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장. 일가견이 있는(1)
휘트린의 밀은 여름에 영근다.
끝을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너른 밀밭에서 통통하게 살이 오른 밀을 보고있으면 절로 평안한 마음이 든다 했었다. 그 드넓은 땅이 온통 황금빛으로 너울거리는 광경에는 하염없는 감탄만 쏟아내게 된다 했었다.
- 탁!
그러든지 말든지.
여하간 지금은 4월이다.
멀리 하느작거리는 저 녹색 풀들이 밀인지 보리인지 잡초인지 이 자리에 앉아 구분해 낼 재간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는 이에게 있어서는 그냥 눈이 좀 편안한 광경일 뿐이라는 소리다.
"여기 히몰리카는 좀 맹맹하네."
화려한 대리석 테이블 앞에 앉아 빈 술잔을 다시 채우던 에우리아가 툴툴거렸다. 그러자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에일라가 가볍게 발을 옮기며 답했다.
"그래요? 나는 아직 안 마셔 봤는데."
"어. 내 입맛에는 별로 안 맞아."
앞으로 칼리안의 정보 조직을 담당하게 될 에일라와 이제까지 담당해왔던 에우리아의 성격 차이가 상당했다. 아무리 세크리티아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 지냈고 업무의 인수인계를 위해 또 여러 번 마주쳤다지만 그런 것만으로 친분을 다지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에일라는 사람을 잘 사귀지 않고, 반대로 에우리아는 사람을 잘 가리지 않으니까.
그럼에도 둘이 그럭저럭 친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던 것은 '믿음직스럽지 않은 놈들을 다 죽이는 것으로 신뢰를 보장받는' 에일라나 '사람을 죽이는 취미는 없지만 사람을 살려두는 버릇도 없는' 에우리아나 서로 비슷한 면이 꽤 많은 까닭이었다.
"술 만들 때 밀을 많이 넣는다더니 그래서 그런가. 나한테는 카이리시스 히몰리카가 더 나은것 같아. 뭐, 할머니 영지에서 만든 술처럼 끔찍한 맛은 아니지만."
"여기 뜨려면 좀 더 있어야 할 텐데 애석하네요."
"애석하기는. 너 어차피 술 싫어하잖아."
"술이 아니라 술 냄새가 싫은 거지. 그래도 세레누스는 좋아해요. 향기가 마음에 들어."
"카이리스에서는 구하기도 어려운 술인데, 그거."
"왕자님이나 당신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돈 많으니까요. 못 구할 것도 없지."
"취향 한 번 비싸기는."
눈에 잘 띄지도 않을 만큼 웃은 에일라가 긴 다리를 뻗었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앉은 채로 잠들어 있던 누군가의 정강이를 툭툭 차며 입을 열었다.
"비싼 것 좋아해야죠. 왕자님이 나 비싸고 귀한 것만 가지라고 돈 주시는 거잖아."
"일 잘하라고 주시는거지."
"일이야 늘 잘하니까."
그거 아끼면 누가 칭찬해주나.
싼 것 마신다고 또 한 소리 듣기나 하지.
바람에 부푼 깃털같은 목소리가 나른하게 울린다.
"그래. 아껴서 뭐 하나. 입에 맞는 술이 더 중요하지."
에우리아가 이렇게 중얼거리며 팔을 뻗었다. 그리고 이 저택에서 두 번째로 비싸 보였던 또 한 병의 히몰리카를 열었다.
퐁, 하고.
코르크 마개가 뽑히는 작은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놓치지 않은 에일라의 시선이 뒤를 향했다. 어느새 말끔히 비워진 히몰리카 병, 안주로 삼겠다며 찾아다 놓은 듯한 말린 살구, 그리고 방금 뚜껑을 연 새로운 술병이 눈에 들어왔다.
"구경 그만하고 이거나 좀 깨워줘요. 어떻게 재웠길래 일어나질 않아."
"나 무보수야. 시켜먹지 말고 알아서 깨워."
"한 병 더 뜯은 것 봤어요."
"······ 언제 봤대."
에우리아가 다시 툴툴거렸다.
조금 전, 란델을 호위하던 에우리아가 아르센과 교대를 했다. 맡은 바 업무가 끝났으면 방에 돌아가 쉬면 될 일인데 문제는 창 밖이 지나치게 밝다는 데에 있었다. 아직 저녁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던 것이다.
날은 화창하고 바람은 불어들고. 이 좋은 날에 방안에 틀어박혀 잠이나 자려니 심심하고 답답해지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나. 때문에 에우리아는 영주성 밖으로 혼자 나왔다. 그 뒤 일찌감치 문을 연 술집이 있나 두리번거리다 업무 중인 에일라를 마주쳤다.
'여기서 뭐 해.'
'일 하죠.'
'아직도 정보 캐고 다녀?'
'정보는 다 캤고 진술 받으러 가요.'
말이 좋아 진술이다. 지독한 세크리티아 사람이 뒤 구린 놈의 입을 여는 과정이 얼마나 화끈할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뻔한 일 아닌가.
이런 기대감에 부푼 에우리아가 반색하며 나섰다.
'같이 가지.'
'도와줄 거면 같이 가고 방해할 거면 말아요.'
'도와줄게. 마법 한 번에 술 한 병.'
'비싸. 다섯 번에 한 병.'
'내 마법 비싼 거야. 세 번.'
'먼저 데려가라 했으면서. 아무튼 좋아요. 세 번에 한 병.'
사전 계획 없던 외근에 대한 계약도 이렇게 꼼꼼하게 마쳤다. 물론 저택의 주인이므로 저택에 있는 술의 주인이기도 할 저택의 가주는 계약 조건에 대해 단 한 마디의 의견도 내지 못했지만.
- 파지직!
그렇게 해서 얻게 된 세 번의 마법.
저택 바닥에 물을 흘리는 것에 한 번, 그 물에 전기를 풀어 함께 있던 하인들과 저택 주인을 재우는 것에 또 한 번, 그리고 에일라가 요청한 마법을 부려주는 것에 마지막 한 번.
그렇게 해서 에우리아는 저택의 술 한 병을 얻었고 에일라는 꽤 수월하게 '진술 받기'를 시작하게 되었으니 둘 모두 밑지는 장사는 안 한 셈이다. 물론 진술은 진술대로 하고 술은 술대로 잃게 될 저택 주인은 아직까지도 단 한 마디의 의견을 내지 못하고 있었지만.
- 촤아악!
온 몸이 꽁꽁 묶인 채 기절해 있던 이의 머리 위에 거대한 물방울 하나가 맺히는가 싶더니 시원스런 소리를 내며 쏟아졌다.
애석하게도 이번에는 젖은 몸을 말려 줄 순한 왕세자가 이 자리에 없던 터라, 물에 푹 빠진 생쥐 꼴이 된 채 깊은 잠에서 깬 놈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더니 익숙한 얼굴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곤 입을 벙긋거렸다.
"······!"
그러나 목소리가 나오진 않았다.
정확히는, 그 목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오질 않았다. 놈 주변에 사일런트 막을 둘러 소리가 새어나오지 않게 한 까닭이다. 에일라가 요청했던 마지막 마법이었다.
- 또각, 또각.
물이 튀지 않을 만큼 멀찍이 떨어져 있던 에일라가 놈의 앞으로 걸어갔다. 계란만한 크기의 분홍색 돌 하나와 두터운 종이 뭉치를 손에 쥔 채였다.
그 사이 놈은 몇 번을 더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다 자신의 소리가 밖으로 나가지 않음을 알고 미간을 찌푸렸다.
"시끄러운 것 싫어해요. 정답 말할 준비가 되면 고개만 끄덕여요. 그럼 들어줄게. 너무 긴장하지 말고요."
반짝-!
걸음걸이마다 흔들리는 비녀 장식이 마법 등불을 반사했다. 그와 함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피가 세마리 나왔어요. 그건 알테니까 설명 안 할게요. 그런데 셋 다 마석은 없고 심장 속에 이상한 돌만 들어있어서 내가 조금 실망했었어요."
놈이 무언가 말을 했다. 그러나 고개를 끄덕인 것이 아니었으므로 에일라는 에우리아에게 사일런트 막을 치워달라 부탁하는 대신 이야기를 계속했다.
"하피들을 다 잡고 나서 생각해보니까 조금 이상한 거야.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하피가 저급 마력탄 수준이기는 해도 마법을 쓸 줄 알고 수 틀리면 저주할 줄도 안다 했었는데 왕자님이랑 소공작님이 잡은 애들은 안 그랬거든요. 마법을 흡수해서 반사하기는 했는데 직접 마법을 쓰지는 않았으니까. 그게 왜일까, 했는데······ 이게 없어서 그런 거더라."
다시 반짝, 빛이 반사됐다.
그러나 이번에는 비녀에 달린 보석이 아니라 그 손에 들린 분홍색 돌에서 반사된 것이었다. 에일라가 놈의 앞에 분홍색 돌을 들어보인 까닭이다.
"뭐야."
그것을 본 에우리아의 눈이 번뜩였다. 입으로 가져가던 술잔도 내려놓고 에일라의 손에 올려진 것을 쳐다보던 에우리아가 말했다.
"그게 있는 줄 알았으면 술 말고 그거 달라 할 걸 그랬네."
"이거 달라고 했으면 당신 데리고 안왔죠."
"싸게 안 파나? 지인 할인 같은 것."
"못 팔아요."
"그럼 비싸게 파나?"
"안돼요. 내 거 아니고 왕자님 거야."
"아. 아쉽네."
에우리아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술잔을 들어을렸다.
관심을 가질 만 하다.
계란만한 대형 사이즈, 흠결도 하나 없고 탁한 빛도 전혀 없는 영통한 분홍 빛의 투명한 돌.
상급, 아니. 최상급 마석을 눈 앞에 둔 마법사가 이 정도로 물러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일이다. 물론 칼리안이 언급된 이상 물러나지 않을 방법도 없겠지만.
"하피 심장 속에 마석이 없었으니까 마법을 못 부리지. 그 돌을 심장에 박은 사람들은 마법이든 치유력이든 잘 쓰던데 몬스터한테는 안 통했나봐요."
고개를 돌린 에일라가 자리에 앉은 놈을 향해 다시 말을 건넸다.
"참 잔인하네요. 하피 심장에서 마석만 빼내고 마석 대신 기분 나쁜 돌을 넣어주는 것도 못 볼 꼴인데 그걸 데려다 왕자님 앞에 풀어놓고 죽게 만들고. 그래도 뭐, 내가 하피 보호자는 아니니까 그건 그냥 그렇다 칠게요. 중요한 건 하피 심장에 든 걸 누가 바꿔치기했다는 게 아니라 바꿔치기한 마석이 어디서 나왔는지. 그거니까."
붙들려 있던 놈이 또 한 번 입을 열며 몸을 틀었다.
"당신 저택에서 나왔어요."
그러나 무덤덤한 얼굴로 서 있던 에일라의 목소리에 이내 잠잠해졌다.
"나는 영주성만 떠올리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까 당신 영주가 아니라 영주 대리인이잖아. 영주성 말고 당신 저택이 따로 있는 걸 진작 떠올렸으면 일이 빨랐을 걸. 그래도 너무 늦지 않게 찾아가긴 했어요. 거기에서 하피 마석이랑 이런 편지들을 찾았거든. 여기 저기 잘 숨겨둬서 찾느라 애 먹었어요, 나."
- 팔락, 팔락!
마석을 말아쥔 에일라가 다른 손에 들려 있던 종이 뭉치를 한 장씩 뒤집어봤다. 조곤조곤 귀에 쏙쏙 들어오는 목소리가 묶여있던 놈의 귀에도 쏙쏙 주입됐다.
"쭉 읽어봤는데 재밌는 내용이 적혀있더라고요. 숲의 길을 통해 왕궁에다 하피를 풀어놓으려 했다. 하프엘프인데다 비밀도 많은 3왕자님이 다누와 손을 잡고서. 뿐만 아니라 그 왕자님은 제온과도 연을 맺었다······ 라고 누명을 씌울 계획을 꾸몄네요."
- 탁!
이미 다 살펴보기를 마친 편지들을 멀찍이 집어던진 에일라가 종아리에 매어 둔 단검을 꺼내들었다.
"이게 제대로 실행됐으면 3왕자님을 광장에 세울 수 있었겠어요. 휘트린은 당연히 사라질 테고 엘프들은 카이리스에서 쫓겨날 것 뻔하고, 카이리스는 제온을 상대로 곧장 전쟁부터 시작해야 되겠네."
다시 한 발자국, 꽁꽁 묶여있던 영지 관리인 나비아의 앞으로 걸어가서는 그의 무릎 위를 단검 끝으로 툭툭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그쵸."
- 덜컹, 덜컹!
나비아가 다시 말을 했다.
그러나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때문에 사일런트 막을 계속 내버려 둔 에일라만 목소리를 또 낭비하게 되었다.
"이건 왕자님도, 당신들도, 다누도, 제온도, 전부 다 곤란해지는 계획이에요. 이 일로 이득 볼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굳이 찾자면 그레이 브리센 정도려나."
- 또각, 또각.
에일라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비아의 주변을 빙 돌듯 느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레이 브리센은 제온이 뭔지도 모르잖아. 그럼 누굴까······."
"텐실."
무뚝뚝한 목소리의 정답이 들려왔다. 에일라가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나온 쪽을 쳐다봤다. 저도 모르게 끼어든 에우리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어. 방해해서 미안. 텐실 놈들을 별로 안 좋아해서, 나도 모르게."
"괜찮아요. 나도 싫어해."
가볍게 답한 에일라가 나비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에일라의 목소리가 움찔 놀라는 나비아를 향했다.
"데블란 때문에 엘프들은 세크리티아와 관계가 안좋았죠. 다누 없어도 사는 데 문제 없는 리베른에서 인성없는 엘프들을 호의적으로 대해 줄 이유가 없고. 카이리스랑도 관계가 틀어지게 되면 엘프들이 갈 만한 곳은 텐실 밖에 없겠어. 대사막에 가자니 실레스티안이 다누 싫어하잖아. 아무튼 이렇게 되면 텐실은 다누의 힘을 얻게 될 테니 좋은 일이고, 겸사겸사 우리 왕자님도 처리할 수 있고. 제온이야 뭐. 어떻게 되든 말든."
툭툭.
나비아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길고 긴 사전 설명을 마친 에일라가 본론을 꺼냈다.
"우리 왕자님 알맹이가 다른 사람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하던데. 그 말을 믿었다 쳐도 휘트린 영지 전체를 다 날려먹으면서 엉뚱하게 텐실만 이득을 보게 되는 이런 계획을 당신이 짰을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럼 누굴까, 난 그게 궁금한데. 설명해줄 수 있겠어요?"
나비아의 고개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자칫하면 칼리안에게 역모의 누명을 씌우려 한 죄로 당장 목이 날아갈 판임에도.
그런 나비아를 보던 에일라가 다시 한 번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와 함 께 에일라의 손에 들려 있던 단검이 거침 없이 음직였다.
- 사악······!
소름끼치는 감각이 나비아의 목을 스친다.
또르륵, 가는 핏줄기가 목을 타고 흘러 내린다.
소스라치게 놀란 나비아가 뒤에 서 있던 에일라를 향해 고개를 돌리려 했다. 그러나 나비아 쪽으로 살짝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인 에일라의 목소리가 그 행동을 막았다.
"아니면, 휘트린과 라시드 브리센이 내 주인에게 무슨 짓을 하려 했는지. 그것도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새끼가 또 있는지······, 그런 건 설명해줄 수 있으려나."
작은 새의 속삭임이 피 비린내 속에 섞여든다.
천천히, 나비아의 고개가 위 아래로 움직였다.
* * *
술잔이 놓였다.
쉬이 받아들이기 힘들 사실 하나를 알게 된 기사, 지상의 나락같던 곳에서 그 기사와 기사의 동생을 구해 이제껏 보살펴 준 왕자, 그리고 나는 여기 왜 있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왕세자의 앞에 각각 하나씩의 술잔이 놓였다.
"하고싶은 말 많았습니다."
"응. "
"제온의 전사들을 다 죽여놓은 것을 헤르츠 경이 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말이 생각나서 정말로 하고싶은 말이 많았습니다. 원망도 하고 싶고 비난도 하고 싶고."
"그래. 많았을 거야."
"그런데 굳이 안 해도 될 것 같아서 말 안했습니다."
- 쪼르륵.
이 자리에 플란츠도 함께 부르자 했던 키리에가 제 잔을 먼저 채웠다. 그리고 그 사이 싹 비게 된 플란츠의 잔에 새 술을 담아 줬다.
휘트린에게 내뱉고 싶던 말들을 플란츠가 이미 한 까닭에 이미 죽은 이를 더 오래 볼 것 없이 다시 나왔다 생각하면서.
"감사합니다."
"왜."
"신경써주신 것 압니다."
솔직히 나는 너 말고 네 동생 때문에 입이 트였다는 말을 하면 큰일 날 것 같아서. 제 삶을 다 망쳐놓은 브리센인데, 그 브리센의 핏줄과 제 딸이 정혼했다는 말에도 무신경했던 모습에 이성이 끊긴 것이지 네 걱정은 별로 안 했다는 말을 하면 휘트린에 파릇파릇한 새 무덤 하나가 생길 것 같아서.
날고 기는 소드마스터와, 그런 소드마스터보다 더 위험하다던 '아직 오러를 제대로 못 다루는 예비 소드마스터' 앞에서는 입을 좀 많이 조심해야 하지 않겠나.
"······ 별로."
때문에 얌전히 이렇게만 대답한 플란츠가 술잔을 들었다.
그것을 대답으로 잘 알아들은 키리에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누굴 위로하는 법은 잘 몰라서 제대로 말도 안하고 있는 칼리안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솔직히 저는 하고싶은 말보다 묻고 싶은 게 더 많았습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죽은 줄 알고 복수하겠다 살아온 내 시간은 뭐가 되느냐고, 차라리 조용히 사라지지 당신 묻히는 모습까지 내 앞에 보여놓고 무슨 낯으로 살아있느냐 묻고 싶었습니다."
"응······. 이해해."
"히나······ 당신 때문에 히나를 영영 잃어버리고 살 뻔했는데······ 그런 줄을 알기는 하시느냐 묻고 싶었습니다."
술잔으로 향하던 칼리안의 가느다란 손이 멈칫했다.
과거의 히나에 대해 단 한 마디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아니. 그 도박장에서 히나를 알아보지 못했던 칼리안을 떠올리고 다 눈치를 챘나 보다. 히나가 어찌 됐는지 이미 알고 있었나보다.
"······ 내 주변엔 왜 이렇게 눈치 빠른 사람들만 있나."
키리에의 말에 할 수 있는 한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씁쓸한 목소리를 냈다. 휘트린의 히몰리카가 영 맹맹한 맛이 나서 마음에 들지 않나보다 했었는데 그게 아니라 술 맛이 하도 써서 그랬나보다.
"너한테 거짓말을 해줄 걸 그랬지."
"히나 잘 지냈다고 말씀이십니까."
"응."
과거의 히나는 세크리티아의 브리지트 숲이 잘 보이는 곳에 지어진 작은 집에서 강아지도 키우고 새도 키우며 잘 지냈노라고. 겨울이 되면 중간중간 코가 빠진 하얀 털 목도리 하나씩을 만들어 왕궁에 보내줬었다고. 그치만 기르는 강아지가 너무 많아서 집을 비우고 왕궁으로 놀러오진 못했다고. 그래서 히나에게 치유력이 있는 것도 모르고 히나가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줄도 모르고 히나의 얼굴도 잘 몰랐다고.
브리지트 숲은 카이리스에서 세크레타로 오는 길목과 멀리 떨어져 있었으니, 마지막이 오는 그 순간까지 히나는 전쟁이 난 줄도 몰랐을 거라고······ 그러니 편안했으리라고.
그런 거짓말을 해줄 걸.
"한 사람이 저문 것을 어떻게 없앱니까. 거짓말 못하셔서가 아니라 거짓말을 못 하겠어서 안 하신 것 압니다."
이 와중에 속깊은 소리를 하고 있다. 피식 웃은 칼리안이 키리에의 잔에 술을 채웠다.
"미안. 더 화를 낼걸."
"그랬으면 화 내서 미안하다 하셨을 겁니다."
"그런가."
"네."
다시 주거니 받거니.
더 이상의 말 없이 한동안 술을 주고 받던 칼리안이 잠시 고개를 숙였다. 손목의 팔찌에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용히 눈을 감고 누군가와 말을 나누던 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뭔데."
여지없는 플란츠의 질문이 들려온다. 칼리안이 웃는 소리를 냈다.
"속상해할 시간을 안주네요."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키리에를 보며 입을 열었다.
"나무 만나러 가자. 키리에."
그것 참 마음에 드는 소리다.
키리에와 플란츠가 똑같이 입꼬리를 끌어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