥지 근처에서 나온다던 그 무거운 철을 구해다 주든 하면서요."
"그래."
언제가 되었건 플란츠가 이렇게 따져 물을 것이라고는 생각했던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아낀 형님 목숨에 대한 값으로 다누에게 어떤 걸 요구하시려고요."
그리고 소파의 등받이에 가만히 등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바다와 맞닿은 대사막의 땅을 내어달라 하자니 여기는 어차피 아르나이젤의 영토라 하고, 숲의 길을 쓸 권한을 달라 하기에는 이미 이동 마법진이 있을 뿐더러 제온의 놈들과 똑같은 조건을 걸고 싶은 생각이 안 들고, 카이리스의 농사에 더 신경써달라 하기에는 이미 더할 나위 없이 농작물의 수확량이 좋고······ 다른 마땅한 것도 없지 않습니까."
다누에게 무언가를 내 놓으라 하려니 딱 들어맞는 보상이 없다는 말.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 칼리안을 찾아온 길이다. 때문에 플란츠가 이제라도 새로운 보상을 요구하자 말하려 입을 열었다.
그런데 칼리안의 말이 먼저 들려왔다.
"아니면 혹시 형님 목숨값을 제가 멋대로 정해서 싫으십니까."
"아니야."
"싫은 게 아니면 그냥 계십시오."
아주 잠시 말을 멈췄던 칼리안의 입술 새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그 목숨값이랑 형님의 '과거' 기억을 맞바꾸자 하겠다는 생각은 접으시고."
플란츠의 눈이 한 번 더 찌푸려졌다.
도대체 저 동생 놈이 머리 꼭대기에 올라 있기라도 한 건지.
"그 얘기 하러 오신 것 맞습니까."
그래.
맞다.
이번 일을 묵인할 테니 과거의 일을 알려달라고. 플란츠는 다누에게 그런 요구를 할 생각이었다. 체이스나 루이즈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 생의 일들을 알 수 있게 해 달라고.
시오나의 검을 먼저 말해버림으로써 플란츠의 야심찬 계획을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린 칼리안의 새빨간 입꼬리가 곱게 올라갔다.
"아무튼 내 형님은 어찌나 직관적이신지."
생각이 단순하다는 말을 저렇게 한다.
"짖지."
"배고파서요. 짖기라도 해야죠."
"배불러도 짖으시고."
"배부르니까. 소화시킬 겸."
짖는다는 말에 계속 짖는 소리가 나온다.
덕분에 또 잔뜩 찌푸려진 플란츠의 눈꼬리를 보며 칼리안이 바람을 뱉듯 웃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앞에 놓인 잔을, 이미 온종일 배가 터지도록 마신 물이 담겨 있는 잔을 들어올렸다.
흉터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새하얀 손.
그런 손을 가만히 지켜보던 플란츠가 입술을 움직였다.
"아우님이 얘기해 준 일을 내가 실제로 보고 버거워할까봐 그러시나."
"형님이 얼마나 변했는지를 제가 모를 것 같습니까. 지금 당장 그 성문 앞에 세워놔도 제대로 다 지켜보고 오실 분인 것 압니다. 제가 어떻게 키운 완······."
"그럼, 뭔데."
다급히 칼리안의 말을 막듯 질문이 돌아왔다.
웃음이 나려는 것을 지운 칼리안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그와 함께 칼리안의 마력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진다.
주변을 둘러보자 사일런트 막이 생성되어 있었다. 혹시나 이곳의 이야기를 다누가 들을까봐. 다누는 마법을 꿰뚫지 못하니 그것을 막은 것일 터였다.
곧 칼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이 아니라 저를 못 믿겠어서. 혹은 형님이 너무 똑똑해서."
정말이지 심혈을 기울여 키워낸, 앞으로 얼마나 더 자라날지 가늠도 되지 않을 연두색의 생명이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 좋은 머리로도 칼리안의 말 뜻을 이해하지는 못했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인데."
"반드시 내가 시간의 축을 돌려야 한다고. 형님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내 온 편지에 그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 말을 개 짖는 소리로만 읽었습니다만."
"······ 그래서."
"분명 생각이 있었겠죠. 무엇이든. 대책없이 찾아오신 건 아닐 겁니다. 스승님도 있었는데 당장 스승님 손을 붙들고 세크리티아 왕궁으로 찾아올 수는 없던 이유도 있었겠죠. 무엇이든 이유가 있었으니, 하지만 한시가 급하다 여겼으니 발칸을 다 데리고 찾아왔겠죠. 그런 개소리같은 편지를 보내면서. 그런데."
달칵.
투명한 물잔을 내려놓은 칼리안이 플란츠를 다시 쳐다봤다.
"······ 개소리가 아니었을까봐."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제는 아니까. 형님 안 미쳤던 것, 이제 저도 아니까. 정말로 그딴 소리 하나 보내놓고 남의 나라 쳐들어 올 미친 새끼는 아닌 것 같으니까. 그래서. 생각을 해, 봤는데."
다시, 달칵.
방금 전 내려놓은 물잔을 도로 들어올린 칼리안이 그것을 손에 쥔 채 입을 열었다.
낮은 한숨같은 목소리가 이어진다.
"형님이 저를 살리려고, 아니면 단순히 형님의 생을 처음부터 다시 살려고, 그래서 시간을 되돌렸을까. 생각을 해봤습니다만······ 아닐 것 같은데요."
칼리안의 눈이 플란츠를 응시했다.
"그때 봤던 형님은. 다시 제대로 살아보고 싶어하는 놈의 꼬락서니가 아니었으니까."
"······ 아마도."
포기했을 거다.
무엇을 해도 결국 전부 다 오답이었던 생을 살았을 것이 분명하니, 그 어떤 것도 손에 쥐지 못하고 결국은 전부 다 포기했을 거다. 제 생을 다시 되돌리겠다며 전쟁을 일으킬 성격도 되지 못했겠으나, 만에 하나 지금과는 성격이 달랐다 하더라도 모든 일을 원점으로 돌리겠노라는 결심을 할 수도 없을 만큼 이미 지쳤을 거다.
되돌려 다시 살고자 하는 마음을 먹지 못할 만큼.
"그렇다 해서 다 포기하고 싶은 심정으로 세상이나 끝내보자 했을 놈의 눈도 아니었고."
아무튼 나는 왜 이렇게 마음이 넓은지.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이해를 하려 드니.
한탄하듯 중얼거린 칼리안이 짤랑짤랑, 마치 술잔을 든 것처럼 물잔을 흔들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카이리스에서 갑작스레 쳐들어오기 전까지 세크리티아에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세작들 역시 다른 어떤 이상한 소식을 전해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형님 혼자 무엇을 보셨을까. 혹시 그 때의 형님은 꿈을 꾸셨던 게 아닐까. 저도 같은 꿈을 꿨다 생각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렇게 짧은 말만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저는 꿈을 꾼 적이 없었고, 그래서 못 알아 본 것은 아니었을까."
첫 번째 생에 대한 기억.
지금의 체이스나 루이즈가 그러한 것처럼 그 때의 플란츠도 첫 번째 생의 기억을 꿈꿨던 것은 아니었을지. 그 때의 베른이 제 말을 이해하리라 여겨 그런 말을 급히 보낸 것은 아니었을지.
그렇게 생각했다는 뜻인 것 같았다.
때문에 그 의미가 맞는지를 묻고자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목소리가 나오지도 않았다.
금제였다.
"굳이 또 입을 막으시네."
그것을 보며 피식 웃은 칼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어찌됐건, 가능성이 있는 일이다.
지금의 다누가 어째서 첫 번째 생의 기억을 보여주지 않는지는 알 수 없다. 만약 정말로 첫 번째 생에서 베른이 시간의 축을 움직였다면, 다누가 왜 플란츠에게만 원망을 쏟고 칼리안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지 역시 알 수 없다.
알려주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알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찌됐건 지금의 다누가 가진 능력은 온전하지 않으니 다누의 기억이 모두 정확하다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저도 물어보자 하려고 했습니다. 지난 생애의 형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런데."
짤랑 짤랑.
흔들리다 가라앉는 물잔 속을 내려다보던 칼리안이 말했다.
"만약 꿈을 꾼 것이 아니었다면. 그냥 형님이 엄청 똑똑했던 거라면. 그런 생각이 또 들어서요."
"내가 혼자 알아냈을 뿐일 수도 있다는 말씀이신지."
"네. 이상한 일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파고드는 머리 아닙니까."
"그런데 왜 다누에게 묻지 못한다는 건데."
"라시드 브리센 만났을 때."
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웃음이 다 사라진 얼굴을 한 채로 플란츠를 스치듯 쳐다본 뒤 다시 잔으로 시선을 내리며 말을 이었다.
"라시드 브리센을 '처음' 만났을 때. 형님과 실리케와 라시드 브리센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형님 그 얘기 저한테 해주실 수 있습니까."
"······ 있어."
"그럼 그 얘기를 하는 동안 또 향기가 들고. 향기가 들면 또, 그 향기 맡던 날들이 생각나고. 생각나면 또, 그 날에 겪었던 일들이 떠오르고. 전부 다 한꺼번에 그렇게 불어나시죠. 너무 똑똑하셔서."
"계속 그래왔던 거잖아. 익숙하다고 말했는데."
"그런 머리가 하나 더 들어오는 겁니다."
플란츠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형님 여기 오실때 어떤 계산을 하셨는지 아십니까. 오만가지 가정과 경우의 수와 변수를 전부 다 머릿속에 집어넣고 다시 그에 대한 경우의 수를 판단해 가면서 가장 이상적인 답을 내셨던 것 아닙니까."
"······ 맞아."
"그럼 그 때에는. 안 그러셨을 것 같습니까."
가장 기본적인 문제.
때문에 플란츠 스스로는 오히려 생각하지 못했을 문제를 알려 준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새로 들어온 기억들을 빠짐없이 전부 다 짚어내서 그것을 구분하고 판단하고 문제를 찾고 해결 방법을 알아내려고 멋대로 돌아갈 것 분명한 지금의 그 똑똑한 머릿속에, 그렇게 똑똑한 머리로 무언가 문제가 생겼음을 알아내고 계산하고 결국에는 시간을 되돌려야 된다는 결론까지 내 버린 '플란츠 루 룬 카이리스'의 기억이 통째로 하나 더 들어간다는 겁니다."
달칵.
끝없이 흔들리는 물잔을 테이블에 도로 내려놓은 칼리안의 붉은 눈이,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녹빛을 향했다.
"형님 그거 감당하실 수 있습니까."
물었다. 그리고 조용히 지켜봤다.
입을 꾹 다문 채로, 그렇게나 똑똑한 머리로 계산해볼 시간을 주듯이. 상상할 여유를 주듯이. 대답을 기다리듯이.
"없어."
그 대답이 들려온다.
고집도 안 부리고 과신도 안 하니 다행이다.
살짝 웃은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돼서 하는 얘깁니다. 형님 못 믿는다는 소리가 아니라."
"알아."
"그런 것 모르신다 해서 형님이 짐이라는 생각 안 합니다."
"나도 안 해."
"네."
제가 짐이라는 생각도 안 한다니 다행이다.
짐은 아니지만 가끔 어마어마하게 환장하겠는 사고를 친다는 사실 정도는 알아줬으면 좋으련만.
뭐, 어쨌든.
"그 좋은 머리로 계산도 잘 하시고 앞날도 다 예측하시는 것, 그걸 하지 말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다만 아직은 그 때의 형님에 대해 섣불리 알려고 들지 않아야 할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형님도 모르게 생각이 번져가지 않도록, 하나를 떠올리면 그 하나만 생각해도 되도록 조절하는 법을 알아내고 나서. 그 때 가서 떠올려도 안 늦습니다."
"늦으면."
"제가 막습니다."
"······ 알았어."
"과거 기억 하나도 몰라도 됩니다. 제가, 내가 다 막을 수 있으니까."
"응."
"네."
아무튼 어찌나 순한지.
고분고분 말은 참 잘 듣는다.
슬쩍 웃은 칼리안이 몸을 일으켰다.
"나가시죠."
"어디."
"키리에 검술 봐주기로 했습니다."
"형님은."
이 말에, 칼리안이 짐짓 놀란 얼굴을 만들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형님 이제 란델 형님도 챙길 줄 아십니까. 어느새 그렇게 친해지셨습니까. 두 분 싸움 나셔서 제가 편들어드려야 할 일 이제 없어진 겁니까."
"······ 언제는 들어주셨는지."
"마음이야, 언제든."
짧은 한숨을 내쉰 플란츠가 더 이상의 대꾸 없이 저벅저벅, 밖으로 나갔다.
"란델 형님도 모셔가야죠. 여기 누가 올 줄 알고요."
그런 플란츠를 따라 나서며 칼리안이 말했다.
짧게 고개를 끄덕인 플란츠가 방향을 바꿨다. 밖으로 나가는 쪽이 아니라 란델이 있을 방을 향해서였다.
"주무실지도 모르겠는데. 형님이 깨우시겠습니까. 많이 친해지신 김에."
"짖지."
"좋아서요. 친해지셨다 하니."
"아니야."
생글생글.
란델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신경 안 쓰던 플란츠가 나서서 란델을 말하는 날을 보게 되다니. 내가 진짜 농사 하나는 잘 짓는구나.
진심으로 즐거운 얼굴이 된 칼리안이 발을 옮겼다.
그리고 란델의 방 문을 가볍게 노크했다.
- 똑똑.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목욕을 하시나······."
잠시 중얼거리던 칼리안이 다시 한 번 문에 손을 댔다.
- 벌컥!
그리고 두 번을 두드리는 수고를 하는 대신 그 방 문을 그대로 열어젖혔다.
"잠깐, 칼리안."
5층 거주인의 창문도 깨 보고 3층 사는 내 동생의 방에는 거리낌없이 쳐들어가는 플란츠가 칼리안을 말리려 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말을 하지 못한 채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아. 너랑 안 마주치려고 이쪽 왕자님 방으로 왔는데, 딱 걸렸네."
발랄한 목소리.
"아무튼. 안녕?"
실로 발랄한 목소리의 인사가 들려 온 까닭이다.
당연하게도 란델은 아니었다.
때문에 서둘러 방 안을 둘러본 칼리안의 눈에 안도의 빛이 어렸다.
란델은 물론이고 칼리안이 목욕을 하는 동안 란델에 대한 호위를 부탁했던 키리에까지 모두 방 안에 온전히 있었다. 다만 키리에는 많이 긴장한 얼굴로, 그리고 란델은 말도 안 되게 태평한 낯빛을 한 채로.
칼리안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향해 전해진 인사에 대한 답을 전했다.
"안녕 같은 소리 하네."
란델과 마주 앉아 있던 채로 고개만 돌려 인사를 건넨 하얀 머리의 대마법사.
"아델리아."
아델리아를 향해서.
"그 일은 미안하다고 했잖아. 내가 도와준다니까?"
"그럼 당장 데려와. 라시드 브리센."
"아니. 당장 도와주겠다고는 안 했잖아."
그럴 줄 알았다.
칼리안이 웃음을 지었다.
햇빛 아래 놓인 붉은 장미 같은 미소가 고운 입술 위에 피어오른다.
그런 칼리안의 얼굴에서 대마법사를 마주해 긴장을 한 기색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생각보다 일찍 다시 만나게 된 아델리아를 향해 살기를 터뜨리지도 않았다. 라시드 브리센을 죽이기 직전에 뺏긴 일에 대해 욕지거리를 내뱉지도 않았다. 플란츠의 앞을 가로막지도 않았고 란델의 앞에 실드를 씌우지도 않았다.
- 드미레아.
- ······ 왜 또 부르십니까.
- 스승님 좀.
- 네.
대신 아빠를 불렀다.
"잠깐만! 부르지 마. 앨런 마나실 부르지 마."
칼리안의 팔찌에서 빛이 이는 것을 본 아델리아가 급히 말했다.
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많이 서운하다는 표정이 된 아델리아의 말이 들려왔다.
"대체 성격이 왜 그렇게 급해?"
"그럼 너를 또 봤는데 참겠어?"
"그렇다고 앨런 마나실을 바로 불러?"
"아니면 내가 너를 어떻게 죽이겠어?"
"나를 왜 죽여?"
"그럼 안 죽여?"
"말버릇은 왜 매번 그모양이야?"
"예쁘게 잘만 말해주고 있잖아?"
- 찾으셨는지요.
그렇게나 듣고 싶던 앨런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칼리안의 팔찌가 다시 빛나는 것을 본 아델리아가 재빠르게 말을 전했다.
"부르지 마. 부르면 나 바로 도망갈 거야. 라시드 브리센 어디에 있는지 얘기 안 하고 그냥 갈 거야."
칼리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 무슨 일이 있습니까?
- 있기는 한데······ 잠시만요, 스승님.
일단 앨런 부르기를 유예해 둔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어디."
"파비안."
답이 전해졌다.
란델의 영지, 파비안.
라시드 브리센이 그곳에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