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장. 일가견이 있는(7)
만약 히나가 온다면.
이렇게 시작하는 내용은 없었다.
[ 히나가 올 거야. ]
그것이 전부였다.
플란츠의 편지는 히나가 오지 않을 때 어떻게 하여 휘트린을 체포해야 하는지, 만약 체포하지 않고 다시 돌려보내게 된다면 무엇을 주의해야 하는지, 그 이후 무슨 일을 하면 되는지에 대한 지침을 적어 두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만약.
"불필요하다······ 그렇게 말한 것이 맞나."
만약, 히나가 온다면.
히나의 뜻대로. 히나가 대처하는대로. 간섭하지 말고 두라는 뜻일 터였다.
"네. 맞습니다."
그런데 사실 플란츠는 편지에 프레이르의 정체에 대한 설명을 해 두지 않았다. 덕분에 지금 프레이르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아는 이들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휘트린'이라는 프레이야의 성과 영지가 누구의 이름으로부터 유래되었는지에 대해 아는 이도 없지 않나. 그나마 플란츠의 편지를 보았던 아르센과 에우리아만 '히나와 휘트린의 힘이 비슷하다'는 등의 말로 말미암아 '플란츠가 프레이르의 이름을 휘트린이라 적었나보다' 하는 정도의 기적적인 끼워맞추기를 해냈을 뿐이다.
그랬으니 히나의 말을 통역한 기사 역시 히나가 무슨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가늠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왔으니 저 치유사는 불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치유사님께서, 방금."
그 기사가 다시 한 번 강조하듯 말을 전했다.
다른 감정은 일체 들어가지 않은 무덤덤한 말투로.
- 자박, 자박.
히나가 다시 발을 옮겼다.
기사에게 되물음을 한 휘트린을 그냥 지나칠 것처럼 걸었다. 아무 말도 듣지 못한 듯 휘트린의 뒤에서 앞 쪽으로, 에우리아가 있던 곳을 향해서.
- ······ 자박.
그러다 곧 걸음을 멈췄다.
혹시나 히나가 휘트린을 만나고 싶어 한다면 히나가 처음으로 만나는 '어머니'가 죄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았으면 해서. 그런 모습을 보고 히나가 마음을 앓게 될까봐.
그런 이유 때문에 칼리안과 플란츠가 휘트린을 체포하거나 정체를 먼저 알리지 않고 일단 두었으리라는 사실을 히나는 이해했다. 휘트린이 도망치거나 플란츠의 빈 방으로 침입하려 들 수도 있음을 알면서도 내버려두었음을 정확히 이해했다.
휘트린을 보지 못한 척 해도 괜찮을 테고 휘트린과 잠시 따로이 만나 대화를 나누어도 문제될 것이 없을 터였다. 그렇게 하여 휘트린이 다시 도망친다 해도 칼리안과 플란츠는 뒷감당을 다 해 줄 사람들이니까.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휘트린을 마주친 뒤로 계속 고민하던 히나가 여전히 프레이르의 모습을 하고 있는 휘트린을 쳐다봤다.
- 자박.
그리고 휘트린을 향해 딱 한 걸음을 다가간 뒤 자신의 로브 속을 뒤져 지갑 하나를 꺼냈다. 작은 고양이 두 마리가 수놓인 지갑을 열어 동전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 후 또한 걸음.
휘트린에게 조금 더 가까이 간 히나가 손을 내밀었다. 키리에와 달리 자신을 참 많이도 닮은 히나를 생경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던 휘트린의 손에 방금 꺼낸 동전 한 닢을 을려놨다.
1플로린의 백분의 일도 되지 않는 가치의 동전 한 닢. 호밀빵을 다섯 개 살 수 있는 돈. 그것을 휘트린에게 건넸다
- 그건.
히나의 손이 말을 그려낸다.
- 오빠의 목숨값이에요. 사흘에 한 번씩 주는, 그 동전 한 개를 받으려고, 오빠는 매일매일, 목숨을 걸었어요.
곁에 있던 기사가 길지도 않은 히나의 얘기를 통역하다 멈칫했다. 히나의 말이 무슨 뜻인지도 이해하지 못했으면서 잠시 목을 가다듬은 뒤 말을 마쳤다.
- 짤랑!
또 하나의 동전이 휘트린의 손에 올려진다.
- 내 목숨값이에요. 동전 한 닢으로, 호밀빵 여섯 개를, 살 수 있다고, 오빠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그래서 나는, 사흘에 하루씩을, 굶었어요.
조금 더 길게 멈췄던 기사의 목소리가 전해진다.
휘트린이 시선을 내렸다.
자신의 손 위에 올려진 것을 내려다봤다.
동전 두 닢.
아무것도 아닌, 정말 아무런 가치도 없는 작고 얇은 동전 두 닢을 내려다 봤다. 다른 말 없이 한참동안 그것을 내려다봤다.
- 나와 오빠를, 낳아준 것에 대한, 보답이에요. 당신이, 잊었던, 두 생명의, 값이에요.
통역하는 목소리가 또 한 번 끊기다 이어졌다. 히나의 말을 함께 본 대원들이 저마다 숨을 삼켰다.
그러나 히나의 얼굴은 평온했다. 낮에 본 하늘에 어떤 구름이 떠 있었는지, 어제는 안네의 털 속에서 어떤 풀씨가 나왔는지, 오늘은 루시에게 어떤 옷을 입혔는지, 점심에 마신 차의 향기가 어땠는지. 그런 말이나 꺼내놓는 듯한 얼굴이었다.
화를 내거나 원망할 필요가 없다 여겼다.
동전 두 닢을 든 휘트린이 이제와 후회라는 것을 할 리도 없겠지만 히나 역시 휘트린이 벌써부터 후회를 느끼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고작 동전 한 닢 씩에 죄책감을 가질 그런 사람의 값싼 선택 때문에, 키리에와 히나가 동전 한 닢짜리 목숨을 연명해왔다 여기고 싶지는 않았다.
- 당신의 가치가, 고작 그 뿐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않았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까, 동전 한 닢. 우리가 당신에게, 바란 것은, 그냥 그 정도였어요. 그러니까 당신이, 대단한 것을, 포기했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귀한 것을 포기하고, 더 좋은 길을 걸었다고, 착각 하지 말아요.
목소리를 전해 줄 구슬을 잊은 것이 아니었음에도 히나는 손을 움직여 자신의 말을 전했다. 휘트린에게는 히나의 목소리를 들을 권리가 없었으니까.
- 혹시라도 더 많은 말로, 당신을 원망하면서, 당신을 계속, 기억해주지 않을까, 기대하지도 말아요. 어쨌거나 나는, 오빠와 내가 당신에게 받은 것을, 다 갚았으니까요.
또박또박. 기사가 한 음절 한 음절에 힘을 주어 가며 히나의 말을 소리로 옮겼다.
- 어머니.
마지막 한 마디까지도.
가만히 서서 기사의 통역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히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에우리아와 대원들을 향해 손을 움직였다.
- 목걸이, 회수하세요. 체포할 명목, 필요하시면요.
이런 말을 본 마법사 한 명이 에우리아를 쳐다봤다. 수어에 익숙하지 않은 에우리아에게 히나의 말 뜻을 알려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 슈욱!
에우리아의 마법이 조금 더 빨리 움직였다.
손바닥에 올려진 제 가벼운 가치를 계속 내려다보는 휘트린을 향해 낫과 같은 형상을 한 물의 마력이 뻗어나갔다. 그러더니 마치 휘트린의 목을 베어낼 것처럼 크게 휘둘러졌다.
- 사아악!
- ······ 툭!
그러나 툭, 하고.
끊어져 떨어진 것은 얇은 목걸이 뿐이었다.
"저 정도는 나도 알아들어."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뒤를 잇는다.
'프레이르'의 머리카락이 은백색으로 변하기 전에, 그 눈동자가 검은 색으로 바뀌기 전에, 히나가 고개를 돌렸다.
- 자박, 자박.
왕자의 가족을 사칭한, 남작을 사칭한, 왕세자와 왕자의 눈을 속여 온, 거짓 얼굴로 왕세자의 방에 들고자 했던, 그런 수많은 죄목이 드러나기 전에 휘트린으로 부터 등을 돌렸다. 그리고 왕세자의 방을 향해 다시 발을 옮겼다.
방 문 앞을 빼곡히 둘러싸고 있던 기사들이 길을 냈다. 불필요한 치유사 말고 정말 필요한 자신들의 치유사가 '술 병을 이기지 못해 잠드신 우리 부군단장님'의 방에 들어갈 수 있도록 널찍하게 길을 냈다.
그 사이로 히나가 지나갔다.
가장 안쪽에 있던 기사가 얼른 문을 열어 히나를 들여보냈다. 그리고 다시 굳게 닫았다.
그 모습을 휘트린이 지켜봤다.
자신의 쓸모없음을 알려준 히나를 쫓다가, 자신에 대한 추모를 마쳤다던 키리에를 생각하다가, 지난 밤부터 계속 답하지 않는 다누를 떠올렸다.
'어머니.'
한번더, 다누를 불렀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휘이익!
에우리아가 두 번째 마법을 운용했다. 은백색의 머리카락과 새까만 눈을 지닌 휘트린을 휘감을 물의 사슬을 뻗어 냈다.
[ 휘트린을 체포하면 제온의 군사들이 찾아올 거야. 그동안 계속 휘트린을 공격해왔다 했었으니까. 싸우지 않고 휘트린을 넘기든지, 제온을 막아주고 휘트린을 조사하든지. 거기부터는 마법사 네가 알아서 결정해. 휘트린을 직접 죽이지만 마. ]
이제부터 벌어질 상황에 대한 판단은 전부 다 아르센에게 맡긴 플란츠의 마지막 말을 최대한 지켜보려 노력하면서.
* * *
드센 바람이 지나갔다 여겼다.
한기 가득한 기운이 스치듯 움직이며 사방을 뒤흔들다 물러갔다 생각했다.
- ······ 쿵!
- 풀썩!
그러니 방금 쓰러진 다섯 명의 전사들은 그렇게만 여길 터였다. 드센 바람과 한기 가득한 기운이 자신을 휩쓸며 갔다고. 제 검에 어려 있던 붉은 오러가 사라짐과 동시에 생명을 빼앗겼으니 그들은 분명 그 이상의 것은 알지 못한 채 종막을 맞이했을 터였다.
- 카아앙! 카강!
그러나 남은 다섯, 그들은 아니었다.
눈 깜짝할 새 새하얀 칼날이 날아들었다. 피부를 저미는 듯한 살기를 간신히 밀어냈다 여기는 순간, 인간의 것이라 생각되지 않을 연보랏빛의 눈동자가 코앞으로 짓쳐들었다.
전사가 검을 휘둘렀다.
오러를 내뻗어 공격을 막고 쳐내려 했다.
- 휘잉!
하지만 헛된 손짓만 했을 뿐, 전사의 검이 닿은 곳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궁금해지네."
방금 전까지 앞에 있던 이가 사라진 것을 알고 주변을 경계하던 전사의 귀에 속삭임이 든다. 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빠르게 검을 내질렀으나 검 끝에 걸리는 것이 없었다. 이번에도 역시 바람이 찢기는 소리만 되돌아왔다.
- 타앗!
- ······ 콰직!
다시 하나.
곁에 있던 또 한 명의 전사가 심장을 잃고 나뒹군다.
처음 도발을 보냈던 노란색 머리 전사의 귓가에 소리가 들렸다. 사냥의 단 맛에 취한 흉폭한 짐승이 목울대를 가다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열 여덟.'
이라고.
"대가없이 얻은 힘이 사라지면, 어떤 기분이 드는지."
궁금함을 토로하는 말을 똑똑히 들은 전사가 손 끝에 힘을 주었다. 당황하지 않으려 애쓰며 딱딱하게 굳은 어깨를 풀어냈다.
'칼리안이다. 다른 이가 아니라 했다.'
모습은 다르지만 분명 칼리안이라 했다.
평소 다른 검을 지니고 다니지도 않는 자신만만한 놈이라 했다. 그러니 놈의 일행에게서 마나를 빼앗아보라 들었다. 마법을 쓰지 못하게 된 마법사와 애초부터 소드마스터가 아니었던 검사, 그리고 왕궁에서 나고 자란 1왕자는 위협을 느낄 수준도 되지 못할 것이라고.
마법도 오러도 쓰지 못하게 된 '칼리안'이, 오러를 잃고 아무 검이나 주워 다 휘두르게 되었을 때 어떻게 되는지나 구경하다 오면 된다고. 그런 말을 듣고 왔다.
그 반대의 상황에 놓이게 되리라고는, 오히려 그 구경거리가 된 것처럼 네 명의 전사가 서로서로 등을 맞댄 채 어디서 달려들지 모를 유령같은 맹수를 경계하고 있게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다누를 만나러 왔는데, 나는. 너희들은 누가 보냈을까. 내가 누구인지도 안 물어 보고······ 신기하네."
궁금한 것이 많았다는 듯, 바람에 실린 목소리가 다시 찾아들었다.
목소리의 끝에 매달린 살기를 도저히 감내 할 수가 없다. 그것을 더는 감당하지 못한 한 명이 한 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제 귓가에 와 닿던 숨소리 쪽으로 오러를 뻗어냈다.
- 우웅······ 파스숫!
똑같은 상황이 반복된다.
검에 어려있던 가짜 오러가 힘없이 사그라든다. 전사들의 힘이 되어 주었던 붉은 오러는 소용을 잃었다. 잃은 지 오래다.
- 쌔애액!
- 콰직!
이탈한 이의 목에 긴 자상이 남겨졌다. 울컥, 피를 쏟아낸 전사가 어두운 바닥을 나뒹굴었다.
열 아홉.
그런 중얼거림이 다시 들린다.
- 끄덕.
노란 머리 전사가 작은 턱짓을 보냈다. 서로 어깨를 가까이 하고 사방을 경계하던 다른 두 전사가 그것을 보았다. 그러더니 곧바로 발을 박찼다.
- 타아앗!
- 타앗!
청은빛의 긴 머리카락을 고스란히 휘날렸으면서 귀신같이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 채 나타나지 않는 칼리안 말고, 다른 세 명의 일행들을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두 전사가 동시에 달려나갔다.
란델의 앞을 막고 선, '두 자루의 검을 쓴다던 왕세자'인 것이 분명한 파란 머리 마법사와 칼리안의 기사를 향해 각각 검을 뻗어냈다. 그 쪽의 공격을 막기 위해 모습을 드러낼 칼리안을 기대하며 몸을 날렸다.
그러나 칼리안 대신 잿빛의 검 두 자루가 어둠을 갈랐다.
- 휘이익!
- 카앙, 카아아앙!
앞으로 달려드는 전사의 검을 강하게 맞받아친 키리에가 검 손잡이의 끝으로 전사의 턱을 올려쳤다.
- 빠악!
뼈가 바스라진 것이 아닐까 의심되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전사가 뒤로 주춤, 두 발을 물렸다. 곧바로 다가간 키리에가 전사와 몇 번의 공방을 벌였다.
플란츠도 마찬가지. 전사의 공격을 잿빛 시나스타의 손잡이로 막은 플란츠가 청은빛의 시나스타를 휘둘렀다. 막아서는 검을 힘으로 밀어낸 전사가 또 한 자루의 공격을 막고 튕겨냈다.
튕겨진 쪽의 검을 대신해 잿빛 검이 다시 날아들었다. 그것을 피하자 코앞까지 짓쳐든 청은빛 검날이 목을 노려 왔다.
- 카아앙, 카앙!
- 카강, 캉!
플란츠와 키리에를 앞에 두고 싸움을 벌이는 전사들을 제외한 또 한 사람.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게 된 노란 머리의 전사가 쉼없이 주변을 살폈다. 어디에서 나타날지 모를 칼리안을 잡아내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 카가강, 카아아앙!
그러나 칼리안은 나서지 않았다.
말을 더 건네지도 않았고 검을 보내지도 않았다. 사라진 것처럼, 정말 어디론가 순식간에 사라진 것처럼, 살기도 기척도 모습도 완전히 다 가린 채 나타나지 않았다.
섣불리 발을 옮길 수도 없는 전사가 멀찍이서 벌어지는 두 싸움을 확인하며 경계를 했다.
- 콰득!
- 카아앙!
키리에의 잿빛 검에 막힌 전사의 검이 바스라질 듯한 소리를 냈다.
서로 오러를 발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벌어진 순수한 싸움. 대사막의 전사와 카이리스의 기사가 벌이는 검술 싸움. 그런 싸움을 견디다 강한 날붙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버거운 소리를 만들어 냈다.
이를 악문 전사가 자신의 검을 끌어당겼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날이 부러질 것이 분명했던 까닭이다. 그러자 그런 기색을 곧장 파악한 키리에가 제 검을 더 뻗었다.
- 카드득, 카각!
잿빛의 검에 또 한 번 힘이 담겼다.
그저 가볍기만 한 줄 알았던 검에 강한 힘이 실렸다.
- ······ 쩌적!
그리고 기어코 커다란 균열 하나를 전사의 검에 만들어냈다.
검에서 힘을 풀며 키리에의 검을 가까스로 미끄러뜨린 전사가 한 발을 물렸다. 그리고 품에서 단검 하나를 꺼내들고 다시 한 번 달려들었다.
- 휘이익!
- 카앙······ 촤악!
허리를 틀며 단검을 피해낸 키리에가 전사의 옆을 향해 몸을 날렸다. 다시 쇄도하는 단검을 살짝 쳐낸 뒤 전사의 옆구리를 강하게 내리그었다.
단말마와 함께 전사의 몸이 휘청인다. 붉은 빛이 몸을 감싸며 방금 생긴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이미 많이 보았던 모습이므로 키리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발을 박차며 전사를 향해 검을 보냈다.
- 부우우웅!
전사의 검이 키리에의 앞을 막아선다.
자신의 검을 한 손으로 붙들어 잡은 키리에가 팔을 뻗었다. 오른손에 들린 검으로 전사의 검을 막아낸 뒤 왼손을 내밀어 전사의 팔목을 움켜잡았다. 그 후 반격할 겨를도 없이 전사의 손을 비틀며 단검의 손잡이를 가로채 잡았다.
키리에의 입술 끝이 살짝 을라갔다.
전사의 눈동자에 그 웃음이 담긴 순간.
- 카아아아앙!
균열을 되돌리지 못한 검이 동강나 부서지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것에 시선을 둘 겨를도 없이, 키리에가 빼앗아 간 단검이 전사의 목을 꿰뚫었다.
플란츠가 두 자루의 검을 쓰도록 가르친 것은 칼리안이었고 종종 그 훈련을 도운 것은 키리에였으니까. 두 개의 검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키리에 역시 잘 알고 있었으니까.
- 타아앗!
숨이 멎은 전사가 바닥에 쓰러지던 그 순간, 또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플란츠였다.
여지없이 가로막힌 전사의 검 아래로 다른 색의 시나스타가 밀고 들어왔다. 재빨리 검을 밀어내며 몸을 뒤튼 전사가 플란츠를 향해 도로 달려들었다.
교차시킨 시나스타로 그 공격을 막아낸 플란츠가 한 발을 잠시 물렸다 몸을 틀었다. 그 사이로 짓쳐드는 전사의 검을 청은빛의 검으로 쳐낸 뒤에는 잿빛의 검을 들어올려 전사의 목을 노렸다.
- 카앙, 카아아앙!
정신없이 쏟아지는 전사의 검격을 두 자루의 검으로 막아내던 플란츠가 두 손을 겹치듯 모았다. 그러자 철컥 하는 금속음과 함께 시나스타가 하나로 합쳐졌다.
무게를 얻어낸 플란츠가 자신의 정수리를 노리며 내리떨어지는 공격을 거세게 올려친 뒤, 자신의 검이 뻗어나가던 방향 그대로 몸을 회전시키며 시나스타를 횡으로 그었다. 그 모습을 본 전사가 빠르게 검을 내려잡고 날아드는 시나스타를 막아냈다.
보다 묵직해진 타격음이 울린다.
전사가 잠시 이를 악물었다.
두 자루의 검을 각각 놀리며 가볍게 찔러들던 공격과 판이하게 달라진 힘. 생각보다 강한 힘에 자신의 검이 밀려난 것을 느낀 까닭이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플란츠가 재빨리 손을 놀렸다.
- 철컥!
시나스타의 금속음이 다시 들린다. 하나로 이어져 있던 커다란 검이 가느다란 두 개의 검으로 다시 나뉜다. 밀려났던 전사의 검이 균형을 되찾고 플란츠의 허리를 향해 휘둘러진다. 손잡이를 거꾸로 틀어잡은 청은빛의 검으로 그것을 막아낸 플란츠가 잿빛의 검을 내뻗었다.
- 카아앙!
- 카각, 카아앙!
시나스타의 어두운 검 끝에 전사의 갑옷이 와 닿는다. 그것을 꿰뚫었다. 그 뒤로도 계속하여 뻗어나갔다. 살갖과 뼈를 가볍게 가른 강인한 금속이 가장 안쪽에 든 생명을 관통했다.
- ······ 콰직!
상대의 움직임이 멈추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몸에서 검을 빼낸 플란츠가 시나스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노란 머리의 전사, 그에게로 달려드는 청은색의 빛줄기를 눈에 담았다.
마지막 남은 전사가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 위를 스치듯 지나간 순백의 검이 긴 잔상을 남기며 다시 움직였다.
- 캉, 카앙, 캉!
어렴풋이 보이는 새하얀 칼날을 향해 검을 들었다. 그것을 급급하게 막아내던 전사가 숨을 몰아쉴 새도 없이 계속하여 검을 움직였다. 정신없이 검을 뻗고 휘둘렀다. 쳐내고 막고 흘려보내며 쉼없는 검을 상대해나갔다.
그 검이 왜 그렇게 흰 빛을 내는지도, 그래서 칼리안이 왜 저런 모습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심장을 움켜쥐고 쥐어 짤 것처럼 치미는 살기를 이겨보고자 생각을 하려 했으나 결국은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다.
"이런 힘이 있으면 내 스승님을 제압할 수 있을 줄 알았나 본데. 그래서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굴었나 본데."
귓가에 내리꽂히는 냉막한 목소리. 치미는 화를 가라앉힐 생각조차 않고 내보내는 선연한 목소리.
잔뜩 세운 발톱을 상대의 목에 박아 넣은 뒤 속삭이는 듯한 저 목소리. 그리고 패배감 따위는 모른다는 듯 찔러 들어오는 연보랏빛의 눈빛.
그것을 듣고 보게 되어서.
그리하여 결국은 위축되어서.
- 카가각!
마지막 힘을 짜내 내보낸 공격이 칼리안의 검에 막혀든다.
"소용없어."
정답을 알려주는 목소리가 전사의 귀에 다시 꽂혀든다. 잔뜩 날선 새하얀 검이 전사의 눈에 어린다.
- 콰직!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목을 꿰뚫는 검의 서늘한 감각을 마지막으로, 전사가 눈을 감았다.
- ······ 툭.
힘없이 무릎을 꿇은 전사가 바닥에 몸을 떨궜다.
또르륵, 새하얀 검 끝에서 핏방울이 떨어져내린다.
가만히 시선을 내려 그것을 바라보던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담담하게 싸움을 마친 키리에와 아예 등을 돌려 폭포를 다시 바라보고 있는 란델이 보였다. 그 곁에서, 어느새 집어넣은 검을 로브자락 아래로 숨긴 새파란 머리의 마법사가 보였다.
'아르센'을 잠시 지켜보던 칼리안의 붉은 입술이 긴 호선을 그린다.
"헤르츠 경이 아무래도 검에 일가견이 있는 모양인데. 검을 어떻게 다루게 됐습니까."
"······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네."
피식, 하고.
한 번 더 실소한 칼리안이 검을 집어넣었다.
새하얀 검신에 청은빛의 긴 머리가 잠시 비춰지다 사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