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장. 욕심(2)
칼리안은 안 세심하다.
주변의 평가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단 칼리안은 스스로를 그렇게 보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어떻게 본다면 맞는 말이고 또 달리 본다면 완전히 틀린 말이었다.
당장 올해 안에 깨어난다 했던 세렌티에 대해 '그 작자가 깨든지 말든지 나도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하며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거나, 일단 5서클이 되어 한 시름을 놓았으니 더 큰 시름거리가 다시 생기기 전에 오러와 마나의 충돌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오늘도 보람차게 짖었으니 이 정도면 뿌듯한 하루였다' 따위의 생각이나 하며 침대에 파고든다거나, 플란츠가 손가락질을 받는 것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든다 해 놓고는 플란츠로 변장한 채 회의장 문을 발로 걷어찬다거나 하는 꼬락서니를 보면 일말의 세심함도 없는 것이 맞다.
그런데, 우리 히나가 오늘은 무슨 색깔 리본으로 머리를 묶었는지부터 작디 작은 신발 어디에 때가 묻지는 않았는지를 살핀다거나, 우리 히나 요즘에는 아이스크림을 하루에 몇 개나 먹고 다니는지를 걱정한다거나, 밤잠을 설쳐가며 그래서 대체 나는 우리 히나 생일에 무엇을 선물해야 하는지를 고민한다거나, 우리 히나의 키가 보리 낱알 만큼 자란 것을 한 눈에 알아본다거나 하는 양을 보면 이보다 더 세심한 사람이 또 있을까 싶다.
그런 많은 사항들을 차치하고 당장 이번의 일만 봐도 그렇다.
'잠깐만 형님들 좀 부탁할게, 키리에.'
어찌됐건 칼리안의 기사인 키리에를 매번 이렇게 떨어뜨려 두고 혼자 쏘다니는 것을 보며 세심하다 여기기에는 어려움이 있지 않겠나.
그렇게 갑작스레 나간 날에는 하나 이상의 구멍을 몸에 매달고 돌아오는 경우가 허다했으니 칼리안은 제 몸에 대해서도 절대 세심하지 않다 해야 할 일이다.
'혹시라도 나 없을 때 다누가 형님한테 손을 대면 곧장 란델 형님 모시고 엘프 도시 밖으로 나가.'
그런데 이렇게.
'형님은 다누한테 또 끌려들어가도 내가 알아서 찾아오면 되긴 하는데, 다누가 문제를 다시 일으키면 내가 좀 많이 돌 것 같거든. 그럼 엘프들이 내 발목을 걸어 보겠다고 란델 형님을 인질로 삼을 지도 모르니까 미리 나가 있어. 상황 정리되면 내가 찾으러 갈게.'
여러가지 이유로 돌아있을지 모를 자신의 상태를 미리 짐작하고, 그럴 때 해야 할 일을 콕 집어 알려주고 갔음을 생각하면 또 굉장히 세심한 성격이 맞는 것이다.
- 부스럭.
그러니 칼리안은 과연 세심한지, 아닌지.
아무리 생각해도 갈피를 잡기 힘든 문제를 잠시 생각해보던 키리에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바위 위에 조용히 앉아있는 란델에게 모포 하나를 건넸다.
"잠시만 계십시오. 식사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두거라. 아직은 허기가 들지 않으니."
휘트린에서 떠나올 때 챙겨두었던 빵이 레이븐의 안장에 매달린 마법사 가방 속에 있었다. 영주성에 있던 발칸의 마법사 한 명을 통해 보존 마법까지 걸어가며 가져온 것인데도 란델은 거절을 했다.
물론 그것이 입에 맞을 리야 없겠으나 이곳에 오는 내내 한 마디의 불편한 기색도 없이 적당한 맛의 빵과 대충 구운 고기들을 먹어왔던 란델이다. 그러니 이제 와서 식은 빵이 낯설고 싫어 거르겠다 하는 것은 아닐 터였다.
때문에 잠시 란델을 바라보던 키리에가 한 번 더 빵을 권했다.
"점심도 거르셨습니다."
"먹거라. 기다릴 테니. 나는 되었다."
하루 이틀을 굶는 것쯤이야 일상이었던 키리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칼리안이 걱정되어 식사 생각이 들지도······.
'······ 아.'
생각의 끝에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꺼내들었던 빵을 다시 집어넣다 말고 눈을 돌린 키리에가 란델을 쳐다봤다.
"저하와 왕자님이 걱정되시는 겁니까."
넌지시 건넨 질문이었다. 그러나 란델은 대답없이 눈만 내리떴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사방에 가득한 숲을 둘러보다 입을 열었다.
키리에의 질문과는 동떨어진 말이 이어진다.
"새들의 울음이 여느 날과 다르구나."
이 말에 키리에가 놀란 낯빛을 거두어 감추며 물었다.
"새들의 울음이 달리 들리십니까."
"오늘따라 유난한 소리를 내었으니."
어제와는 다른 소리.
평생을 왕궁에서 살아온 란델이 그 짧은 사이에 새들의 평범한 지저귐과 경계의 울음이 어떻게 다른지를 알아들은 모양이다.
형제들이 하나같이 배움이 빠르다 해야 할지.
그럼 전하께서는 왜 그 오랜 시간 동안 배운 것이 없으셨는지.
안타까운 생각을 뒤로 한 키리에가 대답을 전했다.
"네. 조금 전에 다소 먼 곳에서 한 차례 소란이 있었습니다."
"엘프들이 우리를 찾고자 도시 밖으로 나온 것이더냐."
"이곳을 비우고 멀리 찾아가 보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어렴풋이 전해진 말 소리나 분위기를 살피기로는 그렇습니다. 그들의 도시에 문제가 생긴 듯 했습니다."
"막내가 돌아온 것이겠구나."
"네. 그렇게 생각합니다."
란델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키리에가 입을 열었다.
"저들 역시 엘프입니다. 저만큼 귀가 밝은 이가 있을 겁니다. 곧 비가 내릴 것도 같으니 잠시 쉬고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리 위험하다 여겨지지는 않는다만."
란델의 짙푸른 눈이 키리에의 등 뒤를 향했다. 투명한 계곡물이 바위 사이사이를 지나 잠시 고이다 다시 흘러내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다누에게서 시나스타를 받았던 칼리안이 그것을 플란츠에게 주었던 곳.
지금 그 계곡을 등진 채 잠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엘프들의 청력이 좋으니 말들의 소리와 작은 대화 소리가 감춰질 만한 곳을 찾아 정한 장소였다.
"주변이 이미 소란하니 이 정도의 소리가 퍼져나가지는 않겠다만."
"대신 저 역시 저들의 소리를 듣기 어렵습니다."
"붙들린다 하여도 저들이 나에게 해코지를 할 수나 있겠느냐."
"왕자님께서는 위험하다 여기셨습니다."
란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새하얀 바위와 바위 사이, 그 틈새에 피어난 노란 꽃무리가 있는 쪽으로 느긋하게 걸어가며 말했다.
"엘프들로부터 몸을 감추기에 가장 좋은 장소는 소란한 곳이다. 그것을 저들이 모르겠느냐. 진정 찾고자 하였다면 가장 먼저 계곡을 살폈을 것이다."
생일에 받는 라프라니아도, 쾌유를 기원하는 아디니아도, 철마다 바꾸어 심는 팬지와 국화도, 그리고 안네루시아도 아닌 작은 꽃. 분명한 이름이 있겠으나 란델은 알지 못하는 노란 꽃 몇 송이가 바람결에 살랑살랑 흔들린다.
손가락 길이 만한 짧은 줄기의 끝에 핀 그 꽃이 참 작고도 작다. 때문에 향을 맡아 볼 엄두도 못 낼 꽃의 생김을 한동안 내려다보는 란델에게 키리에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저들이 란델 왕자님을 붙들 생각이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나 역시 이 나라의 왕자다."
설마하니 그것을 모를까.
엘프들이 그것을 몰라서 칼리안과 플란츠에게 저렇게나 무도한 짓들을 하는 것도 아닐 터였다.
때문에 그것 하나를 믿고 마음을 놓지는 마십사 이야기하려는데 란델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다누의 근원은 이 숲에 있고 다누는 제 첫 뿌리를 옮길 수도 없다. 결국 다누는 계속하여 카이리스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엘프들이 나에게 해를 가하고 카이리스로부터 등을 돌리는 일은 생기지 않을 테니 그리 염려 말거라."
"다누는 얼마든지 다른 곳으로 뿌리를 뻗을 수 있다 들었습니다. 다누의 줄기와 엘프들의 도시는 남쪽 대사막의 바다에 있지 않습니까."
"아니다."
잘라내듯 단정지은 란델이 말을 이었다.
"다누의 줄기는 여전히 이 숲에 있다. 숲의 통로를 지나면 대사막에 위치한 엘프들의 도시로 들어서게 되지만 다누가 있는 곳만은 이 숲이다. 두 곳을 뒤섞은 뒤 눈치채지 못하도록 눈속임을 부려 둔 것이라지."
카이리스의 숲 속에 위치한 통로를 지나면 대사막에 인접한 엘프들의 도시를 밟게 된다. 그 안에서 한참을 걸어가 바닷가 인근에 우뚝 선 다누의 줄기 근처로 가면 그곳은 다시 카이리스의 숲이다. 다누의 줄기를 지나쳐 조금을 더 가면 또 엘프들의 도시다.
숲의 한가운데에 대사막을, 그 안에 다시 숲을 연결해 두고 그 전부를 도시로 삼았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연결된 것을 눈치채지 못할 속임수를 부려 둔 채로.
"왜 굳이 그런······."
"다누의 근원이 있는 카이리스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종족임을 숨기고자 함이다."
소란스런 물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카이리스의 왕실에 해를 입히지 못한다 하시는 겁니까. 카이리스를 떠나지 못하기 때문에."
바람이 좋고 물도 충분한 계곡가에 피었으나 결국은 돌 틈이다.
뿌리를 제대로 뻗지 못한 노란 꽃들을 가만히 보던 란델의 손이 잠시 붉게 빛났다. 그렇게 자신의 몇 분, 혹은 몇 초를 들여 꽃의 생기를 되찾아주었다.
그 뒤에야 입을 열어 키리에의 질문에 대한 답을 전했다.
"양신전쟁 당시 시스파니안께서는 파괴된 다누의 파편 하나를 보전하셨다. 그것을 당신의 둥지 곁에 옮겨 심고 보호해 다시 자라난 것이 지금의 다누다. 때문에 다누와 엘프는 시스파니안의 후손을 해치지 못한다."
"그렇다면 다누는 왜 왕자님을 공격한 겁니까."
"그것이 다누의 행동이더냐."
"정확히는 제온입니다."
"칼을 빌린 것이지."
"어제 플란츠 저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왕자님을 해치기 위해서 말입니까."
"그래."
칼리안이 없어야 플란츠가 과거를 반복한다.
다누는 그렇게 해야만 시간이 되돌아가는 일을 막을 수 있다 여겼다.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칼리안의 목숨을 빼앗고자 했었다. 제 손으로 이뤄내질 못하니 제온의 손을 빌려가면서라도.
"다른 이의 칼을 빌리는 것은 살인이 아닙니까."
"다른 이의 칼을 빌리는 것이 살인이 아니라면, 실리케에게 독이 전해지지는 않았을 테지."
"그 당연한 것을 다누와 엘프들은 모른다는 겁니까."
"다누만은 모르더구나."
"그것은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장로 나르잔이 나에게 막내를 만나도록 도와달라 청하였었다. 이야기를 전하기 전에 막내가 또 사라졌다만."
"왕자님을, 왜······."
"다누의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 듯 보이더구나. 지금 내가 네게 전한 이야기도 대부분 그에게 들은 것이다."
"엘프들이 다누의 뜻에 반하겠다 했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래. 나 역시 그리 들었다."
"다누의 영역에서 다누를 배신하겠다는 말을 했다는 겁니까."
"그리 하여도 다누는 신경쓰지 않는다 하더구나."
"어째서입니까."
휘트린을 보건대, 엘프들에게 있어 다누는 절대적인 위치가 아니던가. 때문에 이렇게 묻자 란델이 그제야 꽃에서 시선을 떼 키리에를 쳐다봤다.
그리고 스치는 듯한 웃음을 보이다 말했다.
"주인도 아닌 어미의 말을 전부 따르는 자식도 있더냐. 버림받아 자란 것에 모정을 갈구하기도 하고, 관심 받으며 자란 것에 치를 떨며 등을 돌리기도 하고. 내 눈에는 그리 보였다만. 아니더냐."
란델은 어미와 자식의 모습을 딱 하나 봤다.
그 딱 하나의 관계에서 란델이 보았던 자식은 어미의 말을 죽어라 안 들었다.
물론 아래층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어찌됐건 란델이 보았던 모자 관계 '전부'가 그랬으니 엘프들과 다누의 관계라 하여 다르겠느냐는 소리였다.
"그리 굴다가도 결국 어미에게 돌아가는 것이 자식이니 다누 역시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하더구나."
특별히 대답을 필요로 하는 질문은 아니어서 키리에는 그냥 고개만 주억거렸다. 그리고 물을 마시고 돌아온 자신의 말 이리스의 목덜미를 툭툭 두드리다 입을 열었다.
"혹시, 이런 이야기까지 저에게 해주시는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란델과 이렇게 오랫동안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아마 플란츠와도 이 정도로 긴 말을 주고받은 적은 없었을 터였다.
분명 란델을 적대하던 키리에가 아니던가.
란델이 그런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리안이나 플란츠도 아닌 자신에게 이런 내용을 낱낱이 알려주는 것이 비단 '지금 당장 도망을 갈 이유가 없음'을 설명하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또 다른 뜻이 있는 걸까.
그런 생각으로 건넨 질문에 란델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소란스런 물줄기를 지켜보다 대답했다.
"긴 이야기이니 네가 대신 막내에게 전하거라. 소란한 것은 좋아하지 않으니."
나 대신 네가 말해주라고.
걔랑 얘기 오래 하면 너무 시끄럽다고.
* * *
이해하지 못할 일 뿐이다.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의 로브를 입은 채로 싸웠을 때에도 그렇게 거추장스러웠는데, 색만 달랐지 거추장스럽기는 매한가지일 로브를 걸치고 어떻게 그런 식으로 움직일 수가 있는지.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불편한 로브에 더해 어떻게 그렇게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한 채로 싸울 생각을 할 수가 있는지.
게다가.
"······ 힘을 내시라 했는데. 내 아우님께서 말씀을 못 들으셨나."
"들었습니다. 힘내서 형님 꺼내러 온 겁니다."
신나게 나무나 캘 줄 알았던 놈 몸에 왜 또 구멍이 나 있는지.
"그런데 왜,"
"사람은 이름 따라 산다는 말을 안 믿었었는데 이름 말고 별명을 따라가나······ 형님 어디에 계시는지를 알아도 찾아서 꺼내기가 녹록하질 않네요. 하도 동글동글하셔서 그런가."
저렇게 다친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얼굴을 보자마자 짖어대는 지독한 참을성까지.
도대체가 뭐 하나 깔끔하게 이해되는 일이 없다.
"아무튼 형님 꺼내고 나면 변장을 풀까 했는데 며칠은 더 이러고 있어야 되겠습니다. 다 낫고 나서 바꿔야 하니까요. 그나저나 옷이 상했는데 어찌하나. 형님이나 란델 형님 옷은 너무 작을 테고······ 키리에 옷이 맞으려나. 그건 또 클 것 같은데."
"말고. 또 왜 다쳤냐고 묻는 거잖아."
빛이 들었다.
아무도 없었다. 그저 다누의 목소리만 들려왔었다.
그것도 잠시, 굉음이 들린 이후로 다누는 침묵했다. 그렇다 해서 플란츠가 다누의 공간 밖으로 풀려나지도 않았었다.
그런 공간 속에 우두커니 남겨진 뒤, 서 있는 것인지 걷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무작정 발을 옮겼다. 아무리 걸어도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은 그곳에서 계속하여 걸음을 옮겼었다.
혹시나 출구가 있는 것은 아닐지.
아니라면 어딘가 균열이 생겨 있지는 않을지.
걷고 또 걷다 시나스타를 꺼내 휘둘러 보기도 하고 손을 뻗어 주변을 더듬어 보기도 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귀를 막고 고개를 숙이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기다렸던 날과는 많이 달랐다. 물론 '세크리티아의 마지막 날'이 펼쳐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가능했던 일이겠으나, 그래도 처음으로 다누에게 끌려들어갔던 날과는 많이 달랐다.
"스승님을 잠시 뵈었는데 루시랑 안네는 잘 있다고 합니다. 형님 많이 안 찾고 빌헬름 관에서 잘 지낸답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분명 달랐는데 또 다쳤다.
그래놓고 고양이들 얘기를 꺼낸다.
"그래도 빨리 돌아가야 형님 얼굴 안 까먹을 텐데요. 지금 쯤이면 란델 형님 영지나, 거기도 다 살펴보고 형님 영지에 가 있어야 할 때인데 너무 늦어지네요. 똑똑한 인재도 좀 찾아볼까 했는데 그것도 진전이 없고. 역시 생각한대로 일이 진행되기는 어려운가 봅니다."
고양이 얘기를 들으면 그쪽에 관심을 두리라 생각한 건지. 그래서 말을 돌리면 돌리는대로 넘어가주기를 바라는 건지.
넘어가달라는 티를 저렇게 팍팍 내고 있으면.
"어쨌거나 전하의 탄신일 축제가 시작되기 전에는 돌아가야 하니까요. 조금 더 서둘러서······."
"말, 좀. 내 탓 안 할 테니까."
원하는대로 넘어가 줄 거라고 생각하는지.
"왜 다쳤냐고."
"다누한테 행패부려서요."
그제야 돌아오는 대답에 플란츠가 긴 한숨을 쉬었다.
지난번처럼 칼리안의 속이 뒤집힐 것은 예상을 했었다. 다누가 칼리안을 마주하자마자 손에 든 것을 도로 내놓을 리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저 꼬락서니는 아무리 봐도 제 힘을 다 끌어다 쓰느라 다친 것으로 보이질 않았다. 누군가에게 공격을 받은 모양새가 아닌가.
"휘트린인 줄 알았는데."
"그 쪽에서는 별 일 없었습니다. 과정이 좀 있었지만 제온도 결국 물러났고 지금은 스승님이 같이 계십니다."
"그럼. 다누가 직접 공격을 했다는 소리인가."
"할 줄 알더라고요. 저도 놀랐습니다만."
다누의 가지가 어깨에 박히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별 것 아니라는 듯 씩 웃으며 덧붙인 칼리안이, 왼손을 움직여 어느새 흘러내렸던 청은색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이렇게 이 모습에 익숙해졌다 되돌아가면 저도 모르게 키리에와 눈을 맞추고 완두콩을 내려다보려 들 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면서.
"······ 그래서."
저벅 저벅 발을 옮기던 칼리안이 잠시 멈추어 섰다.
숲의 바람이 기껏 쓸어넘긴 긴 머리를 다시 흐트러뜨린다. 그것을 또 한 번 쓸어넘기고는 주변을 살피다 고개를 들어올렸다. 잔뜩 찌푸린 하늘을 올려다봤다.
투둑, 투둑.
느린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한다. 칼리안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다누와의 일은 란델 형님 찾고 나서 말씀드릴게요."
한참 뒤, 비에 젖어드는 숲의 흙길같은 낮은 목소리가 플란츠를 향했다. 함께 멈춰 서있던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네."
"다른 곳은."
"괜찮습니다."
"사실대로."
"크게 다친 곳 없습니다."
"속은."
"배고파요."
속도 편치는 않다는 뜻이다.
안 괜찮지만 배고프니까 식사는 하고 싶다는, 거짓말 못하는 놈이 애써 둘러둘러 말하는 소리임을 이제 잘 안다.
"안돼."
"괜찮다니까요."
"······ 히나한테."
"아닙니다. 내일 먹겠습니다. 히나한테 얘기하지 마세요."
"알았어."
"네."
대답의 끝에 청량한 마력의 기운이 살짝 맴돌다 흩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당연하겠으나 클린이었다.
피 냄새 상관없다고 말을 해봐야 안 멈출 놈임을 알아서 그건 그냥 놔뒀다. 그리고 비가 더 쏟아지기 전에 발을 옮겼다.
키리에라면 계곡 쪽으로 갔으리라고, 그 말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언젠가 시나스타를 건네받았던 계곡을 찾아간 뒤 조금을 더 올라갔다.
비를 피할 수 있을 만한 곳.
커다란 바위 아래로 빈 공간이 난 그런 곳이 보일 때까지.
- 저벅, 저벅!
저 멀리 키리에와 란델을 찾아낸 칼리안이 서둘러 발을 옮겼다. 찾아온 이들의 발소리를 들은 두 명이 걸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에게로 걸어간 뒤 한동안 란델의 얼굴을 보던 칼리안이 인사를 건넸다.
"다녀왔습니다."
란델이 고개를 끄덕였고 칼리안이 한 마디 말을 덧붙였다.
"걱정하고 계셨습니까."
별 생각 없이 물은 말.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말.
그 말에 란델이 입을 열었다.
"그래. 걱정하였다."
라고.
칼리안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싱긋 웃으며 답을 전했다.
"네."
저기, 드미레아.
내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혹시 너는 알까 싶어서 그래.
완두콩은 손이 되게 많이 가거든. 계속 시들어. 계속, 계속, 끊임없이, 툭하면 시들고 잠깐 눈 돌리면 어느새 시들고 살짝 잊어버리면 어김없이 또 시들어. 마음을 좀 놓을라 치면 그새 또 또 또 시들어. 시들다 못해 아예 절여질 때도 많아. 진짜 되게 많아. 그런데 옥수수는 안 그래.
옥수수는 원래 이렇게 혼자 쑥쑥 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