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90화 (491/527)

제86장. 욕심(3)

- 모릅니다.

완두콩이고 옥수수고 뭐고.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갑자기 불러내서는 이건 시들고 절여지는데 저건 쑥쑥 자란다 어쩐다 하는 소리나 하고 있는 철딱서니 없는 정혼자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개를 못 키우게 되면 지그프리드 공작저 뒷마당에서 일하겠다 하더니 진짜로 그럴 심산이었나.

아니.

애초에 누가 내 집 뒷마당에서 농사지어도 된다고 허락이나 해준댔나.

하여튼 다 제멋대로지.

- 몰라?

- 네. 모릅니다.

때문에 짧은 대답을 전한 드미레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제 동생이 어디 한 군데라도 다치지는 않았는지를 살피다 안도하는 얀을 향해 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사이 목소리가 다시 전해졌다.

- 너는 뭐든 다 알 줄 알았어, 드미레아.

낮은 목소리.

타고 남은 잿더미를 다 모아다 한 데에 마구 뭉쳐두면 저런 소리가 날지. 이제 막 피어난 꽃송이를 죄 뜯어다 한 곳에 마구 짓이겨두면 저런 소리를 낼지.

휘트린에서는 멀쩡하게 잘 싸운 뒤에 얀에게 인사까지 하고 갔다 하던데. 그새 뭘 했으면 또 저렇게 아픈 것을 참는 소리를 내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 옥수수가 까탈스럽지 않은 작물임은 압니다만.

그래서 그냥, 이번에는 어딜 다쳤느냐 묻는 대신 그 뜬금없는 말에 대한 대답이나 더했다.

덕분에 앞에 서 있던 얀이 건네오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통신용 반지에 아직 익숙해지질 않은 까닭에 마음 속과 입 밖으로 함께 이야기를 하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그래서 겉으로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으면서 칼리안과의 대화만 이어나갔다. 드미레아의 반지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본 얀이 '왕자님이셔?' 하고 묻는 것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지만.

- 옥수수가? 아닌데. 까탈스럽기는 하던데. 엄청.

- 까탈스럽다면 왕자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혼자 쑥쑥 자라지는 못할 것 같은데요.

- 그게 이상해. 완두콩만큼은 아니어도 까탈스럽긴 했거든, 옥수수가.

그래.

아까부터 계속 들려오는 '완두콩'이라는 그 말을 들었을 때 눈치를 챘어야 했다. 하지만 드미레아는 정신이 없었다.

휘트린 영주성 이곳저곳에 널브러진 시신들을 수습하고 영지 경비를 강화하고 갑작스런 전투 때문에 엄청나게 놀랐을 영지민들을 안심시켜야 했다.

칼리안의 영지를 관리하던 백작 나비아가 체포된 까닭이다. 영지를 관리하던 이가 자리를 잃었으니 나비아의 무죄가 확인되거나 새로운 영주 대리인이 올 때까지 그 자리를 임시로 맡아 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본래대로였다면 영지에 거주하는 다른 귀족들에게 맡겨야 할 일이었으나 당장 누구를 믿고 누구를 의심해야 하는지도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이니 어찌하겠나. 아주 오래 전부터 슬레이만이나 세리에에게 공작저와 영지를 관리하는 법을 배우고 실행해 온 '영주의 정혼자'가 나서야지.

그렇게 되면 나비아의 권한을 잠시나마 가져오게 되니 조사에도 진척이 있으리라 생각하며 그 자리에 앉았던 터였다.

- 그래서 나도 놀란 거야.

수습된 시신들은 앨런이 직접 소각할 예정이라 했다.

제온에서 그것을 찾아갈 리가 없었으니까. 때문에 외성 밖에서 한참 떨어진 곳까지 시신을 옮기는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에 더해 아르센이 몇 명의 대원을 더 보내 인근의 영지로 출발했다던 에일라와 마법사들을 지원하게 하고, 시종 레릭과 덴의 지휘 아래 초토화 된 영주성의 내부가 정리되기 시작하고, 에우리아와 시오나를 곁에 둔 발칸의 대원들이 추가로 이어질지 모를 공격에 대비하는 사이.

- 사실은 옥수수가 완두콩보다는 덜 까탈스러워도 손은 더 많이 갈 거라고 생각했었어서. 그런데 어느새 혼자서 쑥 자라 있더라고.

속 모를 칼리안의 이야기가 계속 들려왔다.

잠시 눈을 감고 미간을 주무르던 드미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도 한동안 더 생각을 이어나가다 대답을 전했다.

- 잘 하셨습니다.

아니.

칭찬을 했다.

- 아······ 칭찬해달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 무엇을 하시든.

지금 여기가 얼마나 바쁜지 아시느냐고. 어디서 또 태평하게 싸움이나 벌이다 뜬금없는 농사 얘기를 하고 계시는 거냐고. 그리 타박을 할 생각이 들지는 않아서.

상황 종료를 확신하지 못해 여전히 걸치고 있던 사슬 갑옷이 유난스레 무겁다 여겨지는 것을 잠시 잊고 말을 이었다.

- 잘 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 옥수수도 정말로 혼자서 쑥쑥 자라지는 않았을 겁니다. 왕자님의 공이 있겠죠.

- 그런가. 나도 잘했다 생각해도 되는 건가.

- 무엇이든요.

- 그래, 드미레아. 그렇게 할게.

- 네.

- 고마워, 정혼자님. 영주 대리 일도 바쁠 텐데.

- ······ 그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 그거?

- 휘트린 영주 대리 업무를 하고 있다는 말씀 아직 안 드렸습니다.

- 그걸 누구한테 맡기겠어, 네가. 내 영지인데.

참 대단도 하다.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은 드미레아가, 얀이 가져다 준 차의 맛을 본 뒤 설핏 웃었다. 칼리안과 대화 중임을 알아서 다른 말을 하지 않던 얀이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또 맛없어?"

"그래도 지난 번보다 낫습니다."

"그래?"

"네. 나아졌네요."

여전히 맛은 없다는 의미임을 알 텐데.

그럼에도 뿌듯한 얼굴을 하며 밖으로 나가는 얀의 뒷모습을 좇던 드미레아가 칼리안을 향해 말을 전했다.

- 어찌됐건 이쪽 일까지 걱정하진 마시고 다친 곳이나 치료 잘 하십시오.

- 나 다친 건 어떻게 알았대.

- 아픈 것을 아예 모르시는 분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가 보죠.

- 티가 나? 목소리에서?

- 네. 납니다.

- 너나 얀이나. 사람 살피는 건 참 잘 하네.

- 제가 지금 뭘 할지 훤히 들여다보신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 아, 그렇게 되나.

-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또 왜 다치셨습니까.

- 완두콩 안 시들게 하려고.

한 번 더 들어올리던 찻잔이 잠시 멈칫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 다누한테 찔렸어. 심한 건 아니고.

- ······ 완두콩을 안 시들게 하려다 다누에게 공격을 받으셨다는 말을, 제가 어떻게 들으면 되겠습니까.

- 아. 그렇지.

웃음소리가 전해진다.

- 형님 얘기야. 다누가 형님을 데려갔어. 내가 휘트린에 간 사이에. 그래서 형님을 꺼내오려고 잠깐 싸움을 걸었어.

아, 이 사람이. 진짜.

그제야 뜬금없던 농사 얘기를 알아들었다.

정확히는, 두 곡식 중 연두색을 내는 하나가 무엇을 말하던 것인지를 이제야 이해했다. 그러고 나니 쑥쑥 자랐다는 남은 하나는 또 뭐였을지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었다.

완두콩은 그 연두색 눈 때문에 완두콩이고 옥수수는 그 금색 머리카락 때문에 옥수수인가보다. 그런데 하나는 눈이고 하나는 머리카락을 닮은 별명이라니. 고작 두 개의 별명을 짓는 데에도 대충대충, 통일성이 없다. 아무튼 어디 하나 세심한 구석이 없는 사람이다.

- 왕자님.

- 응. 드미레아.

찻잔을 내려놓은 버석한 손이 둥그런 이마를 향해 움직였다. 손바닥과는 판이하게 다른 매끈한 이마를 감싸쥔 드미레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 왕실 모독은 왕족에게만 면죄권이 있습니다. 저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옥수수는 까탈스럽지 않다는 식의 말을 해 가며 저도 모르게 왕족을 놀림감으로 삼았었음을 이제야 알았다. 덕분에 흘러나온 볼멘소리에 다시 한 번 웃음이 들려온다.

- 설마 내가 너를 데려다 이를까. 내 정혼자님인데.

- 그래서. 다누와 싸움을 벌이신 겁니까.

말을 돌리듯 묻는 말에 대답이 돌아왔다.

- 싸움을 벌였다기 보다는······ 성질을 부린 거지, 내가.

- 그거야 그렇겠죠. 그런데 다누가 플란츠 왕세자 저하를 납치할 이유가 있습니까.

- 다누가 우리와는 사고가 달라서. 그런 와중에도 제가 못 가진 것에 욕심이 났나 보지. 아무튼 형님이 워낙 똑똑하시니.

이마에서 손을 뗀 드미레아가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 사이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 내 정혼자님은 내가 그렇게 예뻐도 도무지 욕심을 안 부리는데. 그치.

- 네.

- 사실은 내가 이렇게 잘생긴 사람이었어도 하나도 탐을 안 내는데. 맞지.

- 네.

아, 서운하네. 하고.

조금 더 커진 웃음이 머릿속을 울린다.

웃든지 말든지.

칼리안의 농담에는 이력이 난 드미레아가 물었다.

- 다들 무사하시기는 한 겁니까. 아니면 제가 마나실 경에게 부탁을 전할까요.

- 아니. 이제 괜찮아.

- 다행입니다. 그래도.

- 응. 다행이지. 형님이 알아서 나오셨으니. 아니었으면 내 몸에 구멍이 하나 쯤은 더 났을 텐데.

드미레아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 * *

다급히 불어난다 했었다.

그러니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무조건 피하라 했다. 상황을 지켜보겠다며 잠시 지체하기라도 하면 눈 깜짝할 새 불어난 물이 어느새 다리를 휘감아 끌어당긴다고. 그리 말했었다.

'이런 비가 내리면 며칠씩 발이 묶이곤 했습니다. 비가 그쳐 계곡물이 얌전해질 때가 되면 다시 비가 내리고요. 그럼 또 발이 묶입니다.'

정기 휴가를 받고 한 달 동안 고향에 다녀왔던, 피망 싫어하는 갈색 머리 마법사. 헤밀라 라스카라는 이름을 가진 그 마법사의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저희 고향에서는 비가 내리는 철이 되면 늘 이런 것을 집에 쌓아두고 날을 버텼습니다, 부군단장님.'

왕궁에서 자주 접해보았던 비스킷과 닮았지만 색과 식감이 정말 많이 달랐던 음식을 곱게 포장해 가져다 주며 그런 말을 했었다.

우유와 버터를 쓰지 않는 투박한 맛의 비스킷.

말린 곡식 가루를 물에 개어 반죽한 뒤 다시 말리고, 그것을 불에 구워내는 것이라 했다. 보존 마법이 없어도 아주 오래도록 상하지 않는다면서 전해줬었다.

자신들의 나이 어린 부군단장이 화려하고 귀한 음식보다는 대원들이 가끔 손에 들고 다니며 주워먹던 신기하고 생경한 먹거리를 더 오랫동안 쳐다본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리라.

'입에 맞지 않으시겠지만요. 그래도 홍차나 커피와 함께 드시면,'

'맞는데.'

'맞······ 아. 입에 맞으십니까?'

'맛있어.'

'아, 다행입니다. 사실 그거 지난 해에 농사 지은 옥수수로 제 동생들이 직접 만든 겁니다. 저하께서, 아니. 부군단장님께서 맛있게 드셨다 하면 동생들이 정말 좋아할 겁니다.'

'동생이 있나.'

'둘이나 있습니다. 제가 첫째입니다, 부군단장님.'

'······ 잘 먹겠다고.'

'넵. 제가 꼭 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쏴아아아······ 쏴아아!

머리 위를 가린 커다란 바위 너머로 더 커다란 물소리가 들려왔다. 그날에 들었던 얘기처럼 순식간에 불어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조금 전보다는 확연히 늘어난 계곡물이 끝없이 흘러내려갔다.

물살이 바위 사이를 파고드는 소리, 그 위로 쏟아지는 굵은 빗물 소리. 그런 소리 사이로 옥수수 비스킷 맛이 났다. 지금 이 순간 입에 든 것은 없었지만 기억 하나에 담긴 모든 감각까지 다 떠올려주는 좋은 머리 덕에 그날의 옥수수 비스킷을 다시 먹은 셈이 되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많이 나았잖아. 괜찮아."

바위를 타고 계속 흘러내리는 빗방울과 그 너머의 빗줄기, 조금 더 먼 곳의 희뿌연 계곡물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

"숲의 통로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응. 나도 알아."

"지금이라도 엘프의 도시로 돌아가서 편히 쉬기라도 하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아무는 게 눈에 보이는데 뭐하러 빗속에 고생을 해. 나 비맞는 것 싫어해. 레이븐도 싫어할 걸."

"그래도······ 상처가 작지 않습니다."

"이 정도면 하루면 나아. 낫고 나서 들어가야지. 게다가 저 비를 뚫고 계곡을 어떻게 다시 건너가. 말들도 있는데."

"하루 이틀 정도는 이 근방에 풀어두어도 됩니다. 사람 뿐이라면 충분히 건너갈 수 있습니다."

"비 오는 계곡은 위험해. 아무튼 걱정하지 마. 정말 괜찮으니까."

키리에의 한숨 소리가 대답을 대신했다.

그 소리를 들은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안 괜찮을 것 같았으면 란델 형님도 계시는데 뭐하러 참겠다 해. 괜찮으니까 괜찮다 하지. 딸린 목숨이 셋에 네 마리가 더 붙어 있는데 아무렴 내가 그걸 두고 고집을 부릴까."

"······ 정말 괜찮겠습니까."

"괜찮아. 정말."

옥수수 비스킷만큼 퍽퍽하고 딱딱한 주제의 대화에 저절로 고개가 돌아간다. 바위 천장 너머에서 안쪽을 향해 움직인 연두색의 시선이 키리에의 어깨를 두드리던 손에 가 닿았다.

키리에나 드미레아의 손과는 다르다.

둘과 마찬가지로 흉이 많았으나 그 하나하나가 둘보다 짙었다. 더 깊고 훨씬 험했다. 덧나고 곪아 더 벌어지고 울퉁불퉁해진 흉이 그렇게나 많았다.

치유는 커녕 약을 쓴 적도 없다는 뜻이다.

평민도 귀족도 아닌 왕제였으니 약을 구하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도. 그러니 그것은 약을 쓰지 못한 것이 아니라 쓰지 않아서 심해진 상처 자국들일 터였다.

"안되겠으면 란델 형님께 부탁드릴 테니까."

"부탁하면. 누가 들어주기는 한다 하더냐."

"란델 형님 저 치료 안 해주실 겁니까."

"모를 일이지. 나 역시 내 시간이 아까운 줄은 알고 있으니."

"오다 보니까 노란 넬로피아가 검은 돌에 반응하던데요. 꽃은 고쳐주시고 저는 안 고쳐주실 겁니까."

"그런 이름이더냐."

"그런 이름입니다. 아무튼 저는요."

"이미 건강을 되찾은 듯 보이니."

"와······ 저 아픈데요. 저 많이 아픈데요. 형님은 치료해주셨으면서 저는 안 해주실 겁니까. 막내라고 차별하시면 저 서럽습니다. 아무리 두 분 사이가 가깝다 해도 그래도 저도 란델 형님 동생인데 형님만 그렇게 아끼고 딱 저만······."

"필요하면 말하거라. 치료해주마."

"네."

······ 정말 어디서나 잘 짖는 내 동생.

손에 난 흉터고 뭐고 시시때때로 짖어대니 놈에 대해 감상적인 생각을 할 틈이 있나.

그 잠깐 새를 못 참고 기어코 짖더니 씩 웃어보인 칼리안이 키리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방금 전까지 키리에와 나누던 이야기의 종지부를 찍듯 얘기했다.

"그리고 지금 엘프 도시 되게 시끄러. 여기가 속 편해."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눈을 돌렸다. 그리고 평소의 뽀얗고 고운 손과 아주 많이 다른 텁텁한 손을 쳐다보고 있는 플란츠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쵸."

"뭐가."

"시끄럽잖습니까."

"어디가."

"······ 형님 지금까지 제 얘기 코로 들으셨습니까."

"안 들었는데."

"거짓말."

"반말. 요즘 계속."

"요."

"엘프들의 도시가 왜 시끄럽습니까."

"아르나이젤이 왔어."

"그······ 해룡 말씀이십니까."

"응. 형님이 불렀어."

"아우님께서 부르셨지."

"형님이 시켜서요."

"뭐든."

"아무튼요. 아무튼 그래서 왔어, 아르나이젤이."

아무튼 그래서라니.

그건 대체 어느 종족의 언어입니까.

칼리안의 충성스런 따까리가 이런 말이 담긴 눈을 했다.

* * *

비가 내리고 바위 지붕 아래로 들어서기 전.

드미레아에게 쑥쑥 자란 옥수수를 자랑하기 전.

플란츠를 가둬 둔 공간의 문을 다누가 직접 열어주고, 그 사이에서 걸어나온 플란츠를 잘 꺼낸 칼리안이 유유자적 엘프들의 도시를 빠져나오기 전.

- 나무 하나 캐는 일이 왜 이렇게 오래 걸리시는지.

- 형님.

- 왜.

- 형님 시험 잘 보시죠.

홀로 갇힌 공간 속에 머무는 것이 이제는 버거워진다 싶던 플란츠에게 칼리안이 엉뚱한 것을 물어왔다.

- 무슨 시험.

- 왕궁에 찾아왔던 선생들이 내 주는 시험같은 거요.

- 본 적 없는데.

- 안 보셨다고요.

- 그래.

- 형님이랑 같이 배웠던 것들 저는 전부 다 시험봤었는데 형님은 안 보셨다고요.

- 안 봤어.

- 왜요.

- 필요가 있나.

- 어차피 다 맞아서 필요가 없었습니까.

- 그래.

- ······ 아.

- 왜.

- 형님 어디 가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재수없다 짜증난다 인간성이 부족하다 다른 사람 자괴감 느끼게 한다 거리감 느껴진다 뭐 그런 말씀 듣기 딱 좋습니다. 그러니까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렇게 얘기하지 마세요. 체스판 없이 체스 두는 것도 다른 사람들한테 권하지 마시고요. 이미 이런저런 욕 많이 드시는데 늘릴 필요 없잖습니까.

- ······ 늘린 것 같은데. 방금.

- 설마요.

아차하는 순간에 어느새 주제에서 멀리멀리 벗어나버리곤 하는 것이 동생 놈과의 대화였다. 때문에 정신을 바짝 차린 플란츠가 또 다른 말을 듣기 전에 먼저 물었다.

- 왜.

- 뭐가요.

- 시험.

- 아. 다누가 저를 시험하겠다 하는데 어떻게 할까 고민이 되어서요.

- 무슨 시험을 왜 다누가.

- 제가 다누에게 이런 저런 요구를 했습니다. 형님을 빼내는 것까지요.

- 그런데.

- 그런데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형님이 방법을 찾고 제가 막을 수 있다 하셨다면서요. 형님이 다누에게.

- 했어.

- 그래서,

- 아우님이 알아서 나를 꺼내면. 그 때는 원하는대로 돕겠다 하던가.

- 아무튼 내 형님은 어찌나 똑똑하신지.

다누에게 알고자 했던 것들, 카이리스에 대한 사과, 앞으로의 무간섭, 그리고 플란츠를 꺼내달라 하는 것까지. 전부 다 다누에게 요구했었다. 그랬더니 다누는 어처구니없는 절충안을 꺼내놓았다.

'스스로 해결해보라. 그리하면 네 말에 귀를 기울일 테니.'

그 즉시 칼리안은 한 번 더 행패를 부렸다.

색깔 뿐 아니라 참 동그란 머리스타일 덕에 오렌지 머리 마법사라는 별명이 아주 잘 어울리는 케인 테스만, 그에게 배운 '크리스털에 불을 붙이는 방법'을 떠올려보며 실로 거대한 폭발 하나를 일으켰다.

- 그래서 아우님은 지금 뭐 하고 계시는데.

- 행패부립니다.

불을 지름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속도로 쇄도해오던 다누의 가지들을 받아쳐내며 행패를 부렸다.

계속 혼자 있다가는 돌연 어느날의 향수 냄새를 다시 맡을지 알 수 없을 똑똑한 완두콩과 적당한 담소를 나눠주면서.

- 아우님께서 다누를 이길 수는 없을 텐데.

- 당연하죠. 제가 다누를 어떻게 이깁니까. 스승님도 못 이기는데.

- 그럼 불러.

- 제 아버지 지금 바쁩니다. 그리고 스승님이라 해서 다누를 이기지는 못할 텐데요.

- 말고. 그 고래.

- 고래······ 아르나이젤 말씀이십니까.

- 그래.

- 걔는 제가 부른다 해서 올 만큼 몸 가벼운 생선이 아닌데요.

- 그래도 그 해룡이 시간의 축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은 하고 있잖아.

- 네. 이유는 모르겠지만 축의 기운에 예민한 것 같기는 합니다.

- 다누가 축의 조각을 쓰지도 못할 것 아냐.

- 네. 못 쓰기도 하고 안 쓰기도 하겠죠. 어쨌든 다누도 그 일을 막으려는 입장이니까.

- 그럼 줘. 다누에게.

- 그걸 줘버리면······.

시간의 축을 다누에게 넘긴다.

아르나이젤은 한낱 인간이 그것을 지니고 있다는 것에도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다누가 가진다면.

- 싫어하겠지. 아르나이젤이.

- ······ 아르나이젤 말고 시스파니안께서 싫어하시면 어떡합니까. 당장 여기 찾아와서 나르잔이 얘기한 것처럼 엘프 도시를 파괴하기라도 하면.

많이 싫어할 것이다.

다만 그렇다 해서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만에 하나 다누가 조각의 힘을 악용하려 든다 해도 상관없다 여기고는 있었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 일을 정말 싫어하게 될 시스파니안이 알아서 해결하실 테니까. 말 짧은 분의 말 짧은 후손이 저렇게 큰 위기에 처했는데 그걸 나몰라라 하고 안 오셨으면, 그래서 문제가 생기면 시스파니안께서 해결을 해 주셔야지. 아무렴.

- 누가 오든. 뭐가 부서지든.

똑같이 생각한 완두콩이 이런 말을 보내왔다.

- 나는 나가겠지.

시험에 정도가 어디있나.

뭐가 됐건 답만 만들어내면 되는 것을.

- 그것 참. 대책 없으시네요. 누가 가르쳤는지.

- 이 정도면 잘 배운 것 아닌가.

바위 절벽에서 허리 성하게 굴러 내려왔던 딱 그 시기의 설렘을 다시 느낀 칼리안이 실로 멋진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네.

다시 한 번 마나를 쏟아넣었다.

전부 다, 싹 다 쏟아넣었다.

다누를 둘러 감싼 보호의 마나를 읽어내고 마나를 흘려보냈다. 그것에 제 힘을 불어넣고 반발을 유도했다. 보호막의 작은 부분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틈을 만들어내도록 했다.

그 뒤 보호막의 틈새로 드러난 다누의 줄기를 향해 붉디 붉은 찬란한 검을 휘둘렀다. 제가 피워내지도 않은 결실을 멋대로 움켜쥐고 놓지 않는, 주제모르는 탐욕을 향해 그 피같은 검을 내리꽂았다.

- 콰아아아아앙!

한 번 더 숲이 흔들린다.

다시 한 번 다누의 줄기에 칼리안의 검이 박혀든다.

금세 아물 생채기. 쓸린 상처보다 못한 작은 티. 그것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안에,

- ······ 툭!

시스파니안이 찾아 헤매던 시간의 축의 조각을 집어넣었다.

- ······ 쿠궁······ 쿠구궁······.

불안한 진동이 인다.

여상하지 않은 빛이 인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 그걸 왜 손에서 놓고 그래?

대해에서 빠져나와 대사막으로, 그 한가운데에 위치한 카이리스의 숲으로, 그곳에 놓인 다누의 줄기로.

곧장 찾아온 어린 해룡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짓쳐드는 빛무리 사이로 천천히 걸어나오는 완두콩이 보였다.

아르나이젤이고 뭐고 일단 모르겠고.

'고생하셨습니다.'

완두콩부터 챙겼다.

그렇게 꺼내왔다.

"······ 그렇게 된 거야."

그간의 일을 이야기한 칼리안이 싱긋 웃었다.

빗줄기 사이로 이어진 설명을 다 들은 키리에는 아무 말 없이 살짝 입을 벌렸다.

아마 욕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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