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장. 멍(7)
지나치다.
따지고 본다면 왕의 자리에 오르는 것에 있어 가장 지나친 능력을 지닌 것은 칼리안이 맞다. 맹금의 통찰과 뱀의 독을 모두 배웠으니, 그 능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면 칼리안은 절대로 아르피아의 붉은 융단 위를 걷지 못할 터였다.
만약 칼리안이 통찰과 독만 지니고 있었다면.
고작 그 두 가지만 가졌다면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칼리안은 다른 지나침을 더 지녔다. 혹여 언젠가 칼리안이 지닌 것들이 모두 드러난다 하더라도, 서툰 웃음 속에 적의를 숨길지언정 그의 앞을 가로막으려 들지는 못하게 만들어 줄 그런 지나침이 있었다.
'하여튼 제가 딱 들어맞는 별명을 드렸지 않습니까.'
'네, 스승님. 저도 마음에 듭니다. 고양이.'
맹수의 발톱을 벼려두었다.
그것을 감출 꽃을 타고났다.
언제든 숨겨지고 다시 언제든 드러나는 무력, 쌓아 둔 오러마저 숨겨지게 할 마법과 생을 놓치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게 할 검술을 익혔다. 그러나 그 서슬퍼런 발톱을 잊게 만들 새하얀 손가락과 새빨간 입술을 함께 지녔다.
그러니 칼리안은 괜찮았다.
지나쳐도 상관없었다. 붉은 융단 위에 선 폭군으로 살지언정 광장의 레니시타를 붉게 물들일 비운의 왕으로 죽을 일은 없었다.
- 아우님께서 바위 얘기를 하셨었는데.
그러나 플란츠는 아니었다.
- 바위 절벽에서 술 먹고 굴러 내려온 얘기 말씀이십니까.
- 말고. 내가,
- 그 일에 관심두시면 안 됩니다. 한참 혈기왕성한 시기시니 치기도 좀 부려보고 싶은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그래도 따라할 생각 접으셔야 합니다. 형님의 한참 창창하신 그 허리 동강납니다.
- ······말고, 라고.
- 제가 세크리티아에서 형님 허리 아껴드리려고 형님 허리 말고 나이프만 동강냈지 않습니까. 제가 그날 형님 허리 아껴드리느라 정말 애 많이 썼으니 제 노고를 봐서라도 직접 겪어보겠다 고집부리지 마시고 얌전히······.
- 야.
······ 뭐.
방금 전까지 멋지게 설명한 바로 그 검은 고양이가 잘 쥐여준 멋짐을 제 스스로 죄다 깎아먹고 있지만.
아무튼 플란츠는 가진 것이 지나쳐도 괜찮은 사람이 아니었다. 지나침이 알려져도 그저 조금 더 곤란하고 귀찮을 뿐 생에 지장이 생기지는 않을 칼리안과는 달랐다.
- 아니면 아리안느한테 시비걸었던 백작의 모가지 대신 정원 바위만 부쉈던 일을 말씀이신지. 아니. 그건 말씀 안 드렸던 것 같은데······. 아무튼 혹시 그 얘기 제가 언제 했었으면 형님 그것도 따라하시면 안됩니다.
- 안했어.
- 형님 주먹이 생각보다 아픈 주먹이기는 했습니다만 그래봐야 풀만 먹고 쑥쑥 자란 완두콩 주먹이라서요. 누구 모가지가 마음에 안드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다 창창하신 형님 손모가지 날아갑니다. 저한테 얘기하세요, 그냥.
- ······ 말고.
- 그것도 아니면 무슨 바위 말씀이십니까. 아, 고래 울음 들었다던 바닷가 바위 절벽 말씀이십니까. 궁금해도 형님은 못 들으십니다. 그런 소리 잡아내 듣기에는 형님 청력이 아직 미진하셔서.
- 계속 짖지.
- 갑자기 지난 얘기를 꺼내시는 것이, 과묵한 사람들끼리 바닷가에 모여있으려니 아무래도 무료하신 듯해서요. 멀리서나마 멍멍거리기라도 해드리는 게 아우 된 도리 아니겠습니까.
- 너. 좀.
- 그것도 아니면. 형님 똑똑한 것 들키셨습니까.
- 들켰어.
- 그래서 깎여나가게 생겼습니까.
- 그래.
- 누구에게요.
- 다누.
- 어쩌다가요.
- 어쩌다보니.
- 그래서. 제가 나무 뿌리 자르러 가야 합니까.
- 와.
- 배고픈데.
- ······ 생굴. 사줄 테니까.
- 네.
뚝!
- 당장 말고, 천천······ 칼리안.
- ······.
- ······ 야.
이렇게 된 일이다.
플란츠는 칼리안을 당장 부르려던 생각이 '없었었다'. 이 순간 휘트린에 생사가 오가는 놈들이 얼마나 많은지 잘 알면서 칼리안을 다시 엘프들의 도시로 불러올 생각같은 건 분명 없었었다. 없었던 게 맞다.
지나친 것 다 까발려져도 괜찮은 걔가 지나친 것 들키면 안 괜찮은 쟤 말을 끝까지 안 들었을 뿐이다.
- 호위기사 렌 경이 공작저로 찾아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린 영애가 전하를 뵈었다는군요.
- 네. 제가 아리안느에게 얘기를 전했었습니다.
- 사고가 생겼습니까.
- 네. 스승님도 위험해질 수 있을 사고입니다.
- 그보다······ 내 아드님께서 지금은 어디에 계실는지.
- 휘트린이요, 아버지.
생굴을 사줄 테니 뗄감 하나만 만들어 달라는 형의 부탁에 그만 신이 나서.
* * *
하피의 힘일 것이라 했다.
화염구를 흡수해 똑같이 뱉어내거나 실드를 무효화시키는 능력을 하피로부터 훔쳐 쓰게 되었으리라고, 아르센은 그렇게 말했다.
그 힘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3층 복도 끝, 5층 서재, 5층 침실, 지하 술창고, 총 네 곳으로 밀려들고 있습니다. 지하 창고 쪽은 마력탄으로 입구를 폭발시켜 막았으나 3층과 5층은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피해 상황은 어떠한가."
"3층에서 놈들과 가장 먼저 맞닥뜨린 마법사 두 명, 그 둘을 빼내오던 기사들 중 한 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바로 치유사님께 옮기고 마법사들을 모두 후방으로 배치했습니 다."
히나의 치유력은 문제없이 발현되었다.
발현되었을 뿐 아니라 그 이상의 일을 해냈다. 영주성을 다 감싸는 정도의 보호막을 구동시켰다. 그러고도 여력이 남아 중상자들을 치료했다.
마법사들의 마력 역시 문제 없었다. 마력탄을 포함한 마법 물품들도 제대로 작동했고 제온의 마법사들 역시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마법을 부렸다.
오로지 발칸의 마법사들만, 그리고 에우리아만 마법을 구현하지 못했다.
"비밀 통로를 계속 막아선다 해도 인원이 적으면 우리가 결국 밀린다. 쓸데없이 목숨 내 줄 필요 없으니 조금씩 후퇴한다."
"네, 부군단장님."
소란한 가운데 생각을 했다.
사일런트 따위조차 쓰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필사적으로 생각을 했다. 하피라는 몬스터에 대한 온갖 지식을 다 꺼내오며 생각을 했다.
"마력탄은 작동을 한다는 말이 맞나."
"네. 맞습니다, 부군단장님. 확인했습니다."
"영주성 무기 창고에 마력탄이 있으니, 4사단 1, 2분대 마법사들은 마력탄을 가져다 서관 통로에 설치하도록."
사단 밑에 여단도 아니고 연대며 대중 소대며 죄다 빼먹고 왜 갑자기 열명짜리 분대가 나오는 거지.
인원과 상관없이 처음부터 군단이라 명명해야 향후 몸집을 부풀려도 귀족들의 반발이 없다 했던 칼리안의 계획을 알지 못한 까닭에 입이 근질근질했으나, 그 궁금증을 죄다 접어두고 닥치는대로 생각부터 했다.
"층이 나뉘어 있으면 제대로 대응하기 어렵다. 서서히 후퇴하며 서관 통로 지나친 뒤에 마력탄을 터뜨리고, 통로 막힌 놈들이 밖으로 돌아서 접근하는 동안 서관 봉쇄하고 대기한다."
"네, 부군단장님."
"서관 봉쇄 작업에는 기사들을 투입하지 않는다. 전원 전투에 나선다. 마법 무기를 쓰는 마법사들은 훈련한대로 나서고 활 훈련을 받았으면 활을 꺼내라. 전투 불가능한 마법사들은 서관으로 가 봉쇄작업 준비하면 된다."
"알겠습니다."
상황이 바삐 돌아갔다.
오래지 않아 영주성 전체가 흔들릴 정도의 폭발과 함께 서관이 봉쇄됐다.
통로가 막혀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한 제온의 군사들이 밖으로 나가 영주성의 외벽을 두드려대기 시작했다.
그 뒤 모든 마법사가 자리에 앉았다.
어떻게든 마법을 발현하고자 기를 썼다.
그 사이 계속하여 생각을 했다.
결국 이렇게 마법을 부리지 못하는 채로 전투가 끝나버리면 자신있게 도와주겠노라 했던 마법사 협회장의 면이 서질 않아서, 에우리아라면 해결 방법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다 했던 부군단장 꼬맹이의 부탁을 저버리기는 싫어서, 아델리아도 아니고 저딴 늑대들의 앞에서 꼬리를 말고 물러나자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 ······ 파직!
마법을 되찾기로 했다.
다만 칼리안이 그러하듯 마나의 흐름을 가로채는 저들의 마나를 다시 갈취하지는 못했다. 오러가 담긴 마나의 형태와 방향과 크기를 항상 자유자재로 변화시키며 싸우는 칼리안과 에우리아는 달랐으니 말이다.
제가 원하는 방향과 형태로 칼을 휘두르기 위해서, 자연의 마나를 별다른 계산없이 움직일 줄 아는 히나와 유사한 능력을 깨우쳤다는 것도 모르는 둔한 칼리안과 같을 수는 없지 않겠나. 에우리아는 '서른 개의 얼음창을 제각각의 방향으로 회전시키려면 서른 개의 마법 계산을 완성해야 하는' 아르센 혹은 다른 여느 마법사들과 같았으니까.
때문에 마법을 무효화시키려는 마나의 흐름을 읽고 그것을 끊어내지는 못했다. 대신.
"문 여십시오."
실드를 두르든 화염구를 내쏘든 물을 차올리고 번개를 부리든, 외부에 마력을 결집시키던 기존의 마법 발현 방식을 때려쳤다.
마력탄이 터지지 않나.
애초부터 완성된 계산식의 마법은 그대로 발현이 되지 않나.
그래서 이미 완성된 마법을 제 몸 속에 만들어냈다. 물 구슬 안에 전기를 집약시킨 이중 속성의 그 마법을 구현했다. 해로울 것 하나 없을 크기의 작고 작은 물방울 속에 더 작은 전기를 담은 것들을 수도없이 만들어내 몸 밖으로 빼냈다. 그것을 모아 손에 쥐었다.
- 파지직, 파직!
그렇게 만들어낸 전기 다발을, 제 마법의 힘에 감전되어 죽지 않고 잘 살아났음을 자축하는 것같은 전기 뭉치를 꽃처럼 손에 든 채로 일어났다.
"역시."
수많은 말을 딱 두 글자 안에 담은 아르센이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마법사들을 등 뒤에 둔 채 언제 부서질지 모를 외벽의 앞을 지키고 서 있던 기사들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베른 경."
끄덕.
자리에서 일어난 히나가 에우리아의 곁으로 와 섰다. 아르센이 말을 이었다.
"마법사는 대기한다. 베른 경이 우리 마법에 장난치는 놈들을 찾아내면 세이렌 경이 없앨 테니, 그 뒤부터는 놈들을 날려버리든 태워버리든 마음껏 싸운다."
"알겠습니다!"
"놈들 대부분은 대사막의 전사들이다. 겪어봐서 알겠지만 강하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봐야 모래바닥 뒹굴던 칼잡이들이다. 제깟 놈들이 발칸의 기사 나부랭이를 어떻게 이기겠나."
"맞습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중간에 군단장님 오시면 우리 공로 다 뺏긴다. 오시기 전에 끝내야 급여 올라간다. 알았나?"
"잘 압니다!"
잠깐 말을 멈췄던 아르센이 씩 웃었다.
"사냥 가자."
함께 웃은 기사들이 서둘러 움직였다.
놈들이 가로막고 있던 문의 잠금쇠 뿐 아니라 고정쇠까지 아예 다 풀어버렸다. 그리고 그 두터운 철문을 놈들 쪽으로 밀어버렸다.
- 끼기긱······ 쿠웅!
거대한 철문이 굉음을 내며 쓰러진다.
철문 근처에 서 있던 제온의 놈들이 저도 모르게 발을 물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빈 공간으로 발칸의 기사들이 쏟아져나갔다.
- 파지직!
- 슈우우욱!
한 번 방법을 터득했는데 응용이 어려을까.
눈에 보이지도 않을 미세한 크기로 만들어낸 어마어마한 전기가 에우리아의 손 끝에 다시 뭉쳤다. 한 곳에서 뭉친 뒤 곧장 쏘아지도록 구현한 마법이 전사들을 향해 날아갔다.
- 콰직!
발칸의 기사에게 내리떨어지던 어느 전사의 검이 부서졌다. 그럼에도 전기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검을 쥔 놈의 손을 타고 올라가 전신을 휘감았다. 발칸의 반격을 막기 위해 모여든 다른 놈들에게로 줄기줄기 전도되어 순식간에 더 큰 빈공간을 만들어냈다.
그 사이로 두 번째 기사들이 나섰다.
치고 들어오는 공격을 막아낸 기사의 등 뒤에서 다른 기사의 검이 뻗어나와 전사를 꿰뚫는다. 그 검을 뽑아드는 사이 첫 번째 기사의 검이 다음 전사의 목을 내리친다. 휘두르는 검격을 방어하느라 만들어진 빈 공간을 노리면, 어느새 날아든 마법사의 화살이 놈의 손을 꿰뚫는다.
- 파직, 파지직!
- 촤아아악!
- 파지지직!
붉디붉은 가짜 오러 위에 스파크가 인다.
눈이 멀 듯한 보랏빛의 전기가 놈의 명치를 꿰뚫고 몸 속을 헤집었다. 함께 뻗어나간 물의 화살이 공중에서 폭발하며 비를 내리면, 어느새 다시 도달한 전기의 창이 모두의 몸 속으로 함께 치밀었다.
- 파직······!
하늘에 수증기를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잔뜩 운집된 먹구름 속에 전기를 충돌시키지 못한다. 번개를, 벼락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 촤악!
- 파지직!
그래도 에우리아다.
- 부우응!
- 터엉, 콰직!
그런 에우리아의 공격에 주춤거리던 놈의 심장으로 묵직한 검이 내리꽂혔다. 기사의 목을 노리는 누군가의 검을 그대로 부서뜨린 뒤 놈의 허리까지 박살을 냈다.
기다리지 않고 뻗어나간 다음 공격에 또 다른 전사의 심장이 으스러진다. 붉은 오러를 막아낸 무거운 은빛 검에 늑대의 선혈이 맺힌다.
- 부우웅!
- 카각, 콰직!
드미레아였다.
이제껏 히나의 옆을 지키느라 싸움에 오래 나서지 못하던 드미레아가 발을 박찼다.
검은 빛의 사슬 갑옷 하나만 걸친 몸이 바닥을 깊이 울리며 착지했다. 그 뒤에야 뽑아드는 검의 끝에는 여지없이 찢겨나간 또 한 명의 심장이 닿아 있었다.
- 저기, 자주색 머리 기사 뒤에 숨은 사람이요. 저 사람의 심장 속에 든 돌이 유난히 작아요.
드디어 찾아냈구나.
히나의 구슬을 손에 쥐고 있던 에우리아가 싱긋 웃었다.
"방심하지 마라! 전열을 살펴라!"
제온의 군사들에게 절대로 포위되지 않도록, 영주성의 외벽을 등진 전열이 절대로 흩어지지 않도록, 비어있는 곳에 기사들을 이동시키고 전열에서 멀어진 이들을 되돌리는 아르센의 목소리가 끝없이 이어진다.
활에도 익숙하지 않은 마법사들이 일순간도 쉬지 않고 화살을 나르는 소리. 마력탄이 폭발하는 굉음. 크고 작은 부상자를 옮기는 이들의 고함.
귀를 뒤흔드는 그 수많은 긴박함을 가로지르며,
- 쌔애애액!
서슬퍼런 전기의 화살이 빛과 같이 날아갔다.
에우리아의 시선을 느끼고 마법사를 막아서던 전사의 미간과 심장에 세 발의 화살이 날아와 꽂힌다. 마법사 쪽으로 몸을 날리려던 또 다른 전사의 발목에 기사의 검이 박히고, 휘청이는 놈의 목에 깊은 검흔이 생겨난다.
- 저기, 빨간색 긴 머리. 저 끝에 파란색 땋은 머리. 맨 오른쪽에 회색 머리. 그 옆에 있는 갈색 긴 머리.
"잘 찾네."
- 쌔애액, 쌔애애액!
- 쌔애애애액!
다섯 발의 화살이 날아간다.
- 콰직!
- 카드드득! 콰지직!
목표를 향해 치닫는다.
- ······ 쿠웅!
제각각의 표적에게 적중했다.
사람의 몸이 바닥에 닿는 둔중한 소리가 다섯 번을 울린다.
그것은 곧.
- 우웅······.
"실드! 실드를 펼쳐라!"
- 우우웅, 우웅!
- 쿠구구궁······ 쿠궁!
"대형을 정비한다!"
- 우웅! 우우우웅!
그것은 곧.
싸움의 종결을 알리는 소리였다.
* * *
슬레이만 때문이다.
슬레이만의 수다가 조금이라도 짧았으면 대륙에서 유일한 8서클 마법사가
'전투 다 끝나고 도망치는 몇몇 놈들을 한데 묶어 질질 끌고 오는' 잡다한 일이나 하진 않았을 터였다.
- 와.
- 배고픈데
- ······ 생굴. 사 줄 테니까.
- 네.
별장의 뒷정리를 시오나에게 맡기고 달려왔으면서도, 앞을 가로막은 것이 히나의 방어막임을 알아보고 영주성에 강제로 들어오지 못하던 칼리안.
때문에 방어막이 열리기만을 하릴없이 기다리다 플란츠와 대화를 나누던 그 칼리안이, 전투가 끝나고 방어막이 해제된 직후 혼절해 쓰러진 히나를 발견하는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터였다.
생굴 말고 히나 때문에 눈이 뒤집힌 칼리안이 긴 웃음을 흘릴 일도 없을 터였다.
- 그보다······ 내 아드님께서 지금은 어디에 계실는지.
- 휘트린이요, 아버지.
- 알겠습니다.
- 오셔서. 저 좀 말려주세요.
- ······ 그리하지요.
- 빨리.
청은색의 긴 머리를 너울거리던 짐승 같은 왕자가 이런 부탁을 할 필요는 없었을 터였다.
슬레이만의 수다가 조금이라도 짧았다면, 그래서 앨런이 제 때 왕궁에 돌아와 있었다면, 칼리안이 조금이라도 빨리 휘트린으로 돌아오고 그 사이 앨런이 한 발 빨리 영주성으로 가볼 수 있었다면.
그런 일들은 절대로 벌어지지 않았으리라.
그러니 모든 일들이 다 슬레이만 때문이다.
"큰 이상은 없다 하니 걱정 마십시오. 다른 부상자들 역시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 합니다. 심려 말고 우선은 그저 백으로 오백을 이긴 것을 기뻐만 하시지요."
전부 다 슬레이만 때문이니 혹시라도 다른 것을 탓하지는 말아라. 상황이 종결된 뒤에야 도착한 면목없는 군단장 앨런 마나실은 그런 말로 3왕자를 다독였다.
만약 그 자리에서 누구 하나라도 '제온'이라는 이름을 거론한다면, 사람들의 기억에도 제대로 남지 못할 청은발의 남자 한 명이 텐실의 공작가를 다 무너뜨리든 시스파니안의 둥지로 찾아가 세렌티의 알을 부서뜨리든 할 것이 분명하여서.
칼리안은 절대로 걷고 싶어 하지 않을 그 길을 선택할 것이 분명하여서. 그래서 그냥 슬레이만을 탓하고 말았다.
"엘프들의 도시로 가겠습니다."
그리고 칼리안은 이렇게 대답했다.
도착해서 무엇을 하려느냐,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 앨런이 칼리안의 어깨를 붙들었다. 눈앞에 벌어진 상황 앞에서 칼리안을 골라내어 엘프들의 도시 입구에 가져다 놨다. 그리고 곧바로 휘트린으로 돌아갔다.
그곳에 다시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이번에는 군단장이 함께 있어야 했으니까.
- 저벅.
그렇게 앨런이 떠나고 혼자 남겨진 칼리안이 한 발을 내딛었다.
"귀 한 쪽. 팔 한 짝. 폐 하나."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멀리 보이는 어머니 나무의 거대한 형체를 향해 이어졌다.
"우리히나 엄마 한명."
- 저벅.
발을 옮겼다.
천천히.
"받으러 왔어,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새기며 걸었다.
그 화풀이를 대신 받아도 충분히 괜찮을 나무를 향해 걸어갔다.
"멍멍······ 하고."
낮은 읊조림이 다시 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