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93화 (494/527)

제86장. 욕심(6)

플란츠 가라사대.

내 동생이 참 무디다.

자주 짖고 가끔 물고 드물게 부수기도 하고 인성이 다소 복잡해서 그렇지 내 동생만큼 무딘 놈은 세상에 또 없을 거다.

못 믿겠으면 걔네 아빠랑 걔네 옛날 형한테 물어봐라. 한 목소리로 그 말이 맞다 할 테니까.

"시스파니안께서도 당연히 아십니다."

"막내의 속에 든 이가 달라진 것을 알면서도 개의치 않으신다는 말이더냐."

"알기 때문에 개의치 못하시는 겁니다."

대마법사 앨런 마나실과 세크리티아의 국왕 체이스 듀라한 세크리티아의 말을 듣고도 내 동생의 무딤에 대해 믿음이 가지 않는다면.

지그문트 칸 시스파니안에게 물어보던지.

할 수 있겠다면.

"시스파니안께서 만들어두셨던 물건 때문에 칼리안으로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세렌티의 안배였든 다른 누군가의 장난이었든, 결국 모든 일의 발단은 시스파니안이 만들어낸 시간의 축이 아닌가.

미친왕 플란츠 루 룬 카이리스가 일으키고 아르센이 이끌었으며 발칸이 참전하고 슬레이만과 앨런이 도왔던 전쟁. 다누는 방관하고 세렌티는 관여하지 않았던 전쟁. 그런 전쟁에서 한 번을 죽었든 백 번을 죽었든 결과적으로 시간을 되돌린 것은 시간의 축이다.

전쟁에 연관된 모든 이들의 책임을 무시하겠다는 소리가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는 거다. 모든 참극의 밑바닥에는 결국 시간의 축이 있었다.

그리고 그 물건을 만든 이는 바로 시스파니안이다.

"사실을 알면서도 원망 한 번을 안하는 사람인데 시스파니안께서 어떻게 내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스파니안을 원망하지 않는 사람이다. 다시 사는 내내 감내할 일이 그렇게나 많으면서도 시스파니안을 향해 왜 그랬느냐 묻는 것조차 묻어버린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다. 그런 놈이 내 동생이다.

그런 사람을, 그런 놈을, 내 동생을, 축복의 힘을 지닌 몸 속에 다른 이가 들어앉았다는 얄팍한 이유로 제 후손이 아니라며 내칠 수 있겠나.

시스파니안의 사려가 고작 그 정도인가.

"······ 시스파니안께서도 전부 이해하지는 못하실 이해를 가진 사람을, 시스파니안께서 어떻게 내칩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보호해주려 하는 것이더냐."

"보호라 하기보다는 보은이나 보상에 가까울 것이라고. 칼리안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제 생각에는 보호입니다."

시스파니안의 물건 때문에 홀로 떨어져나온 사람을 누구든 또 건드리지는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시스파니안의 후손이라는 이름이라도 가지고 조금이나마 순탄한 길을 걷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생각을 기저에 둔 보호일 터였다.

"나쁠 일은 아닐 테지. 이유가 무엇이든."

"네. 이유가 무엇이든."

어찌됐건.

시스파니안을 이해하는 것으로 시스파니안으로부터 이 정도의 이해를 얻어낸 놈이 내 동생이다.

시스파니안이 저를 여전히 후손으로 여기는 이유에 대해서는 일말의 유감도 없다는 것처럼 '아무튼 내 후손이 아니라 하지는 않으시니 카밀론에 갈 때 문제가 될 것은 없어 다행이다' 하는 태평한 말이나 꺼내는 놈이 바로 내 동생이다.

그런 놈을 두고 어떻게 무디지 않다 할까.

'시스파니안께서 오셨습니다.'

'다누는.'

'다누의 기운도 느껴집니다. 다 같이 숲으로 온 것 같습니다만······ 잠깐 가서 싸움 구경 좀 하다가 적당히 말리고 오겠습니다.'

'혼자.'

'네. 혼자 가야죠.'

'조각을 건네자고 한 건 나잖아.'

'형님이었든 누구였든 저곳 근처에도 못 가십니다. 저 셋 사이에 끼면 키리에도 못 버팁니다. 고집부릴 생각 말고 계십시오.'

'······ 알았어.'

'비 맞지 마시고요. 감기 걸립니다.'

그러니 내 동생은 무딘 것이 맞다.

걔만큼 무딘 놈은 세상에 또 없을 거다.

'하도 연약하셔서.'

'내 아우님께서 짖지 않고는 도저히 살지를 못하게 되셨나.'

'어쩌겠습니까. 재미를 붙였으니.'

'하필이면 왜 그런 것에 재미를 붙이셨는지.'

'재밌으니까.'

······ 그래.

자주 짖고 가끔 물고 드물게 부수기도 하고 인성이 다소 복잡해서 그렇지.

'아무튼 계십시오.'

'알았어.'

'날도 궂은데 괜히 란델 형님이랑 싸우지 마시고요. 그래도 어쩌다 싸움이 나면 키리에한테 편 들어달라 하셔도 됩니다. 그렇게 했어도 지게 생기면 부르십시오. 억지로 이겨먹으려다 시들지 말고.'

'너. 적당히, 좀.'

그렇게나 무딘 놈이라서.

그래서 기어코 다시 뛰쳐나갔다.

'다녀올게요.'

시스파니안의 손에 다누가 죽지 않도록 해야 한다면서, 그냥 두어도 아무도 말리지 않을 다누를 돕겠다며 나갔다.

플란츠를 꺼내오느라 시스파니안을 불러낸 셈이니 이번에는 란델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도록 다시 되돌려 보내야 되겠노라고. 그런 엄청난 말을 아무렇지 않게 꺼내두면서.

"하······."

란델에게 대답하는 한편 칼리안이 또 그렇게 팔랑팔랑 뛰쳐나간 방향을 쳐다보고 있던 플란츠가 느린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멀미라도 일으킬 것처럼 정신없이 쏟아지는 빗줄기에서 고개를 돌렸다.

- 톡······ 토독, 톡.

- ······ 치이익!

작디 작은 소리가 울린다.

바위 천장에 맺혀 있다 일순간에 줄을 잇듯이 떨어져내린 빗방울 소리, 그리고 그 중 몇 방울이 불 붙은 장작 위로 떨어지며 곧장 끓어올라 사라지는 소리다.

이 정도의 소리는 어렵지 않게 구분해 들을 수 있을 키리에가 모닥불을 쳐다봤다. 그러자 때마침 고개를 돌리던 플란츠가 키리에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러다 소리와 상관없이 이미 한참 전부터 모닥불을 쳐다보고 있던 란델과 눈이 마주쳤다.

때문에 깊이를 재볼 수 없을 저 푸른 눈으로부터 습관처럼 다시 고개를 돌리려는데.

- 톡! 톡, 톡!

칼리안이 떠났으니 자연스레 사라진 실드 덕에 다시 떨어지기 시작한 물방울이 이번에도 엉뚱한 곳에 안착했다.

- 토옥!

- 톡!

란델.

세 형제 중 가장 고불거리는 머리카락을 지닌 란델의 정수리에 여과없이 떨어져내렸다.

아마 칼리안이 있었다면 웃었을 거다.

- 툭, 툭!

그것을 보고 유일하게 웃을 놈이 없던 까닭에 좀처럼 웃음이 없는 플란츠와 키리에는 그냥 그러려니 하는 얼굴을 했다. 그 사이 란델은 제 머리로 손을 올려 머리카락 사이사이에 맺힌 물방울을 대충 털어냈다.

뼈마디 굵은 손이 그렇게 잠시 금빛 머리를 정돈하고 내려앉았을 때.

- ······ 우웅.

란델의 머리 위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울렸다.

얇고 넓은 형체를 띤 푸른 것이 가만히 빛을 내기 시작했다.

플란츠의 실드였다.

일순간에 펼쳐지지는 않았다. 잠시동안 서로 얽히며 조금씩 넓어졌다. 칼리안의 것처럼 흔들림없는 곧은 형체를 가지지도 못했고 칼리안의 것만큼 두텁고 단단하지도 않았다.

아직은 마법의 유지에 익숙하지 않은 까닭에 몇 번을 깜빡이고 잠시 구멍이 생기다 다시 메워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바위 천장 아래를 다 덮을 만큼도 되지 않아서 키리에나 네 마리의 말들, 그리고 플란츠의 머리 위를 다 감싸지도 못했다.

그냥 딱 한 사람.

정말 마음에 안 드는 위층 거주자의 머리 위에만 그것을 하나 만들어 올려 놓았다.

"무료하더냐."

그랬더니 딱 예상한 반응이 나왔다.

할 일이 없어 떨어지는 빗방울이나 막아주고 있느냐고.

"갚는 겁니다."

그래서 대답해줬다.

누구는 좋아서 해주는 줄 아느냐고.

"무엇을."

"알면서 물으십니까."

"명확치 않으니 묻는 것이겠지."

"몇 분을 쓰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하피 독에 대한 인사로는 값이 충분하지 않을 것 같아 드리는 겁니다."

"이유가 그것 하나더냐."

괜히 씌워줬다.

그 하나에 이렇게 꼬치꼬치 물을 줄 알았으면 그냥 물을 맞든 비를 맞든 내버려 둘 것을 그랬다.

입을 다문 플란츠가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에 대해 잠시 고민을 했다.

휘트린에서 이런저런 조언을 해준 것에 대한 값이라 하면 될지, 당신이 여기서 감기라도 걸리면 일정이 지체되니 그러는 것이라 해야 할지, 내가 뭘 하든 딴죽 걸지 말고 가만히 계셔라 해야 할지.

아니면 키리에도 있겠다 이참에 싸움이나 좀 걸어볼지.

"······ 처음 해보는 일입니다."

그것을 한동안 고민하다 결심했다는 듯 답했다.

그 이유가 그렇게 중요하냐 묻지는 않았다.

언젠가의 마차에서 따뜻한 로브를 덮어주던 히나에게 이유를 묻고, 다른 언젠가의 공작저에서 도움을 주겠다던 세리에에게 이유를 묻고, 또 언젠가의 산 속에서 수통을 건네던 키리에에게 이유를 묻고.

서툰 실드의 이유를 묻는 모습이 그 날들의 자신과 하등 다를 바 없는 것 같아서. 그렇게나 계산을 잘 하는 란델이라 하여 특별히 다르지는 않을 듯 보여서.

물론 지금 행동이 형제를 향한 '호의'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이유없는 행동에 굳이 이유를 듣고자 한다 하니 그렇게나 중요하다 하는 이유를 알려주기 위해 말을 이었다.

"장미 정원에 들어간 히나의 앞을 가리고 선 적 있습니다."

"기억하고 있다."

"칼리안의 앞을 막고 선 적도 있습니다."

"많았다 하더구나."

"잘 아시겠지만. 어머니 앞에 뛰어들었던 날도 있습니다."

마지막 말에는 곧바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란델은 플란츠를 잠시 쳐다보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리했었지."

다른 감상은 들지 않은 대답이 들려온다.

플란츠 역시 다른 감정을 넣지 않은 말을 계속했다.

"지금 그 실드. 처음 쓰는 겁니다."

"그래보이는구나."

"제 몸 말고 다른 것으로 누군가를 가려보는 건 처음입니다. 그것까지 아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러하더냐."

"그렇습니다."

"해서."

"그래서 보여드리는 겁니다."

다시 한 번 란델의 눈이 깊은 빛을 냈다.

그 눈을 마주함에 숨이 다시 막혀드는 것을 느낀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은 향수처럼, 형제라 여겨온 적 없는 이의 깊은 물 역시 곧바로 적응하지는 못한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신경쓰지 않고 계속 쳐다봤다.

타이가 조여드는 느낌을 내버려두고 그저 마주봤다.

"저는 무슨 일이 생기든 가만히 멈춰있는 사람 아닙니다. 누구 지키려고 제 목숨 거는 일 말고, 빗물하나 막자고 실드 펼칠 줄도 압니다. 이제 압니다."

손바닥만한 유리구슬 안에 갇힌 왕자 말고. 제 목숨 아낄 생각도 없이 어디든 뛰어들고 보던 멍청이 말고.

"칼리안이 저도 본 적 없는 제 흉내를 내 가며 형님께 알려드린 일, 이번에는 제가 직접. 직접 보여드리는 겁니다. 얼마나 달랐고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제가 제 입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형님께, 직접."

둘째 형님은 첫째 형님이 생각하던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마저 동생이 대신 얘기해줘야 하는 무력한 사람 말고.

칼리안이 보여줬던 가짜 플란츠 말고 진짜 플란츠가 어떤지를 직접 말했다. 숨이 턱턱 막히는 저 눈을 보면서 직접 말했다.

저러다 또 비틀리고 싸움이 나면 키리에가 편을 들어 줄 테니까. 그것으로도 안 되면 동생 놈을 불러오면 되니까. 그래서 정말 큰 맘을 먹고 하고 싶던 말을 했다.

참았던 말을 했다.

"그리하면."

가만히 그 연두색의 눈을 들여다보던 란델이 입을 열었다.

"달라지는 것이 있더냐."

"또 무상하다 여기시는 겁니까."

"그저 궁금증이다. 아직 멀리 걷지 못하였으니."

"······ 최소한."

플란츠가 손을 뻗었다.

바위 지붕 너머 어딘가, 이곳에 찾아오기 위해 걸어올라왔던 계곡이 있을 곳을 가리켜 보였다.

툭툭 불거진 뼈가 유난히 도드라진 손가락을 바라보는 란델에게 플란츠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든 꽃에 멀쩡한 생명 나눠주는 일은 안 하게 됩니다."

"안 한다면."

"걸을 줄 아시잖습니까. 몇 발자국 더 걸어서 물 떠다 주십시오. 주변에 물 많지 않습니까."

시들었으면 물을 주면 된단다.

태어나 꽃이라는 것을 키워 본 일이 없으니 할 수 있는 말일 터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었으면 이제껏 칼리안이 속으로 내가 키우던 완두콩 또또또 시들었다면서 드미레아와 시스파니안과 세렌티를 불러제끼며 불평불만을 토로할 일도 없었을 거다.

뭐 아무튼 이 자리에 칼리안이 있던 것도 아니었고 칼리안이 그동안 무슨 고충을 겪었는지 대충이나마 알고 있는 키리에는 왕족의 대화에 끼어 들 생각도 욕심도 없던 까닭에.

"어렵지 않을 것처럼 들리는구나."

아래층 사는 동생 놈의 말에 반박할 마음은 없는 화훼농업 전문가가 대충 넘어가주듯 말을 받았다.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때.

- ······ 똑.

서툰 실드에 난 틈새로 스민 빗물이 또로록 똑 하고 란델의 얼굴 위에 떨어져 아래로 흘렀다.

실드에 구멍이 났다.

멋드러지게 실드를 펼치고 거기에 의미를 담아 설명을 해 가며 제 형제의 안 좋은 태도에 대한 감명깊은 조언이 끝나기가 무섭게, 실드에 구멍이 났다.

- 탁!

키리에가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마치 애초부터 할 일이 있었다는 것처럼 이리스에게로 걸어가 주섬주섬 가방을 뒤지더니 그 속에서 하얀 수건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으로 레이븐의 젖은 털을 슥슥 닦기 시작했다.

란델과 플란츠로부터 고개를 돌린 채로.

정말 꿋꿋하게 단 한 번도 얼굴을 돌리지 않은 채로.

"서툴구나."

정작 젖은 것은 내 얼굴인데 내 막냇동생의 기사는 말의 털만 닦고 있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란델이 입을 열었다.

그 말에 까딱이듯 고개를 움직인 플란츠가 대꾸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서툽니다."

"서툴 뿐이더냐."

"아니면 뭐겠습니까."

"마법은 생각을 내비치는 거울과도 같다 하였는데."

"그랬다면 형님을 가려드리는 제 실드를 보실 일도 없었을 겁니다."

"그러하더냐."

"그렇습니다."

한결같은 말싸움이 이어진다.

툭, 툭, 툭.

하늘에서 쏟아지던 비가 멈추었음을, 이제는 나뭇잎 위에 고여있던 빗물만 바닥을 툭툭 두드리기 시작했음을 눈치채지 못한 채로.

* * *

잔뜩 젖은 새카만 머리카락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르나이젤, 그리고 등 뒤의 다누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야말로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온 모양새가 된 칼리안과는 달리 둘 모두 조금도 젖지 않았다. 앨런도 7서클부터는 그러한 능력을 부렸으니 하물며 저들에게야 당연한 일이다.

앞에서 칼리안과 똑같이 비를 맞아주고 있는 시스파니안이 이상한 거다.

그 모습에 유독 마음이 쓰인다.

때문에 시스파니안의 앞에서 실드를 꺼내는 잔재주를 부려 가며 저 비를 좀 막아줄까 하다가.

비를 맞는 것이 싫었다면 저 비를 온통 다 맞고 있지는 않겠지. 아무렴 얼마나 살아왔을지도 알지 못할 고룡이 감기에 걸릴 일도 없을 테고.

이런 생각에 들었던 손을 그냥 도로 내렸다.

"다누."

그리고 입을 열었다.

머리카락 색을 빼고는 시아를 고스란히 닮은 다누를 불렀다.

다누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네가 낸 시험은 잘 치른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신경쓰지 않고 말을 건넸다.

그런데 시험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파란 머리와 검은 눈의 남자 아이, 아르나이젤이 제 작은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아르나이젤이 시험이라는 말에 반응을 한다니.

시스파니안에게 시험이라도 치르는 모양이다.

시험이란 어차피 제 성취가 얼마나 되는지를 확인하게 되는 과정일 뿐이니, 괜한 시간 낭비도 막을 겸 열심히 쌓아 오던 망나니 명성에 한 손 얹을 겸 온갖 시험을 다 거부해왔다던 완두콩이 저 모습을 좀 봐야 할 텐데.

대해를 지켜오던 해룡조차 벗어나지 못할 시험의 굴레를 형님 너만 거절하며 산 거라고. 아무튼 형님 너 진짜 재수없으시다고. 그런 말도 좀 해 주고.

"시험의 방법에 제한을 두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때문에 내어주었지 않았느냐."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다누의 대답이 들려왔다. 그 말에 작은 웃음을 지은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형님만 돌려줬어. 내 질문들에 대답해주기로도 했었잖아. 그 약속도 지켜야지."

"저들이 돌아가면 다시 부르겠다."

저 말을 믿어줄까, 말까.

고민을 하던 칼리안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곧 칼리안이 시선을 돌렸다. 자신과 다누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시스파니안으로부터 눈을 떼 아르나이젤을 쳐다봤다.

"나 비 맞는 것 안 좋아해, 아르나이젤."

아르나이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비를 맞아도 숨이 막혀?"

"비슷해."

"나 때문에 또 숨이 막혀?"

"네 탓은 아니야. 그냥 숨이 막혀."

"나 가면 싸울 거야?"

"싸운다고 싸워 질 상대인가. 안 싸워."

칼리안이 비어있는 양손을 들어보였다.

어차피 당장 손에 쥔 검이 없다 해서 못 싸울 칼리안은 아님을 안다. 그러나 아르나이젤은 한동안 칼리안을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나 돌아갈게."

"고마워."

곧 아르나이젤의 온 몸이 푸른 물방울같은 빛에 휩싸였다.

다음에 또 봐, 하는 입모양을 내비친 아르나이젤의 주변에 퐁퐁퐁 물방울이 생겨난다. 그 뒤 아르나이젤은 바다 소금내를 조금 남겨두고 모습을 감췄다.

돌아간 것이다.

칼리안을 위한다 하기 보다는 아마도. 칼리안의 숨이 막히면 시스파니안에게 혼난다는 생각 때문일 터였다.

잠깐 웃은 칼리안이 뒤로 돌아섰다.

이제는 반대로, 시스파니안을 등지고 서서 다누를 바라봤다.

말없이 서 있던 시스파니안에게까지 돌아가달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엘프들도 없이 칼리안과 단 둘이 남겨진 다누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시스파니안을 돌려보내겠나. 칼리안도 제 목숨이 꽤 비싸다는 것 정도는 안다.

"내 물건 돌려줘야지. 다누."

"오가는 이야기를 들었으리라 생각한다."

"나를 못 믿어서 못 주겠다는 말이잖아."

"그러하다."

"시스파니안께서 나에게 맡기셨다 했는데도."

"상관 없는 이야기다."

그렇게 고집을 부리다가는 정말로 시스파니안에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할까. 이런 고민을 잠시 해 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나를 못 믿겠으면, 거래를 해. 다누."

시오나의 방법을 꺼냈다.

자신을 믿지 못하겠으면 차라리 거래를 하자고. 엘프를 믿지 못하는 칼리안에게 시오나는 그런 말을 했었다.

아무래도 돌아가면 시오나에게 좋은 검을 하나 마련해줘야 되겠다.

이제 와 시오나의 억울했을 마음을 조금 알게 된 칼리안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직 대답하지 않는 다누를 보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나와 내 주변 사람들에게 간섭하지 않겠다 약속해. 내가 실수로 떨어뜨린 내 물건도 돌려줘. 그럼 나는 입 다물 테니까."

"무엇을 의미함인가."

칼리안의 붉은 입술이 긴 호선을 그린다.

- 시아.

시스파니안을 등진 채로, 소리없이 움직인 그 붉은 입술이 분명한 이름 하나를 만들어냈다.

너와 달리 미래를 읽을 줄 아는.

너와 달리 이제야 눈을 뜨게 된.

그리하여.

- 보호받지 않고 태어난, 아직 어린 '어머니 나무'.

시스파니안이 억지로 틔워낸 가짜 나무 말고 진짜 어머니 나무. 이름 그대로 스스로 태어난 그 생명에 대해서.

다누가 고개를 들었다.

빛이 터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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