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83화 (484/527)

제85장. 멍(4)

플란츠 가라사대.

세상에 건드리면 안 되는 것이 딱 셋있다.

식사 거르신 내 동생, 심기 편찮으신 내 동생, 그리고.

"휘트린으로 같이 가겠다 하실 줄 알았습니다."

"왜."

"이럴 때마다 줄곧 걱정해오셨으니까요."

"지금 걱정해야 될 게 내 아우님일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 아우님께서 분명 배가 고프다 하셨는데. 그것도 잊어버릴 만큼 심기 편찮으신 채로 갔잖아."

다소 돌은 내 동생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물론 평소에도 돌아 있지만 그보다 아주 약간 더 돌은' 내 동생이다.

아무튼 요점은 한때 제 정혼자였던 새 부하가 위험하다는 말을 듣고 극심하게 편찮아진 심기 때문에 배고픔도 잊을 만큼 돌은 칼리안은 건드리면 안된다는 거다.

때문에 플란츠는 에일라의 도움 요청을 듣기가 무섭게 나르잔에게 쳐들어가서는, 아니. 찾아가서는 '휘트린의 귀족들이 전부 다 추방된 엘프들인 것을 알게 됐는데 이 말을 전하께 전해야 할지 잠깐 헛꿈을 꾼 것으로 생각해야 할지 매우 고민된다'며 협박을, 아니. 협상을 건넨 뒤 다누로부터 숲의 길을 뜯어내, 아니. 얻어내 사라진 칼리안을 따라가지 않았다.

물론 시들지도 않았다, 아니.

동생 놈에 대한 걱정 때문에 절여지지도 않았다.

······ 아니.

어쨌거나 의연하게 잘 남았다는 소리다.

엘프들의 도시에, 아우님의 충성스런 부하와 그냥 어쩌다 보니 내 윗방에 살게 된 저 사람과 함께.

"너도 안 갔잖아. 히나한테."

"왕자님께서 가셨으니 히나도 안전할 겁니다. 그리고 저까지 이곳을 비울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마찬가지 아닌가. 나는 대장로에게 돌려받아야 할 것도 있는데. 뭐하러."

제온을 상대로 이를 드러낼 동생 놈의 목줄을 구태여 잡아챌 필요도 느끼지 못했지만 휘트린으로 따라나서지 않은 데에는 다른 여러 이유들이 더 있었다.

칼리안과 플란츠는 나르잔에게 엘프 자객에 대한 말을 묻지 못했다. 휘트린과 프레이야, 프레이르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뿐만 아니라 빼앗긴 하피의 마석도 아직 돌려받지 않았고 엘프들이 왜 마석을 탐내는지도 알아내지 못했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이렇게나 많이 남았는데 무작정 함께 돌아갈 수는 없었다.

거기에 더해 에스티나나 이리스, 위층 사는 저 사람의 말은 레이븐만큼 빠르질 못하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그리고. 무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어."

동생 놈 걱정에 앞 뒤를 재보지 않는 짓은 그만하자던 친구의 말에 동의한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다. 벌써부터 약속을 어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왕자님과 대화하셨습니까."

"말고."

"그럼, "

"왕제랑."

"······ 그러셨습니까."

"그랬어."

"그런 이유라면 다행입니다."

"뭔 줄 알았는데."

"왕자님에게 부담이 될 것을 우려하신 줄로 오해했습니 다."

키리에가 이렇게 좋게 풀어 말했으나 결국은 '칼리안에게 짐이 될까봐 안 따라간 줄 알았다'는 의미다.

"아니야."

키리에는 엘프들의 도시로 오기 전의 플란츠가 했던 말을 신경쓰는 듯했다. '또 넘어질 것이라 지레 걱정하지 마라' 화를 냈던 일 말이다. 때문에 플란츠 스스로는 아니라 했으나 혹시라도 그런 생각 때문에 칼리안을 따라나서지 않은 것인지를 걱정했나보다.

"짐이 아니면 무엇이더냐."

때문에 키리에에게 한 번 더 대답을 전하려는데 란델의 말이 들려왔다. 단박에 찌푸려지려는 눈꼬리를 진정시킨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짐이 된다 여긴다만."

그것 봐라. 내 위층에 사시는 당신이 그렇게 생각을 하니까 내 동생이 당신 목숨 몇 분만 내어 달라는 부탁도 못하는 거다. 그러니까 짐이니 뭐니 생각 깊은 척 그만하고 반성이나 하셔라.

하는 말을 굳이 입 밖으로 낼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 플란츠가 란델의 반대편 쪽에 놔두었던 것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참 멀찌감치 떨어져 앉은 위층 거주인에게 잘 보일 곳에다 조용히 내려놨다.

시나스타. 플란츠의 검이었다.

"제 검입니다."

"알고 있다만."

"칼리안이 준 겁니다."

자랑을 하는 건가.

당신이 고작 미스릴 가위나 받을 때 나는 멋드러진 칼을 받았다고.

의미 파악 잘 하는 머리로도 아래층 거주자가 대뜸 칼을 내민 의도를 알아내지 못한 란델이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플란츠의 말이 이어졌다.

"어두운 쪽은. 칼리안의 비밀을 발설하지 않는 것을 대가로 두고 받았습니다."

"무용한 약속을 했구나."

"······ 그때까지만 해도 비밀이 맞았습니다."

지금이야 개나 소나 다 알 것 같은 비밀이지만.

카이리스에 찾아온 체이스를 만났던 날, 비밀을 지켜주는 값이라며 저 귀한 검을 건넸던 칼리안이었다. 이제는 멍멍이같은 얀이나 소같은 르메인만 모르는 비밀이지만 그때까지는 정말 비밀스러운 비밀이 맞았으니까.

"참작하마."

"밝은 쪽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칼리안이 다누에게 받은 것을 저에게 준 겁니다."

"해서. 그 이야기를 왜 하는 것이더냐."

"밝은 검을 받을 때에는 값을 치르지 않았습니다. 대가를 줄 필요 없었습니다. 어두운 검을 받았을 때에는 제가 짐이 맞았지만 밝은 것을 받았을 때에는 아니었다는 것을 압니다."

란델의 눈이 플란츠에게 가 닿았다.

"칼리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시면 값을 치를 생각 말고 그냥 갚으시라는 말씀입니다. 형제라 생각하신다면."

속을 읽지 못할 얼굴로 플란츠를 쳐다보던 란델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멀리 어둠에 잠긴 바다를 한동안 쳐다봤다.

일정한 듯 조금도 규칙적이지 않은, 온 방 안을 메우던 시계 초침 소리와는 완연히 다른 파도 소리를 귀에 담다 입을 열었다. 잔소리같기도 하고 동생 걱정이나 선물에 대한 자랑같기도 하고 혹은 조언일지도 모를 말을 건넨 같은 건물 주민에게 대답을 전했다.

"처음 듣는 소리인데. 듣기에 나쁘지 않구나."

처음 듣는 파도 소리가 싫지 않다고.

란델의 말을 그냥 그런 의미로만 알아듣기로 마음 먹은 플란츠가 대꾸했다.

"형님과 함께 듣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걱정 말거라. 너와 다르지 않을 테니."

"다행입니다."

"그러하구나."

할 말도 참 많고 참아 넘기는 말도 많은 두 놈이 그렇게 입을 꾹 다물었다. 히나에 대한 걱정을 애써 물려두고 둘의 이야기를 듣던 키리에가 소리없이 입술만 끌어올렸다.

사이 참 좋으시네, 하는 생각에.

* * *

사람이 부족하다.

거대한 별장 전체를 고작 몇 명의 기사와 오러를 쓰지 못하는 소드마스터, 그리고 세작 출신의 검사가 꼼꼼하게 지켜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다같이 의견을 모아 별장 건물 안으로 발을 물렸다. 그렇게 하면 아무리 많은 놈들이 별장을 공격한다 해도 안으로 들어오는 인원만 상대하면 되니까.

- 딸깍.

에일라가 폭발력이 대단치 않아서 잘 쓰지 않았던 싸구려 마력탄을 꺼내 안전장치를 해제했다. 그리고 건물 입구를 향해 주저없이 집어던졌다.

바람이 갈라지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날아간 마력탄이 이제 막 건물 안으로 들어서던 기사의 입 속에 안착했다.

- 딸랑······!

사람의 입 안에 들어간 하급 마력탄이 어떤 효과를 내는지에 대해서까지 관심을 가지고 싶지는 않았던 에일라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폭발음과 비명소리 대신 시오나의 방울 소리를 귀에 담으며 발을 박찼다.

- 타앗!

- 툭!

그러더니 대륙에 몇 있지도 않은 능력 좋은 소드마스터의 어깨를 밟고 뛰어올랐다.

오러로 보호되던 튼튼한 어깨를 발판으로 제공한 셈이 된 시오나가 무어라 말할 틈을 주지도 않은 채, 에일라가 제 몸을 쏘아내듯 앞으로 달려나갔다.

- 콰직!

발칸의 기사를 공격하려던 검사의 뒷목에 검을 박아넣은 에일라가 그 검의 손잡이를 지지대 삼아 공중에서 몸을 회전시켰다. 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정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서는 긴 다리를 뻗어냈다.

- 휘이익!

- 빠악!

단단하게 만든 부츠의 앞코에 얻어맞은 어느 놈의 고개가 옆으로 꺾였다. 놈이 휘청이는 틈을 놓치지 않은 에일라가 반대편 다리로 놈의 머리를 다시 걷어찼다.

- 우드득!

썩 좋지 못한 소리와 함께 목이 완전히 돌아간 제온의 검사가 바닥으로 쿵 쓰러졌다. 에일라의 몸무게를 지탱해 준 셈이 된, 뒷목에 검이 박혔던 검사의 시신이 그 위로 널브러진다.

"······ 아."

불꽃 신호를 알아본 일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해서 다행이다.

오렌지 머리 마법사 케인 테스만이 낮은 숨을 몰아쉬는 에일라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저기요."

그 무시무시한 푸른 솔새가 새벽을 알리는 것처럼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보내왔다.

"네, 브리지트 경."

"마력탄 있어요?"

제 입으로 질문을 건넨 에일라가 잠시 실소했다.

마법사들에게 마력탄이라니. 차라리 비상시를 대비한 단검이 좀 있는지를 묻는 게 실용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 까닭이다.

"없겠네요."

"네.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아니고요."

케인이 다시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연 사이,

- 쌔애애액!

- 콰직!

다리를 베여 넘어진 발칸의 기사에게 덮쳐들던 놈의 목에 서슬퍼런 단검이 꽂혀들었다. 날아드는 파리를 내쫓듯 정문을 넘어 들어오는 제온의 놈들을 빠짐없이 잡아 죽인 에일라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장 몸을 날렸다.

"어차피 장난감 없어도 잘 싸우니까."

자신의 공격에 즉사한 놈의 시신에 꽂혀있던 단검을 다시 뽑아든 에일라가 곁에 있던 검사의 어깨를 내리찍었다.

-콰악!

- 스르릉······ 서걱!

검을 든 쪽의 어깨를 관통당한 검사가 자신의 검을 놓친 사이, 에일라의 얇은 장검이 놈의 목을 베어냈다. 피가 튀지 않도록 멀찌감치 피해 선 에일라가 아주 잠시 눈을 내리뜨며 지쳐 차올랐던 숨을 잠시 골랐다.

별장 안으로 진입하는 족족 죽어버리는 것을 비로소 알았던지, 제온의 군사들이 발을 멈췄다.

그 사이 시오나로부터 짧은 말이 들려 왔다.

"우리가 불리하군."

"불리해진지 한참 지났어요."

농담처럼 말하고 있으나 정말 불리했다.

마력탄은 이제 없다.

단검은 하나 남았다.

마법사들은 시종들이 들어가 있는 지하로 내려보낸지 오래다. 다만 케인의 경우에는 별장의 발칸 대원을 통솔하는 위치에 있던 까닭에 위에 남았다.

안 그래도 적은 인원에서 마법사를 빼고 방금 전 다리를 다쳐 아래로 내려보낸 기사 한 명도 제외시키고. 아직 멀쩡한 시오나와 몇몇의 기사들, 그리고 마력탄과 단검을 다 소진한 에일라.

애초부터 불리했던 싸움이었다. 머릿수의 차이도 컸지만 마법과 오러가 차단된 것만큼 악조건은 아니었다. 거기에 더해 저들은 마법도 오러도 모두 사용할 수 있으니.

"······ 우리 왕자님은 언제 오시려나."

그저 칼리안이 오기만을, 아니라면 영주성 쪽의 인원들이 빨리 지원을 보내오기를 기다리는 상황이 꽤 아득하다.

이래서야 안 죽고 기다리겠다는 약속을 지킬 수는 있을는지.

"힐 경, 브리지트 경."

그런데 그때 이렇게, 케인이 둘을 불렸다.

"어머니 나무는 숲의 길을 열지 않았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쳐들어온 놈들이 많아서요?"

"네. 살펴봤지만 휘트린 영지의 사람들도 아닌 것 같습니다. 제온의 일당이 어디에서 이렇게 많이 찾아왔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이 근방은 전부 밀밭이고, 그것들은 전부 휘트린의 영지가 아닙니까."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에일라가 입을 열었다.

"숲의 길을 통하는 것이 아니라면 걸어왔겠죠. 죽은 외성 수비대장도 제온과 연관이 있었는데 주변 영지라 해서 다를 건 없을 거예요."

"네. 맞습니다, 브리지트 경."

"데이른 남작령이 이틀 정도 거리에 있어요. 서두르면 더 빨리 도착할 테고"

인근에 있다는 남작령.

그곳에 제온의 일당을 숨겨두었다가 때를 보아 출병시켰을 가능성이 있었다. 칼리안이 성을 빠져나갔을 즈음 출발했다면 시기도 얼추 맞았다.

"만약 그 영지가 제온과 관련되어 있다면 하피에 대한 다른 증거가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겠네요."

"기사들은 두고, 제가 마법사들과 함께 데이른 영지에 다녀오겠습니다."

어차피 이곳에 있어 보아야 도움이 안 된다. 저들에게서 멀어진다면 마법도 쓸 수 있으니 차라리 데이른 남작령이라는 곳을 좀 살펴보고 오겠다는 소리였다.

"지금?"

"이곳을 공격하는 수가 많습니다. 데이른이 문제없는 영지라면 아무것도 위험하지 않을 테고 문제가 있는 곳이라면 영지 밖으로 병력을 내보낸 지금이 기회입니다. 지금 찾아가 살펴보아야합니다."

기실 시오나나 에일라의 허락을 받고 움직일 필요는 없었으니 허락을 구하는 말은 아닐 터 였다.

"별장 전체를 놈들이 포위했어요. 마법도 못쓰면서 어떻게 나가려고."

때문에 이것만 물은 에일라에게 케인이 답했다.

"칼리안 왕자님의 상급 시종님께 들었습니다. 별장 지하에 비밀 통로가 있다 하셨습니다. 저희가 그곳으로 빠져나가 투명화 상태로 움직이면 됩니다.

"만약 그들이 제온과 연관되어 있다면 마법사들만으로는 위험하다."

"마법을 쓰지 못해도 도망쳐 나오는 정도는 할 줄 압니다, 힐 경. 게다가······."

무언가를 생각하듯 뒷말을 끌던 케인이 설명을 더했다.

"브리지트 경의 마력탄이 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장은 어렵지만 이틀 정도, 그 영지에 다다를 즈음이면 저들의 마법 차단에 대처할 방법을 강구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케인의 말을 함께 듣던 발칸의 기사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목소리가 이어지지는 않았다.

창 밖으로, 여러 명의 마법사들을 호위하듯 둘러싼 제온의 군사들이 다시 다가오는 것이 보인 까닭이다.

인상을 찌푸린 시오나가 창 밖을 살피는 사이, 추후 아르센에게 보고할 내용을 기사에게 대신 전한 케인이 발을 옮겼다. 시간을 낭비할 필요 없이 밖으로 나가기 위함이었다.

"위험할 것 같은데."

그 뒷모습을 보던 에일라가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시종 셋만 지키면 되나."

그런데 이렇게 시오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일라가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별장은 어차피 다 버렸으니까요. 그 셋이랑 여기 기사님들만 지키면 되겠죠."

"그럼 내가 있을 테니 저 마법사들과 함께 가라."

"내가?"

"그래."

에일라가 다른 말 없이 시오나를 쳐다봤다.

하피에 대한 조사는 칼리안이 에일라에게 맡긴 일이기도 했다. 그러니 저들을 따라가든 이곳에서 얀을 지키든, 어느 쪽이든 상관없이 에일라가 나서야 할 이유가 되기는 했다. 그러나 에일라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입을 열었다.

"나까지 없으면 당신이 저 기사들이랑 아래 있는 사람들한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인가."

"맞아요."

"인간들이 그 상관에 그 부하라는 말을 하던데. 무슨 의미인지 확실히 알겠군."

"기분 나빠하지는 말고요."

"이해한다. 엘프들이 어떤지는 나도 겪었다."

"엘프든 뭐든. 나는 어차피 내 주인만 믿어."

오해를 풀어주겠다는 것인지 아닌지.

어쨌거나 에일라의 말을 기분 나쁘지 않게 잘 알아들은 시오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창가를 등진 채 뒤로 돌아 뚜벅뚜벅, 에일라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럼 내가 갈 테니 네가 여기 있겠나."

"······ 아."

이곳을 나가려는 마법사들의 안위를 걱정하여 한 말이 아니었나보다. 그것을 깨달은 에일라가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제온 때문에 왕자님 돕기로 했었지, 참."

"그래. 맞다."

인근에 있다던 그 영지가 정말로 제온과 연관이 있다면 그 속에 든 정보를 반드시 알아내야 하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이다, 시오나는.

"너는 나보다 기민하고 눈치도 빠르다. 네가 없어도 나는 이곳의 인간들을 지킬 수 있지만 너도 그럴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한다. 내가 마법사들을 따라가면 마법사들은 확실히 살리겠지만 정보까지 알아올 수 있다 확신하지 못한다. 그래서 서로에게 더 나은 제안을 하는 것이다."

다만 제온의 일만을 중시해서 이곳을 내팽개치고 갈 만큼 '참 엘프다운 행동'을 할 생각은 없으니 시오나를 대신해 에일라가 동행하여 마법사들의 안위도 챙기고 그쪽의 정보도 알아봐 달라는 의미였다.

- 쿠궁

그때, 미미한 진동이 전해졌다.

살짝 고개를 돌린 에일라가 창 밖을 살폈다.

"건물에 구멍을 낼 생각인가 본데. 괜찮겠어요?"

"문제없다."

"그래요, 그럼. 가지 뭐."

에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단검도 다 떨어지고 마력탄도 다 썼다. 체력도 거의 한계에 왔다. 얼마나 더 버틸지 모르는 상황에서 짐이 되느니 떨어져나가 다른 일을 하는 편이 나을 터였다. 이곳을 빠져나가도 칼리안은 어찌됐건 별장 쪽으로 올 테고, 그럼 시오나를 도울 수 있을 테니까.

"시종들 잘 챙겨요. 잘못되면 큰일나니까."

"칼리안 왕자의 시종은 내 친구의 아들이기도 하다. 걱정 말도록."

"알았어요."

다른 걱정은 더 전하지 않은 에일라의 발이 바삐 움직인다. 얀에게 미리 전해 들었던 비밀 통로 쪽을 향해서였다. 마법사들을 뒤따라가야 했으니까.

- 타앗!

에일라가 가벼운 몸놀림으로 계단의 난간을 짚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불빛 하나 들어와있지 않은 어두운 복도로 발을 옮겼다.

여섯 번째 기둥, 그곳에 놓인 조각.

그것을 살짝 들어을린 뒤 받침대를 눌렀다.

- ······ 스르릉······.

그러자 아주 작은 소리와 함께 벽이 움직였다.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만큼의 틈이 생겨났다.

좁은 통로 안에서 네 명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이 들렸다. 로브가 펄럭이는 소리가 함께 들린다. 그 소리를 따라 에일라 역시 발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점점 좁아지던 통로의 끝에 밝은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반가운 빛이었으나 언제든 함정은 있게 마련이라. 긴장을 풀지 않은 에일라가 검을 뽑아든 뒤 빛이 드는 곳을 향해 발을 옮겼다.

어둠이 걷히고 시야가 밝아진다.

곧 고개를 든 에일라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 이럴 줄 알았지."

네명의 마법사.

그들이 입은 하얀 로브가 보인다.

그들을 둘러싼 제온의 서슬퍼런 칼날이 보인다.

- 쌔애애액!

- 콰직!

붉은 검날이 보인다.

그리고.

"아······."

연보랏빛의 눈동자가 보인다.

"다행이다. 에일라."

반가운.

실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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