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66화 (467/527)

제82장. 알고 보면 순한(5)

권하는대로 자리에 앉았다.

플란츠는 앉지 않았으나 칼리안은 순순히 앉았다. 양 손의 손가락을 얽어 깍지를 꼈다. 그 손을 무릎 위에 가만히 얹은 채로, 마른 바람같은 목소리를 냈다.

"시간의 축 말입니까."

"네. 왕자님. 그것을 가지고 계십니까."

"당신 자식 얘기 하고 있었는데, 나는."

"보다 중요한 이야기를 드리는 겁니다."

칼리안 입을 꾹 다물었다 뗐다. 혹여 달려들거나 목을 으스러뜨리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자리에도 앉고 손도 다물려 두었는데 이제는 욕을 할까봐 남은 인내를 다 끌어모았다.

"키리에를 데려오지 말 걸."

오러를 냈으니 왕궁 안에서 테일란이나 슬레이만과 대련하며 오러 다루는 법이나 익히라 할 걸. 무슨 욕심으로 검술을 직접 봐주겠다고 굳이 이렇게 데려왔을까. 데려왔으면 얌전히 검이나 휘두르게 할 것을, 왜 굳이 정보를 캐오라 해서 괜한 말을 훔쳐듣게 했을까. 후회가 사무친다.

······ 그랬는데.

"엘프도 짖는군."

대뜸 플란츠가 이런 말을 했다.

때문에 칼리안의 고운 얼굴이 확 찌푸려 졌다.

형님 너 지금 나랑 저 엘프를 같은 취급 하신 거냐고. 왜 쟤한테도 짖는다 하시냐고. 비할 게 따로 있지 저 엘프한테 어떻게 짖는다는 말을 하실 수 있냐고. 형님 드신 샐러드 레이븐한테 준 게 그렇게 싫으셨느냐고. 그래서 이러시는 거냐고.

그 큰 눈에 대문짝만한 억울함을 담은 채 플란츠를 쳐다봤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럴싸한 욕지거리를 하나 쯤 알려줄 걸 그랬다. 나한테만 써먹을 줄 알고 안 가르쳐 놨는데 똑같은 말을 가지고 여기저기 돌려막기 할 줄 알았으면 심한 말 하나만 알려줄 걸 그랬다.

"제가 힐난을 받을 이유 없습니다."

그런 칼리안의 귀에 휘트린의 말이 다시 들려왔다.

"저는 더 중요한 쪽을 택하고 다른 쪽을 놓았을 뿐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든 이유를 설명하고 용서받을 생각 역시 없습니다. 그러니 비난받을 이유도 없습니다."

"키리에와 히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 재밌네."

변명이 나오길 바라지 않았다. 해명도 필요하지 않다 생각했다.

적어도 칼리안은 그랬다. 살아있었음을 확인했으니 그냥, 설명이 듣고 싶었다.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칼리안의 손이 닿지 못했을 동안 왜 그런 일을 벌였는지. 정말 브리센 때문인지. 단지 그 뿐인지.

그런데 엉뚱한 말이 들려왔다.

시간의 축을 물었다.

그래. 인간이 아니니까. 엘프들은 분명 사고방식이 달랐지 않나. 모든 엘프가 다누 하나를 어머니라 여기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엘프라고는 저 혼자 뿐인 대사막에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아 온 시오나와는 분명 많은 것이 다를 테니 그럴 수 있다고 여겼다. 여기려 했다.

"차라리 변명이든 해명이든 뭐든 했으면 이 정도로 재밌지는 않았을 텐데. 되게 재밌게 구네."

문득.

핏물 밴 청포도색 드레스가 떠오른다

'나를 찾았다고요.'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불렀단다.'

제 칼에 가슴을 찔린 아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것을 물을 줄로만 알았던 칼리안에게 건네졌던 질문이 생각난다.

'숨기는 것이 있지?'

르니에리 향이 든다.

플란츠를 흉내내다 숨까지 옮았나. 지독한 향에 잠긴 듯, 가는 숨이 차오른다.

"그것 빼고는······ 다른 할 말이 없습니까."

휘트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디에나와 루이즈는 이렇지 않았다. 아리안느의 모친인 레이지안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베른은 세상의 모든 어미가 전부 다 그들같은 줄 알았다.

디에나처럼 다정하고 자상한 줄 알았다. 루이즈처럼 눈빛과 손길과 목소리에 차마 다 담기지도 못할 애정으로 보듬는 줄 알았다. 레이지안처럼 엄히 가르치고 굳건히 끌어안고 강인하게 지켜내는 줄 알았다. 사는 동안 보았던 세 명의 어미가 다 그랬던 까닭에, 세상의 모든 어미는 다 그런 줄로만 알았다. 세상의 아비가 전부 다 빗줄기라면 세상의 어미는 전부 다 온기일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르메인은 데블란과 마찬가지로 빗줄기가 맞았으나 실리케는 달랐다. 온기가 아니었다. 그저 향기였다.

"나에게라도 대신 묻고 싶은 말, 나에게라도 대신 해주고 싶은 말. 정말 없습니까."

"불필요합니다."

휘트린은 찌꺼기였다. 이미 다 아물었다 여겼던 기억의 말라붙은 찌꺼기가 되어 이렇게나 갑작스레 되돌아왔다.

- 톡, 톡, 톡.

깍지를 낀 반대편 손등을 가없이 두드리던 칼리안의 입술이 가느다란 웃음을 그렸다.

"형님. 제 어머니도 이러셨으면······ 어떡하죠."

칼리안을 낳고 기뻐했노라고, 웃었노라고, 실리케가 그랬었는데. 그것이 애정이 아니었으면. 그런 것이 아니었으면.

내 어린 날이 너무 아파 어찌하려나.

"만약 정말 그랬다면 어떻게 하죠. 벌써부터 걱정되는데."

착잡한 마음에 꺼낸 말이었다.

마음이 시끄러워 한 소리였다.

그런데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못내 아쉽다, 했는데."

그 스스로는 어떻게 했었는지를 가르쳐줬다.

플란츠가 칼리안에게.

"못내 아쉽다, 하면 될까요. 저도. 키리에도. 히나도."

"어쩌면."

"······ 네."

- 톡.

- 톡······ 톡.

칼리안은 한참동안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하던대로 계속 손등만 두드리며 여러 말을 골랐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해야 할지, 말을 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엘프다. 사람이 아니다.

그 말을 수백 번 수천 번 되읊다가.

"휘트린."

저문 꽃잎같은 목소리를 냈다.

"네. 왕자님."

"다른 것은 궁금하지도 않고,다른 말은 하고 싶지도 않은 듯 해서. 혹여 내가 잘못 들었나 걱정이 되어 다시 묻습니다. 지금 시간의 축을 얘기하는 겁니까. 내가 그걸 가지고 있는지. 그것 하나만 물은 것이 맞습니까."

"맞습니다."

침착한 대답이 들려온다.

플란츠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떴다. 칼리안을 부르지 않았다. 이름을 부르거나 엘프들의 대장로 나르잔의 앞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무언가를 쏟거나 아니면 어깨를 붙들거나, 그런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똑똑한 머리로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은 칼리안의 편을 들어주는 게 맞는 것 같아서였다. 칼리안이 계속 대화를 나누든 아니면 담담히 대답하는 휘트린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든. 뭘 하든 말릴 생각도 안 들었다.

"시간의 축이 무엇인지 아느냐 물은 것도 아니고 그것을 가지고 있는지를 묻는다는 것은······ 내가 그게 뭔지를 알고 있으리라 확신했다는 소리인데."

붉은 눈이 휘트린의 새까만 눈을 바라봤다.

"다누입니까. 나에게 흥미로운 비밀이 있다면서 다누가 그렇게 알렸습니까."

"그 역시 필요치 않은 질문입니다. 왕자님."

"아······ 서로 필요한 말만 나누고자 마주앉은 자리가 된 겁니까, 어느새 나도 모르게?"

"효용성을 판단할 뿐입니다."

"당신 자식도 필요 없어서 잊고 살았습니까. 죽은 척하는 쓸모있는 헛수고까지 해 가면서."

"계속 그 이야기를 하시면,"

"아. 나는 이 쪽이 더 필요한 얘기 같아서 그럽니다."

휘트린이 조용히 칼리안을 쳐다봤다.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을 거라고, 나는 그렇게 믿고 싶은데. 당신 말고 당신이 잊어버린 당신 자식들 때문에. 왜냐면 나는 내 아버지가 그런 작자인 게 꽤 버거웠거든."

옷보다 상처를 더 많이 꿰매보아서 바느질에 능숙해진 히나 때문에. 스스로 아파보았던 만큼 다른 사람이 얼마나 아플지도 잘 아는 히나 때문에. 이제야 간신히 제 삶을 살게 된 히나 때문에. 그런 히나보다 고작 두 살이 더 많다는 이유로 이제껏 동생을 지켜내야 했던 키리에 때문에.

베른의 생과도 같은 그 둘이 새삼스런 상처에 버거울까봐.

"뭐. 이것도 당신한테 효용적이지 않은 말이라 생각할테니. 원하는대로 나도 일단 버려 두겠습니다. 그럼 아무튼, 그래. 시간의 축. 그 얘기 중이었지."

"······ 그렇습니다."

"그래요. 중요한 물건이긴 할 겁니다."

"지니고 계신 것을 확인시켜 주십시오."

"확인시켜 주면."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풍당, 호수 밑으로 던져진 조약돌같은 목소리로 휘트린이 말했다. 그 말에 플란츠는 고개를 들었고 칼리안은 가장 호사스런 날에 피어난 꽃처럼 웃었다.

"와······ 솔깃한데. 되게 중요한 말이었네."

이제껏 서 있던 플란츠가 한 걸음 다가왔다. 그리고 앉아있던 칼리안과 휘트린의 사이로 들어와 서며 입을 열었다.

"시간의 축을 사용하는 방법 말인가."

"그렇습니다."

"······ 그 전에 몇 가지만 묻지."

"말씀하십시오."

"당신 남편은 죽은것이 맞나."

"맞습니다."

"그 이유를 확인하려다 당신까지 브리센에게 목숨을 위협받은 것 같은데. 그것도 맞나."

"네. 맞습니다."

"당신은 제온을 어떻게 알지."

"라시드 브리센을 통해 보게 되었습니다."

"라시드 브리센과 관계가 있나."

"목적이 같아 도움을 몇 번 받았습니다."

"그럼, 제온에 소속됐나. 당신도."

"아닙니다."

"그런데 시간의 축을 어떻게 알지."

"어머니 나무를 통해 보았습니다."

"다누에게 버림받은 것 아니었나."

"어머니께서 다시 찾으셔서 다시 뵈었습니다."

"내가 당신 딸과 정혼한 것은. 알고 있나."

"그렇습니까."

······ 뭉클!

살기가 터져나왔다.

애써 참아내고 있는 칼리안이 아닌 플란츠의 살기 였다.

신분 증명이 어려워 휘트린 영지의 영지민으로 만들어 두었던 키리에와 히나. 그 중 히나 베른이 플란츠 왕세자와 정혼을 했다. 그것을 모른다 한다. 이 대륙에 플란츠의 정혼 소식이 전해지지 않은 곳이 없을 텐데도.

그 히나 베른이 제 딸임을 모를 수가 없을 텐데도.

"몰랐나."

모른 것이 아니다.

무시해 온 것이다. 외면조차 하지 않았다.

"어떻게 모르지."

"질문하시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저하."

플란츠가 휘트린을 쳐다봤다.

"너는 왜, 권리만 챙기고 의무는 무시하지."

"제가 무슨 권리를 가졌습니까."

"해야 할 일과 자식을 두고 어느 쪽을 버리면 될지 선택했던 거잖아."

"네. 선택했을 뿐입니다. 만약 제게 권리가 있다면 이 자리에서 비난을 거부할 권리를 가지겠습니다."

"당신 자식들은 건드려 보지도 못한 선택의 권리를 이미 멋대로 가로채 꼬나잡고서, 마음대로 독차지한 선택의 대가는 자식들이 다 치르도록 떠넘겨 놓고서. 또, 권리만 챙기려 드는군."

욕하고 손가락질할 권리.

칼리안과 키리에는 그런 권리를 가져가려 들지 않을 것이다. 칼리안은 그것이 제게 없다 여길 게 뻔하고 키리에는 그것을 가질 가치가 없다 할 게 뻔하다.

그 꼴을 플란츠가 못 참았다.

치미는 화를 더 삼키지 못했다.

"실로 대단한 것을 알려줄 테니 필요 한 말만 해라······ 그리 지껄이는데."

"저하."

"버리고 도망쳐 혼자 숨어 연명해 온 주제에. 원망받을 의무는 거부하는 주제에. 네가 직접 손 놓은 자식을 대신 구해 살려낸 내 아우님 앞에 그 같잖은 목을 빳빳하게 치켜들고서."

가만히 움직인 붉은 눈이 플란츠를 향했다.

플란츠는 숨을 토하듯 말을 이었다.

"너 따위가 지금 감히 내 동생을, 칼리안을 내려다보나."

휘트린의 입장에서 휘트린을 보고 이유를 궁금해하고 이해해줘야 할 의무는 플란츠에게 없다. 제멋대로 제 의무를 내던진 휘트린처럼 플란츠도 똑같이 내버렸다. 선택할 권리만 멋대로 틀어진 휘트린처럼 플란츠도 제 권리만 멋대로 가져와 손에 쥐었다. 그렇게 휘트린을 비난했다.

- 혹시 형님 억지로 고기 드셨습니까.

얌전히 두 손을 모으고 앉아 형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가 깜짝 놀란 동생 놈이 '나 자는 동안 뭘 잘못 처먹었으면 그런 말을 하느냐' 짖는 것을 무시하고서.

- 편 들어 주는 거잖아.

- 네. 그런데 형님 말씀 되게 똘똘하게 잘 하시네요.

- 짖지.

- 형님 저한테도 그렇게 길게 말씀해주시면 안 됩니까.

- 시끄러.

- 저는 형님이 저한테 네 글자 이상으로만 말씀해주셔도 참 좋을 것 같은데요.

- 조용히 해.

- ······ 네에.

······ 최선을 다해 신경을 끄면서.

"시간의 축이든 뭐든. 너한테 뭘 얻어낼 생각 없어. 우리도."

그리고 이렇게.

홧김에, 정말 홧김에, 휘트린의 말을 걷어찼다.

- 형님 제 의견 안 물으셨는데요.

- 생각없는 것 맞잖아.

- 그래도 저한테 묻기는 해 보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형님 제 의견 너무 무시하시는 것 같은데요. 아무리 그래도 동생인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 번쯤은 물어보고 결정해야 되겠다는 그런 당연한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여전히 들려오는 동생의 짖음을 흘려버리면서.

"필요없어. 너도. 우리한테."

휘트린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효용성을 부정당한 이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 내 형님께서 그렇다 하시니."

앨런 마나실도 알아내지 못한 시간의 축 사용법을 홧김에 거절하는 큰 용단을 어영부영 내린 셈이 되어버린 칼리안이 생글 웃었다.

필요없는 이와 이 이상 함께 있어봐야 시간만 아깝다. 그래서 곧바로 몸을 일으킨 칼리안이 서재의 책상 위에 놓인 얼음 조각상에 눈을 두었다. 완성된 것을 본 적 없었으나 한 눈에 알아봤다. 아르센이 만든 것이리라.

벌써 사흘째 이런 곳에 두게 된 조각상 쪽으로 걸어간 칼리안이 손을 뻗었다.

- 사륵······.

그보다 더 행복할 수 없을 얼굴로 웃고 있는 이들의 얼굴을 가만가만 쓸어내리다 말을 꺼냈다.

"내 어머니가 나를 어찌 생각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래도 시오나가 그랬거든, 내가 내 어머니를 닮았다고. 그러니 한 가지는 확신합니다."

가벼운 바람이 담긴 목소리가 이어진다.

"적어도 내 어머니는 살지도 죽지도 못해 어느 한 곳에서도 쓰임새 없을 엘프를 계속 친구로 두고자 하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절대로 그 엘프의 편을 들어주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휘트린의 눈이 그 조각상에 머물렀고, 더 이상 그 모습에 신경쓰지 않기로 한 칼리안은 그저 눈을 감았다 떴다.

또 한 번의 변화가 이어진다.

아주 조금 키가 자랐다. 조금 크던 옷이 꼭 맞게 바뀌었다. 검은 머리가 밝게 변했다. 가느다랗던 목선이 움직이며 목젖이 불거졌다.

붉게 타오른 생명이 화하여 퇴워낸 어린 빛.

그런 빛의 눈으로 돌아간 칼리안이, 어느새 박동하는 불꽃을 담아낸 검은 머리의 형을 보며 입을 열었다.

"가시죠. 이제."

칼리안의 얼굴로 되돌아온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매무새를 다시 살핀 칼리안이 팔을 움직였다. 언제까지고 녹지 않을, 온기라고는 조금도 남지 않았으나 결코 쓸쓸하지 않은 얼음 조각을 조심스레 한 팔로 받쳐들었다. 선물했던 것을 그렇게 멋대로 되돌려받으며 말을 더했다.

"키리에가 곧 올 겁니다. 다시 도망치지 말고 만나길 바랍니다. 그게 당신의 마지막 쓸모같으니까."

시간의 축.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

이제껏 해온대로 계속 그 답을 찾아 헤매보기 위해 칼리안이 발을 옮겼다.

저벅저벅.

* * *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그 많던 하인 하나 오가지 않는 복도에 키 큰 사람 한 명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담담하게 가라앉은 얼굴을 하고 있던 이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제 막 서재에서 나온 플란츠, 정확히는 플란츠의 얼굴을 한 칼리안에게 말을 건네왔다.

"다친 곳은 어떠십니까."

"배고파."

생각해보니 사홀 내내 잠을 잔 뒤 오찬 자리에 뛰쳐들며 활기찬 새 하루를 시작했었다. 아직 한 끼도 못 먹었다는 소리다.

키리에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올라가시면 식사 준비 마쳐뒀을 겁니다."

"그래. 가서 먹을게."

"네."

대답을 했으면서도 칼리안은 발을 옮기지 않았다. 눈을 들어올려 키리에를 올려다봤다. 기분을 살피듯이, 걱정이 가득한 얼굴을 한 채로.

그래.

사일런트를 시전하지 않았다.

잊어버리고 시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시전하지 않았다. 키리에라면 피하지 않고 다 듣고자 하리라는 사실을 알아서였다. 칼리안이 숨기지 않을 휘트린과의 대화를 전부 다 듣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때문에 서재 안에서 오간 대화를 낱낱이 다 들은 키리에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인사 나누고 오겠습니다."

"그래."

"아니면······ 왕자님."

"응."

칼리안을 불렀으면서도 말을 잇지 않던 키리에가 고개를 움직였다. 그리고 칼리안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저도 아직 식사 전입니다."

연두색 눈에 빛이 든다.

나뭇잎 끝에 걸린 햇살처럼 빛이 든다.

"같이 먹을까?"

"네."

"술도 마실까? 나 술 좋아해도 괜찮은데."

"······ 야."

'술에 일가견이 있는 자신'을 콕콕 찔러보이며 생글생글 웃는 파릇파릇한 왕세자를 지켜보던 플란츠가, 더 참지 못하겠다는 듯 빨갛고 큰 눈의 눈꼬리를 찌푸려 보였다.

주변에 아무도 없으니 다행이다. 저 꼬락서니를 내 아우님의 과묵한 기사와 나만 봐서 다행이다.

"술 좋습니다."

"그래. 술 마시자. 키리에."

"네."

플란츠가 더 참견할 틈도 없이 식사와 술 약속을 마친 키리에가 둘을 향해 묵례를 건넸다. 그리고 불만 가득한 얼굴의 3왕자와 방긋방긋 웃고 있는 왕세자를 뒤로하고 방 안에 들어섰다.

- 달칵.

문을 닫은 키리에가 고개를 들었다.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은 뒷모습을 보았다. 아무 말 않고 그 모습을 쳐다봤다. 어떤 표정도 없는 얼굴로 휘트린을 쳐다봤다.

오래도록, 정말 오래도록.

뒤돌아 선 휘트린 역시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읽어내기 어려운 표정을 띄운 얼굴로, 한 마디도 하지 않고서 키리에를 봤다. 그 얼굴을 키리에도 바라봤다.

오래도록, 다시 오래도록.

어떤 말도 않고 휘트린을 마주보던 키리에가 긴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추모 마쳤습니다. 그럼 이만."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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