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장. 욕심(1)
시나스타.
서로 다른 두 자루의 검.
'형님 쓰세요. 어디 두고 다니지 마시고요. 이번에는.'
생각해보면 다누는 그 검이 무엇인지 알려준 적 없었다. 생각지 않은 선물을 받게 된 칼리안이 그것이 진짜 별의 조각이었다는 어리석은 확신을 했을 뿐이다.
만약 그것이 정말이라면 '과거'의 검을 가져온 다누가 옛 칼리안이나 베른을, 혹은 잠들기 전의 세렌티를 이 시간으로 데려올 수도 있어야 함을 잊은 채로.
'진짜 내 검이겠군.'
물론 플란츠도 마찬가지였다.
그 후로 시간이 지난 지금, 똑똑한 플란츠가 제 검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사실을 여전히 모를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검의 정체를 알았다 하여 플란츠가 검을 내버릴까 걱정하지도 않았다.
분명 플란츠에게도 브리센의 피가 흐르기 때문이다.
파릇파릇한 완두콩에 그들의 썩은 내가 배어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 동글동글한 완두콩도 어쩔 수 없는 칼잡이라는 뜻이다. 제 목숨마저 욕심부리지 않았던 때에도 레이븐과 검에 대해서만은 탐을 내지 않았던가.
검에 새겨진 글씨가 아르센의 필체임을 이제는 알았을 텐데도 아무렇지 않게 지니고 다니는 것도 같은 이유일 터였다. 누구의 글씨가 새겨져 있든 시나스타가 좋은 검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안 두고 다녀.'
하물며 그러할진대 별의 조각이 아니었다 하여 마다할 리가 있나. 별의 조각이 아닌 베른의 기억을 벼린 칼날로 전락한 그것을 플란츠가 제 손에서 놓을리가······.
'이번에는.'
'네.'
없지.
"비아다누르. 그런 이름이라던데."
그래서 칼리안은 플란츠에게 주었던 시나스타의 반쪽을 도로 건네받아 깨뜨리지 않았다. 알면 아는대로 모르면 모르는대로 계속 쓰게 두었다.
대신 자신했다.
때를 기다렸다.
플란츠가 든 시나스타를 수없이 상대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칼리안의 오러가 부서진 적이 없었지 않은가. 그렇다면 결국 다누를 앞에 두었을 때에도 검이 부서져 상대하지 못할 일은 벌어지지 않을 터였다.
'개조했습니다.'
더욱이 시나스타는, 다누가 만들어 건넨 뒤 다시 제련된 검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브리센에서 사용했던 것과 똑같은 형태로 만들었습니다.'
로튼이라는 그 대장장이는 마법사나 소드마스터가 아니었다. 금속을 다루는 것에 있어 으뜸이라 했던, 양신전쟁 당시 멸족한 난쟁이들의 후손도 아니었다. 비상한 능력이 있다며 명성이 자자한 대장장이도 아니었다. 그냥 우연히 만난 기민하고 솜씨 좋은 대장장이였다.
그러니 그것이 한때 다누의 일부였든 아니든, 대장장이들이 사용한다 했던 꺼지지 않는 불꽃에 어떻게든 생김이 바뀐 검이다.
그러니 다누는.
그러므로 다누는.
"스스로 여문 생명이라니. 누군지 이름 번 잘지었네."
신이 아니었다.
시스파니안이나 아르나이젤처럼 결국은 다누 역시 숨을 쉬고 사는 '생명'이었다. 불사의 존재가 아니었다.
"그런 주제에 고상한 척은."
칼리안이 팔을 움직였다.
다누의 몸뚱이에 깊숙이 파고든, 아니. 그렇게 하려 하였으나 결국은 아무 것도 흠집내지 못하고 멈추어 선 붉은 검을 미련없이 없앴다.
- 뚝.
- 뚝뚝.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내렸다.
칼리안의 오러를 막기만 하는 대신 검을 쥔 쪽의 어깨를 꿰뚫어낸 다누의 가지를 내려다봤다. 온 사방으로 빛을 흩뿌리는 그 가지를 따라 후둑 후둑 흘러내리는 진득한 핏줄기를 보며 긴 웃음을 지었다.
사납게 쳐올라간 새빨간 입술 새로 기고만장한 맹수의 도발이 새어나왔다.
"결국 너나 나나 다 똑같은 개새끼인데."
고작 백 년을 못 살고 스러지는 인간의 앞에서 인내를 잃은 해묵은 나무를 향해 다시 검을 들었다.
- 우우응!
거대한 나무를 감싸안은 더 거대하고 강고한 보호의 마나를 읽어냈다.
다누의 방대한 마나를 전부 다 막아설 필요는 없었다. 사실 그럴 만한 능력이 되지도 못한다 해야 맞을 일이다. 그러나 신경 쓰지 않았다. 칼리안이 만들려는 것은 다누를 다 잘라낼 대단한 균열이 아니라 그냥 작은 틈, 칼날이 들어갈 만큼의 작고 작은 틈이었으니까.
그러니 주먹 한 개 만큼, 딱 그만큼의 범위를 눈에 담았다. 다누의 보호막을 이루는 마나의 흐름 위에 칼리안 스스로의 마나를 덮어씌우듯이 흘려보냈다. 다누의 마나와 똑같이 움직이며 그 사이사이로 자신의 마나가 스미도록 두었다.
마나에 오러를 더하고 오러에 마력을 섞고 마나와 마력을 제멋대로 다루는 것은 이미 신물이 날 정도로 많이 해봤지 않나. 다시 태어나 이제까지 그런 잔재주 하나로 생을 연명했으니 까.
아, 물론.
- ······ 쿠궁······.
익숙하다 했지.
잘 한다고는 안 했다.
- 우우웅······ 우웅, 우웅!
여전히 충돌이 일어난다.
제 몸 속에 든 마력과 오러의 충돌도 아직 해결하지 못한 칼리안이다. 그리하여 그냥 둘이 충돌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넓은 공간을, 새로운 서클이라는 공간을 내줌으로써 당장의 큰 부담을 미뤄뒀던 칼리안이 아니던가.
그런 칼리안이니 다누의 마나에 자신의 마나를 일체화시킬 만큼의 능력을 그새 깨달았을 리가 있나.
- 쿠웅······
그냥 에라 모르겠다 다 망해버려라하고 내버려 두는 거지.
- 쿠웅, 쿵······ 쿠구궁······!
성질 다른 다누의 마나에 섞이지 못한 칼리안의 마나가 요동친다.
그것에 얽힌 다누의 마나가 함께 출렁인다. 끝없이 휘몰아치며 저와 동화되지 않은 힘을 밀어내고자 반발하기 시작한다.
그것을 그냥 두었다.
사방으로 요동치도록 그대로 두었다.
- 두근!
대신 다른 일을 부지런히 했다.
불안정한 충돌로 인해 튕겨나오는, 혹은 섞이기를 거부하고 빠져나오는, 그런 이유들로 저를 이끌던 힘에서 벗어난 주인없는 마나를 모조리 빼앗아왔다. 그것을 다시 다누의 보호막으로 보내 같은 일을 반복했다.
멀리서 여전히 다가오지 못하는 엘프들이 마른 침 한 번을 삼키지도 못할 만큼의 짧은 시간. 날선 연보랏빛의 눈을 깜빡이기에도 부족할 찰나의 시간 동안 그렇게 하였다.
그 뒤 다시 한 번 마나를 펼쳤다.
다누의 것 사이사이에 들어선 자신의 마나를 있는대로 펼쳤다. 주변에 널리고 퍼진 다누의 마나를 휘어잡았다. 그것을 붙들고 계속하여 충돌을 만들어냈다. 다시 흡수해냈다. 다누를 감싼 보호막에서 벌어지는 일이니 충돌의 여파는 다누가 받을 터였다. 그러니 그것은 칼리안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 쿠궁······ 쿠웅!
마법을 부릴 줄 알던 대사막 전사의 힘을 흩어내고 하피가 내보낸 오러를 붙들어 잡고 제온에서 사용하던 마나 차단을 무위로 되돌렸듯이, 똑같은 방법으로 갈취하였다.
다누의 마나를.
그러자 오래지 않아, 칼리안의 잔재주를 지켜보던 다누가 목소리를 냈다.
"전하였다. 너는 나에게 해를 가하지 못한다."
"내 손에 뿌리 잘린 일부터 기억하고 말해."
"경고하였다. 나는 너를 계속 용인할 이유가 없다."
"그럼 내 조상님도 너에 대한 이해를 때려치시겠지."
"굳이 이러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걸 왜 네가 물어."
그 인내가 지고하여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던 다누에게 오른쪽 어깨를 꿰뚫린 채로, 그렇게 다누의 가지에 어깨 한 쪽을 내어 준 채로, 검을 잡았다.
그것을 들어올렸다.
고집스럽게도 오른손을 들어 검을 잡았다. 수백, 수천 개의 칼날을 만들어 낼 오러를 전부 다 모아 그러쥐었다.
"네가 긁었잖아."
- 쿠궁······!
- 우웅, 우우웅!
"나를."
- 콰악······!
굳이 일부러 들어올린 오른팔을 휘둘렸다.
- 울컥!
다누의 가지에서 강제로 빠져나오게 된 어깨의 상처에서 고여있던 피가 쏟아져나왔다.
당연히 그것도 상관하지 않았다.
이 정도는 이제 생굴 먹고 하루 자면 낫는다.
- 쿠구궁······ 우우우웅!
되돌아 뻗어나오는 다누의 가지를 있는대로 쳐냈다.
길고 긴 청은발이 바람에 얽혀드는 사이로 굵은 핏방울이 다시 튀어오른다. 깊디 깊은 자신의 상처에는 한 줄기의 시선도 두지 않고 마력을 긁어모았다.
폭풍이 오는 길목에 들어선 들불처럼 정신없이 흩어지는 붉은 오러의 기운을 어떻게든 붙들어잡았다. 바람의 마력을 붉은 칼날에 모조리 담아낸 뒤에는 욕지거리라도 내뱉듯 다누를 향해 내리쳤다.
- 콰아아아앙!
벌어진 상처 속에 독니를 박아넣듯이 검을 찔러넣었다. 힘들게 벌려 놓은 보호막의 틈새로 이제껏 인내하던 관대한 맹수의 발톱을 내리꽂았다.
고작 뿌리 따위가 아니라 두터운 줄기에. 언제든지 얼마든지 떨궈낼 수 있을 투명한 가지와 아름다운 잎사귀 말고 그 굵직한 줄기 한 가운데에.
- 카가가각······!
- 쿠구궁······ 쿠궁, 쿠궁!
- 콰직!
기어코 그렇게 제 검을 박아넣었다.
- 우르릉······.
- 파아아앗!
눈을 뜨기 어려울 만큼 휘황한 빛이 터져나온다.
그리하여 칼리안이 웃었다.
숨겨 둔 송곳니를 드러내듯이.
* * *
- 소란한데.
- 아, 들리십니까?
- 잘.
- 들릴 줄은 몰랐는데요. 신기하네요.
- 그래서. 내 아우님께서는 지금 대체 뭘 하시는 건지.
- 나무 캡니다. 완두콩 꺼내가려고.
- ······ 힘내.
- 네.
* * *
체이스가 그랬다.
'베른. 혹여 너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와 말을 나누어야 할 일이 있다면, 굳이 억지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려 애쓰지 말거라.'
말이 안 통하는 새끼는 아무튼 일단 후려갈기고 보라고.
'서로의 눈높이가 맞지 않아 말이 엇나가는 때에는 어떤 말을 하여도 결국은 상대의 귀를 빗겨나가는 법이다. 그러니 우선은 상대가 너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노력해보거라. 같은 눈높이에 서게 된다면 대화는 자연스레 이루어질 테니까.'
'네, 형님. 새겨듣겠습니다.'
맞으면 멍이 들고 멍이 들면 아프다. 아프면 억울하고 억울하면 노려보게 마련이다.
그렇게 서로를 쳐다보게 된 마당에 대화가 이어지지 않을 수가 없지 않나. 그러니 역시 체이스의 말은 틀린 것이 없다.
'······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느냐?'
'맞는데요. 이해했습니다.'
'헌데 나는 왜 또 이리 불안해지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형님은 저를 너무 못 믿으십니다.'
'믿지 못할 리가 있겠느냐. 세상에 하나 뿐인 내 동생인데.'
'그런데 왜 그렇게 못미더운 눈을 하고 계십니까?'
'아······ 니다. 이만 가서 일 보거라.'
'네.'
체이스가 정말 그런 의도로 한 말이 맞는지는 체이스 본인의 의견을 심도있게 들어봐야 할 일이지만 아무튼 베른은 그렇게 이해하고 잘 알아들었다. 하늘같은 형님의 말씀을 가슴 속에 깊이깊이 잘 새겨두었다.
"다누."
칼리안이 된 지금까지도.
"나와. 숨지 말고."
온 장기를 다 끊어낼 심산으로 가한 공격에 뿌리 하나를 얻어맞았던 지난 날의 일과는 달랐다. 운 좋게, 혹은 운 나쁘게 한 번의 공격을 당한 그 날에는 분명 다누가 인내하여 참고 넘긴 것이 맞았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물론 다누가 인내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어찌됐건 마음만 먹는다면 그 가지를 다시 휘두르든 자신의 속내 어딘가에 칼리안을 가두어 놓고 죽을 때까지 풀어주지 않든,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은 있을 테니까.
다만 다르다 한 것은 눈높이였다.
칼리안은 다누가 두르고 있던 보호의 힘을 분명히 걷어냈고 그 사이로 공격을 보냈다.
"내가 너를 두려워하여 인내해주고 있다 여기는가."
한낱 인간이라 여겼던 이가 짖고 무는 것을 다누 나름의 관대함으로 참아넘기기에는 놀랍고 화가 날 터였다.
한낱 인간이 건넨 검에 상처를 입었다는 상황에 대해서.
"그러는 다누, 너는."
햇빛이 사라지고 새로운 빛이 보였다.
이제껏 지켜보고 서 있던 수많은 엘프들은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았다. 먼 곳의 바다도 없어지고 짙은 소금내도 전부 가셨다.
그렇게 어느새 끌려들어온 다누의 공간에 꼿꼿이 홀로 선 칼리안이 대꾸했다. 피는 멎었으나 여전히 욱씬거리는 어깨를 내버려 둔 채였다.
"내가 낡아빠진 나무 따위를 무서워해서 기어코 이해를 해줬다 생각하나."
계단 세 개.
칼리안의 쓸모 많음은 알았으나 결국은 세 계단 아래에 세워두고 내려다보기만 하면 될 좋은 도구라 여겼던 란델이 생각난다.
장미 한 송이.
장미가 피어날 것이라던 칼리안의 말에 관심을 보이기는 하였으나 결국 제대로 마주보지 않았던, 때문에 그의 장미를 꺾어가며 첫 대화를 나누었던 그때가 생각난다.
분명한 정도의 차이가 있으니 그 옥수수수염이 이런 말을 들으면 분명 싫어하고 화를 낼 테지만, 어찌됐건 다누는 예전의 란델을 떠오르게 했다. 물론 그렇다 해서 란델이 이렇게 극심한 짜증을 유발하지는 않았지만 닮은 구석이 없지는 않았다.
"말했는데. 너도 별 것 아니라고."
"그런 믿음으로 이렇게나 서슴없이 나의 선을 넘는 것인가."
"별 게 맞았으면 내 칼에 당하지는 말았어야지. 내 칼 하나를 못 막고 오늘도 또 당할까봐 무서워서 공격부터 한 새끼가······ 방금 전에 제가 뭘 했는지도 까먹고 인내를 했다는 둥 선을 넘었다는 둥 지껄이지도 말아야지."
그래서 란델을 앞에 두었던 날처럼 다누를 상대했다.
체이스가 알려주었던 대로 다누를 대했다.
"제 몸 하나 제대로 못 지키던 무능한 새끼가, 어디서 감히 누구를 손에 쥐고 멋대로 써먹으려 들어."
자신이 서 있는 곳으로 다누를 끌어내렸다.
그렇게 하여 다누와의 눈높이를 맞췄다. 그렇게 하고 나서야 대화라는 것을 시도했다.
"하여 네가 나를 가르치는 것인가."
"누가 누굴 가르쳐. 알아들어 처먹을 새끼면 이미 진작에 말로 했지. 알아들어 처먹지도 못하는데 뭘 가르쳐."
다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데, 아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휘트린한테 뭘 시켰는지 말해. 제온이랑 무슨 관계인지 말해. 놈들한테 대체 무슨 약점을 잡혔길래 네 그 성격에 그렇게 고분고분 숲의 길을 열었는지 말해. 하피 마석 가져다 어디에 쓸 생각이었는지 말해. 네 대장로를 직접 보내서 카이리시스와 휘트린에서 생긴 일에 대해 사과해. 두 번 다시는 네 멋대로 우리를 끌어들이지 마."
때문에 칼리안은 그냥 바라는 것만 이야기했다.
"그리고 내 형님, 내놔."
가장 중요한 것을 빼먹지 않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