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95화 (496/527)

제87장. 자고로 미모란(1)

아직 어린 해룡이 몰고 온 비였다.

자상하다 하기보다는 짓궂고 서툴다 해야 할 만큼 내려오던 비가 간신히 멎은 뒤였다.

때문에 온통 다 젖어 있었다.

베른의 것보다도 훨씬 더 긴 듯한 머리카락도, 바닥에 끌리듯 내려앉은 새카만 드레스도, 그 끝으로 보이는 검은 구두도. 모든 것이 전부 다.

그것을 보다 못해 물기를 씻어내며 말했다.

- 체이스 형님이 심한 감기에 걸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곳에 올 때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별다른 통신 도구가 필요하지 않았다. 굳이 입을 열지 않더라도 시스파니안은 칼리안이 건네는 말을 알아서 전해들었다.

- 서툰 실수 한 번을 안 하셨던 분이라 제 앞에서는 넘어진 적도 없던 형님이요. 사소한 상처, 멍 하나도 지니지 않았던 형님이 며칠을 두고 앓았습니다.

그렇게 전해진 말.

시스파니안도 이미 잘 아는 이야기일 터였다.

시스파니안의 공동에 처음 찾아갔던 날, 칼리안의 눈을 들여다보며 베른의 생을 전부 다 겪고 이해했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굳이 일러주었다. 시스파니안은 그 이야기를 말없이 들었다.

- 그래서 저한테는 감기만큼 무서운 병이 없습니다. 아무리 강하다 한들 감기보다는 약해질 수 있다는 걸 배워서요.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문득, 궁금해져서 그랬다.

칼리안을 감싸주고 드미레아와 앨런을 챙기고 슬레이만을 잊지 않고, 카이리시스를 전부 다 품에 안고 그렇게 카이리스 전부를 지탱하는데. 시스테라의 모든 생명을 지켜내고 지켜보며 이제까지 살아왔는데. 그러다 아예 세렌티가 잠든 알까지도 그 품에 안고 있는데.

늘 그렇게 모두를 지탱하며 지내온 삶이 버겁지는 않을지. 궁금해져서. 걱정이 되어서. 그나마의 빗물이라도 씻어내주며 말을 건넸다.

- 그러니까 내리는 비를 멀뚱히 맞고만 계시지는 마십시오. 감기 걸립니다.

그 폭우를 고스란히 맞았던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금세 말랐다. 다시 떠오르는, 혹은 다시 저무는 해의 가장 깊은 곳을 들여다 보아도 그보다는 붉지 않을 눈이 저와 닮은 빛의 눈을 마주봤다.

다 마른 머리카락이 살랑, 불어드는 봄의 바람을 안고 부풀다 내려앉는다.

- 이제는 그런 것을 배웠느냐.

그렇게 스쳐간 바람결의 끝에 시스파니안의 목소리가 깃들었다. 그 짧은 말을 어떻게든 이해해 낸 칼리안이 작게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 네. 배웠습니다, 저는.

- 다행한 일이다.

- 이미 배워 알고 계시던 일입니까.

- 너보다는 많은 것을 겪어 왔으니.

- 다행입니다.

그렇게나 강인한 고룡에게도 젖은 머리카락을 말려 줄 바람이 필요할 때가 있음을, 그리도 강한 칼리안에게도 내리는 비를 가려 줄 손이 필요할 때가 있음을, 그런 것을 배워 알고 있다는 말을 서로 주고 받았다.

- 좋아하지 않았다. 지나치게 시끄럽고 발에 와 닿는 모든 것이 거슬리고 하늘은 어두워지니, 비가 내리는 것을 늘 싫어하였다.

- 그런데 왜 비를 맞고 계셨습니까.

- 기다리곤 한다.

시스파니안의 눈이 오래도록, 꽤 오래도록 감겨들다 올라왔다.

'시스파니안.'

'이게 뭐야.'

'뭐기는. 우산이죠. 비 싫어하잖아요.'

'됐어. 치워.'

'그럼 같이 맞을까요? 나는 비도 좋은데요.'

'나는 싫어.'

'그러니까. 가만히 있어 봐요. 내리는 비를 다 그치게는 못 해도 당신 머리에 떨어지는 비는 얼마든지 내가 다 가려줄 수 있어요.'

여전히 선명한.

퇴색되지 않은.

- 나는 여전히 기억하는 까닭에.

늘 같은 빛을 내는 기억 속을 잠시 거닐다 돌아오듯이. 그렇게 꺼내놓은 말이 칼리안에게 와 닿았다.

잠시 머무르던 기억 속의 우산을 다시 접어 둔 시스파니안이 눈을 들었다. 그리고 그 날의 우산 속 말고 앞에 선 칼리안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 이렇게 다시 걱정을 받으니 나쁘지 않구나.

- 걱정해드려야죠. 조상님이신데.

시스파니안의 주변에 잔물결같은 바람이 일었다.

마치 웃음을 보이는 것처럼.

- 그것을 알면서 다누를 겁주었느냐. 진실이 무엇이든 나의 선택은 한 결일진대.

다누가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면 시스파니안이 더 이상 다누를 보호하지 않을 것이라고. 겉과 속이 다른 칼리안을 똑같이 제 후손으로 봐 주는 시스파니안임을 알면서 다누에게는 겁을 주었느냐고.

시스파니안은 다누와 시아 둘 모두를 보호했으면 했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 손에서 내려놓을 이는 아니었다. 다누의 본질이 무엇이건 시스파니안이 스스로 살려낸 생명인데 진짜 비아다누르가 태어났다 하여 지금의 다누를 내칠 시스파니안이 아니지 않나.

그러니 다누가 스스로 시스파니안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상 시스파니안의 보호는 계속 이어질 터였다.

- 조상님 덕은 착실히 받고 살아야죠.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 그런데 다누에 대해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면 이번에 알게 되신 겁니까.

- 조금 전에 네 말을 함께 들었다.

- 혹시 제 얘기 다 들으십니까.

- 로젤리타를 지나왔으니. 나를 떠올린다면 들을 수 있다.

성인식에 참여하고 나면, 그렇게 하여 시스파니안에게 얼굴을 보이고 나면, 그 때부터 시스파니안을 떠올리며 내뱉는 말을 듣는 것은 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이 말을 들은 칼리안이 잠시 숨을 들이켰다.

축복의 힘에 얽힌 지나친 사려깊음이 줄어든 것은 역시나 칼리안의 투덜거림 때문일 터였다. 다만 그것 때문에 난처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결과적으로 축복의 힘이 늘어났으니 그 일을 두고 후회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한 가지가 걸렸다.

- 하여 내가 내렸던 축복의 힘을 고쳐두었다.

- ······ 네.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 다만 이해해주거라.

한 가지.

딱 한 가지가 걸렸다.

- 네 주량은 나 역시 어찌하기 어려우니.

아.

세렌티시여.

저 말을 다 들으셨나 봅니다.

- 숙취 역시.

- ······ 아.

투명화 마법을 진작 배워둘 걸.

후손의 주량과 숙취 문제만은 해결해 줄 수 없다는 시스파니안을 보면서 칼리안이 때늦은 후회를 했다.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다 덮고 한숨을 푹 내쉬는 칼리안을 시스파니안이 바라봤다. 그렇게 한참을, 다시 한참을 바라봤다.

'비에 젖지 않으니 좋지 않아요?'

'나쁘지는 않아.'

'좋은 게 아니라?'

'나쁘지만 않아.'

'아······ 나는 좋았는데요.'

'뭐가.'

'나쁜 놈들한테 납치된 반려를 구하겠다고 찾아왔던 그 커다란 검은 용 말이죠. 나는 좋았거든요. 무엇이든 다 가려줄 것 같아서.'

'나는 세상을 다 가릴 수 없어. 네 우산도 마찬가지야.'

'내 우산이 세상을 가리지는 못해도 당신 하나는 다 가려줄 수 있으니까. 나는 그거면 돼요.'

비 개인 하늘 아래 바람이 분다.

오랜 기억을 여전히 잊지 않은 고룡의 곁에도, 그 고룡에게 자신의 절망적인 주량과 숙취 문제에 대한 깊은 한탄을 전했던 후손의 곁에도.

'시스파니안.'

'말해.'

'한 번만 더 보여줘요. 비 그치고 날이 맑아지면, 한 번만.'

'뭘 보여달라는 거야.'

'당신 현신이요. 예전에는 싸울 때만 변신해서 제대로 못 봤고 이번에는 여기까지 날아오는 내내 당신 목에 난 비늘 붙들고 안 떨어지려 애쓰느라 제대로 못 봤으니까. 한 번만 더 보여줘요.'

'그건 왜.'

'당신 엄청 길길래.'

'······.'

'키 좀 재보려고요.'

'싫어.'

'나 너무 궁금한데요.'

'꺼져.'

'와, 너무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렇게 부탁하는데.'

잊히지 않을 바람이 분다. 지나쳐간다.

* * *

말이 꽤 정중한 편이지만 사실 입이 험하다.

별 생각 없이 지내는 듯 보이지만 치밀하다.

웃는 날이 많아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 도대체."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무엇 하나로 딱 꼬집어 설명할 수 없을 칼리안의 이 복잡한 성질머리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에 대해서 말이다.

"얼마나 더 무디게 굴 생각이신지."

그래서 그 모두를 통틀어 일단 그냥 무디다 했다.

입이 험하든 치밀하든 절대 가볍지 않은 사람이든 뭐든, 결과적으로 제일 도드라진다 여긴 것은 무디기 짝이 없는 면면이었으니 말이다.

'덕분에 형님도 이렇게 잘 살아계시는 것 아닙니까.'

평가받는 칼리안이나 평가하는 플란츠나 절대 좌시할 수 없을 근거까지 이렇게 떡하니 있지 않나. 여지껏 플란츠가 어디 하나 잘린 곳 없이 멀쩡히 잘 살아있는데 무얼 더 말할까.

그래서 확신을 담아 장담하듯 그리 여겼다.

칼리안만큼 무딘 사람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느냐고. 그 사실을 인정하기 어렵다면 앨런이나 체이스를 만나보라고.

그런데 간과한 것이 있었다.

하나.

앨런의 생각은 달랐다.

여리고 어리고 어여쁜 내새끼라는 말로 칼리안을 애써 포장해 놓을지언정 칼리안이 무르다 믿지는 않는다.

인성 복잡하고 사고 잘 치는 내새끼를 보듬보듬 업어 키우고 있기는 하지만 그리 고운 내새끼의 아리따운 흰 손에 앞날이 창창하던 어느 소드마스터의 허리몽둥이가 작살났던 일을 잊지는 않았다.

둘.

체이스도 그랬다.

체이스는 분명 '내 동생이 많이 무뎌졌다' 말했었다. 상대적인 의미였지 절대적인 표현이 결코 아니었다는 소리다.

데블란 사후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던 어느 날, 체이스의 출신에 끝내 불만을 지닌 귀족들이 베른에게 접근했던 밤. 간판 없는 고급 술집으로 베른을 데려간 뒤 전했던 '선왕 전하의 사인에 대한 의문을 제기해보라'는 충성스런 조언이 그들 모두의 유언이 되었음을 체이스는 안다. 넷이 들어간 술집에서 걸어나온 이가 딱 한 명 뿐이었음을 모르지 않았다.

"무딥니까. 제가요."

"무디잖아."

그런 사람이 무뎌졌다 한들 그것을 정말 무디다 할 수 있겠나.

"아닌데. 지금 엄청 짖다 왔는데."

"안 물었잖아. 반말."

"안 물었으면 무딘 건가."

"또."

"겁니까."

"잘 참다 오셨으니."

"안 물고 잘 참다 왔다고요."

"그래."

그러니 칼리안이 참 무디다 하던 플란츠의 말은 결국, 믿어주고 지지해 줄 이 하나 없는 편파적인 평가인 셈이다. 그런 사실을 모를 플란츠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마주선 놈을 향해 그르렁그르렁 목울대를 울리고 있는 맹수의 목줄을 설렁설렁 잡아든 채 '내 고양이는 안 물어요. 오늘은 배가 불러서.' 따위의 말을 내려놓듯이.

"그 정도면 무딘 겁니까."

"아닌가."

소파에 비스듬히 몸을 묻은 채 제 길쭉한 다리를 대충 꼬아놓으며 되묻는 말에, 그런 자세와 나른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한 번씩 쳐다본 새빨간 눈이 둥근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맞겠죠. 형님 말씀인데."

"그래."

"네. 그래도 어디 가서 다른 놈들 보고 함부로 무디다 어떻다 하시면 안 됩니다. 형님께서 하도 유순하셔서 이놈이고 저놈이고 전부 다 무디게 여겨지시는 것은 알겠습니다만. 그러다 또 이번처럼 홀랑홀랑 뒤통수 맞으십니다."

보고 듣고 있자니 할 말이 없다.

살기등등한 빨간 눈을 빛내고 있는 저놈이나.

저놈이 무디다 말할 간덩이를 가진 이놈이나.

'나는 카이리스에 관심이 없다. 그러니 둘째나 막내가 카이리스를 거머쥐게 될 테지. 헌데 이제껏 너희들이 둘째와 막내에게 그리도 많은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 보아 너희는 내 속내를 몰랐던 듯 보이는구나. 한치 앞을 못 보고 나 하나를 믿었더냐. 어찌하여.'

그 핏줄 어디 안 간다는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오해 말거라. 탓하는 것은 아니니. 눈이 어두운 것이 죄가 되지는 않을진대 엘프들이나 그들의 대장로라 하여 다를 것이 있겠느냐.'

이렇게.

'허나 염려가 되는구나. 이대로 날이 지나 왕좌의 주인이 바뀐 이후에는 카이리스에 엘프들의 터를 유지하기가 녹록하지만은 않을 것인데······ 혹 너희가 지금처럼 텐실을 외면하고도 연명해나갈 자구책이 있는 것이더냐. 있다면 알려주거라. 염려하던 마음을 내려놓고 이만 일어날 테니.'

그래. 이렇게.

협박같은 협상을 제시해오던 그놈이나.

"그래서. 다누와는 이야기를 잘 하신 건지."

"물론입니다. 원만하게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엘프들의 대장로 나르잔을 앞에 앉혀두고 주거니 받거니 해 가며 이어지던 사이 좋은 대화가 다시 들려왔다.

덕분에 나르잔은 애꿎은 찻잔만 거듭 들어올려 이른 아침의 물배를 더 채워넣어야 했다.

'원만한 이야기라니.'

원만한 이야기란다.

협상도 협박도 아닌 그저 가벼운 거래를 했으니 원만한 이야기란다. 당장 다누를 동강내버릴 것처럼, 말 그대로 장작더미를 좀 구하러 왔다는 것처럼 검을 휘두르던 놈이 원만한 이야기를 마쳤다고, 그런 소리를 하고 있다.

너는 참 무디네, 그러는 너는 너무 순하네.

왕위를 사이에 둔 형제 싸움은 결코 벌어지지 않을 테니 그것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면 일찌감치 때려치고 납작 엎드려라, 경고하듯. 왕가에서는 결코 볼 수 없을 훈훈한 풍경을 보여주면서.

"하피의 마석은 우리가 직접 사용할 예정이 아니었네. 영지 휘트린으로 우리 측의 자객이 든 일에 대해서는 사과의 뜻을 전하네. 변명하자면, 내가 아는 일이 아니었네."

어찌됐건 다누와 '원만한 거래'를 마쳤다 하니.

카이리스의 왕족들과 이 이상의 골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대장로 나르잔은 칼리안과 플란츠를 처음 마주했던 그 때보다 몇 배는 더 정중해진 얼굴과 목소리로 말을 전했다.

"1왕자에게도 이야기했듯, 어머니 나무께서 지니신 뜻이 우리의 생각과 모두 같지는 않네. 그러니 그간의 일에 대해 원만히 해결을 했으면 하네."

"그렇게 너희랑 다누 사이에 따박따박 선을 그으면 어떡해. 아무리 그래도 어머니인데."

피해갈 생각 말라는 듯 흘러나온 목소리.

칼리안이었다.

그 말과 함께, 튀긴 바나나를 꿀에 조려낸 디저트로 향하던 새하얀 손이 잠시 멈칫했다. 그러더니 처음부터 디저트가 아닌 찻잔을 집어들려 했다는 것처럼 방향을 바꾸었다.

- 안돼.

그러나 그것도 잠시.

- 이거 홍차인데.

- 안돼. 반말.

- 바나나 아니고 홍차인데요. 물인데요.

- 안돼.

- 저 다 나았는데요.

- 칼리안.

- ······ 저 배고파요······.

- 키리에 팔찌를 빌려왔는데.

저 바나나의 풍미와 참으로 잘 어울릴 홍차의 위에서 그리도 고운 손이 다시 멈췄다.

- 그건 또 왜 뺏으셨어요.

- 빌려왔다고.

- 아무튼 왜요. 또 히나한테 이르겠다 협박하시려고요.

- 협상.

- 무슨 협상이요. 히나한테 이를 거니까 홍차도 마시지 말고 튀긴 바나나도 먹지 마라, 하루 종일 카이리스 절반을 왔다갔다 밥도 못 먹고 고생만 한 안쓰럽고 어여쁜 동생을 이렇게 협박하고 있으면서.

- 나는 내 아우님께서 바나나보다 육포를 더 좋아하시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 ······ 형님 육포 있습니까.

- 있어.

- 형님 대체 어떻게 매번 그렇게 육포를 싸와서 들고 다니십니까.

- 어쩌다보니.

- 혹시 소금 안 넣은 건 아니죠. 루시랑 안네 주려고 하셨던 거 아닌 거죠.

- 아니야.

- 그럼 그거 저 주실 겁니까.

- 참으면. 내일 아침에.

- 오늘 저녁에.

- 내일 점심.

- 오늘 밤.

- 히나에게 물어봐야 되겠군.

- 내일······ 아침.

- 알았어.

찻잔으로 향하던 칼리안이 손이 무릎 위로 되돌아오는 그 짧은 사이, 빛보다 빠른 협상이 이렇게 이루어졌다.

- 치사하다.

- 반말.

만일을 대비해 싸울 만한 상태까지만 치료를 받은, 때문에 다친 어깨는 다 나았지만 깎였던 것이 다 낫기도 전에 본래의 외모로 되돌아오느라 다시 깎여나간 속은 아직 낫지 않은 칼리안이 소리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전히 냉랭한 눈으로 나르잔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엘프 휘트린에게 뭘 시켰는지, 엘프 휘트린과 제온은 무슨 관계인지, 얘기해. 카이리시스와 휘트린에서 생긴 일에 대한 사과도. 아 물론 사과는 대장로 당신이 직접, 카이리시스로 찾아가서 해 줬으면 하고."

"휘트린과 관련된 일은 나 역시 알지 못하네."

다누와의 사이에 굵직한 선 하나를 그어 놓고 협상 테이블에 앉으려다 퇴짜를 맞은 나르잔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휘트린이 살아있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대가 지난 번에 이 곳을 방문했을 때 이야기를 했을 것이네. 휘트린 영지에 숨어들어 있다 했던 그 엘프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지."

"나는 그대가 세크리티아의 브리지트 숲에 방문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곳에 휘트린에 대한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네. 그런 상황에 그 사실 하나를 감추어 봐야 결국 이렇게 밝혀지게 될 테고, 추방된 엘프가 인간 사회에 숨어들어 있었다는 사실은 그 이유가 무엇이든 우리에게 불리한 일인데 무엇하러 숨기겠나. 심지어 그들이 있던 곳은 그대의 영지라 하지 않았나."

거짓이 아니다.

나르잔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습관처럼 찻잔에 가 닿으려던 손가락 끝을 애써 되돌려 테이블만 톡톡 두드렸다.

엘프들은 휘트린에 대해 아는 바가 없고 다누는 그에 대해 딱 한 마디만 전했다.

'나의 아이가 아니었다.'

이렇게.

그 뒤로는 입을 꾹 다물었다.

- 휘트린의 일은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 휘트린에게요.

- 어차피 시간의 축에 대해서도 물어보실 생각 아니었나.

- 네. 맞습니다. 다누가 다루지 못하던 조각을 휘트린은 어떻게 사용할 수 있다는 건지, 그것에 대해서는 확인을 해야 합니다.

- 그러니 다시 만나볼 수밖에 없지 않나.

- ······ 다시 만나면 죽여버릴 것 같은데.

- 같이 갈 테니까.

- 같이 가서 형님이 칼 뽑으시려고요.

- 그렇게 되면 아우님께서 막아 주실 테니.

- 또 태평한 소리 하시네요.

- 틀린 말도 아니잖아.

- 차라리. 란델 형님께 부탁을 드려 보는 게 나을 지도요.

- 그러든지.

- 네.

톡, 톡, 톡.

곧은 손가락 끝이 계산을 시작한다.

"여기서 온 자객. 잡아다 놔. 돌아갈 때 데려갈 거야."

"준비해두었네."

"사과는."

"국왕 르메인을 만나 직접 전하지."

"내가 왕궁으로 돌아간 뒤에, 그때 방문했으면 좋겠는데."

나르잔이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을 했다.

시스파니안이 직접 찾아왔었다.

아르나이젤 역시 칼리안을 안다.

다누의 무모함에 두 용족이 끼어들었다. 그들의 사이에 칼리안이 있었다. 나르잔이 시스파니안을 직접 마주한 것은 아니었으나 아르나이젤의 말은 분명히 들었다. '시스파니안이 아끼는 인간'이라고.

"그리하지."

그러니 고분고분한 것이다.

지금 당장은 엘프들의 잘못이 확연히 두드러지기도 했거니와 칼리안의 뒤에 누가 있는지를 제대로 보게 된 까닭에.

마석을 되찾고 엘프들의 자객을 붙잡았다. 향후 텐실과 어머니 나무의 관계 진전에 대한 협상은 이미 진작에 마무리 되었다. 아르나이젤 덕에 시간의 축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도 얻게 되었다.

휘트린.

그 하나를 제외하고는 원하던 것을 다 얻어낸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본래에도 꼿꼿하던 허리를 조금 더 폈다.

"그리고 하나 더."

두 용족을 등에 업은 김에.

다누의 실수가 극명했던 김에.

"하나 더, 라니."

칼리안이 팔을 움직였다.

제 몸에 꼭 맞는 검은 재킷 덕에 여실히 드러나는 고운 팔을 움직였다. 곱게 뻗어진 새하얀 손가락 하나를 펼쳐 플란츠를, 정확히는 플란츠가 곁에 세워 둔 검을 가리켜 보였다.

"저거. 하나만 줘."

"검을······ 말인가?"

"다누에게 얘기하면 알 거야. 색깔 덮어씌워 사기칠 생각 말고 튼튼한 걸로 아무거나 하나 달라고."

나르잔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칼리안의 고운 입이 예쁘게 움직였다.

"여기 계신 연약하신 내 형님 납치했잖아. 두 번이나. 그거 가지고는 협상 안 했는데."

나르잔의 입이 꾹 다물렸다.

"없던 일로 쳐 줄 테니까."

말을 마친 칼리안이 붉은 입술을 끌어올렸다. 길고 긴 호선을 만들어냈다.

시오나에게 줄 새 검의 재료로 멋대로 제 몸값이 정해지게 된 플란츠는 쳐다보지 않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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