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장. 멍(8)
앞에 선 이를 내려다 보는 눈이 날카롭다.
베른의 눈은 물론이거니와 플란츠나 키리에의 눈도, 에일라의 눈매도, 때때로 드러나는 니들렌의 눈에도 날카로움이 담겨 있곤 했다. 제 얼음창을 고스란히 담은 듯한 싸늘한 눈매를 지닌 아르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결이 달랐다.
한없이 온화할 것처럼 늘 부드럽게 휘어 있음에도 그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날카로움. 겉으로 보여지는 얼굴과 동떨어진 세월이 담긴 날카로움.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온 대륙을 불구덩이로 만들 수 있는 이의 절제가 만들어낸 날카로움. 그런 것이 깃든 은회색의 눈이 단 한 명을 향해 있었다.
"시스파니안께서도 이해를 내리지 못하실 인사같으니."
마치 못 볼 것을 보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더할 바 없이 어리석은 이를 만난 것처럼.
"세상 천지에 제대로 된 아비어미가 이리도 귀할 줄 누가 알았겠나. 겨울 맞이한 나무가 나뭇잎을 떨구듯이 제 새끼를 놓았으니 그 꼴이 다누를 잘 닮았다 해야 할는지······."
진심어린 한탄이 뒤를 잇는다.
르메인을 보았을 때는 분노가 치밀었다. 에반을 만나고서는 살의를 참아냈으며 데블란을 마주한 뒤에는 인고해야 했다. 그리고 지금은 한탄스러웠다.
기실 그 스스로가 세상에서 가장 돼먹지 못한 아비였다 여겨오던 앨런이다. 그런 앨런에게 세상 천지의 그 어느 인사가 제대로 된 부모로 여겨지겠냐만은, 지금 꺼낸 이 말에 대해서만은 어떤 누구도 반박의 뜻을 드러낼 수 없을 터였다.
언젠가 르메인과 데블란을 두고 결국 다 똑같이 못돼먹은 부모다 했던 앨런이 입을 열었다.
"제온에서 자네를 데려가려 오백을 보내고 우리가 그것을 막아냈네. 그러니 그것이 자네의 쓸모를 입증한다 여겨지던가."
앨런의 날선 눈을 마주보던 휘트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아니, 돌리려 했다.
하지만 앨런이 허락하지 않았다.
어느새 발현된 중력의 강제에 고개를 움직이지 못하게 된 휘트린이 눈을 들었다. 앞에 선 인간 대마법사가 자신에게 대답을 강요하는 것이라 여겼다. 때문에 이제껏 생각해오던 답을 전하고자 했다. 아니,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앨런이 건넨 것은 질문이 아니었으므로.
"제 값을 그렇게 굳이 확인해가며 알아내야 하는 생을 살았으니······ 이리도 딱한 인사가 또 어디에 있을는지."
휘트린 영지에서 지은 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도 않았다. 프레이야의 오빠 프레이르와는 어떠한 연관이 있으며 죽은 프레이르를 왜 사칭했는지, 영주 나비아와는 무슨 관계인지, 프레이르로 변장한 휘트린을 죽이려 했던 제온이 이번에는 왜 휘트린을 데려가려 무려 오백의 군사를 보내왔는지, 칼리안에게 위해를 가한 일의 내막은 무엇인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제껏 아르센이 수없이 물었다.
그러나 아무런 답도 듣지 못했다.
- 저벅, 저벅.
그에 대해서 앨런은 굳이 더 묻지 않았다. 이미 다 끝난 생을 대하듯 딱하다는 얼굴로 내려다보기만 하다 혀를 차며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곁에 서 있던 아르센을 향해 입을 열었다.
"헤르츠 부군단장."
"네, 군단장님."
휘트린이 고개를 움직여 둘을 쳐다봤다.
앨런이 속박을 푼 것이다.
그럼에도 다른 소리를 내지 않는 휘트린을 내버려 둔 앨런이 말을 이었다.
"이곳에 두기에는 위험한 자인 듯 한데······ 오늘 내가 왕궁에 옮겨다 놓는 것은 어떻겠나."
"휘트린을 왕궁으로 데려간다는 말씀이 십니까?"
"어차피 아무 말도 안한다 하지 않았나."
"네. 맞습니다."
"그러니 왕궁으로 옮겨두자는 말이네. 그레이 브리센이 든 지하감옥의 맞은편 방이 비었으니 거기에 가져다 두고 차차 심문해보는 편이 낫지 않겠나."
거짓말이다.
아르센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레이는 카이리스에 딱 둘 있는 후작 중 한 명이었다. 라시드가 아직 붙잡히지 않아 왕궁을 습격한 이들에 대한 배후가 명확히 밝혀지지도 않은 상황에 그레이를 감옥에 넣어뒀을 리가 없다.
그레이가 제 발로 나서서 라시드를 고발하고 '라시드를 통제하지 못한 자신을 같이 벌하라' 청하며 왕궁에 들어왔으니, 기껏해야 지하감옥이 있는 건물의 지상층에 마련된 깨끗한 방에 구금을 해 둔 정도일 터였다.
"안됩니다, 군단장님."
그래서 아르센은 이렇게 말했다.
앨런이 눈을 찌푸리며 아르센을 쳐다봤다.
"제 부하들이 다쳤습니다. 한 놈은 평생 쉬던 숨을 못 찾아 죽을 뻔했고 한 놈은 귀를 잃어버렸습니다. 남은 하나는 죽을 때까지 한 손으로 검을 들어야 합니다. 군단장님은 그런 싸움을 다 끝내고 나서야 오셨으면서 죄인만 쏙 빼가겠다 하십니까?"
"말을 조심하게, 헤르츠 부군단장."
"네에, 군단장님. 지금 엄청 조심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제 급여 오르는 것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만 이렇게 저희 공로까지 가져가려 드실 줄은 몰랐습니다."
곁에 서 있던 다른 대원들이 놀란 얼굴로 눈을 꿈뻑였다. 아르센은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직접 이 일에 대한 모든 권한을 저에게 내리셨습니다. 그러니 저는 저 엘프의 입을 여기서 열 겁니다. 이곳에서 이 일에 대한 진상도 전부 다 파악한 뒤에 제가 직접 처형할 겁니다. 목만 집어들고 왕궁에 돌아갈 겁니다. 저 엘프, 숨 붙은 채로 여기서 단 한 발자국도 못 나갑니다. 그렇게 아십시오."
한번, 두 번, 세 번.
곁에 선 이들의 숨 소리가 세 번 쯤 들렸다.
그 사이 앨런은 그렇게나 날카로운 눈으로 아르센을 쳐다봤고 아르센은 그 눈길을 피하지 않고 앨런을 마주 노려봤다.
"······ 왕궁."
그 침묵을 휘트린이 깼다.
"······ 왕궁에 가서 조사를 받겠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레이 브리센'이라는 이름을 꺼낸 앨런의 말에 제대로 장단을 맞췄던 아르센이 고개를 돌렸다.
"왕궁에 가면 아는대로 모두 말을 하겠습니다."
"왜. 그레이 브리센이 거기 있다 하니 관심이 가나?"
휘트린이 여전히 브리센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런 사실을 이렇게 쉽게 알게 된 아르센이 실소를 보였다. 그리고 휘트린을 한참동안 내려다보다 말했다.
"여기에서 입을 열면 왕궁에서 처형 받도록 해주겠다. 그리 되면 혹시 모르지. 하루 쯤은 그레이 브리센의 맞은편 감옥에 묵게 될 지도."
휘트린은 더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당장 줄줄이 입을 열기를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아르센은 더 기다릴 것 없다는 듯 곧장 몸을 돌렸다. 생각이 바뀌면 자신을 부를 테고, 그 때 다시 이야기를 나눠보면 될 일이니까.
- 끼익.
몇 걸음을 걸어간 아르센이 감옥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앨런을 향해 묵례를 보이며 밖을 가리켜 보였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인 앨런이 발을 옮겼다.
다시 한 번 끼익, 하고.
두터운 감옥 문이 휘트린을 홀로 남겨둔 채 닫혔다. 그러자 다섯 명의 마법사와 열 명의 기사가 다가와 감시를 시작했다.
"군단장님."
"왜 부르나."
"저희 급여 얼마나 올려주실 겁니까?"
"다친 놈들 위로금은 지급이 될 걸세, 발칸에 계속 있겠다 하면 놈들 급여는 조금 올려주어야 할 테고 베른 경의 공로에 대해서는 전하와 이야기를 해 볼 생각이네."
저벅, 저벅.
두 명의 마법사가 멀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건 당연한 수순 아닙니까. 그런 것 말고 저희 전부의 급여 말씀입니다."
"자네들 급여를 내가 왜 다 올려주나?"
"저희 오늘 싸워서 이겼습니다."
"싸워서 이기는 것이 군인들이 할 일이고, 싸워서 이기라는 급여는 이미 잘 지급되고 있을 터인데. 할 일을 했다고 급여를 올려주나?"
"싸워서 이긴 것이 아니라 잘 싸워서 크게 이겼지 않습니까. 그랬으면 급여도 올려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급여가 오르는 것이 아니라 특별 포상이 있는것이지."
"아, 포상은 있습니까?"
"있어야지. 그럼."
"저도 주십니까?"
"자네 것은 고민 중이네."
"왜 제 것만 고민하십니까?"
"발 밑으로 뭐가 드는지도 모르고 수면향이나 맡고 다니는 부군단장이 뭐 예쁘다고 특별 포상을 주나."
"그 얘기는 누구에게 들으셨습니까?"
"세이렌 협회장."
"······ 아."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가 구시렁거는 소리, 그것을 싹 무시한 8서클의 대마법사가 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왔다.
"베른 경은 좀 어떤가."
"일어났습니다."
"상태는 어떠하고."
"괜찮습니다. 조금 전부터······."
들려오다가, 점점 멀어지다가.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 * *
저는 괜찮아요, 하고.
히나는 그냥 웃기만 했다.
제대로 휴식도 가지지 못하고 오래도록 치유력을 써 오다 이제와서는 마음까지 해어졌을 터였다. 그러니 혼절한 것이 몸이 힘들어서일지 마음이 버거워서일지.
- 다른 분들은 좀 어떠세요?
꽃도 사고 술도 사려면 급여가 올라야 되는데 군단장님 때문에 꽃도 못사고 술도 못 사서 제 마음이 많이 허전해지면 군단장님께서 책임지실 거냐, 이렇게 묻는 아르센을 훠이훠이 내쫓았다. 그렇게 급여가 급하면 네가 가서 헤이시아 궁부터 마저 다 짓고 오라는 말로 훠이훠이 쫓아냈다.
그리고 그 길로 히나를 찾아왔더니 히나는 다른 놈들부터 걱정을 했다.
"넌 지금 그놈들 걱정이 드느냐."
아마도 처음인 것 같다.
'자네' 혹은 '베른 경'이라는 말 대신 그냥 '너' 라는 말로 히나를 가리키며 말을 건네는 앨런의 모습이 말이다.
앨런의 달라진 말투가 생각보다 어색하지 않은 것에 조금 놀란 히나가 얼른 대답을 전했다.
- 많이 다치셨잖아요.
앨런이 쯧쯧 혀를 찼다.
"네 덕에 다들 목숨 잘 붙였으니 걱정 말거라."
히나가 생긋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또 다시 걱정어린 얼굴이 되어 입을 열었다.
- 칼리안 왕자님이 제 걱정 많이 하시죠.
"하다 뿐일까. 그대로 뒀다가는 사달이 날 것 같아서 아예 그냥 어머니 나무 앞에 데려다 놓고 오는 길이다. 사고를 칠 것이면 거기에다 치라고 해두었다."
히나가 바람소리를 내듯 웃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은 앨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알아서 잘 돌아오실 터이니 걱정 말거라."
- 또 다쳐서 오실까봐요.
"그보다는 네가 다친 것을 먼저 보아야지."
- 저는.
괜찮다고.
그렇게 말하려던 히나가 잠시 고개를 숙였다. 앨런은 다른 말 없이 그런 히나를 가만히 지켜봤다. 한참이 지나도록, 오랜 시간이 흘러가도록.
저는.
히나의 말이 다시 이어질 때까지.
- 화를 안내고 싶었는데요.
"화를 안 낼 수가 있나."
- 아무렇지 않아 해야 한다고 다짐했는데요······.
"아무렇지 않을 리가 있나."
-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요······.
괜찮다는 말을 못 했다.
- 협회장님도 신경을 써주시고 부군단장님도 다른 분들도 엄청 많이 걱정해주셔서, 그러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는데요······.
휘트린을 보았을 때에도, 에우리아의 위로를 받고 아르센의 걱정을 듣고 발칸 대원들의 조심스런 응원을 마주했을 때에도 그저 괜찮다고만 했던 히나가 고개를 숙였다.
툭, 툭, 툭.
기어코 수그린 이마 아래로, 투명한 것이 새까만 눈 속에 한가득 차오른다. 무릎을 덮고 있던 복숭아색 시트에 짙은 방울 자국이 하나 둘 스며든다.
"······괜찮을 턱이 있나."
앨런의 목소리가 히나에게 와 닿았다.
"어미를 본 것인데. 괜찮을 턱이 있나······."
- 네······ 안 괜찮아요······.
히나의 어깨에 올려진 앨런의 손이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제 오빠가 다쳤을 때에만 울음이 난다 했던 히나의 작은 어깨를 두드렸다.
토닥토닥.
느릿하게 와 닿는 그 손의 온기가 목소리만큼 따스해서, 참아온 것을 다 떨궈내듯 히나가 울었다. 소리 한 점을 못 내고 뚝뚝 울었다.
가만가만 그런 히나를 지켜보던 앨런이 다시 한참이 지나고 나서 입을 열었다.
"리베른에 복숭아 꽃이 만발했다면서, 그것을 따다 말려 차를 보내왔더구나."
끄덕끄덕.
히나의 고개가 작게 위 아래로 움직였다.
"생긴 것을 보아하니 내가 안 마시고 또 네게 줄 것을 엘린느가 이미 알았던 모양이다. 찻물 속에서 꽃잎이 어찌나 만발하던지. 도무지 귀찮아서 나는 못 마실 상이다."
- ······ 그래도 엄청 예쁠 것 같아요.
앨런의 손에 들린 구슬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복숭아 꽃처럼 귀하고 어여쁜 목소리가 전해진다.
"급히 오느라 챙기지를 못했는데, 돌아가면 다 주마."
- 또 다 주시려고요.
"다 주어야지. 무엇인들 아까울까."
열심히 눈가를 훔치는 것도 소용없도록, 다시 뚝뚝뚝 눈물이 떨어졌다. 조용히 앉아 그것을 바라보던 앨런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흉이 지지 말아야 할 터인데······ 어찌하나······."
히나의 고개가 도리도리, 옆으로 움직였다.
울다 말고 입을 열지는 않아도 되니 다행이라 여기던 히나의 말이 들려왔다.
- 상처 나기 전에 협회장님이 달래주셨어요. 부군단장님이랑 다른 분들도 다 신경 써주셨어요.
이번에는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 숙인 히나에게 보이지는 않겠으나 그냥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그래서 상처 안 났어요.
"······ 그래."
- 잠깐 멍만 들었어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앨런이 소리없는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를 냈다.
"멍이 든 것이면 차근차근 가시겠구나."
- 네. 차근차근 가실 거예요.
"그래."
- 네······.
그 멍울은 언제쯤 가실는지.
어차피 가실 것이면 아예 싹 사라져서 두 번 다시 떠오르지도 않도록 가시기를. 그런 마음이 담긴 따뜻한 손이 히나를 도닥였다.
토닥토닥.
* * *
서슬퍼런 공격을 사방에 내리꽂을 필요가 없었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뿌리를 찾으려 들 필요가 없었다.
굳이 뿌리를 캐내겠다 이를 악다물 까닭이 어디에 있나. 끝을 모를 나무 한 그루가 저렇게 태평하게 자리를 붙들고 있는데.
굳이 땅 속을 헤집을 필요가 있나.
- 타아앗!
때문에 그저 달려갔다.
시오나에게 잠시 빌려 준 새하얀 검 말고, 이제는 지나치게 익숙해진 붉은 오러의 검을 든 채 그대로 내달렸다.
막아서려는 엘프들의 머리 위로 도약해 더 높이. 하늘에 띄운 오러를 밟고 뛰어오르며 다시 더 높이. 한 번 더, 그리고 또 한 번 더. 그렇게 하늘을 밟고 내달렸다.
- ······ 쿠웅······!
어머니 나무의 코앞까지 다가가 발을 멈추고 땅을 밟았다. 그 후에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검을 들었다.
지켜야 할 것이 차고 넘쳐서, 두려울 것이 차고 넘쳐서, 제 품에 든 것은 티끌 하나라도 내어주기 싫어하는 욕심 많은 짐승이 긴 울음을 내듯 검을 들었다.
- 우우우웅!
세상 천지에 제 발톱으로 베어내지 못할 것이 없다 믿는 오만한 짐승이 검을 휘둘렀다.
- 콰아아아앙!
굉음이 들린다.
- 콰앙, 콰아앙!
- 콰아아앙!
투명하게 빛나는 그 아름다운 나무를 향해, 눈꽃의 결정이 모인 듯한 신비로운 몸뚱이를 향해, 제 생이 다 담긴 붉은 검을 휘둘렀다.
- 콰아앙!
"상처 준 것을 잊지, 말라고."
- 콰앙, 쾅!
- 콰아아앙!
"했었는데. 내가."
나르잔이 보인다.
다시 모여든 엘프들이 보인다.
그들의 검과 화살의 끝이 칼리안을 향한 것이 보인다.
그러나 신경쓰지 않았다. 저들은 절대로 저 검과 활을 놀리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말라 비틀어진 핏방울 하나까지 죄 뽑아다 흩뿌려낼 듯한 기세에 눌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이미 잘 알기 때문이다.
- 카드득!
그래서 그들에게서 눈을 떼 다시 검을 놀렸다. 자신의 검 끝으로 그리 투명한 나무를 긁어내렸다.
- 우르릉······!
발 밑이 진동한다.
칼리안의 공격에 다쳤기 때문도 아니었고 고작 몇 번의 공격과 몇 마디 말에 겁을 먹은 것도 아니 었다.
"나의 인내를 바라는 것이냐."
마치 그것을 증명하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분노를 모두에게 전할 심산인 것처럼 커다란 목소리를 직접 냈다. 머릿속으로 스미지도 않는 소리를 귓가로 직접 전했다.
- 카가각, 카각!
칼리안은 대답 대신 또 한 번 쇠긁는 소리를 냈다.
반쯤 부서진 듯한 연보랏빛의 눈을 한 채로, 한낮을 비추는 달빛 같은 청은빛의 머리를 다 내버려 둔 채로 대답 대신 싸움을 걸었다.
"말 안 통하는 새끼 두 번 살려놓는 취미 없어."
"한낱 인간이······ 나를 말이냐."
무엇을 더 하든 어차피 칼리안의 검은 부러지지 않는다. 무슨 짓을 더 하든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다.
다누의 가지 하나를 잘라내는 정도에 칼리안의 오러는 절대로 부서지지 않을 터 였다. 장담할 수 있었다.
"그 검."
장담할 수 있다.
"내 형님 주라며 나에게 줬던 검. 나와 형님 둘 중에 누구 하나는 거기에 얽매이고 누구 하나는 미쳐버리라며 준 그 쓸모 많은 검."
'왕자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셔서 제가 참기는 했습니다만. 조금 이상해서 말입니다.'
'무엇이 말입니까.'
'왕자님의 형님 되시는 부군단장님께서 가지고 다니시는 검 말입니다.'
'네. 얘기해요.'
'제가 슬쩍 얼려보려고······ 왕자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그 검을 또 부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잠시 살펴보기만 한 겁니다.'
'그래서.'
"미래를 보지도 못하고 마법 너머의 것을 꿰뚫지도 못하고 그저 기억만 가진 네가 그 검을 대체 어디서 어떻게 가져왔을까. 내가 생각을 해 봤어."
'성질이 다릅니다.'
'다르다니.'
'말 그대로입니다. 부군단장님 되시는 저하의 두 검의 재료가 같지 않습니다.'
마나를 모았다.
오러를 담았다. 또 한 번 검을 들어올렸다.
어둠 대신 별을 모아 담아놓은 듯한 그 검.
굳이, 베른을 떠올리게 할 색을 지닌 그 검.
시나스타.
그것의 재료가 되었을 어머니 나무를 향해, 그 가지를 잘라내든 뿌리를 잘라내든 무엇 하나는 반드시 잘라낼 심산으로 검을 들었다.
- 우우우웅!
오러를 담아냈다.
온 힘을 다 담아냈다.
검을 들어을렸다.
마나를 움직였다. 어머니 나무의 몸집을 이룬 마나를 보았다. 그것의 흐름을 깨달았다. 나무를 지키고 선 거대한 마나를 읽어냈다.
그리고 그것을 가로챘다.
더는 어머니 나무를 보호하지 못하도록 뺏어들었다. 그리고 주저없이.
- 콰직!
자신의 붉은 검을 내리꽂았다.
- ······ 두근!
대지가 요동친다.
발밑이 출렁인다.
"너도 별로 대단치 않아."
다누를 향한 속삭임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