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장. 있잖아, 드미레아(5)
혹시 먼지가 앉지는 않을까.
조금 걱정이 되어 겉을 감쌌다.
그러다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은 아르센이 손짓을 했다.
나란히 앉아있는 프레이야와 칼리안.
그 둘의 사방을 감싸고 있던 얇은 얼음 막이 아르센의 손길에 스르륵 사라졌다.
"······ 고약한 짓을 할 뻔했어."
아르센은 화염 마법을 익히고자 했으나 그의 스승이 반대했다. 아르센과 더 잘 맞는 속성을 알아봤던 까닭이다. 만약 스승이 없었다면 아르센은 자신의 주종으로 당연히 불을 선택했을 터였다. 불을 가장 좋아했으니까.
그런데 칼리안은 어떠한가. 혹시나 더 잘 맞는 다른 속성이 있는지를 알아봐 줄 스승이 없지 않았나. 그러니 '바람'이란 어린 날의 칼리안이 가장 좋아하는 속성이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 칼리안을 만들었으면서, 이렇게나 바람이 많이 부는 휘트린의 어딘가에 놓아두도록 하기 위해 만들었으면서, 그깟 먼지가 내려앉을까 걱정된다며 한 점의 바람도 불어들지 않도록 죄 막아 둘 생각을 했다니. 읊조린 말마따나 고약한 짓을 할 뻔했다.
"아무래도 정말 피곤하기는 한가보군."
서로 참 많이 닮은 모자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이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려니 마음 한 구석에 바람이 드는 기분이 되어 버렸다.
프레이야의 손에 라프라니아 꽃다발이라도 하나 만들어 쥐여드릴까. 그러면 바람이 덜 시리려나. 칼리안의 손에 바람개비라도 하나 만들어 쥐여드릴까. 그러면 바람이 덜 추우려나.
너무 잘 만든 까닭에 너무 쓸쓸해져버린 조각상을 한동안 그렇게 내려다봤다.
"개를 키우겠다 하지 않았더냐."
그런데 이렇게 또 한 번, 해답이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에서 일어난 에우리아의 호위를 받으며 밤 산책을 마치고 이제 막 돌아온 란델이었다.
잠시 자리에서 일어서 인사를 건넨 아르센의 파란 눈이 란델의 푸른 눈을 바라봤다. 그러다 이내 란델의 말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아지 말씀이십니까."
"늘 그리 말하던데."
"······ 네. 그것이 좋겠습니다."
결국 더 쓸쓸해지기만 할 꽃다발이나 바람개비 말고 강아지를 한 마리 안겨드리면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한 아르센이 다시 마력을 모았다.
무슨 강아지를 만들어야 할지 고민하지는 않았다. 아르센이 만들어낼 만큼 생김이 익숙한 강아지는 지그프리드 공작저에서 키우던 푸들 '얀'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카밀론에 간 뒤의 칼리안이라면 사람보다 크다던 대사막 개를 데려와 키우든 어디서 새카만 늑대나 재규어를 한 마리 데려와 이름을 '개'라고 지은 뒤에 멋대로 키우든 할 듯 싶지만 어쩌겠나. 푸들밖에 모르는 것을.
- 사각, 사각!
그렇게 다시 한동안 더 얼음을 매만지는 소리가 났다.
덴이 내어 온, 숙면에 좋다는 차를 마시기 시작한 란델은 아르센을 향해 이제 좀 나가라 말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찻잔을 들었다 내려놓아가며 창 밖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 후."
오래지 않아 테이블에서 손을 뗀 아르센이 허리를 쭉 폈다.
프레이야를, 칼리안을, 칼리안의 바람을, 그리고 얀을 닮은 강아지를. 그 모두를 다 담은 작은 동상이 드디어 완성됐다.
- 드르륵!
아르센이 작은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란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늘 밤에는 세이렌 경이 있을 겁니다."
"언제까지 그리 할 생각이더냐."
"왕자님께서 안심하실 때까지는 근접 호위를 해드릴 예정입니다."
"알아두마."
"네."
아직은 안전을 장담하기 어려운 까닭에 에우리아가 호위를 하게 될 것이라 알렸다. 그리고 발칸의 대원 한 명에게 부탁해 준비해두었던 붉은색의 실크 천으로 동상을 싸맨 뒤 자신의 마법사 주머니 안에 조심스레 넣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란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르센은 다시 입을 열었다.
"수고하십시오."
란델은 대답하지 않았다. 두 번째 인사는 자신이 아닌 에우리아에게 건넨 말임을 알아들은 까닭이다.
"어. 가."
"네, 협회장님."
아무도 없던 곳에서 짧은 대답이 들렸다.
싱긋 웃으며 답한 아르센이 란델의 방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뚜벅뚜벅, 걸음을 옮겨 프레이르가 있는 서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칼리안에게 이것을 보인다면 더 좋겠으나 칼리안은 이 동상을 '당근'이라 하지 않았던가. 채찍이 있었다면 당근을 안겨주는 것을 미룰 이유가 없으니 곧바로 가져다주려는 것이었다.
- 뚜벅, 뚜벅.
걸음을 옮겼다.
귀빈실의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 다시 걸었다. 영주성의 깊은 곳, 프레이르가 있을 서재를 향해서.
바람이 불어든다.
그 바람이 좋아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 ······ 뚜벅.
걸음을 멈췄다.
영주성의 깊은 곳, 프레이르가 있던 서재의 앞에서.
조용히 멈춰 선 아르센이 프레이르의 서재 문을 노려봤다.
- 사아아아······.
짙은 냉기가 손 끝에 모여든다.
곧 아르센이 서재의 문 쪽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나 서재의 문을 열지는 않은 채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어느새 매섭게 변한 파란 눈에는 서늘한 빛이 어려있었다.
특유의 모래바람 냄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사냥감들의 냄새.
'······ 늑대.'
대사막의 늑대.
그들의 냄새가 프레이르의 서재 앞을 맴돌고 있었다.
* * *
독을 담은 피가 흐른다.
피에 담긴 독이 번진다.
하피와 엘프와 인간.
먼 곳에서 셋의 공방이 이어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붉은 눈이 깜빡, 내려앉다 제 자리를 찾는다.
"불안한데······ 드미레아."
바람 사이로 자그마한 혼잣말이 담긴다.
'하피가 있었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스승님. 그런데 마석 대신 제온의 돌을 가진 하피였습니다.'
'그것은 또 어찌 된 영문인지······ 그나저나 하피의 독성이 강할 터인데, 무탈하십니까.'
'형님이 중독됐습니다만 란델 형님이 계셔서요. 괜찮아졌습니다.'
'란델 왕자가 시간을 썼겠군요.'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요. 그래도 큰 탈이 나지는 않은 듯 하니 다행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같은 놈을 또 마주하게 되면 무리하지 말고 저를 부르시지요.'
'하피인데······ 정말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당장 왕자님 목숨이 오락가락 하는 것만큼 큰 일이 생기지는 않을 터이니.'
'······ 네, 그럼. 혹시나 또 만나게 되면 스승님께 말씀드릴게요.'
'그리하십시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서라도 그 땅을 밟지는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생각보다 강한 독을 지녔으니.'
'네. 잊지 않겠습니다.'
하피의 독이 어린 땅을 밟지 말라 하였다.
생각보다 강한 독이라고, 앨런이 그리 말했다.
다시 한 번, 깜빡.
손에 튄 독 때문인지 밟고 선 땅에서 올라온 독기운을 들이마신 까닭인지. 하피의 독에 중독된 정확한 이유를 생각해보지 않은 플란츠를 떠올렸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피를 흘리기 시작한 하피와 드미레아를 쳐다봤다.
"내 정혼자 죽는 꼴을 두 번 보기는 싫은데······ 나는."
칼리안이 실소하듯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뿐, 얌전히 있으라던 말을 어기고 앞으로 나서거나 오러의 검을 날려 보내 시오나와 드미레아를 돕는 등의 일을 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시오나도 드미레아도 뒤에 선 칼리안을 크게 염려하지 않으며 싸움을 이어나갔다.
- ······ 우웅.
대신, 그들의 발 밑. 검붉은 하피의 피가 낙인처럼 남겨진 땅 위. 그곳에 넓고 얇은 실드가 펼쳐졌다.
- 사아아아······!
드미레아의 등 뒤에서 하피를 향한 바람이 불어나갔다. 바람이 좋은 휘트린답게.
검을 쓰는 드미레아의 앞을 실드로 막는 것은 방해만 될 뿐이니까. 그렇게 불러낸 실드와 바람이 드미레아를 도왔다.
- 두근!
- ······ 울컥!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도록, 인지하지 않으면 알 수 없도록, 그렇게 살며시 도왔다.
소용없는 괜한 짓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뭐 어떤가. 만일을 위한 대비를 한 셈이라 여기면 될 일이니 말이다.
그래도 그런 괜한 짓을 한 덕에 저렇게.
- 우웅! 우우웅!
저렇게 멋진 모습을 보게 됐지 않나.
그랬으면 된 일이다.
"멋있다. 내 정혼자님."
시간이 꼭 눈에 띄어야 흐르는 것이 아니며 바람이 꼭 눈에 어려야 불어가는 것이 아니듯이.
······ 하고 생각했는데.
내가 느끼기에도 참 멋진 속말이었는데.
"제정신이십니까. 지금."
혼났다.
"얌전히 계시라 했는데 그 말도 안 들으십니까."
하필이면 딱 그 때 까무룩 정신을 놓쳐버려서 들켰다.
피냄새를 더 숨기지도 못해서 고스란히 들켜버렸다. 비밀만 잘 들키는 게 아니라 혼날 짓을 하는 것도 잘 들키는 모양이다.
바닥에 엎어지려는 것을 시오나가 붙들자마자 다시 눈을 떴던 칼리안이 헤실헤실 웃었다.
"걱정되잖아. 내 정혼자님 다칠까봐."
가능한 넓은 범위로 마법을 쓰느라 많이 줄어든 오러와 다시 사라져가는 독기운, 옆구리의 상처가 빠르게 아무는 것이 느껴진다. 정말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고는 한 곳도 없다는 듯 쳐다보는 드미레아의 시선도 느껴진다.
그렇게 한동안 칼리안을 쳐다보던 드미레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 왕자님 구해드린 값은 안 받겠습니다."
"나도 너를 구해준 셈 쳐 주는 거야?"
"네. 같은 값으로 칠 겁니다."
"그래."
알아봐줘서 기쁘다는 듯, 칼리안이 작은 웃음 소리를 내다 곧 입을 다물었다. 독에 타들어간 채 올라오는 피를 목 뒤로 넘겨야 했던 까닭이다.
앨런처럼 몸에 든 독기운을 따로 모아 뱉어낼 만큼이 되면 참 좋을 텐데. 지금으로서는 멀쩡한 부분까지 중독되지 않도록 오러로 막는 것이 최선이다. 그래도 그나마가 되니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겠지만.
"프레이야도 이렇게 무모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너는 참 지독하군."
"아들이 어머니보다 나은 면이 하나 쯤은 있어야지."
혀를 쯧 차는 시오나에게 대답한 칼리안이 제 옷을 내려다봤다. 이제껏 신경 쓰지 못했던 꼴이 그제야 보인다.
- 자박.
시오나에게 반쯤 기댄 칼리안의 발이 앞으로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옅은 분홍빛의 재킷에서 검붉은 피얼룩이 싹 사라졌다.
긴 한숨을 쉰 드미레아가 수련장 쪽으로 한 걸음 빨리 움직였다. 싸움에 들기 전, 시오나로부터 수련장 안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는 말을 들은 까닭이었다. 그들을 불러 이제 영주성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이었다.
"수련장 뒤로 나간 것 같다."
"거기 없어, 드미레아."
그런데 시오나와 칼리안의 목소리가 드미레아를 막았다. 살짝 고개를 돌려 시오나를 쳐다본 칼리안이 가느다란 목소리를 냈다.
"시오나 말대로. 아까 폭음이 있었어. 수련장 뒤쪽에 있을 거야."
"싸움이 또 있다는 겁니까. 그런데 왜 여기 이렇게 느긋하게 계십니까. 제가 가볼까요."
"아니······ 싸움이 아니라."
"아니면요."
"얘기해줄게. 그런데 칼 들지 마, 드미레아. 지금 함부로 칼 쓰면 위험해."
"칼이라니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깜빡.
정신을 다시 붙든 칼리안이 대답을 전했다.
"내 생각엔 온 것 같아."
"누가 왔다는 말씀이십니까."
"라시드 브리센."
우뚝, 드미레아의 발이 멈춘다.
자신이 이곳에 왜 왔었는지를 다시 떠올렸나 보다. 라시드 브리센이 얀을 노린다 했던 그 말이 도로 생각난 것이 분명하다. 검집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었어. 라시드 브리센이 아니야."
"아니면 누구입니까."
"지금 길게 설명은 못해. 나 아파, 드미레아."
어쨌든 라시드가 아니야.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드미레아의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함부로 뽑지 말아달라는 의미였고, 드미레아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드미레아를 보며 고맙다는 듯 웃은 칼리안이 가만히 발을 멈췄다.
"안 가십니까. 그가 찾아왔다면 이미 진작에 뛰쳐나가셨을 분께서."
"······ 그게 아니라. 너한테는 말을 했는데 내가 내 말을 안 들을 것 같아서."
라시드에게 참 많은 인내심을 쏟아붓고 있는 칼리안의 붉은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렸다.
얀을 노린 것이 라시드가 아니었으니 드미레아는 라시드에게 더 화를 낼 일이 없겠지만 칼리안은 아니지 않나. 알고 있는 것이 많을 테니 당장 죽일 수 없는 놈을 앞에 두고 과연 참을 수 있을지. 그것을 장담하지 못하겠어서 잠시 발을 멈췄다고.
곧 칼리안이 긴 숨을 들이쉰 뒤 고개를 도리도리 가로저었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발을 옮겼다.
자신의 발 소리가 어느새 사라진 것도 잊은 채로.
* * *
플란츠와 에일라를 번갈아 쳐다본 라시드가 입을 열었다.
"이 나라의 왕세자라는 분께서 어찌나 겁이 없으신지."
"머리가 좋아서."
머리가 너무 좋아서 겁을 낼 상황도 생기지 않는다. 무엇을 보든 판단이 앞서는데 이 상황에 라시드를 앞에 두고 겁을 먹을 일이 어디 있겠나.
끄덕끄덕.
적당히 고개를 주억거린 라시드가 검을 쥔 손을 움직였다. 그것을 본 에일라가 똑같이 검을 들었으나 플란츠는 움직이지 않았다.
에일라를 보며 싱긋 웃은 라시드가 조용히 검을 들었다.
- 철컥!
그리고 그 손을 천천히 움직여 검집에 집어넣었다.
"한 가지는 알겠습니다."
라시드의 말이었고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 라시드가 말을 이었다.
"저하께서 제 어머니보다 저를 더 잘 알아보신다는 것. 그건 이제 알겠습니다."
"친해질 생각 없는데."
"설마 사교나 나누자 드린 말씀이겠습니까. 놀란 마음에 꺼낸 소리이니 신경쓰지 마십시오."
"안 써."
"다행입니다."
라시드가 한 발을 뒤로 물렸다.
에일라와 라시드의 사이로 플란츠가 들어온 터라 둘 사이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던 까닭이다. 서로 마주보기 역할 만큼.
"브리센 후작을 제가 직접 없애두려 했습니다."
"알아."
"제가 노리는 것을 누가 채가는 것이 껄끄러워서 이번에는 반드시 빼앗기지 않으려 했는데. 아무래도 상황이······."
"본론. 짧게."
피곤해 죽겠다.
요즘 말을 너무 많이 하고 있다. 주변에 죄다 말 많은 놈들만 있다. 내 동생의 새 부하나 키리에 말고는 하나같이 말이 많다.
"브리센 후작 넘겨드릴 테니 저에 대한 수배령은 풀어주십시오. 이곳 저곳 다니자니 불편한 것이 많습니다."
생각한대로, 라시드가 이런 말을 했다.
그 말이 마음에 들 리 없을 에일라가 눈을 찌푸렸고 플란츠가 답을 보냈다.
"내가, 왜."
피식 웃은 라시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것이 많으실 텐데요. 저에 대해서."
"별로."
플란츠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떠보는 말에 넘어가 줄 생각 없었다.
동생 놈이 그러지 않았던가. 거래를 할 때에는 야무지고 똘똘하게······ 아니. 잘 따져가면서 손해보지 않을 거래를 하라고.
"혹은 누구의 목숨을 취해야 1왕자님의 심장에 묶인 것을 풀 수 있을지······."
"전혀."
안 궁금하다.
그건 정말 하나도 안 궁금하다.
"이런······ 아쉽습니다. 3왕자님과 그리 사이좋게 지내시기에 첫째 형님과도 사이가 나쁘지 않을 줄 알았으니 말입니다."
"착각을 했군."
"착각입니까."
"값싼 것들 뿐이군. 그대 목숨값인데."
란델의 심장에 든 맹세의 인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플란츠의 태도에도, 라시드를 구명해주는 것보다 란델의 목숨을 더 싼값으로 치는 대답에도, 라시드는 조용히 웃음만 지었다.
저벅.
플란츠가 한 발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자신의 검에 손을 가져다 댔다. 라시드를 살려둘 만큼 구미가 당기는 말들이 나오질 않으니 말이다.
"더 없으면."
"자꾸 그렇게 목을 내려놓으려 하십니까. 재미 없습니다, 저하."
이 자리에 있는 플란츠와 에일라는 물론 반대편에 있는 드미레아와 시오나, 그리고 칼리안에 대한 자신감이 가득한 말. 그 말에 하마터면 눈꼬리를 찌푸릴 뻔한 플란츠가 가만히 라시드를 쳐다봤다.
"그렇다면. 이건 어떻겠습니까."
"뭐."
"저하를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그 검은 고양이 말입니다. 누군가 그 검은 고양이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게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혹시 관심이 가십니까?"
제온이나 다누.
그들에 대한 비밀을 값으로 내놓을 줄 알았다. 그들에 대한 정보를 줄 테니 그레이 브리센을 대신 없애달라 할 줄 알았다.
"흥미로운 얘기라니."
"그 검은 고양이에게서 바다 소금내가 난다는 얘기."
플란츠의 눈꼬리가 가늘게 변했다.
라시드의 입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 를 듣게 되어서 말입니다."
제온에서 보낸 전사가 하필 체이스의 모습을 하고 있던 이유. 그에 대해 알려주겠다는, 그런 말.
그건 좀 값어치가 있겠다.
이렇게 생각한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 절그럭.
갑작스레 묵직한 쇳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이 자리의 셋이 아닌 다른 곳에서 들린 소리. 생각지 못한 소리를 듣게 된 플란츠가 고개를 돌렸다.
"하······."
그리고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뱉었다.
시오나와 그 곁에 바짝 붙어 서 있는 칼리안. 거기에 더해 또 한 명, 정혼자의 비밀이 또 새어나갔음을 알게 된 드미레아가 서 있는 것을 본 까닭이다.
두 눈을 꾹 감았다 뜬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내 말 먼저 듣지, 소공작."
잠깐만.
소공작.
내가 설명을 할게.
대충 이런 의미였다.
동생 놈의 파혼은 막아야 하지 않겠나.