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장. 일가견이 있는(5)
똑같은 것을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
맹세의 인이 심장에 죄어들지 않도록 생각의 중단을 요구했던 칼리안처럼 플란츠도, 무엇을 숨기고 거짓말하지 못하는 칼리안에게 사실을 알리지 않고 있을 뿐이다. 이 일이 끝날 때까지 자신에게 완전히 속아주기를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모른다. 세상은 체스판이 아니며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에는 규칙이 없으니 변수를 전부 다 계산 할 수도 없다. 그러니 플란츠가 칼리안을 또 속이게 된 일의 결과가 어떠할지, 드러난 결과의 끝에 플란츠가 어떻게 될지, 결과를 확인한 칼리안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역시 아무도 모른다.
어떤 결과도 예측하지 못한 채로 선택한 방법이라는 것. 오로지 그 사실 하나만을 알 뿐이다.
한 명은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라 믿고서 택했다.
다른 한 명은 최선의 방법을 택했으리라 믿었다.
속아달라는 말이나 속겠다는 말은 단 하나도 오가지 않았으나 플란츠는 그렇게 요구했고 칼리안은 받아들였다.
그 받아들임의 결과로 칼리안은 아르센의 알맹이에 제 형제가 든 것을 눈치채지 않고 있을 뿐이다. 플란츠는 그런 형제를 최선을 다해 속이고 있을 뿐이다.
"헤르츠 경. 잠시만."
"네. 왕자님."
하여 알아채지 못했다. 그뿐이다.
어느 쪽이든 좋다.
* * *
허리를 숙여주는 것도 좋고 오롯이서 있는 것도 좋다. 허리를 숙여주면 서로의 어깨에 턱을 괴고 같이 기댈 수 있어서 좋았고, 오롯이 서 있다면 숨을 들이고 내보내는 소리가 귓가에 고스란히 와 닿아 좋았다.
물론 앉아있어도 좋았다. 가만히 찾아가 목을 꼭 끌어안으면 앉아있던 채로 토닥토닥, 습관처럼 버릇처럼 가만히 등을 두드려주는 손의 온기가 좋았다.
"오랜만이야, 전하."
"응. 오랜만이야."
귀에 와닿는 낮은 목소리. 피아노 선율 속의 왼손 반주같은, 오랜 장마가 끝난 날의 마지막 빗방울같은, 밤바다에 내려앉는 등대의 불빛같은, 그런 낮은 목소리가 좋았다.
카이리스의 왕궁.
루비아 관의 별관.
생각지도 못한 이가 찾아왔다는 말에 루비아 관으로 달려오듯 돌아온 아리안느가 꼭 끌어안고 있던 팔의 힘을 조금 뺐다. 그리고 적어도 두 달 뒤에나 만날 줄 알았던 온기와 그리웠던 향기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떻게 왔어? 벌써 자리 뺏겼어?"
소파에 앉아 영문 모를 오리 한 마리를 톡톡톡 쓰다듬다가 정혼자의 품에 와락 안겨버린 사람, 체이스가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안 뺏기려고 몰래 왔어."
"언제 왔어?"
"어젯밤에."
"어젯밤에 와서 여기 계속 있었어?"
"몰래 왔으니까 여기 계속 있어야지. 카스트린 경 들여보낸 일도 실례인데 나까지 여기 몰래 온 것을 알면 카이리스 국왕이 엄청 유감스러워 할 거야."
"유감일 걸 알면서도 왔네."
"보고싶어서."
"나 보고싶었어?"
"보고싶었지, 당연히."
"나도."
체이스의 목에서 팔을 푼 아리안느가 보드랍게 웃으며 마주앉았다.
아리안느를 따라 들어왔다가 체이스에게 예를 보일 때를 기다리던 테일란이 그제야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체이스와 몇 마디 안부를 주고받은 뒤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나 보려고 왔었으면 미리 얘기해주지. 전하 올 줄 알았으면 왕궁 밖으로 나가지 말걸."
"미안. 갑작스럽게 오게 돼서 말을 못했어."
"어제 저녁에 마나실 경이랑 얘기한 것 때문에?"
"응"
전날 저녁, 히나가 아리안느를 찾아왔다.
앨런이 체이스와 나눌 말이 있으니 수정판을 좀 빌려달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어차피 칼리안의 수정판이었으니 빌려주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때문에 수정판을 선뜻 건넸다.
그 수정판으로 앨런과 이야기를 나누던 체이스가 그냥 카이리스로 온 모양이다.
"얘기를 하다가 마나실 경이 세크리티아로 왔었어. 만나게 된 김에 잠깐 당신 만나려고 여기까지 내가 따라왔다가 밤을 새버렸네."
똑같이 아쉽다는 듯 이야기한 체이스가, 보라색의 눈을 들어 아리안느를 들여다봤다. 유리창에 비친 벽난로의 불빛같은 아리안느의 눈을 지그시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밤새 술 마셨어, 아리안느?"
참 오랜만에 만난 정혼자에게 왕좌를 뺏겨 도망왔느냐 묻는 아리안느나, 정말 보고싶던 정혼자에게 밤새 술 마시다 들어왔느냐 묻는 체이스나. 그 놈이 그놈이다.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은 아리안느가 대답했다.
"카스트린 경이 지그프리드 공작님이랑 많이 친해졌어. 나는 알아듣지도 못할 말들을 나누더니 갑자기 지그프리드 남작님까지 같이 얘기를 했으면 좋겠다고 해서. 아, 지그프리드 남작님은 지그프리드 공작님 아내야. 창술을 다루신대."
"응. 칼리안에게 들었었어."
"응. 그런데 지금 휘트린이라는 곳에서 무슨 일이 생겼나봐."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때문에 지그프리드 공작가 쪽이 조금 소란스러워서 두 분이 같이 공작저를 비우고 왕궁에 와서 얘기나 할 수가 없다잖아. 그래서 별 수 없이 나까지 껴서 같이 공작저에 있다 왔어. 내가 여기 혼자 있을 수도 없으니까."
"그건 그렇지."
"응. 검술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창술 얘기도 하고, 그러다 검이랑 창을 어떻게 같이 쓰는지도 얘기하고····· 연두색 저하가 쓰는 검 때문이랬는데 그것도 말이 어려워서 제대로 못 들었어. 난 법이랑 약이랑 마법을 알지 무기에 대해선 모르니까. 아무튼 연두색 저하 검을 어떻게 써야 더 좋을지에 대해서까지 얘기하다가 왕궁 문이 닫힐 시간을 넘겨버렸어. 그래서 그냥 거기서 자고 오는 길이야. 술은 안 마셨어."
많이, 안마셨어.
슬그머니 덧붙인 아리안느가 생글생글 웃었다.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은 체이스가 입을 열었다.
"카스트린 경이 지그프리드 공이랑 잘 지내나 보네."
"가볍게 맞붙기도 하고 얘기만 하기도 하고. 아무튼 요즘 맨날 붙어다녀. 힐 경이 휘트린에 가기 전까지는 힐 경이랑도 대련했었어. 카스트린 경이 너무 싱겁게 이겼지만."
슬레이만과 칼리안과 시오나까지.
내로라하는 칼잡이들이 카이리시스에 모여있던 까닭에, 르메인의 탄신일 축제에 아리안느가 참석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테일란을 들여보냈던 체이스가 아니던가. 테일란을 체이스의 호위기사인 서베인으로 변장시키는 수까지 써 가면서 말이다.
그런 수고에 소득이 없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기우였던 모양이다. 다행히 슬레이만과 이런 저런 교류를 하는 듯 하니 분명 발전이 있으리라.
"다행이네. 내 정혼자 떼 놓은 게 괜한 일은 아니어서."
대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을 파란 리본의 오리가 아리안느의 방 이곳 저곳을 돌아다닌다. 언젠가는 소슬했으나 그 후에는 청량히 바뀌었던 분수의 물 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그런 곳에서 다행히 별 탈 없이 지내고 있는 정혼자를 향해 체이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칼리안이 계속 자리를 비우게 된 것 같아서 심심해하면 어쩌나 걱정했었어. 혹시 심심하면 지금 나랑 같이 돌아가, 아리안느. 마나실 경에게 부탁해서 때맞춰 다시 돌아와 있으면 되니까.
"아, 맞아. 나 있는 동안 여기저기 구경도 시켜주고 같이 놀러다니자 했는데. 당신 동생 곧바로 사라져서는 돌아오질 않아. 얼굴 까먹겠어."
농담처럼 말하던 아리안느가 아, 하고. 잠깐 어색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러더니 곧장 설명을 더했다.
"····· 도, 까먹지는 못하겠네. 그 얼굴이 어디 쉽게 까먹어질 얼굴인가. 그치?"
체이스가 다시 웃음을 보였다.
화제를 전환하겠다는 듯, 아리안느가 서둘러 다른 말을 꺼냈다.
"아무튼 난 재밌게 잘 지내고 있어. 당신 동생은 없지만 코코랑도 많이 친해지고 가끔 루시도 찾아와. 안네는 거의 안오더라. 치유사 베른 경이랑 베로니카 일 돕는 것도 재밌고 여기 다른 귀족들이랑 만나서 얘기 나누는 것 도 유익해. 가끔 그레이스 경이랑 술 마시는 것도 좋고."
세크리티아의 옛 언어로 지어진 인상 깊은 이름의 두 고양이가 아리안느와도 친해진 모양이다. '코코'라고 적힌 파란 리본을 한 오리와도 친해졌나보다. 이곳의 사람들과도, 어느새.
잘 지내고 있나보다. 다행히.
"아무리 그래도 나는 공식적으로 여기 찾아온 사람인데, 하루아침에 사라졌다가 다시 뿅 하고 나타나는 건 이상하잖아. 마나실 경이 마음대로 아무나 데리고 왕궁을 왔다갔다 한다는 게 알려져서 좋을 것도 없고. 그리고 당신 동생 돌아오면, 그때부터라도 같이 놀아야지."
"그래. 아리안느."
체이스가 고운 모래사장 위를 맨발로 걸었던 날처럼 미소를 지었다. 기분 좋은 얼굴로 똑같이 미소를 그리던 아리안느가, 이제 막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세르제인이 여기 온다는데. 전하도 알아?"
"들었어."
"어떻게 할거야?"
"어떻게 하다니?"
"세르제인이 란델 왕자에게 한번 만나자는 편지를 보냈었대. 그래서 찾아오는 거래."
체이스로부터 다른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자 아리안느가 말을 이었다.
"왜 오는지 이미 알잖아, 전하도."
"응"
"전하 입장에서는 세르제인이 텐실을 잇는 게 낫잖아. 당신이랑 란델 왕자랑 서로 첫인상이 별로였던 것 같은데."
체이스가 짧게 웃었다.
브리지트 숲에서 세르제인의 호위들이 세르제인을 죽이려 들었던 일. 그 일의 뒷처리를 체이스가 도왔었다. 란델과의 첫 대면에서는 오가지 않았던 호의였으니 훗날 세르제인이 왕위에 올랐을 때를 기대한 마음이 아주 없지는 않았었다.
"상관없어. 텐실이 대사막과 손을 잡았다 한들, 우리와 텐실이 사이가 좋아진다 해서 특별한 이득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까."
"이득은 바라지도 않아. 손해가 날까봐 그러지."
"란델 왕자가 그 쪽으로 가면, 인사 나누고 잘 지내면 되지. 손해 날 일 없을 거야."
"말이 쉽네."
"쉽지. 나한테 어려운게 있나."
능력좋은 젊은 국왕의 말에 아리안느가 피식 웃었다.
- 똑똑똑.
그 때,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만 일어나시지요. 더 계셨다가는 바다 나라에 난리가 날 터이니."
앨런의 목소리가 뒤이어 전해졌다.
체이스가 주머니 속에서 은빛의 회중 시계를 꺼냈다. 그리고 생각보다 빨리 흐른 시간을 확인한 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러다 정말 내 자리 뺏기겠네. 가야겠다."
아리안느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가움이 너무 커 차 한 잔을 내어 주지도 못했음이 이제야 생각난다.
그것을 알아봤다는 듯 체이스가 팔을 뻗었다. 아리안느를 제 품에 꼭 안았다, 그리고 토닥토닥, 아쉬워하는 등을 가만히 두드렸다.
"잘 있다와. 기다릴게."
"·····응. 잘 있다 갈게."
"술 조금만 마시고."
"싫어. 내 맘대로 마실 거야. 미련 없을 때까지 빨리빨리 실컷 놀아야 전하랑 빨리 결혼하지."
소리없는 웃음이 체이스의 가슴에 댄 뺨을 통해 전해진다.
"그래. 실컷 마시고 놀아, 아리안느."
"응. 전하."
오롯이 선 체이스를 마주 안으면, 숨을 이어가는 소리가 귓가에 고스란히 와 닿는다.
언제고 어느때고 좋은 소리가 귀에 스민다.
* * *
계속 걸음을 옮겼다.
휘트린으로 가던 길에는 막사라도 있었으나 이 정도의 조촐한 인원으로 그런 것을 펼칠 수는 없었다. 불편할 것이 분명했지만 란델은 별다른 말 없이 침낭 속에서 잠을 청했다. 그리고 플란츠와 키리에는 번갈아가며 불침번을 섰다.
그 새벽이 지나가도록.
란델이 선잠에 들고 키리에가 일어나 앉아 주변을 살피다 플란츠와 교대를 하고. 잠에서 깬 플란츠가 키리에가 있던 곳으로 와 앉을 때까지. 다시 시간이 지나 해가 머리 위로 오르고 란델과 키리에가 일어나 앉을 때까지.
칼리안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무 기둥에 등을 대고 긴 머리카락의 끝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흩어둔 채 가만히 앉아있었다. 살짝 감긴 눈을 뜨지도 않았고 그렇다 하여 잠에 든 기색도 아니 었다. 습관대로 손가락 끝을 두드리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눈을 감고 앉아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리는 듯 보였다.
이러한 침묵을 불편하다 여길 이가 없으니 다행이다. 란델이나 플란츠나 키리에나, 하나같이 대화라는 것과 참 데면데면한 성격들이지 않나. 물론 플란츠가 흉내를 내는 중인 아르센이라 해서 다르지는 않았다. 해야 할 말을 아끼지 않는 것이지 말을 못해 입이 근질근질할 사람은 아니니까.
덕분에 참 조용한 휴식시간이 지나갔다. 일행들의 움직임을 들은 칼리안이 몸을 일으켰다.
묶지 않은 청은빛의 머리가 스르륵 홀러내리다 제자리를 찾는다. 그와 함께, 연보라색의 날선 눈이 새파란 빛을 찾아들었다
"헤르츠 경."
몇 시간 만에 들린 첫 말소리였다.
덕분에 부른 것은 한 사람인데 세 사람의 눈이 칼리안에게 와 닿았다.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시선을 흐트리지 않는 칼리안을 향해 플란츠가 고개를 돌렸다.
"말씀하십시오, 왕자님."
"에일라가 붙잡았던 증인 한 명을 헤르츠 경에게 넘겼다던데. 어떻게 처리됐습니까. 그것을 확인한다는 걸 깜빡해서."
"영주성의 감옥에 두기에는 불안함이 있어서 복도 끝의 방을 봉쇄하고 앞뒤로 감시하도록 했습니다."
"계속 데리고 다닐 수는 없는 일인데····· 드미레아가 올라가는 날 대원들을 몇 움직여 수도로 호송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물론 형님과 헤르츠 경이 결정해야 할 일이겠습니다만."
"아닙니다. 같은 생각입니다. 저하께서도 다르지 않을 겁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플란츠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특이사항 있으면, 얘기해줘요. 언제든."
"네. 알겠습니다."
또 한번, 끄덕.
대답 대신 고갯짓을 한 칼리안이 몸을 돌렸다.
그 사이 키리에가 침낭들을 정리했고 영주성에서 준비해 온 간단한 음식으로 식사를 마친 뒤 더 늦기 전에 다시 말을 달렸다.
칼리안은 더 이상 입을 다물고 있지 않았다. 레이븐의 위에서 고개를 돌려 란델의 상황을 살피다 키리에와 대화를 주고 받고 '아르센'과 이런 저런 농담을 나누며 발을 옮겼다. 지그프리드 공작령의 외성이 멀리 보였으나 그 쪽으로 방향을 틀지는 않았다. 조금 더 서둘러 엘프의 도시로 향하는 출입구가 있던 곳을 향해 움직였다.
쫓기거나 촉박한 것은 아니었으나 괜스레, 그냥.
마음이 급하여서.
- ······ 다각.
그렇게 계속 앞으로 나아가던 레이븐의 발이 가만히 멈추었다. 반가운 물소리가 들려오는 곳이 눈에 닿은 뒤였다.
익숙한 곳.
그리 깊지 않은 계곡과 그 끝에 이어진 긴 절벽. 퍼져나간 물보라에 무지개가 어렸던 좋은 익숙함이 남아있는 곳.
- 쏴아아아······!
폭포였다.
계곡 물에 들어간 발칸의 미친놈들이 물 속에서 불을 내보겠다며 또라이짓을 했던 기억이 생각난다. 때문에 혼자서 피식 웃은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광경을 아마도 처음 보았을 란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낮에 올 땐 무지개가 피었었는데, 아쉽네요. 란델 형님께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요."
"아쉬울 것 있겠느냐."
계곡물에 어린 달빛이 폭포에 닿아 끊임없이 부서지는 모습을 내려다보던 란델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이런 것은 아직 무상하다 하시려나.
칼리안이 말없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낮에 왔다면 물 위에 든 달을 못 보았을 텐데."
"······ 좋네요. 무상하지 않아서."
"네가 좋을 것이 있더냐."
"형님이시니."
표정 없는 란델이 대답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아직은 조금 멀리 떨어진 계곡의 모습을 다시 눈에 담았다.
그런 란델을 보던 칼리안이 키리에와 플란츠를 쳐다봤다. 시간이 지체되든 아니든 계곡 쪽으로 더 다가가 잠깐만 쉬었다 가자 이야기를 하려 입을 열었다.
"왕자님."
그러나.
경계심 가득한 키리에의 목소리가 칼리안을 불렀다.
키리에처럼 소리를 들은 것은 아니었으나 유쾌하지 않은 기운을 느낀 것은 같았던 칼리안이 짧은 한숨을 쉬었다.
"정말 어찌나 눈치가 없는지."
얌전히 넘어가나 했더니 꼭 이럴 때 찾아오더라, 하고.
칼리안이 불평을 가득 담아 툴툴거렸다.
오래지 않아 조금도 반갑지 않은 무리가 칼리안의 앞으로 다가왔다. 천천히 걸어와 멈추어 선 이들을 슥 둘러 본 칼리안이 새빨간 입술을 끌어올렸다.
"반갑다 해야 하나. 잘 가라 해야 하나."
목울대를 잔뜩 울리는 으르렁거림이 숲의 밤을 휘저었다.
연보라색의 눈이 달빛보다 서늘하게 제 앞을 바라봤다.
입술 새로 흘러나온 말이 키리에를 향했다.
"끝인 것 같은데."
"네. 저들이 전부입니다."
"또 뭘 믿고 왔길래······ 고작 서른 명이 찾아들었을까."
숲에 내린 별의 여울같은 머리카락 끝에 한기가 어린다. 온 몸으로 뻗어내는 살기가 적들을, 이제 막 찾아든 제온의 전사들을 향했다.
- 우우웅······!
전사들이 검을 들었다.
그것을 보며 씩 웃은 칼리안이 손을 움직였다.
"란델 형님 어지간해선 멀쩡하실 테니 알아서들 잡아요. 키리에도, 헤르츠 경도."
말을 마친 칼리안의 손 끝에 붉은 빛이 어렸다.
당장이라도 누군가의 목을 물어뜯을 듯한 선연한 빛의 오러가 칼리안의 검 끝을 따라 휘돌았다.
- 뚝.
바로 그 때.
놈들이 예상치 못한 행동을 했다. 각자의 검에 어려있던 붉은 빛이 일순간에 사그라든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검에 어려있던 오러를 꺼뜨렸다는 소리다.
또 무슨 꿍꿍이일까.
칼리안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그런 칼리안을 향해 누군가 한 발을 나섰다. 그리고 조금 전 칼리안이 지었던 것과 꽤 비슷한 웃음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반갑다 할까. 잘 가라 할까."
자신이 한 말을 고스란히 따라한 듯한 상대의 말. 청은발의 낯선 얼굴이 누구의 것인지는 조금도 궁금해하지 않는 듯한 이의 말에 칼리안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숨겨둔 게 있나보네. 자신만만한데."
"그래 보이나."
"뭘까. 또."
나보다 만만한 상대가 오랜만이라 반가워서 직접 얼굴 보고 싸워볼까 했는데. 안 되겠다.
- 우우웅, 우웅!
- 우웅!
칼리안의 주변으로 붉은 빛의 검이 떠올랐다.
꿍꿍이 있는 놈에게 정신이 팔리다 일행이 다치는 꼴을 또 볼 수는 없지 않나. 그래서 그냥 단검을 만들었다. 그것을 부려 놈들을 향해 쏘아보내려했다.
- 슈우욱!
그런데 믿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다. 알 수 없는 기운이 일행의 주변을 휘감아 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여름의 습하고 더운 바람같은 불쾌한 느낌이 모두의 발 끝부터 머리 끝까지, 그리고 손 끝을 한차례 스치며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독은 아니었다.
수면향도 아니었다.
- 우웅······ 툭!
누구 하나 그 기운에 다치지 않았다.
다만.
칼리안의 손에 들려있던 붉은 검이 사라졌다.
흔적없이 고스란히 사라져버렸다.
"······ 와."
오러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칼리안의 몸 속에 든 오러는 분명 남아있었다. 원하는대로 모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몸 밖으로 형체를 드러낸 검은, 칼리안이 마음대로 만들고 흐트러뜨려야 할 그 검은 뜻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다시 만들었으나 이내 다시 사라져버렸다.
헛된 수고를 세 번 하지는 않은 칼리안이 잠시 눈을 내리떴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 눈을 다시 떠 앞을 쳐다봤다. 호기심과 감탄과 기대감이 전부 다 섞인 그런 눈을 짐승의 것처럼 번뜩이면서, 벼려놓은 듯한 송곳니를 드러냈다.
"하피한테 배웠구나. 너네."
칼리안에게 말을 걸었던 전사가 대답 없이 몸을 풀었다.
어쩐지 여유가 가득하더라니.
고작 서른 명으로 찾아왔더라니.
"헤르츠 경."
"마법 발현 안 됩니다."
기다렸다는 듯한 대답이 들려왔다.
저들은 마나를 무효화한다. 그러므로 '아르센'은 마법을 쓰지 못한다. 키리에 혼자서는 서른 명의 전사들을 상대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 눈치 안 채려고 했는데.'
아쉬움 그득한 얼굴로 고개를 모로 틀었다 되돌린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서리 가득한 낮은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헤르츠 경."
"네. 왕자님."
무엇을 시도하든 이제 막 소드마스터의 문턱을 발견한 기사 한 명으로는 자신들을 상대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안다는 듯. 칼리안의 일행을 둘러싸고 여유를 부리는 전사들을 마주 바라보면서 플란츠가 대답했다.
"혹시 경의 마법사 주머니 속에, 당장 안 쓸 것 같은 그런 칼이 있습니까."
어차피 마법을 못 쓰는 '아르센'은 열외다. 란델은 아르센과 함께 세워두면 된다. 키리에와 칼리안이 놈들을 때려잡든 찔러잡든 잡으면 된다.
칼리안에게 검만 있다면.
"네. 있습니다."
조용히, 플란츠가 답을 건넸다.
그리고 길고 넓은 로브자락 속에서 길고 가느다란 무언가를 꺼내 칼리안에게 건넸다.
세상은 체스판이 아니며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에는 규칙이 없다. 변수를 전부 다 계산할 수도 없다. 그러니 변수를 계산하지 못하는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래.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 타악!
검의 손잡이가 손에 닿는다. 깊고 깊은 흉터가 가득한 칼리안의 손에 닿는다.
커다란 손바닥.
그 위에, 깊고 깊은 흉터 가득한 커다란 손바닥 위에.
"······ 하."
무엇을 베어내도 생명의 흔적이 남지 않을 순백의 검이 와닿는다.
새하얀 검. 체이스와 앨런을 통해 플란츠가 준비해 온 좋은 검. 과거의 주인이 마지막 순간까지 절대 놓지 않았던 새하얀 검.
베른의, 검.
그 검을 쥔 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웃음을 보였다. 제 옆에서 검을 뽑아드는 '아르센'을 보며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헤르츠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