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72화 (473/527)

제83장. 일가견이 있는(6)

체이스와 대화를 나누고자 했다.

그런데 플란츠는 본래 자신의 것이었던 통신용품을 칼리안에게 빌려주지 않았던가. 때문에 직접 연락을 취할 수가 없었고, 대신 조금 복잡한 방법을 동원하기로 했다.

일단 플란츠는 '히나에게 이야기 할 것이 있다'며 키리에의 통신용 팔찌를 잠시 얻어내는 아주 큰 용기를 부렸다. 그리고 히나에게 부탁 하나를 전했다. 히나는 아리안느를 찾아갔다. 체이스와 이야기하도록 칼리안이 내어 주었던 수정판을 잠시 빌려다 앨런에게 건넸다. 그리고 플란츠의 말도 함께 알렸다.

그 후 앨런이 체이스에게 연락했고 체이스의 허락에 따라 세크리티아로 직접 찾아가 히나의 귀걸이를 내밀었다.

전날 저녁.

낮부터 술잔을 기울이던 칼리안이 엘프 도시에 다녀 올 계획을 알린 이후부터 플란츠가 아르센으로 변장하여 칼리안을 따라나섰던 밤이 오기 전까지의 시간. 히나는 섀틴의 드레스를 기다리고 아리안느는 지그프리드 공작저에 갈 준비를 하고 있던 시간.

그 저녁 시간에 바삐 진행된 일이었다.

- 덕분에 꽤 여러 사람이 수고를 했습니다. 플란츠 왕세자.

그렇게 전달된 귀걸이를 체이스가 손에 쥔 뒤에야, 같은 놈을 동생으로 두었으나 정작 서로는 핏줄도 국적도 다른 두 형의 대화가 시작될 수 있었다.

-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불쾌하셨다면.

- 그럴 리가요. 대륙 유일의 8서클 마법사까지 동원해가며 나를 찾으니 이번에는 또 어떤 재밌는 말을 할지 궁금해서 그럽니다. 그것도 칼리안에게는 함구를 해 달라 부탁하면서.

- 과거의 왕제가 썼던 검.

플란츠가 곧장 본론을 꺼냈다.

체이스가 잠시 답하지 않았다.

- ······ 네. 계속 얘기해요.

- 그 검이 지금 세크리티아에 있을 겁니다.

- 확신하는 것 같은데.

- 칼리안이 말하기로 운철을 구하기 위해 직접 카이리스에까지 왔다 했었는데, 이후로 그보다 좋은 재료를 찾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더 좋은 재료를 다시 구해 손에 잘 맞는 검을 제작해 사용할 상황도, 그런 성격도 되지 못했을 텐데. 그렇다면 이미 있던 좋은 검을 가져다 쓰지 않았을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정확하다.

데블란이 베른에게 좋은 검을 쥐여 줄 이유가 없지 않나. 한 번이야 체이스가 데블란 몰래 베른을 국경 밖까지 인도해줬다지만 두 번 가능할 일은 아니었다.

때문에 그 검을 얻어내고자 데블란을 설득했었다. 섣불리 동의하지 않고 있었던 린 후작저와의 정혼, 어차피 아리안느를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정혼'의 이름을 빌리기는 싫었던 까닭에 거절해왔던 데블란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노라 거래를 했다.

고작 검 하나에 그런 거래를 제안했느냐 할 수도 있겠으나 중요한 문제였다. 체이스는 베른이 분명 소드마스터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렇게 되려면 돈 따위로는 구할 수 없을 정말 좋은 검이 필요했으니까.

'나는 그럼 두 번 다 저하의 동생 때문에 정혼한 셈인 거네.'

과거의 일을 알게 된 아리안느는 이렇게 말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체이스는 이번에도 아리안느와의 정혼을 대가로 데블란과 거래를 했으니 말이다.

세자의 몸으로 카이리스에 방문하기 위해서.

물론 두 번 모두 아리안느와의 대화 끝에 결정한 일이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 '베른'의 일로 정혼이 정해진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니 아리안느가 그런 이야기를 할 수밖에.

뭐, 아무튼.

이야기에 잠시 사족이 붙었으나 그렇게 된 일이었다. 다른 더 좋은 것을 구할 방도를 찾지 못해 전해줬던 검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지금도 세크리티아에 있었다. 보다 정확히는, 처음으로 카이리스의 땅을 밟던 그 순간부터 이미 체이스의 허리춤에 있었다.

이번에는 그 보검을 얻기 위해 다른 더 좋은 거래를 제안할 필요는 없었다. 에일라가 전했던 내용으로 말미암아 칼리안에 대해 이미 흥미를 지니고 있던 데다 체이스의 갑작스런 행동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던 데블란이, 스스로에게 별 도움도 되지 않을 보검 하나에 얽매일 리가 없지 않나. 굳이 그 보검을 가져간 체이스가 그것을 어떻게 쓰려 하는지에 오히려 더 큰 기대를 지니고 있었다.

'카이리시스에서 내가 칼리안 왕자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 또 있는데. 검을, 가지고 갔었습니다. 만약 맞다면 돌려주고 싶어서.'

'저는 다른 검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것은 체이스 왕세자께서 쓰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체이스가 그 검을 정말로 칼리안에게 넘기고 왔다면 그것을 놓치고 지나갈 데블란도 아니었고 말이다.

어찌됐건 그 당시에는 그랬다.

르메인의 탄신일 축제를 핑계로 카이리스를 찾았을 때 가져갔던 그 검을, 그러나 체이스는 결국 되돌려주지 못하고 돌아왔다.

- 맞습니다. 세크리티아에 있습니다.

여전히.

- 그렇다면 그 검, 전하의 수중에 있습니까. 아니면 지금은 다른 이가 사용하고 있습니까.

- ······ 그것을 '베른'이 아닌 이가 감히 어찌 쓸 수 있을까.

체이스조차 한 번을 뽑았으나 결국 사용하지 못하고 집어넣었던 검이다.

베른이 사용했고, 베른이 사용했던 검.

잊히지 않을 한 명의 영웅과 온전히 잊힌 한 명의 영웅, 그 둘이 사용했던. 세크리티아 대왕의 남편이기도 한 베른 네리아드가 처음으로 손에 쥐었고 세크리티아 최후의 왕제인 베른 세크리티아가 마지막으로 손에 쥐었던.

- 돌려주려 했었습니다. 다만 어찌하지 못해 여전히 내가 지니고 있습니다.

그 검을 이제 와 칼리안에게 돌려주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나. 그리 여기게 됐기 때문에 결국은 주지 못하고 되돌아 가져온 검.

그런 검이 아니던가.

- 건네기에는, 아무래도 가혹하여서.

- 괜찮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돌려주어도.

- 괜찮다 여깁니까.

- 당연히.

주저함이 없는 대답이었다.

때문에 체이스 역시 주저함 없이 결정했다.

- 직접 전해 줄 상황은 아닌 것 같고.

- 그렇습니다.

- 마나실 경을 통해 전달하겠습니다.

-휘트린에 있습니다. 칼리안이 알지못하도록 저에게로. 부탁합니다.

라시드 브리센이 휘트린에 없었고 엘프 휘트린 역시 당장 앨런에게 공격을 가할 상황이 아니었으니 그렇게 말했다.

- 알겠습니다.

- 혹 중요한 검이라면 그 값은 제가,

- 명분이라면, 카스트린 경을 카이리스에 몰래 들여보낸 일에 대한 값이라 하겠습니다. 나의 검을 멋대로 보냈으니 배상도 검으로 하는 것이라고. 물론 입 밖에 내지는 못하겠지만 보다 정확히는 플란츠 왕세자가 나에게 발칸의 기밀을 알려주었던 일에 대한 값이라 해야겠고.

세크리티아 귀족들의 반발 정도는 충분히 무마할 수 있을 능력 좋은 젊은 국왕이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 보다 솔직하게는······ 그건 어차피 내 동생의 검이니까. 값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 검이 베른 네리아드의 것인 줄 알았다면, 세크리티아의 수많은 보물들 중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귀한 물건인 줄 알았다면,

- 네. 고맙습니다.

플란츠는 이런 담백한 인사로 나머지 값을 치르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튼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그 후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앨런이 플란츠의 앞에 찾아왔고, 누구나가 다 읽어 본 양신 전쟁의 여덟 영웅을 그려낸 이야기책에서 보아왔던 바로 그 순백의 검이 플란츠의 손 위에 놓였다.

그렇게 하여 돌아가게 되었다.

- 쌔애액!

- ······ 콰직!

베른이 사용했고 베른이 사용했던 검이.

그것으로 지키고자 했던 체이스로부터 빠져나와, 체이스를 지킬 수 없도록 만들었던 앨런과 플란츠를 거치고, 그것을 부서뜨린 '아르센'의 손을 통해.

전해졌다.

칼리안에게.

* * *

[ 시종들은 아침에 적당한 핑계 만들어서 전부 다 외성 밖으로 내보내. 위험하니까 호위들 붙이고, 칼리안의 별장 정리가 끝났을 테니까 거기로 가 있게 해. ]

'읽어'라는 말 뒤에 서론도 없이 곧장 시작된 얘기.

[ 칼리안은 외성이 닫히기 직전에 나가려고 할 거야. 키리에와 너만 동행했다면 사람을 사서 말들을 먼저 내보내고 외성벽을 타고 넘겠지만 란델 형님이 있으니 외성문을 그냥 통과해야 해. 그렇게 되면 카이리스 1왕자가 밖으로 나간 것이 알려지게 될 테지만, 란델 형님이 몰래 빠져나간 의도를 알아내려 잠깐 동안은 조용할 거야. 그 사이 발칸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해. 아침이 되고 나서 안 것처럼 행동해. ]

길고 긴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 칼리안이 란델 형님과 함께 사라졌다는 말을 흘려. 분명 안 믿을 거야. 외모를 바꾸는 것을 이미 여러 번 보였으니까. 그렇게 되면 란델 형님과 함께 나간 것이 누구인지를 알아내려 들 텐데, 내 방을 닫고 내가 그 안에서 쓰러져있는 것으로 꾸며. 다 낫지도 않은 채로 술을 마셔서 다시 쓰러졌다고 해. 아무도 들이지 말라 했다고, 그렇게 말해. 만약 란델 형님이 사라진 것을 모르고 있다면······ 아니면 혹시 칼리안이 사라졌다는 말을 믿는 것 같으면······. ]

만약 아니라면 이렇게, 그도 아니라면 이렇게. 어떤 반응을 보인다면 어떻게, 또 다른 반응을 보인다면 다시 어떤 식으로. 판단할 수 있는 모든 변수가 고려된 행동 지침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 분명 제온에서도 영주성을 감시하고 있을 거야. 내가 너인 척을 하고 있으니 마법사 너는 모습을 드러내면 안돼. 내 쪽에서도 할 일이 있으니까 몸을 숨기고 내 방에서 기다려. 그렇게 되면, ]

"왕세자 저하께서 편찮으시다 하여 찾아왔습니다."

[ 휘트린이 찾아올 거야. ]

플란츠의 예상 중 한 가지대로 휘트린이 찾아왔다.

다시 프레이르의 모습을 한 채로.

[ 몰래 온다면 마법사 네가 바로 공격해서 체포해. 만약 당당하게 온다면 차라리 시간을 끌어. ]

"어. 편찮으셔. 그러니까 조용히 쉬실 수 있게, 가."

왕세자의 방을 둘러보는 척, 투명화 상태의 아르센을 방 안에 넣어둔 뒤 밖으로 나와 문을 지키고 서 있던 에우리아가 대꾸했다.

[ 휘트린은 히나와 비슷하지만 더 강력한 힘을 쓰니까 방 안에 든 사람이 너인 것도 알 테고 나와 왕자들이 영주성에서 다 빠져나간 것도 어차피 알 거야. 무슨 핑계를 대서든 안으로 들어와 우리가 어디로 갔는지, 마석을 쫓아 다누에게 간 것이 맞는지, 상황을 확인하려 들 거야. ]

"그 동안 제 안위를 먼저 신경쓰느라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만약 저하께서 편찮으시다면 제가 치유를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 자객이 나비아를 공격하고 마석을 가져간 건 휘트린의 역할이 아니야. 그걸 보고 우리가 영주성을 빠져 나가도록 만든 것 역시 휘트린의 역할이 아니야. 다누가 휘트린에게 시킨 역할은 단 하나야. 나를 보호해주는 척 하고 브리센을 벼랑으로 밀고 내 아우님에게 시간의 축 사용 방법을 알려주겠다 해 가며 나를 회유하는 것. 그것이 실패했으니 어떻게든 내 방에 들어와 앞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확인부터 하려 들 거야. 숨겼던 것을 공개하면서라도. ]

"어. 대단한 사람이었네. 술병 말고 진짜 병 났을 때 찾아오지 그랬어."

"세이렌 경. 나는 이 영지를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이 영지에 방문하신 왕세자 저하와 왕자님들의 안전은 제 소관입니다. 상태가 좋지 않으시다면, 치유를 하겠습니다."

[ 초조할 테니까. 모든 일에 대해 쓰임새가 가장 중요한 휘트린이, 정작 자신의 쓰임새가 다했음을 인정하기 싫을 테니까. ]

"청력이야, 이해력이야?"

"무슨 말입니까."

"이해력 쪽인가 보네. 딸리는 게 어느 쪽이냐고 물은 거였어."

"······ 예의를 지키십시오. 세이렌 경."

"예의 지키고 있어. 예의 지키느라 안 죽이고 대화하고 있잖아. 예의 더 까먹기 전에, 가."

[ 그렇게 시간을 끌다 보면 새 손님이 찾아 올 거야. ]

자신의 쓰임새를 다시 찾기 위한 휘트린이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게 될 때 쯤이 되면 누군가 올 것이라고. 플란츠는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 때까지만 시간을 끌라고 했다.

그리하여 에우리아가 열심히 시간을 끌고 있으니,

- 자박, 자박.

정말로 새 손님이 찾아왔다.

정말 많은 내용이 담긴 편지의 첫 장.

그 첫 장의 내용이 고스란히 맞아떨어졌다. '만약 오지 않는다면'으로 시작하는 다음 장의 내용을 떠올릴 필요도 없었다.

- 다른 핑계, 들고 오시라 전해줘요.

이 영주성에 이제 막 발을 들인 이가 고개를 들었다.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이의 기운을 느낀 휘트린이 고개를 돌렸다.

칼리안의 별장까지 시종들과 발칸의 몇몇 대원을 안내해준 뒤, 외성 밖을 지키고 있던 에일라. 그런 에일라의 안내를 받아 영주성으로 들어온 이의 새까만 눈이 휘트린의 눈동자 속에 담겼다.

[ 히나가 올 거야. ]

키리에라면 분명, 이곳을 떠나기 전에 히나에게 사실을 알릴 테니까. 히나도 휘트린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할 테니까.

- 내가 왔으니, 저 치유사는 '불필요'하다고. 그 말도 같이, 전해줘요.

그것을 안다면 히나는, 외면하지 않을 테니까.

그럴 사람이니까.

* * *

숲에 앉아 새벽을 보내는 내내 생각을 했다.

생각을 하지 말라 했던 칼리안의 말에 따르고자 플란츠가 계속 다른 생각을 한 것처럼, 플란츠의 꿍꿍이를 눈치 채지 않기 위해 칼리안 역시 계속 다른 생각을 했다.

다누가 하피의 마석을 가져간 일.

그 저의를 궁금해하며 시간을 보냈다.

어차피 자연의 마나를 그대로 가져와 사용하는 엘프들에게는 어떻게 해서든 쓸 곳이 없는 하피의 마석. 그것을 왜 가져갔을까. 그런 궁금증을 풀어나갔다.

그 고민에 대한 답을 찾았다 여겼을 때.

- 카아아앙!

하피의 마력 제어 능력. '로닐'을 보내는 그 한 가지 방법을 믿었다 하기에는 지나치게 자신만만했던 저들의 모습. 제온과 라시드가 앨런을 겁내지 않았던 진짜 이유.

그것들의 관계성을 이미 궁금해하고 있었던, 과거의 여러 일을 조합해 틈을 찾고 답을 이끌어내는 속도에서만큼은 누구도 따르지 못할, 그리하여 이미 해답을 찾았던 똑똑한 '아르센'이 새로운 검을 건넸다.

하피의 마력 제어.

그 힘이 담긴 마석을 이용한 새로운 돌.

제온에서, 그런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냈으리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 카아아앙!

이름 모를 전사의 검이 칼리안의 새하얀 검을 막았다. 뒤에서 쏟아져내리는 폭포의 굉음도 찢어낼 듯한 엄청난 소리가 터져나왔다.

- 우우웅!

전사의 검에 어려있는 붉은 오러가 당장이라도 칼리안의 목을 쳐낼 것처럼 사나운 소리를 냈다. 그런 것에는 일말의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 칼리안이 보다 더 사나운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검에 힘을 가했다.

- 콰드득!

- 카가가각······!

새하얀 검신에 전사의 오러가 비춰진다 여겼을 때, 자신을 가로막은 전사의 오러와 검날을 한꺼번에 부서뜨린 칼리안의 검이 그대로 쭉 뻗어나갔다.

- 콰직!

열 둘.

열 두 번째의 전사의 피가 순백의 검에 튀었다. 그러나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또르륵, 흘러 떨어졌다.

잠시 뒤로 돌아선 칼리안이 란델과, 키리에와, '아르센'을 살폈다. 싸움에는 별 관심도 없다는 것처럼 아예 숲을 구경하는 듯한 눈으로 이 쪽을 바라보는 란델 덕에 실소가 난다.

한 명의 목을 밟고 뛰어오른 키리에의 검 끝이 곁에 서 있던 놈의 정수리를 꿰뚫는 모습이 보인다. 발 끝에 서린 강한 힘에 결국 목이 부러진 전사가 하릴없이 쓰러지는 모습이 뒤를 잇는다.

- 휘이잉!

- 카아아앙!

바닥에 내려서는 키리에의 등 뒤로 뻗어오던 붉은 오러의 검이 누군가의 청은빛 검에 막혀든다. 오러를 막고 쳐낸 이가 또 하나의 잿빛 검을 들어 놈의 심장을 꿰뚫는다. 지치지 않고 이어진 다음 공격이 란델에게로 향하던 이의 목을 베어내고, 다시 돌아서 뻗어낸 검 끝에 또 한 명의 검이 막힌다.

그러니까.

헤르츠 경은 대체 언제 저렇게 검을 배워놨나.

알 수가 없네.

피식 웃은 칼리안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짧은 휴식을 마친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 열 둘."

어찌됐건 칼리안이 잡은 것은 열 둘. 남은 것은 이제 열.

오러를 쓰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순식간에 도륙당한 스무 명의 시신을 바라보던, 칼리안에게 처음 말을 건넸던 이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을렸다.

"맨 검으로 오러를 상대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제법이군."

도발을 보냈다.

"응. 안 쉽네."

칼리안의 입이 똑같이 비틀려 을라갔다.

연보랏빛 눈에 순간적인 붉은 안광이 이는 듯한 착각이 든다.

"그래서 나도 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아직 모르나본데.

남의 오러 거두는 것.

나도 할 줄 알아.

칼리안의 몸에서 광포한 오러가 휘몰아치듯 뻗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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