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장. 감쪽같이 속았네(5)
똑똑한 완두콩.
그 똑똑한 완두콩이 가정의 의미를 두 번이나 썼다.
'아르나이젤이 있을 거야. 아마도.'
이렇게 말이다.
플란츠가 저만의 방식으로 다누를 협박하고 회유하기 전까지는, 플란츠가 그 많은 경우의 수를 하나하나 다 들여다보고 계산을 마쳤다는 사실을 다누에게 알릴 필요가 없었다. 지나친 신임을 주기에는 칼리안 역시 다누를 신용할 수 없었던 탓이다. 칼리안이 쑥쑥 키워낸 완두콩이 얼마나 똑똑한지를 제대로 알게 되었을 때 다누가 믿음을 가질지 욕심을 가질지를 확신하지 못했으니까.
때문에 조금 전 칼리안은, 플란츠가 반만 추측한 사실 하나를 믿고 자신을 따라왔느니 변수를 생각 못했느니 잔뜩 실망한 것처럼 연기를 해놓고 다누의 영역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실상은 아니지 않나.
완전하지 않을 수 있는 계산 결과에 덥썩덥썩 목숨을 걸지 말고 변수를 좀 겁내보라 가르쳤더니, 벌어질 수 있는 온갖 변수와 경우의 수를 그냥 싹 다 가늠해 하나하나 대비하는 것으로 '겁'에 대한 절충안을 제시한 똘똘한 완두콩이 아닌가.
아무튼 지금 당면한 문제는 완두콩이 겁을 내느냐 마느냐, 혹은 완두콩이 얼마나 똑똑하느냐가 아니었다. 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목숨을 거는 일을 겁내는 것에 지나치게 서툰 까닭에 아예 그냥 겁을 안 내도 될 상황을 만들어나가는, 실로 참신한 문제 해결법을 떠올리고 고스란히 실천 중인 그 괴물같은 완두콩이 장담하지 못한다는 말을 했단 말이다.
무려 두 번이나.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 하."
그러니 플란츠의 저 말을 칼리안이 이해한 내용대로 바꾼다면 '아무래도 아르나이젤이 없을 테지만 사람 일이란 본래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인데다 헛수고를 한다 해서 특별하게 손해가 생길 일도 아니니 산책이나 하는 셈치고 그냥 한 번 슥 다녀와 보든가' 정도가 될 것이다. 이런 파도의 앞에 절대로 가까이 가지 못할 칼리안임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키리에."
"네. 왕자님."
그래.
그래서 고민을 안 했다.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란델 형님 옆에 있어."
모르지 않을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로 들어갈 것을 권한 플란츠니까. 믿어달라 했으니 믿어드려야지.
무엇이든.
숨이 막히면 바람을 불러내면 되겠지, 수면 위의 공기를 끌어다 담은 바람을 바닷속으로 가져오면 숨이 막혀 죽지는 않겠지.
그 정도의 준비만 마치고 바닥에서 발을 뗐다.
긴 숨을 폐에 담지도 않았다.
- 타아앗!
그리고 발을 박찼다.
세상의 누가 보아도 절대로 평온한 광경이라 평할 수 없을 바다로 몸을 날렸다. 엘프 장로 나르잔이 놀라거나 키리에가 칼리안을 붙들어 잡을 틈도 없이 바다를 향해 뛰었다.
- 우우우웅······ 우웅!
모래사장에서 딱 한 발을 더 들어갔을 뿐인데 온 몸이 이미 다 젖었다. '철썩 철썩' 따위의 식상한 표현으로는 설명되지 않을 파도의 굉음이 고막을 괴롭힌다. 바닷물을 머금어 축 늘어진 머리카락이 새삼스레 묵직했다.
푹푹 파고드는 바닥을 꾹꾹 밟아가며 한 걸음. 머리 위에서 내리꽂히는 파도에 휩쓸리지 않도록 오러를 움직이며 한 걸음. 목 끝까지 차오르다 어느새 허리춤까지 가라앉더니, 다시 곧바로 하늘을 가리며 짓쳐드는 그 짙푸른 두려움에 진저리를 치며 또 한 걸음.
- 쿠궁······!
- 우우웅, 쿠구구궁!
오러가 아니었다면 깊고도 어두운 바닷속으로 이미 휩쓸렸을 몸을 꼿꼿이 세웠다. 머리 위로 여지없이 파도가 떨어진다. 익숙하지 않은 소금물이 눈앞을 가린다. 숨을 막는다.
입술 끝을 끌어올렸다. 웃음이 났다.
정신 나갔지.
처돌았지, 내가.
바다라니.
미치다 미치다 돌아버렸지.
바다에 들어가다니.
- 우웅······ 우웅······!
파도가 밀려들고 쓸려나간다.
되새기고 싶지 않은 심연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든다. 벌써부터 부족한 숨이 파도처럼 쓸려나간다. 생각만큼 무섭지 않으나 생각보다 몇 배는 더 끔찍한 검은 바다가 머리 위에서 포효한다. 미친듯이 박동하는 바다의 심장 소리에 귀가 멀 것 같다.
아르나이젤.
없기만 해 봐라.
없으면. 그래서 못 만나고 헛수고가 되어 버리면 전부 다 아르나이젤 탓이다. 가늠할 길 없이 드넓은 바다에서, 많고도 많은 소금물 속에서, 하필 이 곳에 이 시간에 이 자리에 있지 않아서, 때마침 우연히 정말 기적적으로 만나지 못한다면, 그건 그냥 전부 다 아르나이젤 탓이다.
- 쿠구구궁, 쿠구궁!
- 우우응!
발을 움직였다. 아르나이젤을 만나지 못하고 내가 바다에 잠기면 어떻게 할 생각인지, 그런 경우에 대한 계산도 마친 것이 맞는지, 굳이 묻지 않고 뛰어든 시커먼 물 속으로 또 한 번 더. 앞으로 걸어나갔다.
바다라니.
내 발로, 맨 정신으로, 바다라니.
······ 진짜 처돌았지, 내가.
파도가 몰아친다. 더는 서있지 못하고 중심을 잃었다. 몸이 가라앉는다. 숨이 막힌다. 기억 속에서 어느새 제멋대로 어려진 몸이 밑으로, 밑으로, 가라앉는 꿈을 꾼다. 잠겨든다. 이제는 함께 뛰어들어 줄 어린 형도 없는 곳으로, 밑으로, 밑으로.
밑바닥으로.
'형님.'
가라앉는다.
밑바닥으로.
- 어?
소리가 들릴 때까지.
바다의 굉음이 아닌 또 다른 소리.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릴 때까지.
- 진짜네?
아, 역시.
내 형님은 어찌나 빌어처먹게 똑똑하신지.
그러게 왜 가정을 두 번이나 해서는. 하마터면 아 이제 형님 그만 믿고 그냥 다 때려쳐야 되겠다 하고 도로 나갈 뻔했잖아.
아무튼 다행이네.
역시 정답이었네.
웃음이 났다. 입 속에 아껴두던 마지막 숨자락이 새어나가는 것도 모르고 웃음이 났다. 지금 웃음이 나오냐고 물어보던 놈이 이번에는 없던 탓에 그냥 웃음이 났다. 그날의 바닷속에서. 오늘의 이 바닷속에서.
- 시간의 축 조각은 시스파니안이 가져갔어. 내가 분명히 넘겨줬어. 왜 네가 가지고 있어?
그리고 까무룩.
눈을 감았다.
"망할 생선. 또 보네."
잠겨들었다. 바다속으로.
* * *
번복하자면 플란츠는 말이 짧다.
'바다로 가.'
분명 바다로 가라고 말했다.
바다에 들어가라고 안 했다.
'수영 못합니다.'
'알아.'
'그래도 갈까요.'
'그래.'
수영을 못 하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데 설마 내가 너한테 바다에 들어가라 하겠냐. 나 그런 사람 아니다. 그러니까 바다에 빠질 걱정 말고 가 봐라했다.
'가면요.'
'해. 잘하시는 것.'
시간의 축의 조각을 가진 칼리안이 바닷가에 서면 그 힘을 느낀 아르나이젤이 찾아올 거다. 이왕 이곳까지 왔으니 아르나이젤을 만나보고 시간의 축이 가진 힘을 사용하는 방법을 배워 봐라. 알아내는 방법이야 네가 알아서 하면 된다.
플란츠는 그렇게 말했다.
'네.'
그리고 칼리안은 알겠다고 했다.
그 뒤 더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다에 뛰어드는 것으로 자신의 심리적 한계를 향한 도전장을 냅다 던졌다.
키리에를 통해 휘트린 영지에서 구해온 옷가지, 정확히는 짙은 회색의 셔츠에 잿빛을 띠는 하늘색 타이를 매고 크지도 작지도 않은 새까만 재킷과 바지를 입은 말쑥한 차림새를 하고서. 별빛의 잔해를 길게 이어둔 듯한 길고 긴 청은빛의 머리카락을 바람결에 내맡긴 채로.
이것이 '대화를 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대화가 맞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깊은 고찰이 필요한 수많은 오해들의 끝에 벌어진 다분히 뜬금없는 상황'임을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거친 파도를 향해 달려드는 푸른 은빛의 짐승 한 마리로만 보일, 그리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래.
그나마 물 속에서 다리를 휘감든 목을 조이든 어디 하나는 꽉꽉 동여멜 새까만 로브라도 벗어두고 뛰쳐들었으니. 그 정도만으로도 그래, 그놈 참 이성적이다 칭찬해 줄 일이긴 하다.
- 형님.
- 왜.
- 아르나이젤 만났습니다.
- 그래.
어쨌든 그렇게 된 일이라서.
머리가 좋다좋다 못해 한 번에 셋 이상의 업무를 하는 것쯤이야 이제는 일상이 되었고 다누가 보여주지도 않은 과거의 일도 멋대로 추론해 낼 뿐더러 세렌티의 금제까지 파고들었던 바 있는 똑똑한 플란츠는.
- 그래도 수영은 못 하겠네요. 여전히 좀 꺼려지기도 하고. 저 생선 못 만났으면 형님 고양이 노릇이고 뭐고 당장 세뉴강부터 건널 뻔했습니다. 아, 물론 이미 물 속이기는 하지만요. 그래도 강도 아니고 아직 뭘 건너지도 않았으니까.
미쳐버리도록 용감해서 이참에 나도 정말 환장하겠는 내 동생 저 분의 말씀을 못알아들었다.
- ······ 어디.
- 아무튼 무사히 왔습니다. 만났고.
아무튼 가기는 갔고 만나기는 만났다니 뭐가됐든 다행이긴 한데 그래서 너 이 새끼 지금 대체 어디냐고.
- 확실히 아르나이젤이 남쪽 대사막 인근해에 살기는 하나 보네요. 이렇게 바로 찾아오는 것을 보니.
크리스털로 만들어진 고래를 연상시켰던 해룡 아르나이젤은 세크리티아보다는 리베른 인근의 대해에서 더 많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칼리안을 만났을 때 아르나이젤은 푸른 인어의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했다.
거기에 더해, 엘프의 도시에 처음 왔을 때 플란츠가 준 육포를 야무지게 다 먹은 칼리안이 '레니시타 잎의 솜털을 심으면 바나나가 나온다' 말했던 그 실내정원의 분수에는 인어의 조각상이 있었다. 그런데 인어는 세크리티아나 리베른의 바다에서 살지 않았다. 인간들을 피해 그곳에서는 사냥조차 하지 않는다.
크리스털로 만든 듯한 고래의 모습, 리베른 인근을 샅샅이 뒤졌던 앨런이 찾지 못한 아르나이젤의 흔적, 아르나이젤이 변장했던 인어의 모습, 인간의 손길에서 도망친 인어가 살 만한 바다, 인어의 모습을 목격하고 조각해둔 곳. 이런 사실들로 말미암아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결론을 지었었다.
아르나이젤의 둥지는 어쩌면 엘프들의 도시 인근의 바다에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 그래서 형님은, 나오셨습니까?
- 아직.
- 네. 어쨌든 저는 아르나이젤과 얘기 마치고 갈 테니까 형님은 거기서 잘 빠져나올 생각이나 하십시오. 혹시 형님 똑똑하다고 안 놔주겠다 하면 얘기해주시고요. 갈 테니까.
- 알았어.
- 네.
설마 지금 또 바닷속에 있는 것은 아니리라 믿고 싶던 칼리안과 통신을 마쳤다.
바람이 강했고 먼 발치의 바다에 파도가 높던데. 아르나이젤이 설마 이번에도 바닷속에 애를 내버려두고 사라지지는 않겠지. 그나저나 당장 물에 뜨지도 못하는 놈이 대체 어떻게 오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는지.
- 너는 나의 개입을 거부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다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저도 모르게 눈꼬리를 찌푸리고 있던 플란츠가 답을 전했다.
"그래."
- 나의 결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시간의 뒤섞임을 막을 것이다. 그것을 위한 가장 합당한 방법을 찾았다 여겼다.
거절의 의사가 돌아왔다.
플란츠가 조금 더 인상을 쓰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다누가 먼저 자신의 목소리를 보내왔다.
- 시스파니안은 나의 결정이 모순된다 하였었다. 네게도 그러한가.
"과거의 일을 아무것도 바꾸지 않으려는 네 결정을 말함인가."
- 그러하다.
"과거의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했는데. 네 행동이 달라진 것은 변화가 아니 었나."
- 변화인가.
"과거와 다르게 홀러가는 일들의 변수를 없애겠다며 네가 직접 움직이는 것이 변화가 아닌가. 변수를 야기하지 않는 행동이라 확신하나. 과거와 틀어지는 일들을 없애고자 네가 움직이면 그 움직임이 결국 과거와 다른 일이 되어버리는데. 그렇다면 너는 네가 야기할 변수를 어떻게 없앨 생각인가. 그 움직임 역시 과거와는 다른 행동인데 어떻게 가능한가."
분명 질문이었으나 대답을 바라고 있지 않았다. 대답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플란츠는 계속 말을 이었다.
"내 동생의 생이 지워졌는데. 살았던 한 사람이 이미 잊혔는데. 그것을 알면서도 너는 어떻게 감히 끼어들어 방해 할 생각을 하는 거지. 단 한 사람의 빈자리로 생겨난 셀 수 없는 변화들을 네가 감히 무슨 수로 제어한다 자신하지. 아무리 따져봐도 나는 계산이 안 되는데."
대답이 또 돌아오지 않았다.
당연하다. 답을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움직임이 이미 변화이며 그렇게 행동을 바꾸어 과거와의 차이를 없애려 드는 것부터 이미 모순임을, 그러니 다누가 목표한 일은 애초부터 해결될 수 없는 일이었음을.
- 그렇다면 너는 어떻게 행동할 생각인가. 무엇을 계산했나.
대답 대신 다누가 이런 질문을 했다.
태고의 고통이 칼리안에게 '잊힘'을 묻고 이해를 얻은 것처럼, 가장 첫 생명이 가장 푸른 생명에게 미래를 물었다.
"되는대로 할 건데."
그래서 플란츠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계산따위 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다누는 침묵했다. 모순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답을 내지 못한 까닭에. 그저 과거만을 보며 살아왔던 이가 준비없이 마주한 미래란 그 자체로 공포이며 두려움인 까닭에.
플란츠가 3층의 창틀에 처음으로 발을 내려놨던 그 언젠가처럼.
- 양신전쟁이 끝난 뒤 시스파니안은 남은 종족을 모아 보호하였다. 잠든 세렌티를 대신해 남은 종족을 품고 귀히 여겼다.
다누가 말했다. 사람의 말과 글을 통해 이미 오래도록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를 플란츠에게 전했다. 사람의 말과 글보다 분명히 더 정확할, 기록이 아닌 사실로서 다누에게 남겨진 일을 알렸다.
"알아."
플란츠가 짧게 답했다. 그와 함께 어둠이 걷히고 빛이 들었다. 이번에는 순백의 빛이 사방을 감쌌다.
- 대지의 죽음이 더 퍼지지 않도록 남아있는 대륙과 대사막을 경계지었다. 살아남은 용의 새끼를 온 대륙에 흩어두고, 깨지지 않은 용의 알을 품어주도록 오래된 화산에게 부탁하였다. 인간을 모아 살게 된 제 반려에게 나의 아이들을 함께 보호하라 청하였다. 죽지 않은 몬스터를 대사막과 깊은 산맥에 숨겨두었다. 인어의 알을 모아 바다 깊은 곳에 두고 하피의 새끼를 숲의 그늘 아래에 맡겨두었다.
플란츠 역시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안다 말하지 않고 계속하여 듣기만 했다.
- 시간이 지나고 인간들은 하피의 심장을 욕심냈다. 그리하여 마지막 하피의 심장을 뜯어낸 한 명의 인간을 시스파니안이 원망하였다. 그러나 그 인간 역시 시스파니안의 귀한 생이라. 시스파니안은 그가 스스로 후회할 기회만 내렸다. 제가 앗은 하피의 외양으로 평생을 살아가도록, 그리 하였다. 그것이 시스파니안이 내린 최초의 형벌이었다.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렸다.
물론 플란츠 역시 하피가 멸종되었다 알고 있었지만 아니지 않나. 그런데 마지막 하피라니. 시스파니안이 그것을 착각하지는 않았을 텐데.
이유없이 시작된 다누의 말에 의문을 느끼고 질문하려 했을 때, 다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 나는 그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이해하지 못했다.
"무엇을."
아르나이젤은 왜 달라졌나.
"······ 그게 무슨 뜻이지."
- 내가 아는 아르나이젤은 푸른 용이다. 그런데 내 영역에 살고 있는 아르나이젤은 왜 나의 외양을 닮았는가.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플란츠가 조용히 숨을 참았다.
- 나의 모순을 알려준 네게 나의 앎을 전한 것이니.
다누의 말이 들린다.
플란츠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다누는 이미 떠난 뒤였다. 빛이 사라지고 어느새 바람이 불고 있었다.
대장로 나르잔의 모습이 보였다. 키리에와 란델이, 그들을 마주보고 선 수많은 엘프 전사들이 보였다.
- 화악!
플란츠가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 하피의 생을 취해 시스파니안의 형벌을 받았다던 인간의 이야기와, 다누와 닮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아르나이젤의 이야기가 무슨 관련이 있는지 가늠하지 않았다.
그것을 가늠하지 않고 그냥, 도대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을 동생 놈을 찾았다. 서둘러 자신을 끌어와 제 등 뒤에 놓는 키리에의 움직임을 막지 않은 채로.
"칼리안은."
"바다로 들어가셨습니다."
"······ 왜."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르나이젤을 만나라고, 플란츠가 그리 말했었다. 그리고 칼리안은 되묻지도 않은 채 그렇게 하겠노라 답했다. 그래서 바다로 들어갔다. 바다로, 들어갔다.
아르나이젤을 만나라고,
"내가."
그리 말했다.
플란츠가.
다누의 말대로라면 과거의 언젠가에 다누를 살해했을지 모를, 그리하여 그런 외양을 지니게 되었을지 모를 아르나이젤의 앞에 칼리안을 가져다 놨다. 바다를 그리워하면서 가까이 가지도 못하는 칼리안을 바다에 밀어넣었다.
"또."
플란츠가, 칼리안을.
······ 또.
- 저벅, 저벅!
플란츠가 발을 옮겼다.
휘몰아치는 파도에 푹 젖어 단단해진 모래사장의 위를 빠르게 걸었다.
"저하."
바다를 향해 발을 옮겼다.
"저하. 위험합니다."
키리에가 뒤따르는 것을 알면서도 걸었다.
키리에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고 계속 걸음을 옮겼다.
- 터억!
그런 플란츠의 어깨를 누군가 붙들었다.
"수영 못하십니다. 파도 심해서."
목소리가 들렸다.
플란츠가 고개를 들었다.
"어찌나 똑똑하신지. 형님 말씀 틀린 것 하나도 없네요."
이렇게 말하며 씩, 웃고 있는 칼리안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