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61화 (462/527)

제81장. 있잖아, 드미레아(6)

정말 반갑다고.

칼리안이라면 라시드에게 그리 말하리라고 생각했었다.

"실망이 큽니다."

그런데 칼리안은 플란츠의 예상에서 벗어난 말을 했다.

라시드와 인사를 주고받지도, 허울 가득한 안부를 묻지도, 욕을 하거나 공격을 보내지도 않았다. 화를 돋우고자 하는 것이 분명할 웃음을 짓지도 않았고 화를 참는 것이 역력한 웃음을 터뜨리지도 않았다.

"나는 남작이 뱀 새끼인 줄 알았던 터라 꽤 재미가 있었는데······ 그조차도 못 된 새끼인가 싶어서."

진심으로 실망한 얼굴이 되어서는 이런 말을 했다. 드미레아의 얼굴을 살피거나 곁에 선 시오나의 반응을 주시할 생각도 않은 채로.

- 시오나 힐이 눈치 채도 상관없어요?

- 시오나는 내 어머니와의 관계 때문에 나를 돕기로 한 게 아니라 제온 때문에 나랑 손을 잡기로 한 거야.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더라도 등을 돌리지는 않아. 칼 빼들고 전하께 찾아갈지는 모르겠지만.

- 그건 뭐, 그 전하 잘못이니까.

- 그래. 아무튼 다른 말은. 더 없었어?

- 아직. 제대로 대화 나누기도 전에 왕자님이 온 거예요.

- 그럼 오자마자 그레이 브리센을 대신 죽이고 자기는 살려달라, 그 말부터 했다는 거야? 대신 내 비밀을 누가 아는지 알려주겠다면서?

- 서로 한 번씩 엄마아빠 욕 주고 받은 다음에요.

- 아······ 그래.

- 저 집안 좀 이상해.

- 같은 집안으로 묶지는 말아.

- 그럴게요.

브리센만은 반드시 제 손으로 닫아걸겠다는 듯 굴던 놈이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꿨단다. 그레이를 내어 줄 테니 자신을 구명해달라, 그딴 제안을 했단다.

그 속내가 너무 뻔해서 실망을 했다.

"저하께서는 제 말에 흥미를 보이신 것 같습니다만 실망을 하셨습니까."

"내 형님 저하께서 흥미를 보이셨다 한들, 내가 남작에게 실망하지 않을 이유가 있습니까."

그래.

라시드가 미끼를 던졌다.

칼리안의 비밀을 누가 아는지 알려주겠다는 미끼 말이다. 그 말에 혹한 연두색 송사리가 파닥파닥 낚여들었다.

- 실망했다 어쨌다 해 가며 말 돌리려 해도 늦었어요. 왕자님한테 바다 소금내 나는 게 사실이라고 이미 다 확신했겠는데.

에일라의 말이 다시 들려온다.

표정 하나 달라지지 않은 칼리안이 답을 보냈다.

- 어쩔 수 없지.

- 그러게 진작 오지 왜 이제야 왔어요?

- 살짝 다쳤어. 그리고 내가 없어야 지금까지랑은 좀 다른 대화를 하겠거니 했어. 순진한 완두콩 꼬셔내서 내 비밀부터 확인하려 들 줄은 나도 몰랐지.

- 당연히 관심 가지겠죠. 그걸 왜 몰랐대.

- 알았으면 대신 좀 나서주지 왜 지켜보기만 했어?

- 그러게요. 나라도 나서 볼 걸 그랬네.

하여튼 키만 쑥쑥 자란 완두콩같으니.

생각을 좀 해보란 말이다. 라시드가 정말 제 목숨줄이나 구명하자고 플란츠를 찾아왔겠나. 일주일 쯤 널어놓은 시금치 이파리같은 저 놈이 정말 그럴 놈이던가.

자신의 무력이 얼마나 되는지, 실리케와 브리센을 왜 그렇게 증오하는지, 플란츠에 대해서는 왜 또 그리 날을 세우는지, 도대체 뭘 믿고 늘상 저렇게 자신만만한지, 그래서 종내에는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 이 많은 의문들 중 단 하나도 알지 못하게 꽁꽁 싸맨 의뭉스러운 놈이 고작 제 목숨값을 거래하자고 찾아왔을까. 차라리 텐실로 돌아가면 그만인 것을.

그런데 속이 뻔히 보이는 제안에 완두콩이 홀라당 넘어갔다. 칼리안의 비밀을 누가 아는지 알려주겠다는 말에 혹해서 제 패를 다 내보였다. 라시드나 란델에 대해서는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다가 '칼리안의 비밀'을 언급하자 곧바로 반응을 했다.

드미레아를 쳐다보며 난처해한 그 순간 '검은 고양이에게 소금내가 난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며 그 사실을 자신은 이미 알고 있었음을 라시드에게 고스란히 가르쳐 준 셈이다.

- 왕자님한테 '체이스 전하'가 찾아왔던 걸 저 놈이 아는지 모르는지, 알고 있었으면 대사막의 전사에게 체이스 전하의 초상화를 전해준 것이 저 놈인지 다른 놈인지, 왕자님은 알아요?

- 아직. 아직 몰라.

- 곤란하네요. 이쪽 패는 다 보여주고 저쪽 패는 아직도 못 본 셈이잖아. 저하에게 이것저것 가르쳐주고 있다 하더니 뭘 가르쳤어요?

- 아니야. 얘기하긴 했어. 거래는 좀 야무지고 똘똘하게 해야 된다고.

- 그게 다야?

- 그거면 됐지.

- ······ 그래도 증거 태우지 말자고 얘기할 땐 똘똘하셨어요.

- 그러셨어?

- 네.

수련장 안의 증거는 기어코 내버려두기로 했나보다. 직접 나서 브리센과 마주보기로 했나보다. 썩 마음에 드는 결정은 아니지만 뭐, 어쩌겠나. 계속 잘 살려드려야지.

- 거 봐. 똑똑하시다니까. 이건 그냥 사기치는 놈을 아직 제대로 안 만나봐서 그래.

아무튼 거기까진 야무지게 굴어놓고 라시드의 수에는 홀랑홀랑 넘어갔으니. 완두콩에게 더 가르쳐야 할 것이 여전히 산더미다.

- 게다가 남이랑 거래 잘 하는 게 좋은 일은 아니잖아? 그걸 벌써 배워서 뭐에 쓰겠어. 또 나한테나 써먹겠지.

- 두둔해주려고 애쓰지 말고 라시드 브리센 입이나 막아요. 죽여놓든 회유해놓든.

- ······ 응.

- 다친 건. 괜찮아요?

- 아무렇지도 않아.

- 걱정할 여지 안 주는 건 나쁜 버릇이야. 그러지 말아요.

- 안 죽을 정도는 돼. 너무 걱정하지 마.

- 믿어주는 셈 칠게요.

입을 열 필요가 없으니 그만큼 빠르게 이어진 대화를 마쳤다.

곧 칼리안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플란츠의 흉내를 내던 때의 눈빛을 한 채 라시드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나에게도 관심이 생긴 것이면 나에게 직접 얘기해요. 여기저기 찔러보면서 신경 긁지 말고."

"여쭌다면 알려주실 생각이었습니까?"

"아니."

라시드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실 것 같았습니다."

"나를 잡아 죽이고 란델 형님을 손 위에 올려두고 형님 저하를 홀로 남기고. 남작이 원한다던 그 목적을 하루아침에 바꿔들고 나에게 관심을 가졌든, 그래서 굳이 이렇게 찾아와 내 화를 돋워 놓든, 뭘 하든 상관은 않겠습니다만 실망스런 모습은 그만 보고 싶습니다."

"그만 보겠다 하심은,"

"남작이 기대하는 바와 같을 겁니다."

답을 들은 라시드가 싱긋, 웃음을 보였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생긋, 마주 웃어줬다.

그 웃음. 둘의 얼굴에 똑같이 떠오르던 웃음. 그것이 일순간에 똑같이 지워졌다. 둘을 지켜보던 이들이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바로 그 순간,

- 우우웅!

- 카아아아앙!

두 개의 칼날이 서로를 들이받았다.

어느새 뽑혀나온 라시드의 검과 진작에 만들어진 칼리안의 검이 상대의 숨통을 탐하며 밤하늘을 울렸다. 서로의 멱을 잡아 뜯을 것처럼, 찢어발길 것처럼, 그렇게.

뱀의 독니와 맹수의 발톱이 난만하게 얽혀들기 시작했다.

* * *

바람이 불어닥쳤다.

검과 검이 맞부딪혔을 뿐인데 순간적인 바람에 옷깃이 펄럭인다.

몰아세우듯 검격을 내리퍼붓는 칼리안의 기세에, 라시드가 훌쩍 몸을 날려 꽤 먼 곳까지 발을 물렸다. 일행들로부터 떨어져서 싸우겠다는 칼리안의 의견을 일단 수용하기로 한 까닭이다.

덕분에 한 발도 움직이지 않았으나 둘에게서 멀어지게 된 플란츠가 고개를 돌렸다. 십여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시오나와 드미레아의 얼굴을 살폈다.

- 일단 나중에. 왕자님과 얘기하겠습니다.

드미레아로부터 간단한 수어가 돌아온다.

바로 뒤의 시오나를 신경 쓰는 것이리라.

입을 다문 플란츠가 고개를 돌려 칼리안 쪽을 쳐다봤다. 드미레아는 시오나를 등지고 있었다 하나 플란츠는 아니었던 터라 고개를 끄덕인다 하더라도 시오나의 눈에 띌 것 같아서였다.

"······ 실수했군."

아주 작게 흘러나온 말.

귀 밝은 시오나가 듣더라도 의심하지 않을 정도의 말.

곁에서 그런 말을 듣게 된 에일라가 플란츠를 올려다봤다. 무슨 소리인지를 묻는 듯한 얼굴이라 플란츠가 대답을 전했다.

"내가 라시드 브리센의 수에 넘어간 것 같은데."

에일라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쉼없이 검격을 주고받는 칼리안에게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라시드 브리센이 무슨 수를 부렸어요?"

"나를 떠 본 말에 넘어간 듯 한데."

"글쎄요. 어떤 걸 떠보고 어디에 넘어갔다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 에일라의 작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칼리안 왕자님처럼 피곤하게 살아오질 않아서요, 저는."

라시드 브리센이 무슨 수작을 부렸고 플란츠가 어떻게 걸려들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말했다. 칼리안 정도의 사고방식을 가지질 않아서 그렇다 했다.

칼리안의 말마따나 대해 본 이라고는 왕궁의 사람이 전부였을 플란츠가 칼리안처럼 사고하고 반응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그런 왕세자가 지금의 일을 제 탓으로 여길까봐 그냥 에일라 스스로도 라시드의 속내를 몰라보는 척 했다. 그것을 알아보는 칼리안이나 자신이 남다를 뿐이라 설명해 줄 만큼 사근사근한 성격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 콰가가각!

- 쿠구궁······ 카아앙! 카강, 캉!

에일라가 그렇게 어영부영 새 주인이 맡아 키우는 완두콩까지 잠시 돌보는 사이, 라시드가 밟고 서 있던 바닥에 긴 검흔과도 같은 자국이 생겨났다. 칼리안의 검이 만들어낸 흔적은 아니었다. 칼리안은 지금 반대편에서 라시드를 향해 검을 올려치고 있었다.

- 스스스······!

그런데 또 한 번, 땅 위에 기다란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투명한 검을 휘두르는 것처럼 말이다.

- 휘익!

- 카가가강!

바람이었다.

색은 커녕 형체도 없는 바람의 칼날이 이곳저곳에서 불어닥쳐 라시드를 노렸다. 사방에서 짓쳐드는 칼리안의 붉은 검을 막아내던 라시드가 자신의 검을 크게 한 바퀴 회전시키며 바람을 쳐냈다.

그 뒤 검을 다잡은 라시드가 자신을 향해 몰아치는 날선 바람과 정신없이 내리꽂히는 칼리안의 검격을 막아내고 튕겨낸 뒤 되뻗었다.

- 카아아아아앙!

그 자체로 붉은 빛덩이와 같은 칼리안의 검과, 은색 검에 제온의 붉은 오러를 씌운 라시드의 검이 다시 얽혀든다. 어둠 속에 든 두 개의 불꽃이 그렇게 끊임없이 맞붙었다.

- 우웅!

- 휘이이잉······ 쌔애액!

바람의 칼날을 막아내면 바람의 화살이 날아들고, 그것을 막아내면 붉은 오러의 단검이 쇄도했다. 피해내면 다시 짓쳐들고 고개를 돌리면 어느새 등 뒤에서 검이 날아왔다.

라시드는 그것을 전부 다,

- 카가가강! 카가각, 카앙!

전부 다 막아냈다.

단 하나도 빠짐없이 막아냈다. 재킷자락 하나, 머리카락 한 올도 베여나가지 않은 채 모조리 다 막고 쳐냈다.

- ······ 딸랑.

그 모습을 보던 시오나의 검 끝이 작게 떨린다.

조금 전에 들었던 라시드의 수수께끼같은 말은 잠시 잊었다. 검은 고양이에게 소금 냄새가 난다는 아리송한 말이 무슨 뜻인지에 대해 당장은 크게 관심가지지 않았다.

대신 눈앞에 보이는 칼리안의 움직임과 수많은 검격, 그리고 라시드의 사이에 자신의 그림자를 투영해 넣었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만들어낸 가상의 자신을 저 사이에 넣고 협공을 시도했다.

"방해를 하겠군."

그 결과가 시오나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칼리안과 대련했을 때 칼리안은 검만 썼다. 지금처럼 미친듯이 바람을 일으키고 오러의 단검을 날려대지 않았다. 지금 저 사이로 들어가 라시드를 몰려다 오히려 칼리안의 공격에 상처를 입을 판이다.

때문에 섣불리 나서지 못한 채 싸움을 지켜보는데, 곁에 있던 드미레아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상대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라시드 브리센 말인가."

"네. 저것을 어떻게 다 막습니까."

저 바람과 저 칼날과 칼리안의 저 공격을 어떻게 다 막고 있나. 휘몰아치는 태풍 속에 서서 물방울을 막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 같다.

제온의 붉은 돌이 내어주는 치유의 힘과 붉은 오러를 가졌다 해서 저런 움직임이 가능할 수는 없다. 라시드는 이제 고작 스무 살이다.

"열 다섯에 검의 길에 오른 사람을 함께 보고 있으면서 이해를 논하나."

시오나의 대답이었다.

하마터면 칼리안은 경우가 다르다 답할 뻔하던 드미레아가 눈매를 굳혔다.

"설마."

"제 혈육들이 한 짓을 생각해봐야지. 에반 브리센도 숨겼는데 그 손주라 해서 못 숨길 이유가 있나."

직접 심어본 적 없기 때문에 그 효과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제온의 돌. 만약 자신이 그것을 심장에 넣게 되면 앨런을 이겨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했던 칼리안의 말이 떠오른다.

"저 자의 오러가 보인다는 말을 들은 적 없습니다."

"적어도 나나 칼리안 왕자보다는 쌓인 오러가 많은가보지. 지그프리드 공이나 카스트린 경이 저 자를 본 적이 있다 하던가? 나는 못 들었는데."

라시드의 움직임 역시 빨랐다. 칼리안과 마찬가지로 가끔씩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를 냈다.

그들 중 라시드를 응시하던 드미레아가 침음을 냈다.

"······ 소드마스터가 여섯이 아니었군요."

"그것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을 것 같군."

짧게 대답한 시오나가 자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 딸랑!

간혹 울리던 방울이 큰 소리를 낸다.

검집에 든 검을 뽑아낸 까닭이다.

조금 전 시오나는 저 사이에 끼어들어 보아야 방해만 될 것 같다 하지 않았나. 그 말과 달리 끼어들어 싸울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때문에 고개를 돌린 드미레아가 시오나를 향해 물었다.

"힐 경. 들어가 싸우실 수 있겠습니까."

"저 자를 같이 죽이자며 데려온 것 아니었나."

"맞습니다만."

"심장에 돌 넣은 놈들은 칼리안 왕자만의 적이 아니니까. 그래도 내가 들어가면 저 자를 혼자 상대하느라 목숨줄 태우는 건 그만 할 테지."

정신을 또 놓기 전에 라시드 브리센을 끝장내려 무리하고 있는 것이 뻔하다. 시오나가 들어가면 칼리안도 저렇게 마법과 오러를 낭비하는 짓은 그만 할 테니 자신이 방해가 될 일도 없지 않겠나.

툭, 하고.

빈 검집을 바닥에 떨어뜨린 시오나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발을 박찼다.

- 우우웅!

날선 바람이 가득한 곳, 붉은 오러가 어지러이 흐드러진 곳을 향해 몸을 쏘아내듯 내달렸다.

- 슈우우욱! 카강!

- ······ 딸랑!

두 검과 바람이 뒤엉킨 곳에 방울 소리가 끼어들었다.

소리없이 움직인 붉은 눈이 시오나를 확인하곤 둥글게 휘었다. 라시드를 향해 치닫던 바람 한 줄기가 꺼뜨러지듯 흩어진다.

기껏 찾아와선 구경만 하는 줄 알았더니 이제야 도우러 왔느냐고, 그런 말을 할 틈은 없었다. 그저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함께 라시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 카가강, 카아아앙!

바람이 사라진 대신 그보다 더 드센 푸른 오러가 라시드의 심장을 노렸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칼리안을 상대해나가던 라시드가 제 검을 들어 앞을 막았다.

- 투욱.

어느새 몸을 띄운 칼리안이 그 검 끝을 밟고 뛰어올랐다. 그리고 수직으로 내리떨어지듯 라시드의 정수리를 향해 검을 찍어내렸다. 신속히 몸을 빼낸 라시드가 시오나의 검을 쳐올리더니 그것으로 칼리안의 공격을 대신 막았다.

공중에서 몸을 비튼 칼리안이 다시 한 번 라시드에게 공격을 보냈다.

- 카앙!

- 캉, 카아앙!

칼리안의 공격을 쳐내는 라시드의 검 끝에 바람이 뭉쳐든다.

바람을 부려 라시드의 검을 잠시 붙든 칼리안이, 지체없이 라시드의 심장을 향해 칼날을 내뻗었다.

- 카앙! 카아아앙!

- 딸랑······ 카가가각!

어느새 꺼내 든 단검으로 심장을 막아낸 라시드가 몸을 회전시키며 검을 뺐다. 그의 몸과 발이 빠져나간 자리에 시오나의 검격이 내리찍혔다.

그것을 본 라시드가 한 발을 더 뒤로 물렸을 때.

녹빛의 시선이 아주 잠시 시오나를 향한 찰나의 순간.

- 쌔애애액!

라시드의 발밑에서 만들어진 새카만 단검 하나가 번개처럼 움직였다. 그 단검의 끝에 바람의 마력이 들러붙는다.

소용돌이를 끌어안은 칼리안의 단검이 막을 길 없이 쏘아진다. 첨예한 검 끝에 닿은 것을 망설임없이 꿰뚫어내며 그대로 뻗어나갔다.

- 으드득······.

- ······ 콰득, 콰지직!

휘청!

이 싸움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라시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 사이에도 멈추지 않은 칼리안의 단검이, 흔들리는 시야를 바로잡은 칼리안의 오러가, 막아설 틈 없이 라시드의 옆구리로 파고들어가 등 뒤로 빠져나왔다.

- 촤아악!

찢긴 살갗과 옷자락 새를 비집고 나온 선혈이 온갖 곳으로 튀어올랐다.

- 후두둑, 후둑!

바람의 마법은 상처를 헤집는다.

칼 끝에 어린 바람이 제 주변의 것을 죄 난자했을 것이다. 오러에 얽힌 피어가 뼛속 깊이 공포를 각인했을 터였다.

"······ 제가, 실수를."

라시드의 옆구리로 파고들어 간신히 심장만 빗겨간 뒤 몸 밖으로 빠져나간 작은 날붙이 하나. 그 한 번의 공격이 그렇게 라시드의 발을 멈춰세웠다.

- 울컥!

되삼킬 새 없이 튀어나온 핏덩이가 라시드의 암갈색 재킷을 검붉게 물들였다.

붉은 빛무리가 얽혀들며 라시드를 감싸안았다.

칼리안이 지닌 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속도로 상처를 치료해나가기 시작했다.

놈이 지닌 정보와 '수배자' 신세인 놈의 목숨을 제대로 재어 본, 때문에 더는 놈을 살려두지 않기로 한 칼리안이 한 번 더 오러를 내뻗었다. 돌의 힘이 라시드를 치료하기 전에 제대로 목숨을 끊어놓기 위해서였다.

- 우우웅······!

- 타앗!

차오르는 핏덩이를 기꺼이 되삼킨 칼리안이 라시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똑같이 뻗어나간 시오나의 검이 라시드의 심장을 노렸다.

그렇게, 붉고 푸른 두 날이 하나의 목숨에 닿았을 바로 그 순간.

- 카가각!

새하얀 빛이 아른거리는 견고한 실드 하나가 둘의 검을 가볍게 튕겨냈다. 곧바로 불어닥친 날선 바람이 그 실드를 가르지 못하고 흩어졌다.

"미안. 끼어들어서."

초대받지 않은 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칼리안의 시야에 들어온다. 매섭게 빛나는 붉은 눈이 이제 막 찾아온 이의 검붉은 눈을 노려봤다.

칼보다 더 예리하게 벼려낸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델리아."

"내가 얘를 좀 데려가야 할 일이 생겼어."

울컥!

다시 치미는 핏덩이를 바닥에 뱉어낸 칼리안이 검을 다잡았다. 폭발하듯 터져나온 살기가 아델리아를 꿰뚫을 것처럼 휘몰아쳤다.

고개를 휘휘 가로저으며 살기를 떨친 아델리아가 입을 열었다.

"대신 내가 한 번 살려줬었잖아. 이 나라에 세르제인을 초대해주는 값으로만 치기에는 네 목숨이 너무 저렴해지잖아. 그러니까 이것까지 같이 쳐."

가벼운 말이 칼리안을 향한다.

당장 그 목을 잡아뜯을 것처럼 달려드는 붉은 단검들을 전부 다 무시하면서.

"얘는 나중에 다시 잡아. 내가 도와줄게. 미안, 진짜 미안."

"너······!"

아델리아에게 달려드는 칼리안의 어깨를 시오나가 붙들어 잡았다. 눈앞에 나타난 흰 머리 여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 위압감은 잘 느낀 까닭이다. 미안하다 말하고는 있으나 만약 이 이상 더 달려든다면 오히려 칼리안이 위험하겠다 여긴 탓이었다.

시오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 아델리아가 한 쪽 눈을 찡긋했다. 그러더니 라시드를 붙잡은 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7서클의 아델리아.

다른 이와 함께 공간이동할 능력이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 쿨럭!"

눈앞에서 먹잇감을 놓친 칼리안이 갑작스레 허리를 꺾었다. 그리고 또 한 번 핏덩이를 토해냈다.

- 타닥, 타닥!

그 모습을 본 것인지 아델리아 때문에 놀란 것인지.

멀찍이 있던 일행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숙인 채 짧은 한숨을 내쉰 칼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사이 가까이 다가온 플란츠를 보며 몸을 일으켰다.

"저 하루만."

이렇게 말하며 또 올라오는 피를 되삼킨 칼리안이 잠시 눈을 감았다.

- ······ 사락!

칼리안의 마력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진다.

검은 머리카락의 끝이 옅게 변했다.

붉은 눈이 연두색으로 바뀌었다.

더 가늘어진 목소리가 플란츠를 향했다.

"하루만 잘게요. 형님."

아무런 설명 없이 멋대로 플란츠의 외형으로 모습을 바꾼 칼리안이 시오나에게 몸을 기댔다. 그리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