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80화 (481/527)

제85장. 멍(1)

칼리안의 별장에 하피가 있었다.

별장은 칼리안의 상급 시종이 마련한 것이었다.

칼리안은 그 일의 여파가 지그프리드에 대한 오명으로 번질까 우려했다. 왕위를 탐낸 3왕자가 지그프리드와 손을 잡고 왕세자 플란츠를 공격했다거나 하피를 수도로 보낼 계획을 세웠다는 등의 모함이 있으리라 여겼다. 때문에 드미레아가 직접 휘트린으로 내려와 진상을 조사하는 중이 었다.

그런데 상황은 칼리안이 예상과 다소 다른 방향으로 홀러갔다.

"저하께서 우리와 손을 잡고 벌인 일이라니?"

"말 그대로일세. 왕자님께서 호시탐탐 저하의 자리를 노리고 계시니, 저하께서 지그프리드와 손을 잡고 왕자님을 해하려 했다는 소문이네. 저하와 왕자님들이 왕궁으로 돌아오시면 가라앉을 말이기야 하겠네만 그래도 참고해 두라고 전해주는 것이네. 대장 코끼리 자네가 어디에서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서 칼부터 휘두르지는 말아야 할 터이니."

"아직도 두 분의 사이가 안 좋다 생각하는 이들이 있나?"

"사이가 좋다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것 같나?"

"하기사. 하여간 이게 다 내새끼가 워낙 유능한 탓이다!"

"말이 왜 거기로 튀나? 지금 이 소문이 마음에 드나보지?"

"싫어할 건 또 뭔가? 능력이 좋으니 이놈 저놈이 다 내새끼랑 손을 잡았다 소문이 나는 것 아닌가?"

"······ 이러니 칼 쓰는 놈들이랑은 같은 자리에 앉지 말라는 소리가 나오지."

"잊지 말게. 자네의 새새끼도 반절은 칼 쓰는 놈이라네."

"지금 내새끼 욕했나?"

"내가?"

"주둥이 놀린 코끼리 놈이 여기 또 있나?"

"내가 언제? 마법사 놈이 도로 새파래졌다 했더니 귀만 늙었어?"

이를테면 카이리스 최강의 소드마스터와 대륙 최강의 마법사가 나에랑샤 뒷골목의 건달이라도 된 양 말싸움을 하는 그런 상황 말이다. 아마 칼리안은 그 일이 이렇게 번질 줄은 상상도 못했을 터였다.

"칼리안 왕자님을 당신과 같은 선상에 뒀으니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이렇게 둘의 언쟁을 끊었다.

저보다 한참 어려보이지만 사실은 저보다 한참 나이 많은 대마법사와 말싸움을 벌이고 있는 대장 코끼리에게 핀잔을 준 이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저보다 한참 늙어보이지만 사실은 저보다 한참 어린 소드마스터와 말싸움을 벌이고 있는 대마법사를 향해 말을 이었다.

"휘트린 영지의 별장에 지그프리드 기사의 시신이 있었다 들었습니다. 저희 사람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혹시 모를 일이니 사일런트를 하시든 말을 조심하시든 둘 중 한 가지는 신경을 써주십시오, 후작님."

지그프리드 공작저에 마주앉아 말싸움을 하고 있는 공작과 후작을 혼낼 수 있을 사람. 바로 세리에였다.

앨런이 일단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조용히 사일런트를 펼쳤다. 말싸움을 그만하겠다는 게 아니라 말싸움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지가 고스란히 드러났으나 세리에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칼리안 왕자님은 어찌됐건 전하 새끼입니다."

그러더니 앨런의 새새끼, 아니. 앨런의 새아들이 기실 누구의 자식인지를 침착하게 알려줬다.

"게다가 칼리안 왕자님은 이 나라의 다음 왕이 되실 분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후작께서 그런 왕자님을 전하 몰래 양자로 삼으신 것은 누가 보아도 쉬이 납득될 일이 아닙니다. 농으로 치부하기에는 무거운 말입니다. 이곳이 아무리 편한 자리라 하나 잊지는 마십시오.

"미안합니다."

"새겨듣겠네."

세리에의 말에 순순히 사과한 것은 슬레이만이었다. 그리고 '주변에 듣는 귀가 없음을 이미 다 살핀 뒤에 꺼낸 말이었다' 설명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인 것은 앨런이었다.

그 둘을 보며 작은 한숨을 쉰 세리에가 다시 말했다.

"소공작이 칼리안 왕자님과 동맹을 맺은 사이임을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전하께서 소공작을 얼마나 신임하는지 역시 모두가 압니다. 그런 소공작이 세자 저하와 은밀히 손을 잡아 칼리안 왕자님을 해하려 했다는 것은 가벼이 여길 수 없을 소문입니다."

칼리안이 처음으로 제온의 공격을 받은 뒤 지그프리드 공작저로 몸을 숨겼을 때, 공작저를 찾아간 플란츠가 자진하여 드미레아의 인질 노릇을 한 일이 있었다. 덧붙여 둘은 칼리안이 실종되었던 것으로 꾸미기까지 했다.

당시 드미레아는 그 일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는 에반의 입을 막고자 꽤 재미있는 협박을 했었다. '플란츠 왕자가 동생의 정혼자 집에 단신으로 머물렸다는 소문을 만들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입 다물어라'는 내용의 협박 말이다.

그런데 그 일이 이제와 소란을 일으켰다.

드미레아의 협박에 에반은 그날로 입을 다물었다. 때문에 드미레아 역시 그러한 소문을 내지 않았으나 갑자기 이

상황에 그 날의 일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플란츠가 한밤중에 소공작이 혼자 머무는 저택에 왜 갔을까, 둘의 사이가 의외로 좋았던 것은 아닐까, 하고.

"그러니까 저하와 소공작이 테이블 밑에서 손을 잡고 있었다는 말 아닙니까?"

"맞습니다."

플란츠와 드미레아가 오래전부터 비밀스런 동맹 관계였다. 그러던 중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플란츠가 제 동생을 죽이려 들었고, 드미레아는 저와 손잡은 정혼자를 배신하며 플란츠를 도왔다.

이런 헛소문이 돈다는 소리다.

"혹여라도 웃으며 넘기지 마십시오, 공."

지그프리드가 배신이라니.

사이가 틀어진 것도 손을 놓은 것도 파혼을 한 것도 아닌, 뒷통수치기라니. 진작에 땅에 묻혀 이미 다 삭아 없어졌을 퀴트로스 혼 지그프리드가 착잡한 얼굴로 무덤에서 걸어나오려 할 정도의 오명이다.

"설마 웃으며 넘기겠습니까! 너무 허황된 말이라 잠시 농을 주고 받은 겁니다."

세리에에게 대답한 슬레이만이 앨런을 쳐다봤다.

"르메인은 뭐라 하던가?"

"하도 안믿겨서 내가 언젠가 전하께서 욕하시는 양을 내 귀로 좀 듣고 싶다 하긴 했지만 두 번 들을 것은 못 됐네."

"지랄맞을 소문이 났다 했나?"

"브리센이 지랄같은 소문을 뿌린다 하셨네."

"브리센이 한 짓이 맞기는 한가?"

"브리센이 아니면 누구겠나. 전하의 귀들이 확인을 했네."

소문의 근원지가 어디겠나.

당연히 왕궁에 감금된 그레이를 어떻게든 빼내보려는 브리센 측 귀족들이겠지.

라시드 브리센은 잡힐 기미가 없고 기껏 터뜨린 휘트린 영지 쪽의 소문에도 지그프리드가 별다른 손해를 입지 않으니 벌인 일임이 뻔하다.

시스파니 안의 등장으로 하늘 끝까지 솟은 르메인을 건드리지 못하니 플란츠를 건드리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역시나 변한 것 하나 없이 막돼먹은 성정의 아들'을 세자로 지목한 르메인의 명성도 흔들릴 것이 아닌가. 이참에 플란츠까지 궁지에 몰아 놓은 뒤 '우리 말을 잘 들으면 왕위에 올려줄게' 해가며 플란츠까지 손 위에 을려두고, 플란츠를 인질 삼아 그레이를 빼내겠다는 의도였다.

"하여간 지랄맞은 것들."

"그 어울리지도 않는 말을 가르친 게 자네인가?"

앨런의 질문에 슬레이만이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앞에 놓인 와인을 쭉 들이키고는 입을 열었다.

"아스난이 휘두른 검에 선왕이 죽고 르메인은 그걸 막으려다 옆구리를 베였지. 그때 르메인의 창자에 휑하니 구멍이 하나 생겼었네. 아무리 축복이 있었다지만 그 때에는 텐실 치유사도 없었고 르메인이 3왕자님처럼 튼튼한 몸도 아니었으니 안 죽은 게 기적이지."

르메인이 왕위에 올랐던 그 날의 이야기 였다.

지랄맞다는 욕을 언제 가르쳤는지에 대한 말이 리라.

"그런데 평생 책이나 본 작자가, 그 몸뚱이를 하고 돌아다니면서 에반의 검을 얻고 제 형을 탑에 보내더니 왕좌를 꿰차고 앉은 뒤에 아스난의 편에 섰던 귀족 놈들을 싹 다 광장에 세웠네. 그러고 나서야 정신을 놨나 싶었는데 그나마도 하루만에 일어나 앉더군. 그래서 내가 그랬지. 그놈의 왕관이 뭔지 몰라도 사람 참 지랄맞게 만든다고. 썩 들어가 누워 잠이나 처 자라고."

르메인이 소같지 않았던 시절의 얘기이기도 했다. 그 말을 들은 앨런이 물었다.

"그랬더니 뭐라하시던가?"

"구경이나 했던 주제에 지랄맞게 참견하지 말라고. 르메인이 나에게 그리 말했네."

앨런이 혀를 쯧 찼다.

그 의미를 모르지 않을 슬레이만이 와인병을 들었다. 그리고 세리에의 잔과 자신의 잔에 한 잔씩을 따르며 입을 열었다.

"그런 말을 할 줄 알았던 놈이 어쩌다저리 됐나, 싶지."

"코끼리 넌 또 뭘 잘했다고."

"하기사, 그렇지."

수도를 떠나 지그프리드 공작령으로 돌아간 뒤 오래지 않아 공작위를 물려받았다. 그 자리에 익숙해진지 오래지않아, 날 때부터 병을 앓았던 첫째를 잃었다. 그러자 둘째가 마음을 닫았다. 어르고 달래던 둘째를 떠맡기듯 왕궁의 어린 왕자에게 보내자 홀로 남은 셋째가 밤마다 악몽을 꿨다. 집착하듯 검에 매달리고 강박적으로 책을 봤다. 그런 세 자식에게 눈을 두느라 오랜 친구의 일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변명거리가 되지 못했다.

그 어린 셋째 왕자의 메마름을 본 것이 비단 슬레이만의 둘째 아들 뿐은 아니었던 까닭에. 둘째 아들 얀의 손을 붙들고 왕궁에 찾아왔던 슬레이만 역시 칼리안을 보았었던 까닭에.

"나도 잘한 것이 없지."

"누군들 잘한 놈이 있을는지."

슬레이만이 어쩌다 르메인에게 지랄맞다는 말을 가르쳤는지를 듣다 참 지랄맞은 기분이 된 앨런이 다시 한 번 혀를 쯧 찼다.

"······ 그리 될 줄을 알았다면 달라졌을 터인데."

앨런이 로닐과 함께 카이리스로 왔다면, 슬레이만의 첫째가 병을 앓는 것을 알았다면, 그래서 로닐이 그 병을 고쳐냈다면.

슬레이만이 공작령에 숨어 사는 대신 다시 수도로 올라오고, 그런 지그프리드를 브리센이 경계하여 조금쯤이라도 몸을 사리게 되고. 그리하여 슬레이만이 옛 친구의 동생이자 새 친구가 된 젊은 국왕에게 관심을 가져봤다면.

그랬다면.

참 많은 것이 달라졌을 텐데.

이런 생각이 들어서.

"넋두리는 그만하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세리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말에, 쓴 것을 잔뜩 삼킨 얼굴이 됐던 앨런이 가느다란 웃음을 지었다.

'왕자님께서는 그런 생각을 해보신 적 없습니까.'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시간을 돌리겠다 마음 먹은 이가 정말 저하가 맞았을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혹여 지그프리드 공이나 지그프리드 남작이 그것을 원했거나. 얀이나 드미레아······ 아니면 란델 형님이 바랐거나. 그도 아니라면 스승님께서 직접 시간을 되돌리고자 하신 것이 아닐까, 네. 생각을 했었습니다.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결론을 지으셨는지 여쭤도 괜찮을지요.'

'결론이 안 났습니다. 하나같이 후회할 일들이 참 많은 생이라서.'

'······ 그렇습니까.'

'누군들 어떠랴 싶기도 했고요. 누가 처음으로 마음을 먹었든 어차피 되돌아간 시간인데 이제와 누굴 의심하고 원망을 합니까. 넋두리 거리도 안 됩니다, 그건.'

발칸의 앞에 '베른'이 되어 싸움을 벌인 뒤.

세크리티아 왕궁의 첨탑에 찾아갔던 베른을 다시 카이리스로 데리고 오며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게 되었다. 세리에가 칼리안과 참 비슷한 말을 꺼내놓는 바람에 생각이 났다.

때문에 넋두리는 집어넣은 앨런이 슬레이만과 세리에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래서, 소공작을 불러올 생각인가?

"아닙니다."

"괜히 불러와서 내새끼까지 진흙탕에 발 디디게 할 필요 있겠나."

"그럼?"

"마법사 나부랭이는 모르겠지만, 쳐드는 공격을 상대하려면 막아내는 법은 물론이거니와 튕겨내는 법도 제대로 익혀 둬야 하는 법이네."

대륙에 딱 하나 뿐인 8서클의 마법사 나부랭이가 이에 대해 답을 하려는데 이번에는 세리에가 입을 열었다.

"그들이 둘째를 건드린 것에 셋째가 저희 대신 분개하기에 지켜보았는데 이제 셋째에게까지 손을 뻗는 것까지 그냥 두어서야, 그것을 부모라 할 수 있겠습니까. 저와 공작이 아무리 코끼리라 하나 신념에 앞서는 것이 생길 수 있음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저는, "

여유 가득한 목소리를 낸 세리에가 슬레이만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 남쪽 지방에서 지내던 날이 그저 무료해서 쇳덩어리같던 검사를 공작으로 만들어 둔 것이 아닙니다."

그래.

쇳덩어리같기는 했다.

세상에 그렇게 무식하게 검만 휘두르는 놈은 처음 봤었다. 멍청하다 멍청하다 놀려오기는 했으나 정말 멍청하여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것에는 일절 눈도 두지 않고 오로지 검만 붙들었던 모습 때문이 었다.

그 때의 슬레이만을 생각하며 함께 웃던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얼굴로 둘을 향해 말했다.

"사고 하나 거하게 치고 내려갈 셈인가."

"그래야지."

"네. 그럴 생각입니다."

내 아들에 이어 내 딸까지 머리 아프게 만들려는 놈들을 더는 그냥 두고보지 못하겠어서 그놈의 정치라는 것에 우리도 발이나 한 번 들여보겠노라고. 그렇게 한바탕 되갚아주고 난 뒤에 드미레아에게 작위를 물려 줄 심산이라고.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둘의 말을 들은 앨런이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이제 슬슬 우리 세리에랑 같이 한적하게 놀러다닐 때도 됐다!"

굳건히 지켜오던 신념보다 제 자식이 더 중한 줄은 아는, 이제는 공작이 된 쇳덩어리가 큼지 막하게 웃었다.

* * *

꽤 오랜 시간이 지나갔다.

- 무슨 일이 있어? 아니면 아직이야.

- 란델 왕자님께서는 아직 대장로가 대화중이십니다.

- 무슨 얘기를 그렇게 오래 해. 란델 형님 또 싸워?

- 아닙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곧 마무리 될 것 같습니다.

- 알았어. 일 있으면 얘기하고.

- 네, 왕자님.

- 그리고 이따 밤에 네 검을 좀 볼 거니까 생각하고 있어, 키리에.

- 감사합니다.

란델과 대장로 나르잔의 대화가 좀처럼 끝나질 않았다. 때문에 키리에에게 맡겨 두었던, 사실은 얀의 것이지만 잠깐 완두콩이 채갔던 그 팔찌를 통해 잠시 상황을 확인했다.

그리고 옆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밤에 키리에의 검술을 봐줄 생각인데. 구경해, 당신도."

살짝 인상을 찌푸리 려 하던 플란츠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동생 대신해서 개 키우겠단 얘기를 하러 찾아왔던 놈이 돌아가질 않고 있으니 저러는 것이리라.

심산은 짐작했으나 아직 '돌아갈' 생각이 없던 베른이 씩 웃었다. 그 꼴을 본 플란츠가 결국 입을 열었다.

"왜."

"지금 당신 동생 부르면 당신한테 혼날까봐. 혼나는 것에 익숙하질 않거든. 혼나 본 적이 별로 없어서, 나는."

지금이야 얀에게도 히나에게도 앨런에게도 혼이 나고 드미레아에게는 엄청 혼나면서 살지만.

아주 어릴 때 디에나와 루이즈에게 몇 번 혼이 났던 일을 제외하고는 혼난 적이 없던 베른의 말에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렸다.

"한 마디 묻지도 않고 바다에 들어갔는데. 그럼."

"물어봤어."

"제대로 안물어봤어."

"그 정도는 알아들을 줄 알았지, 나는. "

분명 조금 전까지는 서로 내탓이다 하던 놈들이 어느새 '생각해보니 네가 조금 더 잘못한 것 같다' 하고 있었다.

"바다에 들어가라는 소리가 맞냐고 안 물어봤잖아. 대체 바다엔 왜 들어간 건데."

"대책이 있나보다 했지."

"겁 먹으라고 한 게 누군데."

"어디 사는 완두콩은 향수를 들이부었는데, 바다 쯤이야."

"향수 들이붓는다고 안죽어."

"바다에 들어간다고 안 죽어."

"죽어."

"안 죽어."

지지 않겠다는 듯 말꼬리를 붙들며 대꾸한 베른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달이 을라 이제는 은빛으로 반짝이는 검푸른 물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안죽어. 이번에는."

"······ 말처럼 쉬울 것 같냐고 하지 않았던가."

"언제."

"향수 들이부은 날에."

"아. 내가 당신한테 얻어맞은 날."

이번에는 플란츠가 고개를 돌려 베른을 쳐다봤다.

말실수를 한 것을 안 베른이 서둘러 말을 바꿨다.

"아. 당신 동생이 당신한테 얻어맞은 날. 나 말고."

아직 존댓말 쓰기 싫다는 소리다.

존댓말을 쓰면 냅다 바다에 뛰쳐든 일로 혼날 것이 뻔하니까. 심지어 칼리안은 그 일이 온전히 제 잘못이라 했으니 혼나기를 피할 방법도 없지 않나.

"쉽다고 안 했어. 안 죽는다고 했지."

"어떻게. 왜 장담하는데."

"마음먹은 일 두 번 어기는 것 싫어하니까. 당신 동생은."

그것이 30년, 50년을 더 살겠다는 다짐이든 개를 키워보겠다는 다짐이든.

두 번 어기지는 않겠다는 말을 했다.

"안 죽어. 어쨌든. 그러니까 당신 동생 새끼 건져온다고 앞뒤 안 재고 달려드는 짓 좀 그만해. 그렇게 안 해도 안 죽어. 안 죽을 테니까."

"······."

"대답."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베른이 잠시 멍하니 먼 바다를 좇다 말했다.

"자세히는 몰라. 카이리스 3왕자가 실리케를 암살하려던 증거가 발견됐어. 그래서 죽은 건 맞아. 독차를 마셨던 건 몰랐어. 세크리티아에 전해진 얘기에는 그런 말 없었으니까."

"그럼."

"암살됐어."

자살로 위장된 교살.

과거의 칼리안이 사망한 구체적인 이유까지는 입에 담지 않았다. 굳이 그런 자세한 내용을 알려가며 괴롭힐 목적으로 꺼낸 말이 아니었다.

"과거든 지금이든, 당신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죽인 건 실리케야. 당신이든 란델 왕자든 국왕 르메인이든 싹다 잘못했지만 죽인 건 실리케야."

"알아."

"그건 우리에게 오답이었고 실리케에게 정답이었을 뿐이야. 당신이 혼자 잘못해서 그 애한테 오답을 알려준 게 아니라. 결국 그건 그냥 그렇게 된 일이야."

"······알아."

"경우의 수 하나하나, 변수 하나하나, 그래. 똑똑하게 계산 잘한것 알아. 이번에는 틀리지 않은 것도 알아. 당신이 제대로 계산했고 내가 전부 다 정답으로 만들었으니까."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당신이 계속 그렇게 틀릴까봐 전전긍긍하면, 나는 당신이 틀린 답에 발이 묶일까봐 뭐든 전부 다 정답으로 만들 수밖에 없어. 그럼 나는 또 바다에 들어갈 테고 당신은 또 시들시들해지는 거야."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지만 언제까지고 모든 일에 대한 수를 계산해가며 살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러지 말자."

"······ 응."

"안 죽을게. 정답을 내든, 오답을 내든."

"알았어."

- 철썩······!

어느새 식상해진, 평온하기 짝이없는 파도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플란츠는 고개를 끄덕였고 칼리안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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