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장. 감쪽같이 속았네(6)
숨겨진 것들이 아직도 많았다.
모르는 일들이 여전히 많았다.
"이번엔 내가 무섭게 한 것 아니야. 네가 왔어."
숨겨지고 모르는 일이 아직도 여전히 한가득이라, 아르나이젤의 말 뜻을 깨닫기까지 아주 조금 시간이 걸렸다.
"바다가 무섭다고 했었잖아."
"아."
덕분에 이렇게 아르나이젤의 설명을 더 들은 뒤에야 제대로 이해를 했다.
아르나이젤은 다누와 달랐다. 베른의 외양을 하고 있음에도 신경쓰지 않고 곧바로 세크리티아에서 자신과 만난 칼리안이 했던 말을 꺼내놓고 있었다.
하기사.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다누와 달리 용이란, 마법의 원류와도 같은 존재들이라 하지 않던가. 그들의 눈에 마법으로 꾸며낸 눈속임이 통할 리가 없었다.
어찌됐건 변장용 마법 물품으로 아르나이젤을 속이려 한 것은 아니었던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전했다.
"그래. 바다 무섭다고 했었어."
"이제는 안 무서워?"
"무서워. 아직도."
"그런데 왜 왔어?"
"네가 있다고 해서."
"나를 만나러 왔어?"
"그래."
"그 조각은 왜 네가 가지고 있어?"
"시스파니안께 받았어."
"시스파니안을 만났어?"
시스파니안은 모든 것을 이해하고자 했다.
아르나이젤은 모든 것을 궁금해하고 있다.
정작 아르나이젤에게 질문하러 온 것은 칼리안인데 끝없는 질문세례는 아르나이젤이 한다. 이래서야, 앞에 선 이가 아르나이젤인지 아리안느인지 궁금해질 판이다.
"아니. 시스파니안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해서 내가 착각했어."
시스파니안과 비슷하지만 또 조금 다른 모습. 지상의 용과 비슷하지만 또 조금 다른 종족이기에 그러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성격 차이일까. 아직은 알 수 없을 일이다.
"아무튼 너를 만난 이후에 내가 시스파니안의 둥지에 갔었어. 거기에서 시스파니안을 만났고 네가 가지고 있던 조각을 전해 받은 거야."
"그걸 인간의 왕에게 줬어? 시스파니안이?"
"그래. 나에게 주셨어. 시스파니안께서."
"그랬구나."
"그리고 나는 인간의 왕이 아니야."
"하지만 다누는 그렇게 불러."
"아니야. 아무튼."
다누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름을 좀 알려줘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한 칼리안이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머리 위로 내리치는 파도가 보였는데 어느새 깊고 깊은 물 속이다. 아주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그새 이런 곳으로 끌려왔다.
아르나이젤을 처음 만났던 날처럼 거대한 기포로 둘러싸인 칼리안이 시선을 돌렸다. 검고 푸른 빛으로 반짝이는 지느러미를 지닌 어린 인어, 그런 모습을 한 아르나이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시스파니안께서는 나비를 좋아하시던데. 너는 생선 좋아하나봐."
저 어린 용의 질문을 좀 멈추도록 하기 위해서 꺼낸 말이었다. 생선이라는 말을 꽤 싫어했으니 말이다.
"생선 아니야!"
생각한대로, 여지없이 억울해하는 대꾸가 전해진다. 싱긋 웃은 칼리안이 아르나이젤의 앞에 본론을 꺼내들려는데 아르나이젤의 말이 먼저 들렸다.
"그리고 좋아해서가 아니라 인간들이 무서워하게 만들려고 이러는 거야.
본론을 꺼내야 하는데.
아르나이젤의 저 말이 너무 궁금하다.
칼리안이 제 입을 닫아걸고 싶어하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인간들이 무서워하게 하려고 인어 모습을 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인간들이 나비를 무서워하잖아."
"그렇다기 보다는 검은 나비를 꺼려하는 거야."
"검은색 뿐이라 해도, 꺼려하는 거라해도, 어쨌든 나비 근처에 안 가잖아. 시스파니안 때문에."
"그게 왜 시스파니안 때문이야?"
"나비는 시스파니안이 아니라 시스파니안의 반려가 좋아했던 거야. 시스파니안은 나비 말고 반려를 좋아했어. 그래서 시스파니안이 반려가 묻힌 곳에 나비 모습을 하고 매일 찾아갔었어. 그랬더니 인간들이 나비를 피했어. 그래서 나도 인어가 된 거야. 그렇게 하면 인간들이 인어를 멀리 할 거잖아."
"······ 그래서 나비를."
죽은 왕의 무덤에 검은 나비가 계속 찾아들었다. 그것이 시스파니안일 것이라 상상도 못한 이들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검은 나비를 죽음의 상징으로 삼았다. 꺼려했다.
그것을 칼리안이 시스파니안에게 말했었다. 검은 나비를 사람들은 환영하지 않는다고. 시스파니안은 제 후손의 그런 말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서운해하거나 해명을 하지도 않았다. 분명 억울했을 텐데도. 하츠아라 역시 사람이었으니, 환영하지 않는다는 그 말이 분명 서러웠을 텐데도.
"만나면······ 사과를 드려야겠네."
이제야 안 사실 때문에 반성을 한 칼리안이 아르나이젤을 쳐다봤다.
"경우가 달라. 푸른 용이 생선 꼬리를 달고 나타난다 해서 인간들이 인어를 무서워하지는 않아. 애초에 인어는 만나기도 힘들잖아. 그러니까 헛수고 말고 원래대로 하고 다녀."
"헛수고야?"
"헛수고야."
"소용없어?"
"없어."
정말이지 어린애가 따로 없다.
칼리안의 말에 입술을 비죽이던 아르나이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팔을 놀려 '팡!' 하는 소리라도 낼 것처럼 제 꼬리를 가볍게 쳤다. 그러자.
- 사아아아!
직전까지 어린 인어의 모습이던 아르나이젤이 본신을 드러냈다. 사람과 비슷한 크기 였던 몸이 거대하게 부풀다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길게 뻗어나갔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거대하고 긴 뱀의 몸에 박쥐 날개를 달고 있다 했던 이야기 속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래, 이야기책에서 보았던 바로 그 모습.
그림으로나 보았던 진짜 해룡이 되었다. 바닷속임에도 날개가 펄럭이는 소리가 나는 듯한 착각이 든다.
그런데 딱 한 가지의 차이가 있었다.
그 몸체가 푸르지 않았다. 세크리티아에서 타봤던 커다란 배보다도 더 거대한 날개 역시 칼리안이 알던 색이아니었다. 달랐다. 그 다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던 칼리안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어머니 나무의 생김이 꽤 인상깊었나."
만약 어머니 나무를 한 조각 떼어내어 해룡의 모습으로 만들었다면 저렇지 않을까. 칼리안이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 아르나이젤은 크리스털을 깎은 듯한, 세크리티아의 일출을 보기 위해 올랐던 그 배에서 마주쳤던 바로 그 투명한 고래와 같은 색을 하고 있었으니까.
"이게 내 본래 모습이야."
"세크리티아의 선원들은 네 모습을 그렇게 전해주지 않았어. 인어를 봤다 해도 그게 너라는 건 몰랐겠지만, 네 본신을 본 이들은 다르게 말했어."
"이렇게 돼 버렸어."
"바뀌었다는 소리야?"
한 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거대한 해룡의 눈이 칼리안을 향했다. 칼리안을 감싸안은 기포보다 더 큰 듯한 흑진주색 눈을 한 번 깜박인 아르나이젤이 대답했다.
"바다의 색을 잃었어."
"색을 잃다니?"
"얼마 전부터 조금씩 이렇게 바뀌었어. 예전의 색이 되려면 내가 일부러 만들어야 해. 지금 네가 그렇게 하고 있는것처럼."
사파이어와 흑진주를 섞어 둔 듯하다던 검푸른 몸체와 영롱한 검은 빛의 날개. 그 색을 잃었다 했다. 다누와도 같은 빛으로 서서히 바뀌어 버려서, 예전의 빛을 내려면 지금의 칼리안이 베른의 모습을 취한 것처럼 따로 마법을 부려야 한단다.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아르나이젤의 거대한 시선이 칼리안의 눈을 직시했다. 자신의 것과 판이하게 다른 연보랏빛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시간을 다시 움직일 거야? 그 방법을 물어보려고 나를 찾아온 거야?"
갑작스런 본론이 었다.
"네가 탈색됐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와?"
"다누가 그랬어. 시간이 되돌아갔고 네가 나타났다고 했어. 그 때부터 내가 바뀌게 된 거라고 다누가 알려줬어. 시간이 다시 돌아가면 나도 원래대로 돌아가게 되는 거야?"
저 시퍼런 생선이 탈색됐단다. 내가 온 이후부터 그렇게 됐단다. 그런데 시간을 되돌리면 다시 염색이 되는지를, 아니. 원래의 색을 찾게 되는지를 묻는다.
본래대로 되돌아가느냐는 그 말은 기대감을 담은 질문이 아니었다. 정말 순수히 궁금하기 때문에 묻는 말이었다. 아르나이젤의 표정을 살피기에는 칼리안의 눈에 뵈는 것이 거대한 눈밖에 없었으나 그 감정이 함께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일단, 그 조각을 네가 어떻게 사용했는지 알려고 왔어."
"내가 알려주면 너는 시간을 되돌릴 거야?"
"시간은 되돌리지 않을 거야."
"아, 그럼."
그랬더니 또 한 번, 뜻하지 않은 대답이 들려왔다.
"——처럼. 그렇게 쓸거야?"
라고.
때문에 더욱 혼란한 기분이 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누구?"
"——."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 세크리티아 대왕을 말하는 것이라면. 맞아."
"어? 어떻게 알았어?"
"그걸 쓴 사람이 한 명 뿐이잖아."
"아, 그러네."
세크리티아 대왕은 존재가 잊힌 이가 아니었다. 자신의 기록을 전부 다 지우기로 결정한 이였다. 베른과는 달랐다. 그럼에도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이런 의문을 지녀보아야 아는 바가 있다 해도 알려주지 못할 것 분명한 아르나이젤이다. 때문에 적당히 단념을 하려는데 아르나이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똑똑한 인간이야."
"나보다 똑똑한 인간 하나 더 있어."
"그래?"
"그래."
아르나이젤이 웃는 얼굴을 했다.
칼리안만한 크기의 눈이 살짝 휘어졌다는 의미다.
"아무튼 너도 똑똑하니까, 마나가 흐르는 것을 읽을 줄 알지?"
"알게 됐어. 얼마 전에."
아직은 익숙하지 않지만.
이렇게 덧붙인 말을 들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얼굴을 한 아르나이젤이 손을 뻗었다. 아, 물론. 그 긴 몸통에 달린 짤막한 네 개의 발 중 앞에 달린 것 하나를 손이라 불러도 좋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완두콩이 루시와 안네의 앞발 두 개를 '손'이라 부르곤 했으니까. 쟤가 가진 앞발도 뭐, 손이겠지.
"시스파니안이 내가 너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그랬어. 너를 바다에 두고 가면 안 됐는데 신경쓰지 않았다고 했어. 너는 바다를 무서워 한다고 했는데 내가 잊어버려서, 인간은 약하고 인어와 다르다는 것도 잊어버려서, 내가 너에게 '잘못'했다고 말했어."
혼났다는 소리다.
그 바다 속에 칼리안을 혼자 두고 온 것에 대해서.
아직은 어린 용이라하더니 정말인가 보다. 그런 생각이 든 칼리안이 피식하고 웃음을 홀렸을 때, 푸른 은빛의 기운이 아르나이젤의 손 끝에서 뻗어나왔다. 그것이 곧 칼리안을 감싼 기포 속으로 들어오더니 품에 넣어 두었던 마법사 주머니로 스미듯 사라졌다.
그러나 그 뿐. 특별히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 기운이 칼리안의 몸을 휩쓸고 지나가기라도 했다면, 어릴 적 루이즈가 읽어주었던 용사의 이야기처럼 갑작스런 큰 힘이 풍풍 솟아나지 않을까 기대라도 해보겠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당연히 특별한 지식이 머릿속으로 들어온 것도 아니었고 곧바로 느껴질 만한 다른 어떤 변화도 없었다.
그저 여상했다.
"다시 살펴보면 보일 거야. 알아낼 수 있을 거야."
직접 확인하란다.
역시 인생은 이야기책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무엇 하나 호락호락한 것이 없다.
"알겠어."
"미안해. 이번에는 제대로 데려다 줄게."
"그래. 고마워. 알려줘서."
아르나이젤의 사과를 잘 받은 칼리안이 고마움을 전했다. 저 건망증 심한 어린 용의 콧구멍에서 퐁퐁퐁, 거창한 힘 말고 그냥 유쾌한 기포가 둥실둥실 수면 위로 오르는 것을 보면서.
"그럼 반가웠어. 또 봐!"
다누의 힘이 깃든 바다에서 인어들의 보호 아래 자란 해룡의 발랄한 인사가 들려온다. 설마 이렇게 사과하고도 또 바닷속에 내버려두고 가는 것은 아니겠지 하고 잠시 불안해하는데 시야가 바뀌었다.
다시 까마득한 어둠이 찾아들었다.
귓속이 웅웅웅, 드센 파도소리가 적막을 깬다.
- 쿠구궁······ 우웅!
폭풍이 강했던 어느 밤, 별장의 지붕에 올라 내려다보던 바다의 소리가 지척에서 들린다. 그리고 그 사이로.
"칼리안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또."
아니, 왜 또 삶아졌나.
들어갔다 나오라 할 때는 언제고.
이렇게 툴툴거리는 사이 어둠이 걷히고 시야가 돌아온다. 겁도 없이 저벅저벅 파도를 향해 발을 옮기는 완두콩이 보인다.
"수영 못하십니다. 파도 심해서."
이제 간신히 물에 뜰 줄 아는 놈이나 평생이 가도 물에 뜨는 법을 못 배울 놈이나 저 파도 앞에서는 똑같은 조약돌 신세임을 알아서 서둘러 걸어갔다.
잠깐 실례 좀 하겠노라는 말도 까먹고 온 몸에서 바닷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도 잊어버리고 완두콩이 더 굴러가지 못하게 일단 붙들어 잡았다.
"어찌나 똑똑하신지. 형님 말씀 틀린 것 하나도 없네요."
삶은 완두콩 소금물에 절여지기까지 하면 큰일나니까.
* * *
짧은 협상을 했다.
- 다누가 나를 납치하지 않았음은 이제 안다. 다만 그 방법이 상당히 강제적이었음은 너희들도 이해할 것이라 믿는다. 그것을 묵과할 테니 저기에 있는 머리 긴 놈이 나를 '형님'이라 부르는 것에 대해 너희들도 묵과해라. 내 동생은 지금 휘트린 영지에 있으니까.
이렇게.
나르잔 때문이었다. 나르잔은 데블란을 봤었지 않나. 거기에 더해 칼리안의 성격이 데블란을 닮았다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칼리안은 이곳에 굳이 베른의 모습을 하고 찾아왔다.
'데블란을 봤어도 상관없습니다. 아무리 외견이 닮았다 한들 저와 세크리티아를 연관짓지는 못합니다. 발칸의 대원들을 보시지 않았습니까.'
발칸과의 전투로 알게 된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의 앞에 '베른'의 모습을 드러냈음에도 아무도 의문을 보이지 않았다. 베른의 모습을 기억하고 멋지다 할지언정 베른과 체이스를 연관지어가며 궁금증을 부풀리지 않았었다. '세크리티아의 국왕을 닮은, 청은빛의 긴 머리카락을 지닌 사람'이 누구인지 자세히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외부로 베른의 모습을 알리지 못하도록 함구하라 하였으나 그와는 다른 문제였다. 마법사의 호기심은 그저 입을 다문다 하여 사라지는 것이 아니지 않나.
'아마도······ 그 역시 세렌티의 금제가 아닐까요.'
그 모습이 베른의 이름만큼 강력하게 지워지지는 않았다. 다만 란델이나 아리안느처럼 칼리안의 정체를 눈치채거나 알고 있던 이가 아닌 이상은 아무도 그 모습을 궁금해하지 않게 되었다.
당연히 가져야 할 호기심을 잃어버린다.
이름을 지운 것과 다를 바 없을 지독한 금제였다.
'짜증나는데.'
'왜 형님께서 짜증을 내십니까.'
'내가 안 내면. 아우님께서 화를 내실 건가.'
'화 안 나는데요.'
'왜.'
'하도 많이 들켜서, 화를 내자니 이제는 좀 민망합니다. 게다가 의문을 안 가진다면 얀이나 전하께 들킬 위험도 줄어들고요.'
칼리안은 그러려니 했다. 오히려 더 좋다 했다. 그래서 플란츠는 일부러 나르잔과 그런 협상을 나눴다.
칼리안은 굳이 그럴 필요도 없으리라 했으나 플란츠는 아니었다. 그렇게까지 해 가며 내 동생이 허구였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지가 않았으니까. 그래서 정당한 대가를 내어 주며 '베른'에 대해 눈감아주기를 요구했다. 비록 '칼리안이 이곳에 온 것을 묵인하라'는 정도로 포장한 말이기는 했으나 속내는 그랬다.
"그래서 기어코 그것으로 협상을 하셨습니까."
어느새 많이 잠잠해진 바다에 석양이 든다.
나르잔을 만나러 간 란델과 그런 란델을 호위하러 간 키리에를 기다리는 동안 칼리안은 다시 바다로 나왔었다.
바닷속에 잠긴 기분이 아직 온전히 나아지지 않았는데 사방이 막힌 곳에 있으려니 괜스레 숨이 막히는 것 같아서 그랬다. 탁 트인 바다를 보면 차라리 숨도 같이 트일까 하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모순되게도.
물론 플란츠도 잊지 않고 데리고 나왔다. 명분을 생각하자면 호위할 사람이 없었다는 이유였고, 솔직하게는 혼자 나가 있으면 자칫 또 숨이 막힐 것 같기도 했고.
"차라리 란델 형님의 일이나, 아니더라도 요구할 만한 다른 중요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텐실에 대한 협상은 란델 형님이 지금 알아서 하고 계실 텐데."
"그러니까요. 훨씬 수월해졌을 것 아닙니까."
"내가 왜."
짧게 대꾸하던 플란츠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란델 형님에게 좋은 일을 해야 하는데."
이 말에 칼리안이 조금 의외라는 얼굴이 되었다.
플란츠가 란델에게 좋은 일을 안 하겠다는 말 때문이 아니었다. 이제는 그냥 당연하게 여겨지는 얘기였으니 그것 때문에 놀랄 일은 없었다.
"형님 말씀 길게 해주시네요. 네 글자로 말씀해달라 해도 싫다 하셨었는데요."
"또 이상하게 듣고 이상한 일 할 것 아냐."
"형님 말씀이 짧아서 바다에 들어간 게 아니라 제가 이해 못해서 들어간 겁니다."
"왜 그렇게 얘기하는데."
"그래야 또 쓸데없이 형님 탓 안 하실 것 아닙니까."
"그럼 둘다 잘못한 것 아닌가."
"아닌데요."
"왜. 굳이."
"굳이 알려드리지도 않은 일 알아내서까지 자책하시는 분인데. 하나라도 줄이셔야죠."
바다에 휩쓸려 또 잃어버린 가죽끈을 다시 구하지 않은 까닭에, 바다를 비추는 붉은 금빛의 물비늘과 확연히 다른 청은빛의 긴 머리가 바람에 나풀나풀 흔들렸다. 익숙하게 거치적거리는 머리를 길게 쓸어넘긴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들었습니다. 어쩌다보니."
익숙하지 않은 이가 통신용품을 다루다 보면 겉으로 내는 말과 속으로 전하는 말이 섞이곤 한다. 집중하지 못한 이가 통신용품을 가졌을 때에도 비슷한 문제가 생긴다. 어느새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전하게 된다.
그 똑똑한 플란츠가 다누에게 제 동생의 얘기를 할 때, 마력을 불어넣을 필요도 없을 플란츠의 팔찌와 칼리안의 반지가 다시 빛났다. 플란츠가 다누에게 전한 겉말이 곧 속말이 되어 칼리안에게도 전해졌다. 칼리안이 제 생각을 통째로 전했던 것처럼, 그 속말에 섞인 기억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 덕에 칼리안은 굳이 들춰보지 않았던 기억 하나를 더 떠올리게 되었다.
"이번에도 감쪽같이 속았네, 하고 뒷통수를 살살 쓰다듬다가······ 아무래도 좀 화가 나서. 겁을 좀 먹으라 했더니 겁은 안 먹고 쓰지 말라 했던 머리만 그렇게 또 혹사를 시켰으니. 내가 썩 좋아하는 방법은 아니었어서 당신이 다누와 얘기 마치고 나오면 한 소리를 할까 했었는데."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못 내겠더라고. 나는."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동안 일렁이는 바다만 쳐다보던 베른이 입을 열었다.
"개 키울게. 내가 대신. 꼭."
"······ 약속 안 해도 키울 텐데."
"약속을 해야 안 잊고 키우지."
"알았어."
"대사막 개로 키우면 되겠네."
"왜."
"좋잖아. 크고. 따뜻하고."
자책하지 말라는 말은 못 하겠어서.
당신 잘못이 없다고도 못 하겠어서.
"그래."
그냥 약속을 했다.
칼리안이 아닌 베른이, 칼리안을 대신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