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장. 욕심(7)
'대장!'
천진난만하던 아이.
'대장! 이제 안녕, 해!'
질문보다 앞서는 대답을 하지만 예지력을 가진 것은 아니라던, 다누를 만난 적 있다 했던. 그리고 아르나이젤만큼이나 천진난만하던.
그런 아이, 시아.
시아와 다누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시아와 닮았다던 모습을 다누의 '진짜 얼굴'이라 판단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왕자님. 저희는 시스파니안께서 취하신 인간의 모습이 그분 스스로의 것일지 아니면 어느 인간을 따라 만들어낸 외향인지도 알지 못하니 말입니다.'
'그렇겠죠. 사실상 시스파니안님의 실제 모습은 검은 몸과 붉은 눈을 지닌 용이었으니.'
물론 아르센으로부터 시아와 다누가 똑같이 생겼더라는 소식을 처음 전해들었을 때에는 둘의 관계를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단순히 생김이 똑같다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지 않나. 당연하게도 말이다.
'맞습니다. 그러니 다누의 얼굴 역시 인간들의 기준으로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 시스파니안님을 뵙게 되면 여쭈어봐도 좋을 테고.'
'네.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봐도 늦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만 그래도 왕자님께서 알고 계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래요. 참고하겠습니다, 헤르츠 경.'
처음에는 그에 대해 깊이 파고들며 고민하지 않았다. 아르센에게 전한 말마따나 참고만 했다. 슈린츠와 휘트린 영지에서의 일이 계속 급박하게 이어진 까닭에 그에 대해 오래도록 고민할 겨를도 없었다.
그런데 지날수록 궁금증이 늘어났다.
시아에 대한 의문은 아니었다.
비아다누르. 다누에 대한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형님. 다누는 어머니 나무입니다.'
'알아.'
'온 대륙에 뿌리를 뻗어두고 제 뿌리가 닿은 곳의 땅을 다스릴 줄을 압니다. 체이스 형님과 어머님의 꿈을 조종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공간 속에 원하는 이를 불러와 가둬두고 환각인지 꿈일지 모를 것을 보여주기도 했지 않습니까.'
'내 검을 가져다 주기도.'
'그러니까요. 아무리 마법을 쓰지 못한다 하나, 다누의 능력이든 마법이든 결국은 마나를 이용하는 것 아닙니까. 인간은 상상도 못할 일을 할 줄 아는 다누가 고작 변장 마법을 들여다보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말이 되든 안 되든. 못 알아 봤잖아.'
'네. 압니다만······ 이상하네요.'
다누의 무능이 지나치다.
'단순한 국왕도 아닌 엘프들의 어머니인데, 그런 존재가 히나만도 못한 능력을 가졌다는 건 이해가 어렵습니다.'
그 불완전함을 이상하게 여겨오던 중, 조금 전 바위 지붕 아래에서 다른 이야기를 더 듣게 되었다.
엘프들의 대장로 나르잔이 란델에게 전하고 란델은 키리에에게 알렸던 사실. 다누가 양신전쟁 당시 파괴되었고, 시스파니안이 파편 하나를 구해내 다시 살려낸 것이 지금의 다누라 했던 말. 그 이야기를 키리에로부터 전해 듣게 되었다.
'다누의 파편으로 다누를 만들어 냈다는······ 그러니까.'
'꺾꽂이.'
'······를 했다는 소리네요. 시스파니안이.'
'그리 전해 들었다.'
'네.'
키리에가 모든 말을 다 전하는 동안 가만히 앉아있던 란델이 딱 한 단어로 요약정리를 해 줬다. 한 마디로 시스파니안이 다누를 꺾꽂이한 것이라고.
'스스로 여문 생명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면서 사실은 더할 바 없이 작위적인 방법으로 태어났다니. 누군지 그 이름 잘 지었다 했었는데, 정말이지 참 잘도 지었네요.'
그 말이 어찌나 우습던지.
마치 베른처럼.
어찌됐건 이제 와 다시 살아가고 있는 모습마저 한 그루의 곧은 나무같은 다누를 생각하다 시아를 떠올렸다. 다누가 지닌 이름의 뜻을, 이미 진작부터 다누를 만난 적 있었던 듯한 시아의 말을 생각해 냈다.
그러다 문득 말도 안 되는 가설 하나를 만들게 됐다.
- 시아가 다누에 대해 이야기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 아우님에게.
- 네. 저에게요. 질문보다 대답을 앞서 하는 아이였어서, 그 말버릇을 우려하던 저에게 시아가 다누를 만났던 일을 알려줬었습니다.
대답이 앞서는 시아의 말버릇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했다던 다누의 말.
- 질문보다 대답이 앞서는 그 말버릇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법이 다른 엘프들과 다르다 해서 시아가 엘프라는 사실까지 달라지지는 않는다고. 다누가 그리 말했다 했습니다.
- 그래서 아우님께서 다누를 이해해보려 하신 건가.
- 그랬죠. 그 말 덕에 저도 서클을 늘릴 수 있었던 터라. 그때까지만 해도 다누가 그런 새끼인 줄은 몰랐으니까.
- 말버릇.
- 몰랐으니까요.
- 그래서.
- ······ 네. 그래서 이해를 해보려 했던 것인데 이제 와 생각하니 시아에게 전한 이야기가 정말 호의였을까, 의심이 됩니다.
- 다누가 아우님에게 내 검을 주었던 일도 처음에는 좋게 여겨졌었지.
- 저를 위로하는 줄 알았었죠. 처음에는.
- 아니었잖아.
- 네. 아마도.
- 끝까지 '아마도'라며 여지를 두시나.
- 입장이 달라 생각의 차이가 생기는 일인데요. 제 입장에서야 한없이 나쁜 새끼가 맞다지만 그래도 이해의 여지는 둬야죠.
- 내 아우님의 이해가······ 어찌나 풍족하신지.
- 덕분에 형님도 이렇게 잘 살아계시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너무 마뜩잖게 여기지는 마시죠.
- 알아. 알았어.
- 네. 어쨌든 시아가 들은 그 얘기 말입니다.
시아가 들었던 이야기.
'어머니 나무가 그러셨어. 내가 혼자 다르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하셨어. 말하는 건 달라도 내가 엘프인 것까지 달라지지는 않으니까.'
모든 것을 포용하는 이가 제 자식을 위해 진심을 담아 건넨 위로와 조언의 말······ 처럼 들렸던 그 이야기. 그것이 만약 위로가 아니었다면. 조언과는 거리가 멀었다면.
칼리안에게 했던 것처럼 정말, 다른 꿍꿍이를 숨겨 둔 말이었다면.
- 말하는 것이 달라도 엘프인 것까지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말. 그 말이 오히려 시아로 하여금 저 스스로를 평범한 엘프의 범주에 밀어넣고 가두게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시아가 평범한 엘프가 아니었을 때의 이야기겠지만요.
평범하지 않은 아이를 평범하다 했다면.
그것이 과연 위로인가, 아니면 눈가리개인가.
- 평범하지 않으면. 어떤 능력이 있을 것 같은데.
- 능력 말고요, 형님.
- 그럼.
- 제가 꽤 그럴싸한 가설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 무슨 가설.
- 시아.
플란츠와의 대화도, 그리고 입으로 이어가던 대화도 잠시 멈춘 칼리안의 붉은 입술이 긴 호선을 그린다.
'시아.'
소리없이 움직인 입술 끝이 그 이름을 만들어낸 순간, 다누의 얼굴에 동요가 일었다.
- 보호받지 않고 태어난, 아직 어린 '어머니 나무'. 시아가 그런 존재였던 것은 아닐까 하는 가설······ 이었는데.
다누가 고개를 들었다.
빛이 터져나왔다.
붉디 붉은 입술 끝에 짙은 확신이 맺힌다.
- 아니었나 봅니다. 가설 따위가.
가설 따위가 아닌가 보다.
제대로 짚은 모양이다.
- 소년이라고, 들었는데.
- 시아 말씀이십니까.
- 그래.
- '어머니' 나무와는 안 어울려서 그러십니까.
- 아무래도.
- 지금 다누의 외양도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무엇보다, 헤르츠 경도 '코코 엄마'인데요. 형님.
- ······ 그건 다른 얘기잖아.
- 어머니라는 단어에 틀을 두지 마시라는 말씀입니다. 어디까지나 인간의 기준 아닙니까.
- 알았어.
- 아무튼 뭘 가르쳐드리든 이렇게 순하게 잘 배우시니······. 키워드리는 보람이 있습니다.
- 짖지는 말고.
- 네.
피식 웃은 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다누."
낮과 밤이 사라지고 하늘과 땅이 거꾸러진 듯한 곳. 빛도 어둠도 아닌 그런 공간에 불려오게 되었으면서도 태평하게 완두콩이나 놀려먹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시스파니안이 들으면 안 되는 얘기야?"
생각지도 못한 열렬한 반응이다.
넘겨짚은 것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기꺼운 마음을 숨기지 않은 칼리안이 물었다.
"시스파니안이 듣지 못할 이야기는 없다."
대답이 들려왔다.
그와 함께 칼리안 외에는 아무도 없던 곳에 작은 엘프의 형상이 하나 찾아들었다.
발끝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가 정말 인상적인, 그리고 뾰족한 귀가 유난스레 눈에 띄는 그런 모습의 다누가 칼리안의 앞으로 와 섰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시아와 똑같다고밖에는 표현하지 못할 얼굴에 다시 한 번 웃음을 지은 칼리안이 대꾸했다.
"그렇겠지. 내 불평도 어느새 전부 다 들으셨던 분인데. 그럼 나를 왜 끌어냈어."
"대화가 필요하다 결정했다."
"이제야 필요해졌어? 빠르기도 해라."
"너는 나에게 거래를 청했다."
"제안했지."
"나는 너의 이야기를 듣겠다. 네 거래에 응할지를 결정하겠다."
"얘기 다 했잖아."
칼리안이 시선을 내렸다. 그러더니 자신을 마주보고 선 다누를 향해 한숨을 내쉬듯 말을 이었다.
"비아다누르. 제가 가졌어야 마땅할 그 이름을 너한테 뺏긴 것도 모르고 네가 지어 준 이름을 가지고 네가 쥐여 준 속박 속에서 살고 있는 비아다누르."
"그것은 나의 이름이다."
"반쪽짜리 능력 가진 너 말고, 시스파니안의 보호를 받아야 했을 진짜 비아다누르."
다누가 입을 다물었다. 칼리안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에 대해서 입을 다물 테니까 시간의 축을 내놓으라고. 그렇게 말했지. 더 이상 내 일에 간섭하지 말라 했지. 내가, 조금 전에."
"지금 네가 나를,"
"제안."
다누의 말을 싹뚝 끊은 칼리안의 입술이 또 한 번 호선을 그렸다.
"협박이라 말하고 싶은 것 같아서. 협박 아니라 제안. 거래하자는 거잖아. '비아다누르'."
다누의 시선이 움직였다.
주변의 다른 것들을 둘러보는 칼리안의 붉은 눈이 다시 되돌아와 자신을 쳐다볼 때까지 아무 말없이 계속하여 칼리안을 올려다 보기만 했다. 그러다 비로소 칼리안과 눈이 마주친 뒤, 다누는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인간들의 언어는 덧없다. 진실된 의미를 퇴색시킬 뿐."
"뭐라 포장하든 너한테는 협박일 뿐이라는 소리가 하고 싶은 거지, 지금."
"그러하다."
"제온에서도 그런 말을 했을 테니까. 거래하자고. 네 비밀을 실레스티안에게 낱낱이 고하기 전에 서로 좋은 일을 하자고."
다누는 답하지 않았다.
"너 말고 또 다른 어머니 나무가 있다는 것을 알면, 시스파니안이 너를 더 이상 보호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되면 너는 알지도 못하는 이유로 실레스티안이나 또 다른 용족에게 죽을 테니까. 그래서 제온의 말을 들었지. 카이리스의 3왕자를 없애도록 도와달라, 실패했으니 카이리스의 대마법사라도 없애도록 숲의 길을 열어달라. 하다하다 이제는 카이리스의 3왕자에게 빼앗긴 하피 마석을 뺏어다 돌려달라, 뭐 등등. 참 고분고분 잘 들어줬지."
강제로 밀어넣듯 또박또박. 한 글자 한 글자를 직접 건네주듯 이야기한 칼리안이 더 깊은 곳을 찌를 것처럼 목소리를 낮췄다.
"그렇게나 드높다는 엘프들의 어머니께서."
그렇게나 드높다는 어머니 나무가 칼리안을 향해 한 발을 다가왔다. 여전히 여유로운 칼리안을 향한 말이 들려왔다.
"해서. 우스운 것인가. 즐거운가."
"한낱 인간이 어머니 나무의 밑바닥을 들여다 봤는데. 당연히 우습지. 제 뿌리가 나락에 닿은 것도 모르고 탑 끝까지 가지를 치밀던 새끼의 밑바닥을 봤는데. 당연히 즐겁지."
-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 다누 회유할 겁니다. 서로 약점 하나씩 붙들고 있어야 동등해지지 않겠습니까.
- 그 엘프는 그냥 둘 건가.
- 시아 말씀이십니까.
- 그래.
- 네. 그냥 둘 겁니다.
"그리 우습고 즐거우면서 왜 이런 태도를 취하는가."
"내 태도가 어떻길래."
"그 아이를 데려와 이곳의 어머니를 바꾸라, 진짜 어머니 나무가 태어났으니 자리를 내어주게 하라. 너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내가 왜. 뭐하러 그런 짓을 해."
- 지금 그 일을 시스파니안에게 얘기하는 편이 다누를 가둬두기에 더 나을 텐데.
- 압니다.
- 그래도, 굳이.
- 네. 그래도, 굳이.
- 어째서.
"어째서인가."
"나는 시스파니안이 아니야. 세렌티도 아니고."
"당연한 사실이다."
"네가 입에 올리는 인간의 왕도 아니야. 그렇게 대단한 놈 아니니까 그냥 내 맘대로 두겠다는 거야. 어차피 때가 되면 알아서 해결되겠지. 시아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어떻게든 깨닫는 날이 오겠지."
"그래서 방관하겠다는 것인가."
"어리잖아."
칼리안이 다누를 쳐다봤다.
플란츠의 질문에는 아직 답을 전하지 않은 채로, 마치 란델이 그러하듯이 다누의 그 밑바닥과 눈을 맞추듯 깊숙이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아직 어리던데. 아르나이젤과도 비교하지 못할 만큼, 나보다도 훨씬 더 어리던데. 자기가 가진 게 예지력인지 어머니 나무의 능력인지 그냥 이상한 버릇인지도 구분 못할 만큼. 그렇게나 어리던데. 아닌가."
더 숨길 것이 없다 여겼던지, 칼리안을 마주 응시하던 다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다."
"그런 애를 너처럼 묶어두는 짓 안 해."
"어째서 안 하겠다는 것인가."
"한 자리에 뿌리박혀서 낡아 부스러지게 만들기 싫으니까."
- 태어났으면 살아야죠. 제대로.
- ······ 그러다 일이 또 틀어지면.
- 오답을 또 골랐구나, 생각하겠죠.
- 하게 되면.
- 어쩌겠습니까. 이미 벌어진 일을. 그냥 내가 또 환장하겠다 해 가며 막는 거지.
- 몇 번 마주친 엘프 아이 하나 때문에.
- 몇 번 마주친 엘프 아이를 나 하나 편하자고 형님처럼 만들어놓기는 싫으니까.
"멀쩡한 세상 놔두고 홀로 갇혀서, 남들 다 반색하는 향기 하나에도 혼자 질식해가는 꼴을 보는 일이 얼마나 궂은지를 아는데. 내가 그 애를 내 손으로 여기에 어떻게 묶어두나. 나는 별로 그러고 싶지가 않은데."
"그런 이유로 거래를 말하는 것인가."
"그렇지. 아무튼 좋게 좋게, 서로 날 세우지 말자고. 적어도 내 입으로 시스파니안께 너 말고 진짜 비아다누르가 눈을 떴다 말하지는 않을 테니까. 나나 형님이나 내 주변 사람들 좀 이제 그만 욕심내고 따로따로 살자고."
- 내 아우님께서 어찌나 욕심이 과하신지.
- 계속 그렇게 새삼스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제 그만, 좀. 비아다누르."
다누가 긴 숨을 들이쉬었다.
기실 숨을 들이쉬는 것이 맞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적어도 칼리안의 눈에는 그리 보였다.
그렇게 한참동안 생각을 이어나가던 다누가 입을 열었다.
"서로 날 세우지 말고 좋게 좋게. 그리 말하였나."
"그랬지."
"그리하여 너는 나의 방해를 받지 않고, 나는 계속하여 한 자리에 뿌리박혀 낡아 부스러져 가고."
칼리안의 말을 고스란히 따라한 다누가 말을 더했다.
"그리 하자 이야기한 것인가."
"그래."
칼리안은 곧장 대답했다.
다누의 말이 더 이어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칼리안이 물었다.
"갑자기 말이 없는데. 다누."
"너는 나의 자리를 좋게 여기지 않는다."
"좋게 보일 리가 있나."
"너는 나의 역할을 그 아이가 맡게 되는 것을 우려한다."
"안타까워 하는 거지."
"그것을 너는 나에게 계속 하라 말한다."
"하던 놈이 계속 하는 게 낫지."
"너는 무슨 권한을 지녔기에 나에게 그 역할을 계속하라 요구하는지 알고자 한다. 그 아이에 대한 마음을 나에게는 느끼지 않는 것인가."
"좋지도 않은 자리에 너는 그냥 앉혀두고 그 애는 지키겠다 하고. 좋지도 않은 자리에 계속 못박아두려는 너에게는 미안하다는 생각이 안 드는지. 그런 질문인거지, 지금."
다누는 대답하지 않았다.
칼리안은 웃었다.
그 이상 어떻게 더 피어오를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세상에 머무는 그 어떤 꽃보다도 더 눈부신 미소 사이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했잖아."
현혹시키지 못하는 것이 없다던 인어의 노래를 뭍에 흘려두면 저런 목소리가 들릴까. 하루를 노래하고 스러진다던 황금빛 카나리아를 붙잡아두면 저런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그런 목소리가 다누를 향했다.
"결국 너나 나나 다 똑같은 개새끼라고."
개새끼가 개새끼한테 험한 일을 시키겠다는데 이유가 어디 있겠으며 미안함이 어디 있겠나.
그런 대답임을 알아들었을지.
다누는 말없이 칼리안을 쳐다봤다.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대답을 전했다.
다시 한 번 빛이 스민다.
눈을 감지 않아도 될 빛이 든다.
시야가 바뀌었다.
숲이 보이고 물에 젖은 나뭇잎이 보였다. 그 끝에서 똑똑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이 보였다.
- 사아아아······.
비 개인 숲에 바람이 깃드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 반가운 소리 사이에 여전히 서 있는 이의 붉은 눈이 보인다.
시스파니안.
둘의 대화가 필요함을 이해하여 잠시 기다려 준 시스파니안의 얼굴이 보인다.
"지극히 위대한, 시스파니안을 뵙습니다."
뒤늦은 인사를 건넨 칼리안이 팔을 뻗었다.
여전히 젖어 있던 시스파니안의 길고 검은 머리에 클린을 걸었다.
한낱 인간이, 태고의 고룡에게.
"아무리 생각해도 감기 걸리실 것 같아서."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한 손에는 시간의 축의 조각을, 다른 한 손에는 뺏겼던 하피의 마석 두 개를 손에 쥔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