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75화 (476/527)

제84장. 감쪽같이 속았네(2)

작은 손이 움직이는 대신 소리가 전해졌다.

- 제가 사용하는 마나를 잠시 모아둔다고요?

"이론 상으로는 그렇······ 습니다만."

목소리를 전해주는 구슬을 손에 쥐고 있던 에우리아가 묘하게 말을 흐렸다. 한참 전부터 계속된 에우리아의 그런 모습에, 어렵지 않게 이유를 짐작한 히나가 말했다.

- 어차피 둘만 있잖아요. 하시던대로 말씀 놓으세요.

작위 때문이었다.

대륙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존중할 만큼의 명망을 지녔다는 것과 별개로, 자리로만 따지자면 카이리스의 마법사 협회장은 자작의 위치에 해당된다. 그리고 에우리아는 할머니인 세이렌 백작의 작위를 아직 물려받지도 않았다

아르센이야 발칸의 부군단장이 됐든 나중에 언젠가 더 높은 작위나 직급을 받든 말든 상관없이 평생동안 무조건 '꼬맹이'다. 에우리아가 아르센을 상대함에 있어 작위를 신경 쓸 일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터였다.

그런데 히나가 백작위를 받지 않았나. 작위로만 따진다면 에우리아보다 월등히 높은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그런 히나를 아르센처럼 계속 아랫사람 대하듯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습관처럼 편한 말이 튀어나오려는 것에 애를 먹을 수밖에.

"아니. 그래도 백작님이 되셨는데."

저보다 어린 고위 귀족을 높여 부르는 일에 거부감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과는 상관없이 세크리티아에 있던 동안 얻게 된 능력 좋고 술은 좀 약한 동생 하나를 잃어버린 기분이 됐었다 하는 편이 맞을 터였다.

- 괜찮아요. 저도 그게 편하고요.

작위가 높아져서 좋은 일은 키리에까지 귀족이 되었다는 것 외에는 없다 여기던 히나가 다시 말했다.

"······ 어. 그래. 그래야겠다."

나도 모르겠다. 작위고 뭐고.

사적인 자리에선 그냥 예전처럼 히나를 대하기로 결정을 내린 에우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 마나를 모아서 둔다는 내용까지요.

그런데 저는 마법사님들이나 기사님들처럼 마나를 다루지는 않아요.

"그렇지. 마력과 오러가 어떤 건지는 알고 있어?"

- 자세히는 몰라요. 저는 그냥 치료만 하니까요

"마법사들은 심장에 서클을 만들어서 거기에 마나를 담아. 그렇게 되면 그 마법사의 고유한 마나 제어 능력이 더해져서 마력이 돼. 그리고 기사들은 심장 말고 여기, 이 쯤에 마나를 모아. 그걸 오러로 바꿔서 신체나 무기를 강화시키는 방법을 익힌 사람을 소드마스터라고 부르지."

- 네. 그것까지는 알아요. 칼리안 왕자님은 둘 다 쓰신다는 것도요.

"둘 다 쓰신다 하기보다는······ 둘을 따로따로 쓰시는 게 아니라 섞어서, 홍차도 마시고 우유도 마시는 게 아니라 밀크티를 마시는 거랑 비슷한 것 같아. '오러를 가지고 네 번째 서클을 만들었더니 오러를 마력처럼 쓸 수 있더라'하셨거든."

- 그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아마 왕자님도 잘 모르실 거예요.

"어. 솔직히 나도 그렇게 생각해."

참 칼리안 답다.

히나가 작은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마법사나 소드마스터는 그런 식으로 마나를 몸 속에 모아놓고 써. 그런데 치유력은 그렇지 않잖아."

- 네. 주변의 마나가 저를 거쳐서 치유력으로 바뀌니까요. 제 몸에 모아두는 게 아니라 몸을 매개체로 쓰는 거죠. 다른 치유사님들도 방법은 같지만 마나 대신 신물에 모여있는 신력을 쓰신다 하셨고요.

이렇게 대답한 히나가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약병을 쳐다봤다. 조금 전 히나를 찾아온 에우리아가 다른 말 없이 꺼내놓은 것이었다.

영주성 안팎으로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제온의 군사들을 대비하느라 모두가 긴장한 이 상황에, 에우리아가 자신을 불러서 굳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저 약병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그런데, 베른 경."

본론을 꺼낼 때가 됐다는 듯 에우리아가 히나를 불렀다. 히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우리아와 히나의 주변에 반투명한 막이 생성되었다. 사일런트였다.

구슬이 있음에도 사일런트를 펼친 이유는 하나였다. 히나의 구슬은 한 방향으로만 말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구슬을 쥔 이의 말을 히나에게 전달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았으나 굉장히 불안정했다. 말이 전달되지 않거나 구슬이 지닌 마력 범위 안에 있는 다른 엉뚱한 사람에게 전달될 수가 있었다.

발칸의 마법사들이 '말씀은 우리 치유사님만 하시면 되니 듣는 놈은 얌전히 고개나 끄덕여라'하는 마음으로 만든 것이라 그렇다.

그래서 히나와 달리 에우리아는 입을 열어 말해야 했고 그러자니 중요한 이야기였던 까닭에 사일런트를 펼쳤다.

"그 치유력을 모아서 담아놓는다고 생각해 봐. 마법사나 소드마스터처럼 어딘가에 저장을 해 두는 거지."

- 저장을요?

"어. 대신 치유사들은 그 힘이 꼭 몸 속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 몸이 아닌 다른 곳에 넣어 두는 거야. 딸기 아이스크림 속에 녹여두거나, 설탕과자 위에 얹어두거나."

다분히 히나의 눈높이에 맞춘 설명이다.

덕분에 히나가 치유력이 든 아이스크림과 설탕과자에서 무슨 맛이 나게 될지를 잠깐 걱정해보는 사이, 에우리아의 말이 이어졌다.

"그렇게 되면 지난 왕실 숲 전투 때처럼 갑작스런 부상자들이 우르르 나온다 해도 베른 경이 세뉴 강 코앞까지 다녀 올 만큼 혹사할 필요 없이 치료를 할 수 있어. 딸기 아이스크림 하나씩 건네주고 베른 경은 그냥 놀면 되는거지."

- 솔깃하네요. 가능하기만 하면요.

"그래. 가능하기만 하다면."

히나의 말을 따라한 에우리아가 테이블 위의 약병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휘트린의 것을 따라 만들었던 또 하나의 수면향이었다.

"베로니카가 만든 수면향, 기억해?"

- 네. 칼리안 왕자님과 힐 경을 재웠다던 약이요.

"맞아. 거기에는 헤르제네스라는 풀이 들어가. 근육을 이완시키는 약초인데 사실 소드마스터의 신체는 근육 이완제가 통할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아. 그랬으면 약제사들이 만드는 온갖 마취제가 소드마스터한테 다 통했을 것 아냐."

- 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어. 그런데 린 영애가 그랬어. 세크리티아의 선원들이 헤르제네스를 술에 섞어 마신다고."

그 이야기를 들은 것은 아니었던 터라 히나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에우리아의 말이 이어졌다.

"재밌는 게 뭐냐면, 원래 헤르제네스는 근육을 이완시키는 게 아니라 반대 효과를 내는 풀이야. 그게 술이랑 섞이면 이완제가 돼."

히나가 말똥말똥한 새까만 눈으로 에우리아를 쳐다봤다. 그 모습을 본 에우리아가 무언가를 깨달은 얼굴이 되며 말했다.

"내말 어렵지."

- 네.

히나는 치유사였지 약제사나 마법사가 아니지 않나. 약을 사다 써본 적도 없을 히나가 에우리아의 말을 이해하는 것이 이상한 거다.

"쉽게 말해서, 몸을 보호하는 오러를 속이는 거야. 그 수면향에는 헤르제네스 뿐만 아니라 근육을 마비시키는 다른 약초들도 들어가거든. 그것에 반발하던 오러가 헤르제네스를 만나면 반가워 할 것 아냐

- 해약이라 생각해서요?

"그렇지. 그럼 오러는 안 그래도 열심히 퍼져나가려는 마비 약을 쉽게 이기려고 헤르제네스의 성분을 빨아들일 거야."

끄덕끄덕.

거기까지는 이해를 했나보다.

"그런데 이건 수면향이잖아."

- 그쵸······ 아, 술에 섞는다 하셨죠.

"그래. 그거지. 술."

에우리아가 기특하다는 듯 웃었다.

약병에 든 것은 수면제가 아니었다. 기체를 증발시키기 위한 알콜이 잔뜩 들어가는 수면향이다.

"두 성분이 천천히 섞일 수 있도록 하는 크루지아······ 아니, 그건 됐고. 아무튼 그런 재료가 있어. 그것과 헤르제네스를 가공해서 약을 만들어 두면, 오러가 쭉쭉 빨아들인 헤르제네스가 술에 천천히 취해서 점점 성격이 바뀌는 거야. 해약이 아니라 강력한 이완제로. 그렇게 하면 소드마스터도 잠드는 마법의 약이 되는 거지."

히나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또 말똥말똥, 영문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그러니까 수면향이랑 내가 치유력을 따로 모아두는 것이 무슨 상관이냐는 뜻이리라.

"그때 베로니카가 재현했던 수면향, 라시드 브리센이 3왕자님을 재운 그 수면향은 휘트린의 약을 따라 만든 거야. 그리고 휘트린이 여기에 첨가한 건 시간 차를 두고 정 반대의 성질로 바뀌어서 마비 효과를 발현하게 되는 가짜 치유력이야. 헤르제네스를 구하고 가공할 필요 없이 간단히 치유력을 한 번만 불어넣으면 돼. 베른 경은 아직 못 하는 일이지만 휘트린은 했어."

휘트린이라는 이름에 잠시 표정을 굳혔던 히나가 한참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에우리아를 쳐다보며 말했다.

- 협회장님의 말대로라면, 엄마······ 제 어머니는 치유력 뿐 아니라 마취나 마비 효과를 가진 힘도 낼 수 있고 그 힘을 따로 모아 두는 능력도 가지고 있겠네요.

"어. 맞아."

- 그것 뿐만 아니라 협회장님이 혼자 깰 수도 없던 방어막도 만들고요.

"그래. 3왕자님이 안에서 같이 때리지 않았으면 못 부쉈을 만큼 강한 방어막이 었어."

뿐만 아니었다. 휘트린은 그 힘으로 제온의 자객을 죽이기도 했다. 하지만 에우리아는 굳이 그 이야기까지는 전하지 않았다.

잠시 입을 다물었던 에우리아가 말을 이었다.

"휘트린이 쓰던 힘과 베른 경의 기운이 크게 다르지 않아. 아주 비슷해. 그러니까 베른 경도 그런 힘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해. 딸기 아이스크림에 치유력을 담아놓는 것도, 물론."

이 말을 들은 히나가 긴 한숨을 쉬었다.

에우리아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던 까닭이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히나가 목소리를 전해왔다.

- 그럼 제가 어머니를 찾아가서 그 방법을 배워 오라는······.

"뭔 소리야. 기껏 마주보고 인사 끝낸 사람을 뭐하러 다시 찾아가나. 모양 빠지게."

뭔 되도 않는 소리를 하느냐는 듯, 히나의 말을 싹뚝 자른 에우리아가 계속 말을 이었다.

"호밀 빵 다섯 개, 동전 한 닢. 휘트린에게 그걸로 베른 경 목숨값을 쳐준 건 잘했어. 무슨 생각으로 베른 경이 그런 말을 했을지 내가 다 알 수는 없어도 속은 시원했어."

"······ 네."

"그런데 걱정이 돼서 그래. 베른 경 스스로 베른 경의 목숨값을 그렇게만 따지게 될까봐."

휘트린이 선택하지 않은, 동전 한 닢 짜리 목숨. 그렇게 자신의 값을 정해놓게 될까봐.

"사람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자기 가치를 한 번 정하면 거기에 얽매이게 돼. 그런 놈들을 많이 봤어."

- 제 가치요.

"어."

히나가 잠시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들었다. 휘트린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맑은 눈을 마주보던 에우리아가 말했다.

"네 가능성을 알려주는 거야. 동전 한 닢짜리 히나 베른이 얼마나 더 자랄 수 있을지 상상해보라고."

히나는 지금도 대단하다.

지금도 충분히 대단하다.

하지만 그 대단함을 잊게 될까봐. 지금의 대단함마저 다 잊고 스스로 정한 값어치에 매여 살게 될까봐. 그렇게나 대단한 히나 베른이 누군가에게는 그냥 동전 한 닢짜리 선택지였다 여기게 될까봐.

그래서 굳이 시간을 냈다. 영주성 안 팎으로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제온의 군사들을 대비하느라 모두가 긴장한 이 상황에, 당장 쓸 데도 없을 수면향을 들고 와 긴 말을 했다.

사실 에우리아는 발칸과 관계된 사람이 아니다.

사적으로는 시스파니안보다 조금 더 존경하는 앨런을 따르고 공적으로는 카이리스 마법사들의 이득을 위해 칼리안의 편에 섰을 뿐, 따져보면 히나와는 별다른 관계가 없다. 단지 세크리티아에서 얼마간 가까이 지낸 정도의 친분이다. 히나가 에우리아에게 큰 도움을 준 적도 없었고 앞으로 에우리아에게 히나의 능력이 크게 필요할 일도 없을 터였다.

- 네. 협회장님.

그럼에도 이런 이야기를 굳이 해주는 것은, 그냥.

특별히 어려울 것 없는 환경에서 지내왔지만 아무리 그래도 히나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을 보고 겪어가며 조금 더 오래 살아 온 에우리아라서. 에우리아라는 어른이라서.

아마 그냥 그 정도의 이유일 거다.

- 그렇게 할게요. 상상해볼게요.

그것을 알아서, 히나는 고맙다는 말 대신 약속을 했다. 그 약속이 몇 번의 고맙다는 말보다 더한 의미임을 알아들은 에우리아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어. 그거 생각해보면서 코코 리본 하나만 새로 만들어줘. 내 이름 넣어서, 코코엄마 말고."

그렇게 많이 고마우면 갚으라고.

그 말에, 한결 가벼워진 히나의 목소리가 에우리아의 머릿속으로 전해진다.

- 네. 코코아빠랑 코코엄마, 다 써 놓을게요.

"새파란 꼬맹이는 됐어. 빼. 뭐하러 수고스럽게 둘 다 넣나. 나만 있으면 돼."

칼리안에게 생의 이유라는 거창한 빛무리가 되어주고 있으나 그 스스로는 아직 더 자라야 할 날을 많이 남겨 둔 나이일 뿐인 히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열심히 끄덕끄덕, 다시 한 번 고개를 움직였다.

다음 번 코코의 리본은 세상에서 제일 예쁜 보라색으로 해야겠다. 코코아빠랑 코코엄마 전부 다 수놓아서 만들어야지.

그렇게 마음을 먹으면서.

* * *

······ 아.

"형님 제 머리끄덩이는 왜 잡고 계십니까."

"놨어."

"제 머리끄덩이 엄청 귀한 머리끄덩이입니다. 참 더럽게 반가운 데에 다시 끌려오느라 제가 잠깐 발랄해지지만 않았어도 형님 칼 잡으실 때마다 조금 많이 허전해질 뻔하신 겁니다."

"알아."

"휘트린에 얌전히 계시라 했더니 여기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형님의 미친 놈들이 형님 없어졌다고 진짜 미쳐 날뛰면 순번 정해서 정말로 놈들 등에 업혀다니실 겁니까. 뭐, 그래도 편하기는 하겠네요. 그나저나 여기는 정말 어떻게 오셨습니까. 혹시 다누가 휘트린에 얌전히 잘 계시던 형님을 여기까지 부른 겁니까. 아니 그러니까 아무 거나 만지고 건드리고 밟지 말라고 백 날을 말씀드려도 왜 이렇게 말씀을 안 들으십니까."

모르겠다.

재가 짖는 건 계산이 안 된다.

그냥 짖게 둬야겠다.

"형님 주변에 미친놈이 저 하나만 있는 게 아닌 것도 아시면서 왜 그렇게 조심성이 없으십니까. 세상에 얼마나 많은 미친놈이 있는지 이제까지 잘 배우셨잖습니까. 미친놈들이 다 저처럼 곱고 어여쁘게 미쳐있는 게 아니라니까요. 여기 구석탱이 어디에 음습하게 숨어있는 다누만 봐도 그렇잖습니까. 저거 이름이 나무라고 해서 형님처럼 파릇파릇할 걸 기대하시면 안 됩니다."

그래······.

마음대로 짖을 날도 있기는 해야지.

"연약하다 하다하다 못해 비위도 참 많이 아쉬운 분이 퀘퀘한 나무 썩은 내는 어떻게 맡겠다고 이런 데를 오셨는지 저 진짜 이해가 안갑니다. 눅눅하고 축축하고 사람 마음 되게 찜찜하게 만드는 곰팡이만 여기저기 핀 채로 어디 하나 안 썩은 구석이 없게 미쳐있는 나무인데 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오십니까."

······ 그래.

이럴 때 아니면 내 동생 언제 또 이렇게 신나게 짖어보겠나. 이 참에 마음놓고 짖다 가게 하는 것도 형이 챙겨줘야 할 일 아니겠나.

"형님 이렇게 큰 맘 먹고 뭘 하실 수 있는 분이면 다 삭아빠진 나무 만나러 올 게 아니라 토끼 고기에 포크나 좀 가져가 보시던가요. 피망은 됐다 치고,"

아니다.

챙겨줘야 할 일 아니다.

명백히 아니다. 아닌 것이 분명하다.

"익은 당근이 얼마나 맛있는데 그것 하나를 안 드시면서, 타조 고기 누린내 난다고 피하시는 분이 이런 데를 다 오시고. 아무튼 형님 사춘기 진짜 오래,"

"야."

"네."

"적당히."

"뗄감으로도 못 쓸 저 새끼를 당신이 왜 만나러 왔는지 묻는 건데. 내가."

또, 서늘하다.

이제까지 플란츠에게 '속은' 것에 대한 서늘함은 아닐 터였다.

단순히 제온의 눈을 속여 그들이 하피의 힘을 응용하는 법을 칼리안에게 드러내도록 하게끔, 그리고 칼리안에게 순백의 검을 전해주게끔, 고작 그것을 위한 일이었다는 이유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을 의문을 향한 서늘함이다. 칼리안의 눈을 가린 채 이곳까지 따라오더니 자신을 부르지도 않은 다누의 앞에 멋대로 뛰어든 것에 대한 서늘함이다.

믿음이 깨질 것 같다는 생각에 따른 분노 혹은 실망이라 하기보다는 걱정의 범주 안에 속한 서늘함이다. 아직은 그렇다.

"거짓말 못하신다더니. 기다리겠다 한 말을 내가 잘못 들었나."

플란츠가 대답했다.

그런 플란츠를 잠시 쳐다보던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 형님이 잘못 들은 말 아닙니다."

"그럼 기다려. 괜찮으니까."

이번에는 성벽을 마주보며 플란츠를 뒤에 두고 서게 된 이, 참상 가득한 성벽을 또 지켜보게 된 그 미친놈의 커다란 등 뒤로 뒤늦은 답이 이어진다.

"네."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앞으로 한 발을 냈다.

그렇게 칼리안과 나란히 선 채 주변을 묵묵히 둘러봤다. 칼리안에게 경고를 전한 뒤로, 쉼없이 이어지는 칼리안의 드센 말에도 계속 침묵으로 일관하던 다누를 찾겠다는 듯이.

그러나 다누는 더이상의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성벽 아래와 성벽 주변에 수많은 시신들의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았다. 불타고 피에 절은 도시 안에 플란츠를, 그리고 '베른'의 모습으로 다시 서게 된 칼리안을 덩그러니 내버려 둔 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고 있었다.

꽤 오랫동안 다누를 기다리듯 멈춰서있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나는 이상하던데. 아우님은 아니었나."

"이상하지 않은 것이 있었는지를 물어보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책 보고 검술 익힌 헤르츠 경이 시나스타를 썼는데요. 날렵하게."

"······ 말고."

"그러면 뭘요."

"다누는 제온과 손을 잡았다며."

"네."

"그런데 서른 명이 왔군. 우리를 잡겠다고. 이상하잖아."

플란츠가 그렇게 말했다.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플란츠를 돌아봤다. 가장 투명한 빛의 자수정을 고르고 골라 고귀한 색을 조심스레 입혀 둔 듯한 눈으로 제 형제를 쳐다봤다. 쳐다보다가.

내 따까리의 허울을 한 웬 놈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을 이제야 마음대로 해소시켰다. 플란츠가 아르센의 모습으로 변장하여 자신을 쫓아왔다는 사실을 비로소 '눈치챘다'.

그리고 의문을 가졌다.

아르센의 외양을 한 플란츠, 소드마스터의 길목에 올라선 키리에, 그리고 칼리안. 그들에게 '마나'를 빼앗는다 하여 고작 서른 명으로 상대할 수 있는지. 마법 사용이 금제되어 무력해진 아르센과 무력없는 란델을 지키며 싸워야 할 칼리안과 키리에가 아니라, 란델 하나를 뒤에 둔 세 명의 능력 좋은 칼잡이들이 서른을 상대하지 못할 것 같은지.

"······ 못 알아봅니까. 외양이 바뀐것을, 다누가."

"알아봤으면 조금 더 많은 인원을 보내라 했겠지. 다누가. 적어도 내 주머니 속에 어떤 검이 들어있었는지, 그 정도는 알았겠지."

다누는 과거의 일들을 그저 지켜봤다고 했지 꿰뚫어봤다 하지 않았다. 아르센의 겉모습을 한 플란츠의 정체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엘프들의 숲에 들어와 보란듯이 칼리안을 불러올 때까지도, 칼리안을 붙든 플란츠가 함께 들어서 스스로 변장을 해제했을 때까지도.

"그럼 엘프들의 치유사는요. 꿰뚫어 보지 않습니까."

그런데 히나는 아니었다.

세르제인의 속에 든 것이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외팔이 검사 노튼으로 변장한 하얀 수리를, 제온에서 보낸 이들의 심장 속에 든 돌을 알아봤다.

"아마도 나는. 내가 전하보다 똑똑할 것이라 생각하는데. 내 어머니보다 먼 곳을 볼 줄 안다고 여기는데. 내 이해가 시스파니안의 이해보다 낫다 믿는데. 아닌가"

"······ 자신만만하시네요."

엘프들의 어머니가 반드시 제 자식들의 힘을 다 가지고 있지는 못하리라는 말이었다.

"꿰뚫어볼 줄 알았다면, 엘프 휘트린을 이용하고 있었을 때 나로 변장하고 있던 아우님을 납치해 가도록 지시하지 않았을 것 아닌가."

또 하나의 빈틈을 찾아 이 자리에까지 찾아온 플란츠가 확신했다는 듯 말했다.

"그럼 그 말을 해주셨으면 제가 잘 알아듣고 행동했을 텐데요."

"아우님께서 거짓말을 못하시니까. 아우님 눈부터 가렸는데. 잘못됐나."

그저 지켜보기만 할 줄 아는 다누의 무능을 확인하고자 했음을 알렸다. 매우 당당하게.

그런 플란츠를 보던 칼리안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드미레아한테 자랑해야 되겠습니다."

"소공작에게, 뭘."

"완두콩 잘 키웠다고."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을 전해 준 칼리안이 아주 조금 뿌듯한 얼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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