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69화 (470/527)

제83장. 일가견이 있는(3)

튼튼이색의 긴 드레스.

그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으나 가봉을 마치고 가법게 모양을 잡아 본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예뻤다.

의상 담당자 섀틴은 밀크티나 마른 잔디와도 비슷한 빛의 그 '백금색' 드레스에 리본이나 레이스 장식을 하지 않을것이라 했다.

"대신 여기에 이렇게, 이런 식으로 주름을 넣을 겁니다. 어깨와 등, 드레스의 밑단 쪽에는 보석 장식을 더할 생각입니다."

드레스가 잘 맞는지를 확인한 섀틴은 치마자락을 위아래로 겹쳐 풍성한 주름을 만들어 보이거나 장식이 더해질 곳을 가리켜보이며 설명을 했다.

"같은 장식의 구두와 티아라까지 다 착용하시게 되면 훨씬 더 잘 어울릴 겁니다, 베른 백작님."

섀틴의 말을 따라 상상을 해보던 히나가 생긋 웃었다. 새로운 호칭이 조금 낯설다 생각하면서.

그래.

자작이 아닌 백작이다.

왕궁으로의 습격을 기민하게 예측하여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게 한 히나에게 주어진 새로운 작위였다.

다른 곳도 아닌 수도 카이리시스와 왕궁을 지켜낸 공이었으니 대부분의 귀족이 히나의 작위가 한 단계 오르리라 미리 예상을 했었다. 다만 작위 수여가 생각보다 빠르게 이루어졌다는 것에는 조금씩 놀라워했다.

브리센의 그레이 혹은 라시드에 대한 벌이 아직 내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체로 르메인은 벌을 먼저 내린 이후에 상을 내렸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왕세자와 왕자들이 다 왕궁을 비우고 브리센 후작은 왕궁 안에 억류되어 있는데. 어수선한 상황을 계속 이어나갈 필요가 있을까 싶군.'

'제 생각도 같습니다, 전하. 왕실에 공을 세운 이가 얼마나 큰 치하를 받는지를 하루 속히 알리는 것은 전하께도 분명한 도움이 된다 여깁니다.'

'그래.'

'거기에 더해, 지금이야 상을 내리는 것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겠지만 이 일을 잊고 나서는 저하의 정혼자인 까닭에 업적보다 큰 상을 받았다 할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겠지. 누군가의 공로가 잊히는 것은 늘 일순간이니.'

시종장 라울과의 대화 끝에, 르메인은 히나에 대한 공로를 치하하는 것을 더 미루지 않기로 결정지었다.

그리고 바로 오늘, 히나는 새로운 작위를 하사 받았다. 자작위와 함께 내려졌던 영지 외에 또 다른 영지도 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었다. 히나가 그간 왕궁 안에서 지내온 것을 잘 알았던 르메인은 그럴싸한 규모의 '베른 백작저'까지 마련해주기로 했다. 왕세자의 정혼자인 히나에게 주어진 새로운 백작저가 브리센 후작저의 정 반대편, 지그프리드 공작저의 인근에 지어지게 될 것임을 안 귀족들이 잠시 술렁였으나 큰 소음이 생기지는 않았다.

"다른 옷들은 마음에 드십니까?"

- 네. 좋아요. 다들 예뻐요.

그런 과정을 거쳐 새 작위를 얻게 된 히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섀틴이 손에 쥔 구슬을 통해 히나의 대답이 전해졌다. 긴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손에 쥔 따뜻한 코코아의 첫 모금같은 목소리였다.

백은발에 잘 어울릴 진주로 장식된 은색 드레스도, 플란츠가 세자 정복을 입고 왕궁 밖에 나갈 때 함께 입게 될 짙은 감청색의 바지 정장도, 은사로 수를 놓고 다이아몬드로 장식할 예정이라던 검은색의 짧은 드레스도 마음에 들었다. 다만 한 가지.

- 그런데 이 옷이요, 슬레이크 경.

색이 마음에 들어 골랐던 살구색의 드레스를 가리켜보인 히나가 말을 전했다.

"네. 백작님."

- 레이스 색을 바꿀수 있나요?

르메인의 탄신일 축제.

바야흐로 한 달 남짓이 남게 된 그 축제로 인해 섀틴은 정말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다른 귀족들의 의상은 아예 의뢰를 받지도 않았다. 칼리안의 의상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수고를 들여야 하는데 거기에 더해 플란츠와 히나의 옷까지 담당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셋의 옷만 이미 열 세 벌인데 거기에 더해 드미레아의 의상 담당자와도 계속 연락을 주고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섀틴은 싫은 내색을 비추지 않았다.

칼리안이 어떤 것을 요구하든 시간 내에 다 만들어내 건네왔던 섀틴이 아닌가. 그런 면이 바로 자신의 능력이라 자부하는 사람이었으니 고작 레이스 하나를 바꾸는 것에 난색을 표해서야 되겠나.

"물론입니다. 바꾸실 수 있습니다."

- 바쁘실 텐데 죄송해요.

"아닙니다, 백작님. 레이스 바꾸는 것이 뭐 어렵습니까."

곧 여러 종류의 레이스 조각이 부착 된 두터운 책을 열어 다른 레이스를 골라낸 새틴이 물었다.

"이것은 어떻겠습니까?"

- 초상화 속 프레이야 왕비님의 드레스와 같은 색의 원단인데, 레이스까지 프릴과 비슷한 색으로 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진주색이나 은색보다는 금색이 낫겠어요.

르메인의 탄신일 축하연이 있을 때 칼리안과 플란츠가 사이 좋은 척을 할지 사이 나쁜 척을 할지 지금으로서는 본인들조차 알 방법이 없어서 하는 소리였다. 혹시나 히나가 프레이야를 떠올릴 옷을 입고 나섰다가 좋지 않은 말이 나올지도 몰랐으니까.

"아이고·····. 제가 백작님을 난처하게 해드릴 뻔했습니다."

섀틴이 제 이마를 탁탁 쳤다.

칼리안의 살구색 재킷, 소매와 목이 뻐근하지 않을까 걱정했을 정도로 과하게 달아 주었던 진주색의 프릴 장식 셔츠, 그리고 그 옷의 원형이 되었던 프레이야의 드레스를 떠올리고 있었다.

"나이를 먹어가니 자꾸 이렇게 생각이 짧아집니다. 프레이야 왕비님의 옷을 만들어드릴 때까지만 해도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는데 말입니다."

- 프레이야 왕비님을 아세요?

"알다 뿐이겠습니까. 프레이야 왕비님께서 왕궁에 오신 이후로 입으셨던 옷은 전부 제가 만들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는 오래도록 왕궁에 들지 못했습니다만."

- 아······. 몰랐어요.

"그래도 칼리안 왕자님의 옷을 다시 짓게 되어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프레이야 왕비님의 추숭식 때 칼리안 왕자님께서 입게 되실 예복을 만드는 동안에는 또 얼마나 벅차고 먹먹했는지····· 아마 그런 기분으로 의복을 만들 일은 다시 없을 겁니다."

섀틴이 감개무량한 얼굴을 했다.

칼리안의 앞에서조차 프레이야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못하던 때가 엊그제인데 어느새 추숭식 예복을 만들고 그 이후에는 칼리안이 멋대로 색을 바꾼 가짜 왕세자의 복식까지 만들게 되었으니. 습관처럼 눈시울이 붉어지지 않는 것이 다행이다.

- 프레이야 왕비님은 정말 좋은 분이셨을 것 같아요.

"맞습니다. 그렇고 말고요. 만약 프레이야 왕비님께서 살아계셨다면 왕궁이 얼마나 빛났을지·····."

이렇게 말하던 섀틴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지금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누구의 정혼자인지, 누구 아들의 정혼자인지를 떠올린 까닭이리라.

그동안 섀틴을 대해 온 왕족이 칼리안 뿐이라 다행이다. 히나나 플란츠가 '브리센'의 사람이 아니라 다행이다.

이제껏 목이 붙어있는 것이 신기하다 여겨지는 말실수가 아닌가.

실언하여 어쩔 줄 몰라하는 섀틴을 향해 히나가 부드러운 목소리를 보냈다.

- 살아계셨다면 어땠을까, 아쉬워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알 것 같아요.

섀틴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다섯 벌의 가봉된 의상을 모두 다 입어본 히나에게 인사를 한 섀틴이 밖으로 나간 뒤. 기지개를 쭉 편 히나가 집무실의 창 밖을 봤다.

섀틴은 저녁에 찾아왔는데 어느새 밤이 되었다.

때문에 이만 돌아가 잠자리에 들까 잠시 고민하던 히나가 아쉬운 마음에 몸을 일으켰다. 그 뒤 찻잔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작은 발소리를 어떻게 들었는지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왔다.

"애옹!"

"미오옹!"

바늘과 가위, 작은 천들이 많아 잠시 들어오지 못하게 했던 루시와 안네가 어느새 다가와 발치를 오간다. 살짝 웃은 히나가 찻잎 통을 잠시 내려놓고 간식 꾸러미를 열었다.

"애오옹······."

성격 급한 루시가 펄쩍 뛰어을라 간식을 졸랐다. 함께 올라오지 못한 안네가 야옹야옹 울음소리를 냈다.

서둘러 말린 닭고기를 하나씩 꺼내 건네자 그것을 물고 멀찍이 간 두 고양이가 나란히 머리를 맞대고 앉아 한 밤의 간식을 먹기 시작했다.

깝깝짭, 간식을 먹는 소리가 어찌나 듣기 좋은지.

웃는 얼굴로 그 모습을 보던 히나가 다시 차통을 열었다.

말린 귤 조각이 함께 들어간 차 향이 아주 은은하게 와닿았다. 과하지 않은 귤 향기에 칼리안이 생각난다.

'프레이야 왕비님을 보았다니. 칼리안 왕자님은 알고 계셨을까.'

칼리안은 자신의 얘기를 즐겨하지 않는 사람이다. 농담도 잘하고 가벼운 말도 많이 하지만 그 많은 말들 속에 정작 제 얘기는 별로 없다. 섀틴을 대할 때에도 다르지 않았을 테니 섀틴과 프레이야에 대해 모를 수도 있겠다.

'왕자님이 돌아오시면 슬레이크 경을 만난 이야기를 해줘야겠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많이 힘들어 보였는데, 섀틴과 함께 프레이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조금쯤은 위로가 되지 않을까.

히나 자신은 그랬으니까.

- 반짝!

보글보글, 찻물이 끓기 시작하는 소리를 들으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분홍색 귀걸이가 밝은 빛을 냈다. 그러더니 곧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히나.

키리에였다.

갑작스런 목소리에 조금 놀란 히나가 얼른 대답을 전했다.

- 오빠?

- 응.

- 바쁘다더니. 일은 다 마쳤어?

- 아직. 조금 더 있어야 돼.

- 소공작님은 잘 계셔? 소공작님이 제대로 설명도 안 하고 나가버렸는데 그렇게 큰 일이 있었느냐면서 공작님께서 걱정하셨어.

- 괜찮아. 소공작님도 공자님도 잘 계셔.

- 응. 공작님 만나면 전해드릴게. 요즘 카스트린 경이랑 거의 매일 빌헬름 관에 오시거든.

- 그래. 너는, 히나. 별 일 없어?

아직 작위가 오른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을 텐데. 그 이야기를 해줄까 말까 잠시 고민을 하던 히나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 나는 잘 있어.

카이리스의 제도 상 평민이었던 이가 자작의 위를 받는다 하여 그 가족까지 전부 귀족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백작위는 달랐다. 히나의 자작위와 상관 없이 스스로가 기사이기 때문에 준 남작에 해당되었던 키리에가 이제 백작의 오빠로, 진짜 귀족이 되었다.

물론 그런 것보다 히나의 수고를 제대로 보상받은 것에 대해 기뻐할 키리에지만, 그래도 히나보다 더 좋아할 키리에의 얼굴을 직접 보고 싶었다.

- 부상자들은 많이 회복됐어. 나까지 나설 만큼은 아니라서 이제 숨을 좀 돌리고 있어.

- 잘 됐네.

- 잘 됐지. 그리고 슬레이크 경이 벌써 드레스 가봉을 마쳐서 방금 입어봤는데, 너무 예뻐.

그래서 히나는 이렇게 다른 이야기만 전했다.

- 히나.

- 응.

- ······ 사실은 만나서 얘기를 해 주려던 게 있는데.

그런데 되려 키리에가 이런 말을 꺼냈다. 직접 만나 전해주려 했던 좋은 소식에 대한 생각을 미룬 히나가 대답했다.

- 무슨 얘기?

- 내가 여기서 누구를 좀 만났어.

- 응.

- 너를 만나서 얘기를 해 줄 때쯤에는 혹시나 그 사람이 여기에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네가 그 사람을 만나보고 싶어할까봐, 그랬는데 늦게 될까봐. 그래서 먼저 얘기를 해주는게 나을것 같아.

작위를 받은 것에 들떠서, 드레스를 입어보게 된 일이 즐거워서, 루시와 안네의 재롱에 기분이 좋아져서, 앨런에게 선물받은 차 향이 마음에 들어서, 그래서 놓치고 있던 것을 이제야 알았다.

키리에의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 괜찮아. 들을게. 누구를 만났는데?

물을 붓지 않아 여전히 마른 찻잎만 들어있던 찻잔을 도로 내려놓은 히나가 물었다.

- ······ 누구······ 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히나.

히나의 귀걸이가 다시 한동안 빛났다.

이미 오래전에 끓어오른 찻물이 보글보글, 그것을 거두어 찻잔 속에 담아 줄 손길을 만나지 못하고 계속하여 끓어 올랐다.

보글보글. 오래도록 끓어올랐다. 더운 수증기가 머무를 곳 없이 퍼져나가고 마른 찻잎의 향이 찻잔 속을 맴돌다 흩어지도록.

- ······ 그랬구나.

오래도록.

꽤 오래도록.

* * *

휘트린 영주성의 정원에 흰 장미가 피었다.

하도 정신이 없어 그제야 보았는데 어느새 피어 있었다.

그 장미들을 비추듯 가만히 빛나던 팔찌의 빛이 사그라든다. 소매 밖으로 퍼져나오던 반짝임이 없어진 것을 안 칼리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히나가 찾아와도 괜찮을까."

제 손목의 팔찌를 내려다보던 키리에가 답했다.

"힐 경이 여기 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왕세자 저하와 발칸도 이곳에 계속 남아있지 않습니까. 소공작님도 계시고 말입니다. 안전을 걱정하지는 않아도 될것 같습니다."

"안전할지가 아니라, 내말은."

말을 멈춘 칼리안이 입을 다물었다.

휘트린에 대해 히나에게 알리는 것을 칼리안은 말렸다. 적어도 엘프의 도시에서 돌아온 다음에, 키리에가 곁을 지켜줄 수 있을 때, 그때 휘트린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게 어떻겠느냐 했었다. 그러나 키리에가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나비아에게 엘프 자객이 찾아왔던 것을 안 까닭이었다. 그것을 알게 되니 휘트린에게 제온의 습격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됐다.

만에 하나 휘트린이 누구에게든 목숨을 잃는다면 히나는 제 뜻과 상관없이 휘트린을 보지 못하는 일을 두 번 겪게 되는 셈이니까. 그래서 곧바로 사실을 알리고자 했고 칼리안은 더 이상 만류하지 못했다.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차피 헤르츠 경이 같이 가기로 했으니 너는 여기 있는 게 어때."

"히나는 항상 저보다 강한 아이였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도 괜찮을 것이라 믿고 싶습니다."

"아니······ 아닐 수도 있어, 키리에."

겉으로만 강했던 이들을 너무 많이 보아왔다. 애초에 칼리안부터 그랬다. 게다가 히나가 과거에 어떻게 떠났는지 알았으니 더더욱 '강하다' 여기고 마음을 놓질 못했다.

"너무 장담하지 말아."

"······ 네, 왕자님."

왜 아니라 여기는지를 묻는 대신 키리에는 이렇게 대답하기만 했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하다 입을 열었다.

"그래도 엘프들의 도시에는 함께 가겠습니다. 제가 지금 히나를 보기가 어려워 그렇습니다."

칼리안의 붉은 눈을 보던 키리에가 말을 이었다.

"힐 경을 따르지 않고 카이리시스에 남자며 결정한 것은 저였습니다. 히나가 어려서, 제가 멋대로 그렇게 정했습니다. 그렇게 해 가며 복수를 준비했던 일이 쓸데없는 것이 되어버렸지 않습니까."

"쓸데없는 일이 세상에 어디 있나."

"그래도 아직은 히나를 마주보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가 미안해서요."

칼리안이 짧은 숨을 내쉬며 답했다.

"대신 다녀오면 히나 잘 살펴줘."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너도. 괜찮다고만 하지 말고."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할 말을 다 못했다며."

"가장 하고싶던 말은 했습니다. 다른 말은 하지 않아 다행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대신 두 분께서 다 해주셨지 않습니까."

"결국 네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닌데. 누가 대신했다 해서 약이 될까."

"약이 되지는 않았어도 위로는 됐습니다."

"······ 그래도. 혹시 치밀거든 얘기해. 담아놓지 마."

"알겠습니다."

남매의 일에 대해 걱정은 하되 그 이상 간섭할 수는 없어 고개만 끄덕인 칼리안이 키리에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 기분을 환기시키듯 주변을 둘러보며 다른 말을 꺼냈다.

"다녀오면 나는, 드미레아 돌아가기 전에 여기라도 잠깐 구경해야 되겠다. 장미가 피었네."

별장의 사고 때문에 찾아왔던 드미레아는 아직 돌아가지 않았다. 지그프리드에 오명을 씌우려 한 일을 완전히 해결한 뒤에 돌아가겠다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니 엘프들을 만나고 돌아오면 이 곳의 흰 장미라도 같이 구경하며 산책이라도 해야지. 키리에가 히나를 살피는 동안 나는 산책이라도 해야지.

"그러고보니 란델 형님께 드린 흰 장미는 어떻게 됐으려나."

금세 또 다른 주제의 말이 입 밖으로 나온다.

"안 그래도 시들시들했는데 완전히 말라 죽었으면 어떡하지. 나 때문이니 새로 사 드려야 하나."

"잘 자라고 있을 테니 걱정 말거라."

그런데 기다리던 아르센 대신 엉뚱한 사람의 목소리가 대답을 전해왔다. 란델이 었다.

"란델 형님을 뵙습니다."

칼리안이 '아르센'과 함께 찾아온 란델에게 예를 보인 뒤 입을 열었다.

"가짜 신력 쓰지 말고 정성껏 키워주십사 말씀드렸는데, 기어코 치유력을 쓰셨습니까."

옥수수수염 네가 왜 여기 왔는지. 물론 그것도 궁금했지만 그보다 조금 더 궁금했던 것을 먼저 물었다. 아무래도 그 시든 장미를 '치유'했나보다 싶어서였다.

"내 정성을 네게 증명하려다 꽃이 시들어서야 되겠느냐."

"증명해달라는 의미로 드린 말씀은 아니었는데요. 란델 형님이 그것 하나에라도 다시 관심을 가져보셨으면 해서 드렸던 겁니다."

"그렇다면 상관없겠구나. 관심의 방법이 무엇이든 꽃은 필 테니."

"그렇다면 굳이 대장로 나르잔을 만나보실 필요 있겠습니까. 가뭄이 들고 열풍이 불어도 장미는 잘 자랄 텐데요."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으며 란델의 깊은 눈을 바라봤다.

플란츠가 만들어 준, '란델이 굳이 칼리안을 따라 엘프의 도시에 가야 할 명분'을 이미 파악한 모양이다. 아무튼 감 좋은 것은 알아줘야 한다.

짖고 물다 하울링까지 하는 내 아우님이 아무리 그래도 고양이가 맞기는 한가보다. 도무지 뭐 하나를 숨길 수가 없다. 배가 이미 빵빵해 보이니 오늘은 간식을 주지 말아야겠다며 다짐을 해도, 숨겨놓은 간식을 귀신같이 찾아내 안네와 나눠먹던 루시와 다를 게 없지 않나.

그렇다면 내가 그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를 재워놓고 따라나선 것도 다 들켰으려나. 결국 들킬 줄이야 알았지만 출발하기 전부터 계획이 틀어질 줄 알았으면 굳이 수면향을 얻겠다며 비싼 마석을 낭비하지 말고 그냥 때려눕힐 걸.

란델과 함께 찾아온 뒤 멀뚱히 선 채로 이런 후회를 한 플란츠가 입을 꾹 다문 사이, 칼리안과 란델의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내가 그 명분을 대고 너를 따를 줄을 알았더냐."

"핑계 대실 말이 그것 뿐일 것 같아서요."

"셈은 빠르구나."

"빨라졌습니다. 먹여 살릴 입이 많아서."

가볍게 답한 칼리안이 '아르센으로 변장한 플란츠'를 쳐다봤다. 그러다 곧 플란츠의 뒤로 보이는 영주성 쪽으로 눈을 돌리며 란델에게 물었다.

"무슨 이유가 있든 안전이 보장된 뒤에 가셔도 늦지 않을 텐데요. 위험합니다."

"무엇에 대한 위험이더냐."

란델이 물었다.

"네가 숲에서 하피를 상대하던 때 다누는 가만히 있었다만."

"맞습니다."

"숲에 하피를 보낸 것도 다누가 아니었고. 그 숲에서 모두가 하피와의 싸음에 시선을 둔 사이에 둘째를 멋대로 끌고 들어가거나 나를 공격하지도 않았지."

"그렇습니다."

"네가 엘프들을 다 죽이겠노라 한 이후 숲을 빠져나오는 동안 너나 둘째나 내가 위협받은 일이 있더냐. 혹은 이곳에 온 이후로 다누에게 공격받은 이가 있거나 제온의 군사가 우리를 노린 일이 있더냐."

"······ 없습니다."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인 란델이 잠시 플란츠 쪽을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영지 관리인을 습격한 이가 너만큼 빠르게 움직였다 하더구나."

"네. 저도 들었습니다."

"그 정도 실력 있는 이가 네 수하와 협회장을 그냥 두고 마석만을 훔쳐가고. 그런 자객을 보낼 줄 아는 다누는 네가 홀로 하피를 상대할 때에도 가만히 있었구나. 다누는 네가 쓰러져있던 사홀 동안에도 다른 일을 벌이지 않았다. 허면 엘프의 도시로 가는 동안에도 목숨이 위험할 일은 없을 듯 한데. 아니더냐."

"게다가 제온과 엘프 휘트린이, 휘트린 영지의 엘프들과 다누의 엘프들이 서로 알력 싸움을 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더욱이 얼마 전에는 시스파니안께서 직접 나서서 경고를 전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다누가 카이리스 왕가를 다시 건드려 제 입지를 스스로 좁히려 할 만큼 어리석고 무모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란델의 이야기에 이어 플란츠가 이렇게 덧붙였다. 그리고 곧바로 다시 입을 열어 말 정말 많은 아르센을 열심히 흉내냈다.

"왕자님께서도 실질적인 목숨의 위협이 없으리라는 것은 아시지 않습니까. 다누가 왕자님이나 저를 끌어들여 '꿈'을 보여줘가며 압박을 할지언정 칼을 보내 목숨을 노리는 목적의 습격은 없으리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모시고 왔습니다."

물론 또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일단은.

플란츠의 설명을 들은 칼리안이 시선을 돌렸다. 란델을 데려온 이유를 말하는 플란츠의 새파란 눈을 잠시 쳐다보며 생각을 하다 이내 란델을 향해 다시 물었다.

"형님과 함께 계시기가 싫으셨습니까. 아니면 바다가 궁금하셨습니까."

"어느 하나를 고르기엔 어려운 질문이구나."

"그렇습니까."

"다만 온전한 핑계는 아니었다. 키워야 할 것이 장미만은 아닐 텐데, 동생의 나라에 원조를 구하는 왕으로 남고 싶지는 않으니."

"그런 욕심을 부릴 줄도 알게 되셨습니까."

"그런 욕심을 드러내게 됐다 해야 맞겠지."

"듣기 좋은 말이네요."

란델은 제 온전한 선택으로 텐실의 왕위에 오르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텐실의 가짜 왕세자 세르제인은 란델에게 세자위를 양보해도 좋을지를 가늠해보고자 카이리스를 찾는다 했다.

굳이 싸우지 않고 세르제인의 왕세자 위 양도를 약속받으려면 란델도 무엇이든 하나쯤 내세울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이를테면 대사막의 열풍 속에서도 밀이 마르지 않게 할 다누의 힘 같은 것 말이다.

"세크리티아 쪽으로는 뿌리도 제대로 뻗어두지 않았다는 다누가 과연 텐실에 관심을 가질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가능하다면 만나는 보아야겠지."

란델은 르메인의 탄신일 축제에서 세르제인을 만날 예정이었다. 협상에 조금이나마더 유리한 조건을 가지려 한 다면 나르잔이나 다누는 지금 만나야 할 터였다.

그러니 어찌할까.

고민하던 칼리안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 네. 알겠습니다. 함께 가시죠."

란델의 동행에 대해 허락을 했다.

고개를 끄덕인 란델이 제 말에 올랐다. 윤기나는 짙은 초콜릿색의 말이 얌전히 주인을 태우며 푸르륵 소리를 냈다.

그래. 란델이 쓴 초콜릿을 좋아하는 것은 잘 알겠다. 아무튼 말도 꼭 저같은 놈을 골랐다고, 그렇게 생각한 플란츠가 아르센의 말 로로의 안장을 붙잡았다. 그리고 허리에 매지 못한 시나스타를 넣어 둔 자신의 마법사 주머니가 실수로라도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말에 오르려는데.

"헤르츠 경."

지금 이 순간에서만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울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왕자님."

서둘러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돌린 플란츠가 대답했다. 그러자 자박, 하고. 칼리안이 한 걸음을 다가왔다.

'······ 들켰나.'

제 울타리 안의 사람을 참 잘도 믿는 칼리안인지라 속아주는 것인지 속은 것인지 가늠이 어렵다. 때문에 쿡쿡 쑤셔오는 양심을 애써 꾹 눌러두는 플란츠의 귀에 칼리안의 말이 들려왔다.

"많이 피곤합니까. 표정이 어두운데."

플란츠의 속임수를 알면 화를 낼 터였다.

화 를 내기보단 실망하리라는 것을 잘안다.

그러니 지금 들키면 한 달 쯤 서로 마주치지 않고 지내게 될 거다. 만약 생각한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은 채 나중에 들키면 내 동생이 누군가를 때리는 것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는데 맞은 놈이 바로 나인 애석한 상황을 접하게 될 게 뻔하다. 물론 그렇게 되면 한 달 아니라 세렌티가 깨어났다 다시 잠들 도록 서로 마주치지 않게 될 테고.

나중에 들키지만 생각한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글쎄. 저놈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왕자님."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란델의 옆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란델 형님 호위해요.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니 조심하고."

반응이 영 알쏭달쏭하다.

나도 모르겠다.

어차피 저지른 일인데 속아주는 것이든 속는 것이든 열심히 속여봐야지 별 수 있겠나.

다시 한 번 결심을 굳힌 플란츠가 싱긋, 세상에서 제일 따라하기 싫은 놈의 웃음을 지어 보였다.

"걱정 마십시오."

"그래요. 그럼."

입가를 움직여 마주 웃어 준 칼리안이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걸치고 있던 로브의 검은 후드를 깊숙이 눌러썼다.

오래지 않아 변화가 인다.

후드 밖으로 빠져나온 긴 청은발에 달빛이 머무른다. 키가 훌쩍 자라고 로브 밖으로 드러나는 손에는 어느새 깊은 흉터가 새겨진다.

그 손이 레이븐의 안장을 붙들었다. 연보랏빛 눈동자가 가야할 길을 가늠했다.

"출발하죠."

부서진 칼날같은 낮은 목소리가 바람에 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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