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62화 (463/527)

제82장. 알고 보면 순한(1)

사냥감에 물려 본 사냥꾼이 하는 행동은 둘 중 하나다.

겁을 먹거나, 혹은 그 사냥감을 아예 말살시키려 들거나.

'네가 사냥해야 될 놈들에게 겁 먹지 말거라.'

대사막의 전사.

긍지높은 늑대.

그 말은 틀렸다.

모든 늑대들이 똑같이 나눠가질 긍지 따위는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 저들도 결국은 왕국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 사는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긍지가 높은 이들이 있는 반면 늑대라는 호칭조차 과분히 여겨야 할 이들이 태반이었다.

긍지를 잃은 늑대들.

아르센은 그런 놈들을 사냥하며 대사막을 누볐다.

그랬으니 당연히 놈들에게 물린 적도 있었다. 검에도 베여 보고 도끼에도 베여 보고 화살에도 베여 봤다. 그럴 때 마다 아르센의 스승은 항상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럴 것이면 검을 들지 왜 마법을 배웠느냐?'

제일 먼저는, 무기를 휘두르는 놈들의 코앞까지 다가가 얼음의 창을 내지르는 제자의 버릇을 혼냈다. 놈들의 생이 끝나는 꼴을 지켜보고자 그러하다는 대답을 한 이후에도 변함없이 그것을 물었다.

'네가 사냥해야 될 놈들에게 겁 먹지 말거라. 다시 저 놈들의 사냥감 노릇이나 하다 죽을 셈이냐?'

그 뒤에는 놈들에게 입은 상처로 말미암아 겁을 집어먹고 뒷걸음질하지 않도록 조언했다.

'많이 아프냐?'

그리고 마지막에는, 늘 한결같이 걱정을 했다.

덕분에 아르센은 이제까지 일생의 절반 이상을 대사막에서 보낼 수 있었다. 그곳에서 긍지를 잃은 늑대들을, 대사막의 썩은 뿌리같은 전사들을 사냥하며 보냈다. 그리고 다시 도시로 돌아와 사냥꾼이 아닌 마법사로 살았다. 그렇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 욱씬!

그레이 브리센이 변경백이었을 때. 칼리안의 심부름으로 변경백령의 그레이를 만나고 돌아오던 길에서 아르센은 다시 조금 바뀌었다. 에우리아를 따라 들어선 숲에서 마주했던 전사들 때문이다. 그들과의 싸움에서 속수무책으로 밀리다 칼리안의 도움 덕에 간신히 목숨을 연명하게 된 이후, 제온에 소속된 대사막의 전사들을 본 아르센은 늘 환상통을 겪었다.

제온에 소속된 대사막의 전사들은 그 전까지 아르센이 알던 이들이 아니었다. 훨씬 더 강했다. 아르센을 사냥꾼도 마법사도 아닌 사냥감으로 만들려 했다. 끊임없이, 겁을 먹게 하려 했다.

"후······."

여지없이 신경을 긁는 어깨의 통증을 떨쳐낸 아르센이 고개를 들었다.

이제는 겁을 먹지 말라 말해 줄 스승도 없다.

그러니 어쩌겠나. 알아서 겁을 치워내고 사냥꾼이 되어야지.

그렇게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은 아르센이 손을 움직였다.

- 달칵.

그리고 당연스레 아르센의 사냥감이어야 할 것들의 냄새가 풀풀 풍겨오는 서재의 문을 열었다.

- 덜걱!

그런데 안 쪽으로 열리던 문에 무언가가 걸리는 것이 느껴졌다. 인상을 조금 쓴 아르센이 문을 한 번 당겼다가, 당겨 여는 문이 아님을 재차 확인하고 다시 밀었다.

문을 여는 움직임에 따라 묵직한 것이 밀려나는 느낌이 든다.

- 스르륵······ 툭!

그러더니 아르센의 구두 위로 무언가가 미끄러지듯 떨어져 닿는 감각이 이어졌다. 때문에 시선을 내려 그것을 확인한 아르센의 눈이 보다 더 매섭게 변했다.

"헤르츠 백작이신 것으로 기억하는데. 맞습니까."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자신의 발 위로 떨어져내린, 문에 기대어 죽은 이의 팔을 구두 위에서 떨궈낸 아르센이 고개를 들었다.

"맞습니다."

"다시 뵙겠습니다. 남작 피어스 헤이젤입니다."

세상에 알려진 또 다른 이름으로 자신을 밝힌 사람은 다름아닌 프레이르였다. 그리고 지금 막 아르센에게서 팔을 치운 셈이 된 이는 대사막의 늑대였다.

"아르센 헤르츠입니다."

비록 남작이라 하나 칼리안과 혈연이 있는 자가 아닌가. 때문에 아르센은 프레이르를 낮춰 부르지 않으며 인사를 받았다. 그 뒤 프레이르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이들이 왕자님을 노린 겁니까? 아니면 관계없는 적입니까."

"칼리안 왕자님을 쫓아 숨어든 이들은 아닙니다. 저와 관련있는 자들입니다. 혹시라도 왕자님이나 왕자님의 다른 형제분들께 습격이 있을까 걱정하지는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왜. 여기에 있습니까."

"백작님을 따로이 뵙기로는 처음인 자리에 이런 꼴을 보이게 되어 죄송합니다. 종종 있는 일이고 다시 한동안은 습격이 없을 테니 혹시나 이들이 다시 들이닥칠까 염려치 말고 쉬십시오."

질문에 대한 정확한 대답이 아니었다.

때문에 한동안 가만히 서 있던 아르센이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아마도 프레이르가 직접 제거했을, 서재 이곳저곳에 쓰러져 죽은 여섯 구의 시신들을 지나쳐 프레이르의 앞까지 걸어갔다. 그 뒤 품 속에 손을 넣어 주머니를 꺼냈다.

- 달칵.

그리고 이곳에 온 목적, 프레이야와 칼리안과 얀을 닮은 강아지가 조각된 얼음 동상을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붉은 천에 싸인 그것을 바라보던 프레이르가 아르센을 쳐다봤다.

"우리 왕자님······ 칼리안 왕자님께서 사과의 의미로 준비하신 선물입니다."

"사과라 하심은,"

"많은것에 대한 사과입니다."

불신하고 시험하고 조통을 하고 역정을 낸 일.

프레이르의 앞에 죽은 프레이야를 내놓은 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일들을 '많은 것'이라 한데 묶어 말한 아르센이 방금 내려놓은 조각상을, 정확히는 조각상을 감싼 붉은 천의 위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리고 손가락을 뻗어 그것을 가리켜보였다. 열어 보라는 의미였다.

"네. 그럼."

한 번 더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프레이르가 손을 움직 였다.

방금 전 죽은 이들의 시신을 뒤에 둔 것을 알고는 있는지. 살벌한 광경을 뒤에 둔 프레이르가 말없이 칼리안이 건넨 선물을 풀었다.

- 사락······,

동상을 감싼 천이 하나 둘 테이블 위로 흘러내렸다.

그리고 오래지않아 속에 든 것을 드러 냈다.

프레이야와 칼리안.

나란히 앉아 웃고 있는 모자의 얼굴.

그런 모습을 본 프레이르가 잠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시 다물었다. 그리고 또 한 번 입을 열었다가 안되겠다는 듯 굳게 닫았다.

다물린 입은 한동안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열리게 되었다.

"······ 아."

그러더니 이런 소리를 꺼내놓았다.

그 말이 전부였다. 다른 감상이나 거듭된 감사의 인사는 없었다. 그저 한 글자, 말이라 하기에도 어려울 짧은 소리. 그것이 프레이르가 꺼내놓은 단 하나의 표현이었다.

프레이르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아르센이 입을 열었다.

"얘기하십시오."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엘프들에게 쫓겨난 것이 아니라 노려지고 있는 것이 맞는지. 제온의 사냥감으로 낙인이 찍혔는지. 얘기하시면,"

어떤 사고의 결과로 도출되었을지 알 수 없으나 분명한 확신이 담긴 말이 아르센의 입에서 나와 프레이르를 향했다.

프레이르가 고개를 들었다.

한여름의 깊고 맑은 계곡이 담긴 푸른 눈이 프레이르를 마주 응시했다.

"남작의 조카께서 도움을 주실 겁니다."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가 이렇게 멋대로 장담을 했다.

그것은, 만약 그 조각상을 본 프레이르가 단 한 단어라도 제대로 된 감상을 보냈다면 절대로 꺼내지 않았을 그런 말이었다.

* * *

칼리안 쪽으로 발을 옮기던 셋의 걸음이 제지됐다.

한 팔로 칼리안을 붙든 시오나가 나머지 한 팔을 내밀어 다른 일행이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막은 까닭이다.

"더 가까이 오지 않는 것이 좋겠군. 다시 피를 토하면 튈 수도 있으니까."

그러는 동안에도 칼리안은 깨지 않았다. 하피를 상대한 직후에만 해도 시오나의 손이 닿자마자 정신을 차렸었는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잠시만 자겠다 말하며 눈을 감은 뒤 다시 뜨지 않고 있었다.

또 그렇게 기대어 선 채로 기절한 것이다.

습관처럼.

플란츠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뜨며 낮은 목소리를 냈다.

"······ 미친놈."

클린을 썼다.

얼굴과 머리카락 색은 바꿨으나 옷을 입은 태가 그대로다. 목소리도 변하지 않았다. 플란츠의 외형으로 변장하면서 얼굴만 겨우 바꿨다는 소리다. 세세하게 신경을 쓸 여력도 없이 정신을 잃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클린을 썼다.

옷에 얼룩져 묻은 제 피에 독이 섞였을까봐. 오늘따라 눈에 참 잘 띄는 분홍색 재킷을 골라 입은 까닭에 빼도박도 못하고 저 옷으로 갈아입어야 될 플란츠가 혹시나 그 피에 영향을 받을까봐.

플란츠가 그리 말하지 않았던가. 클린을 못 쓴다고. 그래서 이런 와중에 기어코 수고를 들여 마법을 썼다. 플란츠가 얼마든지 클린을 발현할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그래야 클린을 '아직 안 배웠다' 했던 말이 참이 되니까.

미친 놈.

지독한 새끼.

만약 세렌티가 정말로 저 놈을 마지막 패로 쓰려고 굳이 데려와 다시 살려낸 것이라면 그 이유는 저 놈이 검 쓰는 만큼 머리도 쓸 줄 아는 능력 좋은 놈이라서가 아닐 거다. 분명 세상에 다시 없을 지독한 놈임을 알았기 때문일 거다.

"너무 걱정하지 말도록. 소드마스터는 이 정도 독에 죽지 않는다."

그것에 중독된 뒤 살아남은 사람이 없다던 하피의 독이 얼마나 극성맞은지를 손수 겪은 플란츠를 앞에 두고, 소드마스터가 약 같은 것에 취해 잠들리 없다 장담한 뒤에 두 번 없을 단잠을 잤던 시오나가 일행을 안심시켰다.

불행히도 그 일화를 알고 있던 까닭에 더할 바 없이 불안해진 플란츠가 시오나 말고 내 동생의 지독함을 믿자며 매우 열심히 되뇌기 시작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처는 적당히 아문 것 같군. 역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칼리안의 옷을 걷어을린 시오나는 담담한 얼굴로 옆구리의 상처를 살피며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더는 피가 흐르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 드미레아에게 건네받은 붕대로 상처를 감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일라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플란츠를 향해 입을 열었다.

"우선 옷부터 바꿔 입으셔야 되니까 별장 안으로 들어가요. 얼굴도 만드시고요."

"······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플란츠가 최근 참 익숙해진 칼리안의 모습으로 외형을 다시 바꿨다. 그 사이 칼리안을 들춰 업은 시오나가 성큼성큼 별장 안으로 발을 옮겼고, 플란츠와 드미레아가 그 뒤를 따라갔다.

곧 에일라가 플란츠의 옆으로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왕자님이 왕자님의 시종에게 연락했어요. 영주성에서 이미 이쪽으로 군사들을 보냈대요. 도착할 때가 됐어요."

이번에는 플란츠가 에일라를 쳐다봤다.

조곤조곤한 에일라의 목소리가 계속됐다.

"칼리안 왕자님인 척 하면서 이번에도 저하가 다친 것으로 알리세요. 그렇게 하시래요."

"누가."

"왕자님이요."

"언제 말했는데."

"피 토하실 때요."

- 에일라.

- 지금 이 상황에? 그 꼴로 나를 부르는 거예요?

- 미안. 내가 아무래도 또 잠들 것 같아서.

"라시드가 사라진 거의 직후에요. 저하 만나서 말하기 전에 상태 나빠질 것 같다고, 저한테 먼저 전해뒀어요."

설명을 덧붙인 에일라가 반지가 끼워진 손을 들어보였다.

라시드가 사라진 직후, 얀에게 연락을 취해 영주성의 상황을 먼저 확인한 칼리안이 에일라에게 이야기를 전했다. 드미레아와도 통신이 가능했으나 영주성 안에서 계속 서로 모습을 바꿔가며 생활한 사정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에일라에게 이야기를 전하는 편이 낫다 여긴 까닭이다.

"저 증거들 다 공개하는데 칼리안 왕자님이 다친 사실까지 알려지면 저하께서 힐 경이나 소공작님과 손을 잡고 왕자님에게 해를 가하려 했다는 쪽으로 이야기가 나을 지도 모른다 했어요. 왕자님이 일어나서 해명하기 전에 상황이 악화될 수 있다고요."

"휘트린이니까."

"네. 하필 여기가 휘트린이라 칼리안 왕자님이 해를 입으면 저하나 1왕자님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길 지도 몰라요. 발칸이 있기는 하지만 프레이르라는 사람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니까요."

"······ 그래."

"편지가 있던 것은 비밀에 부치는 것이 낫겠다고, 그러니까 편지는 필체만 익혀둔 뒤에 태워 없애고 서재 쪽은 아예 가보지 않은 것으로 해 두래요. 수련장에서 발견된 지그프리드의 검 조각을 왕자님께서 '실수로 부서뜨린' 이야기는 이 쪽에서 알리되 왕자님의 시종이 지그프리드 가문 사람인 건 먼저 밝히지 말라고도 했고요."

"그럼 힐 경이나 소공작은 그것을 확인하러 왔다 해야 하나."

"아뇨. 이곳의 일은 도착 후에 안 것으로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했어요."

에일라가 고개를 가로저 었다.

"그 일 때문에 왔다 하면 증거를 없애거나 미리 손을 쓰려 했다는 의심을 하게 되잖아요. 검에 대한 것을 숨길 필요는 없게 됐지만 지그프리드 쪽으로 이목이 집중되면 안된다고 했어요."

"그럼."

"왕자님과 힐 경의 친분이 있고 힐 경은 프레이야 왕비님과도 인연이 있으니까요. 하피를 만난 이야기를 전해들은 힐 경이 왕자님을 걱정하기도 했고 오랜만에 프레이르도 만나볼 겸 왔다고, 다만 힐 경은 이동 마법진을 혼자 쓸 권한이 없어서 소공작님과 함께 왔다 하는 거죠."

앞뒤가 안 맞는 변명거리는 아니었다.

실제로도 시오나는 보증인을 동행할 때에만 이동 마법진을 쓸 수 있었다. 이제까지는 왕실과 발칸, 그리고 지그프리드의 일부 사람들에게만 통행이 허락된 곳이었지 않나. 때문에 아직 시오나를 온전히 믿지 못한 앨런이 제한적인 권한만 주도록 조치를 했었다.

"그렇게 되면 굳이 소공작이 수도를 비우고 이 곳에 을 명분으로 세울 것이 마땅치 않은데."

"명분 필요한 사이 아니에요."

이렇게 말한 에일라의 손이 칼리안과 드미레아를 한 번씩 가리켜 보였다.

"두 분 카이리시스에서도 사이 좋기로 유명해요. 그런 정혼자를 만나러 오는데 무슨 명분이 필요해요?"

"······ 그렇군."

"네."

"알았어."

그 사이 전해온 말이 참 많다.

라시드와의 싸움을 마치고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있기 어려울 것을 느낀 뒤 일행들을 마주 대하기까지의 짧은 시간. 오 래 걸리지도 않았던 그 시간 동안 플란츠가 알아서 하기 어려울 것들을 알아서 짐작해 해야 할 일들을 결정하고 에일라에게 알렸다.

족히 한주먹은 될 만큼의 피를 토했다.

그런 것을 쏟아내는 와중에 연락이라니. 뒷수습이라니.

동생 놈이 얼마나 지독히 미쳤는지를 또 한 번 확인받은 플란츠가 빨간 눈을 찌푸릴 즈음, 긴 말을 다 전한 에일라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별장에 들어선 뒤 계단을 오르던 시오나와 드미레아를 향해 물었다.

"그렇게 해달라 했는데, 가능한가요?"

에일라와 플란츠의 대화를 함께 듣고 있던 시오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문제 될 것은 없을 듯 하군. 프레이르와 안면이 있는 것도 맞으니까. 내 입으로 거짓말을 하기는 어렵겠지만 그 내용을 소공작이 설명한다면 고개는 끄덕여 주지."

"네. 설명은 내가 하겠습니다."

드미레아가 답을 더했다.

에일라의 말을 다 기억에 담아 둔 플란츠가 말했다.

"다른 건."

"나머지는 저하와 1왕자님이 알아서 하시면 된대요."

"알았어."

"아. 그리고 물 많이 드시래요."

"물은 왜,"

되묻던 말을 멈춘 플란츠가 짜증 가득한 눈으로 칼리안의 등짝을 쳐다봤다.

"······ 내 아우님께서 기어코 짖으셨군."

저 동생 놈이 하나도 태평하지 않은 속을 가지고선 참으로 태평하게 잘도 짖어대고 기절했다.

물 많이 마시란다.

안 시들게.

진짜 짜증나는 내 동생 새끼.

"알았어."

대체 언제까지 어린애 취급을 할 생각이냐고 꼭 따져 물을 거다. 저 새끼 눈 뜰 때까지 안 시들고 벼르고 있다가 꼭 말할 거다.

내가 꼭, 진짜 꼭.

* * *

루시와 안네를 보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하나보다.

동글동글한 두 털뭉치를 무릎에 올려두고 쉬려면 아직 조금 더 참아야 하나보다.

- 자박, 자박.

하루가 지났다.

깨어나지 않았다.

- 자박, 자박.

이틀이 지났다. 사흘이 지났다.

깨어나지 않았다.

- 탁.

하루만 자겠다고 약속을 하질 말든가.

시들지 말라 다짐을 시켜두질 말든가.

"······ 하."

그리 곱다던 미간 아래에서 긴 한숨이 이어진다.

이래서야.

걱정을 하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왕세자'가 머무는 방에서 나와 드넓은 회의 장의 입구로 가던 내내, 일부러 내놓는 특유의 발소리를 따라하느라 온 신경을 다 쓴 플란츠가 발을 멈췄다.

그리고 잠시 고개를 돌려 복도의 창에 비친 얼굴을 확인했다. 그 뒤에는 목에 매어 두었던 붉은 타이를 조금 더 죄였다.

- 달칵.

타이를 단정히 한 가늘고 긴 손이 다시 움직여 허리춤 즈음에 닿았을 때, 왕궁의 것보다는 기름칠이 덜 된 육중한 문이 작은 소음을 내며 열렸다.

플란츠가 고개를 들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움직이며 회의장의 안쪽에 앉아있는 귀족들을 천천히 훑었다.

- 저벅.

사람들의 앞에 설 때에는 발 끝에 조금 더 힘을 주고서. 턱을 너무 들어올리지 않도록, 시선은 아주 살짝 아래를 향할 정도로만. 어깨를 펴되 가슴을 내밀지는 않도록, 걸어가는 발 끝이 벌어지지 않도록, 그리고.

"반갑습니다."

웃으며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왕족의 걸음에 무슨 차이가 있느냐 하겠지만 란델과 플란츠와 칼리안의 걸음은 결코 똑같지 않았다. 란델의 걸음에 상대를 향한 시선이 담겼고 플란츠의 걸음에 상대와의 높이 차가 담겼다면 칼리안의 걸음에는 스스로에 대한 여유가 담겨 있었다. 분명한 차이였다.

그 차이를 잊지 않으며 걸어갔다. 이 곳에 모인 스무 명 남짓의 귀족들을 하나하나 다 바라보는 것 뿐 아니라 의자를 빼주는 하인을 향해 고맙다는 듯 양 쪽 입꼬리를 올려주는 것 역시 거르지 않았다.

곧 플란츠가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휘트린의 영주 나비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요."

"네, 왕자님."

고개를 끄덕이며 건넨 대답에 나비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휘트린의 숲과 왕자님의 별장에서 발견된 것은 하피가 맞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이후 나비아는 지루하지만 꼭 필요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하피가 이미 사라졌고 어느 곳에서도 그와 유사한 몬스터가 발견되지 않았으며, 때문에 하피가 어디에서 나타났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는 등의 이야기 말이다.

요컨대 지금 이 자리는 하피와 연관 된 사람이 누구인지를 확인한 나비아의 조사 결과 보고와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할 예정인지에 대해 칼리안에게 알리고자 마련된 것이었다.

"······ 때문에 이미 사망한 외성 수비대장, 라우즈 트리온과 연루된 이들을 수배중입니다. 그리고 그를 외성 수비대장으로 임명하도록 추천하고, 습격이 있던 날 수비대의 일정을 변경케 하였으며, 별장의 관리를 담당하기로 했던 각각의 남작인 예카 에몬즈, 도라 슐린, 델라키오 라비린을 체포하고자 추적 중에 있습니다."

"전부 다 내가 이미 확인해서 먼저 일러주었던 내용들 뿐 인데. 다른 사실은 없습니까."

한동안 입을 다물고 플란츠를 쳐다보던 나비아가 말했다.

"왕자님."

"듣고 있습니다."

"왕자님의 기사와 발칸의 부군단장이 일에 대해 계속하여 조사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네. 내가시켰습니다."

"조사를······ 멈추어 주십시오. 하피가 나타난 일에 대해서는 저희 영지민 모두가 함구하겠습니다. 외부로 발설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이유는."

"······ 이유는."

이렇게 말하던 나비아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런 나비아를 향하고 있던 붉은 눈에 선연한 빛이 든다.

"헤이젤 남작이 연관됐기 때문입니까."

프레이르.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이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나비아로부터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맞습니까."

플란츠가 다시 물었다.

나비아가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이 지난 뒤, 잔뜩 갈라진 나비아의 목소리가 회의장을 울렸다.

"헤이젤 남작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무슨 말."

"······ 그것이······,"

"내가 실은 3왕자의 탈을 쓴 가짜다, 라고. 그런 말을 했나."

플란츠가 물었다.

어느새 하대로 바뀐 질문인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비아는 대답을 전하지 못했다.

"하."

플란츠가 웃었다.

그 붉은 눈에 어린아이와 같은 웃음이 어렸다.

곧 플란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라고. 나는 분명 칼리안이 맞다고. 어디서 그런 헛소문을 듣고 믿었느냐고. 그리 물으려 했다.

그런데 그 때.

- 콰앙!

커다란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모두의 시선이 문 쪽을 향했다.

- 저벅, 저벅.

거리낄 것 없다는 듯.

숨기는 것은 조금도 없다는 듯.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는 걸음걸이로 회의장에 든 이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연두색 눈으로 그 자리의 모두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 감히."

분노를 억누른 낮은 목소리가 모두를 향해 내리꽂혔다.

"내 동생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형으로 본 것이냐. 너희들이, 나를."

칼리안이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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