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장. 일가견이 있는(4)
휘트린의 외성문이 닫히기 직전에 성문을 나섰다.
란델이 성문 경비병의 앞으로 나서 '급히 카이리시스로 돌아갈 일이 생겼다'는 이유를 대며 일행 중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미상의 남자에 대한 확인을 거부했다.
그 뒤에는 늦은 새벽까지 말을 달렸다. 휘트린을 지나 이동 마법진을 통해 지그프리드령이 있는 곳으로 왔다. 하루 중 언제 출발을 하든 결국 숲에서 휴식을 취할 수밖에 없게 될 텐데, 그렇다면 차라리 휘트린 쪽의 숲보다는 지그프리드령 인근의 숲이 나으리라 여긴 까닭이다.
그렇게 새로운 숲에 도착해 말을 멈춰세웠을 땐 어느새 하늘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달리기에는 말들도, 그리고 란델도 휴식이 필요했으니 잠시 발을 멈추고 늦은 잠을 청한 뒤 다시 출발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 사아아아, ······
언제고 반가운 바람이 다시 든다.
숲의 바람소리는 파도소리만큼 반갑다.
그 사이로 들었던 솔새의 울음 때문 일지, 가만히 퍼져나가던 모닥불의 불티 때문일지, 아니면 숲의 바람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기억 때문일지. 정확히는 알 수 없어도 반갑고 좋다는 것만은 확실히 안다.
딸기를 좋아한다 말했을 때와 다르다는 것 역시 안다. 달리 생각나지 않아서, 싫어하지 않아서, 기억에 사무쳐 꺼내놓은 그 붉은 과일과는 달랐다. 명백히 반갑고 좋았다.
- 눈치, 채셨을겁니다.
그 반가움을 만끽할 겨를도 없이 키리에가 말을 걸었다.
나무에 기대 앉은 칼리안이 조용히 눈을 감고 란델은 침낭 속에 몸을 뉘이고 키리에는 주변을 정찰하고 아르센의 모습을 하고 있던 플란츠는 말들을 데려가 풀을 먹이는, 특별히 이상할 것 없이 자연스레 배분된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때였다.
멀리 앉아있는 칼리안의 뒷모습을 보며 말들의 곁을 지키고 있는데, 소리도 없이 갑작스럽게 나타난 키리에가 수어를 보내왔다. 칼리안이 눈치를 챘으리라고.
-제 귀는, 못 속입니다. 어떻게 들어도, 저하의, 발소리니, 아니라 하지 마십시오.
- 너 때문에, 아우님에게 들키겠군.
눈꼬리를 찌푸린 플란츠가 짧게 대꾸했다.
키리에에게 가장 먼저 발각됐다.아마 플란츠가 란델을 데리고 칼리안이 있던 정원에 들어서자마자 들켰을 거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 아우님한테도, 얘기할 건가.
푸른 눈을 잠시 감았다 뜬 플란츠가 물었다. 키리에가 말을 전한다면 어떻게 할지,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지, 앞으로의 행동을 바꿔야 했으니까.
-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이렇게 말한 키리에가 플란츠를 쳐다봤다.
평소 본인이 듣고 알게 된 일을 모두 다 칼리안에게 전해야 하는 키리에가 아닌가. 그런데 키리에는 밤새 묵묵히 말을 달리기만 했었다. 그리고 이렇게 추궁을 했다.
- 직접, 말씀하십시오. 왕자님께서 그 일을 두고, 먼저 언급하기, 전에. 그리고 돌아가십시오.
- 왜.
- 아시지 않습니까. 이러다 저하께서, 또 위험해지면······.
- 또 내 아우님의, 앞길을 막으면, 이라고 해야겠지.
- 저하.
- 위험해지려고 온 것, 아니야. 내 아우님 앞길, 막으려고, 온 것도 아니야. 어련히 살려주겠거니, 내 목숨 의탁할 생각도, 집어치웠고, 계속 보호받는 일 짜증난다며, 화풀이 삼아, 따라을 만큼, 멍청하지도 않아.
이렇게 말한 플란츠가 키리에를 쳐다봤다.
- 걷는 법을 배우다, 몇 번이고 넘어졌다 해서, 다시 일어나려는 것만, 보고, 이번에도 분명 넘어질 거라 장담하면서, 계속 주저앉혀 두지마. 넘어질 게, 뻔하다면서, 실망할 걱정부터, 하지마.
- 그럼, 이유를 말씀해주십시오. 왜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왕자님을 속여가며, 따라오신 건지, 알아야 되겠습니다.
키리에가 오른쪽 눈만 살짝 찌푸렸다, 찌푸려지지 않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반대편의 푸른 눈을 비슷한 색의 눈으로 마주 보면서, 플란츠가 손을 움직였다.
- 위험을 무릅쓰고, 온 게 아니라, 위험해지지 않게 하려고, 온 거야. 형님 데리고.
-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잠시 고개를 돌려 멀리 칼리안의 뒷 모습을 다시 확인한 플란츠가 키리에를 쳐다봤다.
- 그 영지. 거기에 있으면, 아우님도 나도 위험하니까.
이곳에서 벌어진 일들에 틈이 많았다.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 계속 이어졌다.
'어디가 잘못됐지.'
플란츠를 두고 다누를 만나러 가겠노라 말하던 칼리안을 앞에 둔 채로 생각에 빠져들었다. 정리하지 않고 죽 저장해뒀던 일들을 하나하나 짜맞추기 시작했다. 동시에 떠오르는 여러 사건들, 이제껏 밝혀진 배후들, 새로 알게 된 비밀들, 그것을 각각의 상황에 모조리 다 집어넣고 생각을 했다.
몇 년 전, 프레이르가 사망했다.
그리고 휘트린이 프레이르로 변장해 그의 행세를 했다.
휘트린에 만들어진 칼리안의 별장에 하피가 있었다. 그것은 왕실에의 공격이 있기 이전부터 진행된 일이다. 그리고 별장을 관리하던 것은 별장에서 죽은 외성 수비대장, 칼리안이 집어던진 하피의 깃털을 알아보았던 휘트린의 세 남작, 그리고 또 한 명. 휘트린이다.
이미 결론을 지어 알려오는 머릿속을 다시 뒤졌다. 별장의 배후가 왜 휘트린인지, 이유를 찾았다. 그러자 이유가 될 만한 단서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첫날, 하피가 나타나 칼리안을 공격했다.
그 싸움에서 누가 다쳤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시간. 왕실 마차의 방어막 안에 하룻밤 동안 발이 묶였다는 사실이다.
'하룻 밤.'
그 하룻밤 사이, 라시드 브리센은 '나비아와 손잡은 칼리안이 자신의 별장에 길러오던 하피를 수도로 보내려 준비했었다'는 누명을 씌울 증거를 조작해뒀다. 이번에 에일라가 발견한 편지와 하피 마석 말이다.
그러나 라시드는 그 일을 마치지 못했다. 그렇게 만든 증거를 나비아의 저택에 숨겨두기 전에 일이 틀어졌다.
칼리안 때문이 아니었다.
그레이 브리센이 끼어 든 까닭이다.
그레이 브리센이 별장과 하피를 가로챘다. 아마도 세 남작 중 한 명일 누군가를 움직여 별장 서재에 라시드의 필체를 흉내낸 가짜 편지를 가져다 두고 라시드가 남겨뒀던 남은 하피를 풀었다. '지그프리드를 음해하기 위해 하피를 키우고 칼리안을 살해하려 했다'는 누명을 라시드 브리센에게 덮어 씌우려 했다.
'진짜 피해자는 라시드 브리센. 가해자는 그레이 브리센.'
일련의 사건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플란츠와 칼리안이 한 번씩 나란히 죽을 뻔한 셈이지만 실상을 보면 그렇지 않다. 칼리안에게 가려던 누명을 그레이 브리센이 가로채 제 아들에게 덮어씌운 꼴이다. 그렇게 하여 그레이가 알아서 라시드 브리센의 죄를 증명할 거짓 증거를 만들어다 바친 꼴이다.
'그러니까······ 브리센을 노린 거군.'
이 일로 구렁텅이에 빠져든 것은 브리센이다.
카이리시스의 왕실 숲과 왕궁의 북쪽 숲으로 제온이 습격을 한 일을 기회로 삼아, 이참에 브리센을 완전히 밀어넣을 덫인 것이다.
칼리안이 만든 덫이 아니었다.
'휘트린.'
라시드 브리센과 그레이 브리센.
휘트린이 둘 모두와 각각 손을 잡았다.
그리고 둘 모두를 함정에 처넣었다.
휘트린의 목표는 브리센이었다. 칼리안은 휘트린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때문에 칼리안을 보호하고자 하지도 않았고 죽이려 하지도 않았다. 하피 한 두 마리에 죽지 않으리라는 계산 정도는 했겠으나 죽든 말든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내 아우님을 미끼로 썼나 본데.'
칼리안은 미끼다.
칼리안을 미끼로 썼다.
칼리안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 아니었다. 분명 휘트린은 칼리안이 프레이야의 아들임을 인지하고는 있었다. 그러니 죽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을 터였다. 하피 한 두 마리 정도에는 죽지 않을 실력임을 알고 있었을 테니까.
그냥 그 정도의 관심만 있던 거다.
쓸 곳이 있는 친구의 아들.
딱 그 정도의 관심 말이다.
플란츠를 감싸는 칼리안을 보고 보여줬던 휘트린의 반응은 '브리센과 대립해야 조금 더 쓰임새 많을 칼리안이 브리센의 핏줄을 감싸고 도는 변수를 보게 된' 당혹이다.
칼리안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 이후 아르센이 건넨 조각의 앞에서 보였던 반응은 '타인임이 분명하나 프레이야의 아들임을 인정하고 사는 칼리안'에 대한 몰이해다.
칼리안의 비밀을 알았음에도 이전과 태도가 달라지지 않은 것은 그 이유다.
칼리안에 대한 일말의 감정이 없기 때문에. 칼리안의 겉모습에라도 매달리는 휘트린 영지의 다른 귀족들보다 오히려 더 무감정하여서.
라시드에게 칼리안이 가짜라는 말을 흘린 것 역시 휘트린일 터였다. 칼리안과 플란츠에 대한 명확한 감정이 있는 라시드는 그것이 사실인지를 확인할 것이 뻔하다. 그래서 라시드가 그날 플란츠를 찾아왔고, 칼리안과 싸움을 벌이다 죽음에 이를 뻔했다.
그 싸움에서 칼리안이 죽는다면 라시드는 왕자를 죽인 죄를 뒤집어 쓰게 될 테고 라시드가 죽는다면 휘트린에게는 더 좋은 일이지 않나.
그러니까 결국 이 모든 일은 휘트린이 벌인 일이다.
'두 가지가 안 맞는다.'
다만 두 가지가 맞지 않는다.
그렇게 브리센을 증오하면서 휘트린은 왜 이제야 움직이나. 칼리안이 휘트린에 찾아오게 된 일은 어디까지나 우연인데, 기다렸다는 듯 브리센을 잡으려 몰아치면서 어째서 진작 나서지 않았나.
그리고 휘트린은 왜 브리센을 없애려 하나. 자신의 과거에 겪은 일들로 인한 원망이라면 키리에와 히나에게 그런 모습을 보일 리 없다. 프레이야에 대한 복수라면 지금의 칼리안을 원망하지 않을 리 없다. 애초에 원망을 가질 줄 아는 이라면 '키리에와 히나에게마저도 비난을 받을 생각이 없다'는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 다누.'
다누.
휘트린 역시 다누의 말인가. 휘트린이 칼리안을 이용하려던 것처럼 휘트린이 가진 '명분'을 다누가 이용하는 것인가.
만약 다누에게 버림받았던 엘프가 다시 엘프의 사회에 속하게 되는 것이, 다시 다누의 딸이 되는 것이, 엘프들에게 목숨보다 중요한 일이라면. 그래서 휘트린이 이야기한 대로 다누가 휘트린을 다시 불러오는 것을 조건으로 다누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상태라면.
'그렇다면 다누가 원하는 것은 뭐지.'
다누는 휘트린을 움직였다.
고작 인간 왕국의 가문 하나를 닫자고 그런 짓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번 일에서 칼리안은 죽을 뻔했다. 플란츠가 다친 것은 플란츠가 칼리안의 앞으로 뛰어들었기 때문이지 하피에게 노려진 까닭이 아니다. 하피는 처음부터 끝까지 칼리안을 노렸다. 휘트린은 칼리안이 죽을 수 있음에 대한 변수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처럼 움직였다.
그렇다는 건 설마.
'····· 칼리안이 아니라.'
원하는 것이 칼리안이 아니었나.
그날의 왕제를 보여준 것은 칼리안을 위로하기 위함이 아니었나. 칼리안이 그 날의 기억을 다시 상기하게끔, 그 날 자신을 찾은 이의 얼굴을 다시 보게끔, 원망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 었나.
시나스타. 다누가 그 검을 칼리안에게 건넨 이유는 그것을 칼리안에게 주기 위함이 아니었나.
나에게.
그 검의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기 위함이었나.
그래서 휘트린을 '사용'하여 브리센을 몰아세우고 있나. 내가 칼리안에게 브리센을 닫자 하여서.
'결국 다누가 원한 것이 칼리안이 아니라 나라면. 그 날의 기억을 나에게 보여줘가며 나를 뒤흔들려 했던 이유는.'
다누에게.
'미친 왕이 다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벌어진 틈새.
앞뒤가 안 맞는 일.
'헤르츠 경. 데려가.'
그것을 따져보다 다누의 속내를 읽어 낸, 그런 생각의 결과로 칼리안에게 아르센을 권했던 플란츠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키리에를 보며 손을 움직였다.
- 더 안전한 곳으로, 따라온 거야.
내 동생을 미끼로 쓰는 나무.
내 동생 말고, 그런 나무의 뒷통수나 후려 갈기라고 있는 똑똑한 머리 아니겠나.
* * *
꿈을 꾸었다.
악몽일까, 잠시 생각하던 머리가 이내 꿈 속에 잠겨든다.
메마르고 바람이 거세고 추운 밤. 쉼 없이 몰아닥치는 모래바람을 피해 커다란 바위 사이로 숨어 들었던, 이제 막 서클 한 개를 만들었던 어느 어린 날의 찬 기억이 꿈을 통해 되풀이됐다.
등을 기댄 바위 덕에 모래에 파묻힐 일은 피할 수 있었으나 대신 뻣속을 헤집는 한기가 온몸을 휘감아 돌았었다. 할 수 있는 어떤 마법을 부려도 온기를 유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은 두 무릎을 끌어안고 한기를 견뎌내야 했다.
'대사막의 밤이 호락호락할 줄 알았더냐?'
리베른의 바다보다 광막하고 레이도스 산맥의 골짜기보다 암막하다던 대사막의 밤을 그렇게 맨 몸으로 버틴 날. 생애 두 번 없을 그 긴 밤의 한기를 일순 물려낸 것은 울화가 가득했던 스승의 목소리였다.
'마법사 놈이 백 번을 죽으면 그 중 한 번은 그 놈한테 원한 가진 기사 나부랭이 짓이고 나머지 아흔 아홉은 그 놈의 호기심이 원흉일 것이라더니. 네 놈이 딱 그 짝이다.'
스승의 말대로였다.
대사막의 밤이 그렇게나 대단하다는 말을 듣고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뛰쳐나갔다.
'이렇게 추울 줄 몰랐어요.'
'얼음 마법이고 불 마법이고 다 관두거라. 한 치 앞도 모르는 놈이 마법은 배워 뭣에 쓰겠느냐? 대사막 개를 데려다 키워도 너보다는 낫겠다.'
한낮에는 그리도 더운 곳이 한밤에 그렇게나 추워진다는 말을 믿지 못해서 혼자 몰래 집을 빠져나갔던 어린 제자 덕분에, 스승은 눈을 가리고 귀를 파고들고 입과 코로 밀려드는 모래바람 속을 밤새 걸었다. 대사막의 밤 속으로 기어들어가 돌아오지 않는 어린 제자를 찾으려 걷고 또 걸었다.
찬 바위에 등을 대고 잠든, 새파랗게 질린 얼굴의 새파란 머리 제자를 그렇게 간신히 찾아냈다.
'대사막에서 얼어죽을 뻔한 얼음 마법사는 네 놈밖에 없을 게다. 어디 가서 말이나 하지 말거라. 내가 다 부끄럽다.'
그리고 혼을 냈다.
메마르고, 바람이 몰아닥치고, 몸을 기댄 딱딱한 바위가 얼음장같았던 밤.
그 추위 속에서 혼이 났다. 데이지 않을 불로 언 몸을 녹여주던 스승에게 정말 호되게 혼이 났다.
'죄송해요, 스승님.'
'됐으니 따라와라. 가자.'
'네······.'
그런 꿈을 꾸었다.
"······ 에이 씨."
엎드려 잔 까닭인지 입가가 버석하게 메말라 비틀어지고, 창 밖에서는 바람이 불어들고, 몸을 누인 대리석 바닥이 얼음장같다.
그야말로 입 돌아갈 새벽의 추위 속에서 부스스 눈을 뜬 아르센이 정말 눈만 뜬 채로 냅다 욕부터 했다.
어차피 로브 하나면 추위와 더위가 다 해결되는 까닭에 로브 속에는 검은 색 바지와 청보라색의 얇은 셔츠만 걸쳐 입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새 로브가 사라졌다. 얇은 셔츠 차림으로 대리석 바닥에 엎어져 누워 아침이 될 때까지 잠을 잔 것이다.
하마터면 스승님을 따라 아스라이 먼 어느 곳까지 갈 뻔했으니 욕지거리가 나오겠나 안 나오겠나.
- 스르륵!
덮은 것인지 아르센의 몸뚱이 위에 버린 것인지 모를 시트가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어차피 그깟 천쪼가리 하나로는 해결되지 않을 대리석 바닥의 냉기였던 터라, 아르센은 뻐그덕거리는 몸을 손끝부터 움직이며 조금씩 마비를 풀었다.
"에이 씨."
그리고 다시 한 번 험한 말을 했다.
"어. 일어났네."
파란 머리를 휘휘 저으며 정신을 차려보던 아르센에게 높낮이없는 아침 인사가 들려왔다.
맨질맨질한 대리석 바닥에 주저앉아 주변 공기부터 데운 아르센이 고개를 들었다. 그 뒤 지금 이 모습을 절대로 보지 말았으면 했던 딱 한 사람을 마주하게 되었다.
"협회장님?"
호위 대상이던 란델이 나간 까닭에 오랜만에 숙면을 취한 에우리아가, 참 개운한 얼굴로 한 손을 들어보였다.
"꼬맹이 바닥에서 자더라. 한데서 지내던 버릇인가."
"바닥에서 기절한 겁니다."
"너네 애들이 너 깨워서 침대에 올려 두겠다 했는데 하도 잘 자길래 냅두라고 했어. 죽은 듯이 자더라고."
"자는 듯이 죽을 뻔한 겁니다. 스승님께서 같이가자고 손짓하셨습니다."
오해 깊은 에우리아의 말을 되는대로 해명한 아르센이 끙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것을 보며 혀를 쯧쯧 찬 에우리아가 다시 말했다.
"우리 나이에 맨땅에서 자면 뼈에 바람든다. 침대에서 자라."
"그런 게 아니라는 것 아시잖습니까. 놀리지 마십시오."
"싫으면 수면향을 처마시질 말던가."
"······ 진짜 아시면서 놀리신 겁니까?"
"모를 리가 있나. 내가 만들었는데."
아르센이 할 말 잃은 얼굴로 에우리아를 쳐다봤다. 그러자 에우리아가 아르센을 향해 무언가를 건넸다. 얼결에 팔을 내민 아르센이 그것을 받고 살폈다.
꽤 두꺼운 종이뭉치였다.
이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물으려는데
에우리아가 남은 손에 들려있던 물건도 휙 집어던졌다.
- 철푸덕!
한 손으로 잡아채기에는 너무 컸던 그것이 아르센의 얼굴에 철푸덕 올려졌다. 이번에는 새카만 로브였다.
"이게 다 뭡니까."
까만 로브를 걷어을리며 우드득거리는 허리를 곧게 편 아르센이 물었다. 그러자 에우리아가 대답 없이 턱짓으로 종이뭉치를 가리 켜보였다. 눈 뒀다 뭐하느냐는 의미일 것이다.
부스럭거리며 그것을 본 아르센의 눈이 치켜떠졌다. 세상에서 제일 꼴 보기 싫은 놈의 글씨가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은 말투를 고스란히 옮겨두고 있었다.
- 읽어. 마법사.
이런 말로 시작된, '내 말을 알아들을 능력같은 건 마법사 너한테 없을 테니 인내심을 다해 길게 풀어 써준다'는 의지가 고스란히 눈에 보이는 편지였다.
다만 그것을 편지라 해야 할지 보고서라 해야할지. 인상을 확 구기던 아르센이 곧 시선을 움직였다. 흘려쓴 듯 유려한 필기체로 이어진 길고 긴 내용을 쭉 읽어나가던 얼굴이 조금씩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한참 뒤 '주의하도록' 이라는 말로 편지가 끝났을 때, 아르센이 매섭게 가라앉은 눈을 한 채 고개를 들었다.
- 화르륵!
더는 볼 사람이 없어야 할 편지가 타오른다.
중요한 내용은 이미 머릿속에 넣었으니까.
씻을 시간도 없을 것 같아 대충 제 몸에 클린을 건 아르센이 방금 전에 받은 검은 로브를 뒤집어썼다. 그리고 에우리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시종 세 분은 어디 계십니까."
"브리지트 경이 너네 애들 몇 명이랑 시종들 데리고 외성 쪽으로 갔어. 치유사 베른 경이 올지도 모른다고, 마중하러."
"네. 그럼 다른 대원들은 제가, "
"얘기 전해 뒀어. 너 안 일어나길래. 그런데 발칸 놈들 내 말은 잘 안 믿더라고. 급하니까 베른 경 마중까지는 갔는데 다른 말은 네 명령 떨어져야 움직이겠대. 가서 협회장 말이 사실이니까 전달받은 대로 하라고만 말해주면 돼. 나도 알아서 내 할 일 할 테니까."
"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와주는 게 아니고 저하랑 거래한 거야. 수면향이랑만 바꾸기에는 마석이 너무 좋은 거더라."
"그래도 감사합니다."
"하던지."
"알겠습니다. 그럼 협회장님 오늘 저 못 보신 겁니다."
"알아."
짧은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아르센이 마력을 운용했다.
곧 아르센의 몸이 점차 투명하게 변했다. 그것을 지켜보던 에우리아가 툭 내뱉듯 말했다.
"조심해. 꼬맹이."
허공에 얼굴만 둥둥 뜬 기괴한 모습의 아르센이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걱정해주시니까 좋습니다, 협회장님."
"어."
"협회장님도 조심하십시오."
"걱정할 사람을 걱정해."
"네. 걱정할 사람 걱정하는겁니다."
그 말과 함께 아르센은 완전히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됐다.
피식 웃은 에우리아가 아르센의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아주 잠시 뜸을 들이며 밖으로 나간 뒤 방문을 닫고 걸음을 옮겼다.
'부상에서 깨어나자마자 술을 퍼먹고 다시 쓰러진 왕세자가 드러누워 있는', 하지만 실제로는 텅텅 비어있는 방을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