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76화 (477/527)

제84장. 감쪽같이 속았네(3)

그런데.

라는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저 말이 붙으면 언제나 탐탁지 않은 기분이 든다. 잘 넘어가는 듯 보이던 이들이 별 것 아닌 트집을 잡기 위해 늘 꺼내놓던 말이기도 하고, 비로소 문 밖으로 나서려는 발을 굳이 불러다 붙드는 5층 거주인의 목소리가 떠오르기도 하고, 정답이라 여겼던 것을 '틀렸다' 알려주는 르니에리 향을 풍겨내기도 하니까.

- 그런데.

그런데.

그 말이 들려왔다.

칼리안이 농사 잘 지었다며 플란츠를 칭찬하기 조금 전에. 플란츠의 귀가 아닌 머릿속으로.

잠시 생각을 하듯, 살짝 말아쥔 자신의 한쪽 손을 반대편 손으로 느슨하게 감싼 칼리안이 주먹쥔 손등 위를 톡톡 두드렸다. 그렇게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하다 입을 열었다.

"그러면 뭘요."

"다누는 제온과 손을 잡았다며."

"네."

이런 말이 나오던 사이, 칼리안의 손바닥 아래 감춰지게 된 반지에서는 미약한 빛이 홀러나오고 있었다.

- 팔찌 가지고 계시죠, 형님.

- ······ 있어.

생각대로.

바로 곁에 있던 플란츠로부터 답이 들려왔다.

- 형님 왜 자꾸 제 새끼 코끼리 것 뺏어가십니까.

- 빌린 거야.

- 그럴 거면 그냥 하나 만드시던가요. 돈 많으시던데요.

- 봐서. 왜.

돌아가서 통신용 물품을 만들든 말든 그건 내가 알아서 할 거고 갑자기 통신용품으로 말은 왜 걸었는지를 묻는 말이다.

"그런데 서른 명이 왔군. 우리를 잡겠다고. 이상하잖아."

동시에 이렇게, 플란츠의 적당한 대답이 칼리안의 귀에 들렸다. 그 말을 듣는 동안 칼리안은 머릿속으로 플란츠에게 제 생각을 전했다.

- 다누가 변장 마법을 알아보지 못한다 여기시는 것 같은데요.

- 맞아.

- 그런데.

둘의 대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단어를 조합해 소리로 만들어 낼 필요가 없던 까닭에, 마치 여러 문장의 말을 한 덩이로 뭉쳐 만든 듯한 형태의 '의미'들이 둘의 사이를 순식간에 오갔다.

- 형님 아귀 안 맞는 퍼즐 억지로 끼워맞추실 분 아닌 것 압니다. 형님이 변장하고 저를 따라온 건 제온에서 습격을 해 오기 전입니다. 휘트린이 변장을 알아보지 못한 채로 저를 납치했던 일이 있기도 했으니 아마 그 일 때문에 의심하시게 된 것 같습니다만. 그것 하나만으로는 다누가 변장 마법을 못 알아본다는 가설에 대한 충분한 근거가 안 됩니다.

- 하고 싶은 말이 뭔데.

- 얘기해주세요. 형님의 진짜 꿍꿍이.

톡, 톡, 톡.

칼리안의 손가락이 느리게 움직 인다.

반대로 더욱 더 빨라진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 다누는 휘트린을 시켜서 아우님을 회유하려 했잖아.

- 그랬죠. 시간의 축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면서.

- 그런데 다누는 시간이 움직인 것을 싫어하지 않았나. '내'가 세크리티아를 공격한 일을 두고 참극이라 할 만큼.

- 맞습니다. 다만 저희 역시 시간의 축을 다른 방법으로도 쓸 수 있다 여겨오지 않았습니까. 세크리티아 대왕이 악신을 상대할 때 그랬듯이요. 그래서 저도 그 방법을 알아보려 하던 중이었고요. 그것을 저에게 알려주겠다 한 말 아닙니까.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내쉬는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꽤 긴 이야기가 오갔다. 대화를 정리하던 칼리안의 머릿속에 플란츠의 말이 다시 전해졌다.

- 다누가 필요로 하는 건 아우님이 아니야.

- 제가 아니면요.

- 나.

- 형님을요.

- 정확히는, 지금의 내가 아니라.

- 저한테 그 종이만 아까운 짧은 편지 보냈던 완전히 절여진 형님 말씀이십니까.

- ······ 그래.

톡, 톡, 톡.

흉터와 굳은살이 가득한 손가락이 다시금 움직였다. 조금 더 느려진 속도로, 훨씬 더 많은 생각을 담은 채로.

- 그럼 다누가 휘트린으로 하여금 저에게 시간의 축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주겠다 전했던 말은,

- 말 그대로의 의미일 것 같은데. 시간을 돌리는 법을 알려주겠다고.

- 이해가 안됩니다. 시간이 움직인 것을 환멸하면서 시간을 움직였던 형님을 필요로 한다는 건 앞뒤가 안 맞 습니다. 시간을 움직일 방법을 알려주겠다 하는 것도요.

- 그래.

- 그리고 또.

-또 뭐.

- 왜지.

칼리안이 궁금증을 보내왔다.

그 짧은 말 속에 든 보다 방대한 의문 이 플란츠의 머릿속에 던져지듯 들어왔다. 이번에는 아예 말의 형태를 취하지도 않았다. 칼리안은 자신의 의문 전체를 통째로 플란츠에게 전했다.

칼리안 스스로가 이해하지 못한 '모순'을.

엘프들은 미래를 본다 했다.

다누 역시 그러하다 했었다.

그런데 정작 다누는 미래를 보지 못하는 것처럼 군다.

다누는 칼리안의 행동을 예측하지 못했다. 플란츠를 따로 불러오면 칼리안이 어떻게 행동할지 '예지'하지 못했다. 칼리안이 자신에게 불응하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만약 휘트린의 제안이 거절당하리라는 것을 알았다면 다누는 휘트린의 입을 통해 그것을 알리지 말았어야 했다.

- 만약 형님이 휘트린에 대한 적대감이 없었다면, 차라리 아예 모르는 엘프나 다누를 통해 그런 제안을 받았다면, 저는 시간의 축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알려달라 했을 겁니다. 그것이 시간을 돌리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는 의미인 줄은 몰랐으니까요.

- 그렇겠지.

- 어찌됐건 다누는 굳이 휘트린을 통해 제안을 했습니다. 그리고 거절당했고요.

과연 다누는 어떤 것을 할 수 있고 어떤 것을 하지 못하나.

- 그래서. 변수를 계산해봤는데.

- 계산한 것 보여주지 마세요. 저 감당 못합니다.

- 안 해.

플란츠는 방금 전 칼리안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의 생각을 통으로 넘기지 않았다.

칼리안이야 제 생각을 전부 다 넘겨서 그것을 플란츠가 정리하도록 하는 것에 아무런 걱정이 없겠지만 플란츠 쪽에서는 아니었다. 지나치게 많은 변수와 경우의 수를 계산한 까닭에, 그 과정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칼리안조차 가늠하지 못한 까닭이다.

- 아우님께서 시나스타의 재료를 가져 왔었지.

- 네.

- 만약 키리에가 아우님의 정체를 몰랐다면, 모르는 채로 운철이 있는 곳에 찾아가 봤었다면. 그럼 키리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 저를 예언자로 봤겠죠.

톡. 톡. 톡

- 다누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무능해.

- 과거의 기억을 예언처럼 휘둘렀다는 말씀이신 거죠.

- 그 뿐 아니라 마법 변장도.

- 가설이 아니라 확신이 선다는 겁니까.

- 그래.

- 이유는요.

- 내 생각에 지금 이 주변은 아우님의 시선이 아닐 것 같은데.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먼 곳에 놓인 처참한 몰골의 성문을, 그 날의 왕제가 쓰러져 숨을 놓았던 바로 그 자리를 응시했다.

지금은 비어있는 자리.

그 어떤 시신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곳을 바라봤다.

- ······ 네. 제가 보았을 때에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 내가 다누를 처음 만났을 때에도.

- 그러고 보니 지금 이 곳은 사람들이 없네요. 아무도.

- 그래.

- 설마.

톡, 톡톡.

- 헤르츠 경······ 의 시선입니까. 이건.

황량하다.

모든 것이 불타고 모든 것이 사라졌다.

플란츠를 뒤따랐던 아르센은, 세크리티아의 왕제와 국왕을 제 손으로 죽이고 한 나라의 수도를 궤멸에 이르게 한 발칸의 군단장은, 세크리티아의 왕제를 '기억'하겠노라 했던 그 아르센 헤르츠는, 아무것도 기억에 담아두지 않았다.

아무것도 기억에 담아두지 못했다.

그것이 고스란히 펼쳐진 것이었다.

베른의 기억과 미친왕의 기억이 아니었다. 아르센 헤르츠. 그의 기억을 다누가 펼친 것이었다. 그 안으로 칼리안과 플란츠가 들어온 것이었다.

- 아마도. 이곳에 들어올 때까지는 내가 파란 머리 마법사였으니까.

톡.

토옥. 톡.

"······ 못 알아봅니까. 외양이 바뀐 것을, 다누가."

"알아봤으면 조금 더 많은 인원을 보내라 했겠지. 다누가. 적어도 내 주머니 속에 어떤 검이 들어있었는지, 그 정도는 알았겠지."

칼리안과 플란츠가 아무 말이나 내뱉으며 겉으로의 대화를 이어 나갔다.

- 그럼 그 생각이 맞는지를 제대로 확인하고 싶어서 헤르츠 경의 로브까지 뺏어 입고 오셨습니까. 남의 것 뺏는 취미 없다 하시던 분께서요.

- 빌렸어. 설명 전해 뒀는데.

- ······ 또 빌렸대.

- 반말.

다누는 예지하지 못한다.

마법의 이면을 꿰뚫어보지도 못한다.

- 그럼 사실은 제가 아니라 헤르츠 경을 부르려 했던 거겠네요. 형님이 제 머리끄덩이 잡으신 덕에 제가 같이 딸려 온 거고요.

- 그런가본데.

- 저도 형님도 말을 안 들으니 이번에는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보려 했던 걸까요.

- 그럴 수도.

- 그럼 불응했다는 말은 누구에게 한 말이려나.

- 모르겠군.

- 형님이 모르시는 것도 있습니까.

- 많아.

- 똑똑하신 내 형님은 모르는 것이 그리 많은데······ 다누는 땅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다 안다 했네요.

- 그래.

- 예지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마법의 이면을 보는 능력도 없고. 그런데 예지력을 가진 것처럼 눈속임을 하고 이런 기억을 보여줄 수도 있고. 세크레타에는 숲도 없는데 어떻게 예전의 제 기억을 다 알고 있을까······.

- 정작 지금의 기억은 못 보는 것 같은데.

베른의 기억을 다 들여다봤다는 듯 굴었던 다누였으나, 정작 이제와서는 칼리안이 플란츠를 원망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굴었다. 만약 칼리안이나 플란츠의 기억 중 하나라도 들여다 볼 수 있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을 텐데도.

그렇다면, 혹시.

- 혹시 다누는 과거에 죽은 이들의 기억들만 다 가지고 있는 걸까요. 만약 그렇다면 말이 될 것 같은데요.

죽은 베른과 죽은 플란츠와 죽은 아르센.

그들의 기억을 다누가 가져갔다면, 당연하다는 듯 베른이 플란츠를 원망하리라 여기고 행동을 했을 수도 있겠다고. 그런 말에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 그런데 아델리아가, 저를 도우면 이득이 될 일이 있으리라는 말을 다누에게 들었다 했었습니다. 그럼 그것은 거짓말이었던 걸까요.

- 거짓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플란츠의 말이 잠시 끊겼다.

정확히는 지워졌다. 누군가에 의해 전달되지 않은 것처럼.

세렌티의 간섭이었다.

- 생각했었잖아. 아우님의 이름이 지워진 이유.

세렌티의 개입을 깨달았던지, 플란츠가 직접적인 언급 없이 이런 말을 전해왔다. 시간의 축이 한 번만 돌아간 것은 아니었으리라고.

지금의 아델리아를 이용하고자 엘프들은 하지 못한다던 거짓말을 했거나, 칼리안이 기억하지 못하는 시기의 베른이 아델리아를 만났었고 그 후 죽은 베른과 아델리아의 기억을 다누가 가지게 되었거나.

당장 확인할 수 없는 내용이라 일단 고개만 끄덕인 칼리안이 또 하나의 의문을 플란츠에게 전했다.

- 그럼 한 가지 의문이 또 생기는데. 지금 저 광경이 헤르츠 경의 과거라면 왜······ 저에게는 '다른사람'의 기억을 보여준것일까요.

- 아우님이 이 곳에 들어왔을 때 왜 왕제의 기억이 보였는지를 말인가.

- 네. 변장 마법 하나 못 알아보는 다누가 제 본질을 어떻게 알고요.

이야기한대로 다누는 변장 마법을 꿰뚫어보지 못한다. 때문에 이곳에 들어선 이들 중 '아르센'의 기억을 칼리안과 플란츠의 앞에 펼쳐냈다.

그 역시 모순이었다.

다누는 베른에 대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칼리안의 속에 든 이가 베른임을 모르고서야 어떻게 칼리안에게 베른의 온 생과 세크리티아의 마지막을 펼쳐 보이고 플란츠를 마주치게 한 뒤에 그 때의 플란츠가 베른에게 건넨 검을 돌려 줬겠나.

그러니 다누는 칼리안의 속에 베른이 든 것을 이미 알았다는 뜻이다.

짐작이 아니었다. 확신이었다.

변장 마법의 이면조차 알아보지 못하면서.

- 다누가 마법도 알아보지 못하고 예지를 할수도 없다면, 저에게는 어떻게 베른의 기억을 꺼내 보여줬을지. 제 겉모습만 본다면 베른을 연관지을 수 없었을 텐데요.

- 물어볼 것이 있는데.

- 네.

- 혹시 내 어머니에게······ 아우님의 정체를 이야기한 적이 있나.

실리케 역시 죽은 이가 아니던가.

그러니 실리케에게 정체를 알렸는지, 그래서 다누가 칼리안의 정체를 알게 됐을지를 확인하고자 묻는 말이 었다.

-안 했습니다.

칼리안이 아주 살짝 고개를 가로저 었다.

- 숨긴 것이 있는지를 궁금해했지만 알리지 않았습니다.

- 그래.

- 제 정체를 정확히 아는 채로 죽은 이는 데블란 뿐입니다. 그렇다 해도 데블란에게는 막연한 추측이었을 뿐입니다. 실제로 과거의 저를 만났던 것도 아니고 체이스 형님이나 어머님처럼 제 모습을 꿈꾼 것도 아니니까요.

- 데블란이 다누에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겠군.

- 네. 게다가 제가 다누를 만난 이후에 죽었기도 하고요.

- 그럼.

아주 잠시 멈췄던 플란츠의 말이 이 졌다.

- ······ 한 사람밖에 없는데.

그 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되물으려던 칼리안이 입을 다물었다. 입을 열어 말하는 것이 아님에도 입을 꾹 다물었다.

칼리안이 누구인지를 아는 채로 죽은 또 한 사람.

그런 사람의 이름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 칼리안.

긴 앞머리.

그 속에 가려진 새빨간 눈을 떠올리게 된 까닭이다.

- 네.

칼리안의 기억을 다누가 보게 되었으리라고. 그리하여 지금의 칼리안 안에 베른이 있는지를 알게 되었으리라고. 그렇게 알게 된 베른의 기억을 다시 살펴봤으리라고.

짧은 한숨을 내쉰 칼리안이 조금 가벼운 듯한 목소리를 내려 노력하며 말을 이었다.

- 아무튼. 그렇게 데굴데굴 저 가는 대로 졸졸 따라오기 전에 말씀 좀 해주시라니까요. 그렇게 싫어하시는 헤르츠 경으로 변장까지 하면서 여기 대체 왜 오신 겁니까. 정말 다누가 얼마나 무능한지 알려주려고 오신 겁니까.

- 아니.

- 그러면요.

- 협박 못하게 협박하려고.

- 제 정체 까발리겠다는 협박 말씀이십니까.

- 그래.

칼리안은 마석을 찾고 휘트린과 다누의 연관성을 찾고 제온을 대체 왜 돕는지도 확인하고 겸사겸사 화풀이를 하려고 왔다.

그리고 플란츠는 다누가 '칼리안의 정체'를 또 다른 곳에 더 알리지 못하도록 협박하기 위해 왔다 했다.

- 형님이 다누를 어떻게요.

- 못 할 것 같나.

- 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까.

- 내 아우님께서는 상상도 못 하실 듯한데.

칼리안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플란츠가 한쪽 입꼬리를 길게 틀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 내가 얼마나 많은 '경우의 수'를 계산했는지.

얼마나 많은 경우의 수를 계산하고, 얼마나 많은 변수를 대비하고, 얼마나 많은 가설을 세워 여기까지 따라왔는지.

잠시 뒤.

연두색 눈동자를 쳐다보며 그로부터 전해지는 설명을 모두 들은 칼리안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드미레아한테 자랑해야 되겠습니다."

"소공작에게, 뭘."

"완두콩 잘 키웠다고."

그리고 이런 칭찬을 건넸다.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리든 말든.

"그런데, 형님."

그러다 문득 이상한 것이 있다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꺼냈다. 일부러 만들어낸 목소리를 냈다.

"왜."

"다누가 정말 사람의 외양이 바뀌는 고작 그 정도의 일을 못 알아보고 행동한다면 이제까지 모든 엘프들을 속여왔다는 얘기 아닙니까."

"그렇겠지."

"그렇다는 건 레넌보다도 멍청하고 에반보다 무능하다는 소리인데. 그런 나무가 양신전쟁이 있기 훨씬 전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엘프들을 이끌어 올 수가 있었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아니. 이해가 안 된다 하기보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건 어떻게 설명해주실 겁니까."

"아직. 확인하러 온 건데. 그래서."

플란츠가 다시 한 번 당당한 대답을 꺼냈다.

그건 나도 모른다, 라고.

칼리안이 순간 바람빠진 가죽공같은 표정을 해 보였다. 그 입에서 아무 의미 없을 목소리가 홀러나왔다.

"아······ 확인하러 오셨구나."

"다 알고 찾아 올 필요는 없지 않나."

"그래서 무턱대고 따라오셨구나. 반만 추측한 사실 하나를 믿고서, 나머지 반 확인하시려고. 다누가 지금 형님이 변장한 것을 정말 못알아봐서 가만히 뒀는지 쟤 지금 뭐하는지 한번 구경이나 해보자 하고 가만히 뒀는지 그런 변수까지는 또 생각못하고. 그냥 냅다 따라오신 거구나."

칼리안이 빈정거리듯 말했다.

잠시 눈살을 찌푸린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그래야 확인을 할 것 아냐."

"하······."

긴 숨을 들이쉰 칼리안이 부러 큰소리를 내며 다시 내쉬었다. 그러더니 어느새 흘러내려 시야를 방해하던 푸른 은빛의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네. 됐습니다."

입을 다문 플란츠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매캐한 내음과 여전한 피비린내를 다시 한 번 확인하듯이.

그러거나 말거나, 칼리안이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입을 열었다.

"형님 내보내고 단 둘이 얘기 좀 하지. 다누."

둘을 지켜보듯 침묵하던 다누는 여전히 응답하지 않았다. 텅텅 빈 황량한 공간에 둘을 세워둔 그대로 그 이상의 대답을 전하지 않았다. 때문에 칼리안이 다시 무어라 이야기를 하려 했을 때.

- 파아아앗!

강렬한 빛이 칼리안의 몸을 휩쓸었다.

칼리안이 잠시 눈을 감았다.

저도 모르게 팔을 올린 플란츠가 손으로 그 빛을 가렸다.

* * *

수많은 말이 찰나와 같이 오갔다.

숨을 몇 번 쉬는 정도, 회중시계의 초침이 한 바퀴를 채 다 돌지도 못할 만큼의 짧은 시간 동안 정말 많은 말을 주고 받았다. 그 사이 입을 열어 별 뜻 없는 대화를 했다. 그리고 더더욱 의미 없을 말싸움도 좀 했다. 그 뒤 다누를 다시 불렀다.

다누가 답을 보냈다.

눈이 멀 듯한 빛으로 칼리안을 휘감았다.

그 빛이 사그라들었다.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플란츠의 것도, 다누의 것도 아닌 목소리가 가장 먼저 들린다. 그것을 느낀 칼리안이 조용히 눈을 떴다.

주변 경관이 달라져 있었다. 익숙했던 긴 자갈길과 먼 곳의 투명한 나무, 그 뒤로 비춰지는 거대한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왕자님."

걱정 가득한 얼굴을 한 키리에가 보였다. 어느새 키리에와 함께 말에서 내려 두 발을 디디고 서 있던 란델도 함께 보였다.

"······ 아."

그런데 플란츠는 없었다. 대신, 멀찍이서 칼리안의 일행을 빙 둘러싸고 선 이들이 보였다. 어떻게 보아도 호의적이지는 않은 눈길들이 보였다.

칼리안의 일행을 경계하러 나온 엘프들이 었다.

"아직. 안괜찮아."

엘프들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은 칼리안이 대답했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았다.

- 들리십니까.

- 들려.

- 저만 나온 듯 합니다. 형님 말씀대로.

- 알아.

- 형님 정말 괜찮겠습니까.

- 믿고 기다린다며.

- 믿고 기다린다 했지 형님 죽는 꼴 방관하겠다 하지는 않았습니 다.

- 안죽어.

- 시드는 꼴 보러 온 것도 아닙니다.

- 안······ 그래.

안시들어.

라고 할 뻔한 것 같다.

- 방관할 필요 없어. 기다리면 돼.

완두콩이 꽤 긴박하게 다음 말을 이었으니까.

- 얼마나 더요.

- 다누와 대화 끝날 때까지.

- 기다리는 동안 저는 뭘 하면 되는데요.

- 내 아우님께서 제일 잘하시는 것.

- 협박하고 부수고 베고 짖고 물고. 저 잘하는 것 많은데. 유능해서.

- ······ 말고. 다른 것 먼저.

- 그럼 어떤 거요.

- 바다로 가.

- 수영 못 합니다. 아직 책을 안 봐서.

- 알아. 반말.

- 요. 그래도 갈까요.

- 그래.

- 가면요.

- 해. 잘하시는 것.

- 전부요.

- 전부. 다.

칼리안이 가만히 손을 움직였다.

먼 길을 돌아 '칼리안'의 것이 된 검을 들어올렸다.

"란델 형님."

"이야기하거라."

"바다 처음 보시겠네요."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는구나."

"구경시켜 드릴게요."

순백의 검.

그것을 쥐었다. 그리고.

- 네.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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