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장. 멍(5)
강아지를 키우겠노라 했던 그 즈음일 터였다.
"별장이라며. 여긴 밀밭인데. 에일라."
"그래서 내가 아직은, 이라고 했잖아요."
"외출 통보일 줄은 몰랐지."
"안에만 있기 답답했어. 근데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요?"
"기억이 났어."
"비밀 통로 출구가?"
"아니. 별장에 비밀 통로를 만들어두려고 했던 일."
정확히 떠올려보지는 않았다.
하나하나 빠짐없이 살펴보기에는 너무 짧았던 생이라서. 이미 너무 많은 기억들을 열어 본 뒤라서. 그래서 그냥 잠깐만 떠올려보고 말았다.
소소한 일까지 세세히 기억해내다가는, 먼 훗날 검은 머리 사이사이에 흰 머리가 나기 시작할 언젠가에는 새로이 떠오르는 반가운 일들이 남아있질 않을 것 같아서 살짝만 스치듯 보고 다시 닫아 두었다.
'있잖아, 얀.'
'네. 왕자님. 말씀하십시오.'
그래서 언제 나눈 이야기인지까지는 떠올려내지 못했다. 만화경 속에서 매번 바뀌는 신비로운 것들을 보는 대신 늘 같은 자리에서 빛을 낼 붉은 별을 꿈꾸고, 얀의 걱정에 지레 겁을 먹고 간섭하지 말라 화를 내기 한참 전이 아닐까.
그저 어리기만 해도 괜찮았기에 '그저 어리게만 굴었던' 어린 날. 따뜻할 것이 분명한 커다란 은색 개를 손끝으로 쓰다듬으며 나도 강아지를 키우겠노라 했던 어느 날. 그 즈음의 일이 아닐까 가늠해보기만 했다.
'나중에 나 말야. 나중에.'
'네, 왕자님.'
'아무 곳으로도 막혀있지 않은 데에 집을 지을 거야.'
물론 얀에게 묻는다면 기억을 뒤지지 않더라도 알려주겠지만 굳이 그 날의 일을 얀에게 물을 일은 앞으로 내내 없을 터였다.
'집을 짓고 싶으십니까?'
'응. 강아지를 길러도 괜찮은 집이어야 해. 체르밀 궁에서는 못 기르니까.'
'책에서 보셨다던 강아지 말씀이세요?'
'응. 그런 강아지를 키워도 되는 곳에 집을 짓고 살 거야.'
'잠시 쉬시는 게 아니라 사시는 거예요?'
'응. 왕궁에는 란델 형님이나 플란츠 형님이 계시게 될 거래. 그러니까 나는 새 집을 지어야 해.'
몰라서 한 말이 아니었다.
후궁의 아들이라서 가장 먼저 내쳐지게 되리라는 말을 들어왔다. 지금이라면 얀이 두 귀를 손으로 막아서라도 소리를 가려줬겠으나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그리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 많은 말들을 어떻게든 들었다.
때문에 모르지 않았다. 그렇게 내쳐진다면 탑에 가거나 광장에 서리라는 것을 이미 알았다.
'······그럼 호수 말고 잔디밭이 넓은 집을 지어야 되겠네요.'
'강아지들은 수영보다 뛰어노는 것을 더 좋아해?'
'네, 왕자님. 저희 집 강아지는 그래요.'
'보고싶다. 네 강아지.'
'나중에요, 왕자님. 성인식을 치르실 즈음이 되면 보실 수 있을 거예요.'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님을 얀도 알았다.
모르는 척 꺼내진 말에 모르는 척 장단을 맞춰줬다.
'그런데 집에는 잔디밭만 두실 거예요? 다른 것은 생각 안 해보셨어요?'
'아니야. 하나 더 있어. 비밀 통로도 만들 거야.'
'비밀 통로를······ 말씀이십니까?'
'응. 체르밀 궁에도 있잖아. 그걸 내 집에도 만들어 두는 거야. 책에서 봤는데 먼 여행을 떠날 때에는 사람들이 꼭 비밀 통로로 나가. 그러니까 나도 만들 거야.'
만약 탑에도 광장에도 가지 않게 된다면, 그래서 먼 곳에서 다시 살게 된다면, 반드시 비밀 통로가 있는 곳에서 살아야 할 생임을 알았지만 그냥 그렇게 철없는 꿈을 꾸듯 말했었다.
이야기 속의 영웅들이 모험을 떠나게 되는 출발점에는 늘 비밀 통로가 있었으니까. 그곳으로 도망쳐 나와 멀고 먼 여행을 시작하는 모습이 늘 두근두근 했으니까. 그러니 나도 꼭 비밀 통로를 만들어 둘 거라고. 그런 엉뚱한 이야기를 했었다.
그것을 얀은 기억하고 있을 터였다.
잊을 리가 없었다.
여생을 보낼 집이 아닌 별장이었음에도, 칼도 잘 다루고 마법까지 쓰기 때문에 생을 연명시켜 줄 어두운 통로가 없어도 살 수 있을 사람이 되었음에도, 얀이라면 잊지 않고 비밀 통로를 만들어 두었으리라고. 그렇게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별장을 떠올렸다.
"내가 나올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오다 보니 멀뚱멀뚱한 밀밭에 제온 놈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걸 봤는데, 놈들이 그럴 이유가 뭐가 있어. 비밀 통로로 빠져나오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 그래서 와본 거야."
제온의 놈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분명 별장에서 도망쳐 나오는 이들일 것이라고. 영주성이 아닌 별장을 떠올렸다.
별장으로 향하던 방향을 틀었다.
덕분에 늦지 않았다.
"아······ 난 또."
에일라가 조금 과장된 실망스런 얼굴을 했다.
나른하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왕자님이 나 있는 곳을 귀신같이 찾아낸 줄 알았잖아."
"그랬으면, 설레나?"
"설레지. 그랬으면."
"아깝네. 아니라서."
가볍게 실소한 칼리안이 잠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지. 아깝다기 보다는······ 아무래도 억울한데."
"뭐가요?"
- 저벅.
대답 대신 발 소리가 들렸다.
비밀 통로로 나온 마법사들과 그 뒤를 따라온 검사에게 달려들던 제온의 일당들. 소리없이 그들의 뒤에서 나타나 순식간에 여섯 명을 허물어뜨린 칼리안이 발을 옮겼다.
- 저벅, 저벅.
제온의 뒤에서 앞으로, 방금 죽은 이들의 시신과 제온의 남은 일당들을 가로질러 에일라와 발칸의 마법사들이 있는 곳까지 그렇게 천천히 한 걸음씩을 다가왔다.
"나는 설렌다 했었는데. 내가 밑지잖아."
아직 남아있는 적들을 사이에 두고 주고 받던 태연한 대화를 계속 이어가면서.
"어차피 나 이겨 먹을 생각 없잖아, 왕자님은."
"그렇다고 안 억울한 건 아니잖아."
"억울해도 별 수 없어요."
청은빛의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흩날린다.
"다음에는 그럼. 귀신같이 찾아낸 게 맞다 하면, 설레나?"
"다음에는 그럼 그렇게 해 봐요. 혹시 모르잖아, 설렐지."
- 우우웅!
설레다 설레다 듣는 놈들 돌아버리게 만들 태평스러운 대화의 끝에 붉은 빛이 다시 떠오른다. 제온에서 다루는 것과는 그 깊이부터가 다른 진짜 오러가 여명이 드는 땅을 밝힌다.
- 쌔애애액!
죽음의 선고가 대기를 가른다.
하피를 키우기 위해 별장을 샅샅이 뒤지다 발견하게 된,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도 별장에 하피를 옮겨두는 것에 유용하게 쓰였던 비밀 통로의 출구. 그곳을 지키며 덫 사냥을 기다리던 제온 놈들의 생명이 하나 둘 꺼뜨러 진다.
"그래야겠네. 혹시 모르니까. 설렐지."
제 오러에 비춰 붉게 물든 연보라색의 눈이 비로소 움직인다. 무엇을 벼려도 그보다 선득하지 않을 듯한 눈이 드디어 에일라에게서 멀어졌다. 발칸의 마법사들을 한 번씩 살핀 뒤 제온을 향해 돌아갔다.
- 카드득, 카각!
- 콰직!
소름끼치는 소리가 푸른 밀밭을 물들인다.
- ······ 두근!
긴장일지 두려움일지, 혹은 설렘일지.
그 이유를 애써 모른척하며 박동하던 심장이 멎는다.
그나마 검을 좀 다룬다던 대사막의 전사조차 데려오지 않은 허영심 많은 놈들이 모조리 다 쓰러져갔다. 뻣속에 치미는 살기와 피어에 숨이 막혀 단 한 발도 움직이지 못한 채 전부 다 사라져갔다.
- 우웅······ 쌔애액!
- 쿵! 쿠웅!
억울해도 별 수 없는 일이다.
제 품에 든 그 무엇도 포기할 생각 없던 욕심 많은 짐승의 것을 노렸으니.
* * *
심장 속에 돌을 넣었다.
그 돌 안에 하피의 힘을 담았다 했다.
어떻게 하여 오러와 치유력을 쓰고 마법 능력을 증폭시키고, 거기에다 몬스터의 잔재주까지 더해둘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을 알지 못하니 해결할 방법 역시 찾지 못했다.
'왕자님은 하셨어.'
에일라의 그 말을 들을 땐 칼리안이 소드마스터이자 마법사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리라 여겼다. 그래서 저들의 저주같은 능력을 파훼할 길이 없지 않을까 생각했다. 시오나는 오러를 제 손에서 떼어내는 방법도 몰랐고 특정 속성을 담은 마법을 구현하듯 오러가 담긴 마력을 만들어내는 방법도 몰랐으니까.
"······ 역시."
아, 물론 그랬다 해서.
"모르겠군."
지금 갑자기 몰랐던 것을 기적적으로 깨달았다는 소리는 아니다.
오러가 차단되는 이유도 몰랐는데 차단을 이겨내는 방법을 어찌 알겠나. 시오나는 그렇게 똑똑하게 머리를 써 가며 검을 다루는 성격이 아니었다.
- 부우웅!
그래서 그냥 모르는 채 싸우기로 했다.
몸 밖으로 발현되는 마나가 차단되어 오러를 발현할 수 없다면 몸 속의 오러를 가지고 더 열심히 검을 휘두르면 되는 일 아니겠나.
- 카각······ 터엉!
- 콰아아앙!
별장 건물을 다 무너뜨릴 것처럼 날아들던 커다란 불덩이를 검으로 막았다. 그리고 그대로 다시 되돌려 날려보냈다. 일반적인 검사들은 따라하지 못 할 속도와 힘을 부린 결과였다. 불덩이가 흩어지거나 폭발하기 전에 방향을 바꿔버린 것이다.
자신이 보낸 마법을 흩어낼 여유도 가지지 못한 마법사와 그 주변에 있던 이들의 몸이 순식간에 타올랐다. 그 모습을 보며 혀를 내두르던 발칸의 기사 한 명이 제 앞으로 다가오던 놈의 허리를 깊이 베어냈다. 그리고 쉼없이 검을 뽑아 놈의 미간을 다시 꿰뚫었다.
즉사시키지 않으면 치유되니까.
"힐 경."
"왜 부르나."
"저들이 몇이나 남았는지 보이십니까."
"팔십 쯤 남았다."
영주성을 공격하려던 놈들이다.
하나하나의 무력은 다소 낮은 듯 하나 어마어마하게 많은 놈들이 찾아들었다.
그 중 이제껏 사라진 수의 절반 이상은 시오나의 공이었다. 나머지의 절반은 에일라의 검과 마력탄에, 그 둘을 뚫고 다가온 이들은 발칸 기사들의 손에 죽었다.
"팔십······."
끝없이 싸우고도 아직 팔십이 남았다.
"저희가 아직 다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네요."
"저런 놈들에게는 안 죽는다. 나는 불리하다 했지 힘들다 한 적 없다."
만약 시오나의 움직임이 자유롭다면 이미 진작에 끝났을지도 모를 싸움이다. 그러나 시오나는 지하로 향하는 입구를 막고 서 있던 까닭에 섣부른 걸음을 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서둘러 끝내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내가 밖으로 나가서 죽이라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곳이 빈다."
"비지 않습니다. 저들이 이곳까지 찾아들더라도 저희가 막습니다."
기사가 답했다. 시오나가 밖으로 나가 뒤를 신경쓰지 않고 싸운다면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놈은 자신들이 막겠다면서.
"저희 다섯이 뭉쳐 있으면 칼리안 왕자님도 잠시 발을 물리십니다."
자신있게 덧붙여진 말에 시오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싱긋 웃는 기사를 보다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발을 박찼다.
- ······ 딸랑!
대답같은 방울소리가 들린다.
검을 다잡은 기사들이 서로 뭉쳐 사방을 경계해 나갔다. 끝이 살짝 구부러진 시오나의 검이 달빛 아래 긴 춤을 추기 시작했다.
- 서걱!
- 쿵!
한 명의 적이 줄어드는 소리가 들려 온다.
뒤이어 한 명, 다시 또 한 명. 떠오르기 시작한 해를 등진 시오나의 그림자가 길게 이어져 기사들의 눈에도 보였다.
긴 귀를 가진 이의 그림자가 정신없이 움직인다. 엘프들의 도시에서 시오나를 상대로 대련을 요청했을 때, 순식간에 발칸의 대원들을 다 눕혀놓은 그때가 생각나는 광경이 었다.
- 부우웅!
- 카가각······ 카앙!
- 콰직!
붉은 오러가 맺힌 어느 놈의 검을 살짝 막은 시오나가 몸을 틀었다. 그렇게 공격을 흘려보낸 뒤에는 재빨리 팔을 움직여 놈의 심장에 자신의 검을 박아넣었다.
휘어있는 검날로 상대의 검 손잡이를 잡아채듯 끌어당긴 뒤 놈의 가슴을 거세게 내리찍었다. 가슴과 심장이 함께 함몰된 놈을 내던져 달려드는 두 놈의 발을 지체시킨 뒤 그들의 목을 함께 베어냈다.
- 카앙, 캉, 카아앙!
- 카가강, 카앙!
별장의 건물 안에서도 싸움 소리가 들려온다.
그 쪽으로 쏠렸던 시선을 다시 빠르게 되돌린 시오나가 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자신에게 날아와 내리찍히던 세 개의 검을 한꺼번에 막아냈다. 그런 상태로 허리를 잠시 돌린 뒤에는 등 뒤로 달려들던 또 한 놈의 공격을 피하며 자신의 검에서 힘을 풀었다.
시오나의 자리로 와 서게 된 놈의 머리 위로, 방금 전까지 시오나가 막아서고 있던 세 놈의 붉은 검이 떨어진다.
- ······ 서걱!
곧바로 발을 물리던 시오나가 잠시 얼굴을 굳혔다.
"······ 이런."
실력은 없다 하나 그들이 내뻗는 것 역시 오러인지라. 오러를 담지 못한 채 놈들의 오러를 마주 상대했던 시오나의 검에 실금이 생겨 있었다.
- 부우응!
- 부웅, 휘이익!
그것을 오래 살필 여력이 없었다. 동료의 몸에 제 검을 꽂아넣게 되었던 세 놈이 일제히 시오나에게 달려든 까닭이다.
살짝 뒤로 물러나며 검을 내뻗은 시오나가 두 번의 검격을 쳐냈다. 그리고 세 번째 놈의 어깨와 목을 한꺼번에 꿰뚫은 뒤 자리를 옮겼다.
- 파지직!
두 놈의 뒤에서 전기가 뭉쳐드는 소리가 들린다.
마법사가 아직도 남았다.
입을 꾹 다문 시오나가 짓쳐드는 두 자루의 검이 아닌 그들의 손목을 내리쳤다. 그리고 다시 놈들의 미간과 심장을 꿰뚫었다.
- 파직, 파지직!
쉴틈없이 자리를 피한 땅에 푸른 전기가 맺혀 떨어진다. 그것이 날아온 방향으로 몸을 날린 시오나가 마법사를 향해 검을 휘둘렀을 때.
- 우우웅!
- 콰가각······!
놈이 잽싸게 펼친 두터운 실드에 시오나의 검이 막혀들었다.
- 카득, 카드득!
실드를 내리친 강한 힘을 이기지 못한 검에 기어코 균열이 간다. 눈을 감았다 뜬 시오나가 짧은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온 손에 오러를 집약시켜 마법사의 실드를 내리쳤다.
- 카앙!
깊은 생채기가 난 실드가 두 번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깨져나갔다. 그리고 그와 함께,
- 쩌저적······!
- 채애앵!
오래도록 사용해왔던 시오나의 검이 부서졌다.
기어코 부서져 동강이 났다.
짧은 숨을 들이쉰 시오나가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댔다.
- 딸랑!
짧은 방울 소리가 시오나의 손바닥 속으로 먹혀든다.
- 부우웅!
- 콰직!
손잡이에 달아 두었던 방울만 떼어낸 시오나가 자신의 부서진 검을 마지막으로 휘둘렀다. 부서진 칼날의 날카로운 면이 마법사의 심장에 꽂혀든다.
마지막 쓸모를 마친 검을 미련없이 내버린 시오나가 몸을 돌렸다. 이미 부서진 검을 더 쓸 수는 없었다.
부서진 검은 다시 만들어 들면 될 일이다.
아쉽다 한들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니.
때문에 방울만 챙겨 주머니에 넣은 시오나가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주변에 널린 검들 중 그나마 괜찮아보이는 것을 하나 골라 집어들기 위해 허리를 숙였을 때.
"이상한 거 주워 쓰지 말고 이거 써."
낮고 낮은 낯선 목소리가 시오나의 귀에 들렸다.
새하얀 검의 손잡이가 시오나의 눈에 들어왔다.
"주는 거 아니고 빌려주는 거야. 되게 비싼 거라서 내 맘대로 못 줘."
곱게 잘 쓰고 나중에 언젠가는 다시 세크리티아에 돌려줘야 할 검이라서.
숨겨진 말을 듣지는 못했으나 '빌려준다'는 의미는 잘 알아들은 시오나가 몸을 일으켰다.
붉게 타오르는 듯한 익숙한 검을 손에 쥔, 빌헬름 관의 수련장에서 키리에를 막아섰던 날과 비슷한 모습을 한 칼리안이 씩 웃고 있었다.
"왔군. 왕자."
"왔지. 내가."
칼리안이 내민 순백의 검을 받아 든 시오나가 긴 숨을 들이쉬었다.
"에일라랑 마법사들은 옆 동네 갔어. 이쪽이 더 급하다기에 들렀는데, 오길 잘 했네."
칼리안이 왔다.
그렇다는 것은.
- 우우웅!
오러가 되돌아왔다는 뜻이다.
"일단 잡자, 시오나. 싹 다."
"그러지."
방금 전 칼리안이 지은 것과 비슷한 웃음을 얼굴에 띄워을린 시오나가 남은 놈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 우웅, 우우웅!
가슴 시린 기억을 저놈들의 눈에 새겨 줄 새파란 오러를 새하얀 검에 쭉쭉 매단 채로.
* * *
세크리티아의 바다에서는 해가 뜨는 모습을 봤었다.
그런데 엘프 도시의 바다에서는 숲에 가려져 해 뜨는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었다. 대신 달이 저무는 것은 잘 보였다.
그냥 그 모습을 계속 지켜봤다.
키리에는 물론이거니와 플란츠나 란델 역시 안으로 들어가 잠을 청할 생각은 딱히 없던 까닭에, 본의 아니게 셋이 나란히 앉아 달이 저물고 날이 밝는 모습을 지켜보게 됐다.
"이번에도 걱정을 하는 것이냐."
소리가 듣기 좋다 한 이후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던 란델이 이렇게 말을 건넸다.
플란츠는 얀의 팔찌를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칼리안도 물론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서로 특별한 말을 주고 받지 않았다. 별다른 일이 없음에도 수다나 떨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 않나.
"네."
뭐 어찌됐건 별 일이 있으면 연락을 할 테지. 이렇게 여기고 있던 플란츠가 짧게 답했다. 나에랑샤 거리에서 실종됐던 그 날만큼은 아니었으나 걱정을 하고 있기는 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위험하지 않은 것은 압니다."
그 때처럼 생사를 걱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멍멍보다는 으르렁거린다 해야 할 모습을 취하고 있는 동생 놈이, 지금 주린 것이 밥인지 피인지 모를 얼굴을 한 채 제온의 놈들을 죄다 세뉴강으로 인도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플란츠는 동생 놈의 목숨 말고 놈의 고픈 배나 걱정했다.
주린 배 부여잡고 출발하신 내 동생 놈이 아직도 배를 곯고 계시는지, 하고.
"위험하지 않은 것을 아는데도 걱정을 하느냐."
"합니다."
이런 말을 하고 있으려니 익숙한 기분이 든다.
왕궁 밖으로 자신을 끌고 나온 칼리안이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고 하나하나 가르쳐주던 때, 플란츠도 지금의 란델처럼 별 것도 아닌 일들을 물었었다.
왕궁 밖에서는 누구나 진작에 배우는 그런 것들을 말이다.
"형이라서."
"네. 형이라서."
"그래."
짧은 대화가 오가고 다시 침묵이 찾아든다.
한참 전부터 눈을 감고 있던 키리에는 둘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틈이 날 때마다 저러는 것을 보면 아마도 오러에 대해 생각을 하는 것이리라.
그러니 방해를 하지 말아야지.
이런 생각에 다시 입을 다물고 있는데 란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엘프들의 어머니 나무는 기억을 보여준다 하던데. 맞느냐."
"맞습니다."
"본 적이 있더냐."
"잠시 보았습니다."
"어떠하더냐."
"왜. 물으십니까."
"혹여 내가 본다면 무슨 생각이 들지 알 수 없으니."
"······ 무상합니다."
"그러하더냐."
"네. 그렇습니다."
란델의 '과거' 역시 썩 밝지는 않았다
란델도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어찌됐건 지금 있는 곳은 다누의 힘이 직접적으로 닿는 엘프들의 도시였다. 지금 란델의 말을 들은 다누가 '궁금하면 내가 보여주마' 하는 괜스런 친절을 베풀더라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는 그런 곳이 었다.
때문에 그 이야기는 나중에, 이곳에서 나간 뒤에 잇자는 이야기를 하려 플란츠가 입을 열었을 때.
- 파아아앗!
하나도 안 반가운 눈부신 빛이 눈앞을 가렸다.
그 빛이 여지없이 과했던 까닭에 란델이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대신 키리에가 눈을 떴다. 그리고 바로 옆에 앉아있던 플란츠를 잡아당기려 팔을 뻗었다.
그러나 결국 아무것도 잡아채지 못하고 헛손질을 하게 되었다. 그 왕제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많은 흉터가 새겨진 키리에의 손이 허공을 붙드는 모습이 연두색의 눈동자에 비쳤다.
'키리에를, 아니면 나를.'
그러니 지금 이 빛에 스민 것이 키리에인지 아니면 플란츠 자신인지. 그것을 잠시 가늠하고 있는데,
- 너는 그 끝을 바꿀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 하였다.
목소리가 들렸다.
아.
저 나무가 또 나를 데려왔구나, 하고.
그제야 확신한 플란츠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하도 많이 끌려오다 보니 이제는 익숙해진 까닭에 그리 놀랄 것도 없다는 것처럼 침착한 목소리를 냈다.
"되는대로 하다 보면 찾을 텐데. 왜."
이곳에서 다누를 만났을 때 했던 말을 다시 전했다.
- 달리하였다.
"무엇을 달리했다는 말인지."
- 생각을 달리하였다.
"······ 생각을 바꾸다니."
- 알려달라. 방법을, 나에게. 내가 돕겠다.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렸다.
그러다 곧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알았어."
어찌됐건 돕겠다는 말이 아닌가.
그 자체만으로는 서로 해가 될 일이 아니었다.
"알았으니까. 우선 나가고 싶은데."
- 기꺼이 그리하겠다.
그러자 다누는.
이렇게.
- 네가 나에게 방법을 알려준 뒤에.
제 품에 든 그 무엇도 포기할 생각 없던 욕심 많은 짐승의 것을 욕심내는 말을 전해왔다.
플란츠의 한쪽 입술이 길게 말려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