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92화 (493/527)

제86장. 욕심(5)

생각나는 것이 모두 달랐다.

- 쏴아아아······!

- 툭, 툭, 투둑······ 툭.

멀리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거센 소리, 천장을 덮어 둔 실드를 두드리는 고요한 소리. 소란하거나 혹은 정적에 가까운 소리들을 듣던 두 사람의 머릿속에는 서로 다른 기억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창 밖으로, 비가 오는 게, 보여. 비가 오는데, 빗물받이를 준비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 두 사람 중 한 명인 키리에는 이런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왕궁에 오고 오래되지 않은 어느 날의 히나가 키리에의 질문에 대해 전해온 답이었다.

'나는 그게, 너무 좋아. 사람들과는 조금씩, 친해지면 돼. 힘들고 불편한 건, 하나도 없어. 걱정, 안 해도 돼.'

히나와 키리에가 새로 머무르게 된 체르밀 궁의 1층과 2층에는 나무 창이 아닌 유리 창문이 달려 있었다. 늘 비가 새는 천장 같은 것도 없었다. 그 덕에 히나는 비가 오는 날에도 창밖을 볼 수 있었다. 유리 창문을 타고 흘러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기도 했고 밤새도록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면서도 마음 편히 잠들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처음 겪는 일이었다.

기분 좋은 설렘이 드는 일이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고. 지나치게 깨끗한 왕궁과 낯설만큼 다정한 사람들 사이에서 동생이 혹시라도 겉돌까 걱정하던 키리에에게 히나는 그런 말을 했었다.

'부군단장님, 혹시 사과 잼 파이 드십니까?'

플란츠의 기억은 조금 더 다채로웠다.

'아스트리샤 거리에서 카페를 한다는 동생 말입니다. 비만 오면 단 것들을 싸주는데 오늘도 엄청 많이 만들어줬습니다. 괜찮으시면 부군단장님께서도 드셔보시겠습니까? 많이 달지만 그래도 맛있습니다.'

비오는 날이 되면 우울해지니 단 것을 먹어야 한다는 니들렌의 말을, 앨런에게는 이미 절반을 떼어 주고 오는 길이라며 덧붙던 웃음소리를 떠올렸다.

'부군단장님, 혹시 헤르츠 부군단장님 보셨습니까? 치유사님이 헤르츠 부군단장님 어깨를 잠시 봐드리겠다 하는데 헤르츠 부군단장님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틀 밤을 샜다 했는데 이미 퇴근이라도 한 건지······.'

또 다른 어느날도 생각이 났다.

비만 오면 어깨가 쑤신다며 엄살을 부리더니 빈 침상이 있는 치료실 어딘가에서 그대로 잠들어버린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 덕에, 예정된 수업을 취소하고 오후 내내 그 동종업자의 업무를 대신 처리해야 했던 날의 목소리였다.

'왕자님, 오늘 안네가 빗물이 고인 곳에 들어갔나봐요. 배랑 꼬리가 온통 흙물 투성이인 것을 루시가 물어다 데려와서 왕자님의 침대 위에 올려놓는 바람에······ 지금 왕자님의 침상을 다시 정리하고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얼른 마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플란츠에게 아직 '저하'라는 호칭이 붙지 않았던 시기. 안그래도 물을 싫어하는 어린 안네가 빗물 웅덩이에 빠졌다가 결국 목욕까지 하게 되어 밤늦도록 서러운 울음소리를 냈던 날의 이야기도 머릿속을 울린다.

'보렴, 내 아가. 비가 내리는구나.'

물론 그러한 가벼운 심상만 떠오른 것은 아니었다.

'저 비가 아무리 사납다 하여도 네 소매를 적실 수는 없을 거란다. 내가 있는 한 그 어떤 것도 네게 닿을 수는 없을 거란다. 네가 걷게 되고 말을 하게 되고, 언젠가 나에게 가장 큰 선물을 가져다 주게 될 그 날까지 내가 모두 다 가려주마. 그것이 설령 하늘이라 하여도.'

아직 이름으로도 불리지 못했을 만큼 어렸던 날.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기억 속에 남겨진 까닭에 한참이 지나서야 그 뜻을 알게 된, 결코 기껍지 않은 약속의 말이 스치듯 들려온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저는 비 오는 날이 싫어요.'

'비 싫어합니다. 비 맞는 것도 싫어합니다. 바닷속에 잠기는 기분이라.'

닮은 듯 다른.

혹은 다른 듯 닮은.

그런 동생의 한결같은 고백까지도.

'지금이었다면, 당신의 그 짧은 말을 내가 알아봤을까.'

그리고, 이렇게.

그래.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에 들려왔던 수많은 말들이 한순간에 떠올라 제각각의 목소리를 냈다.

사과 잼의 단 맛에 기꺼움을 느끼는 한편 사라진 동종업자에 대한 짜증이 들고, 어린 고양이의 서러운 울음만큼이나 따뜻하고 보송보송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갈망이었을지 원망이었을지 앞으로도 온전한 답을 찾지 못할 그리움에 길을 잃다가도, 종내에는.

종내에는.

치밀듯이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는.

그런 수많은 기억이 함께 들었다.

그러니 키리에에게 있어 빗소리란 곧 안온함이었다. 그리고 플란츠에게 있어서는 한 가지 단어로 규정할 수 없을 정갈한 뒤섞임이었다.

'고쳐주세요. 이번에는.'

참는 것은 어른이 해야 할 일이라는, 플란츠로서는 죽었다 깨도 수긍해주기 싫은 말을 잘도 골라내가며 고집을 부리던 칼리안이 일순간에 태도를 바꿨었다.

그 말을 들은 란델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키리에가 모닥불같은 따스함에 젖고 플란츠가 혼재한 기억에 빠져든 이후로도 한참동안 말을 아꼈다. 치료가 필요한지를 먼저 물었던 것을 잊은 듯이 칼리안을 쳐다보기만 했다.

"지나온 폭포와 파도 소리가 나쁘지 않았다."

그러더니 이런 말을 했다.

휘트린 영지 이후로 꽤 오랜만에 마주하게 된 동생의 붉은 눈을 보면서.

칼리안은 당장 제 고집을 꺾고 치료를 부탁할 만큼 바깥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말해주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입니다. 온통 낯선 것들 뿐이라 걱정했는데."

변장을 푼 까닭에 상처가 움직였음을, 때문에 그나마 익숙해지던 통증이 다시 스미고 있음을 알리는 대신 대답을 했다.

"지금의 빗소리와 많이 닮았더구나."

"하나같이 물이 쌓여 토해내는 소리이니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상상은 했었습니다."

"그런 상상을 했더냐."

"네. 상상했었습니다."

빗소리와 계곡 소리 말고 세뉴강의 물소리 같은 고요한 대화가 가만가만 이어진다.

"그래.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행이네요. 제 상상이 틀리지 않았다 하시니."

그것은 '칼리안'을 향한 말이었다.

또한 '칼리안'이 건네는 답이었다.

왕궁에서 들을 수 없는 폭포와 파도 소리가 듣기에 좋았다고. 왕궁에서 들어본 빗소리가 온갖 물소리의 전부였을 '칼리안'에게 란델이 알려주는 말이었다.

그래봐야 물이 만들어낸 소리일 테니 빗소리와 다르지 않으리라 상상해왔다고. 왕궁에서 들어본 빗소리가 온갖 물소리의 전부였던 '칼리안'이 란델에게 건네는 대답이었다.

휘트린에서 이곳까지 오는 내내 칼리안은 베른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 않나. 결국 란델과 함께 있던 이들 중에 그 물소리를 상상해오던 '칼리안'은 없는 것과도 같았다.

아니. 없는 것이 맞았다.

"상상을 하였을 만큼 궁금했더냐."

란델이 물었다.

지금 앞에 선 칼리안이, 그 물소리를 사분사분 상상해오던 오래전의 칼리안이기라도 하다는 것처럼. 그 칼리안은 없는 것이 맞았으나 여전히 곁에 남아 말을 나눠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칼리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폭포와 바다 소리까지 욕심내지는 않았습니다. 바람 소리를 더 좋아했던 터라."

"욕심이라 여겼더냐."

"탑에서 들을 소리는 결국 바람 소리뿐인데······ 다른 소리를 궁금해하는 마음이란 결국 욕심이 아닙니까."

칼리안은 이렇게 애써 모르는 척해왔던 일들을 입에 올리며 대답을 했다. 알고 싶어 하지 않았던 까닭에 '모르는 것으로' 해 두었던 일들을 꺼내놓으며 란델과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래서 욕심내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바람 소리를 더 좋아하기도 했고."

소리죽인 한숨소리가 작고도 작게 들려왔다.

키리에의 것이었다.

그 외의 다른 숨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둘째 형은 숨을 멈추고 고개를 숙인 채였고 첫째 형은 들이쉰 숨을 언제 내뱉어야 할지 고르지 못한 탓이다. 그래서 결국은 키리에의 작은 한숨만 빗소리 사이에 녹아들었다.

"저는 죽을 때까지 안 열어 볼 생각입니다."

이윽고 다시 빗소리만 남겨진 바위 지붕 아래에서, 두 형에게 빗물이 떨어지지 못하도록 꼼꼼하게 씌워 놓은 실드 아래에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독차를 받아 든 이후부터 '제'가 다시 깨어날 때까지 '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가 왜 '저'를 받아들였는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저와 함께 있었는지. 저는 모르고 싶습니다."

란델의 바다가 칼리안의 생을 향했다.

짙푸른 눈을 똑바로 마주 본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더 이상 다른 사람 탓하기 싫다는 소립니다. 구구절절 엮인 일 다 따져가며 다른 사람 탓하는 것 말고 그냥 세렌티 탓으로만 여길 겁니다. 폭포 소리든 파도 소리든 하나도 안 궁금하다 여겼던 것처럼 저도. 모르는 채로 상상만 하며 살 겁니다. 그건 제 욕심입니다."

혹시라도 형들을 원망했을까.

아니라면 형들을 용서했을까.

떠나기 전 꿈에서 만난 칼리안은 이미 전부를 다 이해한다 하였으나, 그렇게 되기까지 다른 감정이 있었을까봐. 원망과 용서를 이미 지나쳐간 이해일까봐. 형제를 원망했든 용서했든 모르고 싶다고. 그렇게 말했다.

"욕심이겠느냐, 그것이."

"살겠다 했으니, 그것 하나만은 따지지 않고 그냥 살 겁니다. 형님들 생각해서가 아니라 제 스스로를 위해서 그렇게 할 겁니다. 그게 제 바람입니다. 그러니 욕심입니다, 저에게는."

다시 한동안 침묵이 맴돌았다.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폭포 소리 파도 소리 혼자 들으신 일에 새삼스레 마음을 두셔도 저는 용서 못 해드립니다. 세상 사람 전부 다 란델 형님이 저지른 방관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말해준들, 저 하나만은 그렇게 말씀 못 드립니다. 원망도 안 하고 용서도 안 하고 저도 그냥 이해만 할 겁니다."

"그래."

"그것도 제 욕심입니다. 워낙 욕심 많은 사람이라 이것저것 다 제가 욕심부리는 겁니다. 그러니 란델 형님도, 저처럼 그냥. 사십시오. 이제 와 용서 구할 생각 말고, 다만 잊지도 말고 그렇게 그냥 이해받은 대로 사십시오. 그게 형님들과 제 몫입니다."

란델이 대답없이 눈을 내리떴다.

칼리안이 란델의 손을 가리켜 보였다.

"치료 좀 해주시고요. 아픕니다."

굳이 칼리안을 떠올리게 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결국은 떠올리게 할 상황이 되었으니 말을 바꿀 수밖에. 칼리안의 기억을 떠올리게 할 일이 없도록 하고자 하였으나 상황이 바뀌었으니 어찌하겠나.

이참에 미련을 버리도록 해줄 수밖에.

그것이 용서에 대한 미련이든, 원망에 대한 미련이든.

제 손을 가리켜보이는 칼리안의 손가락을 내려다보던 란델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리하마."

"네."

선 굵은 란델의 손이 곧바로 붉게 빛났다.

차츰차츰 통증이 가시고 뼈와 근육과 살이 아물어 붙는 느낌이 났다.

"미스릴 가위 값으로 칠까요."

히나의 것과는 확연히 다른, 마음이 편안해지기는 커녕 오히려 심장이 아려오는 것 같은 느낌의 치유력. 의심 한 점 없이 그런 힘 앞에 제 오른쪽 어깨를 고스란히 내준 칼리안이 물었다.

꾹 다물려 있던 란델의 입이 살짝 움직였다.

"선물에 값을 두는 것이더냐."

"그건 좀 치사하긴 하죠. 그럼 이건 어떤 값으로 치면 되겠습니까."

"두거라."

덧자란 가지를 쳐내듯 칼리안의 말을 싹뚝 잘라낸 란델이 말을 이었다.

"값 없이 그저 갚는 것이니."

갚지 말고 도와달라고.

체이스가 플란츠에게 부탁했던 말이었다.

그러나 아직 갚을 것이 많다 여긴 플란츠는 그 가르침은 쏙 빼고 제 생각만 란델에게 전했었다. 값을 치르지 말고 그저 갚으라고. 그렇게 갚아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도울 날도 알아서 올 테니까.

체이스와 플란츠의 사이, 그리고 플란츠와 란델의 사이에서 있던 일을 알 리 없을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뭘 갚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공짜는 좋은 거니까.

* * *

똘망똘망한 눈을 했다.

그러더니 또랑또랑한 목소리를 냈다.

"싫어."

지그프리드령 인근의 숲.

카이리스에서는 그저 그렇게만 부르는, 시스파니안의 영토이자 엘프들의 어머니 나무가 뿌리를 내린 곳이기도 한 드넓은 곳.

사실은 '실라하르' 라는 제대로 된 이름을 지니고 있으나 인간들에게는 그 명칭이 알려지지 않은 광활한 숲의 깊은 곳에 당당하게 발을 디디고 선 아르나이젤의 목소리였다.

"나 가면 싸울 거잖아. 그러려고 엘프들에게서 다누를 꺼내 온 거잖아."

아르나이젤의 말대로였다. 지금 그들의 주변에는 말 그대로의 숲이 펼쳐져 있었다. 주변에 가득했던 엘프들은 물론이거니와 엘프 도시의 신비롭고 아름다운 경관도 사라진 채였고 광활한 바다 역시 찾을 수가 없었다.

세렌티가 직접 명명한, 때문에 대륙의 어떤 생명도 그 위에 새로운 이름을 덧씌울 수 없는 거대한 숲과 대사막의 연결고리를 시스파니안이 잠시 끊어버린 까닭이다. 아르나이젤의 말마따나 엘프들의 도시로 감싸여 있던 다누를 시스파니안이 꺼내 온 셈이 되었다는 뜻이다.

- 시스파니안이 왔으니까 빨리 돌려줘, 비아다누르.

- 그것만 돌려받고 돌아가, 시스파니안. 응?

어린 엘프의 모습으로 변해 서 있던 다누와 늘 그러했듯 검은색의 상복을 입은 시스파니안의 사이를 가로막고 선 아르나이젤이 제 뜻을 다시 전했다.

아직 성체가 되지 않은 어린 용의 걱정에도 곁에 서 있던 둘은 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것을 본 아르나이젤이 입술에 주름이 지도록 꼭 오므려 닫았다. 그리고 한 번 더 입을 열어 목소리를 냈다.

"다누는 용이 아니야, 시스파니안. 저게 왜 여기에 있는지 알고 싶어 할 수 있어. 너와 직접 얘기하려고 할 수 있어."

"우려하지 말거라."

혹시나 시스파니안이 화를 낼까.

시스파니안의 이해가 어느새 끝에 달했을까.

"이해해 줄 거야?"

"이해하고 있다."

"응응. 알았어. 우려 안 할게. 여기서 조용히 기다리기만 할게."

그리 걱정하며 다누의 편을 들던 아르나이젤이 환한 웃음을 지었다. 아마도 바닷속이었다면 또 퐁퐁퐁, 기분 좋은 공기방울이 물 속으로 퍼져나갔을 터였다.

인어와 인간의 사이를 중재하고, 바다와 뭍의 사이를 중재하고, 용들과 다른 오랜 존재들의 사이를 중재하고, 그렇게 신과 생명의 사이를 중재해오던 이들이 바로 해룡이다. 대해에 사는 인어의 곁에 인간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하고 바다로 밀려드는 뭍의 것들을 되돌려 보내며 지난한 생을 보낸 이들의 싸움을 막는 것으로 바다 뭍의 생명들이 신의 미움을 사지 않게끔 지켜오던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양신전쟁 당시 가장 처참하게 희생되었다. 세상을 향해 분노를 토해내던 악신의 앞을 가로막은 까닭에 누구보다 잔혹하게 희생되었다.

그리 죽은 해룡들의 품에서 시스파니안이 간신히 구해낸 단 하나의 알, 그 속에서 태어나 인어들의 보호 아래 자라난 귀한 생명이 바로 아르나이젤이었다.

"나 그럼 여기 있을 테니까 얘기해. 싸우지 말고 얘기해."

몇 걸음을 벗어나 둘의 사이에서 멀어진 아르나이젤이 고집을 부리듯 이야기했다.

결국은 천성을 버리지 못해 이렇게 또 중재를 하려 든다. 저와 같았던 이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면서도.

인간을 꼭 닮은 작은 한숨을 내쉰 시스파니안이 다누를 바라봤다.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의미는 분명했다. 그러나 시스파니안은 굳이 말을 전했다.

"돌려받고자 한다. 비아다누르."

"설명을 하라, 시스파니안. 그것이 왜 인간의 손에 있는지를."

"내가 너에게 설명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은 한데 모여 본래의 형상을 되찾을 것이다. 그것을 어찌 인간의 왕이 탐하도록 두는 것인가."

"나의 아이가 탐한 것이 아니다."

칼리안을 두고 아르나이젤은 '시스파니안이 아끼는 인간'이라 불렀었다. 그리고 시스파니안은 보다 더 나아간 말로 칼리안을 칭하고 있었다.

"그는,"

"나의 아이는."

다시 한 번 이렇게, 못을 박듯이.

다누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 이상 칼리안에게 손을 댔다가는 한낱 인간이 아닌 '고룡의 핏줄'을 해치려 든 행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리라는 경고임을 알아들은 까닭이다.

다누의 말을 자른 시스파니안이 새겨넣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전했다.

"나의 아이는 그것을 탐하지 않는다. 나의 허용 아래 보호할 뿐이다."

"······ 보호를 맡겼다는 말인가."

"그리하였다."

"너를 대신함인가."

"그러하다."

별조차 뜨지 않은 깊은 밤을 풀어둔 듯한 검은 드레스자락이 물결처럼 움직였다. 흔들림없는 걸음으로 다누를 향해 한 발을 다가선 시스파니안이 다누를 내려다봤다.

- 그 힘을 탐하지 말라.

- 네가 보호하겠노라 말하지 말라.

- 인간을 불신한다 여기지 말라.

동시에 흘러나온 세 번의 경고가 다누를 향했다. 강한 경고의 말에 다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저보다 훨씬 큰 시스파니안을 올려다보며 답했다.

"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보호하고자 한다. 불신이 아닌 불안이다."

시간의 축의 조각. 혹은, 재앙의 조각.

그것을 악용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어찌 사용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하는 물건을 두고 욕심을 낼 만큼 사고가 짧지는 않았으니까. 그저, 자신의 공격 하나 제대로 눈치채지 못한 인간의 손에 사라져야 할 힘을 맡겨두기 불안하다 여길 뿐이었다.

그저, 이해의 차이.

혹은, 믿음의 차이.

다누는 칼리안을 믿지 못하고 시스파니안은 다누를 신용하지 못할 뿐. 결국 서로 원하는 것은 다르지 않았음에도 계속 어긋났다.

"아니라면 네 손에 두기를 원한다, 시스파니안. 그렇다면 건네겠다."

"불가하다."

"어째서 불가하다 하는가. 네가 만든 물건이 아닌가."

시스파니안이 낮은 숨을 들이쉬었다.

고민을 앞둔 하츠아라가 그러했듯이.

그 이유를 알리는 대신, 시스파니안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 하츠아라가 그렇게나 큰 땅에 자신의 깃발을 올린 것에 반발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보냈다.

- 하츠아라는 물론 강한 인간이었으나 살아남은 몇 안되는 동족들과의 이해가 맞지 않는다며 검을 꺼내들 성정을 지니지는 않았다.

- 때문에 하츠아라는 그에게 반발하는 이들을 그저 지켜보았다.

- 어느날 그들이 하츠아라를 붙들어갔다.

- 그들은 나의 이해를 믿었기 때문에, 하츠아라를 해한다 하여도 나의 분노를 사지는 않으리라 믿었다. 긴한 일로 홀로 나섰던 나의 인간을 둘러싸고 검을 겨누었다.

일순간에 전해진 수많은 말.

앞에 서 있던 다누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 몰랐습니다.

이제는 익숙한, 사고 참 잘 치는 어느 이성없는 인간으로부터의 대답이 들려왔다.

- 그런 얘기는 역사책에 없었어서. 지금 처음 들었습니다.

대책없이 일을 저지른 이의 것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차분한 대답. 그런 목소리를 조용히 듣던 시스파니안이 다시 말을 전했다.

- 부끄러우니 기록하지 말라 하였다.

- ······ 초대왕 전하께서요.

- 그래.

- 아······.

'사람들은 내가 칼을 쥐면 날아다닌다고 믿어요. 날지는 못해도 엄연히 소드마스터인데 납치라니, 부끄럽잖아요. 그러니까 기록하지 말라고 했어요. 혹시나 나중에 언젠가 이 일이 어떻게든 알려져서 누가 사실을 묻거든, 시스파니안. 내 마음이 하해같아서 잠깐 붙들려 준 거라고 해명해줘요.'

- 그······ 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갑작스러운 이야기에도 당황하지 않으려 애쓰며 전해오는 대답에, 시스파니안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한 자리에 뿌리박힌 듯 가만히 선 채 시스파니안의 대답을 기다리는 다누를 바라보다 계속하여 말을 전했다.

- 나를 불렀다.

- 초대왕 전하께서요. 시스파니안님을요.

- 그래.

- 납치됐으니까 구해달라고요.

- 그리 말하였다.

- ······ 아.

초대왕의 비사를 듣게 된 먼 후손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전해진다. 그것을 듣지 못한 척, 시스파니안이 말을 이었다.

- 다누에게 건넸더구나. 재앙의 파편을.

- 네.

- 그것에 손을 대기를 허락해줄 수 없을 이를 내가 어찌 대할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느냐.

- 그럴 겨를이 없었습니다. 안 그러면 제 형님 잃어버릴 판이라서.

- 하여 다른 생각 없이 건넸느냐.

- 네. 그랬습니다.

- 너는, 그를.

이렇게 이야기하던 시스파니안이 말을 멈췄다.

다누가 한 발을 움직여 시스파니안에게 다가서는 것이 보인 까닭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행동을 벌이지는 않았다. 때문에 시스파니안은 칼리안을 향한 말을 이어나가려 했다.

- 대책없이 위대하신 분을 청하는 것이 닮았습니까. 초대왕 전하를, 제가.

그런데 칼리안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시스파니안은 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 그를 생각나게 한다.

이성이 없는 것도.

앞뒤 안 가리고 일을 벌이는 것도.

그 누군가를 그리도 생각나게 하여서.

- ······ 검은 나비를 죽음이라 부른 일을 사과드리고 싶었습니다.

- 나는 이해하였다.

- 떠올리게 한 일도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잊고자 하였을, 그러나 잊히지 않았을, 여전히 온전히 다 이해하지 못하였을 그 감정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었음에 대해 사과하고자 한다고.

- 그리 하지 말거라.

시스파니안은 더없이 고요한 음성을 전했다.

- 그것이 나에게는 생이었으니.

사과를 받지 않겠노라 했다.

사과를 받는다면 그 날의 생이 퇴색될 것만 같아서. 이해하지 못할 마음이었으나 어쩐지 그렇게만 느껴져서.

"그럼."

대답이 들려왔다.

- 저벅!

발 소리가 들려왔다.

일부러 만들어낸 커다란 소리가 갑작스레 들려왔다.

검은 머리, 붉은 눈.

이곳에 모인 셋과 비교하여도 가히 흠잡을 곳이 없을 어여쁜 얼굴이 그들을 향해 생긋, 고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칼리안.

어느새 어깨를 다 고친 칼리안이 찾아왔다.

굳이 발 소리를 내지 않아도 진작부터 자신의 방문을 다 알고 있었을 세 명의 나이 많은 존재들을 향해 걸어온 칼리안이 주변을 둘러봤다. 멀쩡해진 오른쪽 어깨를 한 채로 가만가만 걸어와 가장 먼저 시스파니안을 향해 깊은 묵례를 보였다. 그리고 아르나이젤을 보며 짧게 눈짓을 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어린 엘프 시아와 참 많이 닮은 모습을 하고 있는 다누를 향해서는 인사 안 했다. 칼리안은 마음이 넓은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사과드리지 않겠습니다. 대신."

저벅, 저벅.

주저함 없을 걸음으로 걸어온 칼리안이 시스파니안의 앞에 섰다.

"제가 직접 다시 돌려받겠습니다."

조금 전 아르나이젤이 서 있던 자리.

바로 그 자리에 다누를 등지고 섰다. 시스파니안을 마주보며 발을 멈췄다. 그리고 꺼내던 말을 마저 전했다.

"옥수수 키우려면 필요해서요. 나무가."

시스파니안이 칼리안을 바라봤다.

칼리안이 생긋, 다시 한 번 웃음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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