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장. 알고 보면 순한(2)
목소리가 들렸다.
- 어디십니까.
언제 일어날지 알 수 없어 얀에게 도로 빌려 온 통신용 팔찌가 빛을 냈다. 짙은 보라색 셔츠의 소매 속에 가려져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정도의 희미한 빛이었다.
그 빛을 보지는 못했으나 목소리는 들은 플란츠가 답을 전했다.
- 너.
- 일어났습니다.
- ······ 회의장.
- 네.
- 언제.
- 조금 전까지 있다가 나가셨다 하던데 굳이 물으십니까. 방금 전에 일어났습니다.
- 알았어.
- 하루만 자려고 했는데 사흘이 지나 있네요.
- 내 아우님께서 약속을 어찌나 안 지키시는지.
- 사과드릴까요.
- 뭘.
- 약속 어긴 것.
- 됐어.
- 죄송합니다.
- 됐다고.
- 걱정끼쳐서.
언제나 그랬듯 참 무미건조한 대화를 나눴다.
그 후로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 눈을 뜨기가 무섭게 회의장으로 찾아온 동생 놈이 소란을 일으켰다.
사실 플란츠도 무언가를 집어 던진 적은 많았다. 그런데 무언가를 내리친 적은 없었다. 밀친 적도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회의장 문에서 저런 굉음이 나는지, 문을 밀친 것인지 발로 찬 것인지도 알 수 없을 만큼의 소음을 만든 적도 당연히 없었다.
- ······ 내 명성의 새 지평을 열어주시는군. 내 아우님께서.
불만을 보이는 플란츠의 붉은 눈이 묘한 빛을 냈다. 호숫가에서 사냥한 거대한 벌을 물어와 방에 풀어놓던 루시 혹은, 딱 한 입만 먹은 닭고기를 내려놓던 안네를 보았을 때와 비슷한 감상이 담겨 있었다.
사홀 밤낮을 처주무시며 아무래도 이번에는 정말 죽을 모양이다 싶던 내 동생이 회의장 문짝을 냅다 갈기며 입장하는 것으로 화려하게 재등장한 건 좋은데 지금 저 놈이 뒤집어쓴 게 하필이면 내 얼굴인 이 상황을 반기자니 난처하고 꺼려하자니 기꺼운 그런 기분이 됐다는 뜻이다.
회의장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세상 모르고 자빠져 자고 있던 놈이 어느새 일어나 멀끔하게 차려입고 온 것을 마냥 반가워만 하기에는 내 동생 저새끼가 내 얼굴을 가지고 하는 짓을 그저 좋게만 보기는 어렵지 않겠나. 형에 대한 원망은 저 혼자 하겠다 하더니 제 손으로 그 형이 욕 먹을 짓을 참 착실히도 만들어주고 있으니 말이다.
"내 동생에 대해 수근거리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하더니······, 아무리 내 동생이 너희들에게 그 억지 소문에 대한 일을 물었다 해도 설마 정말로 믿고 있으리라 여기지는 않았는데. 실망이군."
"저하. 헛된 소문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만에 하나라도 그 일을 발설하겠다 하는 것도 아닙니다. 저희는 그저,"
"덮겠다. 하던데."
"네. 맞습니다."
"그렇다면 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믿었다는 것 아닌가. 멍청하게도."
플란츠가 가만히 숨을 삼켰다.
그 곁에 앉아 칼리안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란델이 플란츠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네 염려를 덜겠구나. 건강을 되찾은 것 같으니."
"······ 네."
"너무 많이 되찾은 듯 보이기는 한다만."
"······ 네."
지금의 기분을 잘 알아준 것이 또 하필이면 윗방 거주자인 상황에 짜증이 치솟은 플란츠가 란델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답을 전했다.
그 사이, 잠들어 있던 사홀 동안 못다 한 것을 채워넣겠다는 듯한 짖음이 플란츠의 머릿속을 다시 울렸다.
- 설마 형님, 이렇게 소란하게 구셨던 적 없습니까.
- 없어.
- 아. 이런.
플란츠가 망나니 취급을 받는 것을 꽤나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서 플란츠의 대외 홍보용 인격을 써먹는 데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듯한 칼리안이 저벅 저벅 걸어 들어왔다.
언제나 한결같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을 만큼 완벽히 곧은 칼리안의 것과는 조금 다른 걸음. 푹 절여졌을때에만 완전히 곧게 변하는, 평소에는 아주 미세하게나마 앞이 더 벌어지는 걸음. 플란츠의 그런 걸음걸이를 똑같이 흉내내며 회의장을 가로질렀다.
- 제가 오해를 했네요. 이 정도는 하셨을 줄 알았습니다.
- 그 왕제만큼 대단한 망나니는 아니었어서.
- 아. 사실 저도 귀족들 앞에 문을 차고 들어서는 짓은 안 했습니다.
아. 그러셨구나.
문을 손으로 밀치신 게 아니라 발로 차신 거였구나.
- ······ 안 했다니. 의외로군.
- 귀족들이 체이스 형님 앞에서 '선왕께서는 이럴 때 어떤 식으로 했다' 해가며 아버지 칭찬을 하기에 특별 연회장 기둥을 부순 적은 있었지만요. 오러 안 쓰고.
아. 그러셨구나.
문을 차는 짓은 안 하셨어도 기둥을 부수신 적은 있었구나. 오러도 안 쓰고.
- 식사 중에 스스럼없이 칼을 던지 시기에 이 정도는 해보셨을 줄 알았습니다.
칼리안이 잠시 발을 멈추며 이런 말을 보냈다. 때문에 플란츠는 다시 한 번 기가 찬 얼굴을 했다.
그래. 햄 써는 나이프를 던진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건.
- 그러게 왜 하필 그걸 얀에게 던지셨습니까.
- 너한테 던졌으면 우연히 쳐낸 척 했을 거잖아.
- 제가 우연인 척 못 하게, 나서서 제대로 잡도록 하려고 얀한테 던지신 겁니까. 형님 동생 알맹이 바뀐 것 확인 하시려고요.
- 그래.
- 제가 안 잡았으면요.
- 잡았잖아.
- 만약, 안 잡았으면요.
- 눈 뜨자마자 시비를 거시는 건가. 아니면 혼을 내시는 건가.
- 문득 궁금해서요.
- 뭐가.
- 그때 형님 기분이 어땠을지.
지키기에는 이미 다 늦은 것을 알았을때.
- 갑자기. 왜.
- 그냥 문득. 그냥 갑자기.
- ······ 반말.
- 문득 걱정도 됐고.
탁!
조금 큰 소리를 내며 물컵을 내려놓은 플란츠가 고개를 돌렸다. 거울을 보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하는 칼리안의 연두색 눈을 마주봤다.
- 계속 말이 짧으신데.
- 에일라를 잃어버렸을 때 제가 그랬던 것처럼, 형님 너도 그랬을 것 같아서.
- 칼리안.
- 칼리안 맞습니다. 오래 잤다고 해서 제가 누군지 잊을 사람 아닙니다.
- 그런데. 왜.
- 그냥 여쭙는 겁니다. 보통은 그렇지 않겠습니까. 손 쓰지 못한 사이에 잃어버리게 되면······ 형님이나 저처럼.
이렇게 답한 칼리안이 눈을 들었다. 그리고 주변에 앉은 귀족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헤이젤 남작이 내 아우님의 별장에서 하피를 길러왔고······ 누군가 그것을 풀어두는 바람에 내가 목숨을 잃을 뻔 했는데. 그것도 두 번이나. 그런 일을 덮자고 요구하는군."
그 눈빛이 또 달랐다.
처음 이 영주성에 찾아와 모든 귀족의 입을 막았던 '실리케의 아들'과 달랐다. 이번에는 또 조금 다른 플란츠를 연기하고 있던 까닭이다. 베른이 겪어 봤던 플란츠 말고, 칼리안이 알고 있는 진짜 플란츠 말고, 플란츠가 참 열심히 만들어 둔 '그 망나니' 플란츠를 말이다.
"내 아우님에 대한 헛소문이 전하의 귀에 들어갈까 걱정하기라도 했나."
이번 일은 단순한 습격이 아니다.
왕자도 아닌 왕세자에 대한 살해 시도였다.
때문에 이번 일의 주동자가 프레이르로 밝혀진다면 르메인의 직속 기사단인 엘라자르에서 직접 프레이르를 대면하여 심문하게 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프레이르가 입을 잘못 놀려 르메인이 칼리안에 대한 그 이상한 소문을 듣게 될까봐, 그래서 이 일을 덮자 말하는 것이었다.
이런 대화를 회의장 밖에서 가만히 듣고 있다가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프레이르 말고 나머지 다른 귀족들은 칼리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에 대해서.
- 제가 가짜라는 얘기를 듣고 나서도 이 일을 묻어두자 하는 저의가 궁금했습니다. 제가 가짜라는 말을 믿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오히려 반대로 그 사실을 믿어서인지. 그것을요.
- 그래서 문을 괴롭히셨나.
- 네.
그래서 먼저 화를 냈다.
플란츠가 실리케의 부속물이 아니라는 사실은 깨우치게 했지만 그렇다 해서 플란츠가 '화를 잘 내는' 편이라는 소문까지 정정해 준 것은 아니었지 않나.
- 제가 화를 내는 사이에 형님은 디저트 접시만 내려다봤다는 것만으로는, 형님이 알고보면 순한 성격이라는 사실까지 알아볼 수 없을 테고······.
- 말 잘하다 갑자기 짖네.
- 형님께서 열심히 만들어 둔 대외 홍보용 인격으로 말미암아 '실리케를 닮지는 않았지만 성급하게 화를 내는 성격'이라 여기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것 참, 어떻게 알고 이럴 때 써먹기 딱 좋은 것을 만들어 두셨는지.
- 주무시는 동안 못 짖으셨나.
- 자는 동안 꿈을 안 꿔서요. 짖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프레이르의 어처구니 없는 말을 믿은 놈들'로 취급했는데 아니라고 반발한 놈이 아무도 없네요.
- 다누.
- ······ 갑자기 다누 얘기는 왜 하십니까.
- 다누가 알린 것 같은데.
저벅.
칼리안이 한 발을 더 내딛었다. 그 발 끝에 힘이 들어갔다.
-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플란츠가 크고 붉은 눈을 잠시 감았다 떴다.
사흘 전.
* * *
플란츠는 불현듯 그런 생각을 했다. 엘프의 도시에 잠시 들르면 안 되나, 하고.
그들의 대장로를 만나야 할 새삼스러운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사람의 기준으로는 도무지 이해 못할 짓만 골라서 해대는 다누를 다시 만나볼 용기가 생긴 것도 아니었다. 그들의 도시에 찾아가야만 하는 일이 생기지도 않았다. 다만 그저.
- 사아아아······.
바다가 보고 싶었다.
바람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불현듯.
정확히는 지난 겨울 내내 보았던 그 바다가 보고싶었지만 그곳에는 갈 수 없으니까. 앨런을 조른다면 얼마든지 몰래 다녀을 수 있는 곳이겠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플란츠가 제대로 된 명분조차 없이 세크리티아에 멋대로 드나들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대신 떠올린 것이 엘프들의 도시였다.
그냥 불현듯 바다가 보고 싶어서. 산 소리 말고, 계곡 물 소리 말고, 하피의 비명 소리 말고. 가만히 밀려들다 어느새 멀어지는 파도 소리가 이유없이 귀에 고파서.
"막내의 뒤를 그리 쫓아다니더니 닮아가는구나."
그리고 무엇보다.
바다에 가면 저 사람을 안 마주쳐도 될 테니까.
칼리안의 얼굴을 하고 칼리안의 옷을 입고 들어서자마자 들려오는 목소리에 플란츠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것에는 일말의 신경도 쓰지 않을 란델이 말을 이었다.
"네 시계도 똑같이 명을 다했더냐."
이렇게, 자정이 넘은 시간에 또 찾아온 플란츠를 타박했다. 칼리안으로 분한 것을 곧바로 알아봤으면서도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지도 않고 불편한 말을 먼저 꺼내든다.
"감았던 눈을 뜨게 되셨으니 열었던 입은 다물게 되실 줄 알았습니다."
"예절 교육 선생이 더는 오지 않아 기꺼웠는데. 돌아가면 다시 소란해지겠구나."
"형님과 함께 자리하는 수업이 줄어 기꺼웠는데. 돌아가면 다시 인내해야 되겠습니다."
상황을 좀 직시하게 된 만큼 누굴 닮았다는 말은 자제할 줄 알았더니, 이제는 실리케가 아니라 칼리안을 닮았다하고 있었다. 이런 란델의 말에서 르니에리 향기는 가셨으나 그렇다 해서 잔소리로 들리지 않는 것도 아니라 말대꾸를 했다. 그랬더니 교육 과정을 모두 마치고 돌아간 예절 교육 선생을 다시 불러오겠단다.
그래서 플란츠는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그 예절 교육 형님 당신도 같이 받아야 되겠다고.
- ······ 팔락.
하루 종일 읽어내려간 듯한 책을 한 장 넘긴 란델이 시선만 들어 플란츠를 쳐다봤다. 강하지 않은 차 향 너머, 자신을 직시하는 둘째 동생의 붉은 눈을 마주보다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막내가 네 얼굴을 하고 싸움을 말리러 들까 하였는데. 안 오는구나."
"싸움 말려 줄 그 막내 또 편찮습니다."
"그래서 그리 꾸몄더냐."
"네."
"말려 줄 사람이 없다하니······."
- 탁!
"얘기하거라."
체르밀 궁 4층과 5층 거주인 사이의 싸움을 말려 줄 3층 거주인이 아프다 하니 어쩌겠나. 하던 싸움은 일단 멈추고 대화를 해 봐야지. 왜 또 칼리안으로 변장하고 찾아왔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때문에 보던 책을 덮은 란델이 맞은 편 의자를 가리켜 보였다. 저벅 저벅 걸어온 플란츠가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 제발 좀 쉬게 해주고 싶던 입을 다시 움직여 말을 뱉었다.
조금 전 칼리안의 별장에서 겪은 일들을 설명했다. 그와 함께, 왕세자의 방에 칼리안을 눕혀두자마자 찾아 온 아르센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말씀드릴 일이 있습니다.'
'누워있는 게 내 아우님인데. 착각을 하셨나."
'착각 안 했습니다. 플란츠 저하.'
'······ 뭔데.'
'프레이르와 제온이 서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당장 누구든 아셔야 할 것 같아 말씀드립니다.'
'관련됐다니.'
'제온의 전사들이 프레이르를 암살하고자 찾아왔다 전부 죽었습니다.'
'공격을 받은 것을 두고 왜 관련됐다 하는데.'
'왕자님께서 이 지경이 되신 일에 프레이르가 연관된 듯 해서 그럽니다.'
'어째서.'
'사실 오늘 왕자님의 심부름으로 프레이야 왕비님과 어릴 적 왕자님의 모습을 조각해 프레이르에게 선물했습니다. 사과의 의미였습니다.'
'······ 그래.'
'엘프니까 감격하는 방식이 사람과 다를 수 있다고는 생각했습니다만. 프레이르는 두 분의 모습을 똑같은 눈으로 봤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그러니까.'
'이 곳에 없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 네. 그 반응이 아무래도 석연치 않아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질문을 하나 했습니다. 무슨 일인지를 알려준다면 당신의 조카가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찰나였지만 이미 죽은 제온 놈들의 시신을 봤습니다. 그리고 혼란스러움을 감췄습니다.'
아르센이 알려 준 프레이르의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누워있는 칼리안에게 물을 수가 없어 홀로 생각을 했다. 그랬음에도 답을 내지 못해 결국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부상을 입고 누워있는 왕세자의 방에서 나와 란델의 방으로 향한 뒤 얘기를 전했다.
플란츠의 말을 전부 전해들은 란델이 찻잔을 내려놨다.
조용한 목소리가 플란츠를 향했다.
"엘프들은 거짓을 말하지 못한다지."
"그렇습니다."
"프레이르라는 엘프가 막내의 앞에서 혼란한 기색을 감췄다면, 그것을 막 내가 못 알아볼 사람이더냐."
"아닙니다."
"허면 그 엘프가 막내를 독대했을 때까지만 해도 막내가 감추고 있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뜻이겠구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헤르츠 부군단장을 만나기 전에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네."
"하루 사이에 막내의 비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 말을 곧바로 믿은 뒤 혼란스러워했다. 그런 이야기가 되겠구나."
플란츠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칼리안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하던 사람이 칼리안의 영혼이 바뀌었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믿을 수 있나 하는 의문이 든 까닭이다.
"홀로 똑똑한 척. 답을 몰라 나를 찾아왔더냐."
"홀로 똑똑한 척하는 제 머리 꼭대기에 있는 듯 구셨지 않습니까."
"다누의 말이라면 믿을 테지."
말싸움을 잇는 대신, 란델이 이런 말을 했다.
"엘프들의 어머니 말씀이십니까."
"달리 또 있더냐."
그래. 딱 하나의 가능성이었다. 칼리안이 숨긴 것에 대한 내용을 다누가 알려주었다면 프레이르는 믿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하지만 다누는.
"다누는."
"막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이곳의 귀족들이 누구를 닮았는지."
가만히 앉아 플란츠를 지켜보던 란델이 말했다.
버림을 받았든 외면당했든, 그들은 결국 벗어날 바 없는 다누의 자식이라고. 칼리안은 그렇게 말했었지 않나.
그 말을 떠올리던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렸다.
"다누의 말이라면 믿을 겁니다. 하지만 다누는 분명 칼리안을 아끼는 듯 보였습니다. 멋대로 칼리안의 정체를 알리는 것이 칼리안에게 도움이 될 것이 없다는 사실 정도는 알 겁니다."
"아끼는 것이더냐, 아니면 필요로 한 것이더냐."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달칵, 하고 찻잔을 내려 놓은 란델이 나지막이 말했다.
"키우던 개가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이를 드러낸다면 목줄을 매고 가둬둔다 하였다. 헌데. 나를 주인으로 모실 것이라 여겼던 개가 나에게만 이를 드러내고 나 아닌 이들에게는 꼬리를 흔든다면, 그런 개에게 주인이 누구인지를 가르치려면, 어떻게 하겠느냐."
플란츠의 눈꼬리가 가늘게 변했다. 란델의 말이 이어졌다.
"목줄을 매고 가둬두고······ 똑같이 그리하겠지. 다만 그렇게 강제하면 개가 따르던 이들이 물어볼 것 아니더냐. 순한 개를 왜 그렇게 대하느냐고. 그럴 때 개 주인은 어찌하겠느냐."
바람이 불었다.
플란츠가 말했다.
"물린 자리를······ 보여줄겁니다."
"그래. 물린 자리를 보여주겠지. 이 개는 당신들이 생각하던 그런 개가 아니다. 생각한 만큼 순한 성정이 아니다. 그리 말하겠지. 그리하면 그들은 순순히 수긍할 테고, 주인은 비로소 자신의 것이라 여겨왔던 그 개를 온전히 손에 넣지 않겠더냐."
칼리안을 손에 넣으려 했다. 다누가.
그런 다누에게 반기를 들었다. 칼리안이.
중간에 발을 멈추었으나 분명 다누에게로 향하려 했다. 엘프들을 다 죽이겠노라 말했다. 다누의 눈이 닿지 않았을리 없을 숲 속에서, 칼리안이 그리 말했다. 그래서 다누가 프레이르에게 사실을 알린 것이다.
경고였다.
계속 그렇게 엇나간다면 차라리, 네 정체를 모두에게 알려 너를 고립시키겠노라는.
"······ 명분은 지켜야 할 테니. 우선 영지들을 모두 시찰하고 나면······,"
긴 숨을 들이 쉰 플란츠가 이렇게 입을 뗐다.
그 뒤 란델의 심연을 마주보며 말을 이었다.
"형님 혹시, 바다 보러 가실 생각 있습니까."
엘프의 도시.
그 곳의 짙은 바다를 담은 듯한 푸른 눈.
그런 눈에 생명을 품은 빛이 들었다.
"나쁘지는 않겠구나."
바람이 불었고, 답이 들려왔다.
* * *
저벅.
칼리안이 한 걸음을 더 앞으로 냈다.
- 그래서 다누가 형님을 미워하나 봅니다. 쥐여드린 적도 없던 목줄을 어느새 꼭 쥐고 놓질 않으시니.
- 내 아우님께서 이렇게 잘 짖으시는데. 잘 잡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귀족들의 앞에서 무언가를 생각하듯 잠시 눈을 감은 칼리안이 다시 말을 보냈다.
- 사실 제 비밀 아는 사람 참 많습니다.
- 알아.
- 그런데 대부분은 제가 누구든 그리 개의치 않을 사람들입니다. 이전의 저를 만난 적도 없을 뿐더러 왕위에 오를 사람의 알맹이가 누구든 신경 안 쓸 사람들 아닙니까. 형님이나 란델 형님은 예외로 두더라도요.
- 그래.
- 그럼 프레이르는. 이 자리의 귀족들은. 그들도 신경쓰지 않을까요. 다누 덕에 제 비밀이 무엇인지 믿게 됐다 하더라도 신경이 안 쓰일까요.
- 아니어야 했겠지.
- 그쵸. 저들은 제가 어머니의 아들이기를 바랐던 사람들이니까. 그런데도 저들은 입을 다물자 하네요. 프레이르는 어떻게 여기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들은 그렇네요.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끼는 '칼리안'을 손 쓰지 못한 사이에 잃어버렸다······ 그런 사실을 알았다면 비통해하든 지금의 저를 원망하든 내치든 사실을 밝히려 들든 했어야 하는데도 그러지를 않습니다. 그건 왜일까요.
- 상관······ 없어서.
- 네. 아무래도 그런 거겠죠.
- 그래.
- 저를 어머니의 아들로 보지 말라 했던 이야기가 제가 누구든 신경쓰지 말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씁쓸하네요.
칼리안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려 을라갔다.
"내 동생을 지켜온 것은 휘트린이 아니었다. 너희들의 동경이 아니었다. 너희들이 보내오는 영지 수익금과 선물이 아니었다."
지금의 이 모습과 이 얼굴에서는 앞으로 언제까지고 절대로 나오지 못할 말을 다시 꺼냈다.
"나였다."
칼리안이 연두색의 눈을 굳힌 채 나비아를 바라봤다. 이곳에 앉은 귀족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 나를, 란델 형님과 전하를, 제 핏줄 하나 알아보지 못한 무능한 이로 매도하지 말도록. 또 다시 내 동생에 대해 의심을 보인다면······ 휘트린은 새 이름을 가지게 될 것이다."
다누가 무슨 생각을 했든.
칼리안이 이렇게 엘프들을 향해 경고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