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91화 (492/527)

제86장. 욕심(4)

지그프리드령 인근의 숲.

엘프들의 도시로 향하는 통로가 마련된 그 숲은, 그저 걷기만 하며 가로지르는 데에만 해도 족히 며칠은 걸릴 만큼의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그 정도로 넓었던 터라 숲의 한쪽에 비가 내리는 동안 반대편 숲의 날씨는 쾌청한 날이 간혹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상태가 오래도록 이어진 적은 없었다. 비가 다 그치지 않는 이상에야, 비구름이란 결국 어디로든 바람을 따라 옮겨다니게 마련이니까.

- 쏴아아아······!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숲의 가장 깊은 곳, 엘프들의 도시로 향하는 통로가 위치한 부근에만 비가 왔다. 때문에 그 통로와 멀지 않은 계곡에도 비가 내렸으나 거기까지. 그 외의 다른 곳은 아주 화창했다. 그리고 그런 상태가 오래도록 지속됐다.

만약 그런 상황이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음을 누군가 알고 있었다면 참 이상하다 했을 테지만 그리 여기는 이는 없었다.

워낙 인적이 드문 곳이었던 탓에 지금 숲속에 있던 사람이라고는 딱 네 명. 그것도, 하늘에 구멍이 생긴 것은 아닌지 의심될 만큼 퍼부어지는 비에 발이 묶여 맑은 쪽으로는 걸음하지도 못하고 바위 지붕 아래 옹기종기 모여있는 그 네 명 뿐이었기 때문이다.

높다랗고 빼곡한 나무들에 가려 동굴 지붕 밖으로 뵈는 하늘이라고는 고작해야 손바닥만큼의 범위가 전부였으니 다른 곳이 맑은 줄을 눈치챘을 리가.

- 시스파니안이 지켜보고 있어, 비아다누르.

다만 그렇다 해서 숲의 통로 건너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연재해같은 만남을 모르지는 않았다. 자신들의 손으로 만들어낸 상황이니 모를 수가 없었다.

물론 조금도 신경쓰거나 걱정하지 않았다는 사소한 문제는 있었지만.

- 어째서 나를 찾아왔나.

- 시스파니안이 아끼는 인간이 너에게 준 물건 때문에 왔어. 그걸 돌려받으러 왔어.

그리하여 정작 이 일을 만든 이들은 비가 그치기만을 태평하게 기다리던 때, 바로 그 자연재해같은 이들의 대화가 오가기 시작했다.

- 시스파니안이 내 영역에 들어온다 해서 내가 말렸어. 내가 대신 왔어. 그런데 내가 땅에 있으면 비가 와. 비가 많이 오면 나무가 아프다고 시스파니안이 그랬어. 그러니까 빨리 돌려줘. 안 그러면 시스파니안이 올지도 몰라.

지그프리드령 인근의 숲은 시스파니안의 영역이다.

그러니 다누의 근원과 줄기가 있는 곳도 시스파니안의 터전이다. 게다가 엘프들의 도시가 자리하고 있던, 대해와 맞닿은 바닷가 지역은 바로 아르나이젤의 영역이었다.

다누가 시스파니안의 영역에 자신의 근원을 두고 아르나이젤의 영역에 제 자식들의 도시를 두었다는 소리가 맞다. 심지어 도시를 떠난 엘프들은 카이리스 이곳 저곳의 숲에서 생을 이어나가고 있다.

한때는 모든 대지의 근본이라 불리기도 했던 어머니나무와 그의 자식들이 온전한 제것 하나 없이 두 용족과 인간들의 영역 안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 시스파니안이 또 움직이겠다 한 것인가.

- 시스파니안은 언제 어디로든 움직일 수 있어. 너와 달라.

- 다르지 않다. 나 역시 속박되지 않았다. 나의 의지는 어디로든 갈 수 있으며 나는 무엇이든 행할 수 있다.

- 속박됐어. 뿌리가 있잖아. 시스파니안과 나의 눈이 닿는 곳에서 오가고 행할 수 있잖아. 함부로 너를 시스파니안과 비교하지 마.

물론 본래에는 다누의 영역도 있었다.

사람들이 '북쪽 대사막'이라 부르는 드넓은 영토의 대부분이 본래에는 다누의 것이었다. 언제나 푸르고 비옥했던 아름다운 곳이었으나 양신전쟁 당시 완전히 파괴되어 생명을 잃어버린 그런 땅이었다.

그런데 사실, 제 영역을 그렇게나 중시한다는 용들은 그 수가 굉장히 적지 않나. 그러니 다누 역시 찾아본다면 얼마든지 제 영역으로 삼을 만한 곳이 충분히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누가 제것을 다 포기하고 두 용족의 품 안에서 터전을 잡은 것은,

- 어른 용들은 시스파니안을 존경해. 어른 용들은 너를 증오해. 나같은 어린 용들은 너를 미워해야 할 이유가 없을 때 태어났지만 나보다 많이 산 다른 용들은 안 그래. 실레스티안만큼은 아니겠지만 다들 비슷해. 너는 그걸 잊어버리면 안 된다고 시스파니안이 그랬어.

용족의 성체들.

특히 대사막의 용 실레스티안과 다누의 사이가 극렬히도 나빴던 까닭이다.

때문에 양신전쟁이 끝나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시스파니안은, 모종의 이유로 오래도록 자리를 비워야 하는 자신을 대신해 대해의 어린 해룡 아르나이젤에게 다누의 보호를 부탁했었다. 그리하여 엘프들의 도시 역시 대해 인근으로 옮기도록 하였었다.

엘프들의 대장로 나르잔은 다누가 엘프들과 카이리스와의 관계만을 따져 두 영토에 걸쳐진 도시를 세웠다 알고 있었으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보호'였다. 누군가 다누를 건드리기 위해서는 시스파니안 뿐만 아니라 아르나이젤의 영역까지도 거치도록, 그리하여 시스파니안이 없더라도 다누가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 혹시라도 앞뒤를 생각하지 않은 실레스티안의 손에 다누가, 결과적으로는 다누가 머무르던 카이리스의 땅이 위험에 처해지지 않을 테니까.

- 나는 증오의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가 증오하는 것은 나였으나 결국 내가 아니다.

- 양신전쟁 때 파괴된 너도 결국 너라고 시스파니안이 그랬어. 직접 저지른 죄가 아니었다고 믿고 싶은 건 이해하지만 부정하는 건 이해해줄 수 없다고 했어.

- 그렇다면 너는 시스파니안의 말을 모두 다 따르는 것인가.

- 응.

- 어째서.

- 시스파니안이니까.

- 나는 그 믿음의 이유조차 알지 못한다. 알고자 하였으나 알지 못한다.

- 그래서, 너와 엘프들을 살려놓은 시스파니안이 싫어서 시스파니안의 아이들을 공격했어?

- 싫어하지 않는다. 고마움을 느낀다. 나는 그저 나를 향한 증오의 이유를 알고자 할 뿐이다. 그리고 공격이 앞선 것은 내가 아니었다.

비가 내린다.

제 몸에 든 비의 기운을 아직 다 다스리지 못하는 어린 해룡이 뭍을 밟았음에 주륵주륵 비가 내린다. 대사막 남쪽의 도시에도, 그리고 도시의 입구가 위치한 카이리스의 숲 깊은 곳에도.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차마 가까이 다가올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엘프들을 뒤로 한 채로, 거대한 나무의 앞에 선 아르나이젤이 고개를 들었다.

- 나 시스파니안한테 혼났어, 다누. 시스파니안이 아끼는 인간을 바닷속에서 만났는데 바다 위로 올려주지 않고 내가 떠나버려서 혼났어. 인간들은 물 속에서 숨을 쉬지 못하는데 내가 그걸 까먹었어.

말갛고 까만 눈망울 속에 투명하고 아름다운 나무가 가득 들어찼다.

- 나는 시스파니안이 아끼는 인간을 공격할 생각 없었어. 나는 그 인간이 좋아. 재밌었어. 그런데도 시스파니안에게 혼이 났어. 나 때문에 큰일이 날 뻔했다고 했어. 그래서 나는 그 인간에게 사과했어.

- 의도를 알 수 없다.

- 네가 잘못했다는 거야. 꼭 네가 먼저 공격을 해야만 네 잘못인 게 아니야. 너와 그 인간이 대화하는 걸 나도 들었어. 인간들이 아끼는 걸 멋대로 욕심내면 안돼. 그래서 인간이 화가 난 거야. 그건 네 잘못이야.

다누는 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르나이젤의 말이 이어졌다.

- 너도 나처럼 사과해야 해, 다누.

- 내가 잘못하였나.

- 응.

- 그것도 시스파니안의 뜻인가.

- 아니. 그건 내 생각이야. 하지만 시스파니안도 똑같이 생각할 거야. 다른 인간들도 다 그렇게 생각할 거야. 네 자식들도 그럴 거야.

- 그러하군.

- 응. 그러니까 너도 사과해.

아주 잠시 침묵하던 다누의 주면에 잔바람이 일었다.

스스로 일으킨 바람으로 제 몸을 말린 다누가 답을 전했다.

- 그렇게 하겠다.

- 응응. 착하다, 다누.

생글생글 웃은 아르나이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쭉 펼쳐 보이며 말했다.

- 그 물건도 돌려줘. 비가 더 내리면 시스파니안에게 또 혼날지도 몰라.

- 이건, 시스파니안의 것인데.

- 응. 맞아.

- 그렇다면.

아르나이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담담하게 가라앉은 다누가 대답을 전했다.

- 시스파니안에게 돌려주겠다.

시스파니안을 만나겠다는 뜻이었다.

아르나이젤이 입술을 오그려 다물다 미간을 작게 찌푸렸다.

* * *

숲의 비는 갑작스럽고 또 짧은 경우가 많았다.

물론 며칠을 두고 비가 내리는 날도 있었으나 아직 그럴 시기가 도래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오래지 않아 비가 그치지 않을까, 잠시 기대도 해보았으나.

"점점 많이 내리네요. 언제까지 오려나."

그치거나 잦아들기는 커녕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비의 양이 늘어나고 있는 상태였다.

- 쏴아아아······!

이제는 계곡의 물소리보다 빗물이 나뭇잎과 흙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릴 지경이니 다른 말을 더 해 무엇할까.

"춥지는 않으십니까."

"되었다."

"안 추워."

"네. 키리에, 너는."

"저는 괜찮습니다."

가히 천재적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재능의 과묵한 기사가 하나, 검술과 마법은 그럭저럭인데 똑똑함만큼은 세렌티도 못 재어 본 것이 분명한 말짧은 왕세자가 하나, 신물과 돌의 힘을 따로이 쓸 줄 아는 탓에 생존력에 있어서만큼은 따를 자가 없을 말없는 왕자가 하나. 그리고.

"넌."

"저는 추위 안 탑니다. 능력 좋은 만큼 몸도 좋아서."

"······ 말고."

"많이 나았습니다. 몸이 좋은 만큼 회복력도 좋아서."

"하······."

소드마스터 겸 마법사 겸 짖고 무는 고양이 겸. 겸직하는 일이 하도 많아서인지 모르겠지만, 사족 없이는 말을 하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만들어 둔 것처럼 언제나 늘 한결같이 시끄러운 왕제 출신 왕자가 하나.

그 네 명이 이렇게 옹기종기, 바위 지붕 아래에서 고기나 좀 구워먹으면 참 좋을 듯한 불가에 모여앉아 서로서로를 챙기고 있었다.

- 툭, 투둑!

그러던 중, 바위 천장을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이 떨어져내렸다. 그것이 똑, 똑, 똑, 하필이면 플란츠의 파릇파릇한 정수리를 두드렸다.

비가 저렇게 내리는 상황이니 물방울이야 진작부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다만 이렇게 누군가의 정수리에 정확히 내려앉은 적은 없던 터라, 눈꼬리를 찌푸린 플란츠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 세상에 거리낄 것이라고는 고기 접시 앞에 놓인 샐러드 외에는 단 하나도 없을 게 분명한 동생 놈을 향해 무어라 선수를 치려 했다.

완두콩에 물 주냐는 둥 이제 시들 일 없겠다는 둥 너무 그러면 완두콩 무르니까 조심하라는 둥 해가며 짖을 것이 뻔했으니까.

- 화아악!

그런데 플란츠의 예상이 빗나갔다.

똑똑한 플란츠의 계산법으로도 가늠하기 어려울 행동을 하는 것이 주특기인 칼리안은 수많은 놀림 대신 클린만 보냈다. 그러더니 고개를 들어 천장을 쳐다보다, 계곡 쪽으로 난 입구만 틔워 놓은 형태의 거대한 실드 하나를 만들어 나머지 벽과 천장 사이를 막았다.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빗물이 스미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 뒤에는 언제 말하고 짖고 움직였느냐는 듯, 바위 지붕 아래 함께 들어와 있던 네 마리의 말들 중 레이븐의 앞다리에 등을 기대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유야 뻔하다.

더 많은 말을 하기에는 아픈 것이다. 다친 어깨가.

"······ 하."

지독한 새끼.

욕지거리를 되삼킨 플란츠가 바위 지붕 너머로 눈을 돌렸다. 다행히 더 이상은 축축하게 젖어들지 않고 있으나 비릿한 냄새만은 계속 풍겨나오고 있는 동생 놈의 어깻죽지, 그리고 제 동생이나 동생의 어깨에는 일말의 시선도 두지 않고 있는 위층 거주자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기 위함이었다.

'어차피 비가 그칠 때까지는 기다려야 하고 그때까지는 달리 할 것도 없는데 뭐하러 치유력을 낭비합니까.'

란델이 칼리안을 치료하려면 또 목숨을 깎아내야 한다. 당장 목숨을 경각에 달아 둘 상처도 아니거니와 비가 그칠 때까지는 어차피 아무것도 못하는데, 고치더라도 상처가 스스로 더 아문 뒤에 고쳐야 란델의 시간을 덜 빼앗지 않겠느냐 했다.

변명이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하피의 독에 당했던 플란츠에 비하면 경상이라 할 수 있을 만한 상처를 하나 더 고쳐낸다 한들 란델에게는 크게 손해날 일이 없다. 그 몇 분이 몇 십년 쯤 뒤에는 정말 중요할지 모르겠으나 란델이 지금 당장 그 시간을 아까워 할 리가 없지 않나.

지나가다 마주친 들꽃 하나에 제 생을 나눠주는 것조차 주저하지 않았을 사람이니 말이다.

'계속 밖에 계시느라 힘드실 텐데 조금이라도 쉬세요. 저는 괜찮으니까.'

'그래도 겨우면, 얘기하거라.'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고집을 부린다.

저러는 이유를 안다.

알기 때문에 키리에는 물론이거니와 란델조차 더 이상 치료를 언급하지 않고 있는 거다. 아니, 언급하지 못하는 거다. 플란츠 역시 이유를 아니까 욕지거리가 나오는 거다.

비록 당장의 생김은 달랐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보랏빛의 눈과 청은발을 지닌 저 놈은 분명 칼리안이지 않나. 그런 칼리안의 별것 아닌 상처를 고쳐놓고 나면 생각날 것이 아닌가.

'오늘부터 비가 올 거래요.'

언젠가 살려놨던 체르밀 궁의 빨간 장미.

장미를 대신 살려가며 스스로를 속이지 말고 애초부터 똑바로 봤어야 할 아이, 장미보다 더 많이 아팠던 아이, 그러니 장미 따위로 대신하지 말고 똑바로 바라보고 살리려 들었어야 할 아이.

'저는 비 오는 날이 싫어요. 맞는 것도 싫고 내리는 걸 보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해요. 형님들도 그러세요?'

지금이 아닌 오래전의 막냇동생이.

아무것도 아닌 듯이 저 어깨에 난 상처를 고쳐놓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듯이 당연스레 고쳐놨어야 할 그 아이의 더 깊은 상처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을 테니까.

- 욕심이 과하시군.

그래서 더 참질 못하고 말을 전했다.

실드의 벽에 기대 칼리안과 비슷한 얼굴로 눈을 감은 란델과, 말없이 모닥불을 들여다보는 키리에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면서. 또 제멋대로 늘어진 길다란 머리를 바닥에 쓸리도록 내버려둔 채 가만히 참고 있는 칼리안을 향해서.

- 욕심이야 본래 많았습니다만. 과할 만큼.

갑작스런 목소리에 놀라지도 않고 실눈도 뜨지 않은 칼리안이 나지막한 속말을 보내왔다.

- 모르지도 않으실 분이 새삼스레 왜 그러십니까.

- 당신이 그렇게까지 참아가면서 보살펴줘야 할 일 아니잖아. 그건 형님이랑 내 몫인데, 왜.

- ······ 뭘 잘했다고 그 일을 두고 몫을 나누나.

곧장 달라진 말투가 되돌아온다.

- 당신이 그 애로 살면서 나와 형님을 원망하는 거랑은 다른 문제라고. 그건 형님이랑 내가 감당할 일이잖아. 당신을 치료해놓은 형님이 그 애를······ 칼리안을. 떠올리든 말든. 다친 곳부터 치료를 하는 게,

- 왜.

- 왜라니.

- 그걸 왜 당신들이 감내해.

- 아니면. 저지르지도 않은 당신이 감내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기라도 하나본데.

- 참는 건, 플란츠.

뒷말이 이어지는 대신 마력이 움직인다.

예민한 레이븐이 귀를 쫑긋거리는 것이 보였다. 란델과 키리에가 고개를 돌려 칼리안을 쳐다봤고 본래부터 칼리안을 향해 있던 플란츠는 눈매만 굳혔다.

땅에 가 닿았던 긴 머리카락이 줄어든다.

별의 꼬리를 그리듯 점차 올라서던 청은빛이 조금씩 검게 물들었다. 레이븐에게 기대있던 어깨가 좁아지고 온 손에 가득하던 흉이 지워져갔다.

사납게 날을 세웠던 눈꼬리가 내려가자, 안개 속에서 찾아낸 달빛같은 눈 대신 언제까지고 퇴색되지 않을 새붉은 빛이 제 자리를 찾아 들어섰다.

뭉클 풍겨오는 피 냄새에 정신이 든다.

그것을 느낀 플란츠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

- 무슨 짓이야.

별 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여 보인 칼리안이 멀정한 왼팔을 움직였다. 그리고 헐렁해진 검은 재킷을 벗어 키리에에게 건넸다.

"키리에. 나 옷 좀."

"네, 왕자님."

군말없이 그것을 받아 든 키리에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레이븐의 안장 가방에서 더 작고 더 고급스럽지만 여전히 검은색인 재킷을 꺼냈다. 그 후에는 어깨 부근이 찢어진 셔츠까지는 갈아입지 않기로 한 칼리안이 그 위에 새 재킷을 덧입는 것을 도왔다.

그 사이.

지금의 겉모습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덩그러니 남겨진 낮달같은 낮은 목소리가 플란츠의 머릿속으로 들려왔다.

- 참는 건 어른이 할 일인데. 그걸 떠넘겨서야.

아예 그냥 칼리안의 모습으로 되돌아옴으로써 '그래도 베른 얼굴이니까 괜찮겠지 하고 란델 형님한테 억지로라도 나 고쳐놓으라고 말할 생각이었다면 꿈 깨라, 이 어린 놈아' 라는 뜻을 몸소 보여준 칼리안이 씩 웃었다.

- 당신들은 그냥 계속 자라기만 하면 돼. 안 시들고 쑥쑥 자라기나 해. 다 자라고 나서 여력이 남으면, 더 자랄 곳도 없어져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심심해지면, 그때 참아.

칼리안으로 사는 김에 제 형들이 제게 저지른 그 많은 잘못의 뒷감당까지도 다 짊어지려는 욕심 과한 고양이가 다시 눈을 감았다.

짜증을 내야 할지.

고맙다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 미친 새끼.

- 새삼스런 말씀을 하십니까.

가느다란 미성이 흥얼거리듯 들려왔다.

- 누구 동생인데요. 제가.

정말 흥얼거리듯이.

그 꼴이 아무래도 마뜩잖아서, 여지없이 찌푸려진 눈으로 칼리안을 쳐다보던 플란츠가 결국 한 마디를 보탰다.

- 나를 보고 재수없고 짜증난다 하시더니. 내 아우님이셔서 그것을 닮아가셨나.

- 저도 재수없고 짜증나십니까?

- ······ 조금.

이 와중에 또 많이는 아니란다.

웃음을 참아넘긴 칼리안이 대꾸했다.

- 아뇨. 형님 말고 데블란 닮아서 그럽니다. 엄연히 제가 키워드리는 입장인데 아무렴 제가 형님을 닮겠습니까. 닮았어도 데블란을 닮지.

데블란을 끌어와서라도 안 지겠다는 심산이다.

어처구니가 없어진 플란츠가 다시 한 마디를 하려 하는데.

- ······ 스윽.

레이븐에 기대 있던 칼리안이 조용히 허리를 세웠다. 그러더니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험에 있어서는 사람보다 예민하다던 말들이 조금씩 움직였다. 레이븐은 고개를 치켜들었고 이리스는 귀를 세웠다.

그것을 본 플란츠가 검을 잡아들고 따라 일어선 그 때.

"란델 형님."

칼리안이 란델을 불러냈다.

그 얼굴에 만연한 웃음을 본 란델이 입을 열었다.

"치료가 필요하더냐."

"네. 아무래도······ 시스파니안께서 오신 듯 한데."

한 차례 숨을 들이쉰 란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집을 부린 것이 무색하게 치료를 말하게 된 까닭에 웃음을 지운 칼리안이 부드러운 미소를 다시 지었다.

"고쳐주세요. 이번에는."

그리고 이렇게.

란델을 향한 부탁의 말을 덧붙였다.

이번에는 고쳐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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