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85화 (486/527)

제85장. 멍(6)

제대로 아물지 못한 상처는 흉터를 남긴다.

그래서 빠짐없이 치료를 했다. 흉터가 생기면 기억이 함께 남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흉이 된 상처가 좋은 기억으로 남기는 어려우니 말이다.

때문에 분주히 오가며 계속하여 치료를 하던 히나가 아르센에게로 다가왔다. 그 모습을 본 아르센은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 었다.

"괜찮네. 나는 그냥 멍만 들었네."

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당장 덧날 일도 흉이 질 일도 없다는 그 상처를 더 확인하지 않고 팔을 내렸다. 치료를 하지 않더라도 상처는 꼭 확인해보던 평소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 었다.

"고생했네. 이제 좀 쉬게, 베른 경."

그나마 잘린 것이 오른팔이라 '두 다리도 멀쩡한데다 왼손잡이이기까지 한 자신은 특별히 불편할 것이 없다' 말하던 기사 한 명, 폐를 관통당해 피 거품을 뱉어내며 질식해가던 마법사 한 명, '부군단장님들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었는데 하나만 남아서 못 흘려보내겠다' 아쉬워하는 또 다른 마법사 한 명.

팔과 폐와 얼굴을 깊이 다친 그 셋을 동시에 살려내느라 이미 지쳤던 까닭이다.

"아직 싸움이 끝난 것도 아니지 않나, 그러니 힘을 아껴두게."

게다가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 아르센은 영주성 내부로 진입하려 무던히도 애쓰고 있는 제온의 군사들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한참 전부터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에우리아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고 있엇다.

하기사.

그럴 수밖에.

'내성 밖으로 찾아든 병력이 이백, 내성 안으로 잠입해 나타난 병력이 삼백입니다.'

삼백이 쳐들어왔는데 천하의 에우리아가 저놈들 중 단 한 명도 죽이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으니.

'총 오백의 군사로 확인됩니다.'

휘트린 영주성의 가장 깊은 곳에서 소리없이 들이닥친 놈들이 무려 삼백이었다. 영주성에 마련된 여섯 곳의 비밀통로 중 일방으로만 통과할 수 있는 두 곳을 제외한 나머지 네 개의 통로로 삼백의 군사들이 밀고 들어왔다. 거기에 더해 외부에서는 또 이백의 군사가 내성을 포위했다.

별장에 있던 시오나는 외부의 이백만 확인했으나 실제로는 영주성 안팎으로 총 오백의 병사가 찾아든 것이었다. 휘트린의 정찰대로부터는 아무런 말이 전해지지 않았음에도.

마나의 발현이 차단된 까닭에 마력을 펼쳐 주변을 살피는 것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나마 드미레아와 발칸의 기사들이 낯선 기운들을 느껴 대비하지 않았다면 이번에는 정말로 죽은 놈이 나올 뻔했다.

문제는 그 뿐이 아니었다.

'안으로 들어온 이들의 기운이 심상치 않습니다.'

'네. 소공작님. 늑대들의 냄새가 납니다.'

내성을 둘러싼 이백은 그나마 상대하기 어렵지 않을 놈들이었다. 그러나 비밀 통로를 통해 들이닥친 놈들은 아니었다. 검을 든 놈들은 대부분 대사막의 전사였다. 빠르고, 강하고, 가짜 오러를 쓴다.

그에 비해 발칸의 병력은 반토막이었다.

아니, 그 이상의 손실이었다.

'부군단장님도 마법 발현이 안 되십니까······?'

'다르지 않네.'

마법사들이 마법을 쓰지 못했다.

오로지 기사들을 데리고 전투를 이끌어야 했다.

그런 침입을 알았을지, 아니면 도왔을지. 휘트린은 아무 말도 없이 입만 꾹 다물고 있었다. 단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눈도 뜨지 않은 채 그저 숨만 쉬며 앉아있었다.

- 쿠웅······.

아르센이 그런 휘트린에게서 시선을 막 떼었을 때,

- 콰아앙!

- 콰아아앙!

굉음이 울리며 온 성이 진동했다. 성내의 좁은 통로를 막고 버틴 발칸의 기사들에게 밀려 결국 성 밖으로 물러났던 놈들이 다시 진입하겠다며 외벽을 두드려대는 소리일 터였다.

아르센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르센의 멍을 치료하지 않고 돌아갔음에도 조금 전보다 더 창백해진 얼굴의 히나가 눈에 보였다.

그 역시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보호막을 해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별장으로 이미 이백이 갔습니다, 소공작님. 보호막을 해제하면 성밖의 이들이 전부 다 별장 쪽으로 몰립니다."

영주성을 다 감싼 보호막.

그 엄청난 힘은 휘트린의 것이 아니었으니.

그러니까 조금 전.

싸움에 앞서 나비아와 휘트린을 지하 감옥에서 꺼냈다. 그 과정에서 휘트린이 저 보호막을 구동했다. 칼리안을 납치했을 때 펼쳤던 바로 그것이었다. 다누로부터 버림을 받았으니 이렇게 버티다 제온의 편에 서고자 한 것일 터였다.

"레이즈 경."

"네, 부군단장님."

휘트린을 일단 두기로 결정한 아르센이 명령을 전했다.

"기사들을 데리고 내성벽을 돌아 이동해 내성 밖의 이백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다. 놈들이 내부의 삼백과 뭉치지 않도록 해야 하니."

그렇게 되면 저들이 별장 쪽으로 갈 겁니다.

이런 생각에, 레이즈라 불린 이가 아주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을 미리 예상했다는 듯 아르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별장에도 대원들이 있고 브리지트 경도 있다. 그러니 분명 건물 안으로 들어가 수비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정도는 별장에 함께 있는 힐 경이 충분히 막을 수 있다."

"네. 알겠습니다."

발칸의 기사는 일흔이다.

일흔 명으로 삼백의 전사를 피해없이 막지는 못할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아르센은 그렇게 말했고 레이즈라 불린 기사는 수긍했다. 별장 쪽 의 상황은 걱정했을지언정 당장 일흔으로 삼백을 막아야 하는 상황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 사이 어떻게든 마법을 되돌리겠거니, 둘 모두 그리 믿고 내린 최선의 결정이었다.

- 중간을 막으면, 별장의 사람들도, 저희도, 무사한 것 맞죠.

그런데 이렇게 히나가 나섰다.

아르센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가만히 걸어나온 히나가, 얼굴을 보지 않으려 했던 휘트린의 앞에 나섰다.

그리고 팔을 뻗어 방어막 위에 손바닥을 댔다.

- 우웅······!

히나의 힘은 스스로의 마력도 오러도 필요없지 않았던가. 때문에 힘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만 알게 되면 곧잘 따라하던 히나가 아닌가.

히나의 능력은 고작 동전 한 닢짜리가 아니었으니까.

- 우우웅······ 우웅!

히나의 손 끝에서 흔들흔들, 휘트린의 것과 완전히 같은 빛무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이 몇 번을 얽히려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밧줄을 꼬듯 서로 엉키다 스러지기를 계속하던 그 빛이 잠시 뒤 조금씩 형체를 갖췄다. 천천히 단단해졌다.

둥글게 벌어졌다.

그리고.

- 파아아앗!

에우리아조차 깨뜨리지 못했던 방어막을 세워냈다. 그런 것을 만들어냈다.

그 모습을 보던 휘트린의 방어막이 서서히 빛을 잃었다. 히나가 꺼뜨린 것은 아니었다. 휘트린이 스스로 해제한 것이었다.

고개를 돌려 휘트린을 보던 히나가 가만가만 손을 움직였다.

- 당신의 능력이 특별하지 않았네요. 당신이 남긴 상처도 크지 않았었는데.

흉터조차 되지 않을 그냥 작은 멍. 고작 그 정도의 상처만 남긴 '어머니'의 능력 역시 별다른 쓸모가 없었노라고,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휘트린이 '필요없다 ' 했던 그 말을 다시 전했다. 그 어느 것보다 더 휘황한 빛의 방어막을 펼쳐내면서.

- 우우웅!

제온의 전사들 앞에 발칸의 기사들을 세우지 않으려 히나가 만들어 낸 기적이었다. 삼백과 이백을 나누는 그 자리에 기사들 대신 방어막을 세워 기사들을 전부 다 살려냈다.

이백의 군사를 등 뒤에 두고 삼백에 맞서는 대신 발칸의 마법사들만 지키면 되도록, 영주성 건물 밖으로 제온의 군사들을 내보내기만 하면 되도록 만들었다.

그 사이 마법사들이 마법을 회복할 방법을 강구할 시간을 벌었다. 그 모두를 히나가 했다.

- 쿠구궁······!

방어막에 가려 보여지지 않는 별장을 살피는 대신 발칸의 대원들을 다시 나눈 아르센이 성내 곳곳에 대원들을 배치했다. 부상자를 열외시키고 성내에 마련되어 있던 마력탄을 이곳저곳에 숨겼다.

- 쿠궁······ 쿠궁!

다시 한 번 성이 울린다.

마력탄처럼, 애초부터 마법이 깃들어 있던 두터운 문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저 문이 뚫리면 다시 시작될 터였다. 그저 밀어내기만 하고 끝나는 싸움이 아니라 진짜 싸움, 하나가 죽어야 하나가 사는 그런 싸움이 시작될 것이었다.

아르센이 큰 숨을 들이쉬었다.

마법을 잃은 마법사임을 애써 잊고서, 검을 잃은 기사보다 더 허망해진 기분을 굳이 미뤄두고서. 스스로는 한 명의 마법사가 아닌 부군단장임을 계속하여 되새기면서.

그러니 잘못 판단하지도, 잘못 말하지도, 잘못 나서지도 않아야 한다 끊임없이 다짐하면서.

"그럼에도 힘들다면 휘트린을 내 줄 생각이다. 우리 목숨 내어 줄 만큼 귀한 죄인 아니다. 후퇴 명령 떨어지면 주저없이 된다."

"네, 알겠습니다!"

그 뒤 이렇게 가장 중요한 명령을 마지막으로 전했을 그 때.

- 저벅.

"헤르츠 부군단장님."

아주 오래도록 들어왔던 낯익은 목소리가 아주 낯선 호칭으로 아르센을 불렸다.

고개를 돌린 아르센이 놀란 얼굴을 했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에우리아였다.

"문 여십시오."

마법을 다시 익힌 기분으로, 그렇게 다시 태어나는 기분으로, 모두의 앞에 선 에우리아가 발을 내딛었다.

"다 죽여버릴 테니까."

- 파지직, 파직!

보랏빛의 장미 다발 같은 전기 뭉치를 온 손에 움켜쥔 채로.

* * *

칼리안이, 내 동생이 그랬다.

'형님 똑똑하신 건 저만 알면 됩니다.'

어디서든 머리 좋은 티를 너무 내지는 말라고.

그렇게 말했었다.

'그러니까 적당히 숨기세요. 최소한 제가 카밀리아에 가고 형님께서 브리센의 가주 자리에 오르실 때까지는 숨기셔야 합니다. 그게 늦다면 형님이 검의 길에 오르실 때까지만이라도요. 안 그러면,'

'죽는다고. 또 그런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네. 지나치게 도드라진 바위는 어떻게든 깎여나가는 법입니다.'

'알았어.'

'특히 에반 브리센 후작 앞에서는 조심하셔야 합니다. 후작에게 있어 형님은, 제 이득이 되는 일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나를 도구로 보니까.'

'······ 그런 말을 하려는 건 아니었는데요.'

'어차피 같은 의미인데. 굳이 돌려 말할 필요가 있나.'

'그렇다 해도요.'

'익숙해.'

'그런 것에 익숙해하지 마십시오.'

'상관없지 않나.'

'뭐가요.'

'어차피······.'

에반이 죽기 얼마 전, 그런 대화를 나눴었다.

자칫하면 너 죽는다는 소리는 돌려 말할 줄 모르면서 네 조부에게 있어 너는 그냥 도구일 뿐이라는 말은 어떻게든 달리 전하던 칼리안이 그리 말했다. 지나치게 도드라진 바위는 어떻게든 깎여나가는 법이라고.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방법으로든.

지나친 뛰어남은 결국 어떻게든 독이 된다고.

"방법을 알려준 뒤에 내보내겠다니."

그 '어떻게든'의 의미를 이렇게 깨닫게 될 줄은 몰랐다. 에반이 죽고 그레이가 후작위에 오르고 이제는 에반도 그레이도 아닌 라시드 브리센을 가장 경계해야 할 상황이 되었는데 그때 했던 이야기를 이제야 몸소 깨닫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나.

"알려주지 못하거나 알려주지 않으면 안 내보내겠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그렇게 말한 것이 맞다."

머릿속으로 들려오던 목소리가 어느새 귀로 스민다.

빛에 잠겨 감았던 눈을 뜨니 발치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어린 엘프가 보였다.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에 게 전해들은, 시스파니안에게 '비아다누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던 바로 그 엘프인 듯했다.

저것이 다누인가.

참 우스운 일이다.

칼리안이 처음 만난 엘프와 아주 많이 닮았다던 저 모습이 우습다. 분명이 땅의 어떤 엘프보다 노쇠할진대 저렇게나 어린 이의 형상을 취하고 있음이. 그 어리숙함이. 천고를 지내왔으나 조금도 자라지 못한 어리석음이.

- 스르륵.

그 엘프, 다누가 한 걸음을 다가왔다. 어디까지나 다누의 입장이겠으나 어찌됐건 악의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을 얼굴을 한 채 입을 열었다.

"그것이 내가 생각한 해결책이다."

"······ 어쩐지 순순히 숲의 길을 내어준다 했더니."

칼리안을 보낸 뒤 이런 수작을 부릴 생각을 한 모양이다. 자칫하면 멍멍거리는 검은 고양이를 영영 풀어놓게 생겼다. 거기에 더해 루시와 안네도 못 만나게 될 상황이 되어 버렸다.

예전 같았으면 바깥 공기를 못 쐬게 되는 일에 대해 크게 상심하지 않았겠으나 이제는 아니었다. 루시와 안네의 엉덩이만 하릴없이 구경하다 물러나는 일을 또 겪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휘트린 쪽에 일이 생겼습니다.'

'무슨 일.'

'잠시만······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인데.'

'우선 스승님께 연락을 드려 보고 안되면,'

'칼리안.'

'그때는 다누를 만나서 숲의 길을······.'

'칼리안.'

'······ 네.'

'묻잖아.'

제 사람이 사고에 연루되면 무조건 바다로 고꾸라지는 동생 놈을 다시 돌아오라 말하고 싶은 생각도 물론 없었었다.

'제온이 영주성을 두고 별장을 공격했다고 합니다.'

'별장을, 왜.'

'자세히는 모릅니다.'

'······ 내가 그 쪽으로 시종들을 보내뒀는데.'

'형님 탓은 아니에요. 아닙니다. 헤르츠 경도 같은 생각을 했으니 그대로 진행했을 테고 저였어도 같았을 겁니다. 다만 지금 상황이 좋지 않다 하니 우선은 제가 가봐야 되겠습니다.'

어찌됐건 당장 다누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은 아니지 않나. 그러니 칼리안을 부르더라도 조금 더 뒤에, 놈이 살리러 간 목숨을 제대로 다 살려놓은 뒤에. 그래서 이 일을 전해들어도 바닷속에 처박히지 않을 만큼은 될 때 연락을 하는 편이 낫겠다 여겼었다.

"그러니 알려달라. 나에게."

다누의 말이 다시 들린다.

"내가 어떻게. 왜."

"너는 그것을 알 수 있다 하였다. 너는 그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막을 생각이라 하였다. 나는 너와 생각이 같다, 그리하여 나는 너를 돕기로 하였다."

"당장 알아내겠다고도 안 했고 네가 필요하다고도 한 적 없는데."

"네 필요는 나에게 불필요하다. 너는 가능하다 하였다. 그러니 나는 알고자 한다."

아.

데블란같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입니다. 레이븐도 못 먹어요.'

한 자리에 못박힌 생명의 편협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칼리안이 왜 그렇게 많은 것들을 보여주고 알려주려 하는지 제대로 알 것 같다.

시스파니안이 엘프의 도시를 공격한 것이 맞고 아르나이젤이 다누를 죽인 것이 맞다면, 그 이유는 분명 속이 터져서일 거다. 경우의 수고 변수고 계산이고 뭐고 따져볼 필요도 없다. 장담할 수 있다. 제 생각에 갇혀 나올 생각이 없는 저 놈과 소통이 안 되니까 짜증나서 그냥 죽여버린 걸 거다.

이해된다.

"다누."

시스파니안은 말씀이 짧았고.

아르나이젤은 기억이 짧았고.

비아다누르는 생각이 짧은데.

언젠가 만나기는 할 것 같은 대사막의 용 실레스티안이나 또 다른 용족은, 혹은 세렌티는. 도대체 뭐가 짧을 작정인지 벌써부터 암담하다.

"얘기했을 텐데. 방해하지 말라고."

"나는 너희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과는 다르다."

"뭐가 다른데."

"너는 나에게 나의 모순을 알려주었고 나는 동의하였다. 하여 달리 행동하겠다는 것이다."

"내 생각을 네 것처럼 이용해서."

"그러하다."

"세계가 무너지고 시간이 돌아가는 일을 막기 위해서, 네 그런 행동이 필요하다 여기는 건가. 네가 나서야 할 필요가 있다 여기는 건가."

다누가 입을 열었다.

이 역시 '그러하다'는 말을 할 것이 분명하여서, 플란츠는 소용없는 답을 듣는 대신 다시 한 번 입술을 틀어올렸다.

"내 동생이, 고쳐야 할 놈은 없는 편이 안전하다고 그러셨는데. 정작 내 동생은 말도 고치고 새도 고치고······ 나도 고쳐놓고 내 위층에 사는 사람도 고쳐가며 잘 지내시기에 그 말씀을 안 믿었었는데."

"이 상황에 필요치 않은 말이다."

"확실히 내 동생의 말은 틀린 것이 없는 듯하군."

다누의 모습이 한 걸음 가까워졌다.

다누가 가까이 온 것인지 아니면 플란츠 자신을 당긴 것인지 가늠이 안됐다. 빛도 어둠도 들지 않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 단 둘이 있다 보니 거리 감각이 사라져버렸다.

"묻겠다. 다누."

그런 주변의 모습에 신경쓰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 일이 반복되기 위해 네가 사라져야 한다면. 그래서 시스파니안이 이곳을 공격하고 아르나이젤이 너를 죽였다 하면. 네 불필요함을 받아들이고 사라지는 것만이 그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단 하나의 조건이라 한다면. 어쩔 건데."

또 하나의 모순을 다누에게 건넸다.

시스파니안조차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으니 다누는 절대로 깨우치지 못할 모순이라는 것을 하나 더 만들어 알려줬다.

"네가 좋아하는 그 말대로 너는. 순응하겠나. 불응하겠나."

우르릉, 하고.

발 밑이 흔들린다.

동요하는 것일지. 화가 나 그런 것일지. 혹은 다른 이유일지.

"그것 하나 대답 못하는 멍청한 새끼가, 감히 누굴 속박하고 멋대로 이용하려 들어."

더는 관심없었다.

궁금해 할 필요도 없었다.

"······ 뒤질라고."

- 콰아아아앙!

'그런 것에 익숙해하지 마십시오.'

'상관없지 않나.'

'뭐가요.'

'어차피······.'

그래.

목줄 풀린 내 동생 왔다.

'아우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살려주실 텐데.'

더는 이딴 상황에 익숙해지고 싶지 않게 된 형 살려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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