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74화 (475/527)

제84장. 감쪽같이 속았네(1)

타닥, 타닥.

붉은 불티가 조용히 날아오른다.

암막한 주변을 잠시 밝히다 오래 못가 스러지기를 계속하는 붉은 티. 그것을 바라보던 한 명은 어느 늦봄의 소리없는 비에 우수수 떨어졌던 장미 꽃잎들을 떠올렸다. 다른 한 명은 자신의 검은 로브를 벗어 히나에게 걸쳐준 뒤 고개를 들었던 깡마른 왕자의 눈빛을 돌이켰다. 또 다른 한 명은 저 불티에서 호수 위에 띄워올린 불꽃을 보는 대신 나무가 갈라지는 소리를 들어보라던 목소리를 생각했다.

그 셋이 이렇게 별 것 아닌 불티에서 한 사람을 보는 사이.

- 저벅, 저벅.

누군가에겐 외면의 대상이었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기대치 않았던 보호자였으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만화경처럼 느껴지는 바로 그 사람이 모닥불 곁으로 걸어왔다. 검은 공기에 스미는 붉음과는 판이하게 다른 연보랏빛의 눈을 한 채로, 특별히 정돈할 필요도 없을 길고 긴 생머리를 습관처럼 내버려 둔 채로.

그러더니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달고 해진 망국의 깃발을 이리저리 뒤치다 이내 사라져 간 바람같은 목소리를 냈다.

"고기 잘 익겠네요. 불이 좋아서."

칼리안 가라사대.

불이 좋으면 고기가 잘 익는다.

뒤늦은 깨달음에 기적같은 첫만남이며 아릿한 가르침이고 뭐고. 이 자리의 일행들이 깊은 감성에 젖어있든 말든 칼리안은 그냥 별 생각이 없었다는 소리다. 걸었으니 배가 고프고 싸웠으니 배가 고프고 사냥을 했으니 배가 고프고 고기 손질까지 끝내니 배가 엄청 고팠을 뿐.

걷고 싸우는 것에서 모자라 사냥에 고기 손질까지 전부 다 칼리안이 했으니 말이다.

란델 형님은 걸었던 것만으로도 피곤했을 테고, 키리에는 불을 피운 뒤 란델을 잘 지켜야 하고, 헤르츠 경은 생전 잡아볼 일 없었을 칼을 이리저리 되는대로 휘둘러보느라 녹초가 됐을 게 뻔하고. 그러니 어쩌겠나. 여기에서 제일 여유로운 내가 사냥에 손질까지 다 해야지.

이런 생각에 키리에에게 시키려던 사냥은 물론이거니와 평소에는 아르센에게 맡기던 고기 손질까지 직접 나서서 그럭저럭 말끔하게 해치운 칼리안이 그 소중한 야생 닭고기를 키리에에게 건넸다.

"이거 구워줘, 키리에."

"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응 "

아무리 그래도 살고 죽고 다시 사는 내내 왕족이었던 칼리안이다. 입맛이 까탈스럽지 않을 뿐이지 높은 수준의 미각이라는 것이 있기는 있었던 까닭에 자신이 요리라는 것을 하는 실력과 얀이 차를 우리는 실력이 매우 비등비등함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렇게 건네진 고기를 받아 든 키리에가 그나마 넷 중 가장 나은 솜씨로 잘 구운 닭고기를 만들어내는 사이, 가만히 자리에 앉아 모닥불을 바라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오는 길에는 습격이 없을 줄 알았는데 생각지 못한 일이 터졌네요. 놀라진 않으셨습니까."

물론 란델을 향한 말이었다. 싸움에 능한 키리에나 이런 습격에는 이골이 났을 '아르센'이야 문제될 것이 없겠으나 란델은 그렇지 않을 테니 말이다.

"되었다."

대답이 전해졌다.

놀라지 않았다는 소리가 아니다. 폭포에 부서지던 달빛을 눈에 담을 줄 아는, 혹은 알게 된 사람이 코앞에서 벌어진 싸움에 아무렇지 않을 리가 있나. 그러니 놀라기는 했으나 신경 쓰지 말라는 의미에 가까울 터였다.

키리에의 맞은편, 그러니까 란델과 플란츠의 사이 쯤에 와 앉은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보던 란델이 말을 더했다.

"시들지 않고도 저무는 것은 이미 많이 보았으니."

"사람과 장미가 같겠습니까."

"보다 귀했다 여겨지지 않았으니 되었다 하는것이다."

이 말에 칼리안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물론 칼리안 역시 제온에 소속된 대사막의 전사들을 하나하나의 귀한 생명으로 여기고자 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목숨을 노려오는 이들을 그렇게 높이 사 줄 만큼 인정 많은 멍청이는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란델이 조금 전에 죽어 사라진 서른 명의 전사가 장미보다 못했다 여긴다는 말을 걱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 때문이 아니라.

저도 모르게 떠올랐던 '과거에서의 미래' 때문이었다. 과거의 란델이 텐실의 국왕이 된 이후 텐실에서 벌어졌던 가지치기들이 생각나버린 까닭에 쉬이 대답을 주지 못했다. 텐실에서 사라져간 사람들, 이유 없는 필요에 의해 사라져간 그들을 두고 란델이 어떤 생각을 했을지. 차라리 죄책감이 없었기를 기대해야 맞을지 그 반대이기를 바라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오늘 본 것이 꽃보다 덜 귀했다 해서 앞으로의 것까지 그리 보겠다는 말이 아니다. 적어도 너보다는 똑똑하게 구분하고 있으니 걱정 말거라."

칼리안의 눈에 어린 걱정을 읽었는지, 란델이 칼리안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말했다. 세상의 모든 목숨에 대해 무감한 것이 아니라 죽을 놈이 죽었으니 무감하게 군 것이라고.

칼리안이 바람에 들썩이다 팔에 감겨 드는 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제가 똑똑하지 않게 굴었습니까."

"똑똑하게 굴고자 했으면 수를 거꾸로 세었겠지. 서른부터 하나까지."

"죽일 놈 수 말고 죽인 놈 수를 세는 건, 그냥 버릇입니다. 구분하지 못해서 가 아니라."

"상대보다 스스로가 더 귀하다 여기질 못했던 것은 아니더냐."

"그랬으면 제가 검을 들었겠습니까."

"너와 상대의 경중을 달아 본 것이 아니라 보다 더 무겁다 여긴 것이 있어서, 그래서 억지로 칼을 잡다 그런 버릇이 생겨난 것처럼 보였다만."

칼리안의 눈이 새로 얻게 된 새하얀 검에 가 닿았다. 키리에와 '아르센'이 그러한 것처럼 잠시 짬을 내어 칼을 닦아내는 수고를 들이지 않았음에도, 화려한 문양이 각인된 검의 손잡이에는 티끌같은 얼룩 하나 배어있지 않았다. 검집 속에 든 검신 역시 마찬가지 일 터였다.

그래. 란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베어낸 생명의 흔적이 일절 남지 않는 순백의 검. 그런 검을 대신해 죽은 이의 수를 세는 버릇이 들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보셨습니까."

"나는 그렇게 보았다."

"그것이 보기 언짢으셨습니까."

걱정을 해주려다 괜스레 혼이 나는 기분이 든다.

베른 스스로보다 베른이 죽여야 할 이들이 덜 중요하다 여기질 못하고, 베른이 지켜낼 사람 하나를 위해 억지로 그렇게 산 것이 아니냐면서.

"언짢아 할 이유가 있겠느냐. 이제는 물려도 될 버릇이 아닌가 여겨진 것뿐이니,"

아무튼 란델은 사람을 살피는 것에 일가견이 있다.

칼리안이 잠시 고개를 돌렸다. 잘 익어가는 고기와 잘 타오르는 장작더미에 시선을 둔 두 명을 바라보다 다시 란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싸움 구경이나 하실 줄 알았는데, 저에 대해 그리 자세히 보고 계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지켜보라 한 것은 네가 아니더냐."

"제가,"

제가 언제요.

되물으려던 칼리안이 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주억 거렸다.

"네. 그랬네요. 제가."

란델의 말이 맞다.

칼리안이 그리 말했었다. 자신을 지켜 보라고.

장미가 곧 피어날 테니.

"숫자 세는 버릇은 차차 고치겠습니 다. 안 그래도 고쳐야 할 것이 하도 많아서."

"편한대로 하거라."

"네."

짧은 대답 끝에 작은 웃음을 터뜨린 칼리안이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여전히 멋대로 흘려 둔 채였던 긴 청은발이 다시 바닥을 쓸었다.

그것을 이제야 깨달았는지, 칼리안이 마법사 주머니 안을 뒤졌다. 그리고 적당히 찾아낸 긴 가죽 끈으로 자신의 길고 긴 청은발을 꼼꼼하게 올려묶은 뒤 입을 열었다.

"헤르츠 경."

"네. 왕자님."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리려다 말았다.

싸우는 내내 플란츠는, 아르센만큼 몸이 자란 것을 계속 상기하며 평소보다 더 많이 고개를 숙이고 허리도 더 깊이 틀어야 했다. 팔이 길어진 만큼 상대에게 가 닿기까지의 거리가 짧아진 것을 계산하느라 싸우는 내내 몸보다 머리가 더 바빴다.

발에 채이는 긴 로브자락이며 아르센이 그러하듯 엉성하게 묶어 뒀던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는 새파란 머리카락 때문에 안 그래도 이래저래 짜증이 치솟고 있었다. 그래도 이 모든 것이 다 자초한 일이니 열심히 감수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저도 모르게 짜증이 난다.

"아까 보니까 경이 검을 두 자루 쓰는 것 같던데."

"제가 그랬습니까?"

"경이 그랬습니다."

"정신이 없던 중이라 기억이 잘 안납니다."

침묵하기를 멈춘 칼리안 때문이다.

지금 칼리안은 그레이 브리센의 저택이나 왕실의 숲에서 마주쳤던 날보다도 키가 더 컸다. 목소리가 더 낮았고 눈초리는 더 서늘했다. 흉터가 더 많았다. 훨씬 더 많았다.

플란츠와 비슷한 나이가 아니라 그보다 더 자란, 오러를 깨우치고 왕궁에 돌아온 이후의 나이대라는 소리다. 그런데도 칼리안의 검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키가 훌쩍 자라든 말든 오러가 묶이든 말든 칼이 바뀌든 말든 여전히 거침없이 검을 썼다.

그래서 짜증이 났다. 그런 칼리안과 자신의 확연한 실력 차이가 보란듯이 눈에 띄어 신경이 쓰였는데, 거기에 더 해 아까부터 칼리안이 자꾸 쿡쿡 건드려대고 있던 탓이다.

"그런데 헤르츠 경."

"네. 왕자님."

"검술은 대체 어디서 배운 겁니까. 나 너무 궁금한데."

"······ 책 봤습니다."

"책."

"네."

"나는 책으로 기마술밖에 못 배우겠던데. 경은 재능이 상당한가봐."

이렇게. 쿡쿡.

보란듯한 반말로. 계속. 끊임없이. 계속.

덕분에 심기불편한 플란츠를 한참 쳐다보던 칼리안이 가만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먹기 좋게 잘 구워진 채 건네지는 닭고기를 받아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제대로 배워 볼 생각 없습니까. 익숙한 검도 다시 지니게 됐고 경의 실력도 믿고 있으니 내가 잘 가르쳐 줄 수 있는데."

"지금은 없습니다."

"지금은, 없습니까."

"네. 아직은 없습니다."

"언제쯤 생길까. 그 생각."

목소리가 달라졌다.

확연히 무거워진 그 조용한 질문에, 플란츠가 제 손에 들린 접시를 한참 내려다보다 답했다.

"오래지 않아 배워보도록 하겠습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려나. 내가."

"······ 너무 늦진 않을겁니다."

"기다리고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까."

"네. 압니다."

"그래요, 그럼."

칼리안이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겠습니다. 언제까지든."

그리 말했다. 설명없는 눈속임이 너무 오래 계속되진 않을 모양이니, 계속 속아주겠노라고.

믿는 만큼.

언제까지고.

* * *

지그프리드령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수풀.

그 속으로 한 발을 더 들이면 도착이다. 원하던 이를 만나고 궁금하다 여기던 일들을 알게 되고 불만스럽던 일들을 토로할 수 있을 것이다. 저 수풀만 지나면, 엘프의 도시가 나올 테니까.

그 앞에서 발을 멈췄다.

잠시 눈을 감고 연락을 보냈다.

- 네, 왕자님.

본래대로였다면 앨런의 목소리가 전해졌겠으나 아주 많이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미레아였다.

- 휘트린에 별 일은 없어?

- 치유사 베른 경이 휘트린으로 왔습니다.

기다렸다는 듯한 대답이 돌아온다. 칼리안이 다소 가라앉은 얼굴로 말을 전했다.

- ······ 그래.

- 무슨 상황인지는 들었습니다. 베른 경에 대해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그래. 일단 알았어. 얀이랑 에일라는?

- 오라버니는 다른 시종들과 함께 왕자님의 별장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브리지트 경은 저와 함께 영주성에 있습니다.

- 내 별장 많이 지저분한데.

- 전부 정리 끝난 뒤에 들었고, 그래도 혹시 몰라 수련장 쪽으로는 걸음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습니다.

- 별장 안전은?

- 발칸의 대원 몇몇이 별장에 있습니다만 힐 경에게도 그쪽의 호위를 부탁했습니다. 다른 공격이 있을까 걱정 되어서요. 그래도 저는 휘트린이라는 엘프가 지그프리드를 건드리려 한 이유를 정확히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아 잠시 영주성에 남았습니다.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휘트린도 꽤 바쁜 모양이다.

시종들을 왜 별장에 보냈는지, 드미레아가 휘트린을 어떻게 아는지, 일말의 궁금증도 품지 않은 칼리안이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 그래. 나 때문에 괜히 고생이 많네, 드미레아.

- 제가 왕자님 편에 서기로 해서 생긴 일입니다. 왕궁 싸움에 발을 들일 때 이 정도는 예상했습니다.

- 그럼 이건 내가 안 갚아도 돼?

- 네. 제가 살려드린 왕자님 목숨값이나 계산해보고 있겠습니다.

- 아, 그건 세렌티도 못 갚을 텐데. 내 목숨 너무 비싸서.

- 왕자님이나 세렌티가 따지는 값과 제가 생각한 값이 같겠습니까. 알아서 잘 계산해 볼 테니 걱정 마십시오.

칼리안의 목숨이야 칼리안이나 세렌티에게는 비쌀지 모르겠지만 자신에게는 아니란다. 분명 진심일 그 말에 실소한 칼리안이 답을 전했다.

- 서운한데. 평생 정혼자 하라더니.

- 비싼 분이셔서 평생 하시라 말씀드린 것 아닙니다.

- 그럼 역시 옆에 두면 흐뭇해서,

- 아닙니다.

잘 익은 체리를 똑 따서 수확하듯 깔끔하고 단호한 대답에 결국은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앞으로 걸을 때를 기다리던 레이븐이 귀를 쫑긋했다. 그런 레이븐을 슥슥 쓰다듬으며 별 일 아니라는 의미를 전한 칼리안이 다시 목소리를 보냈다.

- 그래도 내 목숨값 너무 싸게 쳐주지는 말고. 비싸게 생각해줘. 정혼자잖아.

- 네. 감안하겠습니다.

- 그래. 어쨌든 금방 갈게. 조금만 수고해 줘.

- 왕자님은 지금 어디 쯤이십니까.

- 엘프 도시 입구. 들어가면 혹시 연락이 끊길까봐 잠시 부른 거야.

- 서두르셨나 보네요. 생각보다 빠른데.

- 응. 부지런히 왔어. 아무튼 조심히 지내, 정혼자님.

- 왕자님도요. 조심하십시오.

- 그럴게.

이곳에 오는 길에 제온의 습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전하지 않았다. 그들이 하피의 힘을 어떻게 부렸는지, 그들이 왜 습격을 해왔는지, 엘프들의 장로 나르잔이나 다누에게 먼저 물어봐야 할 일이라 생각한 까닭이었다. 휘트린 영지 쪽도 그리 한가하지만은 않은 듯 보이기도 했고.

때문에 안부 주고받기 정도만 마친 칼리안이 일행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들어가죠, 이제."

"네. 왕자님."

대답을 전해온 것은 키리에 뿐이다.

다른 둘의 준비가 끝나지 않아 답하지 않은 것은 아닐 터였다. 그저 긴장했을 뿐.

물론 키리에라 해서 다르지는 않았다. 처음 찾아오는 엘프의 도시가 아닌가. 조금이라도 궁금한 면이 있었을 텐데도 키리에는 호기심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검을 뽑아들고 있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 키리에."

"주의하겠습니다."

그런 키리에를 다독이듯 말한 칼리안이 고개를 되돌렸다.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레이븐이 발을 내딛는다.

지그프리드령 인근의 숲, 그 한가운 데의 수풀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어진 곳. 더운 바람이 부는 곳. 대사막 끝의 바다가 펼쳐진 그런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다각.

수풀로 들어선다.

수풀을 통과한다.

레이븐이 한 발을 멈칫했다 걸었다. 덕분에 뒤따르던 아르센의 말 로로와의 거리가 좁혀졌다. 그럴 줄 알았던지 플란츠는 별다른 말 없이 레이븐의 뒤에 바짝 붙은 채로 움직였다. 그 뒤를 란델이, 그리고 키리에가 따라왔다.

- 다각, 다각!

다누와 그의 자식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발을 내딛는다. 수풀을 스치는 소리와 흙에 닿는 발굽 소리가 두 번 더 이어졌다.

그 발굽 소리가 이제 조금 달라질 것이라고. 풀이 스치고 흙이 밟히는 소리 대신 단단한 발에 채이는 작은 자갈의 소리가 나게 될 것이라고. 그 뒤에는 깊고 넓고 짙은 바다의 묵직한 소금 냄새가 코 끝에 스미리라고. 그리고 오래지 않아 새 손님을 맞이하는 엘프들을 마주치리라고. 그리 생각했다.

다만 환대를 기대하진 않았다. 초대하지 않은 손님을 마중 나온 엘프들의 경계어린 눈초리를, 혹은 대사막의 전사와 비견된다던 엘프 전사들이 활과 창을 겨누는 모습을, 그 정도의 홀대를 생각했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칼리안의 방문을 아주 조금 더 언짢게 여긴다면, 어쩌면.

- 휘이이잉!

원하던대로.

즉각적인 부름이 있지 않을까.

"······ 역시."

단단히 올려 묶은 청은빛의 긴 머리가 어지러이 흩날렸다. 드세다 하기에는 보다 약하고 잔잔하다 하기에는 보다 강한 바람에 이리저리 흐트러지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말의 발목에 풀이 스치고 발굽에 흙이 밟히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작은 자갈이 채이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가슴을 다 씻어낼 듯한 바다 비린내가 코 끝에 들지도 않는다. 엘프 전사들의 눈초리나 활과 창도 보이지 않는다.

- 나에 대한 불응을 이른 것이 아니었다.

그 대신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닷가의 강한 햇살에 조금 더 푸르게 빛나리라 잠시 기대했던 머리카락이 어둠에 잠겼다.

여지없는 매캐한 향이 코 끝을 찔러온다. 잊지도 못할 피 비린내가 또 한 번 뼛속 깊이 스며들고 타오르는 불길과 잿더미가 된 세크레타가 다시 펼쳐진다. 이제는 도무지 선의로 볼 수 없을 그 광경의 앞에 '베른'의 모습으로 되서게 된 칼리안이 웃음을 머금었다.

"그럼 다른 말 다 듣지 말고 네 말만 들으라 했어야지. 순응하지 말라기에 그 말만 열심히 들었잖아, 나는."

부드러운, 낮지만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운 목소리가 칼리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지막한 노래라도 부르는 듯한 그런 얼굴을 하고서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다누에게 무언가 더 말을 하려 했다.

"다누."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자리에 없어야 할 또 다른 낮은 목소리가 칼리안의 귀에 들렸다.

칼리안의 연보랏빛 눈이 당혹스러움을 담았다. 다누의 영역에 끌려 들어오느라 눈치채지 못한 또 다른 목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엘프들의 도시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빛이 번져서, 눈 앞을 밝히던 그 빛이 어떤 것인지 이미 겪어 보아서, 동생이 혼자 멋대로 사라지기 전에 되는대로 아무것이나 잡아 챈. 그래서 동생의 그 긴 머리채의 끄트머리를 손에 꽉 쥔 채로 다누에게 함께 불려 온.

완두콩의 연두색 눈이 보였다.

"······ 아."

그 눈을 한참 쳐다보던 칼리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니이럴수가. 형님이왜여기계십니까."

우와.

감쪽같이 속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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