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77화 (478/527)

제84장. 감쪽같이 속았네(4)

도대체.

나는 사람이고 걔는 내 동생인데. 내가 사람이고 걔가 내 동생이면 걔도 사람인 게 맞는데. 맞기는 할 텐데. 그런데 대체 왜.

스스로 잘한다 말하는 것에 왜 짖고 무는 일이 자연스레 들어가있나. 매일매일 짖는 소리를 하기에 매일매일 짖는다 소리를 했더니 이제는 그 좋은 머리로도 제 놈이 사람인지 개인지 다른 어떤 미지의 짐승인지를 잊어버렸나.

거기에 더해 나는 또 왜.

내 동생이 그런 말을 했음을 이제야 깨달았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된 탓이다.

동생 하나를 한 명 말고 한 마리로 만들어버린 건 아무래도 내 잘못이 맞나보다고. 정작 개라는 동물을 제대로 본 적도 없으면서 내가 어영부영 내 동생을 망쳐놨나보다고. 그런 생각을 한 까닭이다.

그래서 기억이 난 것이다.

'형님, 형님.'

그래.

그래서 기억이 난 것일 터였다.

어느 어린 날의 책 한 권이.

'형님, 이것 좀 보세요. 대사막에는 이렇게 큰 강아지가 있대요.'

개를 자세히 본 적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멀리서나마 개를 본 일도 손에 꼽힌다. 귀족가의 저택에서는 꽤 흔하다던 경비견조차 왕궁에서는 기르지 않았다. 시스파니안의 보안 마법이 있었으니 경비견을 굳이 왕궁에 둘 이유가 없었다.

간혹 왕궁 밖으로 나갔을 때 사람들이 데리고 다니던 크고 작은 개들을 잠깐씩 보곤 했지만 당연하게도 그 개들을 가까이서 살펴볼 일은 없었다. 혹시라도 왕족의 몸에 상처를 입힐까, 너나할 것 없이 눈앞에서 자신들의 개를 붙들어 잡고 뒤로 물러나기 바빴으니까.

그나마 지그프리드의 공작저에서 곱슬거리는 갈색 털의 개를 보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오래도록 곁에 두고 살피지 않았었다. 처음에는 그런 것에 관심을 둘 마음이 없어서였고 나중에는 고양이들이 개냄새를 싫어한다 했던 레릭의 말을 상기한 까닭이었다.

덕분에 이제껏 살아오는 동안 자세히 보았던 개는, 우습게도.

'북쪽의 대사막에 사는 강아지래요.'

그 어느 날. 시스테라 대륙의 환경에 대한 수업이 끝난 뒤 눈 앞으로 들이밀어진 책. 그곳에 그려져 있던 거대한 은회색의 개가 전부였다.

멋대로 다가와서는 아직 배우지도 않은 곳을 펼쳐 보여줬었다. 수업을 마치기가 무섭게 자리를 떠나려 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아니면.

언제나 그랬듯 눈치채지 못한 척을 했는지.

'사람보다도 훨씬 크대요. 그래도 무섭지는 않을 것 같아요. 따뜻할 것 같아요.'

이야기를 계속 늘어놨었다.

그저 그림일 뿐인 그것이 보드랍게 느껴지기라도 한다는 것처럼. 세게 건드리면 아파하기라도 할 것처럼. 신기해하듯 궁금해하듯 온기 하나 없는 그림 속의 긴 털을 손끝으로 조심스레 쓰다듬어보면서.

'눈빛이 정말 예뻐요. 정말 이런 색일까요? 연보라색 눈을 가졌을까요?'

그 기억의 끄트머리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그 기억의 끄트머리에 못내 아쉬움이 든다.

책 종이의 색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라고. 다른 장에 그려진 강과 하늘도 다 연보라색으로 보이지 않느냐고. 그리고 그렇게 큰 것은 강아지가 아니라 개라고.

말해줄 걸. 그래도 네 말대로 무섭지 않을 거라고. 생을 보내는 내내 겨울을 나야만 하는 짐승이니, 분명.

따뜻할 거라고.

말을 해줄 걸.

'저는요, 형님. 강아지를 기를 거예요, --에요.'

설명을.

······ 얘기를. 대화를.

해줄 걸.

"생각을 해봤었어."

빛이 사그라들자 어둠이 들었다.

성벽과 성문이 사라지고 바람과 연기가 지워지고 피 비린내가 가셨다. 모든 것을 대신해 오로지 어둠만 들었다.

한 치 앞은 물론이거니와 손 끝 하나 보이지 않는 곳에 선 채로 가만히 입을 열었다.

"내 동생이 바뀐 뒤에 이상하리만치 내 어머니를 경계했어서. 세크리티아의 왕제가 이곳에 오자마자 왜 그렇게 내 어머니를 적대시했을까. 정작 내가 내민 손은 내치지도 않고 잡았으면서 도대체 무슨 이유로 브리센을 증오했을까. 생각을 해봤는데."

다누는 대답하지 않았다. 깊고 짙은 어둠 속에 영영 내버려둘 것처럼 계속 침묵을 지켰다. 그것에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아마도, 칼리안. 그 아이는 과거에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겠구나. 아마도, 분명히. 내 어머니의 손에 목숨을 잃었겠구나. 했어."

칼리안이 '과거'의 칼리안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세크리티아의 왕제가 보고 들었던 칼리안을 알려주지 않는 것은, 칼리안의 생으로 인해 칼리안의 삶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 없었으리라고. 그 과거에서도.

그래서 칼리안은 과거의 그 아이가 어떻게 살았는지 이야기해주지 않았으리라고. 말해주지 못했으리라고. 아주 오래전부터, 헤이시아의 지하에서 그날의 왕제를 만났던 날로부터도 더 오래전, 수련장 앞에 주저앉아 살고싶다 말했던 날로부터도 더 앞선 어느날 인가부터 이미 깨닫고 있었다.

"내 동생이 바뀌기 전까지의 일들은 과거와 똑같았을 텐데. 그렇다면 칼리안에게 독이 든 차가 건네진 것도 다르지 않았을 텐데. 결국은 돌이키지 못할 일이 되도록 나는 뭘 했을까. 그것을 내가 몰랐을까."

칼리안의 속에 베른이 든 것을 신경쓰느라, 앞머리를 자르고 성격이 바뀌기만 한 게 아니라 그 속에 든 사람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알게 되어서 깊이 생각하지 못했었다. 하루하루 말라가는 겉모습이 아니라 누군가가 하루아침에 완벽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지, 같은 사람이 그렇게 다른 눈을 하게 되는 일이 가능한지, 아니라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만약 정말 다른 사람이 되었다면 본래의 칼리안은 어떻게 되었는지. 그것을 가늠하느라 칼리안의 몸이 말라가는 문제 따위에는 관심도 가지지 않았었다.

그런데 과거에서는 그렇지 않았을 텐데.

세크리티아에 베른이 있었고 카이리스에는 칼리안이 있었던 과거에는. 그 때에도 칼리안은 독이 든 차를 받아 똑같이 말라갔을 텐데, 과거에서는 내가 분명 메마름을 눈치챘을 텐데, 왜. 어떻게 해서.

"나는, 그 아이가 눈치를 챘든 아니든 나는. 나라면 그 독차를 알아챘을 텐데. 그 때에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결국 막지 못했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다 잃어버렸을까.

내가, 내 동생을.

평온하다 여겨질 만큼 느린 말투로 말을 해나가던 플란츠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 나섰지. 그 때에는."

확신에 찬 말이 다누를 향했다.

플란츠 자신이라면 나섰을 것이다. 플란츠와 달리 란델은 브리센에 목숨을 위협받고 있었을 테니 나서지 못했겠으나 플란츠는 나섰을 것이다.

독차를 마시지 말라 했으리라.

그것을 마시지 말고 거부하라고, 어쩌면 겁을 냈을 칼리안을 다독였든 강제했든 독차를 더 마시지 말라 말했을 것이다. 칼리안이 마법을 익히던 것을 알고 있었으니, 마법사 협회로 도움을 청하라 말했을 터였다. 몰래 사람을 보내 시스파니안을 닮은 왕자가 스스로 마법을 익히고 있었던 사실을 알리고 그들과 손을 잡으라 했을 터였다.

그 시기의 플란츠는 딱 그 정도로만 똑똑했으니까.

"그래서 죽었겠지. 칼리안은."

그런 행동이 더 큰 독을 불러오게 되리라는 것을 알 만큼 똑똑하지는 못했으니까. 칼리안이 마법사 세력을 등에 업으려 하는 그 움직임을 실리케가 파악하지 못할 리 없음을, 만약 실리케가 그 사실을 안다면 손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빠르게 움직이리라는 것을, 그 시기의 플란츠는 결코 몰랐을 테니까.

"내 행동이 칼리안의 마지막을 앞당겼다. 내 어머니는 나를 불러놓고 그렇게 사실대로 얘기 해주셨을 테고."

르메인의 방관과 실리케의 독과 란델의 외면 속에서 연명하던 과거의 칼리안은, 그렇게 결국 플란츠의 서툰 똑똑함으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리라고. 스스로 알아낸 것들을 다누에게 말했다.

- 무슨 의도인가.

초대하지 않았으나 찾아온 이를 향한 다누의 목소리가 비로소 전해졌다. 말하지도 묻지도 않은 내용을 왜 입에 담는지를 물었다.

담담한 얼굴의 플란츠가 답을 전했다

"내가 무엇을 시작으로 미쳐갔을지, 네가 나에게 그때의 기억을 보여줄 필요 없이 이미 안다고 말하는 건데. 헛수고라고."

다누는 다시 침묵했다.

신경쓰지 않은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내 기억을 나에게 보여줬지. 내가 만든 참극이라면서, 그 성문 앞을. 나 하나로부터 자신 하나를 뺀 모든 것을 지키려다 결국 죽었던 내 동생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지금 무엇을 디디고 서 있는지, 아니. 서 있기는 한 것인지 아니면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있는지. 그조차 구분되지 않는 유난스런 어둠 속에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건 경고가 아니지 않나. 경각심을 가지고 반성하고 경계하길 원했다면 시간의 축에 손을 대는 내 모습을 보여줬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내 동생의 어머니가 보았다던 세상의 마지막을 나에게도 알려주는 편이 나았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시간의 축을 왜 움직였는지를 알려주고 그 일을 되풀이하지 말라 가르쳐주는 쪽이 효과적이지 않나."

- 함부로 평가하지 말라.

"모르는 거잖아."

- 무엇을.

"내가 왜, 시간의 축을 움직였는지. 너도 모르는 거잖아."

어둠이 움직였다.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으나 분명 그리 느꼈다.

"나와 내 동생의 기억을 다 뒤져봐도 알아낼 수가 없었던 것 아닌가. 세렌티의 안배였든 다른 이유였든, 다른 죽은 사람들의 기억을 전부 다 살펴봐도 이유가 될 만한 일들을 찾아내지 못해서. 막아낼 방법을 찾지 못해서."

- 섣불리 판단하지 말라.

"과거만을 기억하는 너는 앞날을 예견하지 못하니까. 한치 앞의 일도 살펴 볼 수 없을 테니까. 너는 앞으로의 시간을 위해 태어나지 못했으니까."

어둠이 움직였다.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으나 분명 움직였다.

'다누는 방관했다 했습니다.'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난 생명으로 이제까지 모조리 지켜보기만 한 겁니다.'

'지켜보고 기억하는 것, 그것이 다누의 본질이자 한계입니다.'

'모든 것을 다 기억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다누는 오로지 과거일 수밖에 없는 거죠. 당장의 앞날을 절대로 가늠하지 못하는 겁니다. 능력이 부족하고 생각이 짧고 사상이 다른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겁니다. 다누는.'

조금 전 칼리안이 전해온 목소리가, 아니. 송두리째 집어던지듯 건네진 거대한 양의 생각이 되떠올랐다.

'그런 다누가 앞날을 알게 됐어요. 시간이 되돌아가면서 미래를 알게 됐습니다. 오랫동안 과거를 지켜오던 다누가 이제와 처음으로 앞으로의 일을 생각할 줄 알게 된 겁니다.'

'하지만 그건 진짜 미래가 아니에요. 앞으로 벌어질 일이지만 분명한 과거입니다.'

'다누는 그 차이를 결코 알지 못합니다. 과거의 미친왕과 형님이 다른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어떻게 해야 세계가 무너져 시간이 되돌아가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는 겁니다. 과거의 형님과 지금의 형님이 서로 다르다면, 그것을 어떻게 해야 막아낼 수 있는지를 생각할 수가 없는 겁니다. 모든 것이 바뀌지 않아야만 막을 수 있으니까요. 다누는.'

바뀌지 않아야 바꿀 수 있어서.

다누는 그렇게만 할 수 있어서.

"그래서 똑같이 미쳐버리도록, 내 생각이 멋대로 뻗어나가도록, 그렇게 만들려고 했나. 과거에는 내가 아닌 세크리티아 왕제만 살폈던 까닭에 나를 놓쳐서. 이번에는 그 왕제가 없으니 실수하지 않고 나를 지켜보며 이유를 확인하려고."

처음의 베른이 시간의 축을 돌렸다.

다누는 세계의 종말을 보게 되었다.

시간이 되돌아갔다. 다누는 베른을 지켜봤다. 이유를 알고자 했다. 그러나 알아내지 못했다. 하여 시간의 움직임을 막지 못했다. 더욱이 '두 번째'는 베른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플란츠의 손에 의해 세계가 다시 되돌아가고 베른은 지워졌다. 이번에도 역시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다누는 생각했다.

'변수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모든 것을 똑같이. 아무것도 바뀌지 않도록.'

그렇게 생각했다.

다누는 결코 통제하지 못할 변수를, 예측하지 못할 미래를, 이번에는 만들지 않아야 한다고.

"네 행동들로 인해 내 동생이 다시 죽고, 네가 지켜보는 앞에서 내가 다시 한 번 미쳐가고, 너는 알지 못한 '이유'를 찾아내고. 너는 그런 나를 살펴보며 알아내고. 그렇게 해서 내가 또 한 번 시간을 되돌려 내 동생과 함께 지워지고 잊혀져 사라지면. 되돌아간 시간 속에서 네가, 누구보다 유리한 시작점에 홀로 선 네가, 혼자서 영웅놀이를 하려고."

- 인간들의 영웅놀이 따위가 아니다.

"그럼. 뭔데."

- 살리려는 것이다.

"누구를. 무엇을. 네가 왜."

- 모두를. 모든 것을. 당연하게.

"어떻게. 그 모두의 안에 나와 내 동생이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다누는 답하지 않았다.

알지 못할 테니까. 그 역시.

'저는요, 형님.'

"내 동생을 궁지에 몰아넣고 죽여 없애서 과거를 재현하지 않아도, 내가 미치지 않아도, 나는 알아낼 수 있어. 내가 알아내고 내 동생이 막아낼 수 있어. 무슨일이 생기든. 어떻게든."

잃어버리는 일은 한 번이면 족하다.

'강아지를 기를 거예요. 나중에요.'

나중을 말하던 아이가.

강아지를 기르겠다던 그 아이가.

하늘의 별을 꿈꾸도록 만들어버 렸다.

"너 때문에 내 동생 죽으면. 너도 실패하는 거야. 영원히."

그건 한 번이면 족하다.

애초부터 별이었던 놈이, 스물 일곱의 생일을 상상하지도 못하던 어떤 미친놈이, 이제야 간신히 30년 뒤를 50년 뒤를 보고 있는데. 그 미친놈까지 제 나중을 다시 잊어버리도록 만들 생각 없다. 또 잃어버리지는 않을 거다.

한 번이면 족하다.

이미 충분히 끔찍하다. 그러니까.

"다시 되풀이하기 싫으면. 끼어들지마."

끼어들어 망쳐놓지 마.

주제넘게.

* * *

하고.

이제는 말이 없다거나 말이 짧다 표현하기도 어려워져서 이제 그냥 에라 모르겠다 말 많은 완두콩이 된 그 완두콩이 열심히 최선을 다해 크리스털 나무를 협박하는 사이.

- 다그닥, 다그닥!

새까만 짐승 한 마리가 신이 났다.

레이븐이 신났다는 소리다. 칼리안 말고.

자갈과 흙이 많아 미끄러운 내리막길을 박차며 달리는 중임을 모를 리 없을 새까맣고 거대한 그 한 마리가 뭉게뭉게, 눈부신 햇살 아래 부연 먼지구름을 만들어냈다. 레이븐이 그랬다는 소리다. 칼리안 말고.

걔는 지금 까만색이 아니라 청은색이다.

- 카아아아앙!

휘트린에서 석연치 않은 문제가 생겼다. 그 문제의 가장 중요한 증인인 나비아 헤이젤을 조사하던 중 엘프 자객 한 명이 쳐들어와 나비아를 해치려 들었다. 거기에 더해 귀중한 증거이자 에일라와 발칸과 마법사 협회의 큰 재산이 되어야 할 마석을 홈쳐갔다.

그래서 엘프들의 대장로 나르잔에게 그 일을 항의하고 범인과 증거물을 되찾기 위해 엘프들의 도시에 왔다.

그랬더니, 세상에나.

엘프들의 어머니가 카이리스의 왕세자를 납치했다!

- 카아앙!

- 카앙, 카아아아앙!

안전을 위해 카이리스의 왕세자 말고 발칸의 부군단장으로 변장까지 해가면서 그 먼 길을 애써 찾아왔는데.

카이리스 왕실과 엘프들의 원만한 관계를 이어나가겠다는 뜻을 내비치기 위해 내집 밖에는 공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살아오던 첫째 왕자까지 대동하고, 왕세자의 안위를 걱정하다 눈이 새빨개진 셋째 왕자가 '세 왕족이 한꺼번에 엘프들을 찾아가면 저들이 많이 놀라고 당혹해 할 테니 그들에게 마음의 부담을 주지 않고도 연약하고 고현하며 낭혜하신 내 형님 저하를 안전하고 쾌적하게 보필할 수 있도록' 변장까지 해 가면서 찾아왔는데.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평화로운 대화와 협상을 위해 찾아왔는데. 이럴수가.

납치라니.

그랬으니.

까만털 말고 청은색 털로 갈아입고 있었음에도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팽팽하게 죄여져 있던 목줄 때문에 안 그래도 답답증이 쌓여가고 있던 와중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잘 잡아가며 익숙해지려 애쓰던 바로 그 목줄이 하릴없이 풀린 것을 알게 된 순하디순한 짐승이 대체 얼마나 큰 상심을 느꼈겠나.

"물러서지 마라! 막아라!"

덕분에, 대체 어디가 연약하고 고현하며 낭혜한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왕세자인 것은 맞는 그 사람이 갑자기 사라진 듯 보이겠지만 이 일에는 분명 어머니 나무의 큰 뜻이 있을 테고 어찌됐건 어머니 나무께서 다른 생명을 해치지는 않으시니 일단 제발 좀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보라 이야기하다 찬연한 순백의 검집에 얻어맞고 어딘가 한 군데씩 많이 틀어지게 된 엘프들이 속수무책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 휘이이익! 카아앙!

- 다그닥, 다그닥!

- 카강! 캉, 카아아앙!

엘프들의 도시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잠시 사라졌다 다시 모습을 드러낸, 그 뒤 플란츠가 곁에 없음을 알게 된 이가 청은빛의 칼날로 돌변했다. 그들을 경계하기 위해 나섰다가 왕세자가 사라진 상황을 확인하여 급격히 당황하게 된 엘프들의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검의 난무를 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저 검이 검집 밖으로 뽑혀나오지 않는다는 것. 그럼에도 불행한 것은 저 검집 역시 금속이라는것.

- 카아아앙!

- 빠악!

맞으면 어쨌든 아프다는 뜻이다.

남쪽 대사막의 공포라던 암갈색의 독사도 저보다 빠르지는 않을 것이다. 북쪽의 대사막을 지배한다던 은백색의 맹수도 저보다 광포하지는 못할 것이다.

눈빛을 본 순간 세상이 뒤집혔다. 그 검을 막았다 여겼으나 어느새 뒷목을 내어주고 있었다. 폭풍 속에 홀로 선 깃발처럼 휘돌아치는 청은빛의 긴 머리카락조차 눈에 담지 못했다. 처음 그들을 둘러쌌던 쉰 명의 엘프 전사들이 손쓸 곳 없이 무너져내렸다.

왕세자가 사라진 상황에 섣불리 왕실의 사람을 공격하면 안 되니까, 그래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노라고. 화살 한 번을 쏘지 못했노라고. 애써 생각해낸 변명거리를 찾아들면서.

- 다그닥, 다그닥!

그렇게 칼리안이 만들어낸 길의 한복판을 레이븐이 내달렸다. 란델과 키리에의 말이 뒤를 따랐고, 키리에에게 말고삐를 붙들린 아르센의 빈 말이 그들을 따라 부지런히 달렸다.

갑작스런 소란에 다시 한 무리의 전사들이 앞을 막았고 이전과 똑같은 참극이 벌어졌다. 칼리안은 단 한 번도 검을 뽑지 않았고 오러를 씌우지 않았으며 마법의 화살과 창을 쏘아내지도 않았다. 발을 박차고 팔을 뻗어 검집 째의 검을 휘둘렀을 뿐이다.

빛이 내린 것처럼.

너른 땅 위에 뒤덮인 서리안개 속에 찬란한 빛이 드는 것처럼.

- 카가강, 카강!

- 타다다당!

그렇게 사나운 빛줄기가 되어 엘프들의 도시를 향해 내달렸다. 햇살 아래 수많은 빛으로 반짝이는 거대한 나무를 향해, 그 뒤로 펼쳐진 짙고 푸른 바다를 향해 쉼없이 달렸다.

검의 가드와 검집을 한 손으로 붙들어 잡은 채로. 그리하여 실수로라도 그 수려한 백색의 검에 엘프의 피가 스치지 않도록. 검집이 팔꿈치 쪽으로 오도록, 손잡이가 정면을 향하도록, 거꾸로 움켜쥔 검을 쏟아붓듯 뻗어내고 되돌아오는 반격을 아주 깊이 쳐내면서.

- 카아앙! 카가가가강!

단 한 번의 협박도 하지 않았다. 엘프들의 팔과 다리와 가슴팍을 제외한 그 어떤 것도 부수지 않았다. 베어내지도 않았으며 짖지도 물지도 않았다.

- 다각!

- 타아악!

레이븐이 비로소 발을 멈출 때까지. 사람의 키보다 높은 장대한 파도가 쏟아지듯 몰아닥치고 있는 그 짙고 푸른 바다의 앞에 다다를 때까지.

살육이 없던 까닭에 똑같이 살육의 수를 쓰지 못한 엘프들이 뒤따라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칼리안이 달려들고 있던 거대한 어머니 나무를 겹겹이 둘러싸고 수비진을 펼치고 있다가, 그 거대한 나무를 향해 일말의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그대로 바다를 향해 돌진한 칼리안의 뒤로 따라붙은 엘프들의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들은 뒤에야 칼리안이 눈을 들었다. 바다를 등지고 뒤로 돌아 엘프들을 마주했다. 그들의 가장 앞에서 있던 엘프들의 대장로 나르잔을 쳐다봤다.

"서로간의 오해가 깊은 듯 하군."

나르잔이 칼리안을 향해 한 발을 걸어나왔다. 연보랏빛 눈 속에 숨겨진 핏빛을 눈치챘을지, 이곳에 선 이가 칼리안임을 알아봤을지.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다. 일단 긴장을 푸는 것이 먼저라 말하는 것처럼,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리거나 바닥을 향한 활을 힘주어 붙들고 있는 엘프 전사들의 앞으로 나섰다.

"카이리스의 왕세자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들었네. 이미 들었겠지만 그것은 공격 의사가 아니네. 이곳을 찾았던 그대들의 3왕자 역시 그런 식으로 어머니 나무와 대면을 했네."

나르잔이 다시 한 발을 가까이 걸어왔다.

자신의 빈 손바닥을 내밀어 보이며 대화를 전했다.

"그러니 오해하지 말고, "

아무런 감정도 생각도 내비치지 않는 듯한 연보랏빛의 눈으로 엘프들과 그들의 대장로를 훑어내린 칼리안이 고개를 조금 더 치켜들었다. 살짝 내리뜬 눈을 한 채 나르잔을 내려다봤다.

- 저벅!

키리에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나르잔의 앞에서 칼리안을 가렸다.

그 사이, 플란츠가 전해왔던 말이 다시 한 번 칼리안의 귀에 새겨진다.

- 다른 것 먼저.

- 그럼 어떤 거요.

- 바다로 가.

시킨대로 말 들었다.

착하고 얌전하게 바다로 왔다.

발을 들인 이를 당장 집어삼킬 듯 휘몰아치는 바다까지 잘 찾아왔다.

- 수영 못합니다.

- 알아.

- 그래도 갈까요.

- 그래.

칼리안이 긴 숨을 내쉬었다.

- 가면요.

- 해. 잘하시는 것.

협박을 하든 부수든 베든 짖든 물든.

무엇을 하든, 바다에서 하라고.

플란츠가 그랬다.

- 아르나이젤. 크리스털로 빚은 고래 같았던 그 해룡.

- 네.

- 거기 있을 거야.

아마도.

라는 말을 붙이기는 했지만.

어찌됐건 그리 말했다.

아르나이젤과 다누가 연관이 있으리라고. 시간의 축이 지닌 힘을 사용했던 아르나이젤이 저 바다에 있을 거라고.

그러니 바다로 들어가라고.

가서, 잘 하는 것을 다 하라고. 전부 다 하라고.

다 하라고.

"······ 하."

칼리안이 짧은 숨을 들이쉬었다.

몸을 돌렸다. 다시 바다를 향해 섰다.

- 타아앗!

그리고 그 파도를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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