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장. 멍(3)
히나로부터 소식이 전해졌다.
- 엘프들의 어머니 나무가, 더는 제, 온, 을 돕지 않을 거래요. 얘기가 잘, 됐나 봐요.
다누가 제온의 손을 놓았다 했다.
좋은 소식이었다. 앞으로는 제온을 맞닥뜨릴까 온 대륙의 숲을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였으니 분명한 희소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투의 도래를 알리는 소식이기도 했다.
'엘프들의 도시에 가게 되면 다누를 설득해 볼 생각인데. 다누가 더는 제온을 돕지 않도록. 얘기가 잘 되면 제온에서는 휘트린이 다누에게 돌아가기 전에 어떻게든 데려가려고 할 거야. 휘트린이 무슨 능력을 가졌는지 알고 있으니까.'
자신이 왜 다누에게 가는지를 설명하며 이어지던 플란츠의 편지에 아르센도 동의했었다. 동종업자의 의견에 동조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렇군······ 알겠네."
짧게 답한 아르센이 방 밖에서 대기하던 대원 한 명을 불렀다. 발칸에서 '안네가 무서워하는 노란 머리'로 더 잘 알려진, 세잔 일라이라는 이름의 마법사였다.
"네, 부군단장님."
"별장 쪽으로 신호를 보내게."
"뭐라고 보내면 되겠습니까?"
"경계 단계를 올리겠다 하면 되네."
"네. 알겠습니다, 부군단장님."
참고로 아르센은 아직 투명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동종업자의 계획에 동참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철없이 제 동생을 따라나설 만큼 혈기만 왕성한 왕세자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니까.
덕분에 칼리안이 사라진 이후로 어디선가 갑자기 툭툭 튀어나와 참견을 해대는 부군단장의 목소리에는 모두들 익숙해진 터였다. 따라서 빈 허공에서 들려오는 명령에도 의연하게 대답한 세잔이 서둘러 나간 뒤, 히나가 손을 움직였다.
- 그리고, 좋은 왕세자 저하가, 이제 변장을 푸셨대요. 그러니까 엉뚱한 부군단장님도, 투명해지는 마법, 그만 쓰셔도 괜찮다고, 좋은 왕세자 저하가, 그러셨대요.
"그래. 알겠네. 그런데 연락을 주신 분이 왕자님이신가?"
- 아뇨. 오빠가 알려줬어요.
왕자님께서는 다른 말씀 없으셨다 하나?"
- 자상한 왕자님은 그냥, 동상 잘 만들었더라, 하셨다네요.
"이번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 없이 말인가?"
- 네. 아무, 말씀도요.
사실 히나에게 한 마디를 더 하기는 했었다.
그냥 왕궁에 있지 왜 휘트린까지 왔느냐, 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 말은 엘프 휘트린을 만나러 위험한 곳으로 온 히나에 대한 걱정어린 잔소리라 아르센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곧 서운함이 조금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발칸의 일에 아예 관여하질 않으시는군. 왕자님께서 만드신 군대인데 말인세."
생긋 웃은 히나가 다시 손을 놀렸다.
- 군단장님이나, 부군단장님도 아닌데, 관여할 수 있는 건, 전하 뿐이잖아요. 자상한 왕자님이, 만드셨다 해도요, 처음이면 몰라도, 자상한 왕자님이, 계속 관여하시면, 그건 그냥, 간섭이 될 뿐이라고, 오빠가 그랬어요.
"그래. 물론 알고 있네만."
- 그래도, 좋은 왕세자 저하 통해서, 계속 도와주고, 계시잖아요. 서운해하지 말고, 투명화나 푸세요. 아무도 없는데, 목소리만 들리는 거, 무서워요.
"아, 그래. 미안하네."
곧 아르센이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만 둥둥 떠 있는 괴이한 꼴에 잠깐 뜨악하던 히나가 인사를 다시 건넸다. 그리고 몇 마디 말을 더 주고받은 뒤 자신이 할 일을 위해 문 쪽으로 발을 옮겼다.
- 저는, 성내에 돌아다니는 사람들, 살펴 볼게요.
"괜찮겠나? 안그래도 속이 시끄러울 텐데."
- 시끄러우니까요. 일 할게요.
"······그래. 부탁하네."
끄덕끄덕.
고개를 움직여 대답한 히나가 밖으로 나갔다. 히나만 할 수 있는 일, 영주성 인근을 오가는 이들 중 심장 속에 돌을 넣은 놈이 있는지를 면밀히 살피는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 ······ 피잉! 피잉, 핑!
문이 닫힘과 거의 동시에 창 밖이 언뜻 빛난다.
아르센의 말에 따라 쏘아진 불꽃 신호였다. 경계를 강화하겠노라 알린 것이니 이제는 정말 밖으로 나설 때가 되었다.
"······ 후우."
조용히 닫히는 왕세자의 방 문을 쳐다보던 아르센이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 뒤에는 잠시 주먹을 쥐었다 폈다해 가며 방 안을 서성이다 의자에 앉았다.
"왜 그렇게 긴장을 하나."
그런 아르센을 향한 또 다른 목소리가 방을 울린다.
이제껏 옆에서 아무 말 없이 서 있던 사람, 에우리아였다.
아르센이 에우리아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저 긴장했습니까, 협회장님?"
"엄청. 승급 시험 앞둔 협회 마법사들 꼴인데."
"그렇습니까?"
"어."
"아마······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뭐. 싸움이?"
싸움.
하나가 살고 하나가 죽는 일을 말함이다.
"설마 제가 싸움이 낯설겠습니까."
낯설지 않을 뿐 아니라 참 익숙하다.
대사막에 살던 늑대들의 머릿수를 줄이는 것으로 생을 연명하지 않았던가. 하나가 살고 하나가 죽는 일이 끊임없이 반복되던 생에서 늘 '살아남는' 쪽을 맡아오기까지 했다. 그러니 싸움이 익숙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왜 긴장을 하나. 쓸데없이."
"사실은······ 혼자 지휘하는 게 처음이라 그렇습니다. 지금은 왕자님도 군단장님도 안 계시니 말입니다."
아르센 헤르츠는 뛰어난 마법사다.
그것만큼은 앨런이나 에우리아 뿐 아니라 칼리안마저도 부정하지 않는 사실이다. 개인 대 개인의 전투에서 아르센을 능가할 마법사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긴장을 한 모양이다.
아르센 헤르츠의 뛰어남이란 발칸의 부군단장으로서가 아니라 아르센 헤르츠라는 한 사람으로서의 능력이 아니던가. 다른 이들의 목숨을 책임질 필요 없이 스승과 대사막을 누비며 살아왔던 마법사 말이다.
"저하께서는 잘만 하셨다던데."
"발칸 대원 여든 여섯 명 데리고 왕자님 한 분 상대했던 그 전투 말씀이십니까?"
"어. 그거."
"저도 사람들 통솔하는 법은 압니다. 그리고 저도 상대가 왕자님이면 긴장 안 합니다, 협회장님. 무슨 일이 있든 죽는 놈이 생기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대원들 죽을까봐 겁나?"
"네. 그렇습니다."
아르센이 또 한 번 어울리지도 않을 약한 소리를 했다.
백여 명의 대원들을 통솔하는 것에 겁을 먹은 모습에, 에우리아가 입을 꾹 다물었다 뗐다. 그러더니 연달아 긴 숨을 내쉬는 아르센의 새파란 머리꼭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말했다.
"꼬맹이 다 컸네. 수작질도 할 줄 알고."
천천히 고개를 든 아르센이 살짝 웃었다.
"······ 들켰습니까?"
"어."
에일라의 손에 들린 것을 구경만 하다 웬 엘프 자객에게 빼앗기게 된 마석. 리베른의 국왕 엘린느가 보낸 것보다 몇 배는 크고 질 좋은 하피의 마석을 받기로 한 에우리아는 수면향과 해약 하나씩을 플란츠에게 내어줬다. 그리고 '잠시 사라진' 아르센을 대신해 발칸의 대원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건네기로 했었다.
그러니 아르센이 나서게 되면 에우리아는 이제 굳이 움직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지금 휘트린에는 에우리아가 호위해야 할 왕족도 없었으니 말이다.
"안 그러면 협회장님을 무슨 말로 꼬십니까. 저 대단한 마석도 없고 천하의 에우리아 세이렌을 부릴 지위도 없습니다. 안 식상한 꽃으로 협회장님을 고용할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아르센의 말대로였다.
에우리아는 일개 개인이 아니다. 카이리스의 마법사들 중 발칸에 소속되지 않은 다른 모든 마법사를 대표하는 자리의 사람이다.
아무리 에우리아가 칼리안을 지지한다 한들 그건 브리센이나 다른 귀족을 상대로 한 세력 싸움일 때의 이야기지 르메인에 대한 반역까지 지지할 수는 없는 일이다. 별장에서 나온 반역의 증거들과 완전히 무관하다는 것을 아직 다 밝혀내지 못한 칼리안을 섣불리 도울 위치가 못 된다는 뜻이다. 카이리스에서 내로라하는 마법사들을 전부 다 광장에 세울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으니까.
더욱이 칼리안은 에우리아의 협조를 요청하지도 않았단다. 발칸은 물론이거니와 에우리아에 대한 전달사항은 일절 없이 아르센이 동상을 잘 만들었다는 그딴 한가한 소리나 했단다.
그래서 아르센이 대신 에우리아에게 우는 소리를 해가며 수작을 거는 중이었다. 그 대단한 이중 속성 마법사의 도움을 좀 구하기 위해서.
"차라리 도와달라고 하든지."
"도와달라 한다고 도와주실 수 있는 위치 아니잖습니까."
"뭐. 힘들다고 징징대는 건 도와달라는 말이랑 다른가."
"발칸의 부군단장이 하도 졸라서 거절하지 못했다, 하는 명분은 생기지 않습니까."
"명분 좋아하시네."
"명분 좋아합니다. 스승님께서 사람이 명분만 있으면 못 할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긴장했다면서 말은 잘 하네, 꼬맹이."
"아닙니다. 긴장 많이 했습니다."
"해야지. 딸린 목숨이 백 개는 되는데."
"네. 그놈들 중에 죽는 놈 생길까봐 걱정되는 건 사실입니다."
"그게 걱정되면 제대로 부탁을 하든지."
"제대로 부탁드리면 도와주실 겁니까?"
"어."
"저는 드릴 마석 없습니다."
"나도 알아."
"그래도 도와주실 겁니까?"
"그렇다니까."
"그럼 저한테 손 좀 보태주십시오, 세이렌 경."
대화의 끝에 부탁의 말이 제대로 붙었다. 때문에 '저보다 경험 적은 마법사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마법사 협회장 말고 그냥 에우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뭐. 심심한데 놀면 뭐 하나."
"감사합니다."
"어, 그래."
아르센이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음에는 수작 안 부리고 제대로 부탁드리겠습니다."
"다음엔 얄짤없어."
"그래도 도와주실 분인 것 압니다, 협회장님."
대사막에 있을 때는 어리바리 귀여웠던 꼬맹이가 나이를 좀 먹더니 어찌나 능글맞아졌는지.
피식 웃은 에우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별장 쪽은 안전한 게 맞나. 아니면 내가 그쪽에 가고."
"대원들도 있고 시오나 힐 경도 있으니 안전할 겁니다."
"차라리 다 같이 있는 편이 나을 것 같던데 왜 나눠 놨나."
"다 같이 있기는요. 모여 있기에는 너무 위험합니다. 휘트린이 어떻게 나올지도 알 수 없고 휘트린의 능력도 제대로 파악이 안 됐지 않습니까. 저는 이제라도 치유사 베른 경을 별장으로 보내는 게 나을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한 아르센이 에우리아를 보며 무언가를 알릴까 말까 고민하는 얼굴을 했다. 그러다 에우리아가 이번 일에 선뜻 나서주기로 했음을 상기하며 입을 열었다.
"사실······ 마법이나 오러 발현을 차단하는 놈들이 생긴 것 같습니다."
이것은 방금 전 히나가 수어로 전해온 말이었다. 수어를 제대로 배우지 않은 에우리아는 알아듣지 못했던 이야기이기도 했다.
"마나를 차단해?"
"네. 그런 놈들이 왕자님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치유력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마법과 오러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능력을 가졌다고 합니다."
에우리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법사들이 전부 다 짐짝이 되겠군."
"맞습니다, 협회장님. 그러니 어떻게 보면 별장 쪽이 더 안전할 수도 있습니다. 오러를 쓰지 못해도 힐 경은 강한 검사가 아닙니까. 기사들과 브리지트 경도 있으니 그 쪽으로 따라간 시종 세 분 정도는 충분히 지킬 수 있습니다."
세 명의 시종은 군인이 아니다. 영주성에 남은 드미레아처럼 스스로를 지킬 능력도 없거니와 군인들의 전투에 말려들어 위험에 처해질 이유도 없다.
게다가 어차피, 시오나가 오러를 쓰지 못하게 된다면 영주성에 남은 발칸의 모든 마법사들을 지킬 수도 없을 일이다. 그래도 세 명의 시종 정도는 확실히 지켜줄 수 있을 터였다.
"놈들이 그 방법을 전부 다 익혔을지 일부만 익혔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쨌거나 지금은 상황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다같이 모여있다가 다같이 위험해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군인이 아닌 이들만이라도 확실히 지키는 편이 낫습니다, 협회장님."
"그럼 나한테는 왜 도와달라 했나. 나도 마법사인데."
"협회장님은 이 영주성에서 마법을 가장 잘 다루시는 분 아닙니까. 혹시 놈들이 수작을 부리더라도 해결 방법을 알아내실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에우리아는 다른 말 없이 입을 다물었다.
아르센이 그런 에우리아에게 작은 묵례를 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방 밖으로 나갔다.
휘트린을 내어주는 대신 치르기로 한여럿 대 여럿의 싸음. 처음으로 홀로 이끌게 된 큰 싸움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 * *
휘트린이 변수였다.
생각지도 못한 변수를 부렸다.
에일라가 열심히 생굴을 먹고 시오나는 휴식을 취하고, 다른 발칸의 대원들과 드미레아가 머무는 영주성 쪽에서 경계 강화를 알리는 불꽃이 떠오른 뒤.
의외로 잠잠한 영주성을 주시하고 있을 때 시오나의 검이 낮은 울음을 냈다.
'휘트린이 영주성을 보호하고 있다. 제온에서 방향을 틀었군. 이 쪽으로 오고 있다.'
그리고 시오나는 이런 말로 상황을 전해왔다.
그 말대로, 멀리 보이는 영주성이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휘트린의 보호막이 영주성을 다 둘러싼 까닭이다.
에일라는 그것을 보자마자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칼리안에게 연락을 취했다.
'왕자님, 바빠요? 나 구하러 와 줘야 할 것 같은데요. 멀리 있으려나?'
'어디야.'
'별장이에요, 아직은.'
'기다려. 갈 테니까.'
'알았어요.'
히나가 그랬지 않나.
목숨 걸고 싸우지 말라고.
이런 상황에 목숨 안 내놓고 싸우다 잘 살아서 비싸고 좋은 새 집으로 돌아가려면 별 수 있나. 미리미리 도움을 청해야지. 목숨이 또 경각에 달린 채로 칼리안을 불러냈다가 운이 나쁘기라도 하면, 그래서 이번에는 칼리안이 에일라를 지키지 못하는 일이 벌어져버리면 안될 테니까.
- 콰아아앙!
그렇게 칼리안을 불러낸 이후 작은 성문과도 같은 별장의 정문 쪽에서 폭발음이 일었다.
별장의 지하에 피신해 있던 중 듣게 된 그 폭음에 깜짝 놀란 레릭이, '부서지는 건 그냥 다시 지으면 되니까 걱정 말아요' 라며 농담 섞인 소리로 안심을 시키려는 얀의 말에 다시 깜짝 놀라고 다른 의문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덴의 반응 때문에 또 한 번 깜짝 놀랐을 무렵.
별장 밖으로 나와 있던 시오나의 푸른 오러가 빛을 잃었다. 그것을 본 에일라가 눈썹을 살짝 들었다 내려놨고 시오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상관없다. 칼리안 왕자의 말대로 내 몸을 보호하는 오러는 그대로다. 오러를 잃은 것은 아니니 놀라지 말도록."
"안 놀랐어요."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당신 몸만 보호하면 뭐 해. 빨리 방법 찾아요."
"마음만으로 찾아질 방법이면 참 좋겠군."
"왕자님은 하셨어. 당신도 지는 것 싫어한다면서요."
적당한 핀잔과 적당한 부추김이 함께 든 말에 시오나가 입을 꾹 다물었다.
시오나와 엇비슷한 양의 오러를 지닌 칼리안은 제온의 마나 차단을 이겨냈다 하는데 자신은 대책을 찾지 못하고 있던 까닭이다.
"영주성 쪽은 어떠한가."
고개를 돌린 시오나가, 오렌지색 머리 마법사인 케인 테스만에게 물었다. 그러자 케인은 하릴없이 사라지는 마법을 지워내며 말했다.
"신호가 떠오르지 않고 있습니다."
"칼리안 왕자를 통해서도 연락을 취할 수 있다 들었다."
"소공작님이랑 통신 안 된대요. 휘트린이 펼친 방어막 때문인가봐요."
에일라의 입에서 나온 휘트린이라는 이름에 시오나가 잠시 먼 곳을 쳐다봤다.
휘트린의 보호막이 제온의 공격을 막았다.
그것까지는 좋았으나 그와 동시에 영주성이 고립됐다. 제온의 군사들은 영주성 대신 별장을 찾아와 공격하기 시작했고 영주성 안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발칸의 대원들이 안전한지 아닌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제온은, 휘트린은.
대체 무슨 생각일까.
멀리 영주성을 다 감싼 휘트린의 방어막을 보던 시오나가 침음을 냈다.
"영주성 공격이 여의치 않으니 우리를 인질로 삼으려는 속셈인가."
"우리 말고 시종분들을 노리는 거겠죠. 우리를 잡아다 어디에 써."
"나는 능력 좋은 소드마스터다."
"나도 능력 좋은 세작 출신 기사지망생이에요."
"그럼 쓸모가 있겠지."
"그래도 없다니까요, 쓸모."
- 카아앙! 카강!
능력 좋은 소드마스터가 몸을 날렸다.
그리고 부서진 정문을 넘어 짓쳐드는 놈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턱을 살짝 들어올리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일라가 조용히 움직였다.
- 스르릉······.
검을 뽑아들고 제온의 군사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 서걱!
- 콰아악, 콰직!
한 놈의 목을 베는 사이 달려드는 다른 놈을 향해 왼손의 단검을 뻗었다. 두 번째 놈의 명치를 파고든 단검을 재빨리 뽑아 심장을 다시 찔렀다. 어느새 지척까지 날아든 불의 화살로부터 몸을 피하자 그것에 대신 맞은 놈이 바닥을 뒹굴었다.
눈이 찌푸려질 만큼 강하게 타오르는 불꽃의 뒤로 잠시 몸을 숨긴 에일라가 품 속을 뒤졌다.
- 딸깍.
그리고 손에 잡히는 마력탄을 아무것이나 꺼내 멀리 보이는 제온의 놈들에게로 집어던졌다.
"터지려나."
마력탄은 터지려나.
아니면 저것도.
- 쌔애애액!
안 터지려나.
- 콰아아아앙!
거대한 폭음이 지축을 뒤흔든다.
비싼 철로 된 검 대신 비싼 돈을 들여 장만한 최상급 마력탄이 제온의 전사 열댓명을 집어삼켰다.
"저건 터지네."
감흥없는 에일라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발칸의 기사들이 달려나갔다.
- 쉬이익! 캉, 카강!
폭발에서 뛰쳐나온 이들을 향해 검을 내리긋는다. 그런 기사들에게 내리떨어지던 누군가의 물화살을 시오나가 쳐냈다. 그 사이 에일라가 내던진 단검이 물화살을 보낸 마법사의 미간에 박혀든다.
- 쌔애액!
- ······ 쿠웅!
그 후 눈에 보이는 두 명의 마법사에게 단검을 더 날려보낸 에일라가 다시 한 번 발을 박찼다.
발칸의 기사의 등에 검을 꽂으려던 놈의 발목을 걷어찬 뒤 그의 목에 단검을 박아넣었다. 그 후 곧바로 허리를 비틀어 제온 쪽에서 날려보낸 암기를 피한 에일라가 훌쩍 몸을 띄웠다.
방금 전까지 에일라가 있던 자리에 두 자루의 검이 박혀든다.
- 휘익!
- ······ 빠악!
높이 뛰어을라 자신에게 검을 보낸 두 놈 중 한 명의 턱을 무릎으로 올려 찬 에일라가 반대편 발을 뻗었다. 그리고 다른 한 놈의 복부를 걷어찬 뒤 곧장 목을 베어냈다.
- 서걱!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검을 뽑아든 에일라가 다음 놈을 향해 몸을 날렸다.
검으로, 무릎으로, 부츠의 뒷굽으로, 단검으로.
- 쌔애액!
- 콰아아앙!
그리고 마력탄으로.
몇 놈을 베어내고 또 몇 놈을 폭사시켰을 즈음.
- 체이스 형님 통해서 아리안느를 불렀는데, 왕궁 문은 닫혔고 아버지는 나가셨대. 연락이 안 돼.
깊은 물 속에 잠긴 듯한 칼리안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그 시간 앨런이 지그프리드 공작저에 가 있었음을 알지 못했던 까닭이다.
어차피 앨런을 기다린 것은 아니었던 에일라가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 나는 왕자님 불렀어요. 그러니까 왕자님이 오면 되겠네.
- 응. 숲의 길을 열었어. 그쪽으로 가고 있어. 내가 갈게. 갈 테니까, 에일라.
다음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무슨 소리를 하고싶은지는 듣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때문에 방금 피한 화살이 날아온 곳으로 단검을 날린 에일라가 다시 목소리를 전했다.
- 안 죽을게요.
- ······ 그래.
- 응.
- 에일라.
- 네.
- 갈 테니까.
- 알았어요.
- 기다려.
- 그럴게요.
목소리가 돌아온다.
- 죽지 말고······ 에일라.
- 응.
안 죽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