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65화 (466/527)

제82장. 알고 보면 순한(4)

손목의 팔찌는 그대로 두었다.

그 상태로 잠시 변장만 풀었다.

뒤에서 동생 놈의 머리카락이 새카맣게 바뀌는 모습을 지켜본 플란츠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플란츠는 변장을 완전히 다 풀지는 않고 얼굴만 되돌렸다. 어차피 프레이르의 서재에서 나갈 땐 다시 칼리안의 모습을 해야 하니 굳이 몸까지 바꿀 필요는 없을 터였다.

- 찾았어요.

그때 칼리안의 머릿속으로 이런 말이 들려왔다. 에일라의 목소리였다.

- 이름 없고 오래되지 않은 무덤, 있어요.

- 얼마나 됐는데.

- 아무것도 안 적혀있어요. 비석은 별로 안 낡았는데······ 몇 년 안 됐겠네요.

- 알았어.

- 이게 진짜 프레이르의 무덤이에요?

- 응. 제대로 훔쳐들은 게 맞다면.

- 그럼 맞겠네.

- 아마도.

살아있는 줄 알았던 이가 죽었음을 알았다.

죽은 줄 알았던 이가 살아있었음을 알았다.

- 하피 풀어놓은 배후 조사하러 갔으면 그거나 알아내지. 엉뚱한 얘기를 들었네요. 하필이면.

- 그러게······, 모르고 넘어갔으면 좋았을 텐데.

몰랐다면 좋았을 걸.

- 왕자님은. 괜찮아요?

- 확인했으면 돌아와. 조심하고. 에일라.

- 알겠어요. 참견 안 할게.

- 응.

대화를 마친 칼리안이 '프레이르'를 쳐다봤다.

가느다란 미성이 서재를 울린다.

"휘트린. 죽은 줄 알았잖아, 나는. 당신이."

죽은 줄 알았던 이가 살아 돌아온 일은 이미 겪었다.

시간이 되돌아가고 죽었던 이들과 다시 살게 된 일을 말함이 아니다. 그들은 죽은 것이 맞다. 베른의 생을 함께 했던 모든 이들이 다 죽어버렸고 단 한 명도 되살아나지 못했다. 베른조차도. 베른마저도.

그러니 그들을 두고 다시 살아 돌아왔다 여기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아니라 에일라를 말함이었다. 하얀 수리를 말함이었다. 둘 모두 멀쩡히 살아서 돌아오지 않았던가.

그 사실을 안 뒤 에일라는 거둬들였다. 하얀 수리는 다시 죽였다. 물론 칼리안은 에일라 또한 사형대로 되돌려 보내려 했었다. 만약 에일라가 칼리안의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장담하건대 칼리안은 분명 그리 했을 터였다.

그러나 하얀 수리를 죽이고 에일라를 사형대에 보내려 했던 이유는 그 둘이 '살아 돌아온 것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그 둘이 죽음을 가장했던 일은 칼리안이 분노해야 할 것이 아니었다.

"죽은 프레이르 흉내를 내면서 살아 있었을 줄은 몰랐어. 여기 들어오기 직전까지도 안 믿었어. 에이 설마, 죽은 줄 알았던 새끼가 눈 앞에 나타나는 일을 내가 세 번이나 겪을까. 그렇게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살아있었네. 휘트린. 설마 했는데. 정말로."

살기가 터져나왔다.

분노하여서.

휘트린이라는 이름을 들은 '프레이르'의 반응과 에일라로부터 전해진 이야기로 말미암아 완전히 확신하게 된 사실에, 다시 돌아버릴만큼 분노하여서. 천 가지 만 가지 이유를 갖다 붙여도 이해해줄 수 없는 상황을 목도했음에 온전히 분노하여서.

"엘프는 거짓말 못한다더니. 그것부터가 거짓말인가."

하기사.

칼리안도 거짓말을 못하지만 남 흉내는 잘 내니까. 엘프는 고기를 못 먹는다 했지만 시오나는 고기 없이 못 사니까.

"왜 대답을 안 해. 내 말이 맞는지 아닌지 얘기를 해야지."

"······ 그러는 왕자님께서는, "

"개소리 내밀 궁리 말고 대답만 해. 맞는지, 아닌지."

피가 배인 듯한 눈으로, 짓눌린 듯한 목소리로, 휘트린을 찾았다. 절대로 듣고 싶지 않다는 얼굴로 대답을 종용했다.

'프레이르'가 눈을 들었다. 그리고 칼리안의 붉은 눈을 쳐다봤다. 프레이야와 꼭 닮은 얼굴을 바라봤다. 칼리안을 보는 것인지 그 너머의 프레이야를 보는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눈빛을 하고 있다가.

- 달칵.

셔츠 속에 채워두고 있던 목걸이를 풀어 내려놨다.

"네."

확연히 달라진 목소리가 칼리안을 향했다.

얇아진 목소리 뿐만이 아니었다. 얼굴이 달라지고 키가 줄어들고 몸이 바뀌었다. 불거져 있던 목젖이 사라지고 머리카락이 조금 길어졌다. 목과 손목이 가늘어지고 눈매가 달라졌다. 성별이 바뀌었다.

백은발. 검은 눈.

"죽지 않았습니다."

히나와 꼭 닮은, 휘트린으로 돌아왔다.

"······ 하."

초상화 속에서 보았던 얼굴을 절대 잊지 않았을 플란츠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하여 사실을 거듭 확인한 셈이 된 칼리안으로부터 더 사나워진 살기가 흘러나왔다.

'성을 모릅니다. 두 분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사실 저희 남매의 이름도 어머니가 남겨 둔 편지를 찾게 된 덕분에 알게 됐습니다.'

'아버지는 동생이 태어나고 그리 오래지 않아 돌아가셨다 적혀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후에 갑작스런 병으로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편지에 적힌 내용이 그랬습니다.'

"편지에 써뒀다며."

'제 누이는 스스로 죽음을······.'

"······ 히나. 키리에. 이름을 적어뒀다며."

"네. 그렇게 적어서 프레이야에게 전했습니다."

"그랬으면 키리에가 누구인지 알아 봤어야지. 먼저 알아봤어야지."

이 영지에 내가 들여뒀던 남매 이름이 뭔지는 알고 있었어야지. 내 기사 이름이 뭐였는지는 알아뒀어야지.

"못 알아보고 잊어버리고, 이유가 뭐가됐든 이렇게 들킬 거였으면."

모를 거였으면.

잊을 거였으면.

"죽었어야지."

그랬으면 차라리 죽었어야지.

- 죄송합니다, 왕자님.

- 에일라 만났어?

- 네. 브리지트 경의 반지를 잠시 빌렸습니다. 혹시 회의장에 계십니까.

- 응. 회의장이야. 무슨 일인데?

- 방금 들은 이야기 때문에 제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계셨으면 더 행복하게 살았을지도 몰라요. 모르는 일이니까 몰라요.'

'저는 제가 정말 열심히 잘 살았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그냥 그렇게 살고 싶어요.'

- ······ 설마.

- 잘못 들은 것일까요.

- 잘못······ 응. 잘못 들은 걸 거야.

- 만약에 사실이라면, 왕자님.

- 나가면 내가 프레이르를 만나볼게. 거짓말을 하는지 아닌지 내가 보면 알 수 있잖아. 내가 물어볼게. 물어보고 알려줄게.

- 사실이라면. 저도 만나보겠습니다.

모르고 잊어버리고 죽지도 않을 거였으면, 적어도.

- 그래. 키리에.

적어도 키리에에게.

하필이면 키리에에게.

"······ 죽었어야지."

키리에에게 들키지는······ 말았어야지.

* * *

- 딸랑······ 딸랑.

손잡이 끝에 달린 방울을 괜스레 툭툭 쳐보던 시오나의 긴 귀가 바짝 세워졌다. 방울에서 시선을 뗀 시오나가 고개를 들었다. 칼리안의 살기를 느낀 까닭이다.

본능적으로 긴장했던 목 근육을 풀어내며 귀 끝을 툭툭 두드린 시오나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영주성을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그런데 곁에 있던 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어머니께서 살아계셨나 봅니다."

키리에였다.

꺼내려던 말 대신 고개를 끄덕인 시오나가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를 냈다.

"그러니 3왕자가 저런 살기를 내겠지."

"네."

"화가 많이 났나 보군."

"아마······ 저희 남매에 대해 왕자님께서만 알고 계시는 사실들도 있어서 그럴겁니다."

과거의 히나는······ 아마도.

칼리안이 절대로 이야기해주지 않을, 그러나 키리에는 얼핏 예상하고 있는 일. 아마 그 때문에 더 저렇게 화를 내는것이리라.

"그래."

'검은 고양이에게 바다 소금내가 난다'는 라시드의 말에 대해 여전히 별 생각이 없는 시오나가 다른 의문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영주성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는 키리에를 꽤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으려니 키리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분명 돌아가셨습니다."

"직접 보았나."

"네. 직접 보았습니다. 아무리 어렸다지만 분명 보았습니다. 몸이 식은······ 것을 기억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어머니를 묻는 것도 저는 보았습니다."

한동안 대답하지 않던 시오나가 입을 열었다.

"죽음을 가장하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 네. 압니다."

설탕 모양의 약.

심장을 멎게 하는 약을 키리에도 안다. 칼리안이 그것을 다루는 모습을 보았지 않나. 그런 약이 아니더라도 죽음을 가장하는 방법이 많다는 사실을 안다.

그런데 굳이, 왜. 어째서. 그것만은 모르겠다.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휘트린이 살아있었다는 사실 말인가."

"네."

"그날 너희들에게 편지를 주고 가지고 있던 돈도 다 건네주고 난 뒤에, 내 스승님을 다시 만나기까지 나홀을 꼬박 굶었다."

키리에가 피식 웃었다.

휘트린이 살아있었음을 알았으면 돈을 다 내줘가며 그냥 두고 왔겠나. 어린애 둘을 억지로 끌고 휘트린에게 데려다주는 일이 아무리 어렵다 해도 쫄쫄 굶는 것보다는 낫지.

"숲으로 가지 그러셨습니까. 사냥하실 수 있었을 텐데요."

"스승님을 기다리기로 했던 곳이라서 길이 엇갈릴까봐 나가지도 못했다."

"이번 일 끝나면 꼭 식사 대접 해드리겠습니다."

"좋지."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한 시오나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 움직임에 한 번 더 방울 소리가 울렸다.

그것을 들으려니 어찌할 바 없이 영주 성에 눈길이 닿는다.

"너희들을 억지로라도 여기에 데려다 놓을 것을 그랬다."

"아닙니다, 그건."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대답한 키리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돌아가셨다 여기고 살았으니 앞으로도 그렇게 살면 됩니다."

"히나에게는."

"얘기할겁니다."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낫지 않나."

"예전에는 부모님 일을 모르는 편이 낫다 생각했습니다만, 이제는 아닙니다. 돌아가서 직접 히나를 만나 얘기해 줄 겁니다.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히나가 결정해야 할 몫입니다."

"그래."

"힐 경께서는 혹시 만나보실 겁니까."

- ······ 딸랑.

검 끝의 방울이 다시 소리를 낸다.

좋은 귀를 아무리 기울여봐도 여전히 역시나. 새끼 여우들이 장난치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어떻게 들어야 이 방울에서 그런 소리가 들리는지, 그것 하나가 궁금했었다.

"아니."

오로지 그것 하나만 궁금했었다.

허나 이제는 아니었다. 새끼 여우가 장난치는 소리 대신 호밀빵 냄새같은 소리가 나게 되었다. 그래서 더는 궁금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니 됐다.

"죽은 친구는 죽은 뒤에 만나야지."

검 끝에 매달린 방울을 보던 키리에가 몸을 일으켰다.

"그럼 저만 다녀오겠습니다."

"만나보려는 건가?"

"그렇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들으려고 그러나."

툭 내뱉듯 한숨을 쉰 키리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제나와 같은 여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돌아가신 어머니와의 대화는 저도, 죽은 뒤에 나눌 생각입니다."

"그럼."

"한 가지만 확인하려고 그럽니다."

죽음을 가장하고 살아 온 이유가 무엇이었든.

얼마나 큰 일이 있었고 얼마나 큰 결심을 했든.

키리에에게 중요한 것은 딱 하나였다

"저기 계신 분의 귀가 어떤지. 여전히 길고 뾰족한지. 저는 그것만 확인할 겁니다."

휘트린의 귀가 여전히 길고 뾰족한지, 아니면 히나처럼 스스로 잘라냈는지.

오로지 그것 하나만 확인하면 될 일이었다.

잘려나간 부분을 변장하기는 어려움을 안다. 때문에 두 팔이 멀쩡한 사람이 변장용 마법 물품으로 외팔이가 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껏 프레이르의 행세를 했던 휘트린 역시 귀가 짧을 것은 분명하다.

다만 그 귀를 자른 것이 단지 변장 때 인지. 아니면 히나처럼, 살기 위해서 였을지. 그것을 확인하고자 마음을 먹었다.

"혹시 궁금해하면 저라도 알려줘야 하니 말입니다."

"히나말인가."

'치유술을 빨리 익힐 걸.'

"······ 네. 그렇습니다."

너무 어렸던 까닭에 제대로 기억도 못 하는 제 엄마의 '병'을 고쳐주지 못 했던 것을 항상 아쉬워하던 히나였으니까. 휘트린이 가고싶어 했다던 브리지트 숲을 언제나 궁금해하던 히나였으니까.

키리에 스스로는 휘트린에 대해 그 어떤 것도 궁금하지 않았으나 히나는 아닐 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만약 히나가 그것을, 휘트린이 쉬이 살아왔는지 아닌지를 궁금해한다면 키리에가 알려줘야 했다.

"그래."

시오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히 인사를 건넨 키리에가 발을 옮겼다.

* * *

플란츠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유가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휘트린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지 않아 다행이라 여겼다. 만약 나왔다면 칼리안은 제 어머니의 친우이자 제 기사의 어미인 이의 숨을 끊어놨을 거다.

"잠시 앉으시겠습니까. 여쭐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프레이르, 아니.

휘트린은 이런 말을 먼저 했다.

죽었다던 프레이르의 모습을 하고 있던 휘트린이 꺼낸 말. 이제껏 스스로를 죽은 것처럼 위장했던 이유같은 건 단 한 마디도 포함되지 않은 말이었다.

히나와 참 많이 닮은 휘트린을 뚫어 져라 바라보던 칼리안이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함께 공기를 짓누르던 살기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어찌됐건 이 자리에 휘트린과 칼리안만 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휘트린이 가리킨 곳에 앉은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제야 천천히 소파 쪽으로 걸어오는 플란츠를 보다 미간을 찌푸렸다.

- 형님. 또.

또 걸음이 달라졌다.

남들 눈에 될 만큼 차이가 나지는 않겠으나 칼리안의 눈에는 너무 잘 보였다. 저 걸음이 왜 저렇게 곧게 변했는 지는 묻지 않아도 뻔하다.

브리센 때문이리라 여긴 것이다.

휘트린은 히나와 비슷한 힘을 가졌다 했으니까.

브리센에서 독을 보내왔는데 계속 멀쩡히 살아있으면 이용당할까봐 죽음을 가장했을까. 본인 뿐만 아니라 키리에나 히나도 피해를 입을까봐 죽은 것으로 해뒀을까. 그래서 키리에와 히나를 그렇게 내버려뒀을까.

플란츠는 분명 그런 생각을 했으리라.

- 브리센 때문이라 여기시는 거면.

- 브리센 때문이라 생각한 건 맞아. 그래도 자책하는 거 아니야.

- 그럼 왜 그러십니까.

- ······ 화가 나서.

이렇게 답한 플란츠가 다시 한 번 짧은 숨을 쉬었다.

"왕자님께서 화내실 일 아닙니다."

그런데 마치 그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휘트린이 이런 얘기를 했다. 물론 시기좋게 겹쳤으나 플란츠가 화가 났다 한 말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키리에와 히나의 일을 두고 칼리안이 대신 화낼 일이 아니라는 의미로 꺼낸 말일 터였다.

"맞는데. 내 아우님께서 화내실 일."

그래서 이렇게, 화난 완두콩이 내 동생 편을 들었다.

셋이 있다 둘이 싸움 난 자리에서 한 명이 한쪽 편을 들면 그럭저럭 나름대로 든든 하기는 하지 않던가. 그래서 나서서 편을 들었다.

휘트린이 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칼리안 쪽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시간의 축, 가지고 계십니까."

이제껏 이어오던 주제와 전혀 동떨어진 이야기. 칼리안도 플란츠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런 말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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