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81화 (482/527)

제85장. 멍(2)

휘트린의 내성 안과 외성 밖의 소통이 거의 단절됐다.

그래도 다행히 엘프의 도시에 들어선 칼리안과 연락이 끊기지는 않았다. 내성 안의 영주성에 있는 드미레아가 칼리안에게 이야기를 하면 칼리안이 외성 밖의 에일라에게 전해주는 식으로 말을 주고받을 수는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양측 모두 이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누가 뭐라 하건 어찌됐든 왕자인 칼리안에게 전서구 역할을 맡기기는 어려웠다는 이유는 결코 아니었다. 드미레아와 에일라에게 있어 칼리안이 고작 그 정도를 꺼려하게끔 만들 만큼 재미없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보다는, 대체할 수단이 있던 까닭에 굳이 칼리안을 가져다 쓸 필요가 없었다 해야 맞을 일이다.

- ······ 피잉!

휘트린의 내성 안, 영주성 쪽에서 푸른 불꽃 하나가 하늘로 올라갔다. 화려한 빛을 내며 떠올라 굉음을 내며 폭발하는 축제용 불꽃과는 확연히 달랐다. 거대한 소음도 비산하는 빛무리도 없이 곧게 오르다 금세 사라지는 것이다.

그 뒤에도 서너 차례, 이번에는 붉게 변한 불꽃이 시간차를 두고 몇 번인가 빛을 내다 흔적없이 사그라들었다.

- 피잉, 핑!

그러니까 저 불꽃 덕이다.

저것 덕분에 칼리안이 전서구 노릇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군에게는 상황을 알리고, 적에게는 마법사가 체류하고 있음을 경고할 수 있는 더 좋은 수단이 아니겠나.

"아직 특이사항 없습니다."

곧 별장 쪽에 머무르던 발칸의 기사가 자신들 중 가장 높은 직급의 마법사에게 짧은 보고를 전하는 것이 들려왔다.

마법사의 불꽃은 발칸 뿐 아니라 카이리스의 각 영주성에서 운영하는 군사들, 타국의 군대, 심지어 제온에서도 주요한 연락 수단으로 쓰인다. 물론 보안을 위해 불꽃의 색과 형태, 하늘에서 폭발하는지의 여부 등이 의미하는 바가 제각각 다르게 정해져 있었지만 그것을 연락책으로 쓰는 것만은 동일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불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정보는 당연하겠지만 기밀이었다.

"정말 별일 없는 게 맞을까요?"

때문에 영주성 쪽에서 띄워을린 붉고 푸른 불꽃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얀이 불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러자 태연한 표정의 에일라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답했다.

"맞아요. 이상없다는 뜻이에요."

"아······ 다행이네요."

"아직까지는요."

"아직까지는, 이라니요?"

"경계를 한 단계 을린다는 말을 덧붙였어요. 제온에서 들이닥칠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는 소리고요."

히나를 영주성에 안내한 뒤 별장에 되돌아와 있던 에일라는 담담했다. 영주성에서 곧 싸움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하면서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함께 있던 얀과 다른 두 시종의 표정이 아주 조금 굳은 것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혹시······ 칼리안 왕자님께서 알려주신 겁니까?"

그런 에일라를 쳐다보던 사람, 조금 전 보고를 받았던 발칸의 마법사가 물었다. 그런데 그 얼굴에 경계심이 가득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에일라가 오랫동안 히나를 호위했으며 그동안 발칸의 대원들이 에일라와 여러차례 대련하며 배움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이나 칼리안의 기사가 될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을 상황을 당면한 까닭이다.

"왕자님이 나한테 알려주신 것 많은데. 뭘 말하는지 모르겠네요."

"신호 말입니다, 브리지트 경. 그것을 알아보신 듯하여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를테면 발칸의 일부 대원들과 수뇌부, 그리고 칼리안과 르메인만 알고 있어야 할 불꽃 신호의 의미를 에일라가 파악했음을 알게 된 상황 말이다.

"나는 알아보면 안 되나?"

"경이 아실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걱정 말아요. 그런 것 여기저기 알려주실 왕자님 아니에요. 내가 알아낸 거지."

이렇게 말한 에일라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아무도 손대지 않고 있는 음식들 중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것은 얀이 미리 구비하여 마법 보존 처리까지 해 둔 식재료들을 가지고 발칸의 기사들과 레릭이 직접 만든 음식이었다. 영주성에서 음식과 요리사를 공수해 올 상황은 되지 못했으니 말이다.

혹시나 칼리안이 올까 하는 얀의 부탁에 따라 매 끼니마다 준비되어 올려지고 있는 커다란 생굴에, 채 썬 레몬 껍질이 들어간 올리브오일을 살짝 올려 제대로 음미하던 에일라에게 마법사의 말이 들렸다.

"그것을 직접 알아내셨다는 겁니까."

"그런 암호 하나 못 푸는 놈한테 정보 물어오는 일 맡길 사람인가, 왕자님이. 나 예뻐서 왕자님 옆에 있는 것 아니에요."

그런 암호라니.

기밀과도 같은 신호체계를 이렇게까지 가볍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칼리안의 편에 선 것을 다행이라 여겨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마법사가 잠시 입을 다문 사이 에일라의 말이 이어졌다.

"자기 사람이 의심받는 것 알면 왕자님이 많이 서운해 할 테니까 혹시라도 그러지는 말고요. 유능하다고 의심받으면 억울하잖아."

"의심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브리지트 경."

"그럼 됐네요."

문제될 것 없다는 듯 대답한 에일라가 마법사에게 향하던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 거의 다 비워져 있던 생굴 접시에 다시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영주성에서 싸움 나면 우리도 못 쉬어요. 시간 있을 때 먹어둬요."

잠시 대답하지 않던 마법사, 오렌지색 머리를 지닌 케인 테스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리법이 간단한 메뉴들로 차려진 저녁 식사를 이어나갔다. 경계를 서고 있는 이들이나 휴식 중인 시오나 힐을 제외한 나머지 대원들과 세 명의 시종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찌감치 식사를 마친 얀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대부분 손대지 않는 생굴을 열심히 가져다 먹는 에일라를 보며 입을 열었다.

"브리지트 경도 생굴을 좋아해요?"

숨기기도 어렵다.

빈 굴 껍데기가 에일라의 접시에만 가득하다.

"네. 좋아해요."

에일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세크리티아에 있을 때에는 생일이 와도 못 먹던 거라서."

칼리안이나 에일라가 출신을 굳이 숨기지 않은 까닭에 에일라가 '푸른 솔새'라는 이름의 세작이었음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아니, 딱 한 명. 란델의 시종 덴이 있었으나 그건 숨겨서가 아니라 서로 데면데면했던 탓이었으니 이 자리에서 세크리티아를 언급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세크리티아에서는 생일에 생굴을 먹어요?"

"그냥 좋아하는것 먹어요."

생일에도 못 먹는 음식이라 좋아하는데 생일에는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단다. 의미가 돌고 돌아 어느 것이 먼저인지 알 수 없는 대답이었으나 얀은 신경쓰지 않았다.

순서가 중요한가.

뭐가됐든 좋아한다면 된 거지.

"다행이네요. 왕자님께서 안 계셔서 남을까봐 걱정했는데 계속 잘 드셔주셔서요."

"왕자님이 생굴을 좋아해요?"

"네. 엄청 좋아하세요."

동글동글하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얀이 대답했다.

칼리안이 세크리티아에 있는 동안 생굴을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는 에일라도 잘 알았다. 다만 칼리안은 그냥 뭐든 많이 먹었다. 그래서 특별히 더 좋아하는 줄은 몰랐었다.

그런데 생굴을 좋아한단다. 칼리안이, 그 왕제가.

"아마 고기보다 더 좋아하실 거예요."

"······아."

왕족은 본래 날음식을 먹지 않는다. 익히지 않은 것은 위험하니까. 때문에 안 그래도 해산물을 잘 먹지 않는 카이리스의 왕궁 요리사가 생굴을 내어둘 일은 아예 없었다.

세크리티아도 마찬가지다. 값비싼 재료이니만큼 손님을 위한 요리에는 포함을 시키지만 왕족의 앞에 익히지 않은 굴을 두지는 않는다.

예전의 칼리안이든 그 왕제든 왕궁 안에서는 생굴을 먹어봤을 리가 없다는 소리다. 그런데 좋아한다니.

그 이유를 어쩐지 알 것 같다.

카이리스 출신인 키리에가 평생 구경도 못 해봤을 생굴을 왕제에게 권했을리가 있나. 세크리티아에서 몇 번을 만났던 아리안느는 생굴을 가까이 두지도 않았다. 그러니 왕제가 왕궁 밖을 돌아다녔던 시절에 접해본 뒤 좋아하게 되었거나, 아니면.

"그렇구나."

내가 좋아해서 좋아하거나.

- 달그락!

빈 굴 껍질을 내려놓은 에일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굴을 입으로 가져갔다. 생일에도 못 먹던 비싼 요리인데 이런 날이라도 실컷 먹어둬야지, 하고.

- 피잉! 핑! 피잉······!

그때.

밝은 오렌지 색의 불꽃과 흰 불꽃이 번갈아가며 몇 차례 하늘을 밝히다 사라졌다. 그것을 확인한 케인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탄산수 한 모금으로 입을 가신 에일라가 레몬이 든 물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몇 개의 흉터 자국이 언뜻언뜻 남아있는 희고 긴 손가락을 천천히 씻어냈다.

- 딸랑, 딸랑!

손을 씻는 작은 물소리 뒤로, 이곳을 향해 걸어오는 소드마스터의 방울소리가 들려온다.

곧 몸을 일으킨 에일라가 고개를 가만히 돌렸다. 그리고 이제까지 이야기를 나누던 얀과 다른 두 시종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려가 계세요."

영주성의 싸움이 시작되었으니.

* * *

새를 좋아하는 줄은 몰랐다.

오히려 꺼려할 줄 알았다. 새들이 장미 잎 위에 앉은 벌레를 잡아먹으려다 꽃을 떨궈놓지 않을까, 그러니 새들을 싫어하지 않을까. 그렇게만 생각했었다.

"새를 좋아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싫어할 이유가 있더냐."

"꽃을 떨구잖습니까. 자칫하면."

"아니다."

"안 떨굽니까."

"비바람만큼 꽃을 뒤흔들지는 않았다."

"그렇습니까."

더는 엘프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던 마음에, 이곳에 다시 온다 하더라도 그것이 썩 평화로운 방문은 아니리라 여겼던 까닭에, 그리고 바다에 오게 되니 와닿는 짙은 소금내에 아무래도 숨이 막혀서.

'저게 바다라는 거야, 레이븐. 너도 잘 봐둬. 이제 저기는 다시 못 볼 지도 몰라.'

처음 저 바다를 봤던 때까지만 해도 다시 오지 않으리라 생각하던 바다가 아니던가. 발칸의 대원들을 끌고 나온 플란츠가 그렇게나 검은 바다 위에 푸른 불꽃을 띄워올리는 모습을 보게 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때문에 다시 발을 들이기는 커녕 그속에 스스로 고개를 파묻게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던 짙은 바다 위에 새 한 마리가 날아가고 있었다. 붉은 깃도 푸른 깃도 흰 깃도 아닌, 별 의미를 둘 필요도 없을 어두운 깃을 지닌 새가 눈에 보였다.

"그나저나······ 갈매기는 아닌데. 저 놈의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네요."

"정작 저들은 제 이름을 모를 텐데 이름이 중요하겠느냐."

"그냥, 알려드리고 싶어서요. 이것저것."

이미 어둠이 졌으니 갈매기가 날 때는 아니었다. 갈매기나 다른 물새가 아닌 맹금이었다. 아마도 저 뒷편의 숲에 살다 이곳까지 사냥을 나온 모양이다.

그것을 좇아 움직이던, 새라는 것을 싫어할 줄로만 알았던 이의 푸른 눈이 칼리안을 향했다.

"새들을 잘 알 줄 알았더니 의외로구나."

"세작명은 왕궁에 있는 조류도감을 하나 펼쳐두고 대충 찾아 정해줘도 되고, 아니면 세작이 될 본인들이 정해서 오기도 하고요. 안 그래도 바쁜데 굳이 그 이름을 가지는 새들의 생김까지 다 외워 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하더냐."

"네. 저라고 왕궁 생활이 달랐겠습니까. 좁기는 마찬가지죠. 그나마 왕궁 밖을 돌아다닌 날이 있어 밖에 사는 사람들에게 나무와 풀은 좀 배웠습니다만 새를 배우지는 못했습니다."

"왕궁 밖의 사람들은 새를 모르느냐."

곧게 쏘아지듯 바다로 들어갔던 새가 물 밖으로 나왔다. 그 발톱에 얽힌 물고기가 없었다. 허탕을 쳤나보다.

"나무 열매나 풀에는 독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이름과 생김을 외워 둘 수밖에요. 먹으면 안 되는 열매는 무엇인지, 독초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나무 줄기를 상처에 대면 무슨 효능이 있는지, 그런 것들 말입니다. 그런데 새들은 아니잖습니까. 흔히 만나는 것들이 아니고서는 굳이 수고롭게 이름과 생김을 외워 둘 필요가 없죠. 잡으면 다 고기니까요. 그래서 저도 못 배웠습니다, 거기까지는."

"무엇이든 그들에게는 식량일 뿐이라는 얘기로구나."

"대체로 그렇습니다. 아마 텐실은 보다 더 심할 테고요."

란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민들에게 삶이란 곧 생존이 아닌가, 그런 이들이 새의 이름을 외워 두어 어디에 쓰겠나.

"그래. 그러하겠지."

"네."

다시 퐁, 하고. 파도 너머로 물방울이 튀어오르는 소리가 어렴풋이 났다.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은빛의 물고기 한 마리가 맹금의 발톱에 낚여 올려진 것이 보였다.

"잡았나 보네요."

칼리안의 말에 곁에 있던 플란츠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란델은 새에게 붙들린 물고기를 따라 숲 쪽으로 눈을 돌려보다 입을 열었다.

"축하를 하겠느냐, 아니면 애도를 하겠느냐."

"저 새와 물고기 중에 누구 편을 들 것인지를 말씀이십니까."

"그래. 하나가 살고 하나가 죽는 것이니 너라면 축하를 하겠느냐, 아니면 애도를 하겠느냐."

재밌는 질문이다.

"둘 다는 못합니까."

"못 한다 하면."

"글쎄요. 어찌해야 하려나."

칼리안의 상황을 빗대어 건넨 물음은 아니었다. 그런 말을 칼리안에게 직접 할 만큼 모진 옥수수수염이었다면 칼리안은 저 놈이 형제든 아니든 절대로 자신의 등 뒤에 둘 생각을 하지 않았을 거다.

그래서 칼리안은 화를 내거나 속상해하거나 혹은 곧장 대답하는 대신 눈을 돌렸다. 달빛이 깃든 연보라색의 눈으로 플란츠를 쳐다보며 물었다.

"형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별로."

저 말이 칼리안과 연관되지 않았다는 것은 똑같이 잘 알아들었을 완두콩이 성의라고는 일절 담기지 않은 대답을 했다.

별 수 없다.

완두콩 기분이 상해 있던 까닭이다.

혹시나 오해할까 덧붙이자면 완두콩이 상한 건 아니고 그냥 완두콩의 기분만 상했다는 소리다. 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잘 풀었던 기분이 왜 금세 상했느냐면.

'형님은 배 안 고프십니까.'

'······ 내 아우님께서는 이미 바닷물을 많이 드셨을 텐데. 허기가 들 여유가 남으셨는지.'

'소금물 많이 먹어봐야 소용이 있습니까. 고기도 많이 먹고 빵도 많이 먹어야 지금 만큼 키가 크죠. 키리에보다 작은 걸로 이미 족합니다. 누구 올려다보는 취미 없어서요, 저는.'

'그런 얘기 아니잖아.'

'그럼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바다에 멋대로,'

- 저벅, 저벅!

'돌아왔습니다, 왕자님.'

이렇게.

옆에 앉아있던 놈이 어느새 다시 내 동생으로 돌아왔음을 알기가 무섭게 본격적으로 혼을 좀 내볼까 했는데, 키리에와 윗층 거주자가 딱 때맞춰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란츠는 이번에도 또 칼리안을 제대로 혼내지 못했다. 혼날 짓을 한 것은 알고 있으니 부러 입 밖으로 말을 꺼내 혼을 내든 말든 이미 반성은 했을 칼리안이지만 괜스런 억울함이 든다. 둘 다 잘못을 하고 똑같이 반성도 했는데 나만 혼나고 내 동생은 안 혼난 셈이니까.

그 속내가 빤해서 슬쩍 웃은 칼리안이 다시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맞은편에 함께 앉아있던 키 큰 기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떻게 생각해, 키리에."

"둘 다 하지 못한다면 둘 다 안하는 것이 맞다 생각합니다."

"축하도 안하고 애도도 안하고?"

"네."

"공평하네."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란델을 쳐다봤다.

질 좋은 담요를 깔지도 않은 젖은 모래 위에 앉은 형제를 그렇게 한참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미안하십니까."

"무엇이."

"낚인 물고기는 죽어 사라지고 그것을 먹은 새는 하루를 더 살고. 세르제인의 자리를 빼앗아 하루를 더 살게 되는 것에 미안함을 느끼십니까."

"그리 보이느냐."

"그리 보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런 것까지 신경쓰실 분이 아니었다 여겼어서 놀랍기도 하고요."

"세르제인이 아니라 너를 말함이다."

란델이 이렇게 칼리안이 잘못 짚어낸 의도를 정정했다.

애초에 미안함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인 줄도 몰랐던 터라, 하필 그 미안함을 지금의 칼리안에게 가지고 있다는 말이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웠다.

"음······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때문에 칼리안이 이렇게 말한 뒤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귀를 탁탁, 손바닥으로 두드린 뒤 고개를 도리도리 가로저었다. 키리에에게 끈 하나를 얻어 묶었던 청은빛의 머리가 함께 요동치 다 살짝 흘러 내렸다.

"귀에 물이 들어가서 멍해졌나······ 환청이 들리는데."

피식 하고, 플란츠 쪽에서 바람 새는 소리가 들린다.

저 소리가 잘 들리는 것을 보니 귀가 멍한 것은 아닌가보다. 그런데 이상하다. 왜 헛말이 들리지.

"나를 경계하지 않은 적 없다 하더니, 이제는 아닌가보구나."

"제가 란델 형님을 편히 여기는 것 같아 좋으십니까."

"나쁠 것이 있겠느냐."

'음'

배가 고파 그러나.

아무래도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칼리안의 귀에 란델의 말이 다시 들려왔다.

"어찌되었건 세르제인이 아니라 너를 말함이다."

"란델 형님 저한테 미안하십니까. "

"아니라 하면 빈 말일 테고."

"왜요."

"형제를 등에 업고 생을 나게 되었으니."

이 말에 그제야 이해를 한 칼리안이 싱긋 웃었다.

"란델 형님 제 이름 팔아서 대장로 협박하셨습니까."

"협상하였다."

"다누가 텐실 쪽으로도 뿌리를 뻗어주기로 했습니까."

"그래."

칼리안의 이름을 팔아 협상을 마쳤단다. 란델이 텐실의 왕위에 오르면 다누가 텐실에도 능력을 내어주기로 했다는 소리다. 그렇게 되면 가뭄도 들지 않고 지진도 생기지 않고 병해도 나지 않게 될 터였다.

그러니 동생의 이름을 팔아 안락을 얻은 형을 축하해줘야 할지, 형의 안락을 위해 이름이 팔린 동생을 애석히 여겨야 할지. 그것을 묻는 말이었다.

그 기저에 미안한 마음을 두고서.

"장미 잘 자라겠네요."

"그러할 테지."

"저는 어떻게 포장해서 파셨습니까."

"다누가 말하기를 시스파니안이 이곳을 공격할 날이 오리라 했다더구나. 만약 그 일이 일어난다면 네가 한 번은 나서서 시스파니안을 설득하도록 하겠노라고, 그리 말하였다."

"······ 시스파니안이 이곳을요."

"그래."

다누는 미래를 보지 못한다.

그러니 시스파니안이 이곳을 공격했다는 이야기는 분명 '과거'의 일을 말함일 터였다.

시스파니안을 한 번 설득해보려 시도하는 일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칼리안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어찌됐건, "

- 왕자님. 바빠요?

그런데 칼리안의 말을 막으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나 구하러 와 줘야 할 것 같은데요. 멀리 있으려나?

칼리안이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에일라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