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64화 (465/527)

제82장. 알고 보면 순한(3)

때때로 열풍이 불었다.

대륙의 지도를 두고 몇 개의 평행한 가로줄을 그려가며 비교했을 때 텐실은 카이리스의 북쪽과 비슷한 높이에 위치해 있었다. 카이리스의 북동쪽, 그리고 세크리티아의 북쪽에 자리한 곳이 바로 텐실이었다.

그럼에도 텐실에는 때를 가리지 않은 열풍이 불었다. 카이리스는 물론이거니와 세크리티아에도 찾아들지 않는 뜨거운 바람이 었다.

드높고 험준하여 '하늘로 뻗은 나락'이라는 뜻을 지닌 레이도스 산맥을 두고 계절이 나뉘는 것 같았다. 길고 긴 산맥의 서쪽인 카이리스에는 눈이 내리고 남쪽인 세크리티아에는 낙엽이 지는 시기에도 텐실에는 때없는 열풍이 불어닥치곤 하는 것이다.

시기도 이유도 없이 언젠가는 몇 날을, 또 언젠가는 몇 달을 불어닥치는 그 바람에, 통통히 살이 오르던 밀은 말라 비틀어지고 호수는 줄어들며 짐승이 갈사하기 일쑤였다.

- 세렌티의 앙화!

때문에 텐실이 아닌 나라의 사람들은 그것을 두고 세렌티의 앙화라 했다. 세렌티를 모시던 세크리티아에 반기를 들더니 그리 아름다운 나라를 기어코 잘라놓은 경솔한 신관들의 후손을 세렌티가 직접 꾸짖는 것이라 했다. 위대한 고룡은 축복하는 법을 알고 한낱 괴물인 하피도 저주하는 법을 아는데, 하물며 그들을 모두 만들어낸 세렌티가 나라 하나를 대대로 벌하지 못하겠느냐 말했다.

기실 나라가 나뉘기 전에는 없던 현상이 생긴 것이니 나름대로 일리는 있을 의견이다. 덕분에 텐실은 그 열풍의 피해를 숨기기에 급급했다. 신관이 세운 나라인 세크리티아보다도 몇 배는 더 간절하게 세렌티를 모시는 나라에 하필이면 세렌티의 앙화라니. 그보다 우스운 올가미가 또 어디에 있을까.

다만 그것은 단순한 추측일 뿐.

텐실에 불어닥치는 열풍이 정말 세렌티의 벌일지, 산맥을 뒤에 두고 남쪽 대사막과 인접한 지리적 특성이 원인 일지, 대사막에 둥지를 틀었다던 황금빛 고룡 실레스티안의 짓궂은 장난이 가해져서일지, 혹은 다누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아서일지. 정확한 이유를 밝혀낸 이는 아무도 없었다.

기후학자와 지리학자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호기심 많은 마법사들이 유독 그 일에 대해서만 관심을 두지 않은 까닭도 아니었다.

텐실이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세렌티가 관여하지 않는 자연현상은 없다 믿는 이들이 모인 나라였으니 학자들의 말을 신용하지 않았고, 인간이 부리는 마법은 세렌티의 순리를 거스른다 여기는 나라였으니 마법사들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으며, 드래곤 역시 세렌티의 자손이라 믿었으니 그들이 세렌티의 땅에 감히 장난을 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세렌티를 향한 자신들의 믿음을 의심치 않는 나라였으니 세렌티가 정말로 텐실을 벌했으리라 믿지도 못했다.

- 덜컹, 덜컹!

그리하여 결국 이유가 없는 열풍.

덥고 메마른 열풍이 다시 찾아들고 있었다.

"왕실의 분수가 다시 마르겠구나."

오랜 가뭄이 들었던 텐실은 왕궁의 분수에도 물을 막았었다.

강 바닥이 쩍쩍 갈라지고 숲이 말랐다. 바닷물을 퍼온 사람들이 소금기 없는 물을 만들며 목숨을 연명하던 일에 진저리를 내게 되었을 즈음. 비로소 단비가 내렸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텐실의 왕실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세렌티에 대한 감사 기도를 을리는 것이었다. 사홀을 두고 이어진 감사 행사를 마친 뒤에는 당연하게도 분수를 재가동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열풍이 불었다. 간신히 내린 비가 다 마르게 생겼다. 그 분수를 또 멈춰두게 생겼다.

"그리 되면 테드릭은 또 세렌티의 신전을 찾아가겠지. 열심히. 신실하게. 진심을 다해."

- 쏴아아아!

창 밖으로 시원하게 쏟아져내리는 분수를 바라보던 회보랏빛 눈에 웃음이 걸린다. 새치가 조금 섞인 갈색 머리에는 마른 햇살이 내려앉았다.

장식 하나 없이 길게 늘어뜨린 곧은 머리카락이 살랑, 뜨거운 바람을 담고 부풀다 내려앉을 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가 입을 열었다.

"참 한결같으십니다."

공작도 소공작도 아닌 공작의 딸. 그런 사람이 일국의 국왕을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왕궁의 것과 달리 어떤 가뭄이나 열풍에도 절대 멈추지 않을 공작저의 분수를 내려다보면서.

그 모습이 한결같다 말했다.

마지막으로 본 이후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으나 변한 것이 없었다. 목소리도, 말투도, 눈빛도, 꼿꼿이 서서 창 밖을 바라보는 모습도,

"구하기 어려웠다."

그것이 한결같다 하는 소리에 제 할 말만 전하는 모습마저도.

"무엇을 구하기 어려웠다는 겁니까."

"질문을 하기 전에 생각을 먼저 하거라. 라시드."

"······ 레네티스. 말씀이십니까."

이제껏 창 밖을 보던 이, 라시드의 모친이기도 한 셀레나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데블란이 나자빠져서 이제는 만들 재료를 구하기도 어렵다 하더구나. 심어놓는 족족 바스라진다며 안 그래도 우는 소리를 하는데 너까지 하나를 낭비했으니 조심히 쓰거라."

칼리안에 의해 큰 부상을 입은 상태로 이동 마법에 휘말린 탓에 결국은 심장이 찢겨나갔다. 덕분에 심장 속에 든 돌, 레네티스라는 이름을 지닌 그 돌이 파손됐다.

숨이 멎기 직전에 갈아끼워진 새로운 레네티스 덕에 다시 살게 된 라시드가 웃음을 홀렸다.

"이렇게 강제로 불러오지만 않았어도 돌을 낭비할 일은 없었을 겁니다."

"너는 또 생각없이 말하는구나."

- 사락.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기우는 햇살을 등지고 선 셀레나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검은색의 타이트한 바지와 검은 셔츠, 은색의 베스트와 짙은 보라색의 짧은 재킷, 그리고 크고 작은 진주와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긴 목걸이만이 라시드의 눈에 들어왔다.

그 모든 것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러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사흘만에 간신히 일어나 이제야 마주한 셸레나의 얼굴만은, 등지고 선 햇살에 음영져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그래도 라시드는 그것이 아쉽다 여기지 않았다.

"그냥 두었으면 네가 살아서 저 열풍을 다시 볼 수 있었겠느냐. 철없는 소리 그만하고 감사히 여기거라. 흡족한 소식 하나 전하지 못한 일을 잊고 손해까지 감수하며 살려놓은 것이니."

어차피 셀레나 역시 아들과 마주보고 담소나 나눌 생각은 없을 테니까.

햇살의 눈부심을 이겨보겠다는 듯 셀레나를 향한 시선을 조금도 물리지 않은 라시드가 입을 열었다.

"저를 살리고자 부른 것은 아닐 텐데 왜 갑자기 돌아오게 하셨습니까. 그것도, 그 마법사의 손까지 써가면서."

"세르제인이 사라졌다."

"국경 근처에서 카이리스 국왕의 탄신일 축하 사절단에 합류할 예정일 겁니다."

텐실의 왕세자 세르제인이 셸레나의 감시망을 빠져나갔다. 르메인의 탄신 기념 축제를 찾게 된 텐실의 사절단에 합류할 계획을 세웠을 터였다. 텐실의 왕세자가 사절단을 이끌고 오는 것을 르메인이 허용했으니까.

정확히는 란델을 설득한 칼리안의 허용이었지만.

"이유는 무엇이더냐."

"세르제인은 카이리스와 손을 잡을 계획입니다."

"르메인은 아닐 테고."

"란델 왕자입니다."

"겉치레만 챙기고자 가지도 않았을 테고."

"사실상 칼리안 왕자입니다."

세르제인이 찾아오는 표면적인 이유는 하나였다.

란델과의 친목이다.

그리고 또 하나. 란델을 만나고 텐실의 왕위를 맡겨도 괜찮을지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자질이 있다 여긴다면 세르제인은 더이상 가짜 왕세자 노릇을 하지 않을 터였다. 그것이 카이리스로의 입국을 허가해달라며 칼리안에게 도움을 요청한 이유였다.

그런데 만약 세르제인이 란델에게서 국왕의 면모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아마도 평생을 '세르제인'으로 분해 살게 될 터였다.

그 스스로가 텐실의 새로운 국왕으로 나선 뒤에.

"그래."

셀레나가 눈을 들었다. 그리고 햇빛의 밝음에 이제 적응한 듯한 라시드를 마주보며 세르제인에 대한 감상을 전했다.

"포부가 크구나. 제 주인의 자리를 품다니."

사망한 왕세자 세르제인의 호위기사였던 가짜 세르제인의 출신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감히 하늘을 올려다 본 칼잡이의 원대한 꿈에 대한 비아냥임을 알아듣지 못할 만큼의 말도 아니었다.

"죽이면 됩니까."

"실패한 일은 잊은 듯이 말하는구나."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진짜 세르제인은 죽었습니다."

"속에 든 것이 무엇이든 아리엘리 왕가의 세르제인은 살아있다. 그러니 실패했다 하는 것이다. 생각을 좀 해보거라."

사람들의 앞에 서는 것은 세르제인의 껍데기지 세르제인의 알맹이가 아니다.

그 속에 든 것이 진짜든 가짜든 상관있나. 어차피 대륙의 어떤 왕족이나 귀족들도 제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사람들 앞에 서지 않는데, 그것이 진짜의 알맹이든 껍데기를 흉내내는 가짜의 알맹이든. 속에 든 것이 도대체 무슨 상관일까.

그러니 그 세르제인이 진짜 왕족이 아니라 왕족을 완벽히 흉내내는 기사 나부랭이라 한들 셀레나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죽여버린 세르제인이 다시 살아 움직이고 있는 이 상황 때문에 잠시동안 살려두는 것 뿐. 사람들의 앞에 세르제인을 묶어 세워놓고 변장을 풀게 하지 않는 이상 지금의 세르제인은 진짜 세르제인, 텐실의 왕세자였다.

그러므로 라시드는 세르제인을 살해하는 일을 실패한 것이 맞다.

가만히 눈을 감은 라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이 실패했다는 말에 더 반박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무엇을 시키려는 겁니까."

셀레나가 웃음을 지었다.

"카이리스행이라니. 왕세자의 껍데기를 흉내낸다 해서 쓸모가 생기는 것은 아니리라 여겼는데, 생겼구나. 놀랍게도."

"······ 카이리스 땅에서 텐실의 왕세자를 죽이면 됩니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바뀐 질문을 했다.

라시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셀레나가 입을 열었다.

"마법사를 불러 너를 다시 돌려보내주마."

"네."

"지금의 일을 마무리지을 즈음이면 사절단이 도착할 게다."

"알겠습니다."

죽이면 되겠느냐는 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특별히 확답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으니 라시드는 더 묻지 않았다. 그리고 인사를 건넨 뒤 몸을 돌렸다.

"더는 손해가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라시드."

그런데 셀레나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한동안 무표정히 서 있던 라시드가 뒤를 쳐다봤다.

어느새 라시드를 등지고 다시 창 밖을 보는 셀레나의 말이 이어졌다.

"쓸모있게 굴거라."

이 말에, 라시드의 입이 움직였다. 양 옆으로 부드럽게 올라간 입술이 기분 좋은 웃음을 만들어냈다.

"네. 어머니."

듣기 좋은 대답을 만들어냈다.

* * *

다누의 경고.

란델로부터 그 말을 들은 플란츠는 당장 히나를 불러오겠다 했었다. 그러자 계속하여 란델을 호위하고 있던 에우리아가 조용히 나섰다.

'남작이 사용하는 힘이 치유사 베른 경의 것과 유사합니다. 서로 마주하지 않도록 하는 편이 낫다 생각합니다.'

히나가 자신과 마찬가지의 힘을 쓸 수 있다는 것을 프레이르가 알았을 때 프레이르가 히나를 반겨할지 배척할지 알 수 없다 했다.

'휘트린의 아이가 동시에 여럿을 치유하는 모습을 봤지만 이전에는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나는 그 힘으로 방어막을 세운다는 이야기도 들어본 적 없다. 만약 프레이르가 스스로의 힘을 유일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면, 또 다른 엘프, 그것도 하프엘프가 자신의 유일성을 해칠 수 있다 여기도록 하지 않는 편이 좋을 듯 하군.'

다음 날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시오나 역시 같은 의견을 냈다. 그래서 플란츠는 히나를 부르지 못했다.

덕분에 새로운 고민이 생겼었다.

혹시나 제 힘을 이미 들킨 프레이르가 부상 당한 왕세자를 치료해주겠다 나서면 어떻게 해야 할까. 치료를 하게 되면 방 안에 누워있는 이가 사실은 칼리안이었음을 알게 될 텐데, 그리 되면 무방비 상태의 칼리안을 공격하게 될 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의심을 사지 않고 치료를 저지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다 고민을 그만뒀다. 히나는 멀리서도 누군가의 변장을 알아봤었지 않나. 처음 겪었을 때에는 속았을지 몰라도 두 번이나 변장을 알아보지 못할 프레이르는 아니었다.

때문에 플란츠는 키리에를 다시 불러들이고 시오나와 드미레아에게 부탁을 해 가며 왕세자가 머무는 방의 호위를 강화했다. 부상당한 것이 칼리안 임을 이미 알고 있을 프레이르가 정말로 공격을 할까 우려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프레이르는 칼리안을 치료하겠다 찾아오지도, 공격하려 들지도 않았다. 덕분에 칼리안은 사흘간 편안한 숙면을 취했다.

"다행입니다. 시드실까 걱정했는데."

휘트린의 귀족들에게 한바탕 호통을 친 뒤.

칼리안은 본래의 계획대로 조사를 이어나갈 것을 명령했다.

더 이상 이 일을 덮자는 말을 꺼내지 못하도록, 회의장으로 키리에를 불러낸 뒤 히나와 연결된 통신 용품을 이용해 르메인에게도 연락을 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하피의 습격과 칼리안의 별장에 대한 내용을 전했다. 엘라자르 대신 발칸을 움직여 범인을 색출하는 일에 대한 르메인의 허가도 얻어냈다.

그 후 지체없이 회의장을 나와 프레이르에게로 발을 옮기는 중이었다. 여전히 플란츠의 얼굴을 한 채, 작은 사일런트 막 안에 플란츠를 넣어놓고서.

참고로 란델은 회의장에서 곧장 방으로 돌아갔다.

완두콩도 방으로 들여보내고 프레이르를 혼자서 만나보려 했으나 이제는 참 당연하게도 완두콩이 데굴데굴 따라붙었을 뿐이다.

"짖는 범위가 넓어지셨던데. 아우님의 새 부하에게까지 그 말을 하시고."

"걱정 말고 기다려주시라 했는데요. 슈린츠 쪽에서 한 번 말한 것 말고는 에일라에게까지 짖어두진 않았습니다."

"······ 그럼. 왜."

"왜요. 에일라가 혹시 시들지 말고 계시라 했습니까."

"아니야."

"아니면요."

"아니야."

"에일라에게 물어볼까요. 궁금한데."

"싫어. 반말."

"네."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며 생글생글 웃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드미레아가 오러를 발현했습니다. 에반이 죽어 이제 제가 다섯 번째 검이 됐으니까, 만약 키리에와 드미레아가 별 탈 없이 검의 길에 오르게 된다면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욕심내시면 형님께서 여덟 번째 검은 될 수 있겠습니다."

"라시드 브리센. 소드마스터인 것 같던데."

스륵.

여전히 플란츠의 얼굴을 하고 있던 칼리안의 발소리가 잠시 사라졌다 다시 들렸다. 어차피 사일런트가 있었으니 신경쓸 일은 아니었으나 다시 얼른 발소리를 만들어낸 칼리안이 답을 전했다.

"알아보셨습니까."

"힐 경과 소공작이. 그럴 것이라고."

"······ 네. 잘 해야 키리에 정도의 실력이겠거니 했는데 예상보다는 강했습니다. 어찌됐건 라시드 브리센은 자신이 검의 길에 오른 것을 알릴 성격은 아닌 것 같으니까 형님이 그냥 여덟 번째 하세요."

"마법은."

"마법은 재미없어 안 배우겠다 하셨잖습니까. 브리센의 검술을 다 익혀두기는 하셨으니 검만 쓰든 마법을 더 배워보든 다른 것을 해보든 형님 좋은 대로 하십시오. 어차피 형님 지금 이대로도 제가 참 잘 키워드렸다며 뿌듯해 할 만큼은 되니까요."

짖네.

하고 생각하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고맙다는 말은 못 하겠는데."

계단 위를 향하던 칼리안의 베이지 색 구두가 잠시 멈췄다. 그리고 조금 뒤에서 걸어오던 플란츠의 검은 구두를 내려다보다 낮은 목소리를 냈다.

"고맙다는 말 들으려고 형님 키우는 사람 아닙니다, 저는."

"······ 말고. 회의장에서."

귀족들을 앞에 두고 칼리안을 지켜온 것은 나였다 이야기했던 일을 말함이리라. 연두색 눈을 깜빡이며 긴 숨을 들이쉰 칼리안이 말했다.

"또 한 대 맞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요. 고맙다는 말은 생각도 안 했습니다."

"왜."

"저 어렸을 때, 형님이 저를 지켜줬었다 생각하시는 분 아니잖습니까. 그런데 그게 보호였다며 제 멋대로 결정하고 말을 했으니. 내 얼굴 멋대로 써먹지 말라며 화를 내시면······ 그런 걱정은 했습니다만."

플란츠가 대답하지 않았다.

"형님이 고마워하실 일 아닙니다. 화나는 것 아니면 됐습니다."

"······ 알았어."

"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다시 발을 옮겼다.

이러다 칼리안의 모습으로 돌아간 뒤에도 버릇이 되면 어쩌나 싶은 발소리를 내면서, 저벅 저벅.

자박 자박.

보다 작은 발 소리를 내며 계속 뒤를 따르던 플란츠가 붉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붉은 눈을 들어 동생 놈을 보다 입을 열었다.

"시찰이 끝나면 엘프의 도시에 다시 가볼까 하는데."

"저 말고 다누 때리시려고요."

"그래."

"네. 잘 다녀오십시오."

그런데 칼리안이 이렇게 대답했다.

미간을 찌푸린 플란츠가 무어라 말을 하려 했을 때, 칼리안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쯤에는 엘프 도시도 안전할 겁니다. 란델 형님과 둘이 바다 구경이나 하고 오셔도 괜찮을 만큼요."

"······ 내 아우님께서 또 무슨 경솔한 계획을 세우셨는지."

"협상은 글렀고 협박을 받았으니."

그 이상의 자세한 설명 없이 계단을 다 오른 칼리안이 하인들의 인사를 지나쳐 계속 걸었다. 수면제에 취한 채 찾아오게 되었던 곳, 프레이르가 있다던 서재의 앞에 다다를 때까지 조용히 그렇게 발을 옮겼다.

- 벌컥!

칼리안이 힘주어 서재의 문을 열어젖혔다.

동생 놈이 이번에는 발 아닌 손으로 문을 연 것에 저도 모르게 안도한 플란츠를 뒤에 둔 채로.

피 냄새가 진동했다.

사홀 전 이곳에서 죽었다던 늑대들의 피 냄새였다.

칼리안은 그것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거리낄 것 없다는 듯 발을 놀렸다. 칼리안을 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는 프레이르를 향해서였다.

"칼리안······ 왕자님."

"네. 이제는 잘 알아봐주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프레이르가 대답 없이 칼리안을 쳐다봤다.

웃음기가 싹 사라진 얼굴로 프레이르를 마주 보던 칼리안이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혹시 내 기사를 본 적 있습니까. 내가 없는 동안 꽤 분주히 돌아다녔는데."

"저는 아직. 제대로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한번 보아야 할겁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스르륵, 어느새 붉게 변한 눈을 다시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당신 아들이니까. 휘트린."

프레이르, 아니.

휘트린이라 불린 이의 입이 조용히 다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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