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장. 일가견이 있는(2)
휘트린에 오게 되니 좋은 것이 하나.
휘트린에 오게 되어 나쁜 것이 하나.
바람 부는 곳에 잘 지어진 멋진 별장을 직접 보게 된 것은 나쁜 일이 아니었다.
정원 이곳저곳에 많은 이들의 시신이 널려 있었으나 그것 대신 별장 안에 놓여 있던 밝은 빛의 커튼과 가구들을 기억하기로 했으니 괜찮았다. 수련장의 험한 몰골 대신 혹시나 수련 중에 건물이 상해 칼리안이 다칠까봐 무조건 튼튼하게 지은 벽과 지붕을 아로새겼다. 하피의 비명 대신 다 자라지 않은 밀 줄기의 부대낌을 귀에 담았다.
그러니 별장에 간 일은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얀이 그렇게나 신경써서 준비 한 별장 덕분에 좋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게 되었다. 당연하겠지만 휘트린 때문이다. 별장에서 마주친 하피 때문에 사흘을 내리 잠들었다 일어난 뒤, 키리에로부터 청천벽력과 같은 이야기를 전해듣게 된 셈이니까.
'프레이르가 사망했다 합니다.'
'······ 누구.'
'프레이르. 그가 사망했다 합니다.'
칼리안으로 변장한 플란츠가 귀족들과 오찬을 마친 뒤 '왕자님이 가짜라는 말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피 사고를 묵인해달라'는 말을 듣고 있던 때. 그곳의 문을 발로 박차고 들어간 칼리안이 플란츠에게 망나니의 참된 자세를 가르쳐 준 이후.
'나 자던 사이에 사고가 있었어? 그런 얘기 못 들었는데, 나는.'
'최근의 일이 아닙니다. 몇 년 전에 사망한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키리에.'
키리에로부터의 보고가 전해졌었다.
'왕자님의 별장에서 사망했다던 외성 수비대 대장 말입니다.'
'망고색 머리카락?'
'네.'
'에일라가 조사중이었다가 별장 앞에서 죽은 채로 발견됐었잖아.'
'맞습니다.'
'그 사람이 왜?'
'하피 깃털을 알아봤던 이들 중 예카 에몬즈라는 남작을 소공작님과 제가 함께 조사하고 있었는데, 남작의 집을 수색하던 중에 그 죽은 외성 수비대장에 대해 나누는 대화를 듣게 됐습니다.
'뭐라고 했는데.'
'한 명은 이런 시점에 외성 수비대 대장을 왜 죽였는지를 추궁했고 다른 한 명은 해명은 했습니다. 수비대장이 프레이르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그에 대한 입막음을 하도록 지시 받았다면서요. 브리지트 경이 수비대장에 대한 조사를 멈추지 않아 불안했던 것 같다,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놈들이 일부러 네가 속도록 함정을 만든 건 아니야?'
'소공작님도 저희들을 속이려는 연극이 아닌지를 의심했습니다만 정황을 보아 그렇지는 않은 듯 했습니다. 수비대장을 살해한 것은 사전 계획에 없던 일이라며 당황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나를 만난 프레이르는 가짜라는 소리인가.'
'······ 네. 그렇습니다. 그 뒤 남작의 저택에서 꺼낸 무언가를 들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굳이 에일라를 지목해가며 에일라가 조사하는 쪽에서는 나오는 게 없을 테니 헛수고하지 말라 하더라니.'
'왕자님을 만난 '프레이르'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응. 내 조부모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 만난 혈육이라 그래도 나는 조금 반가웠는데. 어쩐지 씁쓸하네······."
'직접 뵙지도 못하고 이런 소식을 드려 죄송합니다.'
'아니야. 미리 듣는 게 낫지. 아무튼 그럼 지금 프레이르 행세를 하는 놈이 누구인지를 알아내야겠네.'
'······ 제 어머니 같습니다, 왕자님.'
생각지도 못한 이에 대한 소식.
살아있는 줄 안 이가 이미 죽었고 죽은 줄 알았던 이가 살아있었다는 사실을 동시에 알게 된 일. 그것이 휘트린에 와서 마주하게 된 나쁜 일이었다.
정말, 정말 나쁜 일이었다.
그 뒤 드미레아는 외성 수비대장의 집을 살피러 갔고 키리에가 놈들의 뒤를 쫓았다 했다. 그러나 드미레아는 별 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고 키리에는 놈들을 놓치고 말았다. 키리에의 능력이 부족해 잡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 머릿속이 복잡해 놓쳤으리라는 것을 안다.
'왕자님의 기사가 놓쳤다는 놈들 어디로 갔는지 알아냈어요.'
그래도 다행히 에일라가 마무리를 했다.
'놈들 찾았어?'
'찾아서 잡았으니까 알아냈지. 대신 한 명은 죽였어요. 대화 매너가 별로여서.'
'그래. 네가 알아서 했겠지.'
'응. 안 죽이고 남긴 한 명은 왕자님 추종자같은 그 마법사한테 넘겼어요. 증인이니까 이제 발칸에서 관리할 거예요.'
'헤르츠 경. 이름 외워두라니까. 에일라.'
'알기는 안다니까. 아무튼 예카 에몬즈라는 그 남작 집에 있던 물건을 가져다가 어디 숨겼는지 알아냈어요. 나비아 헤이즐 백작 저택이에요.'
'······그럼 휘트린이 보낸 놈들이겠네.'
'아마도 그렇겠죠. '왕자님한테 누명을 씌우려 했다'는 누명을 나비아에게 씌워놓으려 한 것 같은데. 분홍색 보석 세 개랑 가짜 편지들을 나비아 집에 숨겨뒀대요.'
'분홍색이면 설마 하피 마석인가.'
'아마도. 조사 끝났으니까 이제 그것 확인해보러 나비아 저택에 가볼 거예요. 숨겨둔 것 찾고 나비아 돌아오면 진술도 받고 그러려고.'
'그래. 그렇게 해.'
휘트린의 서재 앞에서 키리에를 기다리던 중, 이렇게 에일라와 이야기를 나눴었다.
키리에가 휘트린을 찾아 들어간 동안, 그 서재 안에서 휘트린을 만난 키리에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말과 물음을 다 삼켜내고 추모의 말을 건넬 때까지.
'마석이면 좋겠다.'
'왜. 네가 가지려고?'
'달라고 하면 주나?'
'달라고 하면 줘야지. 당연히.'
'달라고 하면, 그럼. 휘트린 영지도 주나?'
'달라고 안 할 거잖아.'
'달라고 하면. 그래도, 혹시나.'
'달라고 하면, 줘야지. 그것도.'
'왕자님.'
'응.'
'과거에 나한테 빚진 티 너무 그렇게 내지 말아요.'
'······ 티 나?'
'많이 나.'
'이런. 몰랐네.'
'나 잡아다 사형대에 올리려 했던 건 안 미안하다 하면서 나는 기억도 안 나는 일을 너무 미안해하시는 것 같네.'
'그건 네가 나한테 잘못을 했던 거고.'
'과거에는, 그럼. 왕자님이 나한테 잘못했어요?'
'했지.'
'얼마나?'
'많이.'
'내가 용서한다 하면 괜찮아지나?'
'글쎄. 어떠려나······ 모르겠어.'
'확신 생기면 말해요. 용서한다 해 줄 테니까.'
'그래······ 에일라.'
키리에가 용서를 판단할 가치조차 없다 결정한 휘트린에게 진정한 안녕을 고하던 그 때. 칼리안은 에일라에게 용서를 약속받았다.
덕분에 키리에에게 더 말을 못 하고 있었다.
키리에가 서재에서 돌아나온 뒤 함께 방으로 돌아와 변장을 풀고 나서도. 키리에, 그리고 키리에의 청으로 함께하게 된 플란츠와 식사인지 술자리인지 모를 것을 나누면서도.
누군가를 위로해주는 게 서툴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마음이 소란하여 많은 말을 하지 못했다.
키리에가 누군가에 대한 용서를 영원히 내려놓는 동안, 영원히 내려놓으려 했었던 용서의 말을 다시 듣게 된 상황이 어쩐지 우스워서. 얀 덕분에 참 좋았던 휘트린이 키리에의 일로 참 나쁜 곳이 되어버린 상황도 우스웠는데 조금 더 우스운 일이 생겨버려서. 그 우스운 것들 때문에 얀에게도 키리에에게도 괜스런 미안함이 들어서.
그것 참.
그저 살아갈 뿐인데 어찌나 이렇게 모난 곳이 많은지.
- 또 나예요.
그렇게 잠시 어찌할 바 없이 침잠하고 있으려니 에일라가 다시 칼리안을 찾았다.
- 오늘 왕자님 여러 번 찾네.
- 응, 에일라. 얘기 해.
- 바빠요?
- 아니. 형님이랑 키리에랑 같이 술 마시고 있어.
- 와. 나만 열심히 일하나봐.
- 마석 줬잖아, 대신.
- 하나만 줬잖아.
- 나머지는 발칸에 넘겨서 증거 삼아야지.
- 그래요. 아무튼, 나비아 죽을 뻔했어요.
그러더니 풀잎에 통통 내려앉는 이슬 같은 목소리로 이렇게, 침잠하던 칼리안이 깜짝 놀라 숨을 몰아쉴 만한 말을 전했다.
- 뭐?
- 나비아 진술 다 듣고 들으려는데 귀 뾰족한 엘프 자객이 찾아왔어. 나비아 말로는 영지민이 아니고 '숲'에서 보낸 놈 같다네요.
- 다친 곳은. 없어?
- 나비아? 나? 세이렌 경? 하긴, 나겠지. 나 괜찮아요. 세이렌 경이랑 나비아도요. 아, 세이렌 경은 잠깐 도와주겠다 해서 같이 있었고요.
- 놈들은.
- 놈들 아니고 놈. 한 명이 창문으로 갑자기 뛰어들어서는 나비아한테 화살 두 발 쏘고 곧바로 반대편 창문으로 뛰어나가 사라졌어요.
- 세이렌 경이 있었는데 하나를 못 잡았다는 소리야?
- 왕자님만큼 빨랐어. 나랑 세이렌 경이 화살 하나씩 막았을 땐 이미 없었어요. 저택 뒤쪽 숲에 길을 열었던 것 같아.
- 다누가 손을 댔나.
- 아마도요. 숲의 길은 다누가 열 테니까.
- ······ 그래.
- 어쨌든 중요한 건 마석이에요.
- 마석은 왜.
- 그 놈이 훔쳐갔어. 찾아다 줘요. 나를 주든 증거를 삼든, 돌려받아야 해.
그것 참.
그저 살아갈 뿐인데 어찌나 이렇게 다사다난한지.
그래도 어쩌겠나. 하피 마석을 그렇게 가지고 싶어하다 뺏겼다는데 찾아가서 잘 돌려받아다 에일라에게 하나 줘야지.
겸사겸사 다누도 좀 보고.
* * *
플란츠의 심기가 매우 불편해졌다.
덕분에 칼리안이 매우 난처해졌다.
"왜."
플란츠가 짧게 물었다.
칼리안이 긴 숨을 들이쉰 뒤 이제껏 한 얘기를 속사포같은 속도로 다시 전했다.
"휘트린 일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고, 지금 다누를 찾아가는 건 형님한테 위험합니다. 누가 알아보든 말든 명분 상으로나마 휘트린에도 제가 계속 머물러야 하고, 지금 다누를 찾아가는 건 형님한테 위험합니다. 나비아를 공격하도록 사주한 놈이 휘트린인지 다른 누구인지 알아낼 똑똑한 사람이 필요하고, 지금 다누를 찾아가는 건 형님한테 위험합니다. 여기 남아서 발칸 지휘 할 사람도 있어야 하고, 지금 다누를 찾아가는 건,"
"짖는 내용 빼고 제대로. 짧게 말해."
"네. 지금 다누를 찾아가는 건 형님한테 위험합니다."
"그래서."
"제가 다누한테 화풀이를 했다던 그 때에 사실 저는 형님이랑 계속 휘트린에 있었다는 핑계를 대야 할 것 같으니 형님이 여기서 형님이랑 제 노릇 적당히 번갈아가면서 해주시면 됩니다. 형님 그 똑똑한 머리로 휘트린의 일도 마무리 짓고 나비아 죽인 놈도 찾아내면서 계시면, 저는 잠깐만 예전 모습으로 나가서 다누 만나고 오겠습니다."
칼리안이 나무를 만나러 가자고 키리에에게 말했다.
문제는 그것이 었다.
칼리안은 플란츠에게까지 가자 하지는 않았다.
어지간히 위험한 곳은 데리고 가겠으나 다누만은 안 되겠단다. 이번에는 플란츠 고집에 절대 꺾여 줄 생각이 없단다. 그러면서 플란츠가 여기 있어야 할 이런저런 이유를 가져다 붙여놓고 있으니 플란츠가 짜증이 나겠나, 안 나겠나.
다른 이유들은 결국 다 명분임을 안다.
칼리안이 다누에게 화를 좀 내는 동안 '사실 그 시간에 진짜 칼리안은 휘트린에 있었다'는 해명을 할 필요가 없지 않나. 카이리스의 왕자가 저를 건드린 다누에게 앞뒤 안 가리고 화를 좀 내겠다는데 그것을 두고 도대체 누가 불만을 보일까. 르메인이든 앨런이든 행여 칼리안이 다누에게 다치지는 않을까 걱정할지는 몰라도 다누에게 해코지 한 것을 두고 무어라 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핑계 대지 말지."
"핑계 아닙니다. 아무튼 형님이 제 흉내 내는 것을 적당히 들켜도 제가 인정하지 않으면 되니까 저처럼 곱게 웃느라 너무 애쓰지는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고기 싫으면 그것도 안 드셔도 괜찮고요. 아니면 아예 식사 때는 형님 모습으로만 다니시던가요. 좋아하시는 풀 많이많이 드시면서 란델 형님이랑 파릇파릇하게 잘 지내고 계십시오. 란델 형님이랑 싸움 나면 얀 통해서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편 들어드릴게요."
"길게 짖네."
내 동생 이제 하울링도 하네.
기특해서 돌아버리겠는데.
"안전해지면요. 저한테도 다누가 날을 세우는 것 같은데 형님이랑 란델 형님 모시고 어떻게 갑니까. 그러니까, 안전해지면요. 바다가 보고 싶으시면 영지 시찰 마치고 세크리티아에 가요. 란델 형님이랑 다 같이 가서 구경하고 오면 되잖습니까."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까봐 같이 가겠다는 거잖아."
"사고 많이 안 칠 겁니다. 제 영지 관리인이 습격을 받았으니 범인이랑 훔쳐간 마석만 돌려달라 하고 인도받아 올 겁니다. 사실상 다누를 만나겠다는 것도 아니고 대장로 나르잔을 만나러 가는 거니까요. 다누가 거부하면 저도 다누를 만날 방법 없습니다."
한참 뒤, 플란츠가 큰 결심을 했다는 듯 말했다.
"······ 알았어."
"혹시 또 몰래 나오거나 따라오지는······."
"대신."
"네."
"헤르츠 경. 데려가."
"헤르츠 경은 왜······."
"오러 서툴잖아. 걱정되니까 데려가라고."
순순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수긍한 듯한 플란츠의 태도에 아주 조금 찝찝해하던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사실 혼자 다녀오려 했었다.
다누가 칼리안이 엇나가는 양을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아 하고 있지만 그렇다 해서 죽이려 드는 것도 아니지 않나. 때문에 마석 잃어버린 것을 핑계 삼아 다누와 한바탕 또 대거리를 벌여볼까 했었다.
그러다 키리에를 위해 키리에를 데려가기로 마음을 바꾼 터였다. 엘프들을 만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휘트린이 있는 곳에 키리에를 두고 가는 것보다는 마음을 좀 환기시키는 편이 낫겠다 싶어서였다. 다녀오는 동안 키리에의 검술을 작정하고 보아줄 수도 있는데다 다누는 키리에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을 테니까.
그런데 아르센을 데려가란다.
키리에가 아직 오러를 잘 다루지 못해 걱정된다면서.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잠시 생각을 해보던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오나와 세이렌 경도 있고, 별장의 일을 누가 꾸몄는지 완전하게 확인될 때까지는 드미레아도 여기에 있을 테니까. 헤르츠 경은 데리고 다녀을게요. "
"알았어."
끄덕끄덕.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날 밤.
- 슈우우욱······!
아르센의 방에 무색 무취의 연기가 새어 들어갔다.
누군가 방으로 다가오는 것은 느꼈으나 밖에 있던 대원들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발칸의 다른 대원이겠거니, 칼리안은 아무 기척을 내지 않으니까 대원들이 아니라면 에우리아겠거니. 그런 생각에 별다른 경계를 하지 않은 아르센이 한 발을 디뎠다.
- ······ 피잉!
그런데 그 순간, 눈 앞이 아득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르센의 새파란 눈이 서슬을 담은 것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이거······ 설마."
그래.
수면향이다.
보다 길게 설명한다면······.
에우리아가 지닌, '휘트린에게 수면향 제조법을 얻어냈던 에우리아가 그것을 만드는 방법을 히나에게 가르치기 전에 제 능력이 닿는대로 일단 한 번 대충 만들어 본 시험용 수면향 및 해약'과 '곧 발칸의 소유가 될 두 개의 최상급 마석 중 한 개'를 맞바꾸는 좋은 거래를 마친 완두콩이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에게 건네는 진심어린 선물이었다.
물론 히나의 힘이 제외된 만큼 소드마스터를 재울 정도의 효과는 없었으나,
- 핑글!
그것을 딱 한 번 들이마심과 동시에 실드를 두른 민첩한 마법사의 정신을 침범할 만큼은 되는 그런 선물이다.
천장이 빙글 돈다.
바닥이 울렁거린다.
벽을 붙들고 눈에 힘을 주며 앞을 노려보던 아르센이 입술을 악물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천장과 바닥이 소용돌이치는 것을 느끼다 결국에는 몸을 허물어뜨리고 말았다.
악다구니가 절로 새어나온다.
"······ 늑대새끼같은······ 저하 새······!"
- 쿠웅!
하릴없이 수면향에 깊이 취한 아르센이 이렇다 할 반항도 못한 채 널브러졌다. 그리고 더 버티지 못하고 깊은 단잠에 빠져들었다.
밖에서 그 울림을 들은 플란츠가 갈 사람 갔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귀빈실 구역의 복도를 지키고 서있던 두 명의 대원이 걱정어린 눈으로 플란츠를 쳐다봤다.
"부군단장님. 정말 이래도 괜찮은 것 맞습니까?"
"괜찮아."
안네가 무서워하는 노란 머리 마법사, 그리고 오카리나 연주를 곧잘 하는 회색 머리 기사. 그 둘의 별명과 이름과 다른 습관들과 출신지역 및 가족관계, 카이리시스에서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까지 줄줄 읊어주는 것으로 '나는 진짜 부군단장이 맞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 플란츠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함께 서 있던, 윗층에 거주하는 금발머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준비하고 나오겠습니다."
"좋을대로 하거라."
나오든 말든 별반 관심없을 5층 거주인이 대답했고 플란츠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꿀꺽 삼켰다. 수면향의 해약이었다.
- 사아아·····.
곧바로 팔찌의 힘이 움직인다.
플란츠의 키가 손가락 두 마디 쯤 자랐다. 눈매가 훨씬 날카롭게 바뀌었다. 입술이 조금 얇아지고 목젖이 좀 더 튀어나왔다. 손가락의 마디 뼈가 들어간 대신 손등의 핏줄이 툭툭 올라왔다.
연두색의 눈에 한 겨울의 쾌청한 하늘이 담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옅은 에메랄드 빛의 가느다란 머리가 새파랗게 변하며 길게 자라났다.
- 스르륵······ 터억!
바닥에 널브러져 그대로 잠들어버린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의 몸 위에 이불을 끌어다 대충 덮어 준 플란츠가 주섬주섬, 아르센의 짐 속에서 적당한 옷을 꺼내 갈아입었다. 플란츠의 것보다 조금 더 큰 가죽 부츠도 하나 찾아 꿰어 신었다.
그러다 문제가 하나 생겼다.
플란츠가 입는 발칸의 기사 제복은 로브가 아닌 갑옷이었던 까닭에 아르센의 로브 제복이 필요해진 것이다. 그러나 아르센의 짐을 아무리 뒤져도 여분을 찾지 못했다.
"하."
어쩔 수 없이 팔을 뻗은 플란츠가 아르센이 옷 위에 걸치고 있던 로브를 뺏었다. 그렇게 얻어낸 새하얀 로브에 클린을 세 번 쯤 건 뒤 잘 여며 입었다.
그리고 서둘러 밖으로 나와 칼리안이 향했을 곳으로 발을 옮겼다. 물론 란델도 함께.
란델을 데려가는 이유는 별 것 없었다.
란델과 약속하지 않았나. 바다에 데려다 주겠다고. 갑작스레 일정이 좀 바뀌었다 해서 안 그래도 책 잡히기 싫은 저 윗층 사람에게 '약속 어겼다'는 말까지 듣고 싶지는 않아서 란델을 불러 냈다.
'대장로 나르잔과 하실 이야기가 있을 겁니다.'
'글쎄. 생각나는 것이 없다만.'
'······ 형님 텐실에 가겠다 하셨지 않습니까. 가뭄에 열풍까지 잦은 곳에서 장미를 어떻게 키웁니까. 다누의 힘이라도 필요할 테니 대장로와 얘기 나눠 보십시오.'
'그런 명분을 만들면서까지 나를 귀찮게 하는 것이더냐.'
'좋아서 모셔가는 것 아닙니다.'
'그나마 다행이구나.'
이렇게, 칼리안을 만나러 나가려던 '아르센'이 '장래의 텐실을 위해 나르잔과 이야기를 좀 해보겠다 나선 기특한 첫째 왕자'를 대동하게 된 적당한 이유도 하나 만들어 쥐여줬다. 칼리안이 다누의 미움을 톡톡히 받고 있는 플란츠의 동행은 허락하지 않겠지만 다누와 특별한 관련이 없을 뿐더러 바다를 궁금해하는 란델까지 거절하지는 못할 테니 말이다.
아르센의 흉내를 내는 것은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생글생글, 칼리안 흉내를 하도 많이 내 봐서 이제 누구 흉내를 내는 일에도 일가견이 생겼다.
- ······저벅.
찬 바닥에 누운 채 아침을 맞이하게 될 아르센 걱정은 안 했다. 이불 덮어 줬으니까. 거기에 더해 또 하나, 아직 성능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으니 함부로 쓰면 자칫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에우리아가 말했었지만.
- 저벅, 저벅!
그래도 아르센이니까.
곧죽어도 내 손에는 안 죽을 거다.
주변 경계를 소홀히 해서 수면향 따위에 당한 따까리에게 실망해버린 내 동생 손에 죽겠지.
······ 죽든지 말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